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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황인숙 시인

부흐고비 2021. 12. 21. 06:26

황인숙 시인
1958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서문학상, 김수영문학상, 형평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리스본行 야간열차』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등이 있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 황인숙
보라,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 팅! 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 황인숙
꽃 몸살 앓으며 생강꽃 피어날 깨//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 황인숙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무관심의 빵조각이 퉁퉁 불어 떠다니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음습한 호수에서./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는 철새처럼.// 플라타너스야, 너도 때로 구역질을 하니?/ 가령 너는 무슨 추억을 갖고 있니?/ 나는 내가 추억을 구걸했던 추억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굴욕스런 꿈속에 깨어 있다 잠이 들고/ 자면서도 나는 졸리웠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황인숙
비가 온다./ 네게 말할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칠 거야./ 네 눈썹에 부딪칠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 황인숙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럭/ 보도블럭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퍽!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파두 -리스본行 야간열차 / 황인숙
잠이 걷히고/ 나는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어떤/ 암울한 선율이/ 방울방울/ 內分泌됐다/ 공기가 으슬으슬했다/ 눈을 들어 창밖을 보니/ 한층 더 으슬으슬하고 축축한/ 어둠이었다// 끝없이 구불거리고 덜컹거리는/ 産道를따라/ 구불텅구불텅/ 덜컹덜컹/ 미끄러지면서/ (이 파두, 숙명에는 기쁨이 없다.)// 나는 점점 더/ 부풀어 올라/ 탱탱해졌다/ 오줌으로 가득 찬/ 방광처럼.//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 황인숙
하얗게/ 텅/ 하얗게/ 텅/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텅/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텅//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바다의 초대 / 황인숙
오세요, 지친이여/ 눈매 서늘한 바다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다디단 바람이 불고, 불고, 불고/ 하늘엔 상념처럼 구름이 흩어지고// 자고, 자고, 또 자고,/ 하염없이 자고만 싶은 이여, 오세요./ 다디단 모래알들을/ 한 번 더, 한 번더,/ 하염없이 한 번 더 어르면서/ 바다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다친 비둘기 같은 이여/ 바다가 기라립니다/ 당신을 물고기처럼 팔팔해지게 할/ 눈매 서늘한 바다/ 다디단 여름 흠뻑 머금은/ 바다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거예요.//

걱정 많은 날 / 황인숙
옥상에 벌렁 누웠다./ 구름 한 점 없다./ 아니, 하늘 전체가 구름이다./ 잿빛 뿌연 하늘이지만/ 나 혼자 독차지/ 좋아라!/ 하늘과 나뿐이다/ 옥상 바닥에 쫘악 등짝을펴고 누우니/ 아무 걱정 없다/ 오직 하늘뿐/ 살랑살랑 바람이/ 머리카락에도 불어오고/ 발바닥에도 불어오고/ 옆구리에도 불어온다/ 내 몸은 둥실 떠오른다/ 아, 좋다!/ 둥실, 두둥실//

남산, 11월 / 황인숙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11월 / 황인숙
납물처럼 떨어지는 빗줄기 속./ 온종일 슈퍼마켓 처마 밑에서/ 발이 저리도록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이들의 구두코를 바라보던/ 거지 아이의 마음을, 은전 한 닢,/ 햇빛으로 주조한 것인 양/ 따스하게 하네.//

11월 / 황인숙
너희들은 이제/ 서로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11월,/ 햇빛과 나뭇잎이/ 꼭 같은 맛이 된/ 11월.// 엄마, 잠깐 눈 좀 감아봐! 잠깐만.// 잠깐, 잠깐, 사이를 두고/ 은행잎이 뛰어내린다./ 11월의 가늘한/ 긴 햇살 위에.//

​열한시 반 / 황인숙
지하철 회현역/ 남대문 시장 쪽 출구 계단/ 무뚝뚝하게 닫힌 상가의 셔터/ 어둑하고 얼룩한 계단/ 하얗게 식은 연탄 화덕/ 스무 마리쯤의 오징어와 타일 벽에 기대어/ 잠든 아주머니/ 코를 찌르는 연탄가스/ 막 빠져나오면/ 노란 귤이 수북한 손수레/ 노점상의 애절한, 붉은 눈/ 눈이 붉은 밤.//

골목길 / 황인숙
울퉁불퉁/ 동네 집 사이로 난/ 좁은 계단 길에/ 부러진 목발 기대앉아 있네요/ 외로운 얼굴로 기대앉아 있네요// 작은 목발이에요/ 손잡이에 감긴 하얀 헝겊에/ 뽀얗게 손때가 묻어 있어요/ 참 작은 목발이에요/ 부러졌네요// 지나가는 사람 드문/ 울퉁불퉁 좁은 계단 길/ 햇빛 한 줌, 잡풀 한 줌/ 강아지 오줌 자국 한 줌.//

막다른 골목 / 황인숙
문은 헤맨다/ 열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토록 완강하게/ 그는 문을 흔들고 있다/ 문은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는 부술 듯이 문을 두드린다/ 문은 흔들리면서 마음을 굳혔다/ 난 몰라, 널 모른다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는 헤맨다/ 여태껏도 헤매다가 우연히 이 문을 만났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흔들면서/ 자기가 왜 이러는지 헤맨다/ 문의 완강한 거부만이/ 그의 완강함의 명분이다/ 깊은 새벽 막다른 골목길을/ 그와 문이 흔들고 있다.//

아주 외딴 골목길 / 황인숙
이 외딴 골목길/ 빗방울도 처마에 부딪혀/ 자주 발 딛지 못하는 곳/ 길이라기보다는 틈/ 낡은 장롱 같은 집들의 틈/ 그 틈, 더 좁아지지 않도록/ 시멘트로 다져놓았다// 길인 듯 아닌 듯/ 숫기 없는 사람은 그 앞에서 발길을 돌릴 것이다/ 인기척 없는 집들의/ 인적 없는/ 이 외딴 골목길/ 스티로폼 상자와 고무 양동이 안에/ 나팔꽃 봉숭아가 피고지던 흙이 굳어 있다/ 불 안 드는 빈방처럼// 이, 어린애 같아 보이는 길/ 정작은 나이배기일 것 같은 길/ 시멘트가 빈틈없이 깔려 있는/ 그러나 이 야성적인 길.//

공터 / 황인숙
이런 공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폐업한 지 오래도록/ 간판도 내리지 않은 여인숙/ 먼지 낀 유리문 너머/ 퍼렁 옷과 빨강 옷이 쌓여 있던/ 유명 메이커 大할인점/ 문밖으로 개숫물 졸졸 흘리던 떡볶이집/ 그리고 동사무소와 파출소 엉덩이 아래/ 이런 공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 자드락 멋을 물씬 풍기며// 말짱 허문 집들 위로/ 공터가 불쑥 솟아났다/ 공터 한구석에/ 껍질이 낡은 페인트처럼 벗겨진/ 나무 한 그루가 어리둥절 솟아났다/ 나도 어리둥절/ 얼마 만인가, 이 공터// 공터의 손을 가만히 잡으면/ 내 마음은 출렁인다/ 어린 시절의 공터놀이/ 넘실넘실 돌아온다/ 그리웠던 공터/ 그리운 공터.//

조용한 이웃 / 황인숙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끔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딱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잔가지들이 무수히 많고 본줄기도 가늘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모진 소리 / 황인숙
모진 소리를 들으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더라도/ 내 귀를 겨냥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모진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쩌엉한다./ 온몸이 쿡쿡 아파온다/ 누군가의 온몸을/ 가슴속부터 쩡 금가게 했을/ 모진 소리// 나와 헤어져/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내 모진 소리를 자꾸 생각했을/ 내 모진 소리에 무수히 정 맞았을/ 누군가를 생각하면/ 모진 소리,/ 늑골에 정을 친다/ 쩌어엉 세상에 금이 간다.//

숨쉬는 명함들 / 황인숙
약수터 가는 길의/ 서늘하고 침침한 나무 그늘/ 납작하고 딱딱한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그는 명함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빠닥빠닥 부스럭부스럭/ 배고픈 다람쥐처럼// 평생 좋은 일은 자그마한 것이나 드물게 보았을/ 그보다 좀더 큰 나쁜 일들을 드문드문 보았을/ 안경을 치켜올리며/ 그는 그 흰 빠닥종이를 뒤적거린다// 나이는 예순에서 예순다섯 사이/ 차림새는 그럭저럭 말끔하다/ 그는 명함 속으로 빨려들어가 있다/ 무엇을 찾는 걸까?/ 사랑이나 감사, 쓸모의 징조를?/ 그는 수줍어 보이고 영악해 보이고 고적해 보인다// 숨쉬는 명함들/ 그의 평생이 담긴 명함들/ 어떤 명함은 기억에 없다/ 그 자신의 삶의 어느 부분처럼// 그는 땀이 찬 손바닥을/ 바지에 쓱 문지르고/ 천천히, 꼼꼼히/ 명함을 들여다본다/ 숲을 울리는 꿩 울음소리도/ 한참을 지켜보는 내 시선도/ 명함들 속에 빠진 그를/ 낚아채지 못한다.//

명아주 / 황인숙
어렸을 때 명아주 밭에 들어간 적이 있다/ 보드라웠던 듯도 하고 까실했던 듯도 하다/ 무뚝뚝했던 듯도 하고 나른했던 듯도 하다/ 튼실했던 듯도 하고 생기 없었던 듯도 하다/ 지금 무슨 냄새를 맡았는데,/ 설명할 수 없지만 명아주 냄새다/ 가시철망에 둘러싸였던 듯도 하고/ 연탄재가 뒹굴었던 듯도 하다/ 근처에 호박꽃이 피었던 듯도 하고 저녁이었던 듯도 하고/ 교회 종소리가 들렸던 듯도 하다/ 우리 동네였던 듯도 하고 아니었던 듯도 하고/ 하늘 높이 새털구름이 흩어져 있었던 듯도 하고/ 아무튼 나지막이/ 명아주 밭이었다/ 그리운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코끼리 / 황인숙
동춘 서커스단에는/ 얼어 죽은 코끼리의 박제가 있다고 한다/ 아주 오래 전 추운 봄날/ 수원에서 본 그 늙은 코끼리일까?/ 차가운 햇볕 속에서/ 낡은 천막처럼 펄럭였었다/ 그 잿빛 주름살의 고드름/ 주렁주렁 추위를 매달고……/ 오래도록 안부가 궁금했었다.//

겨울밤 / 황인숙
나는 네 방에 음악을 불어넣는/ 늦봄의 바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수은 얼음 알갱이의 눈보라로/ 네 방을 질척질척 얼리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도 내가 춥다//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황폐함/ 피로,암울,막막,사납게/ 추위가 삶을 얼려 비트는 황폐함/ 그러면서도 질기게도/ 죽을 것 같지 않은 황폐함// 모르는 별로 너 혼자/ 추방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영혼을 뒤쫓는 것이/ 수은 얼음 알갱이의 눈보라라면?// 아,나는 네 영혼에 음악을 불어넣는/ 늦봄의 포근한 바람이고 싶었다// 사실 나는 죽었는지 모른다.//

겨울 햇살 아래서 -갑숙에게 / 황인숙
철 모르고 핀 꿀풀꽃과/ 미처 겨울잠에 들지 못한 철없는 꿀벌이/ 겨울 햇살 아래서 만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고 한다// 우리한테 미래는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들은/ 미래에 대해 곰곰/ 생각하는 얼굴일 것이다/ 겨울 햇살 아래서.//

하늘로 뚫린 계단 / 황인숙
나는 계단이 좋다/ 이왕이면 오르막 계단이 좋다/ 양옆에 집집의 담장과 문들이 벽을 이루더라도/ 정수리만은 하늘로 뚫렸으면 좋겠다/ 그리 까다로운 주문도 아닌데/ 계단 꼭대기 집들이 서너 걸음만 뒤로 물러서주면 된다// 아, 정수리가 하늘로 뚫린 계단/ 그 층계가 스물을 넘지 않아도/ 한없이 한없이 뻗어 올라가네/ 회오리처럼 소용돌이처럼//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오르막 계단에/ 나는 휩쓸린다.//

관광 / 황인숙
물가의 식탁/ 초로의 남자와 여자/ "그때는 잘 나갔지 뭐, 한달에/ 백오십만 원씩 꼬박꼬박 받았으니까."/ 호기로운 목소리의 남자/ 고개를 주억거리는 여자/ 철썩 철썩 철썩/ 호수가 파도친다/ 모터보트가 지나간 한참 후까지// 물가의 식탁/ 이동막걸이와 제육복음/ 잉잉거리는 파리와 꿀벌/ "어이! 뭣들 해? 갈 시간 됐어!"/ "보기 좋구만잉!"/ 한 무리 초로의 남녀들 왁자지껄/ 관광버스를 향해 걸으며 외친다// 물가의 식탁/ 알았다고 남자는 소리지르고/ 쿡쿡 웃으며 고개 숙이는 여자/ 철썩 철썩 철썩/ 파도치는 호수.//

미로 / 황인숙
점심시간 막 지나/ 황성자 씨 가방 채겨 나간다/ ... 아춤마, 어디 가세요?/ ... 집에 가/ ... 왜요?/ ... 김 반장이 가래네/ 황성자 씨 순한 눈/ 끔벅, 끔벅하면서/ 얼굴 붉히고 웃는다// 황성자 씨가 화장실 갔다가 작업대로 못 돌아오고 공장을 헤맬 때면/ 젋은 아가씨들 킥킥거렸다// 37년 다닌 공장/ 더 다니려고 숨겨온 치매/ 기어이 들키고 말았네//

​술래 / 황인숙
"나 좀 잡아봐, 나 좀 잡아봐!”/ 지하철 플랫폼에서/ 제 엄마 옆에 선 형아한테 애걸하며/ 네댓 살 사내애가 자판기 쪽으로 뛰어간다/ 내 조카애도 저만할 때/ "나 찾아봐! 나 찾아봐!"/ 나만 보면 커튼 뒤로 장롱 속으로 숨어들었지/ 어린애들은 쫓기보다/ 달아나기를 좋아해/ 찾기보다 숨기를 좋아해/ 아슬아슬 조마조마 무서운 게/ 그렇게나 즐거운 어린이여/ 어른이 되면/ 술래가 즐거우니라/ 아니, 술래가 바뀌니라//

응시 / 황인숙
내 귀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어찌 네가 편할 것인가./ 그리고/ 네 마음밖에 그 무엇이 들리겠는가.//

후회 / 황인숙
깊고 깊어라,/ 행동뒤의 나의 생각/ 내 혀는 마음보다/ 정직했으니.//

희망 / 황인숙
어제가 좋았다/ 오늘도 어제가 좋았다/ 어제가 좋았다, 매일/ 내일도 어제가 좋을 거이다.//

졸음 / 황인숙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 달팽이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 유리창 위에 달팽이 한 마리./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

풍경 / 황인숙
이미 기세 높은/ 오전 열한시의 쨍쨍한 햇볕 속에/ 매연을 뿜으며 덜컹거리며/ 트럭도 지나가고 버스도 지나가고/ 오토바이도 택시도 지나다니는 대로변 길바닥에/ 일인용 소파가 놓여 있다/ 그 소파에/ 등받이는 뒤로 젖혀진 얼굴과 어깨를 걸치고/ 양쪽 팔걸이에는 팔꿈치를 걸치고/ 벌린 무릎과 맞붙인 발바닥과 나머지 몸뚱어리를/ 포근히 파묻고 한 남자가 잠들어 있다/ 홀연히 떨어진 방패연처럼// 난데없는 그 소파/ 자세히 보니 눈에 익다/ 이따금 들르던 카페가 소파 뒤에서/ 철근과 시멘트 블록 파편으로 얼크러져 있다// 바둑판무늬의 일인용 소파에 햇볕이 몰려 있다/ 한 남자가 혼곤히 잠들어 있다/ 홀연히 떨어진 방패연처럼//

유다 / 황인숙
그리움이 크면 환상./ 환상의 비눗방울을/ 그저 보시라./ 마지지 말라./ 만지지 말라./ 만지지 마, 말라니까!// 그리움이 크고 겁이 없으면/ 그를 다친다.//

간발 / 황인숙
앞자리에 흘린 지갑을 싣고/ 막 떠나간 택시/ 오늘따라 지갑이 두둑도 했지// 애가 타네, 애가 타/ 당첨 번호에서 하나씩/ 많거나 적은 내 로또의 숫자들// 간발의 차이 중요하여라/ 시가 되는지 안 되는지도 간발의 차이/ 간발의 차이로 말이 많아지고, 할 말이 없어지고// 떠올렸던 시상이 간발 차이로 날아가고/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치고/ 길을 놓치고 날짜를 놓치고 사람을 놓치고// 간발의 차이로 슬픔을 놓치고/ 슬픔을 표할 타이밍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네/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뺨을 푸들거리며// 놓친 건 죄다 간발의 차이인 것 같지/ 누군가 써버린 지 오랜/ 탐스런 비유도 간발로 놓친 것 같지// 간발의 차이에 놓치기만 했을까/ 잡기도 했겠지, 생기기도 했겠지/ 간발의 차이로 내 목숨 태어나고// 숱한 간발 차이로 지금 내가 이러고 있겠지/ 간발의 차이로/ 손수건을 적시고, 팬티를 적시고//

나무 / 황인숙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하늘꽃 / 황인숙
날씨의 절세가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텅 비는 것 같습니다/ 앞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에 걸려/ 뒷눈송이들이 둥둥 떠 있는/ 하늘까지 까마득한 대열입니다/ 저 너머 깊은 天空에서/ 어리어리한 별들이 빨려들어/ 함께 쏟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빨려들어/ 어디론가 쏟아져버릴 것 같습니다/ 모든 상념이 빠져나간 하양입니다/ 모든 소리를 삼키고/ 하얗게 쏟아지는 눈 오는 소리/ 나를 호리는 발성입니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 묵직해진 우산을 뒤집어 털어/ 길 위에 눈을 돌려줬습니다/ 계단골이 안 보이도록 쌓인 눈/ 아무 데나 딛고 올라가려니/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내 방에 들어서 문을 닫으니/ 호주머니 속에 눈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벚꽃 반쯤 떨어지고 / 황인숙
한 소절 비가 내리고/ 바람 불고/ 벚꽃나무 심장이/ 구석구석 뛰고// 두근거림이 흩날리는/ 공원 소롯길/ 환하게 열린 배경을/ 한 여인네가 틀어막고 있다/ 엉덩이 옆에 놓인 배낭만 한/ 온몸을 컴컴하게 웅크리고/ 고단하고 옅은 잠에 들어 있다// 벚꽃 반쯤 떨어지고/ 반쯤 나뭇가지에 멈추고.//

화난, 환한 수풀 / 황인숙
- 네네시 사십분! 농담이겠지?/ 그녀는 눈을 흡뜨고 시계를 본다/ - 아아니, 아니,/ 시계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며/ 찰칵찰칵 제 갈 길을 간다/ 그녀는 지붕 위로 휙휙 날아간다/ 공중에서 뚝 떨어진 그녀를 보는/ 그의 화난, 환한 얼굴/ - 날 나무라면 안 돼/ - 그럼 풀이라 할게//

자유로 / 황인숙
나는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구절초처럼 빛나는 혈통에 대한/ 간도 쓸개도 없이// 멍하니 기가 죽어 살고 있다.// 나는 타락했다./ 내가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피의 계율을 잊었기 때문에.//

일용할 물 / 황인숙
오늘은 또 어디서/ 머리를 적시나/ 어디서 가슴을 적시고/ 발을 적시나/ 오늘은 또 어디서/ 온몸이 젖어/ 뚝 뚝 물 떨구며/ 돌아오나/ 돌아와 젖은 그림자를/ 바람벽에 널어놓고/ 말려보나//

젖은 혀, 마른 혀 / 황인숙
바람의 축축한 혀가/ 측백나무와 그 아래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슬며시 눈을 뜨고/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다// 바람의 마른 혀가/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스스로 눈을 감고/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잠이 든다/ 영혼이 펄럭이며 잘 마르는 날.//

주름과 균열 / 황인숙
내 기억이 포개진 수많은 주름/ 속에 포개진 균열// 그 단애에/ 헐벗은 나무가 서 있다/ 눈과 얼음이/ 따개비처럼 불가사리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기가 막히다/ 세월의 빠름이,아니 사실/ 빠른건 모르겠는데/ 세월의 많음이// 균열이 포개진 주름.//

일요일의 노래 / 황인숙
북풍이 빈약한 벽을/ 휘휘 감아준다/ 먼지와 차가운 습기의 휘장이/ 유리창을 가린다/ 개들이 보초처럼 짖는다// 어둠이/ 푹신하게 깔린다// 알아?/ 네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게/ 덜 외롭다//

이름 모를 소녀 / 황인숙
이제,/ 이름 모를/ 사람이 없네/ 뉘신지 당신이/ 당최 궁금치 않네// 이름 모를 거리가 없네/ 어디에서건 그곳이/ 대강 어딘지, 무슨 동(洞)인지/ 절로 알 만큼 한 도시에/ 오래도 살았기에// 맹랑하지도 허무하지도/ 간질간질하지도 않은/ 하루, 또 하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흘러간 가요/ '버들잎 따다가 쓸쓸히 바라보는'/ 가슴을 저미네/ 알 수 없는 것투성이고/ 매사 서툴렀던/ 흘러가버린 시절/ 아뜩히 밀려오네//

도시의 불빛 / 황인숙
좀더 밤이 오길 기다리자꾸나./ 내 방에서처럼 저 집들도/ 분명 전등을 켜고 있을 터인데/ 불빛들이 내게 닿기에는/ 아직 충분히 어둡지 않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꾸나. 샛별은/ 하늘의 경사를 오르며 맑아진다./ 집들의 윤곽이 가라앉고/ 말갛게 창문이 떠오른다./ 밤을 보낼 치장을 마친/ 집들이 떠오른다.// 언젠가 한 친구가 외쳤었지./ "저 불빛들 좀 봐!/ 알알이 슬픔이야!"/ 지금 저 건너편에서 어떤 이도/ 이쪽을 건너보며 똑같은 탄식을 하고 있을지도// 슬프든 노엽든 따뜻한 핏톨처럼/ 집집의 불빛들이/ 밤의 언덕, 골짜기에/ 고요히 웅얼거리며 맥박 친다.//

말의 힘 / 황인숙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생활! / 황인숙
결혼한 친구가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일해서 벌어먹고 사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데/ 수삼년이 걸렸다... 나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처음엔 미칠 듯 외로운 일이었다."// 자기 먹이를 자기가 구해야만 한다는 것./ 이 각성은, 정말이지 외로운 것이다./ (결혼을 한 여자에게는 더욱이나.)// 내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가난하다는 건 고독한 것이다.// 인생이란! 고단하지 않으면/ 구차한 것.//

생활의 발견 / 황인숙
소스 맛에는 중독성이 있다/ 때론 소스를 맛있게 먹기 위해/ 돈가스가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돈가스 소스는 돈가스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연구하고 만든 것일 테지만// 소스만 있으면 어떤 특정한 음식의 맛을/ 상당 정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맨밥에 돈가스 소스를 끼얹어 먹으면/ 돈가스와 흡사한 맛이 난다// 시작법은 시의 소스/ 제 소스의 레시피를 가진 시인들이 부럽다/ 언제라도 한 접시 먹음직한 시를 내놓는 그들!/ 나는 레시피도 없고/ 찬장 깊숙한 데서 꺼낸 인스탄트 돈가스 소스는/ 유통 기한이 1년이나 지났다/ 그래도 가난한 나는/ 맛있게 먹지//

삶 / 황인숙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삶의 시간을 길게하는 슬픔 / 황인숙
나이는 서른 다섯 살./ 가을도 저물어 시린 바람이 안팎으로 몰아친다./ 이제는 더 이상 청춘도 없다. 사랑도.// 밤은 막막, 낮은 휑휑./ 그렇지만,/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앙다문 이빨./ 눈꺼풀 저 구석에 지그시 눌러둔/ 쓰라린 눈알./ 억울해? 억울하지.// 억울함을 딛고 비참을 딛고/ 생이 몰아치는 공포를 딛고/ 딛고, 딛고!// 오, 추락하는 꿈으로도/ 오, 따분한 꿈으로도/ 오, 처량한 꿈으로도/ 비비틀리는, 푸드덕거리는/ 몸은 작열한다!// 죽은 몸에는/ 눈먼 꿈도 깃들이지 않는다네./ 당신을 저버린 연인이 무섭게 차갑다고?/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다른 삶 -이아라 리 감독의 영화 <종합적 쾌락>을 보고 / 황인숙
얼굴이 예뻐도/ 삶이 지루할까?/ 돈이 많아도/ 삶이 지루할까?/ 집안이 무고해도/ 삶이 지루할까?// 여일한 삶이 지루해/ 예쁜 얼굴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앞으로 추한 얼굴로 한 번 살아보려고/ 밋밋한 삶에/ 피어싱을 한다/ 문신을 한다/ 성형수술을 한다.//

 

삶의 음보 / 황인숙
노래방에서/ 누군가 아주 느린 곡조의 가요를 노래하면/ 따라 듣기에만도 나는 진땀이 난다/ 내게는 그가/ 노래를 부른다기보다 불러낸다고 느껴진다/ 저 힘!/ 가창력이라기보다 저 정신력!/ 말하자면, 저력!/ 다시 말하자면 가창력!/ 장식음과 바이브레이션/ 모음의 젖과 꿀이 넘쳐흐르네// 나는 간신히 음표에 올라앉았다/ 음과 음 사이의 거리가/ 내게는 항시 아득하여/ 나는 총총히 노래했다/ 짤딸막한 모음의 나의 노래여/ 내 노래는 언제나 단조로웠다.//

길 / 황인숙
『내셔널 지오그래픽』 포스터 속의 길은/ 피려는 것인지 지려는 것인지 모를/ 꽃송이들을 단 잡목 덤불 사이로 나 있다./ 아마 지려는 것인 햇빛 아래/ 잔돌이 구르는 비탈이다./ 온기가 가시지 않은 그 길은 멀리/ 안개와 구름에 싸인 산맥들과 하늘로/ 시선을 이끌어, 떨구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내 시선이, 책방을 겸한 문구점이 있는/ 길거리의 길 위로 돌아오자마자/ 누군가 나를 향해 돌진하듯, 튀어오른다. 마주 걸어오는/ 그의 몸의 길은/ 험준하게 뒤틀려 있다./ 안개와 구름에 싸여.// 그 길 위에서, 그의 얼굴은 정면을 향해 있고/ 그의 눈의 길은 곧다./ 그래서, 그의 바른 자세는/ 더욱 비틀려 있다./ 힘껏 튈려고/ 휜 스프링처럼.//

꿈 /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이인성의 소설 제목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에서 차용


비 / 황인숙
저처럼/ 종종 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

비 / 황인숙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비 / 황인숙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가슴 졸일 자식도 없는/ , 같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할머니 비에 젖으신다// 후암동 종점/ 햄버거집 처마 밑/ 깊숙이도 못 들어서시고/ 처마 끝에 쪼그려앉아/ 할머니 비에 젖으신다// 흐린 유리알 같은 할머니의 눈에/ 빗물이 흐른다, 멈추지 않는다/ 빗줄기는 머리에도 아니고 가슴에도 아니고/ 할머니의 몸에 들이친다/ 납작 눌린 머리칼과 곱은 손등에 들이친다// 할머니는 기억도 기력도 없으시지/ 도둑고양이만큼도 아는 이가 없으시지/ 아이고, 하느님/ 왜 나를 이때까지 살게 하셔서/ 이렇게 춥고 외롭게 하십니까?/ 한탄도 할 줄 모르시지/ 하지만 평생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설움은 남으셨을 할머니/ 생각도 없이 눈물이 흐르고/ 그러면 멈추지 않으실 할머니// 비가 조금 듬성해지자/ 할머니는 접은 판지상자 뭉치를 머리에 이시고/ 비틀비틀 일어나신다/ 빗물에 젖어드는/ 판지 뭉치 머리에 이시고/ 할머니,/ 멍한 얼굴, 비틀걸음으로/ 어디로, 어디론가 걸어가신다.//

안개비 속에서 / 황인숙
나무들은 자기 심장의 박동대로/ 새를 날린다.// 급히 지나쳤으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리라./ 붉은 신호등 앞에서/ 겨우내 먼지에 싸여/ 그 옆의 제설용 모래 상자와 다름없어 보이던/ 쥐똥나무덤불이 여릿여릿 숨쉬는 것을.// 아직도 제설용 모래 상자와/ 별 다름은 없어 보이지만./ 보이는 대로 보지 말아야지./ 그녀가 어떻게 보이고 싶었을까?/ 바로, 봄./ 왠지 그러리라고.// 붉은 신호등 앞에서 발을 멈추고./ 그녀의 잠든 얼굴 위에/ 오는지 마는지 한 빗소리에 귀기울이며/ 이제사 네 머리칼도/ 젖어들고 있다.//

비 온 가을 아침 / 황인숙
블록 담벼락은 젖어 있었다./ 남은 잎새를 마저 던지고/ 튤립나무는 우두커니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길바닥은 노란 잎들을/ 힘껏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튤립나무보다/ 더 벗고 있었다./ 주름살을 기묘히 구겨/ 갓난애의 얼굴을 하고/ 후들후들 떨며/ 행인들의 눈치를 보며/ 먼 유년을/ 놀고 있었다.//

가을날 새벽 / 황인숙
가을날 새벽/ 말간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별들/ 쭉 훑어낸/ 손가락 시리다// 가을날 새벽/ 서른댓 개의 증증계/ 뚜벅뚜벅 짚어/ 깡총깡총 뛰어/ 내 몸 속에/ 층층계/ 발끝 시리다// 참은 숨 물밀리듯/ 얼굴 시리다/ 가을날 새벽// 흠뻑 울음 운/ 젖은 눈들의 숲/ 새들이 길을 흔든다.//

가을밤 1 / 황인숙
습기를 전해 주던 바람이 습기를 거둬 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단풍 드는 나무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질 나뭇잎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늙어갈 친구들과 나// 소슬바람에 가팔라진 가슴/ 베어 물 듯 귀뚜라미 울고/ 홀로, 슬며시, 어둡게/ 온 생이 어질어질 기울어지는/ 벼랑 같은/ 밤.//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

황사 바람 1 / 황인숙
무수한 틈으로 꽉 짜인/ 꽉 짜인 어금니로 바람이/ 만물을 분쇄한다/ 신경쇠약 직전의 유리창들이/ 들들들들 갈린다/ 갈린다 틈틈 켜켜로/ 바스라져 하늘이 휘날린다/ 저 뿌연 아가리에/ 가시철망을 던진다면/ 검고 둥근 가시철망이/ 고딕체로 공중에 굴러다닌다면!//

죽음의 춤 / 황인숙
그건 가을날인데요/ 햇살이 노릇노릇 졸고 있는/ 산중턱 무덤가인데요/ 부들이 손짓하듯 나부끼는대요./ 갈대도 억새풀도 나부끼는데요./ 하늘과 산모롱 가득히/ 노란 깃털 파란 깃털이 흩날리는데요./ 무덤의 주인들이 잠을 깨어나/ 가늘게 가늘게 눈을 뜨는데요./ 아아 그런/ 가을날인데요.// 웬 새가 쪼롱쪼롱 울며/ 날아가네요.//

지극히 속된 기도 / 황인숙
거리마다 교회당이 있다./ 하늘에는 달이 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내가 가본 교회당들의 거리들./ 거리들의 교회당들./ 그 안에는 촛불들이 너울거렸다./ 기도하는 눈꺼풀처럼./ 달싹이는 입술처럼.// 누군가 불붙여놓은 촛불 앞에서/ 재빨리 기도한 적이 있다./ 그 기도는 지극히 속된 것이었다./ 근사한 시를 쓰게 해달라는 것,/ 약간의 돈이 생기게 해달라는 것,/ 또, 나를, 용서해달라는 것.// 교회당 안은 조심스럽고 과묵한/ 그리고 눈어둡고 귀어두운 노인처럼/ 귀기울였다.// 내가 가본 온 거리의 교회당들./ 내 가슴속 거리의 창고에, 울릴까 말까 망설이는,/ 울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종들을 쟁여놓은 그 교회당들.// 나는 기도했었다./ 무구한 빗소리를 품고 있는 회색 구름 아래서/ 알록 양산을 쓰고.//

진눈깨비 / 황인숙
1./ 유리창 저쪽/ 맑게 개인 저편// 감기지 않는 눈// 우리 다시 만날 때/ 너는 나를 기억할까?// 내가 너를 기억할까?// 3월,/ 벗을 수 없는 추위.// 2./ 네 이름 이제는/ 나를 울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삶이 나를 삐치게 할 때.// 네가 안 쓴 달력들이/ 파지처럼 쌓였던 나날,/ 이라고 하면 네게 위안이 될까?// 오오, 미안, 화내지 말라!/ 나도, 미친 듯, 살고 싶다!// ......그러면 추위가 벗어질까?//

진눈깨비 2 -죽은 벗에게 / 황인숙
네 이름 이제는/ 나를 울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삶이 나를 삐치게 할 때.// 네가 안 쓴 달력들이/ 파지처럼 쌓였던 나날,/ 이라고 하면 네게 위안이 될까?/ 오오, 미안, 화내지 말라!/ 나도, 미친 듯, 살고 싶다!// ....그러면 추위가 벗어질까?//

참새도 혼자는 외로운가보다 / 황인숙
아파트 화단 나리꽃이 피어있는/ 바위 위에 참새 두 마리 날아와/ 부지런히 쪼아 대며 폴짝폴짝/ 짹짹 폰 사진 에 담으려니// 가볍게 소나무 가지위로 폴짝폴짝/ 바위위로 폴짝폴짝 참새도 혼자는/ 외로운가보다/ 참새 두 마리 짹짹//

추운 얼굴로 웃으며 / 황인숙
차가운 안개비 속에서 팽팽히/ 꽃들은 시들지도 못했다./ 노랑과 빨강, 분홍 튤립들/ 보랏빛 히야신스/ 은방울꽃들의 하양./ 사람들은 그 사이를/ 추운 얼굴로 웃으며 거닐었다./ 이따금씩 해의 행방을 찾아/ 회색 하늘 속을 기웃거리며./ 빗방울이 굵어졌다./ 꽃향기가 방울져 흩어졌다./ 어떤 이들은 우산을 펴 쓰고/ 우리는 지붕 밑을 향해 뛰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쓸어 닦으며/ 너는 맥주를 마셨다./ 합석한 노인들은 달콤해 보이는 빵과 함께/ 김이 오르는 커피를 마셨다./ 창밖에는 꽃들이/ 추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칼로 사과를 먹다 /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삶은 감자 / 황인숙
이건 확실히/ 잘못 선택한 밤참이다/ 한 번이라도 감자를/ 삶아 본 적이 있는가?/ 스무 번도 더 냄비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찔렀다/ 열대야처럼 푹푹/ 김 속에서 감자들/ 生을 수그리지 않는다/ 쉭쉭거리며 가스불은 시퍼렇게 달려들고/ 냄비는 열과 김을 다해 내뿜고/ 감자는 버티고 있다/ 덥고 지루한 싸움이다/ 눈꺼풀이 뻣뻣하고 무겁다/ 이렇게까지 감자를 먹어야 하나?/ 한 번 더 찔러보고 아직 아니라면/ 그냥 자야겠다/ 우, 삶은 감자!//

여기서부터 / 황인숙
그렇게 있을 법하지는 않는 일이 떠오를 때/ 때로 바로 그 작은 확률 때문에/ 그 일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믿곤 한다, 믿고야 한다// 아, 그, 작은, 확률/ 인상적으로 인상적인/ 그, 작은!//

움찔, 아찔 / 황인숙
햇볓에 따끈하게 데워진/ 쓰레기 봉투를 열자 마자/ 나는 움찔 물러섰다/ 낱낱이 몸을 트는 꽃잎들/ 부패한 생선 다가리에 핀/ 한 숭어리의 흰 국화// 그들은 녹갈색과 황갈색의 진득거림을/ 말끔히 빨아먹고/ 흰 천국을 피워낸다// 싸아한 정화의 냄새를 풍기며// 나는 미친듯이 에프킬라를 뿌려대고/ 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고/ 지옥을 봉했다/ 그들을 그들이 태어난/ 진득거림으로 돌려보냈다//

웃음소리에 깨어나리라 / 황인숙
낯선 집 낯선 가족 낯선 식사 자리에/ 돌연 내가 있다/ 어색해하는 건 나뿐/ 이들은 낯선 나를 개의치 않고/ 식사를 계속한다/ 하도 이상해서, 이게 꿈인가? 곰곰/ 생각해보니 꿈이 맞다/ 꿈인 줄 알면서도 어색하다/ 어찌나 어색한지 꿈 같지가 않다// 그 세계 사람들은/ 얼마나 이상하게 사는 걸까?/ 난데없이 누군가 나타났다가/ 절로 사라지곤 하니// 다음엔 한번 웃어보리라/ 그들이 깨어나리라/ 나를 빤히 바라보리라/ 봐라, 달이 오줌을 눈다/ 무덤 저편도 젖을 것이다.//

쓰디쓴 자유 / 황인숙
신이 내리시는 선물은/ 한난들 달가와할 것 없노니./ 바다거북처럼 흘린 안달 끝에/ 나는 뭍으로부터 풀려났다./ 그립고 그리운 바다여./ 나는 엉금엉금 그에게/ 될 수 있는 한, 빨리 달려갔다./ 그의 혀가 내 머릴 핥는 순간의 애틋함이여./ 나는 풍덩 몸을 던졌다./ 나는 유유히 몸을 놀렸다./ 나는 자유로왔다./ 나는 자유로이 숨통을 물로 채우며/ 자유로이 가라앉았다./ 나는 한없이 자유로왔다.// 뭍이여!/ 나를 반환하겠다./ 데려가다오./ 꽁꽁 묶어다오.//

시장에서 / 황인숙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들러보았죠./ 수줍은 제비꽃에 벗은 완두콩./ 그에게는 아무짝에 소용없는 것./ 그럼그럼 딸길 살까 바나날 살까?/ 아니면 익살맞은 쥐덫을 살까?/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둘러보았죠./ 한 쾌의 말린 뱀, 목에 늘인 할아범./ 아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 뽀골뽀골 미꾸라지 시든 오렌지/ 아니면 특제 실크덤핑넥타이./ 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 복작복작 밀리며 걷는 내 손엔/ 한 쪽엔 아이스크림 한 쪽엔 풍선./ 농담처럼 절뚝절뚝 뛰는 지게꾼./ 그 뒤를 바싹 쫓아 빠져나왔죠./ 주머니에 뭐가 있나 맞춰보아요./ 바로바로 올림픽 복권이어요./ 만약에 첫째로 뽑힌다면은/ 아아아아 재밌어 너무 재밌어/ 풍선처럼 그이는 푸우 웃겠죠.//

아, 해가 나를 / 황인숙
한 꼬마가 아이스케키를 쭉쭉 빨면서/ 땡볕 속을 걸어온다/ 두 뺨이 햇볕을 쭉쭉 빨아먹는다/ 팔과 종아리가 햇볕을 쭉쭉 빨아먹는다/ 송사리떼처럼 햇볕을 쪼아먹으려 솟구치는 피톨들/ 살갗이 탱탱하다/ 전엔 나도 햇볕을/ 쭉쭉 빨아먹었지/ 단내로 터질 듯한 햇볕을/ 지금은 해가 나를 빨아먹네.//

아직도 햇빛이 눈을 부시게 한다 / 황인숙
버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햇빛이 유리창처럼 떨어졌다./ 아찔!/ 나무가 새겨진다./ 햇빛이 미세하게/ 벚꽃을 깎아낸다./ 벚꽃들, 뭉게뭉게 벚꽃들.// 청남빛 그늘 위의/ 희디흰 눈꺼풀들./ 부셔하는 눈꺼풀들.// 네게도 벚꽃의 계절이 있었다./ 물론 내게도.//

수전증 / 황인숙
가끔/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이 떨릴 때가 있다/ 사람들 앞에서/ 제멋대로 손은 떨고/ 나는 확확 달아오르지 못하게/ 얼굴을 굳힌다/ 그리고 내 손이 생쥐나/ 재떨이나 구름인 양 내려다본다/ 한 번 떨기 시작하면/ 제어할 수 없는 손// 얼굴도 아니고 어깨도 아니고/ 가슴도 아니고 손이/ 어리숙하게 보여준다/ 피로나 두려움 때로는 긴장과 흥분// 달아나고 싶은거다/ 그래서 앞발이/ 파들거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비탈* / 황인숙
걷는 게 고역일 때/ 길이란/ 해치워야 할/ '거리'일 뿐이다/ 사는 게 노역일 때 삶이/ 해치워야 할/ '시간'일 뿐이듯// 하필이면 비탈 동네/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들/ 오늘 밤도 묵묵히/ 납작한 바퀴 위에/ 둥드러시 높다랗게 비탈을 싣고 나른다/ 비에 젖으면 몇 곱 더 무거워지는 그 비탈/ 가파른 비탈 아래/ 납작한 할머니들.//
* KBS 문화스페셜 '세상의 모든 라면박스'에서 차용.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 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 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누벼/ 너른 들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폴짝 폴짝 뒤따르리라/ 푸드득 푸드드득/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둔 들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속은 아늑하고 짚단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 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 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산오름 / 황인숙
친구와 북한산 자락을 오른다/ 나는 숨이 찰 정도로 빨리 걷고/ 친구는 느릿느릿,/ 그의 기척이 이내 아득하다/ 나는 친구에게 돌아가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기를 몇 번, 기어이 친구가 화를 낸다/ 산엘 왔으면, 나무도 보고 돌도 보고/ 풀도 보고 구름도 보면서 걷는 법이지/ 걸어치우려 드느냐고/ 아하!/ 친구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걸으려는데/ 어느 새 획획 산을 오르게 되는 나다/ 땀을 뚝뚝 흘리며 바위에 앉아 내려다보면/ 멀리서 친구가 느릿느릿 올라온다/ 나무도 데리고 돌도 데리고/ 풀도 데리고 구름도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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