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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송수권 시인

부흐고비 2021. 3. 25. 13:08

아내의 맨발1 - 연엽(蓮葉)에게 줌/ 송수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하여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으로 몸을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까치마늘 같던 발아!/ 蓮 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에 삭은 蓮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 잎새 속에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도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아내의 맨발3 - 갑골문 / 송수권

뜨거운 모래밭 구덩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시골길 또는 술통 / 송수권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그리메: ‘그림자’의 옛말. **즈믄: ‘천(千)’의 옛말, 많은.

갯메꽃 / 송수권

채석강에 와서 세월따라 살며/ 좋은 그리움 하나는 늘 숨겨놓고 살지/ 수평선 위에 눈썹같이 걸리는 희미한 낮달 하나/ 어는 날은 떴다 지다 말다가/ 이승의 꿈 속에서 피었다 지듯이/ 평생 사무친 그리움 하나는/ 바람 파도 끝머리 숨겨놓고 살지// 때로는 모래밭에 나와/ 네 이름 목터지게 부르다/ 빼마른 줄기 끝 갯메꽃 한 송이로 피어/ 딸랑딸랑 서러운 종 줄을 흔들기도 하지// 어느 날 빈 자리/ 너도 와서 한번 목터지게 불러 봐,/ 내가 꾸다 꾸다 못 다 꾼 꿈/ 이 바닷가 썩돌 밑을 파 봐./ 거기 해묵은 얼레달 하나 들어 있을 거야/ 부디 너도 좋은 그리움 하나/ 거기 묻어놓고 가기를//

빈집 / 송수권

오래도록 잠긴 저 문에/ 누군가 빗장을 푼다/ 삭아내린 싸리 울바자 다시 세우고/ 눈보라가 설쳐대는 툇마루와/ 댓돌을 쓸고/ 댓돌 위에 신발 몇 켤레도 가지런하다/ 어제는 서울서 일만이네 식구가 내려와/ 밤새도록 저 창호 문발에 불빛 따뜻하다// 그 불빛 새어 나와/ 온 마을이 다 환하다/ 낯선 듯 동네 개가 컹컹 짖고/ 올바자를 넘는 애기 울음소리/ 동쪽 하늘에 뜬 샛별이 다 파르르 떤다/ 마당가 바지랑대에 널린 애기똥물빛/ 이제야 사람이 사람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굴뚝의 연기가 치솟아/ 한밭재 대숲머리를 돌아나가는/ 저 들판의 자욱한 연기 보아라/ 오래 잊힌 자진모리 설움 한 가락이/ 그렇게 풀리는구나// IMF가 대순가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벼르고 벼르던 30년 세월/ 조금 일찍 돌아온 것뿐이다/ 조금 앞당겨 돌아온 것뿐이다//

여자 / 송수권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하나 없는 계산도 할 줄 모르는 여자/ 허나, 세상을 보고 세상에 보태는 마음은/ 누구보다 넉넉한 여자/ 어디선가 숨어 내 시집 속의 책갈피를 모조리 베끼고/ 찔레꽃 천지인 봄 숲과 미치도록 단풍 드는/ 가을과 내 시를 좋아한다고/ 내가 모르는 세상 밖에서 떠들고 다니는 여자/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자기 시집 하나 보내지 못한 여자/ 어느 날 이 세상 큰 슬픔이 찾아와 내가 필요하다면/ 대책없이 떠날 여자, 여자라고 말하며/ `여자` 란 작품 속에만 숨어 있는 여자/ 이르쿠츠크와 타슈겐트를 그리워하는/ 정말 그 거리 모퉁이를 걸어가며 햄버거를 씹는/ 전신주에 걸린 봄 구름을 멍청히 쳐다보고 서 있는 여자,/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팔십 리 해안 절벽 변산 진달래가/ 산벼랑마다 드러눕는 봄날 오후에.//

여승 /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 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봄비는 즐겁다 / 송수권

며칠째 봄비가 지난다./ 한 떼씩 마치 진군의 나팔 소리 같다./ 샤넬 향수병을 따놓은 병마개 같다./ 촉촉히 마음에 젖어 드는 얼굴,/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가 있었다./ 물구나무 서서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건네보던 친구가 있었다./ 젖지도 못하고 마른 종이처럼 구겨졌으면 어쩌나./ 큰 길로 나서니 빨강 분홍 초록 파랑 우산 속에/ 소녀들의 밝은 표정이 갇혀 있다./ 한 떼의 봄비처럼 조잘거리며 내를 건너 숲을 건너/ 밀림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 가벼운 종아리들,/ 문득 발을 막고 제재소가 나무 켜는 톱질소리가 들려온다./ 향긋하다. 눈을 감는다./ 거대한 삼나무 숲 속살들이 톱밥으로 무너져내린다./ 자꼬만 밀림 속에서 휘파람새, 휘파람새가 운다./ 생각이 발통이 되어 축축한 통나무들을 몰고 간다./ 나무 찍는 우리 나라 강릉 크낙새의 빨간 주둥이가 보인다./ 뚝방길 위 버드나무에 하얀 젖니를 뱉고 가는 봄비는 즐겁다./ 아, 들길에 서서 나는 명아주 싹이라도 세어볼 건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 떼의 봄비, 뒷발꿈치가 다 젖는다./ 오늘은 강가에 나가 남풍에 실려 종종걸음 치는 한 떼의 봄비./ 조용한 전별식을 갖고 싶다.//

땅끝에서 / 송수권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 끝/ 빚에 몰린 한 여자가 투신했다// 마을 사람들 횃불을 들고 나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듬해 유채꽃이 피어서야/ 그 여자 이바지 떡짐을 이고 왔다// 암, 쇠똥에 굴러도 이승이 백 번 낫지/ 마을 노인들 저마다 한 소식씩 던졌다// 암, 그렇고말고 죽고 나서야 찍는 발자국이/ 첫 발자국이지!//

후티새 울다 / 송수권

학생들과 점심을 먹고 오는 길/ 동천 냇가에서 혼자 내렸다// 맑은 물 속에 떠오른/ 징검돌들이 반짝반짝 눈부셨다// 어린날처럼 수도없이 뒤꼭지를 밟으며/ 건너 뛰고 건너 왔다// 구두를 벗고 양말을 벗고 맨발을 씻었다// 마른 버찌 나무에서 후티새가 울고 있었다/ 후딱벗어 후딱벗어//

운주사 운(雲住寺 韻) / 송수권

눈 감아도 들리네 천불산 골짜기 쩌렁쩌렁/ 아직도 천 년 세월 살아서 골풀무 치는 소리/ 쇠창날은 돌 속으로 돌 속으로 스미어들어/ 뜨거운 혼 형상을 지으면서 한 송이 꽃으로 피고/ 불꽃을 문 돌가루 비산비야에 자우룩히 떠서/ 망치와 징, 쇠좆메를 들고 쫓겨 온 사람들/ 아 통성(通性)도 없이 통성도 없이/ 이서방이나 김서방 함물댁이나 여산댁들/ 한밤내 모닥불 지피고 내게 이르는 말/ 오금 펴 앉지도 못하고서도 못하는 세월/ 명화적(明火賊)떼나 되라 하네 활빈당이나 되라 하네/ 저 들머리 나자빠진 시무룩한 돌미륵들/ 너는 떨거지떼 말고 구름에 가 살지도 말라 하네/ 이 세상 끝을 지켜선 산꼭대기 와불을 세우라 하네/ 눈 감아도 보이네 피울음 산울음 쩌렁쩌렁/ 발가벗은 채 뜨거운 불 가슴에 품고/ 아직도 살아서 퍼드러지는 골풀무 치는 소리/ 나루 불빛 노를 젓지도 말고 구름 뒤에 숨은 배처럼/ 살라하네//

뻘물 / 송수권

이 질퍽한 뻘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 아니라 밤꽃 흐드러진/ 페로몬 냄새 그보다는 뭉클한/ 이 질퍽한 뻘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야/ 열 몇 살 가슴 두근거리던 때 이야기지만// 들찔레 소복이 피어지던 그 언덕에서/ 나는 비로소 살냄새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여자도 낙지발처럼 앵기는 여자가 좋고/ 그대가 어쩌고 쿡쿡 찌르는 여자가 좋고/ 하여튼 뻘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고소리보단/ 땅을 메다치는 소리가 좋아요// 하늘로는 가지마....../ 하늘로는 가지마....../ 캄캄하게 저물며 뒤늦게 오는 울음/ 그 징 소리가 좋아요/ 저물다가 저물다가 하늘로는 못 가고/ 저승까진 죽어 갔다가/ 밤길에 쏘내기 맞고 찾아드는 계집처럼/ 새벽을 알리며 뒤늦게 오는 소리 좋아요.//

퉁* / 송수권

벌교 참꼬막 집에 갔어요./ 꼬막 정식을 시켰지요./ 꼬막회, 꼬막탕, 꼬막구이, 꼬막전/ 그리고 삶은 꼬막 한 접시가 올라왔어요./ 남도 시인, 손톱으로 잘도 까먹는데/ 저는 젓가락으로 공깃돌 놀이하듯 굴리고만 있었지요./ 제삿날 밤 괴** 꼬막 보듯 하는군! 퉁을 맞았지요./ 손톱이 없으면 밥 퍼먹는 숟가락 몽댕이를/ 참꼬막 똥구멍으로 밀어 넣어 확 비틀래요./ 그래서 저도- 확, 비틀었지요./ 온 얼굴에 뻘물이 튀더라고요./ 그쪽 말로 그 맛 한번 숭악***하더라고요./ 비열한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런데도 남도 시인- 이 맛을 두고 그늘이/ 있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그늘 있는 맛, 그늘 있는 소리, 그늘 있는 삶, 그늘 있는 사람./ 그게 진짜 곰삭은 삶이래요./ 현대시란 책상물림으로 퍼즐게임 하는 거 아니래요./ 그건 고양이가 제삿날 밤 참꼬막을 깔줄 모르니/ 앞발로 어르며 공깃돌놀이 하는 거래요./ 詩도 그늘 있는 詩를 쓰라고 또 퉁을 맞았지요.//
*퉁: 꾸지람. **괴: 고양이. ***숭악한 맛: 깊은 맛.

나팔꽃 /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대역사(大役事) / 송수권

너는 서해 뻘을 적시는 노을 속에/ 서 본 적이 있는가/ 망망 뻘밭 속을 헤집고 바지락을 캐는 여인들/ 한 쪽 귀로는 내소사의 범종 소리를 듣고/ 한 쪽 귀로는 선운사의 쇠북 소리를 듣는다/ 만 권의 책을 쌓아 올렸다는 채석강 절벽/ 파도는 다시 그 만 권의 책을 풀어 흘려/ 뻘밭 위에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 이곳에서 황혼이야말로 대역사를 이루는 시간/ 가슴 뜨거운 불꽃을 사방으로 던져/ 내소사 대웅보전의 넉살문 연꽃 몇 송이도 활짝 만개한다/ 회나무 가지를 치고 오르는 청동까치 한 마리도/ 만다라와 같은 불립문자로 탄다/ 곰소의 뻘강을 건너 소금을 져나르다 머슴 등허리가 되었다는/ 저 소요산 질마재도 마지막 술빛으로 익는다/ 쉬어라 쉬어라 잠시 잠깐/ 해는 수평선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혼자 먹는 밥 / 송수권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되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 / 송수권 

암향부동이란 말/ 함부로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조선 매화 한 그루 뜰에 심어 놓고/ 어제는 어초장 서재를 옮겼다/ 강가에 나가 아직도 시들지 않은/구 절초 몇 송이 꺾어다 창호 문 바르고/ 군불을 지폈다/ 화개동천 언 겨울 빙벽에 땅땅 못을 박고/ 전화를 놓고 우편함을 새로 개설했다/ 허옇게 얼어붙은 강줄기를 내려다 보며/ 이 적막한 시대에 어디에 가서/ 무릎 꿇고 큰절 올려야 하나/ 참매화 향이 그리운 밤/ 뽕짝조 시도 개매화도 작당으로 피는 시절/ 스승도 제자도 갈 곳도 따로 없는 밤/ 뜰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어 놓고/ 암향부동이란 말/ 함부로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뻐꾹새 운다 / 송수권

시도 때도 없이 밤에 뻐꾹새 운다/ 복사꽃 피지 않아도 울고 복사꽃 피어도 운다/ 복사꽃 밭에서 어머니와 함께 밑거름 하는 날은/ 그 환한 꽃그늘로 와서 뻐꾹새가 울었다/ 뻑, 뻐꾹, 뻑, 오빠는 손뻐꾸기로 울었다/ 해마다 복사꽃 피고 져도 소식 없더니/ 요즘은 벽시계 속에 숨어서 울고 문 밖에서도 운다/ 재활용품 수거 청소차가 오는 날은 더 요란하게 운다/ 쿠쿠 밥통 속에서도 뻐꾹새가 운다//

지리산 뻐꾹새 / 송수권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때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 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 중/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름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로 흘러들어/ 남해 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곰소항 / 송수권

자욱하다/ 진창이 된 저 삶들, 물이 썬 다음 저 뻘밭들/ 달빛이 빛나면서 물고랑 하나 가득 채워 흐르면서/ 아픈 상처를 떠올린다 저 봉합선들,/ 이 세상 뻘물이 배지 않은 삶은/ 또 얼마나 싱거운 것이랴/ 큰 소리가 큰 그늘을 이루듯/ 곰소항의 젓갈맛 속에는 내소사의 범종 소리가 스며있다/ 밤배를 타고 뻘강을 건너온 사람들,/ 소금을 뿌리고 왕새우를 굽는 철판에서도/ 그 오그라 붙는 왕새우 수염 속에서도/ 물비린 소리는 살아서/ 자욱하다//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 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한/ 댓잎파리의 맑은 숨소리//

 

아도(啞陶) / 송수권

아도란 무엇이냐/ 질그릇이다/ 인사동 골짜기의 고물상 같은 데 가서 만나보면/ 입은 기다랗게 찢겨져 있고 두 귀는 둥글게/ 구멍이 패어 있는/ 입이 있어도 벙어리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못생긴 우리네의/ 질그릇이다/ 유언비어를 날조하거나/ 겁쟁이 지식인들의 입을 누르는/ 그것은 시어머니의 며느리에게 은밀한 건네는/ 유가풍의 禁書(금서)와 같은 질그릇이다// 사화가 극심했던 시절엔 서울의 아도()/ 짭짤한 재미를 보았고/ 외세가 판을 치던 시대엔/ 주먹만 한 아도를 사들고 관직에서 떨려난 선비들은/ 줄을 이어 낙향했다/ 우리들의 입에 재갈 물리고 귀에 자물쇠 채우는/ 이 희한한 물건은/ 이태조가 서울의 땅기운을 끄기 위해/ 간신배 정도전을 시켜 고안해낸 물건이었다/ 또한 수상기가 오른 입의 뻣세디 뻣센 집 문간엔/ 아도 일백 개를 사서 쌓아두기도 했다// 신라 때 복두장이는/ 하루아침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 도림사 대숲 가에 가서 외치다/ 아무도 듣는 이 없어 복장이 터져 죽었다지만// 나는 오늘 이 도시의 어디선가/ 목을 조르며 도둑고양이처럼 오는 최루탄 가스에/ 재채기 콧물 눈물범벅이 되면서/ 잎 핀 오월의 가로수 밑에 비틀거리면서 비틀거리면서/ 그 시대에서 한 발짝도 더 깨어나지 못한/ 또 하나의 아도가 되어가는 내 모습을 본다./ 아도 아도 아도 아도 아아아아 아도/ 이 땅의 시인이여 만세.//

※ 아도啞陶 : 조선 건국 때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을 시켜 만든 못생긴 질그릇이다. 누군가의 대문간에 하룻밤에 100개를 쌓아놓으면 ‘말조심’ 대상 요시찰인물임을 암시했다.

 


 

송수권(1940~2016) 시인은 전남 고흥군에서 태어나, 순천사범학교와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서 <산문에 기대어>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다. 시집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아도> 동학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들의 땅>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 10시집 <파천무> 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 <신화를 삼킨 섬-흑룡만리> 등이 있으며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 <들꽃 세상(토속꽃)> <여승> 육필 시선집 <초록의 감옥> 3인 시선집 <별 아래 잠든 시인> 민담시선집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 <시를 읽는 아침> <사랑의 몸시학>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 <태산풍류와 섬진강> <남도기행> 음식문화 기행집 <남도의 맛과 멋> <시인 송수권의 풍류 맛 기행> 산문집 <아내의 맨발> <송수권 시 깊이 읽기> <한국 대표시인 101인 시선집> 등이 있다.

문공부예술상, 전남문화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김동리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만물상] 사부곡(思婦曲)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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