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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첫 새 손님 / 최원현

부흐고비 2021. 3. 29. 13:15

새 손님이 오신단다. 아내는 집안청소를 몇 번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먼지 하나라도 있을까 털고 훔치고 닦기를 수없이 하는 아내의 이마에 송글송글 솟은 땀방울이 오실 손님의 눈망울인양 빛난다.

조실부모한 내게서 딸과 아들 두 생명이 태어났다. 그 딸과 아들이 결혼해서 딸 내외는 남미 파라과이 선교사로, 아들내외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딸아이가 임신을 해서 만 1년 만에 귀국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그 새 손님이 내 집 첫 손님으로 온단다. 첫 손주, 첫 손녀다.

처음이란 말에선 새벽이슬 같은 청초함과 순결함 냄새가 난다. 맛을 보면 무미할 것 같지만 듣는 것,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뭔가 좋은 일이 마구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으로 온 몸이 긴장된다.

딸아이가 가있던 파라과이는 우리나라에서 농업이민을 갔던 풍요로운 나라였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의 1970년대 삶의 환경이란다. 해서 딸은 만삭의 몸으로 칠레와 캐나다를 거쳐 귀국을 했고 이어 딸을 순산했다. 내 첫 손주인 그 아기가 곧 내 집으로 온다.

그는 이제 우리 집의 왕이 될 게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게다. 우리 집의 새 손님, 첫 손님이 온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설렘이지만 딸아이의 결혼은 낮잠에 꾼 짧은 꿈처럼 아쉽고 긴박한 중에도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몇 번이나 잠을 깼는지 모르겠다. 29일, 한 달도 안 되는 29일만에 딸아이가 결혼을 한다. 퇴근하여 집에 오니 딸아이가 얘기할 게 있단다. 한껏 긴장이 되었다.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할 게 있다고 한 적이 없는 아이여서 뭘까 더욱 궁금했다. 그러나 아이는 아주 쉽게 남미 파라과이로 선교를 떠나겠다고 했다. 언제냐고 했더니 한 달 후란다. 일단 제동을 건답시고 그럼 결혼도 안 하고 갈 거냐고 했더니 한 달 후 떠난다면서 결혼도 하고 가겠단다. 사람도 있단다. 참으로 마른하늘의 벼락이었다. 결혼이 그렇게 쉬운 거면 왜 이날까지 속을 썩였느냐고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기가 막히다’는 게 이런 때인가 보다.

상대는 6년간 같이 봉사를 하던 친구인데 결혼을 생각하며 사귄 것은 6개월쯤 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소아심장병 어린이 돕기 마라톤대회 때 내가 갈 수 없어 누구 같이 갈사람 있으면 가라고 했더니 좋아라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친구란다. 그 친구와 결혼을 하고 같이 파라과이 선교사로 떠나기로 했단다.

딸아이의 결혼식 전날 밤 나는 수없이 잠을 깼다. 아니 잠을 들지 못했다. 품안에 있을 때나 자식이라 했지만 가까이서 결혼을 하여 살고 제 몫의 삶의 자리를 챙겨가는 것도 아쉬운 일인데 지구 반대편 나라에 선교사로 간다니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다. 그렇게 결혼식을 하고 잠깐의 훈련과정을 마친 후 몸만 가지고 떠나버렸던 딸 내외가 출산을 위해 귀국했고 아이를 낳은 것이다.

드디어 손님을 모시러 가게 되었다. 이미 몇 번 눈인사를 한 바 있지만 아이의 모습에 나도 아내도 정신을 다 빼앗기고 있었다. 내 살붙이, 딸과 아들 남매를 낳고 키울 적엔 너무 힘들어 키우는 재미 자라는 재미를 느낄 여유가 없었지만 내 피붙이요 살붙이의 첫 번째 열매인 녀석을 보니 심장이 멈출 것만 같다.

불면 꺼져버릴 것 같고 만지면 바스라질 것 같은 여린 생명체 내 첫 손주는 그렇게 내 집 가장 귀한 손님으로 모셔졌다. 녀석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들여다보고 바시시 웃는 작은 입술을 내려다보면서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을 맘껏 누렸다.

그렇게 내 첫 손주는 새 손님으로 와서 바로 왕처럼 군림했고 우린 기꺼이 그에게 순복했고, 얼마 지나 자기 집을 얻어 나갔지만 가까운 곳이어서 자주 찾아가고 찾아온다. 어느새 어린이 집엘 다닌다. 동생도 보았다. 그래도 녀석이 집에 오면 여전히 새 손님이고 첫 손님이고 첫 손주로의 지위와 권위를 맘껏 행사하고 누린다.

처음, 첫이라는 이 살폿한 느낌의 단어 하나가 주는 느낌과 감동과 의미는 비단 첫 손주만은 아니리라. 내가 가졌던 첫 직장의 설렘도, 내가 작가로 등단하여 첫 작품을 발표 했을 때의 떨림도, 처음 문학상을 받았을 때의 감격도 바로 그 처음, ‘첫’이라는 느낌과 의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사는 날 매일매일도 그렇게 남은 일생의 첫날을 맞는 감격으로 살아감이 어떨까.

첫 손녀의 이름은 박하다. 하가 지금쯤 어린이집에서 끝날 때이다. 오늘은 녀석을 보러 어린이집으로 가야겠다. 이 또한 어린이집에서는 첫 만남이 되겠다. 나를 발견하면 ‘하부지!’ 하고 놀라며 반가워 입이 벌어질 녀석을 생각하니 내 가슴이 더 설렌다. 첫 손주에 대한 내 사랑이 너무 크고 깊은 것인가. 병원에서 집으로 오던 그 첫날의 감격과 기쁨의 기억이 또 되살아난다. 사랑은 그렇게 늘 가슴으로 오는가 보다. 첫 만남의 감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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