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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해바라기 씨앗 / 현정희

부흐고비 2021. 3. 29. 09:05

해바라기 씨앗을 소쿠리에 담아 햇볕에 말리고 있다.

지난 오월이었다. 선흘꽃밭에 꽃구경을 갔더니 동문회에서 사랑의 꽃씨 나눠주기 행사를 하고 있었다. 행사를 담당하고 있던 한 친구가 엽서를 건네주면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렴. 꽃씨를 보내줄게. 아담한 해바라기야.”라고 말했다.
작은 해바라기이면 정원에 심어도 예쁘겠다 싶어 남편한테 편지를 썼다.

“현승 아빠, 지난한 세월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오늘, 꽃밭에서 꽃들을 감상하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해요. 여생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히 살았으면 좋겠어요.”

며칠 후에 선흘꽃밭에서 보내온 엽서에는 해바라기 씨앗 일곱 개가 들어있었다. 무표정한 남편도 엽서를 펼쳐보며 미소를 짓는다. 해바라기는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풀꽃이다. 그 씨앗을 앞마당에 심었더니 일주일쯤 지나자, 두 개의 해바라기 싹이 돋아났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줄 때마다 쑥쑥 자라나 내 눈높이만큼 성장했다.

7월 어느 날 아침에 살며시 피어난 보름달만 한 크기의 해바라기 두 송이가 내 마음을 반짝이게 했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부모님의 얼굴을 닮았다고나 할까. 관세음보살의 미소일까. 나 혼자 보기가 아까워서 해바라기 꽃을 스마트폰에 담아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꽃의 광채가 위안을 주었는지 꽃씨를 얻고 싶어 하는 마음을 보내왔다.

어릴 때 시골길이나 마당에 피어났던 해바라기는 키가 2미터 이상이나 되는 커다란 꽃이었다. 황금빛 기운이 감도는 따스한 분위기가 그냥 좋았다. 하지만 차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시골길에서 해바라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해바라기 이야기를 보면, 해신의 딸인 물의 요정 구리자와 류고시아가 연못에 살고 있었다. 동이 트니 태양의 신 아폴로가 황금 마차를 타고 빛을 발하면서 나타나자, 그 황홀한 빛에 두 자매는 넋을 잃었다. 두 자매는 아폴로를 사모하게 되었다. 구리자는 오직 아폴로의 사랑을 갈망하며 오랜 시간 한 곳에 서 있었기 때문에 발이 땅속에 묻혀 한 포기 꽃으로 변해버린 꽃이 해바라기라고 전해온다.

기다림의 꽃말을 지닌 해바라기는 중국에서 불리는 향일규向日葵를 번역한 이름이다. 해바라기는 해를 따라 얼굴을 돌리는 줄 알았다. 내 정원의 해바라기는 동쪽을 향해 피어났지만, 해가 돌아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해바라기가 피어나자 정원에 꿀벌과 나비도 다시 날아오고, 새들도 찾아와 청아한 목소리로 지저귄다. 작은딸도 출근하면서 해바라기와 눈 맞춤하며 고운 미소를 짓는다. 해바라기는 나에게 훈훈하고 상큼한 미소로 색다른 기쁨을 안겨주었다. 잃었던 웃음을 다시 찾았다.

한 달쯤 지났을까. 꽃잎은 차츰 시들어가고 해바라기 씨앗이 촘촘히 박힌 모습이 되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햇빛을 저장하며 씨앗은 여물어갔다.

9월 맑은 어느 날, 나는 잘 익은 해바라기 두 송이에 담긴 씨앗을 거두었다. 해바라기 씨앗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태양 빛깔을 모두 간직하고 있어서일까. 모양과 크기는 벼의 씨앗처럼 생겼으나 검정색이다. 씨앗마다 들어있을 소중한 생명, 하늘이 내려준 귀한 선물로 여겼다. 해바라기는 작은 씨앗들을 남기고 일생을 마감했지만, 그 자태는 내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희망을 안겨 주었다.

세상의 사람과 사건들은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된다. 대부분 우연한 인연들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 버린다. 그중에서 내 삶의 울타리로 들어와 필연이 되어 한 생을 함께하는 특별한 인연들은 얼마나 반갑고 소중한가.

해바라기 씨앗은 선흘꽃밭에서 보내온 우연한 인연이지만, 필연이 되어 많은 씨앗을 남겨주었다. 우연에서 시작하여 필연이 되고 존재 나름의 꽃과 씨앗, 열매를 맺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이어가는 것인가. 내 정원에 사는 용월이는 별꽃, 달맞이꽃은 달꽃, 해바라기는 태양꽃으로 피어난 것일까. 신비로운 세상이다.

봄이 오면 매화, 수선화, 천리향, 자목련, 작약이 피고지면, 장미, 용월이와 백합, 능소화, 봉숭아와 해바라기가 제 나름의 꽃을 피운다. 사시사철 피어난 꽃향기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구원의 손길이 아닐까.

유난히 더운 올여름, 내 뜰에 처음 피어난 해바라기는 나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주는 듯했다.

“폭염에도 절망하지 않아. 더위도 때가 되면 물러나지. 황금빛으로 피어난 나도 한순간일 뿐이야. 산다는 것은 이별 연습을 반복하는 것이지. 그래도 힘을 길러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해ⵈ.”

셈에 약한 나인지라 정신을 가다듬고 묵상하며, 며칠간 햇볕에 잘 말린 검정 씨앗을 열 개씩 세면서 봉지에 담았다. 백 개의 봉지가 나왔다. 두 송이의 해바라기가 나에게 천 개의 씨앗을 남기다니 놀라운 일이다.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선물해야겠다.

해바라기 씨앗은 묵묵히 봄을 기다리고 나는 여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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