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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서정춘 시인

부흐고비 2021. 12. 23. 08:34

 

낙화시절 / 서정춘

누군가가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문밖 세상 나온 기념으로
사진이나 한 방 찍고 가자 해
사진을 찍다가 끽다거를 생각했다
그 순간의 빈틈에
카메라의 셔터가 터지고
나도 터진다
빈몸 터진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종소리 / 서정춘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 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休 / 서정춘

가을걷이 하다 말고 앉아 쉬는데/ 늦잠자리 한 마리가 인정처럼/ 어깨 위로 날아와 앉습니다/ 꼼짝 말고 더 앉아 쉬어 보잔 듯//

파묘 / 서정춘

아버지 삽 들어갑니다/ 무구장이 다 된 아버지의 무덤을 열었다/ 설다선 이빨의 두개골이 드러나고/ 히잉! 말 울음소리가 이명처럼 귓전을 스쳤다/ 어느 날도 구례장을 보러 말 구루마를 끌며/ 하늘만큼 높다는 송치재를 오를 때/ 마부 아버지와 조랑말이/ 필사적인 비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미소展 / 서정춘

아이들이 눈 오시는 날을 맞아 눈사람을 만드실 때/ 마침내 막대기를 모셔와 입을 붙여주시니 방긋 웃으시/ 어 햇볕도나 좋은 날에 사그리로 녹아서 입적하시느니//

죽편(竹篇) 1 여행 / 서정춘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 서정춘

나는 아버지가 이끄는 말구루마 앞자리에 쭈굴쳐 타고 앉/ 아 아버지만큼 젊은 조랑말이 말꼬리를 쳐들고 내놓은 푸른/ 말똥에서 확 풍겨오는 볏집 삭은 냄새가 좀 좋았다고 말똥/ 이 춥고 배고픈 나에게는 따뜻한 풀빵 같았다고 1951년 하/ 필이면 어린 나의 생일날 일기장에 침 발린 연필 글씨로 씌/ 어 있었다//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저수지에서 생긴 일 2 / 서정춘

어느 날 저수지 낚시터엘 갔었더랍니다 처음에는 저수지 물이 아주 잔잔해서 마치 잘 닦인 거울 속 마음 같아 보였는데 거기다가 길게 날숨 쉬듯 낚싯줄을 드리웠는데 때마침 저수지 물이 심각하게 들숨 날숨으로 술렁거렸고 난데없는 왜가리의 울음방울 소리엔 듯 화들짝 놀란 물고기가 저수지 전체를 들어 올렸다가 풍덩풍덩 놓쳐버렸기 때문에 나 역시 낚싯줄에 간신히 걸린 한 무게를 깜짝깜짝 놓쳐버릴 수밖에 없었더랍니다 그러자 저수지 물은 다시 잔잔해졌고 아 이렇게 한순간에 일어난 "긴장감 속에 깃든 평화"를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아직 맛본 일이 없었더랍니다.//

30년 전 - 1959년 겨울 / 서정춘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쪽지 / 서정춘

나비 시를 지었다/ 시가 안 돼 접었다/ 여러 번을 접었다/ 여러 번을 잘랐다/ 바람 속에 날렸다/ 다 털

고/ 나비는/ 날았다// 竹篇 1 -여행 / 서정춘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虛 / 서정춘

푸른 청 하늘입니다/ 우산살만 남아 있는/ 낡은 거미줄입니다/ 하루 종일 비 맞아도/ 젖지 않는 우산입니다/ 나 여기 서 있다가/ 나 한 자루 우산대입니다//

 

눈물 부처 / 서정춘

비 내리네 이 저녁을/ 빈 깡통 두드리며/ 우리집 단칸방에 깡통 거지 앉아 있네/ 빗물소리 한없이 받아주는/ 눈물 거지 앉아 있네//

 

빨랫줄 / 서정춘

그것은, 하늘 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 아래/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뿐이다//

돌의 시간 / 서정춘

자네가 너무 많은 시간을 여의고 나서 그때 온전한 허심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지나간 시간 위로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눈을 뜰 수 없고 온몸을 안으로 안으로 웅크리며 신음과 고통만을 삭이고 있는 그동안이 자네가 비로소 돌이 되고 있음이네// 자네가 돌이 되고 돌 속으로 스며서 벙어리가 된 시간을 한 뭉치 녹여 본다면 자네 마음속 고요 한 뭉치는 동굴 속의 까마득한 금이 되어 시간의 누런 여물을 되씹고 있음이네//

시인의 말 - 詩貪 / 서정춘

나여/ 시는 탐나고/ 타고난 재주는 워낙 없구나// 시 한편을 쓸 때마다/ 몇 십번을 고쳐 쓰니/ 그야말로 뼈가 운다// 이 느자구 없는 시탐을 빨리/ 그만 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랴, 이제는 가난이 먹고 남긴/ 이삭이나 줍자//

시인의 말 -하류 / 서정춘

하류가 좋다 /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하류下流 / 서정춘

옷 벗고/ 갈아입고/ 도로 벗고/ 하르르/ 먼/ 여울 물소리//

매화걸음 / 서정춘

매화걸음 했었지/ 살얼음걸음으로/ 가는 동안 녹아서/ 피는 꽃 보았지/ 드문드문 피어서/ 두근두근 보았지/ 아껴서 보았지//

매미의 사랑 / 서정춘

그리워서 많이/ 울었을 것이다// 사랑해서/ 죽도록 울었을 것이다//

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

내 안의 뼈란 뼈는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 름다운 유골 한 채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生이 있/ 었다.//

낙차落差 -해우소에서 / 서정춘

마음놓고 듣네/ 나 똥 떨어지는 소리/ 대웅전 뒤뜰에 동백나무 똥꽃 떨어지는 소리/ 노스님 주장자가 텅텅 바닥을 치는 소리/ 다 떨어지고 없는 소리//

봉선화 –1950년대 / 서정춘

너는 가낭뱅이 울아비의 작은 딸/ 나의 배고팠던 누님이 아이보개 떠나면서 보고 보고 울던 꽃/ 석양처럼 남아서 울던 꽃 울던 꽃//

기념일-유정숙에게 / 서정춘

시 공부 10여 년에 쌓인 책 이희승 국어사전 빼고/ 나머지 한 도라꾸 판 돈으로 한 여자 모셔와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 세 들어 살면서 나는 모과할 게 너는 능금해라/ 언약하며 니뇨 나뇨 살아온 지 오늘로 50년 오매 징한/ 사랑아!//

어린 꿈 - 다대포 언덕의 어린날의 꿈 / 서정춘

내가 가난한 농사꾼의 아이였을 때/ 어린 내게는 아직 일러 농사 일도 없어서/ 심심찮은 밥벌이로 남의 소나 먹이다가/ 언덕에 풀어져 잠이 든 꿈에/ 하늘을 파랗게 쳐다보는 사람을 보고/ 좇아와 주는 학이 있었습니다/ 빨그랑 햇덩이를 머리에 찍어 달고/ 목청 터지게 울음 울어/ 소 있는 내 곁에/ 神같이 내려 앉아 주었습니다/ 나는 소 고삐 말아 쥔 채/ 다락같은 학을 타고 하늘 높이/ 소를 몰아 날아올랐었지만/ 내 황홀했던 어린 날의 가장 어린 꿈이 되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 꿈이 그리워/ 숨이 가빠오른 채 이 시를 씁니다.//

초로 / 서정춘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나보다 어리디 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 보태버릴 수록 차고 달디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

늦꽃 / 서정춘

들국화는 오래 참고/ 늦꽃으로 핀다/ 그러나/ 말없이 이름 없는/ 佳人 같아 좋다/ 아주 조그맣고/ 예쁘다/ 예쁘다를 위하여 늦가을 햇볕이/ 아직 따뜻했음 좋겠는데,/ 이 꽃이/ 바람의 무게를 달고/ 홀린 듯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 꽃이/ 가장 오랜 늦꽃이고/ 꽃이지만 중생 같다//

알치 / 서정춘

​그렇다네/ 구를대로 굴러먹은 친구/ 자네를 탓하며/ 나도 여기까지 굴러왔다네/ 언젠가는 복수를 하리라/ 한사코 닳고 닳은 이를 갈다가/ 내 손때묻은 단짝/ 호두 알 두 개를/ 슬쩍 슬그적 굴려보는 것인데/ 친구여/ 꿈이었다네.//
* 알치: 이빨 가는 소리

빈집 / 서정춘

누가 살다 비웠을까/ 비운 순간, 내부로부터/ 가볍게 기울다 만/ 오두막집 하나, 그 빈 집에/ 젊은 제비 부부 한쌍 날아와/ 기울다 만 반대쪽 처마 밑에/ 새 집 붙여 살고 있다/ 生色깨나 떨지만/ 아름답구나/ 이 몸 들어가/ 한평생 살고 싶다/ 제비한테 흥정하면/ 이제 와서 들어 줄까//

백치白痴 1​ / 서정춘

쌀 한 톨이 귀한 1950년대,어렵사리 한 웅큼의/ 쌀뜨물을 대야에 받아 낯바닥을 씻어대는 누이의/ 얼굴빛은 차돌이었다.//


 

서정춘 시인은

1941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순천동초등학교, 순천매산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8년 신아일보사 신춘문예에서 시 ‘잠자리 날다’가 당선됐다. 동화출판사에서 28년 근속하다 1996년 명예퇴직했다. 시집으로 △죽편(1996) △봄, 파르티잔(2001) △귀(2005) △물방울은 즐겁다(2010) △이슬에 사무치다(2016) △하류(2020) 등이 있으며 시선집 ‘캘린더 호수’(2013) 및 기념집 ‘서정춘이라는 시인’(2018), 편저 ‘시인의 돌’(박두진 외 22인의 수석시집. 문향사 1989) 등이 있다. 수상경력으로는 △제3회 박용래문학상(2001) △제1회 순천문학상(2004) △제6회 최계락문학상(2006) △제5회 유심작품상(2007) △제5회 백자예술상(2014) △순천매산고 '자랑스런 매산인 선정 표창'(200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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