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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넘게 입원 중인 동생의 시부(媤父)를 뵙고 왔다. 이분은 수 년 동안 동맥경화증으로 고생을 하다가 뇌혈관이 터져 의식을 잃었다.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로, 그곳에서 다시 병실로 옮겨 치료하기 석 달이 넘는다.

사장(査丈)어른인지라 동생의 낯을 봐서도 진작 문병을 했어야 옳건만, 그댁 가족들의 만류로 오늘에 이르렀다. 환자가 의식 불명인데다가 그 모습이 남에게 보이기 민망하다는 것이다. 몸에 줄줄이 고무호스를 대고 있는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쉬지 않고 흐르는 뒤 때문이었다. 사람에 따라 몸에 있는 오물을 다 쏟아내고야 운명을 한다는 말을 들은 바도 있어 더 늦기 전에 병 문안을 하기로 작정했다. 비록 환자가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내 할 도리는 하고 싶었다.

병실엔 자손들은 없고 간병하는 아주머니뿐이었다. 환자는 모로 뉘어져 있었다. 모포는 허리깨까지만 덮였고 아래는 그냥 벌거숭이였다. 둔부가 상해서 공기를 쐬며 말리기 위해서 그러노라! 고 간병인은 설명했다. 그리고 공을 굴리듯 반대 방향으로 환자를 돌려 뉘고 다른 쪽 둔부를 벗겨 내놓았다. 마치, 이쪽의 짐을 저쪽으로 옮겨 놓듯 표정과 몸짓이 심상했다.

목젖께가 뻐근해 왔다. 물체같은 참상의 저 환자가 그렇게도 정갈하고 학덕이 높던 바로 그 어른이 틀림없는가. 아무리 병환이 깊었을 때라도 며느리가 받쳐오는 조석상을 의관을 정제하고야 받던, 예의범절이 유별나던 그분이신가. 아니 생전의 그분은 아니었다. 생전의 그분이 아닐뿐더러 살아있는 그 누구도 아니었다.

누르스름한 것이 둔부 사이로 흘러 떨어졌다. 간병인이 잽싸게 닦아내었다. 침상의 먼지를 닦듯 천연한 자세가 감동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간병도 인술의 일환인 것인가. 사람의 오물이 오물로 느껴지지 않을만큼……. 그러나 나 자신도 그 누르스름한 액체를 전혀 '뒤'라고 느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놀라움이었다.

사물을 인지하지 못하며 의식을 잃어버린 생존은 고요였고 정지였다. 그리고 고요에서 배설되는 것은 이미 오물의 기능을 잃었다. 겨울날 연탄난로 연통에 부식된 녹물이 흘러내리듯 처마끝의 추녀를 타고 내려와 누렇게 매달린 고드름이듯, 둔부 사이로 흐르는 황색의 액체에서 혐오도 악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만이, 살아서 숨 쉬고 환호하고 절규하는 것만이, 비방하고 변호하는 것만이 더러움을 배설하고 악취를 내뿜는 것임을 알았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지금까지 더러움을 느끼게 한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하나둘 병실로 들어왔다. 목례만 했을 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따님이 슬그머니 모포를 발치까지 내렸다. "혼미에서 깨어나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평상의 기품을 찾으시오." 내 축원이었다. 생명이 아름답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지만, 생명에 속한 오예(汚穢)마저 아름다움임은 이제사 알겠다. 나는 이런 등식을 만들어 보았다. 고로 더러움도 아름다움일 수 있다는…….

바깥 날씨는 겨울답지 않게 포근했다. 1월인데도 봄의 태동은 이미 시작되었는가. 길거리에서 뒹구는 휴지쪽에도 정겨운 마음이 간다. 문득 어제까지 나를 잠식했던 우울, 세상을 분노케 했던 일들, 낙동강 오염사태, 모자지간의 송사 사건에도 분개 대신 미소가! 지어진다. '살아있음'으로 부딪치고 받아 안게 되는 난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분노하고 질타하고 절망하는 것 또한 아름다움이구나. 살아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구나. 손끝에 감지되는 맥박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유선진 수필가 

서울 출생

서울미동초등학교,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 졸업 

1987년 『월간문학』 12월호 신인상 등단 

2002년 수필집 『섬이 말한다』 (한국문예진흥원 우수 도서 선정) 

2009년 산문집 『사람, 참 따뜻하다』, 2014년 수필선 『쓴맛 단맛』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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