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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의 등단 이야기 / 이정림

부흐고비 2021. 3. 5. 11:00

1974년부터 수필이라는 이름을 달고 글을 썼으니, 수필과 인연을 맺은 지도 28년이 되었다. 한 분야에 30년 가까이 몸을 담아 왔다면 한눈 팔지 않은 인생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내가 줄곧 일해 온 곳은 잡지사 아니면 신문사였다. 그 시절의 내 희망은 거창하게도 명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살맛 나게 한 것은 유명한 분들을 매일같이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을 비롯하여 외솔 최현배 선생, 청전 이상범 화백과 홍익대학의 이마동 학장, 또《현대문학》의 조연현 주간을 비롯하여 아동문학가 이원수·시인 김용호 선생과 같은 문단의 중진 인사들…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분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부지런히 기사를 썼고 취재원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신이 꽤 유능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마침내 나는 용기와 무모함의 한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겁도 없이 직업여성들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이고도 의식 있는 여성지를 창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부추김과 내 만용으로 창간된 그 잡지는 2호까지 내고 엉뚱하게도 정치적인 탄압으로 폐간이 되는 불운을 내게 안겨 주었다.

서른도 못 된 나이에 겪어야만 했던 내 인생의 첫 번째 실패는 나로서는 너무나도 큰 타격이었다. 이십 대에 꿈꾸었던 명기자도, 또 의식 있는 잡지의 발행인도 되지 못한 나는 삼십 대를 무기력한 노인같이 맞이해야만 했다. 에너지는 모두 소진되고, 비전이 없는 나날은 내게서 생존의 의미마저 앗아가 버린 느낌이었다.

내 삼십 대는 정말이지 회색의 늪지대와도 같았다. 나는 매일 매일 그 늪 속으로 한 걸음씩 빠져들어갔다. 삼십 년을 육십 년만큼 살았다고 하면, 인생이 설령 삼십 년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조금도 아쉬울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내게는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완전한 무(無)라는 그 자각은 나를 침체의 늪 속에 편안하게 도피하도록 허락지 않았다. 젊은이에게 도피는 무능의 비겁한 다른 이름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나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던 그 죽음의 늪에서 빠져 나왔다.

나는 다시 펜을 잡았다. 내 빈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펜밖에 없다는 그 깨달음은 깨어진 꿈들의 상처를 어느 정도 아물게 해 주었다. 그래서 72년도 《수필문학》 8월호에 〈정취(情趣)〉라는 짤막한 글을 발표한 이후로 중단했던 글쓰기를 7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정식으로 등용문을 거쳐야겠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70년대 초반은 문예지에서 처음으로 수필 분야에 추천 제도를 두기 시작한 때였지만, 나는 그런 관문에 대한 호기심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나와 생각이 달랐다. 이왕 글을 쓰려면 어디에서 나왔다는 '타이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권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달리 반대할 소신도 없어, 76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수필에 대한 정식 입문 절차를 밟았다.

이십 대의 실패를 딛고 승선한 수필이라는 배―그 배를 타고 긴 항해를 하는 도중, 때로는 하선(下船)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도 많았다. 멀미하는 사람이 배에서 고생하듯이, 문학적인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 부딪히게 되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핑계를 대고 그 배에서 내려올 기회마저 놓쳐 버린 것 같다. 배는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린다. 돛이 낡아 더 이상 바람을 맞을 수 없을 때까지 배는 계속 앞으로 달릴 것이다.

나는 자신을 미화하거나 과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필을 혼(魂)으로 쓴다든지 피로써 쓴다든지 하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수필은 내게 아마추어적 허영이 아니라 프로의 실존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정림 수필가는 1965년 9월 한국 외국어대학 불어과 졸업 1985년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1974년 "수필 문예"로 등단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 1988~1990년 지양편집기획 대표 1988~1996년 한국일보 문화센터 수필강좌 출강

수상 : 현대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 본상, 김태길수필문학상

수필집 : 『당신은 타인이어라』 『산길이 보이는 窓』 『하얀진달래』 『숨어 있는 나무』

평론집 : 『한국 수필평론』 『한국 수필평론』

번역서 : 『어린 왕자』(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생텍쥐페리) 『여자의 일생』(모파상)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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