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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새벽 종소리 / 박재식

부흐고비 2021. 3. 20. 17:48

새벽 네 시면 차임벨 소리에 잠이 깬다. 교회의 차임벨은 새벽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울린다. 이 성가(聖歌)를 울리는 종소리가 어둠을 깨고 누리에 퍼지면 도시에는 새로운 하루가 열리게 된다. 통금(通禁)이 풀린 거리를 자동차가 신바람이 나서 질주하고, 해장국집이 문을 연다. 그래서 차임벨은 통금해제의 신호이기도 하다.

10여 년 전만 해도 밤 열두시의 통금과 새벽 네 시의 해제 시간은 싸이렌이 알려 주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싸이렌은 화재를 알리기 위해 소방서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비상 신호 기구였다. 어릴 때 싸이렌이 울리면 두근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불이 난 곳을 찾아 불구경을 가던 생각이 난다. 이것이 정오의 시보(時報)로도 이용되다가 2차대전 말기에는 공습을 경보하는 공포의 음향으로 변했다.

이런 전차로 하여 싸이렌 소리를 들으면 어떤 절박한 사태가 예상되면서 불안의 먹구름이 가슴을 덮게 된다. 영문을 모르는 외국 관광객이 난데없이 한밤중에 울리는 싸이렌 소리에 놀라 잠옷 바람으로 호텔 방을 뛰쳐나왔다는 해프닝이 족히 있을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만이라도 다른 음향으로 바꿀 길이 없겠는가 하고 궁리한 것이 교회의 차임벨이다.

이 차임벨을 착안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는 김창열(金昌悅)씨이다. 선친이 교회의 목사였던 그는 그 무렵 내무부의 출입기자로 있으면서 치안국의 모(某) 고위 간부와 환담을 하던 어간에 통금 싸이렌 문제가 화제에 떠오르자 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 고위 간부가 무릎을 치자 그는 미처 방침이 성안도 되기 전에 독점기사로 신문에 써버렸다. 덩치가 곰 같은 그에게 창(唱)과 고수(鼓手)를 겸한 이런 멋쟁이 솜씨가 있었던가 하고 그때 나는 적이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시민의 귀에 낭랑하게 울릴 통금시보(通禁時報)....." 이런 기사가 보도되면서 등장한 차임벨은 확실히 시민들에게 부드러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촉즉발의 휴전선을 지호지간(指呼之間)에 둔 서울은 시민들이 의식하지 않는 속에도 언제나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 우리나라의 심장이다. 통금은 말하자면 그와 같은 현실의 산물인데, 통금을 알리는 시보가 비단 주정뱅이나 밤손님이 아니더라도 듣기에 결코 쾌할 리가 없다. 뚜우-하고 밤하늘을 흔드는 둔탁한 소리는 잠자던 위기의식을 일깨우기에 안성맞춤의 신호이기도 했다. 그것이 성가를 울리는 차임벨로 바뀐다는 것은 시민생활의 정서면에서도 큰 뜻을 갖는다고 해석할 만 했다. 통금이 시작되는 자정의 성가는 평화로운 밤잠을 재촉하는 자장가가 될 것이며, 묶였던 발이 풀리는 새벽의 종소리는 문자 그대로 해방을 알리는 종소리가 될 것이다.

차임벨이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은 서울의 영락교회로 기억된다. 끊일 듯 이어가는 맑은 종소리가 성가의 가락을 들려주었을 때 나는 깊은 감명에 젖어 기도하듯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었다. 어느 평화스러운 마을, 고색이 창연한 교회의 풍경이 안막에 떠오르고, 본당 마루에 꿇어앉은 수녀들이 은은한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를 올리는 안젤루스의 광경이 연상되는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 준다. 허공에 날리는 성가의 가락은 교회당 안에서 풍금소리로 듣는 엄숙함보다 한층 신비로운 정취를 더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차임벨의 정체를 잘 모른다. 종탑에 음정을 달리하는 여러 가지 종을 매달고 그것을 가락에 좇아 줄을 당겨 소리를 내는 타종악기(打鐘樂器)일 것이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그러면 은은한 여운까지를 감안하여 가락을 뜯는 솜씨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리고 늦은 밤과 꼭두새벽에 때를 맞추어 저 아름다운 종소리를 울려 주는 천사 같은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수수께끼처럼 품었었다.

그러나 그 수수께끼는 얼마 안 가서 저절로 풀려 버렸다. 영락교회를 효시로 서울 도처의 교회에서 앞을 다투다시피 하여 차임벨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살던 집 건너편에 있는 해방촌에서도 새벽 네 시만 되면 어김없이 그윽한 성가의 종소리가 나의 단잠을 깨웠다.

그것이 진짜 종이 아닌 녹음으로 담은 것을 확성기에 의해 방송하는 소리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마음이 허전해졌을 만큼 실망하였다. 시간도 타이머 장치에 의해 맞추리라는 짐작을 했다. 그러고 보면 예배 시간을 알리는 단조로운 구식 종소리가 도리어 정답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어릴 때 나에게는 불구의 삼촌 한 분이 계셨다. 젖먹이 때 경기를 앓고 한 쪽이 곰배팔에 절름발이가 된 불구였다. 나는 이 불구의 삼촌 때문에 가끔 다른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 분풀이의 짜증을 부리곤 했다. 그때마다 삼촌은 쓸쓸한 웃음을 지으시다가 "사람은 외양보다 마음이 성해야 한다" 하고 내가 깨칠 수 없는 말씀을 하시고는, 내가 좋아하는 옛이야기 같은 것으로 달래 주곤 했다.

그 삼촌은 기독교를 독실하게 신앙했다. 현세에서 단념한 행복을 내세에서 찾은 것인지도 몰랐다.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못 든(장가를 들 수 없었던) 그에게는 순정의 짝사랑을 하던 유일한 대상이 있었다. 같은 교회에 나오는 미션 계통 학교의 여학생이었다. 그 허망한 꿈을 식구에게 토로했다가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혼찌검을 당하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면서 가슴이 저려 온다.

"미친 놈, 누구 망신시키려고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나! 병신 주제에 실성까지 했나?"

오르지 못할 뫼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아버지의 수분론(守分論)은 삼촌을 두고 타이르시는 말씀에서 항상 나의 귀에 배겨온 경구이다. 그러나 딱하게 여기신 아버지가 아무렇게나 짝지어 주려던 혼담에는 마치 부정한 말이라도 들었을 때처럼 성난 얼굴로 시무룩했다.

이런 삼촌이 새벽마다 일찍 교회에 나가 종을 쳤다. 물론 교회에는 종치는 사람이 따로 있었지만, 삼촌은 자원해서 새벽 기도를 알리는 종만은 당신이 맡아서 쳤다. 종치는 사람이 치는 새벽종은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듣기에도 어색하다는 것이었다. 새벽이면 제일 먼저 교회당에 나가 예배 시간을 기다리면서 생긴 궁리였는지도 몰랐다.

이러한 삼촌을 식구들은 질색을 하며 말렸다. 불구의 몸으로 종탑까지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일은 적잖은 위험이 부담된다. 실상 한 번은 사닥다리를 내리다가 아래로 굴러 크게 몸져누운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삼촌은 신들린 사람처럼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추운 날도 물독의 얼음을 깨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비바람이 불고 눈발이 휘몰아치는 날도 아랑곳없었다. 새벽 세 시 반에 예종(豫鐘)을 치고, 기다렸다가 다시 네 시에 시작을 알리는 종을 친 다음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내려와서 예배에 참여한다고 했다.

그 종치는 시간은 시계처럼 정확했다. 물론 회중시계 같은 것을 가졌을 리가 없는데, 두 번째의 종소리가 울리면 어김없이 벽시계가 뒤따라 네 시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삼촌이 치는 종소리는 다른 사람이 치는 종소리 보다 유표할 만큼 음향이 곱고 운치스럽게 들렸다. '땡그르릉 때응' 하고 끊일 듯 다시 이어지는 유연한 종소리는 강약과 완속이 무상하여, 다른 사람의 '땡그릉 땡, 땡그릉 땡' 하고 마구 울리는 단조로운 소리와는 사뭇 음향의 뉘앙스가 다른 것 같았다. 가만히 마음하여 귀 기울이면 종치는 이의 기도소리를 아울러 듣는 것만 같았다. 삼촌은 그의 하염없는 기도를 종소리에 실어 하늘 속으로 띄워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삼촌은 40을 못 넘기고 그의 불우한 생애의 막을 내리셨다. 잠자리에 누워 차임벨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삼촌이 치던 새벽 종소리가 은은한 여운을 끌면서 가슴을 적셔 온다.


 

박재식(朴在植) 수필가는

1928년 경남 진주(晉州) 출생.

동인지 『문학청년』에 시와 단편소설(1948) 발표. 단국대학 법학과(1962) 졸업. 월간 『새가정』에 첫 수필 「나의 잊을 수 없는 소녀」 발표(1954), 『부산일보』에 칼럼 연재(1970),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충북지부장,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수필문우회 회원. 수필집 『바람이 머물고 간 자리』(1982). 『열려 있는 창』(1988). 『대장닭』(1997). 『짝사랑』(1999), 수필선 『세월의 바람 속에』(2007)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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