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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최정례 시인

부흐고비 2021. 12. 24. 08:55

최정례(1955~2021) 시인
경기도 화성 출신이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 감정』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 『빛그물』 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이수문학상, 현대문학상, 백석문학상, 미당문학상, 오장환문학상을 받았다. 최정례 시인은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 노력하였다.

 



1mg의 진통제 / 최정례
1mg의 진통제를 맞고/ 잠이 들었다// 설산을 헤매었다// 설산의 빙벽을 올라야 하는데/ 극약 처분의 낭떠러지를/ 기어올라야 하는데// 1mg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 1mg을 안고/ 빙벽을 오르기가 힘들었다// 그 1mg마저 버리고 싶었다// 너무나 무거워/ 엄마 엄마 죽은 엄마를 불렀다// 텅 빈 설산이 울렸다//

햇빛 속에 호랑이 / 최정례
나는 지금 두 손 들고 서있는 거라/ 뜨거운 폭탄을 안고 있는 거라// 부동자세로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거라 빠빳한 수염털 사이로 노랑 이그르한 빨강 아니 초록의/ 호랑이 눈깔을// 햇빛은 광광 내리퍼붓고/ 아스팔트 너무나 고요한 비명 속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거라, 증조할머니 비탈밭에서 호랑이를 만나, 결국 집안을 일으킨 건 여자들인 거라,/ 머리가 지글거리고 돌밭이 지글거리고, 호랑이 눈깔 타들어가다 못해 슬몃 뒤돌아 가버렸던 거라, 그래/ 전재산이었던 엇송아지를 지켰고, 할머니 눈물 돌밭에 굴러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그러다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식의 호랑이를 만난 것이라// 신호등을 아무리 노려봐도 꽉 막혀서// ――다리 한 짝 떼어놓으시지/ ――팔도 한 짝 떼어놓으시지// 이젠 없다 없다 없다는데도/ 나는 증조할머니가 아니라 해도// ――머리통 염통 콩팥 다 내놓으시지/ ――내장도 마저 꺼내 놓으시지// 저 햇빛 사나와 햇빛 속에 우글우글/ 아이구 저 호랑이 새끼들//

붉은 밭​ / 최정례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푸른 골짜기 사이 붉은 밭 보았습니다/ 고랑 따라 부드럽게 구불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풀 한포기 없었습니다 그러곤 사라졌습니다 잠깐이었습니다/ 거길 지날 때마다 유심히 살폈는데 그 밭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엄마가 내 교과서를 아궁이에 쳐넣었습니다/ 학교 같은 건 다녀 뭐하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아궁이를 뒤져 가장자리가 검게 구불거리는 책을 싸들고 한 학기 동안 학교에 다녔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타다 만 책가방 그 후 어찌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밭 왜 풀 한포기 내밀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그러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끔 한밤중에 깨어보면 내가 붉은 밭에 누워 있기도 했습니다//

레바논 감정​ / 최정례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 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 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 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애인이 되지요*/ 옛애인은 다 금의환향하고 옛애인은 번쩍이는 차를 타고/ 옛애인은 레바논으로 가 왕이 되지요/ 레바논으로 가 외국어로 떠들고 또 결혼을 하지요// 옛애인은 아빠가 되고 옛애인은 씨익 웃지요/ 검은 입술에 하얀 이빨/ 옛애인들은 왜 죽지 않는 걸까요/ 죽어도 왜 흐르지 않는 걸까요// 사막 건너에서 바람처럼 불어 오지요/ 잊을 만하면 바람은 구름을 불러 띄우지요/ 구름은 뜨고 구름은 흐르고 구름은 붉게 울지요/ 얼굴을 감싸 쥐고 징징거리다/ 눈을 흘기고 결국//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 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 박정대의 시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중에서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 최정례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면 믿지 않겠지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안고 겅중겅중 뛸 때 세상에 별 우스꽝스런 짐승이 다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긴 나도 새끼를 들쳐 업고 이리저리 숨차게 뛰었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 TV에서 캥거루가 권투를 하는 걸 보았어요. 사람이 오른손으로 치면 캥거루도 오른손으로 뻗어 치고 왼손을 뻗으면 다시 왼손으로 받아치고 치고 받고 치고 받고. 사람이나 캥거루나 구별이 안 되더라구요. 호주나 뉴질랜드 여행 중 느닷없이 캥거루를 만나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앞발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도 있겠더라구요. 나는 가끔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 캥거루 주머니에 빗물이 고이면 어쩌나 하는 식으로 우리 애들이 살아갈 앞날을 걱정하지요. 한번은 또 TV에서 캥거루가 바다에 빠진 새끼를 구하려다 물속으로 따라가 빠져 죽는 장면을 보여주더라구요. 그 주머니를 채운 물의 무게와 새끼의 무게를 가늠하다가 꿈에서는 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지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한밤에 이렇듯 캥거루 습격을 당하고 나면 영 잠이 안 오지요. 이따금 캥거루는 땅바닥에 구멍을 판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그 구멍으로 아무것도 안 한다네요. 나도 쓸데없이 구멍을 파고 아무것도 안 하게 되네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 / 최정례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대 놓치고, 그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히 선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억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 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빛그물 / 최정례
1/ 두 마리 수사슴이 싸우다 한 마리가 죽는/ 장면을 보았다 승리한 사슴은 자기 뿔에/ 엉켜 매달린 죽은 사슴의 뿔에서 벗어나려고/ 벗어나려고 머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사자 한 마리가 멀찍이 그 몸부림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 장면이 무슨 비유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잠들었는데 잠의 수면으로 흘러가다 떠오르다/ 다시 흘러가면서// 강을 건너는 한 무리 사슴들을 보았다/ 물에 잠겨 떠가는/ 관목처럼 사슴의 뿔이/ 왕의 관처럼 떠내려가는데// 천변에 핀 벚나무가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바람도 없이 꽃잎의/ 무게가 제 무게에 지면서, 꽃잎, 그것도/ 힘이라고 멋대로 맴돌며 곡선을 그리고/ 떨어진 다음에는 반짝임에 묻혀 흘러가고// 그늘과 빛이,/ 나뭇가지와 사슴의 관이 흔들리면서,/ 빛과 그림자가/ 물 위에 빛그물을 짜면서 흐르고 있었다// 2/ 바탕이 무늬를 이기면 야하고 무늬가/ 바탕을 이기면 간사하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논어』에서 읽은 질승문즉야(質勝文則野)/ 문승질즉사(文勝質則史) 하니 문질빈빈/ (文質彬彬) 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무늬와 바탕이 서로 빈빈해야 아름답다고/ 들었다 그 빈빈이 좋아서 그 빈빈의 빛그물로/ 누워 떠내려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의 것 / 최정례
세상은 다른 사람들의 것/ 나는 그들 사이에 맺혔다/ 사라지는 물방울 같은 것*// 이슬 같은 것/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었고/ 태어난 후에는 손뻗어 가지려다/ 놓쳐버리고/ 나를 지배하는 집단의 힘, 그들만의 리그/ 이젠 내 몸의 건강까지도/ 그들의 손에 달려 있고// 잠시 잠깐/ 저 노란 꽃과 눈 맞추는 것처럼/ 아이가/ 잠깐 기다려봐 내가/ 생일 선물로 사다리를 그려줄게/ 무슨 색 좋아해, 보라, 초록?/ 초록으로 그려줄게/ 사다리를 기다리는 그 순간만/ 세상은 푸르게 출렁이며 잠깐// 그 잠깐을 뺀 나머지는 다 그들의 것//
* 김인환 "타인의 자유“

벙깍 호수* / 최정례
오늘 작가회의로부터 이상한 문자를 받았다. 시인 최정례 부음 목동병원 영안실 203호 발인 30일. 평소에도 늘 받아 보던 문자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었고 내 이름이었다. 실수임을 인정하는 정정 문자가 다시 오겠지 기다리며 그냥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해서 웃긴다고 말했더니 남편의 말이 그것은 시인의 죽음이지, 당신은 시인이 아니잖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딸애에게 내가 죽으면 제일 걱정되는 것은 자개장롱과 돌침대라고 했다. 딸애는 걱정 말라고 했다. 자기가 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다. 방 안 전체를 차지하는 이 무거운 구닥다리를 그 애가 쓸 리가 없다. 남 주거나 팔아버리지 말라고 했다. 딸애는 자기를 못 믿는다고 벌컥 화를 냈다. 작가 회의에 전화해서 항의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회의에 참석한 적도 없고, 절친한 사람도 없는데 누구에게 내가 살아 있다고 주장할 것인가. 어쨌든 나는 살아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살아 있다. 난 정말 살아 있다. 그런데 궁금했다. 집 앞 문간에 의자를 내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사람들, 동남아시아 어디쯤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았다. 나도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하고 그냥 그러고 있다. 왜 벙깍 호수라는 이름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 호수는 매립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택시를 타고 그 호수에 데려다달라고 했더니 운전수가 한 대답이었다. 벙깍 호수에도 못갔고 플리즈 원 달러를 호소하는 애들에게 일 달러도 안 준 나다. 한 번 주면 오십 명은 달라붙는다고 해서 못 줬다.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나는 살아 있다.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살아 있다고 말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친구들은 바쁘고 헛소리는 들어주지도 않는다. 나는 그냥 앉아서 지금은 사라졌다는 벙깍 호수만 그려보고 있다.//
* 캄보디아의 큰 호수였으나 지금은 택지개발로 메웠다.

              안개의 표현 / 최정례

안개가 모두를 끌고 간다/ 나무 기둥과 기둥 사이/ 작은 나무가 사라진다/ 작은 나무와 작은 나무 사이/ 덤불이 사라진다//

안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이 가린 것이고/ 보이는 것은/ 보이기로 한 것이고//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과/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 사라지는 그들의 표현//

여기서부터// 이제로부터/ 다시 보기로 한다/ 그들 앞에서/ 지워지고 있는 나를/ 사라지고 있는 나를//


이름을 부를 때까지 / 최정례
35번 방에서 시력 검사를 하고 36번 방에서 안약을 넣고 안압 검사를 하고 37번 방 앞에서 이름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이윽고 간호원이 이름을 부르더니 동공 확장 약을 넣었다. 수납을 하고 오라고 했다. 자동 수납기가 말을 했다. 진료 카드를 넣어주세요. 비밀번호를 누르세요.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영수증을 받아 간호원에게 가니 뭔가 잘못되어 시신경을 다시 찍어야 하니 수납원에게 다시 다녀오라고 했다. 여러 개의 방을 지났다. 코너를 돌고 또 돌았다. 수납이라고 쓴 화살표가 사라졌다. 대신 화장실 표시가 나타나서 들어갔다 나왔는데 이상했다. 무엇을 하러 왔는지 잊어버렸다. 황량한 벌판이었다. 한 여자 울고 있었다. 유모차를 붙잡고 우는 여자를 노부인이 달래고 있었다. 다른 병원으로 가보자. 부처손이라는 게 있다던데 그걸 달여 먹여보자. 못할 일이 뭐가 있겠니? 깊은 산속으로 가면 부처손이 있다. 엄마, 못 본다고 하잖아요. 아기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요. 유모차에는 아기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청바지를 입은 아직 처녀라고 해도 좋을 어린 엄마가 엎드려 울고 있다. 생명을 받은 대가로 생명을 몽땅 바쳐야만 인생아, 어린 엄마가 울고 있다. 여기서 더 이상 문장을 만들지 말라고 입 닥치라고.//

한 줄기 넝쿨이 / 최정례
어항 속의 물고기를 사람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물고기가 사람의 실내를 들여다본다고 할 수는 없다// 창을 기어오르다 디딜 곳을 놓친/ 담쟁이넝쿨 한 줄기가 창가에 걸쳐 있다/ 실내를 들여다본다? 아니다// 나는 콩을 까고 있다/ 껍질은 왼쪽에 놓여지고/ 콩은 오른손에 잠깐 들려 있는가 싶더니/ 바구니에 담긴다// 손이 콩의 무게를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콩에 무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들여다보는 것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들여다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콩이 튀어 식탁 밑으로 달아나고/ 한 줄기 넝쿨은 거꾸로 매달린 물음표 모양으로/ 실내를 들어 올리며// 이게 다 뭐냐?/ 고 묻고 있는 것만 같다//

길에 누운 화살표 / 최정례
네 비행기 날아가고// 지금쯤 구름 속에 있겠다/ 바다 위에 떴겠다/ 드디어 땅바닥에 닿았겠다// 그러나 생각 않기로 한다/ 대신 네 호흡인 구름에게//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가 있다고 전한다/ 좌판에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가/ 서로의 볼을 맞대고 있다고// 내 앞에 트럭이 지나간다고/ 굵은 대파가 책처럼 높다랗게 쌓였고 밧줄에 묶였고/ 뿌리는 뿌리끼리 푸른 잎은 잎끼리/ 서로가 서로를 꽉 채우고 빈틈 하나 없이 저렇게/ 묶여 실려 간다고// 허공 속의 부재에게/ 사과를 사과나무를/ 다 마셔버리고 싶다고 쓴다// 높은 곳에 떠도는 구름에게/ 사과나무 한 채를 다 마시고/ 지금쯤은 구름 속인지 바다 위인지 땅바닥인지// 길바닥에 누운 화살표에게 묻는다/ 좌로 꺾인 하얀 화살표 따라간다고 쓴다/ 희망은 난폭해서/ 날마다 쫓기며 가보게 한다고//

개미와 한강 다리 / 최정례
개미 한마리가 한강 다리를 지나가면 다리가 휘겠니, 안 휘겠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개미 한마리에 어떻게 한강 다리가 휘겠어? 이 세상 개미 모두가 북한산만큼 모여 한강 다리를 건너가면 다리가 휘겠니, 안 휘겠니? 그야 당연히 휘겠지, 북한산 실은 기차가 지나가는 것처럼. 그렇다면 개미 한마리가 지나갈 때도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 한마리 무게만큼 한강 다리가 휘어야 하잖아. 거의 무에 가까운 무게지만 무게는 무게거든. 그 무게만큼의 어떤 생각,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한 생각이 드나드는 것 같다. 계속 오고만 있고 아예 와버리면 안 된다는 듯이, 네 생각도 그렇게 오더라. 까맣게 잊고 있다가도 어느날 깨어보면 분명 간밤에 오고 있었고 어느새 가버린 거야, 그래야 다시 올 수 있다는 듯이. 존재의 무게가 거의 없는 것이, 생각의 무게 같은 것이 지나간다. 방금 한강 다리가 아주 약간 휘청했다.//

달과 수박밭 / 최정례
달빛은 참 멀리서도 왔네/ 수박밭으로/ 검은 줄무늬 수박고랑으로/ 달빛은 참/ 모텔 안으로 까만 차가/ 미끄러져 들어서고/ 빨간 차가 또 소리없이 스며드는/ 거길 비추기도 하지/ 하루 온 종일/ 수박밭은 뜨거웠는데/ 달빛은 참/ 미루나무를 눕히고/ 골짜기 논물에 미루나무가/ 누워서 흔들리다 흐려지다/ 꿈에 들어 혼몽 중인/ 거길 지나기도 하지/ 수박은 혼자서/ 둥글어지고 둥글어지고 둥글어지다/ 잎사귀로 노를 저어/ 둥근 달에게/ 기어오르기도 하지/ 달빛은 참/ 초록으로 얼룩덜룩한 줄무늬 속으로/ 붉은 방으로 가득 들어차려고/ 먼 태양 흑점에서부터 수박씨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너를 만나러 왔는지 몰라 중얼거리며/ 여름날과 겨울날이 섞여버리도록/ 목이 말라서/ 푸른 골짜기 붉은 밭으로/ 달빛은 참//

비 맞는 전문가 / 최정례
십여 년 동안 그가 한 일은/ 비 맞는 일뿐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는 재빨리 나가야 한다/ 버스 정거장 가로수 아래로/ 머리에 코에 수염에 빗줄기가/ 주르륵 흐르도록 해야 한다/ 주머니 가득 빗물을 채우고/ 그를 기다렸던 버스가 텅 빈 채/ 다시 출발할 때까지/ 서서 비를 맞아야 한다/ 건너편 창에서/ 그녀의 그림자 사라질 때까지/ 과자처럼 바삭거리며/ 리모콘과 뒹구는 그녀를 위해/ 가로수 늘어진 가지를 흘러/ 머리카락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셀 수 있어야 한다/ 담배는 주머니 안에서 죽이 돼야 한다/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비 맞는 장면을 보여 줘야 한다/ 죽을 때까지 지독하게 젖는 일을/ 불평없이 사랑해야 한다/ 전근대적 추억을 고용하려고/ 희생적 지출을 한 그녀를 위해/ 그는 비 맞는 전문가니까//

모란의 얼굴 / 최정례
젊고 예쁜 얼굴이 웃으며 지나가고 있다/ 나를 보고 웃는 것은 아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빨간 꽃잎 뒤에 원숭이 얼굴을 감추고// 일요일 아침 모두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가자! 결의하고는 떠나고 있다// 맹인의 지팡이 더듬어 잡고//

꽃 / 최정례
열두 구비구비 산 머너엔/ 금빛 꼬리 여우가 산다고?//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가서/ 올라가고 올라가고 올라가서// [A온갖 방향으로 흔들리라고?// 깜감하고 좁고 아득한 길을 찾아/ 색깔의 폭포들이 몰려오면/ 빨강에게 보라에게 껌정에게/ 쫓겨다니라고// 마지막을 향해 달리다가/ 처음을 향해 또 달리다가// 공허의 줄기 끝에/ 매달리라고/ 벼랑끝에 창을 하나 내라고/ 얼굴을 내밀라고// 아이구 저기 막장 끝에/ 저게 여우라고? 꽃이라구?//

꽃구경 가자시더니 / 최정례
벚꽃나무 머리 풀어 구름에 얹고/ 귀를 아프게 여네요/ 하염없이 떠가네요/ 부신 햇빛 속 벌떼들 아우성/ 내 귀 속이 다 타는 듯하네요/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시더니/ 무슨 말씀이었던지/ 이제야 아네요/ 세상의 그런 말씀들은 꽃나무 아래 서면/ 모두 부신 헛말씀이 되는 줄도 이제야 아네요/ 그 무슨 헛말씀이라도 빌려/ 멀리 떠메어져 가고 싶은 사람들/ 벚꽃나무 아래 서보네요/ 지금 이 봄 어딘가에서/ 꽃구경 가자고 또 누군가를 조르실 당신/ 여기 벚꽃나무 꽃잎들이 부서지게 웃으며/ 다 듣네요/ 헛말씀 헛마음으로 듣네요/ 혼자 꽃나무 아래 꽃매나 맞으려네요/ 달디단 쓰디쓴 그런 말씀/ 저기 구름이 떠메고 가네요//

꽃 핀 복숭나무에게 시집가고 싶으면서 / 최정례
당신의 앞마당에 붉은 꽃 헝클어뜨리고 복숭나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뜻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는 아이처럼 복숭나무 그 난해하나 아름다운 한 그루 책 앞에 머뭇거립니다/ 사실 나 머리 빗고 꽃 핀 복숭나무에게 시집가고 싶으면서 딴청을 부리는 것입니다/ 느리고 느리게 날아와 꽂히는 화살처럼 복숭나무 내 몸에/ 서서히 스며들어 오기를 바라면서 마음은 그렇게 간절하면서/ 복숭나무에게 시집가고 싶다는 말 숨기고 고집스레 복숭나무를 읽겠다고만 호기를 부리는 꼴입니다/ 당신을 향해 뻗은 찬란한 가지를 바라 보고 바라 보다 꿈에 듭니다/ “나도 이제 꽃핀 한 그루 복숭나무야” 착각하고 소리치다 깨어난 저녁입니다/ 장승업의 남국노인*에게 바치던 볼 붉은 아기 얼굴 같은 그런 복숭아를 그립니다/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하늘 복숭아를 낳아 가지에 매달게된다면 나도/ 오랜 목마름 잊고 당신의 목마름을 위하여 바치리라 바치리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 南國老人:장승업의 그림. 신령으로 보이는 한 노인에게 어린 소년이 자기 머리통만한 붉은 복숭아를 두 손으로 바치는 그림으로 성북동 간송 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음.

산벚꽃나무하고 여자 그림자하고 / 최정례
그는 산벚꽃나무와 여자 그림자 하나 데리고 살지요/ 그는 돈도 없고 처자도 없고 집도 없고 그는 늙었지요/ 바위 구멍 굴딱지 같은 곳에서 기어나와 한참을 앉아 있지요/ 서성거리지요/ 산벚꽃나무 기운없이 늘어진 걸 보니 봄이 왔지요/ 냄비를 부시다 말고/ 앓아 누운 여자 그림자를 안아다/ 양지 쪽에 눕히고/ 햇빛을 깔고 햇빛을 덮어주고/ 종잇장같이 얇은 그녀도 하얗게 늙어가지요/ 산벚꽃나무 장님처녀 눈곱 달 듯/ 한두 송이 꽃 매달지요/ 그녀의 이마가 그녀의 볼이 따뜻하지요/ 아니 차디차지요/ 이 봄은 믿을 수가 없지요/ 그녀를 눕혔던 자리 아지랭이 피어오르고/ 그녀가 천천히 날아가지요/ 산벚꽃나무 너무 늙어 겨우 꽃잎/ 두 장 매달았다 떨구지요/ 또 봄은 가지요/ 그녀는 세상에 없는 여자고/ 그래도 그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지요/ 산벚꽃나무하고 여자 그림자하고//

숲 / 최정례
한 나무에게 가는 길은/ 다른 나무에게도 이르게 하니?/ 마침내/ 모든 아름다운 나무에 닿게도 하니?// 한 나무의 아름다움은/ 다른 나무의 아름다움과 너무 비슷해// 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 푸른 흔들림/ 너는 잠시/ 누구의 그림자니?//

당나귀 귀의 숲 / 최정례
시간은 무장무장 흘러버렸고/ 당신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망설이다 묻어둔 그 말/ 물고기의 말이 되었고/ 강아지의 말이 되었고// 잎사귀 틈에 홍방울새/ 칡덩굴 속에 꽃자주 꽃/ 그것들 그 말들/ 비집고 비집고 돋아난 것인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그 말 모든 나라에 속하고 싶고/ 다시 태어나고만 싶어// 그래 수년 만에 나타나 불쑥/ 입 밖에 낸다면/ 당신 그 소리 느닷없어 알아들을까// 홍방울새 울음소리/ 빨갛게 맺는/ 열매로만 알아듣는 것처럼// 언젠가 들은 소리라고/ 이마를 찌푸리고/ 누구였더라 무엇이었더라// 엉기고 엉겨버린 것들/ 알아볼 수 있을까// 산꼭대기로 기어올라가서/ 모래폭풍 속으로 달려나가서/ 바위구멍 속에 퍼부어두었던 말들// 대숲이 되어 수런거리는데/ 순간에 빈 바람을 부르는데// 어디로 데려가 달래나/ 어디로 어떻게 불러보나//

3분 동안 / 최정례
3분 동안 못할 일이 뭐야/ 기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지// 그런데/ 이봐/ 먼지 낀 베란다에 널린/ 양말들, 바지와 잠바들/ 접힌 채 말라가는 수치와 망각들/ 뭐하는 거야// 저것 봐/ 날아가는 돌/ 겨드랑이에서/ 재빨리 펼쳐드는 날개를// 저 날개 접히기 전에/ 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지/ 도장을 찍고/ 악수를 청하고/ 한 나라를 이루어야지// 비행기가 떨어지고/ 강물이 갇히기 전에/ 식탁 위에 모래가 켜로 앉기 전에/ 찬장 밑에 잠든 바퀴벌레도 깨워야지/ 서둘러 겨드랑이에/ 새파란 날개를 달아야지//

기둥 / 최정례
비스듬히 기울어 서 있다 마른 잎 하나 달지 못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런 새 날아와 울지 않는다 혼자 고요하다// 그는 맨바닥에서 목침을 베고 잤다 방바닥에 머리를 툭 떨어뜨리고도 다시 코를 골다가// 갑자기 잎 내리고 천천히 기울어갔다 줄기 속을 흐르던 물소리 멈춘 건 어느 날이었는지 뿌리 끝까지 다 죽어 썩으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그는 산에 가서 오지 않았다 추석인데 식구들 다 모였는데// 그 집 기둥이 된 저 나무는 얼굴을 방바닥에 박고 있다 머리가 땅이 되고 뿌리가 하늘을 향해도 전혀 아픔을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죽은 나무라고 저렇게 오래 서 있기만 할까//

달빛이 살쾡이같이 / 최정례
달빛이 살쾡이같이 내려와서/ 지상의 너 강아지풀은/ 뾰족해진 것/ 칼과 같이/ 특이한 식물이 돼버린 것// 줄기를 뻗대고 잎을 내밀고/ 살쾡이 같은 달빛을/ 머리 위에 올려 피워보려고/ 수런거렸던 것// 강아지 새끼가 어미젖을 찾아/ 얼굴을 비비대듯 허공을 비벼/ 초승달을 상현달을 보름달을/ 줄기 끝에 차례로 올려 피워보려고// 초승꽃에서 그믐꽃까지/ 그렇게 날마다 서른 개의 꽃을/ 돌아가며 피워놓으려고/ 삐죽대고 이죽거리며 흔들었던 것// 달빛도 따라 흔들렸던 것//

빨간 다라이 / 최정례
외갓집은 도라지 꽃밭 위에 없다/ 외갓집은 지금/ 부흥 수퍼 전망 부동산 위 3층에 있다/ 북두칠성 아래 감나무와 수국나무 사이/ 우물도 없다/ 그 자리엔 흑장미 비디오가 있다/ 외삼촌은 빚더미 위에 있고/ 장터거리 밭은 가압류 중이고/ 구불거렸던 길은 곧게 펴졌다/ 외갓집은 지금 서기 2000년 이고/ 부엌엔 김치 냉장고와 정수기가 있고/ 엿 밥풀강정 술찌게미 따위는 없다/ 잔칫집에서 술취해 돌아오다/ 얼어죽었다는 애꾸 김석출/ 때문에 무서워 외면하고 건너뛰던/ 도랑은 사라졌다/ 아라비아식 지붕을 모자처럼 올려 놓은/ 모텔이 서 있다/ 방앗간은 연성공업사가 되었고/ 간판엔 이렇게 써 있다/ 각종 플라스틱 통/ 저수조 물탱크 함지박 빨간 다라이 개집//

돌멩이 돌멩이 돌멩이 / 최정례
저 끝, 아주 먼 곳에/ 내가 생각하는 네가 있지/ 돌멩이 돌멩이 돌멩이/ 웅크린 돌멩이에게/ 거기까지 도저히 갈 수는 없지/ 그가 하는 말 전혀 알아들을 수 없지/ 귀속에서 쟁쟁쟁 종만 때리지/ 유리창에 소리없이 금이 가고/ 묵묵부답이지/ 그곳까지의 거리/ 그 끔찍한 내면의 거리/ 다리도 없고 길도 없고/ 딱딱한 무언의/ 접근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막는/ 거부가 있을 뿐이지/ 돌멩이 돌멩이 돌멩이 속으로/ 불가능의 꿈 속으로/ 그 아득한 거리를 짐작해 보는 것/ 이게 겨우 나의 사랑이지/ 으으 돌멩이 돌멩이 돌멩이//

3분 자동 세차장에서 / 최정례
소낙비 쏟아지는 게 좋아 소낙비 속에 물레 방아간같은 소낙비 매맞는 움막같은 수숫단같은 수숫단을 비집고 들어가는 3분 자동 세차장이// 라디오를 끄고 기어를 중립에 놓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라는 주문을 외는 거야 중립 브레이크 중립 브레이크 레이크 이크// 병든 도깨비처럼 황속 뱃속*에 세들고 싶었지 “황소님 주인님 방 한 칸 빌려주세요 애는 낳았는데 한겨울에 어디로 이사를 가란 말인가요 며칠만이라도 더”// 기습결혼을 했었지 황소 뱃속같은 곳에서 아이를 낳고 아파트가 당첨됐으나 허물어지고 길길이 뛰고 난리치고 아무나 붙잡고 사정했지만// “초록불이 켜지면 출발하시오” 나가라는군 초록불이 켜지면 방을 빼라는군 빗자루와 비누걸레는 늘 협박이지 옷 입고 샤워하다 3분만에 밀려나는군 아무리 방망이로 땅을 쳐도 끄떡하지 않는 나라 이상한 나라//
* 李想의 수필 「황소와 도깨비」에서

투명한 덩어리 / 최정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네/ 골목으로 난 창 아래 그가 서네/ 바알간 불빛 바라보네/ 창은/ 불빛은/ 처마는 그에게 인사 안하네/ 묻지 않네/ 적막의 시간을/ 투명한 얼룩이 흐르네/ 입 속의 웅얼거림/ 얼어붙네/ 움직이지 못하네/ 그는 뚱뚱한 투명한 덩어리네/ 벙어리네/ 그가 집으로 돌아왔네/ 아무도 그가 돌아온 줄 모르네/ 한 저녁이/ 녹다 흐르다/ 가네//

두 사람의 잠 / 최정례
나는 나 자신을 떠나지 못한다/ 소금이 바다를 떠나듯이/ 쇠종에서 종소리가 떠나듯이/ 그렇게 못한다// 당신은 오래 전에 잠들었고/ 등뒤에서/ 나는 몸을 구부리고/ 벌거벗은 돌멩이가 되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구름들이/ 밤새 우리 지붕 위를 흘러간 적이 있으나// 당신은 고치 속에 웅크리고/ 고른 숨을 내쉬고/ 이제 나는 잔인함을 받아들여/ 벙어리 자명종이다.// 놓여날 길 없는 차가운 밤/ 종 속에 갇힌 종소리들/ 유리창을 흘러내르는 안개들// 당신은 잠결에 혹/ 손을 뻗어 중얼거리지만/ 당신이 잡은 건 게임판이거나/ 축구 경기의 채널// 우리가 함께 갈 곳/ 찾을 수 있을까/ 우리가 함께 가더라도 각각/ 다른 장소인 그런 곳//

붉은 구슬 / 최정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엎드려 울고 있었다 내 이름은 이 홍주라고 했고 고3이었다 미닫이 문 저쪽엔 어린 동생이 죽어 누워 있었다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집 문을 열면 연탄 아궁이가 보이고 아궁이 옆에 신발을 벗어 놓고 쪽마루를 디뎌야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문은 닫혀 있고 찬 바닥에 얼굴을 대고 흐느껴 울었다 울음소리에 흔들려 깨어났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 옆에는 파출소가 있다 파출소 앞에 갑자기 모란이 한무더기 매달렸다 차들이 지날 때마다 모란 꽃송이가 부르르 떨었다 곧 먼지에 덮였다 졌다// 홍주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그 집 죽은 동생 기억에 없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게 언제인데 방이 넷인 아파트에서 이렇게 누워 있는데 내가 교복을 입고 쪽마루에 엎드려 우는 고등학생 홍주라니// 이상하다 붉은 구슬 속에 갇힌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파출소 앞을 내가 지나 다닌다 갑자기 매달린 모란 봉오리 내 이름이 아닌 핏빛 구슬 덩어리 좀처럼 피려 않던 먼지에 덮인//

약국을 지나다 / 최정례
왜 여기를 지나는지/ 왜 저 붉은 알약들을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몇년 몇월 몇일 몇시 몇분이었는지/ 한웅큼 알약을 털어 넣고/ 먼 싸이렌 소리를 듣던 게/ 예리한 칼 같은 것에 살을 베이면/ 베이는 순간은 통증을 모른다/ 늦게 불이 켜진 약국을 지난다/ 약병 속에는 이상한 이름의 성분들/ 그들이 지녔던 깨알 같던 희망도/ 죽어 정리되어 있으리라/ 무엇이라고 했던가/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지나가는 것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약병들은 참 나란히도 정리되어 있었다/ 한참 후에야 쓰라림과 욱신거림은 온다/ 약국의 셔터가 내려질 시간이다//

고래 횟집 / 최정례
누가 고래 새끼를 묶어놓았네/ 즐비한 횟집 아래/ 비가 오고/ 바로 눈앞에서 파도가 부르고/ 고래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엄마 젖을 부르네/ 빠져나가는 치맛자락 붙잡네/ 놓치고 헤매 다니네/ 빗속에서/ 고래는 죽은 눈을 뜨네/ 떠내려가는 파도 자락 붙잡네/ 죽은 입을 벌리고/ 흐르려구/ 죽은 꼬리를 죽은 지느러미를 젓네/ 빗줄기가/ 횟집 유리창을 쓸어내리네/ 간판 가장자리를/ 가죽나무 가지가지를/ 이마를 가슴을 창자를 다리를/ 흐르려구/ 흐를 수 없는 것들의 간곡함으로/ 흐리기로 하려구//

빵집이 다섯개 있는 동네 / 최정례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교회가 여섯 미장원이 일곱이다/ 사람들은 뛰듯이 걷고/ 누구나 다 파마를 염색을 하고/ 상가 입구에선 영생의 전도지를 돌린다/ 줄줄이 고기집이 있고/ 김밥집이 있고/ 두 집 걸러 빵 냄새가 나서/ 안 살 수가 없다//

놓친 구름 / 최정례
구름을 하나 샀네/ 어이없게도 크고 순한 구름이었네/ 멀리서 와서 아름다웠고/ 진창을 건너왔기에/ 붉기도 했네/ 나를 팽개친 천의 구름들/ 나를 찢은 만의 구름들/ 거기 있었네./ 나의 어리석음과 허망함을/ 그 구름 속에 부려놓고/ 내 구름을 기둥에 묶어둘까/ 장롱 속에 가두어 둘까/ 쩔쩔매었네/ 혹 구름도 발톱이 있다는 걸 들었는지/ 한 구름이 자신을 찢고/ 다른 구름이 되는 걸 보았는지/ 날마다/ 내 발을 주고 손을 주고/ 내 가슴을 뜯어 덮어 주었지만/ 구름은 역시 구름이었네/ 저기 저 구름/ 저건 또 누가 놓친 구름인지//

병점餠店 / 최정례
병점엔 조그만 기차역 있다 검은 자갈돌 밟고 철도원 아버지 걸어 오신다 철길가에 맨드라미 맨드라미 있었다 어디서 얼룩 수탉 울었다. 병점엔 떡집 있었다 우리 어머니 날 배고 입덧/ 심할때 병점 떡집서 떡 한점 떼어 먹었다 머리에/ 인 콩 한 자루 내려 놓고 또 한점 떼어 먹었다 내 살은 병점 떡 한점이다 병점은 내 살점이다 병점 철길가에 맨드라미는 나다 내 언니다 내 동생이다 새마을 특급 열차가 지나갈 때 꾀죄죄한 맨드라미 깜짝 놀라 자빠졌다 지금 병점엔 떡집 없다 우리 언니는 죽었고 水原, 烏山, 正南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헤어져 끝없이 갔다//

늪과 시 / 최정례
그곳엔 가지 말라고들 한다/ 빠지지 말라고도 한다/ 그러나 결국 가게 된다/ 망설이다 결국은/ 깜깜한 구멍을 기어서 기어서/ 부득불 간다/ 그곳은/ 집은 무너지고/ 집의 그림자만 누워 있다/ 강물은 이미 흘러가버렸고/ 산도 절도 밥도 시도/ 숨어서 울게 된다/ 그림자만 파먹게 된다/ 그림자가 되어/ 쥐처럼 기어다닌다// 어쩌다 빠져나온다 해요/ 그다음엔/ 농사를 지을 수도/ 광대가 될 수도/ 장사를 할 수도 없다/ 비굴하게나마 살아갈 수가 없다//

뒷모습의 시 / 최정례
나는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고/ 너는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지나갔다/ 언덕이 각도를 세워 기울고 있었다/ 아니, 언덕이 길어지며 다시 눕고 있었다/ 몇걸음 가다가 뒤돌아보았다/ 너는 등을 보이며 계속 가고 있었다/ 꿈속에서 지나가던 너처럼/ 정말 우리는전혀 모르는 사이 같았다//

딸기는 왜 이렇게 향기로운 걸까 / 최정례
자기 종족을 멀리 퍼뜨리기 위해 그러겠지/ 맛보고 못 잊겠으면 또 뿌려 심어달라고/ 그래봤자 인간들이 다 먹어치우고 마는데/ 딸기는 사랑스러워 앞으로도 뒤로도/ 사랑스러워 딸기는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이야기를 숨겨놓고 있는 거지/ 총총한 씨앗 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그 이야기 속에 숨은 아주 다른 이야기를/ 다 하다 보면 딸기는 사라지고 마는데/ 딸기가 맛있다고 하하 웃는/ 당신 속에 또 다른 당신이 숨어 있다/ 당신 속에 숨은 독재자, 주정꾼, 야구에 정신 팔아버린,/ 고집불통, 대책 없이 꽥 소리치는 당신의 아들딸/ 당신 속에 당신들 종합선물세트처럼 가질 수가 없어/ 멀리서 바라본다/ 흰 셔츠에 단정히 타이를 맨 당신이라는 당신/ '괜찮아'라는 말이 숨겨놓은 뿌리 깊은 암세포/ 그런 식의 말에 숨어 사는 변덕과 완고한 이념들/ 그런 식으로 숨겨놓은 ‘사랑해’라는 말의 기운은/ 감기 기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뜨거운 국 한 그릇이면 해결될/ 혹은 섹스 한 번이면 해결될*/ 사랑한다는 말은/ 또 다른 말을 숨겨야 겨우겨우 당신에게로 가니까/ 그러니까//
* Jeffreu McDaniel 「The Benjamin Franklin of Monogamy」에서 빌려 변주함.

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 최정례
여자는 빨래를 넌다/ 삶아 빨았지만 그다지 하얗지가 않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햇빛이 동쪽 창에서 서쪽 창으로 옮겨가고 있다/ 여자는 서쪽으로 옮겨 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살게 될 줄은 몰랐지/ 서쪽 창의 햇빛도 곧 빠져나갈 것이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봄이 있었다/ 어떤 시는 오래 공들여도 거기서 거기다/ 억울한 생각이 드는데 화를 낼 수도 없다/ 어쨌든 네가 입게 된 옷이야/ 벗어버릴 수는 없잖아 예의를 지켜/ 얼어붙었던 것들은 녹으면서/ 엉겨 매달렸던 것들을 놓아버린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들을 붙잡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이따위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형이 다니는 피아노교습학원 차를/ 타고 싶어서 쫓아갔다가 동생이/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얘기/ 그가 라디오에 나와 연주하고 있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멀리 산이 보였었는데/ 이 집은 창에 가득 잿빛 아파트뿐이다/ 전에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된 것/ 우연은 간곡한 필연인가/ 우연이 길에서 헤매는 중인데 필연이 터치를 했겠지/ 그래서 여기에 이르렀겠지/ 잃어버린 봄, 최초로 길을 잃고 울며 서 있었던 것은/ 여섯 살 때인 것 같다/ 피아노의 한 음이 이전 음을 누르며 튀어오른다/ 우연과 필연이 서로 꼬리를 치며 꼬드기고 있다/ 문득 서쪽 창으로 맞은편 건물의 그림자가 들어선다/ 퇴근하는 지친 몸통처럼 어둡다//

비스듬히 / 최정례
복숭아나무 똑바로 서 있는 거 못 봤다/ 꼭 비스듬히 서 있다/ 길가에서 길 안쪽으로 쓰러지는 척/ 구릉 아래쪽으로 기울어/ 몸 가누지 못하는 척// 허공에 진분홍 풀어/ 지나가는 사람 걸어 넘어뜨리려고// 안 속는다, 안 속아// 몸은 이쪽에 머리는 저쪽에 풀어 두고/ 왜 서 있나/ 비틀비틀 무슨 생각하며 걸어 왔나// 도화/ 길 밖으로 꽃잎 다 흘리고// 안 속는다, 안 속아//

발자국 / 최정례
무슨 새의 발자국이 눈 위에 총총총/ 몇 번 찍고 사라진 흔적 앞에/ 휘파람새/ 휘파람새를 본 적도 그 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데/ 얼떨결에 그 이름 입에 담네//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 백지 한가운데 흩뜨려놓다가 한줄기 휘파람따라/ 사라질 것 같네// 이 계곡이 숨겨놓은 눈사태보다도/ 털짐승의 갑작스런 출몰보다도/ 발밑/ 얼어붙은 계곡 물의 깊이가 더 무섭네// 휘황찬 상점의 유리에 비쳤던/ 순간의 그림자처럼/ 무슨 짐승이 날개를 친 흔적도 없이/ 앞뒤없이 백지 위에 발자국만 남겼나// 엄마, 위인전 읽다가 태어난 연도보다 죽은 연도를/ 몰라서 물음표가 되어 있으면 그 속으로 빨려드는 거/ 같애. 예를 들어 장영실(?~?), 이걸 보면 너무 무서워/ 서 확 넘겨버려. 아이가 말할 때// 어디선가 휘파람 한줄기 내려오면서 회오리 속으로/ 머리채를 잡아끄네//

늙은 여자 / 최정례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게들은 구멍 속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 최정례
갯벌에 꼬물대던 작은 게들이/ 갑자기/ 천지개벽의 지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제히 정지한다// 나는 아무런 의도가 없어, 없어/ 너희를 잡아 다리를 부러뜨릴 생각도/ 찜 쪄 먹을 계획도 없다구// 그래도// 꼬물거리던 그들은 내 기척에/ 기겁을 하고/ 눈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뻘 저 편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척 게눈을 뜨고 내 눈치를 본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그들이 내 발길을 피해/ 일제히 재빠르게 몸을 옮길 때/ 순간의 무수한 게걸음에/ 수평선이 빙그르 도는 것 같다// 아찔하다/ 하늘은 뻘로 바다는 하늘로 뒤집힌다/ 난 바람을 쐬러 방파제에 서있고/ 옷자락을 펄럭일 뿐인데// 섭섭하다/ 게들이 구멍 속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죽은 척 살아서 내 눈치를 볼 때//

국 / 최정례
외국에 나와서 제일 그리운 것은 국이다/ 국물을 떠먹으면서 멀리멀리/ 집으로 떠내려가고 싶은 것이다// 너무 추워서 양파 수프를 시켰는데/ 쟁반만 한 대접에 가득 수프가 나왔다/ 김도 나지 않으면서 뜨거워 혀를 데었다/ 너무 짜고 느끼하고/ 되직해 먹을 수가 없었다/ 몇 숟가락 못 뜨고 손들었다// 국이란 흘러가라고 있는 것이다/ 후후 불며 먹는 동안 뜨거운 내 집으로/ 흘러가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내 집은 어디에 있나/ 내 집에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나/ 왜 여기 나와 헤매고 있나// 여행이란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맘에 드는 곳에 고여 있는 것이다/ 거기 머물며 내 집을 생각하는 것이다/ 내 집이 어디 있는지 과연 내 집이/ 어디 있기는 있는 것인지/ 국을 그리워하며 떠내려가보는 것이다//

각자도생의 / 최정례
V자 편대비행으로 철새가 날아간다/ 그물 던졌다 당기듯 포물선을 그리다 순간에/ 선두가 바뀌고 날개의 리듬도 바뀐다/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고/ 잠을 자면서도 날아가는 그들/ 기어이 찾아가는 북쪽의 한 지점과/ 그들 눈 속에 나침반 같은 것이/ 양자역학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으나//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날아가는 그들/ 강변북로의 이 자동차 군단과도/ 아무 상관없이 날아가는 그들/ 철갑에 철갑을 두른 이 단독자들과/ 정체 중인 이 개별자들과/ 늘어선 강변의 부동산들과/ 깨질 것같이 투명한 겨울 하늘과/ 슬플 것도 없이 유리를 두른/ 이 유리자들의 부동산/ 완전 안전유리를 배경으로/ 새들과는 역방향으로/ 강변도로를 질주하다 정체하는/ 정체자들 위로/ 날아가는 날아가는/ V자 편대비행의 새들이 있고/ 이유도 없이 그들과는 상관도 없이/ 각자도생의 길을 가야 하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남의 소 빌려 쓰기 -송재학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 / 최정례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을 그냥 누워만 지낸다. 말 안 하고 일 안 하고 되새김만 한다. 소처럼 나는 나를 끌고 들판으로 나가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나가지도 못한다.// 소는 내 것도 아니고 남의 소였어요, 밥값은 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소를 끌고 나간 것인데, 남의 소는 아이 말을 잘 안 들어요. 그냥 풀을 뜯어 먹어야 하는데 하늘만 쳐다봐요. 콧김만 뿜고 뿔을 들이밀어요. 소는 나보다 훨씬 더 컸어요.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건 오히려 나였고요, 화가 났어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돌을 집어들었어요. 던졌어요. 소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어요. 설마 그 큰 소가 쓰러질 줄은 몰랐고. 어디에 맞았는지도 모르겠고.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도망갔어요. 무슨 일이냐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웅성거리는게 멀리서도 다 보였어요. 수의사가 불려 왔더라구요. 그가 내린 판단은 소가 병들어 죽었다는 거에요. 그들은 땅을 파고 소를 묻었어요. 다음 날은 소를 다시 파내고 달려들어 살을 떼어갔어요. 소값의 삼 분의 일이라도 건져야 한다고요. 한 열흘은 먹었나 봐요. 피범벅이 되도록 고기를 먹고 또 먹었어요.// 이거 누구한테 말한 적 있어요? 아니요, 왜요? 난 말 못해요. 난 알고 있거든요 소를 죽인 건 바로 나라는 걸. 수십 년 전 일 아닌가요, 병들어 죽었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난 말 못해요. 소는 죽었고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데 그들이 날 가만 두겠냐고요.//

금니빨 / 최정례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을 끝내고 밀려나온 뼛조각을 휘저으며 화부가 물었다. 이 금니빨은 어떻게 하실 건지요? 불구덩이서 빠져나온 누런 뼈 시신을 보고 다시 자지러지게 울던 유족들은 저승사자 앞에서 복종하듯 네, 네 라고만 했다. 유골함 속에 함께 넣어달라는 뜻인지, 필요 없으니 화부의 뜻대로 챙기라는 것인지 우왕좌왕하는 그들이 화부는 답답하기만 하다.// 구두 수선집 입간판에 "금니빨 삽니다"라고 씌여 있었다. 금니빨은 사서 뭐하려고? 그것들 긁어모았다가 다시 불구덩이에 넣어 녹였다가 여왕의 왕관이라도 만들어 바치자는 뜻일까. 아우슈비츠에 모여 쌓여 있던 금니빨들, 그때나 이때나 그 누가 지껄이건 말건 역사는 소용돌이치며 타들어간다. 저 안쪽에서 언뜻 금니빨 번쩍이며, 여긴 아우슈비츠도 아닌데 아우슈비츠 복제 골목에 모형 수용소 같은 구두 수선집 앞에 "금니빨 삽니다" 그리고 "무게 달아본 후 가격 쳐드립니다"//

11월 / 최정례
느닷없이 큰 곰이/ 천장까지 닿는 검은 그것이 나타나/ 우리 집 고양이를 아이들을 때려눕히고/ 나를 그러면?/ 함께 살자고 하면?/ 이 집 커튼을 찢고 들어와/ 돌이 된 내 심장을 두들기며/ 그러면 어떡하지?/ 창문의 불빛을 훔쳐보다가/ 느닷없이 현관문에 피아노에/ 차압딱지를 붙이는 집달리처럼/ 11월 어느 날/ 무심한 곰의 얼굴로 들이닥쳐서/ TV에서 배 두들기며 웃는 코미디언들/ 얼굴 위에 재를 뿌리고/ 소파 위에 내 손바닥 위에/ 뜨거운 석탄을 올려놓으면/ 그러면?/ 이 집 사느라 진 빛/ 이자의 이자 때문에/ 넌 역전 앞에 가 신문지나 덮고 누워 있어라/ 그러는데도/ 기대고 싶고 조금은 은근히 살고 싶어지면/ 그러면?//

입술 / 최정례
마음이 몸에 있지 않다면/ 마음 따로 몸 따로 사는 거라면/ 몸이 마음과 만나는 곳은/ 입술, 입술쯤일 것 같다// 마음의 입구는 입술/ 마음에 없는 말을/ 입술이 혼자 들썩일 때/ 그건 마음이 모르는 마음의 심연을/ 몸이 먼저 알고 중얼거리는 것// 아픈 몸이 마음을 부른다/ 통증을 건네보자고/ 마음이 몸을 만나/ 슬픔을 담아두려 하나/ 그럴수가 없다/ 입술이 열린다//

화투 / 최정례
슬레이트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뚝 또 뚝 떨어지구요/ 창에 기울은 오동꽃이 덩달아 지네요/ 종일 추녀물에 마당이 파이는 소리/ 나는 차배달 왔다가 아저씨와/화투를 치는데요/ 아저씨 화투는 건성이고// 내 짧은 치마만 쳐다보네요/ 청단이고 홍단이고/ 다 내주지만/ 나는 시큰둥 풍약이나 하구요/ 창 밖을 힐끗 보면/ 오동꽃이 또 하나 떨어지네요/ 집 생각이 나구요/ 육목단을 가져오다/ 먼 날의 왕비/ 비단과 금침과 황금 지붕을/ 생각하는데/ 비는 종일/ 슬레이트 지붕에 시끄럽구요/ 팔광을 기다리는데/ 흑싸리가 기울어 울고 있구요/ 아저씨도 나처럼 한숨을 쉬네요/ 이매조가 님이란 건 믿을 수가 없구요/ 아저씨는 늙은 건달이구요/ 나는 발랑 까진 아가씨구요/ 한심한 빗소리는 종일 그치지를 않구요//

내일은 결혼식 / 최정례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으면/ 한 짝은 엎어져 딴 생각을 한다// 별들의 뒤에서 어둠을 지키다/ 번쩍 스쳐 지나는 번개처럼// 축제의 유리잔 부딪치다/ 가느다란 실금/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트는 것처럼// 여행 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하고 짐을 싸고 나면/ 병이 나거나 여권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가기 싫은 마음이/ 가고 싶은 마음을 끌어안고서/ 태풍이 온다// 태풍이 오고야 만다./ 고요하게 자기 눈 속에 난폭함을/ 숨겨두고/ 내일은 결혼식인데 하필 오늘/ 결혼하기 싫은 마음이 고개를 쳐드는 것처럼//

창에 널린 이불 / 최정례
아파트 창에 널린/ 햇살에 적나라한 솜이불// 애국도 매국도 아닌/ 태극기도 일장기도 성조기도 아닌/ 목화솜 이불인지 폴리에스터 요깔개인지/ 이념도 아니고 사상도 아닌/ 우리의 생활// 이미 비난받은/ 우리의 내부인 것 같은// 내장을 꺼내/ 뒤집어놓은 것처럼// 입 꾹 다문 일 가구의/ 내면을 햇살에 내어 말리고 있는/ 작은 창 가난한 방의/ 두툼한 저 무념무상//

우주의 어느 일요일 / 최정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별빛이 달려오는데/ 왜 이렇게 밤은 캄캄한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말도 했다/ 그것은 아직 별빛이/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주의 어느 일요일/ 한 시인이 아직 쓰지 못한 말을 품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의 말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왜 도달하지 못하거나 버려지는가// 나와 상관없이 잘도 돌아가는 너라는 행성/ 그 머나먼 불빛//

냇물에 철조망 / 최정례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이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이다// 어제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바람이 불었는데/ 한 가지에 나뭇잎, 잎이/ 서로 다른 곳을 보며 다른 춤을 추고 있다// 저 너머 하늘에/ 재난 속에서 허덕이다가 조용히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모습으로/ 구름도 흘러가고 있다// 공중에서 무슨 형이상학적 추수를 하는 것 같다//

논 / 최정례
얼어붙은 논바닥에/ 벼 베인 그루터기에/ 이목구비에 다 내주고// 찬비 오는데 어쩌려고/ 그들은 아직도 들판에 서서/ 실려가는 쌀자루를 바라보고 있나// 꿈속에 버리고 온 아버지처럼/ 발목 얼어붙어서// 땅끝으로 가서는 낭떠러지를 만나고/ 더 끝으로 가서는 자기 발등을 찍는// 꿈속에 버리고 온 아버지처럼//

하산 / 최정례
그때 나는 숲에서 나와 길에 올랐다/ 검은 떡갈나무 숲 한 뼘 위에/ 초승달 눈 흘기고 있었다// 숲에서 나오자 세상 끝이었다/ 우리 밑에 짓눌려 부스럭대던 잎사귀들/ 아이처럼 지껄이던 산 개울 물소리/ 아무 생각 없이 나눈 악수는/ 흘러 흘러 흘러서 바위틈으로 스며들고// 숲에서 나오자 깜깜했다/ 허공중에 피었다 곤두박질 치는 것/ 깨진 접시 조각처럼 잠시 멈춰 있던 것/ 보았느냐고, 묻고 싶은데/ 갑자기 숲은 아득해져서/ 지나간 잎사귀들만 매달고 흔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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