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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목향木香 / 정목일

부흐고비 2021. 3. 5. 08:29

어느날, 나는 한 벌목꾼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60년대만 해도 지리산 기슭엔 울창한 삼림이 우거져 있었다. 장작을 땔감으로 하는 때이어서 벌목을 하는 데가 많았고 숯을 굽는 곳도 있었다.

첩첩산중으로 내왕하는 차는 장작과 숯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있었을 뿐, 버스의 운행도 드물었다. 벌목하는 장면만은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름드리 큰 참나무·소나무들이 늘어 서 있는 산림 속에서 몇백 년 자란 거목이 쓰러지는 광경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장엄의 극치라 해야 좋을 것이다.

산중에서 벌목 일을 많이 해온 사람들은 나무의 깊이를 안다. 나무의 생각과 연륜과 향기를 알게 된다. 그들이 톱을 갖다 대는 순간 나무의 뿌리와 높이가 마음으로 전해 오는 것이다.

오랜 연륜을 가진 나무일수록 생각이 깊고 뿌리도 깊은 법이다. 몇백 년 동안의 삶을 지탱해 준 땅에 순종하면서 생각의 뿌리를 땅 밑으로 뻗으며 위로는 하늘 높이 가지를 뻗쳐갔다.

벌목꾼은 안다. 나무에 톱을 갖다 대는 순간, 몇백 년 자란 거목이 숨을 죽이고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톱질을 시작하면 거목은 꿈쩍도 하지 않지만 거목의 일생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몇백 년의 삶을 받치고 있던 뿌리의 흔들림을 마음으로 알게 된다.

아무리 세찬 풍우에도 끄떡도 하지 않던 몇백 년 삶을 키워 온 뿌리의 흔들림이 손끝으로 전해 오는 것이다. 톱질을 하면서 나무의 인생이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알게 된다고 한다. 거목은 눈을 감은 채 아픔을 참으며 전 생애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랜 연륜을 가진 거목일수록 나무의 향기가 깊다고 한다. 아마도 연륜의 향기, 마음의 향기일 것이다. 톱질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진다. 나무의 연륜이 잘려나가고 뿌리를 받치고 있던 땅이 신음한다. 수십 번의 톱질에 나이테가 한 줄씩 잘려나간다 할지라도 수백 년 연륜의 거목은 수백 줄의 나이테를 지녔을 테니 얼마나 많은 톱질이 필요하겠는가.

나무의 살과 뼈가 잘려나가며 흰 톱밥을 뿌린다. 그것은 단순히 나무의 피가 아니다. 나무의 톱밥 속에는 나무의 나이테가 들어 있다. 수백 년간 하늘을 우러러 애타게 그리워하며 희망의 가지를 뻗치던 햇빛이 잘려나가고 있다.

귓가에 밀어를 속삭이던 음성, 성난 파도처럼 덮쳐 누르던 바람이 잘려나가고 있다. 나무에게 안식과 정서를 안겨주던 새들의 음악이 톱질에 잘려나가고 있다. 몇백 년의 연륜을 자르는 톱질 소리가 산중을 울리면 산의 중심도 조금 흔들리는 듯 느껴진다. 톱밥은 몇백 년의 기억으로 잘려나가서 땅바닥에 흩어진다. 톱밥의 알갱이처럼 많은 거목의 추억들이 흩어진다.

벌목꾼은 나무의 마지막 순간을 안다. 톱날이 어느 정도에 머물게 될 때, 나무의 몇백 년 삶의 집중력, 그 중심이 일순간 침묵할 때를…….

그 순간의 포착은 체험과 영감에서 얻어진 것이다. 벌목꾼은 조용히 나무에서 톱을 빼내고는 재빨리 몸을 피한다. 산이 숨을 죽이고 벌목꾼도 긴장하여 나무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거목은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듯 서 있다가 '우지끈'하고 쓰러져 내린다. 그 순간의 장엄과 황홀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수백 년 연륜의 아름드리 거목이 삼림 속에서 맞는 최후는 비참한 모습이 아니다. 어쩌면 수백 년간의 연륜으로 빚은 일생일대의 교향악일! 지 모른다. 거목이 수백 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뢰 같은 함성을 지르며 하늘 높이 치솟았던 거구를 쓰러뜨릴 때, 아마도 수십 리에 뻗친 계곡이 그 소리를 귀담아듣고 있었으리라.

거목이 쓰러질 때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가 주변의 작은 나무들을 덮치게 된다. 나뭇가지와 가지의 부딪침에 따라 나무들이 내는 소리는 크게 작게 수천 번의 떨림으로 산중을 울리게 한다. 거목의 최후 순간은 그 연륜만큼이나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나 할까. 나무가 땅으로 쓰러 질 때 산이 긴장한 탓인지 나뭇가지와 가지의 부딪침으로 인해 내는 소리는 천 갈래 만 갈래 기기묘묘한 소리의 폭로로 떨어져 내리면서 장엄한 교향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나뭇가지가 부딪쳐 내리는 것에 놀라 주변의 새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고, 수만의 나뭇가지와 가지가 부딪쳐 꺾여나가면서 내는 소리는 수만의 음향을 내는 것이어서 어쩌면 수만의 단원이 연주하는 대 오케스트라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 극적인 오케스트라는 산중으로 퍼져나가 다시 메아리로 돌아오는 통에 산과 산, 나무와 하늘, 계곡이 화음을 이루어 입체음향으로 영원에 사라진다. 그 어떤 음악이 수백 년간의 삶을 마치는 거목의 마지막 연주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몇백 년간 삶을 산 거목의 최후의 말, 최선의 노래, 영원의 불꽃이었을 것이다. 진한 나무의 향기도 수십 리에 뻗쳤으리라. 산에 들에 우리의 주변에 나무가 많아야 함을 물론이지만, 아름드리 거목이 많아야만 우리의 정서도 생활도 더 크고 깊어지리라 생각한다.

거목을 키우지 못하는 토양이라면, 크고 깊은 마음이 자랄 수 없고 또한 큰 인물이 나올 수 없으리라. 벌목꾼의 얘기가 생각날 때마다 거목의 최후와 함께 지리산 산림이 펼쳐지며 진한 목향이 가슴속으로 퍼져 흐르는 것을 느낀다.

 

 

[문화예술인]정목일 수필가   - 경남도민일보

등… 40여 권의 책 집필 조용한 전통찻집에서 정목일(72) 수필가를 만났다. 올해로 등단 43년. 지난 1975년 에서 '방'이라는 작품으로 수필 부문 첫 당선자가 됐고, 이듬해 에 작품 '호박꽃', '어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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