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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임보 시인

부흐고비 2021. 2. 27. 23:27

덕장 / 임보


파도를 가르던 푸른 지느러미는
뭍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장식,
대관령의 허공에 걸려 있는 명태는
거센 바람의 물결에 화석처럼 굳어 간다


내장을 통째로 빼앗기고 코가 꿰인 채
일사분란하게 매달려 있는 동태,
등뼈 깊숙이 스민 한 방울의 바닷물까지
햇볕과 달빛으로 번갈아 우려낸다

눈보라에 다 뭉개진 코와 귀는 이제
물결의 냄새와 소리를 까맣게 잃었다
행여 수국의 향수에 젖을까 봐
밤의 꿈마저 빼앗긴 지 오래다

그렇게 면풍괘선(面風掛禪)으로 득도한 노란 황태,
이놈들이 비싼 값으로 세상에 팔려나간다
요릿집의 북어찜,
제사상의 북어포,
술꾼들의 북어국…

겨울,
서울역 지하도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는
덕장 아래 떨어진 낙태(落太)들

*면풍괘선(面風掛禪) :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패러디한 것임.
*낙태(落太) : 덕장에서 떨어져 내린 파손된 명태.

 

 

팬티 -문정희의「치마」를 읽다가 / 임보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도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동북아신문] [시]문정희‧임보‧이상화‧오탁번‧윤동주‧안도현 시에 화답하여

 

[시]문정희‧임보‧이상화‧오탁번‧윤동주‧안도현 시에 화답하여 - 동북아신문

치마 / 문정희文貞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대리석 두 기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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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음식 간보기 / 임보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내 앞에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 한다// 그러면/ "음, 마침맞구먼, 맛있네!"/ 이것이 요즈음 내가 터득한 정답이다.// 물론,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지만―// 만일/ "좀 간간한 것 같은데" 하면/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뭣이 간간허요? 밥에다 자시면 딱 쓰것구만!'/ 하신다.// 만일/ "좀 삼삼헌디" 하면/ 또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짜면 건강에 해롭다요. 싱겁게 드시시오."/ 하시니 할말이 없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고?/ 아내 음식 간 맞추는 데 평생이 걸렸으니// 정답은/ "참 맛있네!"인데/ 그 쉬운 것도 모르고…. //

바보 이력서 / 임보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가시연꽃 / 임보

가시연은 맷방석 같은 넓은 잎을 못 위에 띄우고/ 그 밑에 매달려 산다/ 잎이 집이며, 옷이며, 방패며 또한 문이다/ 저 연못 속의 운수행각, 유유자적의 떠돌이/ 그러나 허약한 놈이라고 그를 깔봐서는 안 된다/ 그를 잘못 건드렸다간/ 잎과 줄기에 감춰둔 사나운 가시에 찔려/ 한 보름쯤 앓게 되리라/ 그가 얼마나 매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는/ 꽃을 피울 때 보면 안다/ 자신의 육신인 두터운 잎을 스스로 찢어/ 창으로 뚫고 올라온 저 가시투성이의 꽃대,/ 그 끝에 매달린 눈 시린 보라색, 등대의 불빛/ 누구의 길을 밝히려/ 굳은 성문을 열고/ 저리도 아프게 내다보는가//

새들을 날개 위에 올려라 / 임보

새는 날개로 허공을 받치고 떠오를 때 새다/ 새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 반짝이는 눈으로 지상을 응시할 때 새다// 버려진 먹이를 찾아 인가의 주변을 서성거리거나/ 먹다 남은 먹이를 얻으러 육식동물의 곁을 어정거리는 놈들은 이미 새가 아니다// 철원에 가서 겨울 독수리 떼를 보았는데/ 인간들이 던져둔 고기에 취해 검은 쉼표들처럼 빈 들판에/ 날개를 접고 있었다// 상원사에 가서 고운 멧새들을 보았는데/ 방문객들의 손바닥에 올라 스스럼없이 모이를 쪼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새가 아니라 가금(家禽)/ 언젠가는 닭처럼 날개를 잃게 되리라/ 간악한 인간의 손들이여/ 새의 날개를 꺾지 말고/ 그들을 맑은 날개 위에 올려라//

사람의 몸값 / 임보

금이나 은은 냥(兩)으로 따지고/ 돼지나 소는 근(斤)으로 따진다// 사람의 몸값은 일하는 능력으로 따지는데/ 일급(日給) 몇 푼 받고 일하는 사람도 있고/ 연봉(年俸) 몇 천만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한 푼의 동전에 고개를 숙이는 거지도 있고/ 몇 억의 광고료에 얼굴을 파는 배우도 있다// 그대의 몸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알고 싶은가?// 그대가 만일/ 몇 백의 돈에 움직였다면 몇 백 미만이요/ 몇 억의 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몇 억 이상이다// 세상에는/ 동장의 자리 하나에도 급급해 하는 자가 있고/ 재상의 자리로도 움직일 수 없는 이도 있다// 사람의 몸값은 세상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가 결정한다//

미투美鬪 / 임보

진달래가 벌에게 당했다고 하니/ 민들레도 나비에게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지/ 매화 산수유 복숭아 살구 자두 들이/ 떼를 지어 ‘나두! 나두! 나두!’/ 아우성을 쳤다// 드디어/ 벌과 나비들이 얼굴을 싸쥐고/ 은둔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해/ 과일나무들은 열매를 못 달고/ 세상은 깊은 흉년에 빠졌다.//

난경(難經) / 임보

창공에도 길은 있다/ 천만 성군(星群)들이 무리 지어 가는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새들도 날개를 퍼덕이어 지상(地上)을 박차지만/ 그들이 만난 것은 언제나 추락일 뿐/ 허공에 띄운 사람들의 철새[鐵鳥]들도/ 끝내는 불꽃으로 타고 만다// 바다에도 길은 있다/ 헤엄치는 물고기 떼들이/ 그것을 일러준다, 하지만/ 사람들이 세운 돛은/ 매번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 올 뿐/ 마지막 도달한 곳은 결국/ 좌초에 지나지 않는다// 날개도 지느러미도 아닌/ 우리들의 두 다리가 걸을 곳은/ 어차피 이 지상(地上)이지만/ 그러나 난마(亂麻)처럼 천만 갈래로 얽히고 찢긴/ 저 산야(山野)의 길들/ 그것은 욕망과 좌절의 흔적들일 뿐/ 아직 하나의 길도 트이지 않았다// 사막에도 길은 있다/ 약대를 끌고 서역(西域)으로 가는 무리들을 보라/ 길은 있는데/ 모래 속에 묻혀 있는 하나의 길은 있는데/ 앞서 간 자들의 발자국이 그것을 오히려 어지럽힌다/ 그래서 바람은 묵은 발자국들을/ 모래 속에 다시 묻고/ 마지막 한 사람/ 그대가 오기를 또 기다린다.// 

 

세워지는 모든 것들은 무너진다 / 임보 

성수대교가 동강나고/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을 때/ 세상 사람들은 분노했다/ 세상 천지에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러나 사람들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다/ 이 지상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신이 만든 산과 바다도/ 때가 되면 무너지고 기울거늘/ 인간들이 쌓은 저 보잘것없는 모래성/ 그것이 완전키를 믿다니/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몇 대를 공들여 이룬 제왕(帝王)의 궁성(宮城)/ 언젠가는 가라앉고/ 몇 백년 정성으로 세운 신전(神殿)/ 언젠가는 무너진다/ 더러는 산의 허리를 자르기도 하고/ 더러는 대지의 심장을 뚫기도 하는/ 하늘을 거역하는 교만한 인간들아/ 헛되이 모래의 성들을 쌓지 말며/ 흐르는 강물을 막아 둑을 세우지 말라/ 너희가 만든 것들은 결국 쓰레기들일 뿐/ 쓰레기의 더미 속에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눈 먼 인간들아/ 쓰레기의 세상에서 쓰레기가 아니기 위해/ 쓰레기를 헤치고 일어서라/ 어리석은 망치와 끌을 내던지고/ 벗은 몸으로/ 바보로/ 한 마리 순한 짐승으로/ 어머니 자연의 품에서 다시 태어나라/ 모든 세워지는 것들은/ 언젠가 주저앉는다.//

 


 

임보(林步) 시인은

'임보'라는 이름은 좋아하는 시인 '랭보'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본명: 강홍기(姜洪基), 1940년 전남 순천 출생,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고, 성균관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충북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시집: 『林步의 詩들 59-74』『山房動動』 『木馬日記』『은수달 사냥』 『황소의 뿔』『날아가는 은빛 연못』『겨울, 하늘소의 춤』『구름 위의 다락마을』 『운주천불』『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자연학교』『장닭설법』 등이 있다.  한국현대시협상. 성균문학대상. 시예술상본상. 상화시인상, <산상문답>으로 2017년 제6회 녹색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다음 카페] 자연과 시의 이웃들(임보 시인 운영 카페)

 

자연과 시의 이웃들

시인 임보(林步)가 주관하는 곳으로 시(詩) 이론과 창작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고적 그리고 예술에 대한 자료를 공유하며 즐길 수 있는 공간입니다. 자연과 시를 사랑하는 모

caf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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