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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하수下手 / 류경희

부흐고비 2021. 3. 30. 08:35

명월 언니는 대모의 풍모가 넘치는 사람이다. 가냘픈 여인 두 명은 너끈히 이길 몸무게에서 넉넉한 마음 씀씀이, 그리고 술이라도 한잔하면 걸걸한 음색으로 어느 기성 가수 못지않게 뽑아내는 노래 솜씨까지 어느 한 부분도 뒤지는 점이 없었다. 듬직한 풍모의 언니는 어느 자리에서든 빛이 났다.

언니의 여러 가지 장점 중 특히 빼어난 특기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입담이다. 한 날, 모임이 있었는데 구성원의 절반이 처음 대면을 한 자리라 괜히 서먹해서 입이 마르는 분위기였다. 돌아가며 간단한 자기소개가 마무리되자 사교적인 김교수가 척 봐도 리더다 싶은 언니에게 덕담을 건넸다.

“여기서 미인을 뵙는 군요.”
다소 손발이 오그라드는 칭찬에 언니가 파안대소를 했다.

“여기서 평생 두 번째로 외모 칭찬을 듣네요.”

언니의 웃음에 졸개 격인 우리는 덩달아 웃음을 흘리며 공손히 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가 대여섯 살 때였는데요. 우리 집에 돈을 빌리러 온 먼 동네 아저씨가 저를 한참 살피더니 ‘이런 애가 크면 좀 낫다’고 했었거든요.”

그 말이 이제껏 들은 미모에 대한 유일한 칭찬이었다는 말에 우리는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쉬운 부탁을 하러 온 터라 뭐라도 칭찬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 형편 딱한 아저씨의 순박한 말투를 상상하며 대책 없이 터진 웃음이 진정되자 언니는 김 교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제 모습이 어떤 지는 제가 잘 알고 있으니 너무 애쓰지 마세요.”

자신을 희화하여 주위를 즐겁게 만드는 재주는 배워서 익혀지는 게 아니다.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그녀의 높은 자존감을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부러운 장점을 타고 난 사람이 더 있다. 정이 넘쳐 가끔 오지랖으로 지청구를 먹기도 하는 푸근한 영희 씨가 그렇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영희 씨가 문학인들의 모임에 동석했을 때의 이야기다. 전국에서 모인 문인 수십 명이 점심을 나누게 됐는데 반주로 동동주가 곁들여 졌다. 술잔들이 오고 가며 분위기가 무르익자 연배 지긋한 남 시인이 앞 좌석에 자리한 젊은 여 시인에게 잔을 권했다. 그런데 빈틈없는 매무새의 단정한 그녀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며 정색을 했다.

약간 무안해진 남 시인이 간청하듯 다시 잔을 내밀었다.

“조금만 드리겠습니다.”

여 시인은 재차 잔을 권하는 남 시인에게 낮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불쾌함을 표했다.

“자꾸 이러시면 저를 희롱하시는 건데요.”

화기애애한 친선의 자리가 여인의 항의로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남 시인의 얼굴빛이 그의 손에 들인 퇴주잔 뚝배기 빛으로 변한 것을 보며 이 난처한 상황을 어찌 수습해야 하나 들숨 날숨이 편치 않았다.

그때 말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영희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그 잔 제가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너무나 당황해서 말문조차 굳어있던 남 시인이 무슨 영문인가 싶어 흔들리는 표정으로 영희 씨를 바라보았다.

“저는 인물이 시원찮아서인지 어딜 가나 술을 권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퇴주잔이라도 받아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영희 씨의 해맑은 말에 남 시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영희 씨가 잔을 받아 동동주로 입술을 적시자 박수와 환호가 폭죽처럼 터졌다. 이렇게 품이 넓은 사람에게 반하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목석이리라.

링컨은 자신이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이 자신을 웃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늘 긴장 속에 살았던 자신이 웃지 않았더라면 이미 죽은 지 오래였을 것이란 링컨의 말이 가슴에 닿는다. 따뜻한 웃음을 주는 이런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다. 감탄하며 웃는 것까지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냥 하수(下手)임을 인정하며 살련다. 하 하 하.

 


류경희 수필가는

 『월간문학』 수필 등단(1995).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회원. 에세이문학회원.

수상 : 연암문학상 본상, 청주시 문학상.

수필집 :  『그대 안의 blue』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향기』  『소리 없이 우는 나무』  『즐거운 어록』  『빛나는 유리반지 하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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