티스토리 뷰

남편이 오늘도 병원에 가는 날이다.
일주일에 세 번씩의 병원 행이 그에게는 일상이 되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될 일을, 하기 싫어도 억지로 지켜내더니 10년의 세월동안에 버릇처럼 되어버렸다. 아직 힘겹게 진행 중인 일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은 고통이지만 투병에 관한 이야기를 한 편쯤은 남겨 두어야될 것 같아서 글을 시작한다.

1993년 2월말 어느 날이었다. 저녁 준비로 바쁜 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남편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앙병원 응급실로 가보세요. 이 선생님이 거기 계세요."라고 했다.

얼마 전부터 음식물을 소화시킬 수 없어 먹지도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숨이 차서 걷기도 힘들어했기에 병원에 가보자고 권하다가 완강히 거절하여 하는 수 없이 가까운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먹고 있던 중이었다. 결국 큰일이 일어났구나.... 송수화기를 던져버리고 중앙병원까지 어떻게 달려갔는지 응급실로 쳐들어갔다. 시장바닥과 같이 어수선한 그곳에서 남편은 침대는커녕 의자도 없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남편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선생님들이 출근한 사람을 붙잡아서 강제로 응급실로 데려다가 놓은 것이었다.

사흘을 그렇게 피난민처럼 지내다가 겨우 병실을 얻어서 올라갔다. 의사들은 많은 검사를 시도했지만 그것은 환자의 상태를 서류상으로 결정해두기 위한 요식 행위였다. 이미 간단한 검사만으로도 그가 가진 두개의 신장은 기능을 전부 잃어버렸다는 것이 증명될 만큼 위급한 지경이었다.

신부전말기라는 진단이 정식으로 나서도 남편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외출증을 끊어서 다른 병원에 갔다. 오래 전에 신장염을 치료해 주었던 의사선생님도 냉담했다.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한 환자를 야단쳤다. 거기서도 별다른 희망이 없자 결국 왼편 팔의 동맥과 정맥을 잇는 수술을 받고 혈액투석을 준비했다. 그러나 결심하기까지 너무 시간을 보냈기에, 수술 후 적어도 4주 이전에는 혈관을 쓸 수 없는데 투석이 급해서 3주만에 시작했다. 4월 중순의 일이다. 혈관이 부어오르고 터지고 멍이 들어 얼음찜질과 뜨거운 찜질을 번갈아 하면서 그의 투병이 시작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중병에 온 가족이 그의 기색을 살피느라고 살얼음판을 걸어야했다.

병원에서 처방한 식단은 아예 무시하고 먹고 싶은 것만 찾았다. 무염이나 저염 음식이 상식인 그의 병에 일상적인 음식을 먹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애써 조리한 음식이 그대로 버려지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다가 결국 평상시대로 먹기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 주기로 결정했다. 환자가 먹는 것이라고 백화점 식품매장을 이용하거나, 시장에서도 무엇이든 제일 좋은 것만 샀다.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았지만 병원비도 무시 못할 비용이 되었다. 가끔 죽어버린다고 병원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이곳이 지옥이구나 라는 생각으로 그를 지켜봐야 했다. 결혼생활 중에서 가장 어려울 때 투병을 시작했고, 큰아들은 군대에 갔다. 남편은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아픈 몸을 이끌고 경의선 기차를 탔다. 그렇게 면회를 다녀오면 진이 다 빠지고, 숨이 차서 맥없이 누워버리곤 했다.

혈액투석은 마라톤의 전 구간을 뛰는 것과 마찬가지의 부담을 심장에게 주는 것이다. 투석을 받고 온 날은 밤새도록 가슴이 조이고 아프다고 신음을 했다. 심장이 쉴새없이 뛰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의 곳곳에 마비가 와서 환자도 옆의 사람도 혼이 빠지게 만들었다. 또 치료약의 합병증으로 몸이 가려워서 긁느라고 수없이 손톱자국이 생겨났다. 다리에 무성하던 털이 부서져 나갔지만, 투석한 지 이틀만 지나면 몸이 부어 올라서 숨이 차서 걷기가 불편했다. 소변을 통해서 나가야될 오물이 몸 안에 그대로 쌓이니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거기다가 중앙병원에서 소개한 개인 병원은 집에서 가기가 몹시 불편했다. 자기의 뜻대로 해주지 않으면 의사 선생님에게도 간호 선생님에게도 상관없이 화를 내어 모두들 환자의 처분만 바라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밖으로 내뿜어 버리는 화가 그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받아 줄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병원에서 차츰 기운을 찾았고, 몇 년 후 병원을 옮길 때는 밀린 치료비까지 탕감해 주어서 너무 고마운 병원으로 기억된다.

남편의 불만은 내가 병원에 함께 가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치료받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혈액투석은 인공신장기를 통해서 몸 속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치료법이다. 팔에 두 개의 주사바늘을 꽂아서 한쪽으로는 피를 내보내고 다른 한쪽으로는 깨끗해진 피를 몸 속으로 다시 넣는다. 기계 앞에 부착된 여러 개의 호수를 보면 그것의 붉은 색이 가슴을 조이고, 몸서리를 치게 만들어 보고 있기가 어렵다.

매정해지기로 결심했다. '아픈 사람만 아파합시다. 다른 사람은 그냥 삽시다.' 라는 것이 오랜 투병생활을 하는 환자 가족들이 명심해야되는 격언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혼자 내몰았다. 한술 더 떠서 출근하는 사람에게 '돈 많이 벌어 오세요'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가정이란 곳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다. 아내의 노후를 위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열심히 직장에 나간다. 병원에 다니면서도 결근을 한 적이 손꼽을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하러 나간다. 나중에 마누라가 더 늙어서 남편도 돈도 없게 되면 자식에게 대접받기 힘들다고 노후 대책을 세워주는 것이다. 우리아이들이 그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남편의 얘기가 싫지 않다. 그는 가족을 위해서 성하지도 않는 몸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문득 새끼를 먹이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내어준다는 어미거미가 생각난다.

가끔 내가 악처 중의 악처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중병이 들어 일주일에 세 번씩 병원에 가서 몇 시간 동안 투석을 받아야 되는 사람에게 가족부양의 짐까지 맡겨놓고 편하게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일만을 고집해서 그에게 불편을 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늘 마음이 편하지 않다.

지나온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고난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높은 고개를 힘들게 넘어서니 강물이 기다리고, 물을 건너니 자갈밭을 지나야 했던 일들을 말하고 있으니 이제는 한숨을 돌리고 주변을 살펴보고 싶은가 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겪는 인생의 힘겨운 여정을 한꺼번에 다 체험을 하고 난 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힘겨운 서로에게 미안해서 우리는 각각 혼자 서서 울었다. 그리고 지치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 기도를 들어 주셨다. 우리 가족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환자들과 가족들이 많다. 그들을 위해서 확신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투병이 좋은 결과를 낳아서 절망 가운데서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길잡이가 되어 주길 바란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벌집 이야기 / 류인혜  (0) 2021.02.19
비 설거지 / 류인혜  (0) 2021.02.19
평생의 친구 / 류인혜  (0) 2021.02.19
그리운 '사로잡힘' / 최소원  (0) 2021.02.19
봄이 오는 소리 / 백임현  (1) 2021.02.1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