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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비 설거지 / 류인혜

부흐고비 2021. 2. 19. 12:46

현관을 닫으면 모든 필요한 것이 집안에 다 들어있는 요즘과는 달리 그때는 모든 것이 건물 밖으로 나와 있는 생활 방식이었다.

갑자기 내리는 비는 언제나 사람을 놀라게 했다. 한창 바쁜 농사철에는 부지깽이도 일을 한다고 했는데 마당에 널어놓은 것들이 많을 때, 소나기가 내리면 집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밖에 일나갔던 식구들도 뛰어 들어와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열어놓은 장독 뚜껑을 덮고, 빨래를 걷고, 땔감으로 쓰려고 늘어놓은 젖은 생나무를 한 아름씩 안아서 부엌에 들이고, 마당에 쌓아놓은 것들에는 비닐을 씌웠다. 어느 때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사방으로 뛰어다니다 보면 문득 비가 그쳐버려 들여놓은 것들을 다시 마당에 내다 놓아야 될지 어쩔지 난감하기도 했다.

소풍날에 비가 올까 걱정하듯이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무엇보다 좋은 날씨를 빌었다. 시집가는 날 등창이 난다고 무슨 심술이 났는지 계속 봄 날씨처럼 따뜻하게 맑다가 졸업식 날 비가 오셨다. 목에까지 차있는 습한 기운이 하늘까지 닿았는가 보았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어려운 고비 때마다 마음에 쌓여온 서러움을 내리는 비가 대신한다. 졸업식 날 비가 내려서 그런지 생각해보니 공부하던 7년 내내 비를 맞고 있었던 기분이 든다. 수시로 내리는 비로 마음도 눅눅하고 옷도 젖어들어 늘 춥고 외로웠다. 그 고단한 길을 마무리하는 날, 비가 내린다. 방송대학교의 특성상 혼자 하는 공부에 익숙해져야 되지만 모여서 공부하는 것은 물론 친구 한 사람 없이 짐작으로만 길을 찾아서 걸어왔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없기에 적정 기에 포기해버린 학업을 새롭게 시작한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아이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작가라는 전문적 직업을 가진 사람답게 공부를 많이 한 어머니를 원하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대학에 가면 나도 공부를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진작 말을 했었다. 그 말에 대한 책임으로 두 아이가 대학교에 입학을 하게되자 나이든 사람이 공부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인 한국방송통신대학을 선택했다.

두 번째, 자칫 남편의 와병으로 인한 우울증에 빠지기 쉬운 자신을 위한 예방책으로 공부를 택했다. 환자와 가까이에 있어야 되는 조건에 가장 합리적으로 집에 마음을 붙잡아 두는 방법이 공부하는 것이라 여겼다. 정신을 집중하기에는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일거리가 없었다. 남편 때문에 내가 발이 묶여 있다는 핑계를 될 필요가 없어 평안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굳어갈 나이에 외워야 할 많은 학문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흥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10년쯤 예정한 일정이 3년이나 앞 당겨졌기에 마음이 가볍다. 처음에는 성적표의 F 자 표시가 참 부담스럽더니 차츰 독학의 진지함이 몸에 배이자 성적과는 상관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며 알아간다는 사실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늙어서 공부한다는 것이 크게 자랑할 것은 아니나 부끄러운 노릇도 아니기에 당당히 학교에 대한 홍보도 하면서 주변의 몇 사람들을 동창으로 만들기도 했다.

출석수업 때, 선생님의 얼굴을 마주보며 배운다는 것과 남녀노소의 다양한 동료 학생들을 만나는 즐거움은 일반 학교의 수업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간고사나 기말 고사를 행하는 장소를 찾아가느라고 새벽부터 집을 나서다 보면 어디쯤에서 자연적으로 길게 늘어서 바쁜 걸음을 걷는 일행들을 따라가게 되어 안심을 하던 일도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시작한 일은 마땅히 결과를 이루니 이제 문학사의 자격이 주어졌다. 학사모 위에 우산을 쓰고 모든 희비(喜悲)를 마무리하듯 사진을 찍어 졸업의 기념으로 남긴다. 이제는 마음 젖을 필요가 없을까, 비 설거지를 끝낸 가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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