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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중섭 화백을 만난 것은 1954년의 여름으로 기억된다. 장마비가 멎은 늦은 아침인데, 이젠 그도 고인(故人)이 된 무용가 옥파일(玉巴一) 씨가 동반하여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다. 구두는 말할 것도 없고, 바지가랑이까지 흙투성이가 된 두 사람은 어디서 마셨는지 아침부터 거나해 있었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들어서자마자 옆에 있던 직원이 피식 하고 웃음을 뿜었을 만큼 그들의 행색은 간밤의 비에 젖은 흔적으로 무척 후줄근하고 초라하게 보였다.

원래 데카당스의 기질(氣質)이 짙은 옥파일씨도 그러하거니와 그보다도 동반자(同伴者)의 차림새나 모습은 두드러지게 개리커처하였던 것이다. 부스스한 얼굴에 노르스름한 콧수염을 기르고 시체엔 보기 드문 베레모 같은 것을 썼는데, 무릎이 나온 '사지'바지와 땟국이 흐르는 흰 와이셔츠를 입고, 그 무더운 날씨에 투박한 겨울 상의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몸 전체가 구부정한데, 술 취한 탓인지는 몰라도 한자리에 그냥 서 있지를 못하고 뒤뚱거리는 것이 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사람 같았다. "박형, 저 사람이 이중섭 씨야. 왜 알지? 화가(畵家)말이야." 언제나 알콜에 찌든 떠듬떠듬한 헛소리로 옥파일 씨가 나의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그가 약관(若冠)으로 일본의 유수한 미전(美展)에 입상한 천재화가라는 것은 뒤에 들어서 안일이지만,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첫인사를 그와 나누었다. 그러고는 좀 난처해졌다. 왜냐면 두 사람의 찾아온 뜻이 뻔하기 때문이다. 술과 벗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옥파일 씨는 뜻 맞는 친구와 얼려 술을 마시다가 모자라면 곧잘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시간이 어중간했다. 토요일이긴 했지만 점심때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내가 양해를 구하고 돌아앉아 남은 일을 마무리하는 이윽한 시간을 무슨 빚 받으러 온 사람들처럼 의자에 버티고 앉아 그냥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적이 불유쾌했다. 옥파일 씨는 그렇다 치고라도 방금 첫 인사를 나눈 이중섭씨인가 하는 사람의 거동 좀 보소. 팔짱을 끼고 앉아, 무섭게 눈을 내려 감고는 이내 스르르 코를 골기 시작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오만불손(傲慢不遜)한 주정뱅이 화가- 나는 처음 그를 이런 위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나의 관찰이 사뭇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없이 수줍고 겸손한 위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근처의 단골 식당에 그들을 이끌어 점심 식사를 시키려니까. "식사 보담, 우리 술이나 한잔씩 하면서 얘기나 하지. 그게 좋겠지?" 옥파일 씨가 화백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때의 화백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당황하는 눈초리로 흘금흘금 두 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면서 이런 때의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망설임으로 무척 고심을 하는 태가 얼굴에 뚜렷했다. 세 사람은 그 조그만 식당에서 소주를 꽤 마셨다. 원래 옥파일 씨의 주량은 밑빠진 독이지만, 이 화백의 주량도 만만하지 않았다. 권하는 잔은 지체하는 법 없이 들이켜고 되돌려 왔다. 주기가 돌면 으레 옥파일 씨는 자기 나름의 예술론을 펼쳐놓기가 일쑤다. 현역은 아니지만 발레가 전공인 그는, 시(詩)도 쓰고, 그림도 알고, 음악에도 일가견을 갖는 식의 다양한 예능의 소지자였다. 마침내 문외한(門外漢)의 두 사람이 현대 회화에 의론이 미쳐 시시비비를 다툴 때까지도 화백은 잠자코 경청하면서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그 경청하는 자세가 퍽 겸허하고 진지했다. 흡사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학생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때 두 사람(나와 옥파일 씨)이 신이 나서 주고받던 논쟁은 추상화(抽象化)에 관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무렵 우리나라 화단에도 비중을 갖고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추상화를 정통의 예술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아류(亞流)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엎치락 뒤치락의 구론이 오간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숫제 공자(孔子)앞에서 문자를 쓴 셈이었다. 그러나 화백은 끝내 한마디의 참견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모두 술이 어지간히 되어 식당을 나온 것은 거의 저녁 무렵이 되어서였다. 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헤어지기 아쉬운 빛들이 표정에 감돌았다. "이번엔 내가 한잔 낼테니, 우리 집에 갑시다." 이중섭씨였다. 나는 아까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뭔지 모르게 화백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달관한 예술가가 지니는 신비로움 같은 것이 그 인품 속에 감추어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잔잔한 눈이 한없이 맑은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꼬리 끄는 아쉬움을 부담 없이 자기 집으로 이끌 만한 풍류가 능히 그의 몸과 생활 속에 배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그때 하였다. 세 사람은 누하동(樓下洞) 에 있는 이화백의 하숙집으로 갔다. 일본식 집의 이층 '다다미'방이었다. 8첩(疊)넓이의 꽤 큰 방은 여기저기에 흩어진 화구와 그리다가 만 그림 조각으로 쓰레기터같이 너저분했다. 바람벽에는 그가 손수 그려 붙인 그림으로 거의 빈틈이 없었다. 화백이 듬성듬성 방바닥을 치우고 있는 동안 나는 그러한 그림들을 구경하였다.

그림을 모르는 탓인지는 몰라도 역작(力作)같은 것은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붓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서 만든 그림 같은데, 내가 여태껏 보아온 그림과는 달리 그 화풍이 좀 독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재는 발가벗은 아이들, 그것도 발가락 다섯 개를 극명(克明)하게 그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호박넝쿨, 물고기, 비둘기, 황소, 닭, 그중에도 바닷게를 유난히도 많이 그린 것이 눈에 띄었다. 무슨 동화책 속의 삽화를 보는 것 같았다. "자 앉읍시다." 그새 방바닥 한가운데에 반상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상 위에는 반쯤 남은 청주 됫병이 얹혀 있고, 안주는 김치깍두기 뿐이었다. "이 어인 정종이어?" 옥파일 씨가 신기하다는 듯 반색을 하니까, 자기를 사숙하는 미술대학생이 사들고 온 것이라면서 돈도 좀 두고 간 것이 있으니까 오늘밤 마음껏 마셔보자고 했다. 세 사람은 다시 주거니 받거니의 술타령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밖에는 머츰했던 장마비가 생각난 듯 돋혀 오고 있었다. 반병 남짓한 술은 삽시에 없어지고, 화백이 흔들흔들 바깥으로 나가 구멍가게에서 다시 소주를 가져왔다. 그것이 거의 밤을 새우며 마시는 동안 여러 차례 되풀이 되었다.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아랫방 주인아주머니가 올라와서 저녁밥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화백은 다락문을 열고 뚜껑 없는 냄비를 집어냈다. 그것이 쌀독인 듯 잠시 들여다보고 나서, "쌀이 좀 모자라겠는데..." 하고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술 먹는데 밥은 뭘" 옥파일씨가 그만 두라고 했다. 그럼 저녁은 술로 때우고, 내일 아침밥이나 부탁한다고 주인아주머니를 돌려 보냈다. 명색은 자취생활(自炊生活)인데 마음씨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쌀만 주면 자기네들의 하는 밥에 덧얹어 지어준다는 것이다. 김치도 재료만 사다 주면 담가 주어, 깍두기 안주는 아직도 단지에 하나 가뜩 있다고 숫제 단지째 상 옆으로 갖다 놓았다. "전 그림을 잘 모릅니다만, 선생님의 그림은 무슨 얘기를 소재로 한 그림들 같군요." 나는 화백의 얘기가 듣고 싶어서 우선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적중한 것 같았다. 여태껏 잠자코 술잔만 건네던 화백의 입에서 흡사 물꼬를 터놓은 봇물처럼 사연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림이 색채와 형태를 통해 시각에 호소하는 예술이라지만, 소재에 따라선 얘기를 담아 그려보는 재미도 있더군요."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자기가 바닷게를 즐겨 그리는 데는 까닭이 있다고 했다.

1·4 후퇴 때 원산(元山)에서 솔가하여 남하한 화백은 제주도 서귀포(西歸浦)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한국말을 모르는 일본 여자인 아내와 두 아이와 그리고 천하에 주변머리 없는 화백으로 구성된 피난 식구는 이내 무서운 굶주림의 엄습을 받아야 했다. 별수 없이 그는 아침부터 갯가에 나가 새끼 게를 단지로 하나씩 잡아와선 그것을 삶아 끼니로 삼았다고 한다. "처음엔 정말 못 먹겠어요." 갯벌에 지천으로 기어 다니는 새끼 게는 워낙 작아서 알맹이가 없다. 식용으로 삼았다면 오직 딱딱한 껍질을 씹는 맛일 텐데, 그것을 어린 꼬마들에게까지 먹였다니 지난 일이지만 듣는 마음이 아팠다. 그와 가족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 은인을 수없이 잡아먹은 죄의식 때문에 게를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림 속의 아이들은 못 견디게 보고 싶은 그의 꼬마들, 그리고 그가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의 이미지도 그림으로 담는다고 했다. 굶주리다 못한 그의 아내는 마침 미귀환일인(未歸還日人)들의 송환케이스로 아이들과 함께 친정인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화백은 돈이 마련되는 대로 밀항하여 뒤따라가기로 하고 그들 가족은 부산 부두에서 어설프게 헤어졌다고 한다. "늦어도 석달 안으론 들어가서 같이 살겠다고 한 것인데, 벌써 2년이 넘었다"면서 화백은 좀 숙연해졌다.

그의 계획은 그림이 되면 개인전을 열어, 거기서 팔린 그림 값을 모아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화백의 유일한 희망이요 창작활동의 원천이며 생활의 전부라고 했다. 그 동안 부산 등지(等地)에서 한두 차례 소규모의 작품전을 벌이기는 했으나 재미를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재미를 못 본 것이 아니라 팔린 그림 값을 친구에게 떼이기도 하고, 생긴 푼돈은 술값으로 탕진해 버린 것이라고 옥파일 씨가 주석을 달았다. 그래서 그를 걱정하는 주위의 몇몇 사람이 서둘러 이번에는 본격적인 개인전을 갖고 목돈을 만들도록 이렇게 널찍한 공방(工房)까지 주선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변변한 그림이 사십 점은 있어야 하는데, 그림이 잘 되지를 않는다면서, 지금 방안에 너절하게 걸린 그림들도 몇 개를 빼고는 미완성이거나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졸작들이라고 푸념을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화백의 순수한 창작의욕에서 그리는 그림이 아니고 다급한 필요에 의해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내 나름대로 풀이를 했다. 아무튼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로 삼는 창작활동의 부진에서 오는 초조감의 갈등 속에서 고민하는 화백의 몸부림을 짐작할 만하였다. 그것을 술과 친구 속에 얼버무리며 지내는 것이 화백의 그 무렵의 생활인 듯하였다.

"뭐 꼭 일본에 가셔야만 합니까? 한국에서 터전을 닦고 가족을 다시 데려오면 되지 않습니까?" 나는 귀중한 화가 한 사람을 아주 일본에 빼앗길 것 같은 아쉬운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물었다. 화백은 대답대신 그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때 그의 얼굴에는 피난생활에 지친 짙은 곤비(困憊)의 그늘이 내려 덮는 것 같았다. 이 화백의 처지로 보아 나의 그 말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씨알먹지 않는 제안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아직은 예술가가 예술로써 먹고 살 수 없는 땅에, 그것도 굶주리다 못해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가족을 다시 데려온다는 것은 화백으로서는 생각할 가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현실 적으로 한·일 간의 국교가 열리지 않았던 그 무렵의 사정으로 보아 일본 사람인 아내를 일본에서 데려온다는 것은 이 화백이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일보다 몇십 배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때의 나의 충정은 이 화백이 꼭 우리 땅에서 빛을 보는 화가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그런데 그는, 지난 해 겨울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보고 왔노라고 했다. 그렇게도 그리워서 못 견디는 가족을 일본에서 만나고 되돌아왔다는 말이 언뜻 곧이들리지 않았으나, 화백은 안타까운 그때의 사연을 찬찬한 그러나 감동이 섞인 어조로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뭐라고 딱 잘라서 대답하지 못한 나의 충정과 물음에 대한 화백의 해답이 되기도 했다. 몇몇 친구의 주선으로 외항선(外航船)의 선원수첩을 만들어 화물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숙원은 쉽게 풀리는가 했다. 그런데, 일본 고베항(神戶港)에 내려 가족이 있는 도쿄(東京)로 가기 위해 역을 찾는 길목에서 일본경찰에 붙들리고 만 것이다. 그 무렵 일본에는 밀입국자가 많아 감시의 눈이 몹시 번득일 때인 만큼 몰골과 행색이 현저한 화백을 놓칠 리가 없었다. 외항선원의 신분(?)을 가진 그가 당장 밀입국자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거짓 없는 자백을 받은 경찰은 천진하리만큼 솔직한 화백의 태도에 감동한 것인지, 혹은 화백의 딱한 처지를 동정한 것인지는 몰라도 퍽 처우가 친절했다. 도쿄(東京)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 가족에게 연락을 해주었다. 이윽고 그의 아내가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찰은 다음날 화백이 배로 되돌아갈 것을 조건으로 그들 내외가 하룻밤을 지낼 여관까지 주선해 주었다. 아담하고 조용한 이층 방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껴안았다. 꼭 견우직녀의 해후와 같았다고 화백은 그때의 감개가 새로운 듯 표정이 황홀해졌다. "아이들은 왜 데려오지 않았소." "급하게 오느라고..., 그리고 뭐, 오늘밤은 둘이서만 갖는 것이 좋잖아요?" 아이들은 집에 가서 천천히 봐도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내일은 배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화백의 마음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내의 표정은 소녀같이 밝았다. "여까지 온 당신을 어떻게 되돌려 보내요? 저가 내일 부탁해 볼께요. 우리 목욕하고 잡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는 창문을 열고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보름달이 휘황한 밤이었다. 화백이 뒤에서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고즈넉이 껴안았다. 그 손을 꼭 쥔 아내의 뺨에는 어느새 눈물이 범벅져 있었다. 화백도 복받치는 서러움을 누를길 없어 눈물을 마구 흘렸다. 이국땅 낯선 항구의 달은 유난히도 밝았다. 저 달이 기울면 다시 이별이 온다는 속된 감상이 그때처럼 무게를 갖고 달을 바라보게 한 적도 없었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고 한 소월(素月)의 시정(詩情)이 크낙한 감동을 싣고 가슴에 사무치는 달이었다고 화백은 말한다. 그의 일작(逸作) <달>은 그때의 감명이 모티브가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튿날 그의 아내는 도쿄(東京)의 요로에다 전화를 걸었다. 일본의 유수한 재벌 계통의 규수였던 그녀의 간청은 이내 현지의 경찰에 힘을 미치어 왔다. 배가 고베(神戶)를 떠날 때까지 도쿄를 다녀와도 좋다는 허가가 내린 것이다. 그것은 실상 주변껏 일본에 눌러있어도 좋다는 묵시적인 조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쿄의 상황은 화백을 그냥 일본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였다. 전쟁으로 몰락한 처가의 가계는 모녀가 뜨개질로 간신히 이어나가는 형편. 그보다는 거지가 되어 나타난 사위에게 대한 장모의 노골적인 냉대는 마련 없이 찾아온 자신의 경솔을 뼈저리게 뉘우치게 만들었다. 화백의 의지와 반의지(反意志)가 결정적으로 귀국을 마음먹게 한 것은, 옛 동경미전(東京美展) 때의 선배 화가를 찾았을 때였다. 그는 전후의 일본화단에 중진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중섭 씨였죠?" 누구시더라 하는 표정으로 화백을 살펴보던 그는 별로 반기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맞는 것이었다. 어떤 도움 될 의논을 바라고 찾아간 화백은 그냥 맥이 풀렸다. 질화로의 빈재를 부질없이 쑤석거리면서 내키지 않는 투로 얘기하는 일본 화단의 근황 같은 것만 듣고 그 집을 물러나왔다.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결국 아내와 어린 두 아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 선배 화가와의 대화를 통해 부흥하는 일본 화단의 움직임이 그의 예술을 능히 받아들일 소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힘이 솟았다. 그러자면 우선 제작에 필요한 아틀리에 한 칸이라도 마련할 자금이 있어야 한다. 그 돈을 한국에서 만들어 다시 들어와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돈을 벌어가지고 꼭 온다." 무심한 아이들을 차례로 안아보고, 붙드는 아내의 손을 뿌리치다시피 하여 화백은 타고 갔던 화물선 편에 실려 되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끝내 풀지 못한 비원(悲願)을 안고 생애의 마지막을 닫는 화백의 철저하리만큼 기구했던 운명은 이 때 결정적으로 그 지침(指針)이 돌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설사 화백이 그것을 예감했다 하더라도 그의 깔끔한 기질이나 지나치게 수줍은 성격은 무가내하 그 비극의 길을 스스로 걸어 나올 수밖에 없는 화백의 화백다운 운명이 아니었는가 싶다. 화백은 본래 말수가 적고 어눌한 위인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인간됨의 순수성은 언어에 꾸밈이 없는 대신 사실이나 감정의 표현이 매우 정확했다. 정확하다는 것은 언어의 선택이나 줄거리의 전개가 논리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화백의 화법(話法)은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무시한 것이었다. 가령 달(月)을 얘기할 때도 두 손으로 둥그렇게 달 모양을 그려 보이면서 솟구치는 감회와 그 때의 정경을 스스로 도취된 표정과 목소리로 나타내는 식인데, 그것이 그의 어슬픈 말솜씨와 잘 조화를 이루어 듣는 사람의 마음에 정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작용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화백과 일본행(日本行)은 이미 그의 인생에서 떼칠 수 없는 숙명적인 과제이며, 얼마나 절실한 현실적인 염원인가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화백은 선반에서 자개무늬가 있는 조그만 칠기함을 정중히 들고 와서 우리 앞에 놓았다. 그것은 그의 방에 있는 유일한 가구였다. 그 속에는 일본에서 그의 아내가 보낸 편지가 차곡차곡 간직되어 있었다. 화백의 양해를 얻고 그중 한 통을 집어서 읽어보았다. 확실한 사연은 지금 기억할 수 없지만, 화백의 건강에 대한 걱정, 아이들의 근황, 빨리 일본에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는 등의 내용이, 화백의 절실한 심정에 비해서는 퍽 담담한 글귀로 엮어져 있던 것 같았다. 지체 있는 일본 여자의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을 엿볼 수가 있었으나, 그 보다는 재회(再會)를 기다리는 자세가 남편에 대한 신뢰감으로 안정되어 있는 듯했다. 그걸로 보아, 화백이 아내에게 띄운 소식은 절박한 그의 사정과는 달리 낙관과 희망에 찬 내용의 것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그렇다면 두 사람사이에서 오고간 숱한 사연의 편지는 결국 가족 재회라는 그들의 한결같은 소원이나 운명에 아무런 뜻과 구실을 끼치지 못한 헛된 문안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던가? 만약 화백이 불여의한 실정을 일본의 아내에게 사실대로 알렸던들, 그의 일본행의 꿈은 보다 손쉽게 실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냐면, 화백의 심리적인 부담은 한갓 일본으로 도항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건너간 뒤의 생활 근거를 삼을 자금까지를 전시(戰時)의 불모지에서 마련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깔끔하고 수줍은 성격은 끝내 불우한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할밖에 없는 운명의 줄거리를 좇아야만 했던 것 같다. 한 사람의 예술을 이해하려고 할 때, 흔히 그의 인간과 생활과 정신을 천착한다. 그것이 그의 예술을 밑 받치는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날 밤 이 화백에게서 느낀 작품 세계는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소박한 행복에의 추구에 불과했다. 가족을 만나 가족과 함께 산다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행복관. 그것이 그를 몰아 작품을 그리게 하고 내용을 형성시킨 화백의 지배적인 세계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와 같은 필부의 소박한 행복관을 높은 예술의 세계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물론 화백의 예술적 천재가 가능하게 한 일이었겠지만, 그것을 뒤집어서 생각한다면 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세계가 그의 예술을 강렬하게 붙들 수 있었다는 것은, 화백이 한갓 탐미적(耽美的)인 예술지상주의자(藝術至上主義者)이거나 괴팍스런 위인이 아닌 매우 노멀한 인간형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한다.

가장 예술가다운 생애를 통해 가장 인간적인 예술을 완성시킨 사람. 그것이 바로 이중섭 화백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밤은 깊어 자정을 지났다. 열어 놓은 창 밖에서는 세찬 빗발이 양철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앙철지붕에 비가 내리는데... 이 밤이 얼마나 좋습니까? 응? 박형, 옥형" 시를 읊듯 뇌이면서 화백은 뜸해진 술잔을 마구 권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화백을 만나보지 못했다. 적십자병원(赤十字病院)에서 간호하는 사람 하나 없이 고독하게 숨을 거두어 갔다는 소식도 후문으로 접했을 뿐이다. 내가 만난 다음 해의 1월인가 미도파화랑(美都波畵廊)에서 대망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러나 모처럼 들른 것이 화백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출품된 그림 중 내가 누하동 2층 방에서 본 것들은 불과 몇 점밖에 되지 않았지만, 웬일인지 거기 걸린 모든 그림이 낯익은 것만 같았다. 특히 화백이 자신의 네 가족을 소재로 그린 명작 <가족>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 나오는 길의 방명록 한 자락에 나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얘기를 눈물겹도록 많이 듣고 갑니다."(1974)

 

 

죽어서야 소원 이룬 이중섭, 그의 애틋한 가족 사랑

서울 망우리 묘지공원에서 만난 이중섭 화가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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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 이중섭이 평생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혼자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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