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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문정희 시인

부흐고비 2021. 2. 27. 22:46

                                                     가시 / 문정희


어머니

나는 가시였어요
당신의 생애를 찌르던 가시

당신 떠난 후
그 가시가 나를 찔러요
내가 나를 찔러요

어머니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 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무언가 확실히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동북아신문] [시]문정희‧임보‧이상화‧오탁번‧윤동주‧안도현 시에 화답하여

 

[시]문정희‧임보‧이상화‧오탁번‧윤동주‧안도현 시에 화답하여 - 동북아신문

치마 / 문정희文貞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대리석 두 기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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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 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나는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위에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혹 / 문정희

자궁 혹 떼어낸 게 엊그제인데/ 이번엔 유방을 째자고 한다/ 누구는 이 나이 되면 권위도 생긴다는데/ 내겐 웬 혹만 생기는 것일까/ 혹시 젊은 날 옆집 소년에게/ 몰래 품은 연정이 자라 혹이 된 것일까/ 가끔 아내 있는 남자를 훔쳐봤던 일/ 남편의 등뒤에서 숨죽여 칼을 갈며 울었던 일/ 집만 나서면 어김없이/ 머리칼 바람에 풀어 헤쳤던 일/ 그것들이 위험한 혹으로 자란 것일까/ 하지만 떼내어야 할 것이 혹뿐이라면/ 나는 얼마나 가벼운가/ 끼니마다 칭얼대는 저 귀여운 혹들/ 내가 만든 여우와 토끼들/ 내친김에 혹 떼듯 떼어버리고/ 새로 슬며시 시집이나 가볼까/ 밤새 마음으로 마을을 판다//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성에꽃 / 문정희

추위가 칼날처럼 다가든 새벽/ 무심히 커튼을 젖히다 보면/ 유리창에 피어난, 아니 이런 황홀한 꿈을 보았나./ 세상과 나 사이에 밤새 누가/ 이런 투명한 꽃을 피워 놓으셨을까./ 들녘의 꽃들조차 제 빛깔을 감추고/ 씨앗 속에 깊이 숨 죽이고 있을 때/ 이내 스러지는 니르바나*의 꽃을/ 저 얇고 날카로운 유리창에 누가 새겨 놓았을까./ 하긴 사람도 그렇지./ 가장 가혹한 고통의 밤이 끝난 자리에/ 가장 눈부시고 부드러운 꿈이 일어서지./ 새하얀 신부 앞에 붉고 푸른 색깔들 입 다물 듯이/ 들녘의 꽃들 모두 제 향기를/ 씨앗 속에 깊이 감추고 있을 때/ 어둠이 스며드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저토록 슬픈 향기를 새기셨을까./ 한 방울 물로 스러지는/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들을.//
* 니르나바 :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경지인 열반을 뜻하는 말.

유방 / 문정희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드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겊 속에/ 꼭꼭 싸매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왔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랫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러브호텔 / 문정희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를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들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두 조각의 입술 / 문정희

닫힌 문을 사납게 열어젖히고/ 서로가 서로를 흡입하는 두 조각 입술/ 생명이 생명을 탐하는/ 저 밀착의 힘// 투구를 벗고/ 휘두르던 목검을 내려놓고/ 어긋난 척추들을 밀치어놓고/ 절뚝이는 일상의 결박을 풀고// 마른 대지가 소나기를 빨아들이듯/ 들끓는 언어 속에서/ 하늘과 땅이/ 드디어 눈을 감고 격돌하는 순간// 별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방벽이 무너지고/ 단숨에 위반과 금기를 넘어서서/ 마치 독약을 마시듯이 휘청거리며// 탱고처럼 짧고 격렬한 집중으로/ 두 조각 입술이 만나는/ 숨 가쁜 사랑의 순간//

 

당신의 냄새 / 문정희

말갈기 날리며 천 리를 달려온 말이/ 별빛 땀을 뿌리며/ 멈춰 설 때/ 풀밭에서 쏴아 하니 풍기는 냄새// 숲 속에 살고 있는 안개가/ 나무들의 겨드랑이를 간지를 때/ 푸른 목신들이 간지럼을 타며/ 소소리바람을 일으키는 냄새// 물속에서 물고기들의 비늘이/ 하늘을 나는 새들의 깃털과/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출 때/ 땅 속의 뿌리들도 그걸 알고/ 저절로 어깨를 들썩이는 냄새/ 꽃이 필 때/ 발그레 탄성을 지르며/ 진흙들이 내뿜는 냄새// 당신의 냄새는/ 내가 최초로 입술을 가진 신이 되어/ 당신의 입술과 만날 때/ 하늘과 땅 사이로 쏟아지는/ 여름 소나기 냄새//

 

나의 아내 / 문정희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 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 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 잔을 끓여다 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 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 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 주는 아내/ 오래전 밀림 속에서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 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미당의 시 「내 아내」 중에서. ** 메릴린 옐롬의 『아내』 중에서.

 

자살법 / 문정희

마녀와도 같이/ 화장하고 잠들면// 잠든 사이/ 놀러 나갔던 혼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요.// 돌아오긴 오는데/ 제 얼굴 도로 찾지 못해// 그만 그대로/ 허공을 헤맨다고 해요.// 밤이면 홀로 일어나/ 짙게 짙게 화장을 해요.// 벼랑 끝에 바쳐질 붉은 꽃처럼/ 화장한 몸뚱아리 하나 던져 놓아요.// 이러이 그만 깨어나지 말기를/ 황홀히 기도하며.//

 

어머니의 편지 / 문정희

딸아, 나에게 세상은 바다였었다./ 그 어떤 슬픔도/ 남 모르는 그리움도/ 세상의 바다에 씻기우고 나면/ 매끄럽고 단단한 돌이 되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돌로 반지를 만들어 끼었다./ 외로울 때마다 이마를 짚으며/ 까아만 반지를 반짝이며 살았다./ 알았느냐, 딸아// 이제 나 멀리 가 있으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뜨겁게 살다 오너라./ 생명은 참으로 눈부신 것./ 너를 잉태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했던가를 잘 알리라./ 마음에 타는 불, 몸에 타는 불// 모두 태우거라/ 무엇을 주저하고 아까워하리/ 딸아, 네 목숨은 네 것이로다./ 행여, 땅속의 나를 위해서라도/ 잠시라도 목젖을 떨며 울지 말아라/ 다만, 언 땅에서 푸른 잎 돋거든/ 거기 내 사랑이 푸르게 살아 있는 신호로 알아라/ 딸아, 하늘 아래 오직 하나뿐인/ 귀한 내 딸아//

 

/ 문정희

나의 방에/ 또 하나의 나의 방에// 눈망울 선한 짐승 하나이/ 살고 있나니// 무량수전 관세음보살 앞에/ 무릎 꿇은 나/ 가시와 굴레/ 천 권의 책에 길든 나를/ 바람둥이 그가 흔들고 있나니//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이 되듯/ 어둠과 돌 자갈길/ 차마 길도 아닌/ 죄 위에 그 몸 드러내는/ 천둥 벌거숭이// 미밀처럼 뜨거이/ 그가 살고 있나니.//

 

몸이 큰 여자 / 문정희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 엎어/ 해마다 튼튼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같은 남자와 씨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무엇을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벌려 상치쌈을 먹는/ 야성의 꿈과 푸른 핏줄 선명히 골 패인/ 배가죽 속의 고향노래를/ 늘어진 젖가슴에 뽀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치 무게를 달고/ 설익은 나이의 수치를 내세우며/ 규격 줄자 앞에 한줄로 줄을 서는/ 도시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탐스럽고 비옥한 밭의/ 무한한 사랑과 왕성한 산욕(産慾)//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상품이 된 시인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위해/ 채찍질을 하며 뜻없이 시들어가는 오늘/ 나날이 오염되고 황폐화 되어가는/ 저 아름다웠던 우리들의 대지에/ 나는 한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풍성한 천연의 대지를 깨우고싶다.//

* 클라리사 P 에스테스 : 미국 심리 분석 학자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가 나무에게 / 문정희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걸어 나와라/ 피 흘려라/ 푸른 심장을 꺼내 보여다오/ 해마다 도로 젊어지는 비밀을/ 나처럼 언어로 노래해 봐/ 네 노래는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너무 아름답고 무성해/ 나의 시 속에 숨어 있는 슬픔보다/ 더 찬란해/ 땅속 깊은 곳에서 홀로/ 수액을 끌어올리며 부르던 그 노래를/ 오늘은 걸어 나와/ 나에게 좀 들려다오/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그리움 속으로 / 문정희

저 산맥들은/ 무슨 커다란 그리움 있어/ 이렇듯 푸르름을 사방에다 풀어 놓았을까// 바람 속에 쑥부쟁이 냄새 나는/ 그리운 고향에 가서/ 오늘은 토란잎처럼 싱신한 호미를 들고/ 진종일 흙을 파고 싶다./ 힘줄 서린 두 다리로 땅을 밟으며/ 착하고 따스한 눈매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겨드랑이에 정직한 땀냄새가 풍겨/ 수줍음 타는 처녀가 되고 싶다.// 그 처녀를 사랑하는/ 말 못 하는 그대를 만난다면/ 반가움에 떨며 속으로 조금 울먹이리라// , 바람이 푸르른 공후를 켜는 날/ 나는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솔 향내 나는 그리움 속으로 떠나고 싶다/ 오랜만에 옥양목 저고리 풀먹여 입고/ 그리운 얼굴들을 만난다면/ 내 신발은 얼마나 가벼울까/ 오늘은 빠르고 번쩍이는 것들 죄다 치워 놓고/ 온갖 슬픔을 접어 두고/ 푸루른 그리움 속으로 떠나고 싶다/ 두고 온 고향의 옷깃을 부여잡고 싶다.//

 

가을 우체국 / 문정희

가을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인보다 때론 우체부가 좋지/ 많이 걸을 수 있지/ 재수 좋으면 바닷가도 걸을 수 있어/ 은빛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낙엽 위를 달려가/ 조요로운 오후를 깨우고/ 돌아오는 길 산자락에 서서/ 이마에 손을 동그랗게 얹고/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볼 수 있지// 시인은 늘 앉아만 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뚱뚱해지지// 가을 우체국에서 파블로 아저씨에게/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시인이 아니라/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크고 불룩한 가방을 메고/ 멀고먼 안달루시아 남쪽/ 그가 살고 있는/ 매혹의 마을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작은 부엌 노래 / 문정희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움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가/ 간을 맡추는 냄새/ 부엌에서는/ 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요./ 세상이 열린 이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소리 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 촛불과 같이/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의 덜미를 푸는/ 소름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요./ 수줍은 새악시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와요./ 우리 부엌에서는//

 

안면도에서 달까지 / 문정희

안면도에 핵 폐기물 단지가 선다는/ 소식이 들리자/ 안면도 사람들이 일제히/ 잠 못 자고 일어났다.// 어떻게 사나!/ 이제 안면도는 밤마다 요괴처럼/ 지지지/ 푸른 독을 내뿜으리라/ 벌써부터 온몸이 떨려 잠 못 이룬/ 안면도 사람들은 세차게 고개를 내흔들었다.// 안면도는 안 된다! 나의 뒤뜰은 안 된다!/ 아니, 사람이 사는 곳은 안 된다!// , 핵 폐기물을 어디에 갖다 버려야 하나/ 아무도 몰래/ 달이나 별에다 갖다 버릴까/ 그곳으로 추방해 버리면/ 편하게 잠잘 수 있을까// 지구를 향해 밤마다 울고 있는/ 병든 달과/ 죽어 가는 별을 바라보며.//

 

사랑을 유리병 속에 담아 둘까 / 문정희

사랑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고독이라는/ 유리병 속에 담아 둘까.// 사랑은 너무나도 순간적이어서/ 마치 미세한 향기 같아서/ 그대와 자밋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연기처럼 피어 올랐다가/ 이내 사라지기도 한다.// 정략이 조금 개입된 결혼이/ 좋은 결혼이듯이/ 인생은 투명한 순도만으로는/ 오히려 부서지기 쉽듯이/ 사랑에도 약간의 허영과 가식이 섞여야/ 더욱 설레고 뜨거운 것일까.// 아낌없이 훌훌 태우되/ 모두 다 들여다보진 말 것.// 거기엔 뜻하지 않게도 화상 같은/ 애증이 끼어들고/ 권태와 변질의 낭떠러지가/ 눈앞에 당도하느니// 아름다운 사랑의 등성이에/ 한나절 외줄을 타고 오르다 보면/ 거기엔 바람만 쓸쓸히 불고/ 바위 틈엔 에델바이스 대신/ 이런 난해한 악마가 기다리고 있느니.// 사랑을 유리병 속에 담아 둘까.//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앞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순간 / 문정희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 버리고/ 그리고/ 오래 오래 그리워 하였다//

 

사람의 가을 / 문정희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 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 그리고 너,/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 날//

 

겨울 사랑 /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갈대숲을 지나며 / 문정희

처녀 시절이여, 안녕// 나에겐 증거처럼/ 웨딩드레스를 입고/ 수염자리 의젓한 신랑의 팔을 끼고 서 있는/ 한 장의 결혼사진도 있지만// 이상도 하지/ 나는 한 번도 결혼한 여자가 아니었네/ 유부녀는 더구나 아니였네/ 방목해서 키운 튼튼한 아이들/ 넉넉한 평수에 편리한 부엌의 안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처녀였다네// 집안에서 잠시 아내이다가/ 현관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다시 처녀가 되었지// 사람들은 모르지/ 세상엔 결혼한 여자가 없다는 것을/ 모든 여자가 독신이라는 것을// 세상이 가지 자로는/ 재어지지 않는 넓이와 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웨딩드레스 입고 사진 찍은 여자를/ 결혼한 여자라 묶어 버릴 뿐이지//

파를 다듬으며 / 문정희 

산 목숨에도 노란 빈혈이 드는/ 가을날 오후/ 어김없이 찾아온 제사를 위해/ 파를 다듬는다/ 파를 다듬다가 철철 눈물을 흘린다// 홍 동 백 서, 주 과 포 혜/ 몇백 년을 루머처럼 떠도는 지령에 따라/ 바삐 손을 놀리는 나에게/ 어린 효자 아들이 말했다/ 엄마, 제사상에 짜장면 시켜다 놓자/ 탕수육도 한 접시// 

 

성공시대 / 문정희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문정희文貞姬 시인은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진명여고 재학 시 시집 <꽃숨> 발간.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 졸업.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동국대 문예창작학부 석좌교수
시집 『새떼』 『찔레』 『남자를 위하여』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아우내의 새』 『나는 문이다』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외 다수. 미국에서 출간된 영역시집 《Windflower》가 스페인어ㆍ독일어ㆍ히브리어 등 8개 국어로 번역. 산문집 <젊은 고뇌와 사랑> <청춘의 미학> <사랑의 그물을 던지리라> <지상에 머무는 동안> 등.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제40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문정희 시인 "남성들의 문단에서 50년간 이 갈며 시 썼죠" | 연합뉴스

문정희 시인 "남성들의 문단에서 50년간 이 갈며 시 썼죠", 임미나기자, 문화뉴스 (송고시간 2018-03-2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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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레이디 문화톡톡]시인 문정희 '삶 속의 시, 시 속의 삶'(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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