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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오탁번 시인

부흐고비 2021. 2. 25. 15:17

저녁연기 / 오탁번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나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저녁연기 같은 것 -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한 산문시 같은 산문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높이까지만 피어오르다가,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저녁연기, 이게 바로 시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두레반 앞에 앉으면, 솔가지 타는 내가 배어 있는 어머니의 흰 소매에서는 아련한 저녁연기가 이냥 피어오른다.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

밥냄새 / 오탁번

하루 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다가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때 되면 만날 온나/ 아,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아빠 / 오탁번

아빠는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나한테 늘 하는 말이 있다/ -에헴, 아빠는 어릴 때/ 잉크가 어는 방에서 공부를 했다!// 아빠는 이글루에서 살았나?//

설날 / 오탁번

설날 차례 지내고/ 음복 한 잔 하면/ 보고 싶은 어머니 얼굴/ 내 볼 물들이며 떠오른다// 설날 아침/ 막내 손 시릴까 봐/ 아득한 저승의 숨결로/ 벙어리장갑을 뜨고 계신// 나의 어머니//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 눈이 좃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렸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소잉!//

굴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시집보내다 / 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나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몇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몇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숫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지난 해 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왔다/ -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줬나?/ 줄잡아 몇만 평도 넘을 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었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 김지현 시집 보냈나?/ - 서석화 시집 보냈나?/ -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그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잠지 / 오탁번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한 밥 얻어 먹겠네//

엘레지 / 오탁번

말복날 개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우포늪 / 오탁번

우포늪이 토해 내는 울음소리를 듣고/ 귀 밝은 하늘이 내려왔다/ 그 후 하늘은/ 1억 4천만 년 동안/ 하늘로 올라갈 생각은 영 않고/ 우포늪에서 살고 있다/ 흰뺨검둥오리 알이/ 하늘빛을 띄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미하는 실잠자리들이/ 물수제비 그리며/ 우포늪을 간지럽힌다/ 먼 북극의 빙하가/ 늦잠 자는 하늘을 깨우느라고/​ 바다로 툭 떨어진다/ 산란하는 붕어가/ 물풀 사이로 숨는다//

철새 / 오탁번

우리 혼인생활 30년에/ 밑줄 그을 만한 뜨거운 사랑 없었지만/ 하늘 높이 날아오를 만한/ 기쁨 없었지만/ 아내여 미운 아내여/ 다음 생에서 또 만나/ 하늘을 날아가다가/ 좀 쉬고 싶으면 날개를 접고/ 가을 논에 흩어져 있는 햅쌀을/ 냠냠냠 쪼아먹는/ 기러기 눈빛을 한/ 철새나 될까 몰라/ 아내여 미운 아내여//

토요일 오후 / 오탁번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냐?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의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가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술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마늘밭 / 오탁번

텃밭에 마늘 두 접을 심었다/ 친환경 유기농 퇴비와/ 복합비료를 잘 뿌려주고/ 육쪽 마늘을 정성껏 심었다/ 마늘밭 이랑에 비닐을 씌우지 않고/ 솔잎을 긁어다가 덮었다/ 겨우내 눈 쌓인 마늘밭을 보면서/ 비닐 대신 괜히 솔잎을 덮어/ 마늘이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솔잎을 헤치며/ 강보에 싸인 아기 손가락 같은/ 여린 마늘싹이/ 하나도 죽지 않고 쏙쏙 돋아났다/ 금빛으로 빛나는 마늘밭을/ 아침마다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꽃샘추위 매서운 날/ 농사짓는 초등학교 동창이 왔길래/ 마늘밭 자랑을 한참 했다/ - 야, 마늘밭 좀 봐! 너무 멋지지?/ 허지만 녀석은 싱겁기만 하다/ - 마늘밭이 다 그렇지 뭐!/ 우리가 주고받는 엉뚱한 말에/ 앞산 진달래가/ 꽃봉오리 터뜨린다//

개꿈 / 오탁번

평균 수명 채우려면 앞으로 10년,/ 살아온 날 생각하면/ 10년이야/ 눈 깜짝할 사이인데,/ 참 이상하다/ 겨우 10년밖에 안 남은 세월이/ 무한대無限大로 느껴진다/ 백수白壽하고 싶니?/ 참 뻔뻔스럽다// 그렇다 뻔히 보인다/ 짧고 굵게!/ 젊은 날의 숱진 맹세 죄다 까먹고/ 흐지부지 살아온 나는/ 앞으로 어느 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또 이럴 것이다/ 곧 사윌 목숨인 줄도 모르고/ 무한대로 남아 있는 내 생애가/ 은하수 물녘까지 뻗칠 거라고/ 개꿈을 꿀 것이다/ 뻔하다//

아뿔사 / 오탁번

평소에 김흥수 화백의 기록을 깨려고 맘먹었다/ 40년 연하의 여제자와 신방을 차린 것!/ 다들 배 아파하던 로맨스를 나도 꼭 해보고 싶었다/ 아예 50년 차로 나이를 벌려/ 하는 김에 아주 더 벌려/ 세계기록을 세우려고 꿍꿍이셈을 했다/ 산수유와 가시오가피에 인진쑥까지 먹으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아뿔싸!/ 2010년 12월 27일(월) 외신들이 전하는/ 뉴스 한 토막!/ Playboy Hugh finds new playgirl!/ 플레이보이 창업주 휴 해프너(84)가/ 60년 연하의/ 크리스털 해리스(24)와 약혼을 했다는 뉴스가/ 내 뒤통수를 때린다// 신기록을 세우려면 최소 61년 연하의/ 아리따운 소녀를 점찍어야 한다!/ 그럼 올해 그 아이는 겨우 일곱 살?/ 초등학교에 갓 들어갈 나이?/ 굼뜬 동작에다 때는 일락서산/ 죽도 밥도 안 된/ 내 인생아!//

봄날 / 오탁번

젊은 날 술집에서/ 유두주乳頭酒 마시며 희떱게 논 적 있다/ 위스키 잔에다/ 아가씨 젖꼭지 담갔다가/ 홀짝 단숨에 마시고는/ 팁으로 배춧잎 뿌린 적 있다/ 독한 위스키에 취한/ 오디빛 젖꼭지의/ 도드라진 슬픔은 모른 채/ 내 젊음의 봄날이/ 깜박깜박 반짝이는 불빛에/ 만화방창 활짝 핀 적 있다// 이순耳順 지나 종심從心이라/ 일락서산 끄트머리에서/ 콧속 유두종乳頭腫 수술을 받았다/ 이비인후과에 난생처음 가서/ 내시경 진찰을 받았는데/ 콧속에 딱 젖꼭지 모양으로 생겨먹은/ 혹이 있었다/ 수술받고 내내 코피를 쏟다가/ 문득 젊은 날 마신/ 유두주가 떠올랐다/ 그때 그 아가씨의 젖꼭지가/ 콧속으로 들어와서/ 숨을 막으며 벌주는 것일까/ 유두주 죗값 치르는/ 피 흐르는 봄날!//

사랑 사랑 내 사랑 / 오탁번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과추풍령유감(過秋風嶺有感) / 오탁번

가까운 山/ 더 가까이 보이고/ 먼 山/ 더 멀리 보인다// 참새 똥 뒤집어 쓴/ 허수아비 하나/ 수수밭 두렁에서/ 웃고 있다// 아득하기만 한/ 이 가을날/ 오직 나 하나/ 눈물방울 사이로// 가까운 山/ 더 멀리 보이고/ 먼 山/ 더 가까이 보인다//

 

국민학교 1학년 / 오탁번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나하고 놀자/ -- 국민학교 1학년 국어 시간// 어미개 때려 잡아서/ 가마솥에 삶아 먹는/ 어른들/ -- 국민학교 1학년 하교 길// 제 어미가 죽은 줄도 모르고/ 바둑이가/ 몽당연필 따라/ 마분지 공책 위에서/ 깡종까종 나하고 논다/ -- 국민학교 1학년 국어 숙제// 어른들은/ 개고기 먹고 술에 취해/ 쿨쿨 잔다/ -- 국어 숙제 끝// 

 

손 / 오탁번-   

손은 여자가 여자임을 나타내는/ 참으로 지순한 기호라고 생각된다./ 당신의 손이/ 환부에 닿을 때/ 체온계의 눈금에 닿아/ 그 깊은 시간이 전달되는 소리를/ 우리는 아직 걱정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뼈마디 마디에 受信의 공간을 마련하고/ 어깨에 앉는 자디잔 동작./ 손은 당신이 당신임을 나타내는/ 너무나 투명한 기호라고 생각된다./ 시간이 전달되는 소리와/ 그 시간 속에 피어나는 호흡./ 아픈 고뇌로 접혔다가 다시 이어가는/ 당신의 깨끗하고 슬픈 衣裳./ 사람들은/ 너무 많은 환부를 지녔다./ 당신의 작은 손이/ 길고 오랜 시간을 지니듯.//


사랑의 깊이 / 오탁번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둠의 깊이만큼 비애가 끝간 데 없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어쩔 수 없이 젖어드는 그리움의 얼굴//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또 꽃이 피고/ 천둥 번개 요란한 새벽마다 눈을 뜨고/ 너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알몸에 알몸을/ 가까이하고 여름 여치가 날개를 비벼대며 울 듯//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의 깊이만큼 우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빛나는/ 너의 흰 손 흰 이마 가슴 적시는 눈물 방울//

 

연(蓮)잎 앞에서 / 오탁번

연잎에 내리는 여름 한낮 빗방울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그리움 따라/ 연잎마다 크낙한 손바닥 하나씩 펴고/ 호수 위에 떠다니는 내 마음 손짓하네// 물결 따라 일렁이는 푸른 연잎을 보면/ 내 눈빛 잠자리 겹눈처럼 밝아지지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때 그 입술은/ 예쁜 연꽃 봉오리로 아직도 숨어 있네// 이른 아침 연잎에 내리는 이슬방울인 듯/ 마주보며 피워올린 첫사랑의 꽃봉오리!/ 아무도 모르는 물밑 아득한 깊이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랑으로 피어나는 연꽃!// 연잎에 내리는 저녁나절 빗방울인 듯/ 아직도 눈에 밟히는 그리운 얼굴아/ 잔잔한 호수 물결 지는 듯 다시 일 때/ 서늘한 연잎 위에서 푸른 눈썹 떠오르네// 

 

우주달력 / 오탁번

우주 탄생에서 현재까지/ 백 몇십억 년을/ 1년짜리 달력으로 환산하면/ 우주는/ 1월 1일 0시에 탄생했고/ 지금 이 순간은/ 12월 31일 밤 12시다// 태양의 생일은 9월 9일/ 지구 생일은 9월 14일이다/ 성탄절 전야에 태어난 공룡은/ 12월 28일에 멸종됐고/ 인간은/ 12월 31일 밤/ 10시 30분에 태어났다/ 문자가 발명된 것은/ 15초 전의 일이다// 인생이 영원하다고/ 꿈꾸는 나!/ 너, 엿 먹어라//

 



충북 제천과 강원도 원주에서 나고 자랐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 박사를 받았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철이와 아버지〉가 당선되고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당선된 후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處刑의 땅〉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 《아침의 豫言》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손님》과 소설집 《處刑의 땅》 《내가 만난 女神 》 《절망과 기교》 《저녁연기》 《새와 十字架》 《혼례》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 《純銀의 아침》이 있으며 시론집 《現代文學 散藁》 《韓國 現代詩史의 對位的 構造》 《현대시의 이해》 《오탁번 詩話》가 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국어과와 수도여자사범대학 국문학과를 거쳐 1978년 8월 31일부터 2008년 8월 31일까지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오마이뉴스] '확 깨는' 오탁번 시, 이렇게 만들어졌다

 

'확 깨는' 오탁번 시, 이렇게 만들어졌다

[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②] '해피 버스데이'의 시인 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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