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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남수 시인

부흐고비 2021. 3. 30. 15:16

 

'서글픈 암유2' 중에서 / 박남수

 

어제 밤,꿈에
한 노승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모두 뱉아 버려,속이
텅 빌 때까지

이 말씀은 내가 몇 번이고 들은
말씀 같기도 하고, 난생 처음 듣는
말씀 같기도 했다.아마 무슨 經이라는데
있는 것이겠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서글픈 暗喩 / 박남수

1// 벌레의 어떤 것은/ 누에고치를 만들고 죽는다./ 다른 어떤 벌레는/ 땅속에 구멍을 파고 빈사상태로/ 한겨울을 보낸다.// 2// 어디서나 그 억센 손이 불쑥 튀어나와. 느닷없이 덮치면 몸통이 터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몽땅 으스러지면/ 결국 쓰레기 속에 던져져 썩는다.// 벌레들은 더듬이를 세우고/ 외계를 경계하며서,(울지도 못하고/ 성대가 퇴화하도록) 숨을 죽이고 산다.// 벌레의 어떤 것은/ 나무등걸에 파고들어/ 나무 행세를 한다.//

잉태 / 박남수

감탕을 먹고/ 탄생하는 연꽃으 아기가/ 이끼 낀 연못에/ 웃음을 띄운다.// 지금 한창/ 별을 빨고 있는/ 이승의 뒷녘에서는/외롭게 떨어져 가는// 후일의 후광/ 구천에 뿜는 놀의 핵심에서/ 부신 상이 타면/ 나는/ 어둠에 연소하는/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훈련 / 박남수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초롱불 / 박남수

별하나 보이지 않은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조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따라 초롱불은 어디를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상한 곳을 지나/ 묺어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는 초롱불.//

마을 / 박남수

외로운 마을이/ 나른나른 오수(午睡)에 조을고// 넓은 마음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 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대룩대룩 겁을 삼킨다.//

호루라기 / 박남수

1.// 호루라기는, 가끔/ 나의 걸음을 정지시킨다./ 호루라기는, 가끔/ 권력이 되어/ 나의 걸음을 정지시키는/ 어쩔 수 없는 폭군이 된다.// 2.// 호루라기가 들린다./ 찔끔 발걸음이 굳어져, 나는/ 되돌아보았지만/ 이번에는 그 권력이 없었다./ 다만 예닐곱 살의 동심이/ 뛰놀고 있을 뿐이었다.// 속는 일이 이렇게 통쾌하기는/ 처음 되는 일이다.//

아침 이미지 / 박남수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풍광 속에서 / 박남수

낳고 자라서 죽음으로 탄생되는 것은/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가장 순수한 흙이되어/ 태양이 쪼이고 바람이/ 부는 풍광 속에서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이 되어/ 산다. 영원,영원을 산다//

종소리 / 박남수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밤길 / 박남수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음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셋 외롭고나// 이윽고 훌닥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뚝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4월 비빔밥 / 박남수

햇살 한 줌 주세요/ 새순도 몇 잎 넣어주세요/ 바람 잔잔한 오후 한 큰 술에/ 산목련 향은 두 방울만/ 새들의 합창을 실은 아기병아리 걸음은 열 걸음이 좋겠어요/ 수줍은 아랫마을 순이 생각을 듬뿍 넣을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고명으로 얹어주세요//

맨하탄의 갈매기 / 박남수

맨하탄 어물시장에 날아드는/ 갈매기 끼룩끼룩 울면서 서럽게/ 서럽게 날고 있는 핫슨 강의 갈매기여/ 고층건물 사이를 길 잘못들은// 갈매기 부산 포구에서 끼룩 끼룩 서럽게/ 서럽게 울던 갈매기여/ 눈물 참을 것 없이 두보처럼/ 두보처럼 난세를 울자// 슬픈 비중의 세월을 끼룩끼룩 울며/ 남포면 어떻고 다대포면 어떻고/ 핫슨 강변이면 어떠냐 날이 차면/ 플로리다 쯤 플로리다 쯤 어느/ 비치를 날면서 세월을 보내자구나//

서쪽, 그 실은 동쪽 / 박남수

나의 전모를, 지금/ 내 스스로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어둠 속에 묻혀/ 조금은 그을음까지 앉았을 나의 전모를// 산타 모니카 해안에 앉아/ 멀리 서역을 바라보면서/ 동방의 사람, 나 朴南秀는/ 여기서는 서쪽, 그 실은 해뜨는 동쪽/ 조국을 생각한다.// 조국의 사람들을, 그 가슴에/ 물결치는 애련의 갈매기를, 그 울음을./ 그의 서러운 몸놀림을./ 아, 피맺힌 분단을.//

새의 암장(暗葬) 2 / 박남수

沈默을 터뜨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새들은 떼를 지어/ 純金의 깃을 치며 멀어져 갔다.// 물낯에 그려진 무수한 동그라미가/ 하나씩 虛無로 꺼져 갔다.// 붉은 피가 풀어져/ 다시 푸르러지는 一瞬을/ 누구도 보지 못하였지만, 다만/ 어디선가 아픈 純叫가 검게 떨어져,// 갈대밭이 수런거리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沈默을/ 완전히 뒤엎고, 하늘의 漂流物이 江畔을/ 피로 적시는 것을 보았으리라.// 모든 危驗을 잊어버린, 새는/ 죽음의 粘土위에 떨어져/ 스스로를 한 幅의 版畵로 찍고 있었다.//

새 / 박남수

새 壹// 1// 하늘에 깔아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쭉지에 파묻고/ 따스한 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ㅡ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새 貳.// 이른녘에/ 넘어오는 햇살의 열의(熱意)를/ 차고,/ 산탄(散彈)처럼 뿌려지는 새들은/ 아침 놀에/ 황금의 가루가 부신 해체(解體)./ 머언 기억에/ 투기(投企)된 순수의 그림자.//
새 參.// 나의 內部에도/ 몇 마리의 새가 산다./ 은유(隱喩)의 새가 아니라,/ 기왓골을/ 쫑,/ 쫑,/ 쫑,/ 옮아 앉는/ 실재(實在)의 새가 살고 있다./ 새가 뜰로 나리어/ 모이를 쫓든가,/ 나무 가지에 앉든가,/ 하늘로 날든가,// 새의 意思를/ 죽이지 않으면,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족히 산다.//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쫑, 쫑, 쫑,/ 기왓골을 옮아 앉으며/ 조그만 自然이 된다.//
새 四.// 바람에 갈대가 우는/ 발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포인타는 코를 저으며/ 갈밭을 허비다가 코를 들었다./ 코의 방향으로 뚫린/ 포수(砲手)의 총구,/ 새는 투망(投網)처럼 하늘에 뿌려지고,/ 펑,/ 울린 맑은 공기의 구멍./ 구멍에서 그려나가는 파동의 끝에/ 날개는 너울 너울 기울며, 떨어져간/ 한 마리의 새.// 펑,/ 소리의 에코./ 새들의 Vie는/ 진공지대에 울린 총소리 속에 있었다.// 갈밭이 갑자기 물결치더니/ 머리를 내어민/ 포인타의 입에 물리인/ 피 묻은 총소리/ 키가 넘는 갈대가 우는/ 발 밑으로는/ 역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손 / 박남수

물상이 떨어지는 순간,/ 휘뚝, 손은 기울며/ 허공에서 기댈 데가 없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손은 소유하고/ 또 놓쳐 왔을까.// 잠깐씩 가져 보는/ 허무의 체적(體積).// 그래서 손은 노하면/ 주먹이 된다./ 주먹이 풀리면/ 손바닥을 맞부비는/ 따가운 기운이 된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손은/ 빈 짓만 되풀어 왔을까.// 손이/ 이윽고 확신한 것은,/ 역시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박남수(朴南秀, 1918~1994)

1918년 평안남도 평양시 진향리 출생

1933년 <조선문단>에 희곡 [기생촌]이 당선

1939년  <문장>에 [마을], [초롱불], [밤길]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41년 평양 숭인 상업 학교를 거쳐 일본 츄우오(中央) 대학 법학부 졸업

1954년 <문학예술> 편집위원

1957년 조지훈, 유치환 등과 함께 한국 시인 협회 창립

1957년 제5회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1959년 <사상계> 상임 편집위원

1973년 한양대 문리대 강사 역임 및 도미(渡美)

1994년 사망 시집 : <초롱불>(1940), <갈매기 소묘>(1958), <신(神)의 쓰레기>(1964), <새의 암장(暗葬)>(1970), <사슴의 관(冠)>(1981), <서쪽, 그 실은 동쪽>(1992) <그리고 그 이후>(1993), <소로(小路)>(1994)

 

 

박남수 시인

박남수 시인 생몰1918년 5월 3일 ~ 1994년 9월 17일 (향년 76세) 데뷔1932년 조선중앙일보 시 '삶의 요로'수상1993 공초문학상 외 1건경력1973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외 4건----------------------------------

caf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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