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껏 무르익은 여름은 강렬한 햇살을 앞세워 도시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분주했던 오전의 일과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려고 혼자서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이크! 이건 뙤약볕이다. 이마에 손을 대어 햇빛을 가리며 앞 건물에 있는 감자탕집으로 들어갔다. 전날의 숙취도 있어 '감자 해장국'을 시켰다. 시원한 냉수를 한 모금 들이킨 후, 식당을 휘둘러보았다. 아는 직원이라도 있나 살펴보니 모르는 얼굴들뿐이다. 무심코 바라본 앞자리에는 중년의 갈색 머리 여인이 식탁 가득히 뼈다귀를 쌓아가며, 감자 섞인 해장국을 먹고 있다.

고개를 젖혀가면서 붉은 혀로 뼈에 붙은 익은 살점을 익숙히 발라먹는 모습이 꽤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정면으로 마주 앉은 자리라 먹는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민망하여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신문을 찾았으나, 이미 다른 테이블에 펼쳐져 있다. 그 여인을 곁눈질로 다시 보게된 것은 유난히 맛갈스럽게 음식을 드는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왼손에 젓가락으로 커다란 감자 조각을 찍어 든 채로 오른손으로는 뼈다귀를 숙련된 기술자마냥 뜯고 있는 보기 드문 광경에서였다.

은근히 치밀어 오르는 시장기를 느끼며 주문한 해장국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나도 모르게 시선은 그 여인이 왼손에 들고 있는 감자로 자꾸만 가고 있었다. 싯누런 감자를 꽨 대젓가락의 모습에서 내 머릿속 아득한 심연에 저장되어 있던 유년 시절 어느 여름날이, 휘몰아치는 그리운 심사와 뒤섞여 잔잔한 서글픔과 함께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초가지붕의 썩은 새에서도 물이 배어 나올 정도로 비가 줄기차게 오는 날이었다. 까맣게 윤이 나는 부엌의 흙바닥에 있는 아궁이에서는 뭉게구름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미 눈물로 범벅된 두 눈을 꿈벅거리며 어머니는 젖은 청솔가지를 아궁이에서 빼내었다. 나도 아궁이 곁에서 물러나며 연신 매운 눈을 문질렀다. 장작은 아껴야 되는디… 하는 어머니의 중얼거림보다도, 내 관심은 온통 아궁이 속의 주먹만한 감자 세 알이었다.

어쩌다 어머니가 다른 식구들 몰래 부엌에서 구워주는 감자 맛은 가히 별미였었다. 나는 군침을 삼키면서 장작개비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어머니 손에 들려진 부지깽이가 재 속에 누워있는 감자들을 톡톡 건드릴수록 입안의 군침은 점점 달콤해져 갔다. 이윽고 까맣게 껍질이 탄 감자 세 알이 아궁이에서 굴러 나왔다. 재빠르게 제일 큰놈을 잡으려던 내 손목에 둔탁한 아픔이 몰려왔다. 이눔이! 어머니의 부지깽이는 내 손목을 지나 엉덩이를 후려치고 있었다.

연기에 젖었던 내 두 눈에서, 빗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콧잔등에는 구운 감자의 검댕이 대신 미지근한 눈물방울이 늘어 붙었는데, 빛바랜 검정 치마에 감자 세 알을 소중히 말아 쥔 어머니의 꺼칠한 손등이 연기보다 더 매워 보였다. 부엌을 나간 어머니의 뒷모습이 원망스러워 훌쩍이고 있을 때, 어머니가 빈손으로 들어와서는 물사발을 손에 쥐어 주었다. 부엌을 나와 댓돌 앞에 섰을 때, 안방 문짝의 찢어진 창호지 사이로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마루에 올라 할아버지에게 물사발을 드리는 순간, 할아버지 이마의 굵은 주름살이 인자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내 손바닥에는 물사발과 뒤바뀐 감자 두 알이 비로소 주인을 만난 듯이 탐스러운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소중히 감자를 가슴에 싸안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뚜막에 쭈그려 앉아있는 어머니에게 감자 한 알을 불쑥 건네주었다. 어? 엄마 콧잔등에 검댕이가 묻어있네…. 감자를 받아들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끄러미 쳐다보는 어머니의 까만 눈망울에 가득히 번지는 미소가 슬프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감자탕집 카운트에서 이쑤시개를 문 갈색 머리의 중년 여인이 힐끗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의아로움이 묻어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해장국을 먹기 시작했다. 머리를 숙이고 해장국에 담겨있는 누런 감자를 집어 으깨면서, 귓가에 맴도는 아득한 날의 시냇물 소리 비슷한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래! 저 여인의 우악스럽고 게걸스러우며 기교가 묻어 있는 뼈다귀 저작술(詛嚼術)과, 붉은 혀의 쉴 틈 없는 감자 으깨기 출몰법(出沒法) 구사가 부럽다…. 저 여인의 너그러운 입술과 턱이 삼십 오년 전, 내 어머니의 가냘픈 얼굴이었으면 좋겠다고 뇌까렸다.

힐끗 카운트 쪽을 보니, 그 여인은 이미 나가고 없다.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춥고도 그리운 추억들. 가끔씩 그 정지된 흑백사진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면, 내 깊은 심중의 이끼 낀 우물에 박제되어 있던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켜곤 한다. 회상이라는 타임머신에 이제는 모두다 그립고 소중하게 되어버린 꿈을 싣고서 말이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