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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향 시인

부흐고비 2021. 3. 29. 15:25

구겨진 몸 / 이향


불 피우다 보면
구겨진 종이가 더 잘 탄다
주름살 많은 부채 속, 바람 잡혀 있듯
구겨진 몸에는 통로가 있다
밑바닥까지 굴러본 뒤에야 깊어지는 숨처럼
구석에 쿡, 쳐 박혀봐야
뻑뻑한 등도 굽을 수 있지
그래야 바람을 안을 수 있지
반듯한 종이가 모서리 들이미는 사이
한 뭉치 종이가 불을 먼저 안는다
구겨진다는 것은 바짝 다가선다는 것일까
더 망칠 것 없다는 듯
온 몸으로 불길을 연다

그 얇은 몸으로 불을 살린다

 

밤의 그늘 / 이향

나무는 나무에서 걸어나오고/ 돌은 돌에서 태어난다// 뱀은 다시 허물을 껴입고/ 그늘은 그늘로 돌아온다// 깊고 푸른 심연 속에서/ 흰 그늘을 뿜어올리는/ 검은/ 등불// 낮에 펼쳐둔 두꺼운 책갈피로 밤이 쌓인다// 달의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다가 다시 펼쳐지는/ 밤의/ 정원에서// 멀리 걸어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저 혼자 앉아 있는/ 밤//

희다 / 이향

어딘가에 닿으려는 간절한 손짓/ 펄럭이다 돌아오는 사이/ 이미 내 목덜미를 감고 있다/ 낙타가 모래바람을 건널 때 순한 눈을 가려줄/ 속눈썹 같은,/ 깊은 잠 베개 밑에서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줄/ 손가락 같은, 그 빛에 싸여/ 우리는 이미 가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어쩔 수 없이 몸을 놓아야 할 때/ 가만히 내미는 손/ 초면 같지 않아 오래 들여다보면/ 따라가 보고 싶지만/ 아직은 이 골목 저 골목 당신을 기웃거리는/ 그 빛,//

유리문 안에서 1 / 이향

슬픔이 찾아오지 않은지 오래다/ 두려움이 커지면 창을 만드네/ 늦은 밤 가게들의 문 닫는 소리/ 밤을 뒤지는 눈빛/ 사라진 골목을 짖어대는 개들/ 창은 무얼 찾아 돌아다니는 걸까/ 슬픔이 돌아오지 않은지 오래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창을 만드네/ 점점 부끄러워지는 용서들/ 시들어가는 영혼/ 익숙해져버린 눈동자/ 창으로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아무리 할퀴어도 자국이 생기지 않는 유리문에/ 누군가 바짝 붙어/ 불안에 떨고 있다//

새해 -김보라 작업실 벽에 그려진 푸르고 어린 말에게 / 이향

머리에 장난감 같은 플라스틱 뿔이나 하나 달고/ 나와,/ 뒷발질이나 하고 있다// 짐승의 새끼로 막 태어날 때,/ 어떤 막에 싸여 맨바닥에 툭, 던져질 때,/ 덥고 푸른 김이 금방 식어버릴 때,// 푸들푸들 한기를 털며 겨우 일어서보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어린 말은/ 그저 네발로 버티고 있다// 반쯤은 눈썹에 가려진 눈, 그 눈으로 낯선 그림자가 들어서고, 눈곱이 끼고, 먼지바람이 갈기를 세우겠지// 머지않아/ 흙바닥에 발을 디뎠던 그 순간을 후회하게 될/ 푸르고 어린 말은,//

흘러내리고 있다 / 이향

한 번도 감정에 휘말린 적 없는 벽은 평평하고 반듯하다 그 벽에 누군가 알 수 없는 말을 뱉어낸 뒤로 벽은 더 단단해졌다 앞으로 닥쳐올 어떤 일에 좌절이나 분노가 없을 것 같지만 언젠가 허물어져 내릴 수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더러는 벽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먹질도 해 보지 못 한 채 결국 오줌도 갈기지 않은 채 침만 삼키며 당해 준 적 있다 벽은 한계에 부딪칠 때면 담쟁이를 감아올리거나 구멍을 뚫어 자신을 달래보려고 안간힘을 썼는지 모른다 어느 날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뒤엉킨 눈빛으로 이제 그만 주저앉으려는 너를 위해, 어떤 순간을 또 다른 순간으로 돌려보내 주고 싶은지 벽은 이미 흘러내리고 있다//

산수유 / 이향

황소개구리가 뱀을 삼킨다/ 눈 껌뻑거릴 때마다 뱀이 조금씩 몸속으로 들어간다/ 밖에서 틀었던 똬리/ 안이라고 못 틀겠는가마는,/ 그 긴 것이 들어갈 때/ 황소개구리 눈은 더 튀어나온다// 어쩌다 남의 눈으로 들어간 저 괴상한 울음이/ 노랗게 터지는 밤이다//

소 / 이향

잘 해보겠다고 제 혀로 제 사타구니를/ 핥을 때도 있다//


 

이향 시인
1964년 경북 감포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희다』 『침묵이 침묵에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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