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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벌집 이야기 / 류인혜

부흐고비 2021. 2. 19. 16:21

베란다 왼쪽 벽 높이 못 하나가 튀어나와 있다. 그 끝에 집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창문으로 들락거리며 자재를 나르고 있는 것은 허리가 잘록한 말벌들이다. 물어 온 것들을 이어서 작은 육각형을 하나씩 늘이고 있다. 벌의 날갯짓 소리가 공사장의 레미콘 돌아가는 소리 같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새끼손가락 크기였는데 지금은 다섯 손가락을 활짝 벌려서 부챗살을 만든 모양만큼 지어 놓았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베레모 꼭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들어 달아 놓은 형상이다.

평소에는 발뒤꿈치를 들고 고개를 내밀어 안부를 물었는데, 잠깐 쉰다며 바람이 잘 들어오는 곳에 머리를 뉘었더니 벌집 밑바닥이 똑바로 보인다.

아하! 첫눈에 들어오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이제까지는 옆 모양만 보고 육각형이구나 짐작은 했는데 정확하게 육각형이다.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서너 줄 비워 놓고 자로 재어 그린 듯 흰 덮개가 있다. 짙은 회색 바탕에 육각을 이루고 있는 흰 선의 선명함이 아름답다. 유충이 번데기가 되어 잠자고 있는 방이다. 새로운 느낌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어 일어났다가 다시 누웠다. 혼자 보기가 아까워서 작은아이를 불러다 옆에 뉘었다. 모자가 흡족한 마음으로 나란히 누워 벌집 구경을 한다.

우리 집 베란다를 빌어 집을 짓고 있는 여왕벌이 부지런하여 날마다 식구 수를 늘이자 문득 자양동 살 때 뒷방 식구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이사 오던 날 내다보니 여자아이만 세 명이었다. 우리 집 아이들을 염려한 나는 아이가 많아도 여자들이라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가장 큰 아이는 막내를 업고 있었는데 중간 아이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진다는 생각만 했다. 이층에 사는 주인 여자가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아이가 둘뿐이라더니 셋이네.” 키가 작고 단단하게 생긴 뒷방 남자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둘이나 셋이나요.”

이사 온 다음날 그는 퇴근길에 유치원에 다니는 우리 큰애만큼 한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셋째는 살던 집에 맡겨 놓았었단다. 뒷방 여자는 에미를 보자 심술이 나서 팔딱거리는 아이가 진정될 때까지 한참 동안 부둥켜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주인 여자는 입을 벌린 채 쳐다만 보았다. 네 명의 아이들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들의 어울림은 뭔가 부족한 느낌으로 어색했다. 말없이 사람들의 눈치만 살폈다.

며칠 후 남자아이가 또 나타났다.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 까까머리는 내가 쳐다보자 씩 웃었다. “시골 할머니네 갔었어요. 학교를 일주일이나 빼먹었어요” 그 애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제야 질서가 잡혔다. 둘째가 나타나자 아이들은 돌연 생기를 찾았다. 그중에서도 남자아이 둘은 뜻이 잘 맞았다. 다섯 아이가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것만으로도 집 안이 부산스러웠다. 우리 두 아이와 옆집의 세 아이까지 함께 어울렸다.

친정살이를 오래 하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집을 장만하여 애지중지하는 주인 여자가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보다 셋방에서 내쳐질까 전전긍긍하는 뒷방 여자가 더 안쓰러웠다. 아이 다섯을 데리고 또 어디로 가야 될지 막막하다고 했다.

뒷방 아이들은 새끼 벌처럼 각자 독방을 썼다. 다락에서 잠을 자던 둘째도, 이불을 꺼낸 캐비닛에서 새우처럼 꼬부리고 자던 셋째도 눈만 뜨면 싱싱하게 뛰어다녔다.

벌의 식구가 날마다 늘어 스무 마리도 넘는다는 아이의 걱정에 슬그머니 위기의식이 생긴다. 자꾸만 많아져 나중에 떼 거지로 공격해 오면 어쩌나, 말벌에 쏘여서 죽은 사람도 있다던데, 자기 집 내어 주고 살이 마르던 자양동 집 주인 여자 꼴이 되어간다.

다시 가족회의를 열어 남편이 좋은 날 잡아서 벌집을 떼어내기로 결정한다. 그 좋은 날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기다리던 아이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모기향을 피우는 것이다. 의외로 효과가 나타난다.

벌들이 힘을 잃어 떨어져 내리고 날갯짓 붕붕거리던 소리가 없다. 남아 있는 벌들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붙어 있어 초상집이 된 듯하다.

다음날 아이들 방에 벌이 세 마리나 날아다닌다. 모기향을 피운 아이에게 “벌이 원수 갚으러 왔다” 했더니 방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아무래도 벌이 집을 비운다는 가을까지 기다려야 된다. 식구가 많아져 소란스러워도 기왕 집을 지어 살 터를 빌려주었으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

며칠이 지나자 남은 벌들이 조금씩 기운을 차린다. 벌 한 마리가 무거운 것을 물고 날아오르다가 떨어지고 또 날아오르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이가 물끄러미 그 모양을 쳐다보더니 “벌도 사람처럼 띨띨한 게 있나 봐요.” 한다.

늘 부모의 관심이 부족한 듯 울고 다녀서 오빠의 구박을 받던 넷째 여자아이가 생각난다. 그 아이를 닮아서 순하기 짝이 없던 뒷방 여자라면 벌집 밑에다 받침대를 달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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