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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최영철 시인

부흐고비 2021. 4. 1. 13:41

우짜노 / 최영철

어, 비 오네
자꾸 비 오면
꽃들은 우째 숨쉬노

젖은 눈 말리지 못해
퉁퉁 부어오른 잎
자꾸 천둥 번개 치면
새들은 우째 날겠노

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
흥건히 고인 흙탕물
몸 간지러운 햇빛
우째 기지개 펴겠노

공 차기하던 아이들 숨고
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
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
우째 먼길 가겠노

호박이 굴러들어온 날 / 최영철

어느 날 느닷없이 내일이 없어진다 해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해도/ 괜찮아 다 괜찮아 첫날 같은 마지막 날/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날/ 밥은 두어 숟갈만 먹어야지/ 먹고 또 먹고 뺏어먹기도 했으니/ 하늘은 두어 차례만 바라봐야지/ 자꾸 바라볼 면목이 더는 없으니/ 이제 막 당도한 저 방랑자 개하고나 놀아야지/ 일생을 바쳐 나에게 왔으니 그건 당연한 일/ 그러고도 애달프지 않은 너의 발꿈치나 바라봐야지/ 더 못 기다리고 나온 그때 그 찻집/ 아무짝에 쓸모없는 낙서나 끄적여야지/ 남은 생의 절반, 한나절을 허송해야지/ 이젠 네가 내일이면 꼭 온다고 해도/ 가슴 설렐 일 없으니 좋아라/ 다시는 오지 않을 어둔 밤이 코앞이니 좋아라/ 뒤척이며 잠 못 들 일 없으니 좋아라/ 하루가 눈 깜박할 사이 가버리는 일/ 더 이상 무뚝뚝한 밤은 없을 것이니/ 오늘 같은 내일이 없을 것이니/ 아이 좋아라 참 좋아라//

어머니 연잎 / 최영철

못 가득 퍼져간 연잎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이 못 가득 꽃을 피우려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제 자태를 뽐내기 위해/ 하늘 가득 내리는 햇살 혼자 받아먹고 있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연잎은 위로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아래로 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직 덜 자라 위태위태해 보이는 올챙이 물방게 같은 것들/ 가만가만 덮어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위로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고 서툰 대가리 내미는 것들/ 아래로 안으로 꾹꾹 눌러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동란 때 그러하셨듯/ 산에서 내려온 아들놈 마루바닥 아래 숨겨두고/ 그 위에 눌러앉아 방망이질 하시던 앙다물던/ 모진 입술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그것들의 머리맡에서/ 꼬박 밤을 밝히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쑥국 -아내에게 / 최영철

첨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다음 생에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그대 꼬드겨/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때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굴쭈굴한 배를 안고/ 그래도 그래도/ 골목 저 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연장론 / 최영철

우리가 잠시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불안한 그대들의 모서리와 모서리는 삐걱거리며 어긋난다/ 우리가 세상 어딘가에 녹슬고 있을 때/ 분분한 의견으로 그대들은 갈라서고/ 벌어진 틈새로 굳은 만남은 빠져나간다/ 우리가 잠시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그 누가 일어나 두드릴 것인가/ 무시로 상심하는 그대들을 아프게 다짐해줄 것인가// 그러나 더불어 나아갈 수 없다면/ 어쩌랴 알지 못할 근원으로 한쪽이 시들고/ 오늘의 완강한 지탱을 위하여 결별하여야 할 때/ 팽팽한 먹줄 당겨 가늠해본다/ 톱날이 지나가는 연장선 위에/ 천진하게 엎드려 숨죽인 그대들 중/ 남아야 할 것과 잘려져 혼자 누울 것은/ 무슨 잣대로 겨누어 분별해야 하는가를// 또다시 헤어지고 만날 것을 빤히 알면서/ 단호한 못질로 쾅쾅 그리움을 결박할 수는 없다/ 언제라도 피곤한 몸 느슨히 풀어 다리 뻗을 수 있게/ 一字나 十字로 따로 떨어져/ 스스로 바라보는 내일이 있기를/ 수없이 죄었다가 또 헤쳐놓을 때/ 그때마다 제각기로 앉아 있는 그대들을 바라보며//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 프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강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헤쳐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세울 것인가//

날아가는 메기 / 최영철

끓는 냄비의 뚜껑을 열자/ 다 익어 날개를 단 메기 한 마리 날아올랐다// 고마워요 당신. 나 물고기였을 때 날아보려고 그렇게 파닥대고 솟구친 것 아시지요. 이렇게 날 수 있으리라고는 훨훨 승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어요. 그저 저 날렵한 꼬마물떼새처럼 날아올랐으면 날아올랐으면 좋겠다고 시늉이나 하며 자꾸 물 박차고 훌쩍 훌쩍 위로 솟구쳤지요. 그런데 이거였군요. 이렇게 익어 흐물흐물해져서야 끓어 넘쳐서야 날 수 있는 거군요. 몸 속 모든 기운 우려내 보내 버리고 나서야 날개가 돋는 거군요. 그래야 한없이 부드럽고 가벼워지는 거군요. 여기 떨구고 가는 살점들을 드세요. 큰 입 긴 꼬리지느러미 두고 갈께요. 고마워요 당신// 이거였군요 이래야 날 수 있는 거군요/ 여기 남기고 가는 아린 가시가/ 제 발목을 붙든 것이었군요//

고추 / 최영철

수영장 탈의실에 줄 서서 삐약삐약 옷 벗는 아이들, 선생님이 시켜준 대로 벗은 옷 차곡차곡 바구니에 담는 아이들, 작은 고추 다 드러낸 아이들, 살색 그대로인 고추, 얼굴색 엉덩이색 그대로인 고추,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고추, 재잘대는 말소리도 살색, 쿨럭쿨럭 기침소리도 살색, 벌써부터 살색이 다 날아가고 없는 내 고추, 무슨 일인지 시커멓게 탄 내 고추//

바보 고기 / 최영철

낚시에 걸린 바닷고기/ 죽어도 따라오지 않으려고 파닥거리는데/ 민물고기 당기면 순하게 스윽/ 따라온다는 약수터 중늙은이 말에/ 착한 민물고기/ 감탄을 내지를 뻔했네// 바보 민물고기// 마음 약해/ 아무 소리 못하는 내 꼴이나/ 유혹하는 대로 끌려오는 네 꼴이나// 파닥거려야지 갈갈이//

그리운 지상 / 최영철

삶은 때로 떠 있거나 가라앉기만 하는 것/ 나 이미 튼튼한 대지에 발 붙여 본 지 오래/ 지상이여 안녕한가 밥 푸는 김 모락모락/ 새벽종 스피커 희망의 노래 온누리/ 기찻길 옆 나란히 선 굴뚝 더운 기적 울리는가/ 삶은 너무 치솟거나 곤두박질하는 것/ 나 이미 고요하게 내리는 햇살 쬔 지 오래/ 봄꽃들 향기 날리기 좋게 바람 솔솔/ 평균대 뛰어 넘어가는 아이들 함성/ 이슬 뚝뚝 맺히는 처녀들 허벅지 깔깔대느냐/ 나 이미 사랑을 잊고 산 지 오래/ 삶은 추하도록 환하거나 무료한 것/ 엎드린 손바닥 위에 동전/ 도시락 딸랑거리며 오글오글 모여 기다리는/ 너희 식솔에게 돌아가고 있느냐/ 삶은 너무 숭고하거나 바닥이 뻔한 것/ 해는 다시 제자리로 스러지고/ 헤어진 자리 얼굴 파묻어 울고 있느냐/ 삶은 너무 내빼거나 금방 주저앉아 버린 것/ 잘 있느냐 지상이여 잘 있느냐.//

홍매화 겨울나기 / 최영철

그해 겨울 유배 가던 당신이 잠시 바라본 홍매화/ 흙 있다고 물 있다고 아무데나 막 피는 게 아니라/ 전라도 구례 땅 화엄사 마당에만 핀다고 하는데/ 대웅전 비로자나불 봐야 뿌리를 내린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막 몸을 부린 것 같애/ 그때 당신이 한겨울 홍매화 가지 어루만지며 뭐라고 하셨는지/ 따뜻한 햇살 내린다고 단비 적신다고 아무데나 제 속내 보이지 않는다는데/ 꽃만 피었다 갈 뿐 열매 같은 것은 맺을 생각도 않는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내 알몸 다 보여주고 온 것 같애/ 매화 한 떨기가 알아 버린 육체의 경지를/ 나 이렇게 오래 더러워졌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같애/ 수많은 잎 매달고 언제까지 무성해지려는 나,/ 열매 맺지 않으려고 잎 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워 올리는/ 홍매화 겨울나기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애.//

서해까지 / 최영철

늦은 아침 깨우며 이부자리 들치는/ 머리 위의 해/ 오늘은 저걸 따서 구워 먹는 것이다/ 반 접어 그 사이 눌러두면/ 노릇노릇 저물어 갈 붉은 뺨/ 치즈나 설탕 같은 거 바르지 말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 변산반도 곰소쯤/ 잘 익은 붉은 해 한 덩이 호호 불어/ 막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소금밭이 늘어뜨린 혓바닥이 먼저 와/ 꼴딱 삼킨다/ 물이 다 달아난 까실한 오후/ 바다가 바닥을 칠 때까지/ 중참 한번 내오지 않은 하늘이/ 난 모르는 일이라고/ 문을 쾅 닫고 간다.//

기도 / 최영철

미사 시간에 한 아이가/ 미사 볼 때 제발 졸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내 조는 사이에 하느님이 다녀가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을 빌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그저께 집나간 반달이가/ 부디 좋은 주인 만나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구박받다 울며 돌아왔을 때/ 집 비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빌었다/ 저 아이에 비하면 너무 큰 욕심인 것 같아/ 제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잡아먹히더라도 개소주 같은 건 안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최영철 시인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
1984년 무크지 『지평』 『현실시각』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연장론> 당선
시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가족사진》《홀로 가는 맹인 악사》《야성은 빛나다》《일광욕하는 가구》《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그림자 호수》《호루라기》《찔러본다》《금정산을 보냈다》《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
산문집 《우리 앞에 문이 있다》《나들이 부산》《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시의 향기를 찾아서》 동화 《나비야 청산 가자》
제2회 백석문학상, 제10회 「최계락문학상」, 제6회 「이형기문학상」수상
「외국문학」편집장 역임, 문화비평지「관점 21 게릴라」편집위원 역임, 부산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조용호의 나마스테!] 시인 최영철·소설가 조명숙 부부

“상대 작품에 대해 날선 감시… 균형감각 잃지 않아 좋아요” [조용호의 나마스테!] 시인 최영철·소설가 조명숙 부부 낙동강변 도요마을에 가랑비가 내렸다. 삼랑진역에 내렸을 때부터 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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