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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함기석 시인

부흐고비 2021. 12. 20. 09:08

함기석 시인

1966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하였다. 저서로는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공원』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 동시집 『숫자벌레』 『아무래도 수상해』, 청소년 시집 『수능예언문제집』, 동화집 『상상력 학교』 『야호 수학이 좋아졌다』 『코도둑 비밀탐험대』 『황금비 수학동화』 『크로노스 수학탐험대』 등을 출간했다. 눈높이아동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애지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올해의 좋은시상, 고양 행주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눈높이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주말N수학] 수학과 문학의 수상한 만남, 시인 함기석

미국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예술가에게 수학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뮤즈"라고 말했습니다. 타이슨은 왜 예술가에게 수학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실제로 레오나

www.dongascience.com:443

 

수학자 누(Nu) 9 / 함기석
카프카에서 카프카를 마시고 카프카가 되었다 카프카는 캄캄한 홀이었고 말안장이었고 과자의 세계였다 카프카는 카프카 말이 되어 새가 되어 유성처럼 날아다녔다 말다세나 추론을 추론하던 누가// 빨간 사과를 집어던졌다 카프카는 사과를 삼킨 블랙홀이 되었고 관처럼 고독했다 카프카에 취할수록 더 큰 허무와 허기를 느꼈다 카프카는 계속 카프카를 비워 진동 중인 끈을 따라 빈병이 되어갔다// 끈을 따라 빈 카프카가 계속 쌓였고 사방으로 카프카 진공이 넓게 퍼져갔다 누가 계속 기네스를 가져왔다 누가 계속 흑색의 죽음을 통고했다 끈으로 목을 휘감아 조이는 물뱀 같은 음악이 흐르고// 카프카는 카프카를 집어던졌다 사포처럼 거칠거칠한 카프카의 어둠 속에서 비명과 혁명과 연기가 새빨간 담뱃불과 함께 솟았다 우주처럼 카프카는 정전되었고 카프카는 계속 장전되었다// 카프카의 입구와 출구는 처형된 자들의 심장 핏줄처럼 비좁게 막혀 있었다 누가 내 몸으로 들어와 철문을 굳게 닫고 무인행성이 되었다 카프카는 낙서투성이 벽에 변신 이후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우주의 끝에서 총성이 울렸고 놀랍게도 탄환은 이미 내 눈썹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두 눈을 부릅뜨고 탄환과 탄환의 무한한 배후를 응시했다 새로운 전쟁이 예감되었다//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와 발발이 π / 함기석
수학과 이교수를 따라 제로와 발발이 π가 캠퍼스를 걷고 있다/ 연못 중앙엔 가시연꽃, 잉어들은/ 빨간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폐곡선 놀이에 빠져 있고/ 나무는 한쪽 발이 없는 불구의 컴퍼스여서/ 제로는 누구의 고통도 측정하기 싫은 우울한 짐승이다// 좀 빨리 걸어라 발발아, 나의 말은 지름이 점점 커져서/ 넓이를 측정할 수 없는 비문이 되고 있다/ 교수님 말은 비문도 법문도 아니에요 걸어 다니는 성기예요/ 코를 킁킁거리며 π는 이교수가 뱉는 말을 핥는다/ 제로의 그림자 원은 각(角)의 나라로 망명하고 싶다// 발발아, 인간은 누구나 비문이다/ 너는 먼지와 거품이고/ 난 진흙과 한숨으로 이루어진 바퀴고 체인이다/ 연못의 눈동자에 담긴 구름이 무한히 확장되어 없어지고/ 원은 자기의 생을 사고의 살인에 허비하고 있다// 고로쇠나무가 흘리는 수액은/ 고로쇠나무의 피고 사상이고 가설이고 수식이다/ 수식은 몸속에서 자라는 뼈, 죽음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다/ 발발아, 너는 너의 죽음을 어떤 수식으로 증명할 거니?/ 원은 자신을 구성한 같은 거리의 점들을 회의한다// 교수님, 어떤 이론은 대못이에요/ 눈동자에 박힌 달이 대낮에 예수처럼 울고 있다/ 교수님, 보세요 못에 박혀 붉은 녹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세계/ 말라죽은 오동나무 밑엔 검은 돌이 우는 흰 그늘/ 원은 구르며 보이지 않는 발발이의 꼬리 끝을 응시한다/ 무한한 하늘 저편에서 거대한 시계초침이 거꾸로 돌고 돈다/ 3바퀴 2바퀴 1바퀴 0바퀴 -1바퀴……/ 연못 중앙엔 폭탄처럼 터진 가시연꽃, 잉어들은/ 수영복을 찢고 폐곡선을 찢고 까마득한 공중으로 헤엄쳐 오르고/ 원의 중심 0에서 죽은 새들이 분수처럼 난다//

정물 연인 / 함기석
네 눈이 네 얼굴에 박혀 있으므로/ 그것은 폭약이므로// 향나무는 타오르는 폭포고/ 해바라기는 지구에 불시착한 회전체 우주선이다// 그것은 테이블 A 모빌 B// 밤새 파도는 불타오르고/ 물과 절벽의 밀회 속에서 물거품은 태어나고// 내 눈이 내 얼굴에 박혀 있으므로/ 그것은 욕조이므로// 섬들은 흰 집이 되어 날개를 편다 먼 우주를 향해// 백사장에 누워 잠든 알몸 외계인/ 처녀 a 총각 b// 그것은 난파한 배, 생환이 불가능한 그물//

평행선 연인 / 함기석
어떤 문장은 가스덩어리다.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핵이 없다. 내가 라이터 불을 대면 그 즉시 폭발하여 내 얼굴을 태워버린다. 눈을 태우고 귀를 태워버린다. 그런 밤.// 어떤 문장은 촛불이다. 타오르는 파도고 노래하는 풍랑이다. 어떤 문장은 청색 멀미를 일으키고 어떤 문장은 스스로를 문장 밖으로 내쫓아 아름다운 숲이 된다. 그런 밤.// 유성우는 쏟아지고 어떤 문장은 제 몸을 길게 늘여 검은 라인이 된다. 라임이 된다. x축이 되고 y축이 된다. 1차원 곡선이 되고 2차방정식이 된다. 그런 밤.// 나는 나라는 3차방정식의 세 허근이다. 시간은 계속 자신의 몸을 사방으로 끝없이 늘여 좌표평면이 되고 있다. 무한의 우주가 되고 있다. 그런 밤.// 지구는 하나의 점, 화성도 목성도 토성도 우주를 뛰노는 모래알 삐삐들, 밤하늘엔 흰 고래들만 헤엄쳐 다니고 어떤 문장은 문장이 없다. 그런 밤.// 돌이켜보면 나의 삶 또한 한 장의 창백한 백지였다. 발을 찾아 떠돌던 외발의 펜이었다. 그런 밤. 나는 해저에서 어떤 문장을 가져온다. 그곳은 너의 눈동자 물의 침실 아픈 새들의 둥지.// 돌이켜보면 너의 삶 또한 불 꺼진 찬 방이었다. 세계는 수족관이고 넌 바닥에 납작납작 엎드리다 한쪽으로 눈이 돌아간 넙치였다. 그런 밤.// 우린 평행선 연인, 안을 수도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난경의 문장들, 건드리면 그 즉시 울음이 터져버릴 작은 물풍선들. 그런 밤.// 어떤 문장은 약에 취해 있고, 어떤 문장은 칼에 찔려 쓰러져 있고, 어떤 문장은 모든 기억을 잃어 표정조차 없다. 그런 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밤.//

모래가 쏟아지는 하늘 / 함기석
화장터 도로변에 목련 꽃망울들 싱싱하다/ 누가 꺼내 달아 놓았을까/ 하얀 심장들/ 가지 끝 하늘엔 빈 둥지처럼 떠 있는/ 친구의 마지막 웃음소리/ 메아리처럼 꽃망울이 터진다/ 꽃의 육체에 갇혀 있던 문자들이 터져 나와/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언젠가 나도 가야 할 공중의 길/ 바람에 꽃잎들은 흩날려 공기 속을 떠돌고/ 홀로 남겨진 아이는 운다// 아빠와 함께 왔다가/ 혼자서 돌아가야 하는 목련나무 길/ <없음>이라는 말의 있음을 아이의 <눈>에서 보고/ <있음>이라는 말의 없음을 뒤집힌 <곡>에서 듣는다/ 꽃망울 하나가 또 내 심장처럼 터진다// 굴뚝이 내뱉는 검은 숨을 허공이 마시고 있다/ 연기와 함께 문자들이/ 허공의 폐 속 깊이 흡입되어 사라진다/ 언젠가 나도 가야 할 저 연기의 길/ 오래전 누군가의 아름다운 육체였을 저 형체 없는/ 연기들 공기들 빛들// 노란 나비 한 마리/ 아이의 머리 위를 아물아물 날고/ 아이는 목련나무 꽃그늘 속에서 계속 운다/ 하늘에서 우수수 금빛 모래들이 쏟아진다/ 나는 말없이 하늘 밖 머나먼 우주를 바라보다가/ 아이의 젖은 뺨을 닦아준다// 여린 뺨에 붙은 꽃잎 한 장/ 그 창백한 우주의 지도에 섬처럼 박혀 있는/ 모래 한 알, 그 무언의 점을 본다/ 그 순간/ 나도 봄도 이 목련나무 꽃길도 이미 <없는 말>이어서/ 하늘도 땅도 지구도 저 광대한 우주도 모두/ 한 알의 모래// 내가 껴안자/ 아이는 두부처럼 부서지고/ 하늘 가득 아이의 울음만 팽팽히 커지고 있다//

국어선생은 달팽이 / 함기석
당나귀 도마뱀 염소, 자 모두 따라해!/ 선생이 칠판에 적으며 큰소리로 읽는다/ 배추머리 소년이 손을 든채 묻는다/ 염소를 선생이라 부르면 왜 안 되는 거예요?/ 선생은 소년의 손바닥을 때리며 닦아세운다/ 창밖 잔디밭에서 새끼염소가 소리친다/ 국어선생은 당나귀/ 국어선생은 도마뱀/ 염소는 뒷문을 통해 몰래 교실로 들어간다/ 선생이 정신없이 칠판에 쓰며 중얼거리는 사이/ 염소는 아이들을 끌고 운동장으로 도망친다/ 아이들이 일렬로 염소꼬리를 잡고 행진하는 동안/ 국어선생은 칠면조/ 국어선생은 사마귀/ 선생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친다/ 당장 교실로 들어오지 못해? 이 망할 놈들!/ 아이들은 깔깔대며 더욱 큰소리로 외쳐댄다/ 국어선생은 주전자/ 국어선생은 철봉대/ 염소는 손목시계를 풀어 하늘 높이 던져버린다/ 왜 시계를 던지는 거야? 배추머리가 묻는다/ 저기 봐, 시간이 날아가는 게 보이지?/ 아이들은 일제히 시계를 벗어 공중으로 집어던진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오전 10시는 오후 4시가 된다/ 아이들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선생이 씩씩거리며 운동장으로 뛰쳐나온다/ 그 사이, 운동장은 하늘이 되고/ 시계는 새가 된다/ 바람은 의자가 되고/ 나무들은 자동차가 된다/ 국어선생은 달팽이!/ 국어선생은 달팽이!/ 하늘엔 수십 개 의자가 떠다니고/ 구름 위로 채칵채칵 새들이 날아오른다/ 구름은 아이들 눈속으로도 흐르고/ 바람은 힘껏/ 국어책과 선생을 하늘꼭대기로 날려보낸다//

색채강박증 교사 소괄호의 바나나를 둘러싼 음모들 / 함기석
(1) 색의 3속성// 문장고등학교 미술실이다 색채는 몸매가 매혹적이고 눈이 아름다운 여교사다 채도와 명도가 그녀의 눈과 말의 색조화장을 놓고 싸울 때 나는 먼셀표색계에서 죽은 낱말들의 피부색을 찾는다 채도가 마취헝겊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미술실 계단 밑으로 끌고간다 음모가 돋아나고 명도는 염산으로 휘도를 내쫓기 시작한다//
(2) 음모의 모양// 무채는 유채색으로 유채는 무채색으로 얼굴을 은폐한다 그들 두 교생이 팔짱을 끼고 과학실 복도를 걸을 때 음악은 생쥐의 모습으로 뒤따른다 고양이조차 잡아먹을 교활한 것들! 음모들은 구불구불 자라나고 색채 때문에 바나나는 점점 시커멓게 변색되어간다 색채가 웃는다 그녀는 명도(明刀)를 가진 무채를 사랑하지만 그것은 측광에 의한 환각이다//
(3) 음색의 관계// 모음은 혀가 없는 색이고 색은 공, 자음은 나비의 율동으로 공을 떠다니는 피, 빛은 동공에 붙어 피를 흡수하는 거머리들, 나는 마취상태에서 한 쌍의 보색연인을 본다 그들이 살을 섞어 말을 섞어 염산을 뿌리자 꽃처럼 피살되는 유채, 무덤 위의 파도 같은 천둥이 치고 보라색 비가 내린다 가색에 의해 무색이 되고 감색에 의해 흑색 또는 회색이 되는 특수학교 특수반 아이들//
(4) 사체 크로키 실습// 자살한 내 짝꿍 (한다)의 육체에서 말의 세 가지 색을 뽑는다 녹G 청B 적R, 이것을 가색혼합 하여 백색의 침묵을 만들 때 괄호 안에서 친구들은 탄다 (1), (2), (3), (4) … 기형의 숫자벌레가 되어 탄다 소리도 냄새도 없이 공중을 떠도는 연기들, 낙하산을 타고 새 교장이 오고 새 교감이 오고, 피투성이 새들이 난다 두개골이 깨진 문장의 옥상에서//

아픈 방 / 함기석
난 이 시 아픈 방이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소 어서 들어오시오/ 왼쪽 벽에 스위치가 있소 누르지는 마시오 난 이대로 어둠 속에서 쉬고 싶소 불을 켜면 당신은 벽을 타고 흐르는 피, 의자 밑에 떨어진 떨어진 손을 보게 될 거요 난 그런걸 당신께 보이고 싶지 않소// 가만히 서서 책상을 바라보시오 책상은 칡넝쿨로 뒤덮여 있소/ 책상 밑으로 흐르는 계곡이 보이오? 계곡은 당신이 서있는 벽을 타고 천장 밖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흐르고 있소 얼마 전까지 이 방엔 한 여자가 살고 있었소 그녀는 스스로 숨을 끊고 계곡을 따라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떠났소// 0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창을 찾아 보시오 창은 말의 동공처럼 어둡게 깨져 있소 거기 서서 0시의 바깥세계를 바라보시오 밤의 잿빛 도시가 보이오? 도시의 강변 저편에 빌딩들이 보이고 아파트단지가 보일 게요 불 켜진 방이 하나 보일 게요 시를 읽고 있는 사람이 보일 게요 누군지 아시겠소? 아픈 방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오// 당신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주시오 그 사람도 나처럼 아픈 방에서 홀로 아파하고 있을 게요 가서 그랑 술이라도 한 잔 하시오 미안하오 이제 난 약을 먹고 쉬고 싶소 그만 나가주시오 당신이 이 방을 나설 때 여자의 손이 당신을 따라 갈 것이오 그럼 좋은 밤 보내시오//

광야 / 함기석
시인아, 파도를 노래하지 말고/ 흰 종이 속에서 검푸른 파도가 솟구치게 하라// 백지는 근육체고 핏줄다발이고 숨 쉬는 광야이니/ 형용사의 숨통을 조여라// 이 숭고한 명사, 하늘은 찢어 앞치마로 써라/ 이 독재자 명사, 혀는 찢어 흩날려라// 보라! 죽은 고양이 눈동자에 내리는 햇빛/ 보라! 인간이 망친 땅을 뚫고 날아오르는 새싹들// 어떤 시는 빛이고 새, 인간의/ 갇힌 꿈을 찢고 살을 찢어 심장을 꺼내는 사자// 시인아, 사자를 가두어 사육하지 말고/ 갈기 무성한 사자가 사납게 광야를 달리게 하라//

구름 낀 문장 / 함기석
배 한 척이/ 푸른 콧수염 휘날리며 항구로 들어서고 있다// 먼 우주에서 유성우가/ 해변의 결혼식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듯// 폭죽이 터지고/ 장미와 피가 구름에 스민다// 저 멀리 도시에서 어둠은 흰 붕대처럼 풀어지고/ 밤마다 섬 해안선 따라// 온몸을 고대의 어휘로 문신한 나신의 여인들이/ 검고 긴 바늘 춤을 춘다// 땅의 입과 하늘의 항문을 촘촘히 꿰매어 움직이도록/ 숨 쉬도록// 나는 어두운 급류/ 너는 눈보라 치는 사막, 우린 구름 낀 문장// 낮과 밤이 사라지고/ 무모한 장미는 찢긴 눈이 아름답다// 하얀 드레스 길게 끌며 바다 위로 걸어오고 있다/ 또 한 척의 도도한 배가//

글자들이 타고 다니는 기차 / 함기석
밤은 두 눈이 파도치고 있었다/ 밤의 노란 링 귀고리가 살랑 흔들렸다/ 글자들이 힐끔힐끔 나를 읽고 있었다/ 글자들이 수군거렸다/ 저기 봐 이 기차에 처음으로 사람이 탔어/ 도대체 어딜 가는 길일까?//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예쁜 글자 하나가/ 과자를 먹고 있었다/ 과자는 모두 조약돌로 되어 있었다/ 조약돌 구름과자/ 조약돌 기린과자/ 조약돌 토란과자/ 조약돌 포도를 꺼내 입에 넣자 입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슬픈 악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감고/ 꼭 다문 입술 뒤의 어두운 울림통을 생각했다/ 포도 속에 뿌리 내린 빛과 음의 실뿌리들을 생각했다// 취한 달이 지나갔다/ 얼굴에 깊고 쓰린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차창 밖 세상으로 빈 술병을 휙 집어던졌다/ 낮에 먹은 상한 빛을 밤에 토하고 있었다// 말했다가 다가와 내게 말했다/ 이 기차에 탈옥한 글자들이 탔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사람을 보면 죽일지도 몰라요/ 그래요? 그거 참 잘 됐네요/ 내 뒷자리에서 홀쭉한 침묵이 말했다// 기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허공으로 부드럽고 착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고유한 방화범 / 함기석
나의 구두는 우주선/ 밤마다 내 두개골을 싣고 밤하늘을 유영한다/ 나의 구두는 잠수함/ 밤마다 황산으로 뒤덮힌 바다에 나를 내다버린다// 구두는 나의 육체 나의 무덤인 언어/ 구두는 자신의 전생애를/ 구두라는 제 이름의 새장에 갇혀/ 병든 새처럼 고통스러워하며 상처받는다// 사물의 이름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감옥/ 인간이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놓은 무서운 질서/ 무서운 폭력, 나는 밤다다/ 검은 복면을 쓴 방화범이 되어/ 그 감옥 지하실에 폭약을 설치하고 불을 지핀다/ 내 육체 속에서 번식하는 내 아비의 우상들을 죽이고/ 발 아래 침묵하는 대지를 살해한다// 시인은 제 피와 뼛가루가 묻은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교수대와 관을 만들어야 한다/ 치열하게 유희하듯 유희하듯// 장미를 계속해서 장미라 불러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수백 마리 뱀들이 우글거리는 관(棺)인 그것을/ 나는 간단히 시체라 부른다/ 이제, 장미는 빠알간 나의 시체/ 나는 밤마다 나의 시체에 불을 지른다// 시인은 모두 방화범이 되어야 한다/ 썩어가는 세계의 항문과 사타구니에 불을 지르는/ 고유한 방화범이 되어야 한다//

하모니카 부는 참새 / 함기석
무더운 여름오후다/ 참새가 교무실 창가로 날아와 하모니카를 분다/ 유리창은 조용조용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하모니카 속에서/ 아주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나온다/ 물고기들은 빛으로 짠 예쁜 남방을 입고/ 살랑살랑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교무실을 유영한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선생들 귓속으로 들어간다/ 선생들이 간지러워 웃는다/ 책상도 의자도 책들도 간질간질 웃으며/ 소리 없이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선생들도 흘러내린다/ 처음 들어보는 이상하고 시원한 물소리에/ 복도들 지나던 땀에 젖은 아이들이/ 뒤꿈치를 들고 목을 길게 빼고 들여다본다/ 수학선생도 사회선생도 국사선생도 보이지 않고/ 교무실은 온통 수영장이다//

당신을 위한 수탉의 모닝콜 / 함기석
갑자기 형사가 찾아오면/ 갑자기 나는 혐의자가 되고 용의자가 된다/ 갑자기 킁킁거리며 개가 다가오면/ 갑자기 나는 냄새나는 고깃덩어리가 되고/ 갑자기 탄환이 날아오면 갑자기 목표물이 된다/ 곤충채집자가 나를 채집하면 난 이상한 곤충이 되고/ 벌레연구가가 나를 연구하면 난 이상한 벌레가 된다// 내가 수염을 기르면 초승달이 수염을 기른다/ 내가 나팔을 불면 당나귀가 나팔을 분다/ 내가 수영을 하면 비행기가 수영을 한다/ 내가 속옷을 벗으면 가을 숲이 속옷을 벗고/ 내가 섹스를 하면 호텔이 수평선과 토마토 섹스를 한다/ 내가 세수를 하면 구름은 랄랄랄 면도를 하고/ 내가 외투를 걸치면 고양이는 호호호 화장을 한다/ 내가 외출을 하면 나무들은 하하하 담배를 피며 지나가고/ 가로등은 내 머리에 노란 우유를 쏟는다/ 내가 창공의 무지개를 둘둘 말아 허리에 두르고/ 눈썹 붙은 얌체 고양이 지지처럼/ 벤치에 앉아 시계를 보고 또 보며/ 시계 속으로 보이는 백만 년의 눈보라/ 백만 년의 바람소리 백만 년의 하늘을 보며/ 당신을 기다릴 때/ 갑자기 골목에서 방글방글 나타난다/ 갑자기 인라인스케이트 타고 나타난 죽음이/ 퍽! 나의 생을 핸드백처럼 낚아채 빙글빙글 달아난다// 그리하여 내가 죽으면 노랑머리 콩나물유령이 죽는다/ 내가 죽으면 붕어빵유령이 죽는다/ 내가 죽으면 고등어유령이 죽는다/ 어린 달걀들은 하늘을 맴돌고/ 당신을 위해 아침마다 모닝콜을 불러주던 나의 노래는/ 차디찬 물 속을 맴돌고/ 나의 피 나의 눈물 나의 숨결은 허공을 맴돈다// 내가 죽고 당신이 죽고/ 나무가 죽고 새가 죽고 도시가 죽고 문명이 죽고/ 천둥과 함께 백만 년이 흐르고/ 번개와 함께 다시 백만 년이 흘러도/ 빙글빙글 지구는 계속 돌고/ 뱅글뱅글 슬픔도 고독도 우리들 눈깔처럼 계속 돌고/ 뺑글뺑글 존재도 농담도 우리들 불알처럼 계속 돌고/ 돌다가 돌다가 완전히 돌 때까지/ 우주는 랄랄랄 계속 돌고/ 시간도 히히히 계속 돌고/ 죽음도 헤헤헤 계속 돌고/ 말들도 깔깔깔 계속 돌고//

새를 위한 목적어 침대 / 함기석
새가 난다/ 쉴 곳을 찾아 도시 상공의 1연을 난다/ 다음 문장의 공원으로 날아간다/ 도착해보니 도축장이다/ 다음 문장의 놀이터로 날아간다/ 도착해보니 사격장이다/ 포수가 총을 들고 서 있다/ 새는 놀라 도망친다// 새가 운다/ 날개 아픈 새가 쉴 곳이 없어 운다/ 병원 창가 2연에서 휠체어 탄 아이 코코가 바라본다/ 외로운 새에게 말한다/ 외톨이 새 아무야 울지 마! 새가 날면 주어가 날아/ 얼룩말이 날고 주전자가 날아/ 우체통도 날고 집도 나무도 젖소들도 함께 날아// 새가 웃는다/ 지친 새가 구름 옆의 3연에서 웃는다/ 아이는 새를 위해 선물을 놓는다/ 까마득한 공중에 살며시 목적어 침대를 놓는다/ 침대 곁에 풍금을 놓고 나팔꽃 화분을 놓는다/ 새가 환하게 웃는다/ 코코에게 고맙다고 윙크하고는/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 달콤한 잠에 빠진다// 새가 잠든 사이/ 나팔꽃 속에서 하얀 손이 나와 풍금을 연주한다/ 음악에 맞춰 핑 퐁 핑 퐁/ 젖소들이 나무들이 바람과 춤추고/ 침대 끝에서 새의 꿈이 하얗게 흘러내린다/ 새장 같은 아이의 병실 창밖//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5연의 연못으로/ 방울방울 파문을 그리며 떨어진다//

실내악 / 함기석
고양이 체셔가 웃으며 건반 위를 걷는다/ 연주가 시작되고/ 오르간 양쪽에 불이 켜진다/ 양초 대신 손이 꽂혀 타는 두 개의 촛대// 오르간 앞엔 팔 없는 소년/ ( )가 앉아 있다/ 괄호의 눈에서/ 푸른 쇠구슬이 반음 차로 떨어질 때마다/ 체셔는 체셔체로 걸음을 옮긴다// 원 스텝 투 스텝, 반음 쉬고/ 흰건반 검은건반, 다시 반음 쉬고/ 점프해 발을 바꾸는데/ 음에 맞춰 혀를 날름거리는 사색가가 나타난다// 꿈틀거리는 이 침묵은 붉은 줄무늬가 또렷한 뱀이다// 고양이가 앞발로 톡톡 건드리자 뱀은/ 머리를 빳빳이 세우고/ 체셔의 웃음과/ ( )의 사라진 팔을 번갈아 쳐다본다// 체셔는 웃으며 다시 체셔체로 걷는다/ 건반 사이에서/ 날개 가득 ( )색 피를 묻힌 새가 날아올라/ 밤의 동공 속으로 날아간다//

낯선 실내악 / 함기석
누가 대패로 바다를 깎고 있다/ 하얗게 깎여 나오는 파도들, 물빛 나이테의 결과 결 사이로/ 어린 돌고래 떼 헤엄치고, 광활한 실내다/ 공중으로 반도의 섬들이 하나둘 해파리처럼 떠오르고// 피아노에 앉아 있다 향나무 여자/ 대패가 지나간 등엔 검은 등고선들, 새들이 잔에 비친다/ 빛의 탄환들이 연속적으로 튕겨 오르는 유리의 살갗/ 소리가 진동할 때마다 파르르 물결이 울고// 누가 또 이유도 모른 채 참살된다/ 벼랑엔 여자의 속눈썹 닮은 눈발들의 비명/ 어둠 속에서 건반들은 조용한 피를 흘리고 여자는 표정없이/ 왼손으로 흐르는 피를 연주한다/ 떨어져 나간 오른손은 게처럼 홀로 해안 철책을 걷고// 붉은 설탕처럼 바다로 쏟아지는 눈/ 잔이 담배 연기를 타고 입술로 옮겨진다 음률에 맞춰/ 혈관을 타고 마지막 악장을 향해 퍼져 가는 독/ 수평선엔 출렁이는 흰 돛배들// 밀물이 물뱀인양 여자의 다리를 휘감는다/ 허리를 휘감아 오른다/ 손가락들은 파들거리는 은빛 지느러미의 물고기/ 누가 또 도끼로 건반을 찍는다/ 튕겨 오르는 흰 이빨들// 공중의 섬들이 해저로 가라앉는다/ 건포도 빛깔의 울음을 내며 날아가는 새들/ 여자가 쓰러진 모래무덤에서 스멀스멀 글자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벼랑 위엔 깃발처럼 나부끼는 혀//

오르간 / 함기석
바다 한복판에 오르간이 환하게 떠 있다/ 누구의 익사체일까// 새들이 건반에 내려앉을 때마다/밀물과 썰물이 반음 차로 울리고// 파도가 모래 해변으로 나와/ 하얀 혓바닥으로/ 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 게들이 하늘을 본다/ 북극성 조등(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원을 그리며 도는 별들 음표들 시간들// 누가 주검을 연주하는 걸까/ 건반 사이에서 새들이 날아올라/ 캄캄한 허공으로 흰 쌀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착란의 돌, 詩 / 함기석
빌딩숲에 절이 있었다 열린 대문 사이로 새소리가 흘러 나왔다 달콤했다 활짝 핀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알몸의 여자가 목욕하고 있었다 황홀했다 정원으로 들어갔다 아카시아 꽃향기로 여자의 머릴 감겨 주었다 햇빛으로 상처 난 가슴과 허리를 씻어 주었다 여자는 내 이마에 키스했다 오랫동안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내 손을 끌고 신선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우린 불륜의 사랑을 나누었다 알몸으로 뒹굴며 꿈같은 몇 분을 보냈다 난 다시 정원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았다 10여 년이 지나 있었다 황급히 사방을 살펴보았다 여자는 사라졌고 사원은 거대한 새장으로 변해 있었다 어린 해바라기가 내 뒤를 따라다니며 말했다 넌 무당벌레 넌 칠면조 넌 뚜껑 없는 주전자 이 곳은 한 번 들어오면 다시는 나갈 수 없는 유형지야 이 바보야! 난 날개를 푸득이며 새장 밖으로 도망치려 발버둥쳤다 그러나 밖으로 달아나려 하면 할수록 안으로 안으로 갇혔다 나는 지쳐 갔다 새장 속에서 내 청춘은 길을 잃고 말라 갔다 참담했다 오랫동안 외로웠다 오랫동안 방황했다 나도 나의 삶도 안으로 안으로 썩어 들어갔다 많은 밤을 불면과 악몽에 시달렸다 대웅전에 불을 질렀다 나는 해바라기를 끌어안고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염소가 다가와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가슴에 고인 썩은 바다를 혓바닥으로 핥아먹으며 금붕어처럼 웃어 주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나는 활짝 핀 아카시아 꽃그늘 아래로 간다 알몸으로 목욕을 한다 무서운 새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길을 찾는다 없는 길을 찾으며 나는 움직인다 내 주검이 누울 암흑의 그 자리를 맨손으로 파들어 가며 나는 쓰고 쓰고 또 쓴다 이 외롭고 잔인한 말의 사원에 갇혀//

우리 흐를까 / 함기석
너는 하얀 책/ 절반은 물이고 나머지는 꿈인 책/ 펼치면 흰 모래와 푸른 파도가 흘러나오는// 너는 작은 종이책/ 해초와 조가비, 돌고래와 숭어 떼가 유유히 헤엄치는/ 한 장 한 장 얇은 살이 나풀거리는// 너는 봄밤마다 빨간 지느러미 달린 반달이/ 내 눈으로 들어와 요트처럼 달리면/ 화르르 벚꽃이 지는// 나도 봄밤이다 냄 몸속 깊은/ 해저에서 짝 잃은 고래의 아픈 허밍이 울리고/ 등줄기가 아름다운 태고의 사람 하나/ 물의 묘실에 누워 꿈꾸는// 봉인된 방, 시간은/ 불의 빙산, 사랑은/ 죽음을 붕괴시키는 천 개의 눈과 분화구를 가진 괴수// 들리니? 먼 지층에서 울리는 땅의 심장 소리/ 그건 나의 숨소리/ 보이니? 용암을 타고 맹렬히 올라오는 물고기 화석들// 어둡고 찬 밤이다/ 가만가만 귀 기울이면/ 철벅철벅 잠 못 든 새들이 내 등을 밀어/ 깊고 깊은 내 자작나무 숲으로 나를 밀물치는 소리// 우리 다시 흐를까/ 내 몸의 절반도 꿈꾸는 물이고/ 나머지는 피가 꾸는 아픈 환몽이고 벌거숭이 말이니//

포파 아저씨가 선물로 준 작은 상자엔 / 함기석
어항이 있었어요// 어항은 아기의 발처럼 아주 아주 작았는데/ 잘 울고 수줍음을 많이 탔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젖을 물리고/ 햇빛을 듬뿍듬뿍 뿌려 주었더니/ 나팔꽃처럼 쑥쑥 자랐어요// 어항은 조금 커져 어항 속에/ 연못을 하나 갖게 되었어요/ 어항은 점점 더 커져/ 포파 아저씨가 사는 마을과 숲/ 꽃밭과 초원과 과수원도 갖게 되었어요/ 포파 아저씨가 집에서 시를 쓰고/ 새들이 호수에서 낚시놀이를 하는 동안/ 어항은 점점 더 점점 더 커져 마침내/ 하늘과 바다와 온세상을 갖게 되었어요// 세월은 참 빠르게도 흘렀어요/ 어항은 늙어 어느새 수염이 하얗게 달렸어요/ 어항은 어항 속의 세상을 보며 즐거워했지만/ 어항 속에서 들리는 빗소리 바람 소리 계곡물소리/ 올빼미들의 멋진 기타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했지만/ 어린 시절이 너무도 너무도 그리워/ 탁구공처럼 다시 작아졌어요// 이제 아주 아주 작아진 어항 속에는/ 아주 아주 작아진 온세상이 들어있어요/ 온갖 동물 식물 별과 구름들이 모두모두 들어있어요/ 밤마다 어항에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고래가 나와/ 바다 속의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네가 기린을 상상하면 어항에선/ 기린이 목을 내밀고 웃고/ 비행기를 상상하면 비행기가 날아올라요// 혼자 밤길을 가기가 무서울 땐/ 숟가락으로 어항을 탁탁 두드리며 상상해 보세요/ 그럼 어항에선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착한 호랑이가 나와/ 어둠 속을 함께 걸어가 줄 거예요/ 그러나 조심해야 해요/ 어항은 쉽게 깨질 수도 있으니까요/ 어른들이 몰래 훔쳐 갈 수도 있으니까요// 네 눈썹 밑의 그 반짝거리는 마술 어항//

뷰티샵 낱말과일들 / 함기석
토마토/ 유기산과 비타민 A, C가 풍부해 여드름 많은 문장과 지성피부를 가진 문장에 좋다.//
수박/ 이뇨작용을 하여 과잉된 자의식의 부기를 확실히 빼준다. 속껍질 간 것을 냉장심장에 넣었다가 팩으로 사용하면 문장에 윤기가 생긴다. 냉찜질이 필요한 시에 좋다.//
레몬/ 산도가 높으므로 물 빛 소리를 10대 3대 1의 비율로 섞어 사용하면 좋다. 문장들은 잠자는 동안에도 피지를 분비한다. 피지를 없애려면 문장의 피부온도를 낮추어야 하는데 레몬즙이 효과만점이다.//
자두/ 각종 과일산이 풍부해 상상력을 자극한다. 행간의 모공수축으로 인한 긴장유발 및 문장의 각질제거효과도 있다. 여백은 낱말들을 통해 문장의 피부수분밀도를 조절한다. 날씬한 시를 원하는 뚱뚱녀에게 좋다.//
키위/ 피부미백효과에 좋은 비타민 C가 다량으로 들어 있어 시 안면부에 퍼진 기미나 주근깨를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탱탱한 볼 매끈한 코를 원한다면 스팀타월 냉타월 번갈아 3분씩.//
오렌지/ 레몬보다 산도가 약해 몸 전체에 사용할 수 있다. 시의 엉덩이 가슴 성기 주변 등 어느 곳에나 사용 가능하다. 면역력이 약한 문장, 폐활량이 적은 문장의 코와 입 등 호흡기를 보호하는 데도 효과만점이다.//
딸기/ 비타민 C와 젖산이 풍부해 문맥에 발랄한 봄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다. 시 전체에 퍼진 악취제거 및 낱말들의 사유세포활성화효과도 있다. 씨는 버리지 말고 마침표로 사용하면 된다.//

첫 키스 / 함기석
너의 입술에서/ 장미꽃이 피어난다/ 새들이 날아오른다/ 새들이 날아가는 호수가 보인다/ 눈이 예쁜 물뱀 하나 뭍으로 올라온다/ 꽃밭을 지난다/ 앵두밭을 지난다/ 탱자나무 울타리 지나 내게로 온다/ 흰 벽돌담 넘어 내게로 온다/ 미끈미끈 내게로 다가오는 어린 뱀은/ 미끈미끈 내게로 다가오는 너의 혀/ 두근두근 내 입술에 살을 비빈다/ 나의 입술에서/ 빠알간 금붕어들이 쏟아진다/ 빠알간 코스모스 꽃잎들이 쏟아진다/ 아 가을이다/ 나는 손을 쭈욱 뻗어/ 구름을 따 네 눈에 넣어준다/ 해와 달을 따 네 입에 넣어준다/ 하늘 가득 아름다운 피아노소리 울려 퍼진다//

너의 작은 숨소리가 / 함기석
흔든다 아주 작은 먼지 하나를/ 흔든다 먼지가 앉은 나비 날개를/ 흔든다 나비가 앉은 꽃잎을/ 흔든다 꽃이 잠자는 화분을/ 흔든다 화분이 놓인 탁자를/ 흔든다 탁자가 놓인 바닥을/ 흔든다 바닥 아래 지하실을/ 흔든다 지하실 아래 대지를// 흔든다 대지를 둘러싼 지구를/ 흔든다 지구를 둘러싼 허공을/ 흔든다 허공을 둘러싼 우주 전체를//

코흐 해안 / 함기석
두 아이와 아내가 모래밭에 누워 발가락 튕기기 놀이를 한다/ 밀물이 혀로 발바닥을 간질일 때마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발가락 끝으로/ 섬과 배와 집들을 튕겨 수평선 위 하늘로 날려버린다// 나는 혼자 해안선을 걷고 있다/ 벼랑 위엔 고사목들, 죽은 나뭇가지 끝에서 허공으로 이어진/ 흰 계단들이 보이고/ 서쪽 하늘에 수십 개의 서랍이 달려 있다/ 서랍이 열릴 때마다 먼저 죽은 자들의 팔이 나와 손을 흔들고/ 태양에서 끝없이 모래가 흘러내린다// 모래언덕엔 언어와 죽음이 맞붙어 뒤엉킨 샴쌍둥이 등나무/ 가지 끝 빈 둥지에서 보이지 않는 새가/ 보이지 않는 알을 품고 있다/ 언덕 아래로 세 명의 내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다/ 맹인이 된 노인과 몸 전체가 검게 탄 아이와/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네 발 짐승// 새들이 소금물에 상처 난 발을 씻고 공중의 묘역으로 난다/ 아이들은 계속 깔깔깔 떠들고/ 걷고 걸어도 끝이 닿지 않는 기이한 해안선/ 세 명의 나는 다시 삼백 명의 나, 삼천 개의 모래알로 흩어지고/ 죽어가는 자의 입술에 닿는 가냘픈 숨결처럼/ 나풀거리는 파도// 사람의 속말은 자신조차 볼 수 없는 자기 생의 해구로/ 쓸쓸히 침몰하는 배고 선원들이다/ 관 뚜껑을 열어 마지막으로/ 흰 옷을 입고 잠든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듯/ 바람이 물과 빛으로 쓰는 모래의 백색유서를 읽고 있다// 벼랑 끝에서/ 검은 눈을 주렁주렁 단 만델브로 나무가/ 아이들과 아내가 뛰노는 모래밭을 오래도록 쳐다본다//

마지막 해변 / 함기석
하늘에서 누군가 물조리개로 빛을 뿌린다/ 해변은 땀에 젖은 흑인의 등처럼 반짝거린다/ 바다의 잇몸을 뚫고 수면으로 나온 흰 이빨 같은 섬들/ 물결따라 햇빛알갱이들 아름답게 너울거리고/ 바다는 한 꺼풀 한 꺼풀 하얀 속살을 벗겨 뭍으로 보낸다// 해변에 한 노인이 서 있다/ 바다의 주름진 이마를 만지며/ 해저에 사는 눈 없는 물고기들의 일생을 생각한다/ 피었다 진 꽃자리처럼 노인의 눈은 쓸쓸하고 그늘이 깊다/ 바다의 유치원에서 어린 물고기들 뛰놀고/ 소녀가 나비 다라 방파제 꽃길을 뛰어간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떨군다/ 모래밭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맨발을 바라본다/ 고독과 고통 속에서 보낸 수십 년의 시간과/ 진흙 길들이 스민 아픈 발을 바라본다/ 쉬지 않고 걷고 걸어 이 마지막 해변까지 데려다 준/ 상처투성이 착한 발을 미안하게 바라본다/ 보드랍게 발등을 어루만져 주는 바다의 하얀 손가락들// 노인은 모래밭에 바다가 쓰는 참회의 시를 가슴으로 듣는다/ 부서지며 사라지는 물로 된 말들/ 말들이 만드는 무수한 모래구멍과 생의 아픈 물거품들/ 울분과 분노의 나날들, 증오 때문에 한 사람을 죽이고/ 두 여인을 폐인으로 만들었던 뼈아픈 기억들/ 시린 하늘에서 내려온 전깃줄 같은 빛줄기가 노인의 목을 옥죈다/ 노인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방울 하나 발등으로 떨어진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본다// 작은 배가 한 척 해안으로 밀려온다/ 삐거삐걱 노를 저으며 누군가 저음의 노래를 부른다/ 노인은 젖은 눈을 여미고 노 젖는 자의 얼굴을 본다/ 어부차림을 한 죽음이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이제 그만 이 배를 타고 가시지요?/ 배는 노인을 태우고 소리 없이 나아간다/ 천천히 자궁을 빠져나가듯 수평선 너머 내생으로 나아간다/ 배가 그리는 물결 파문들, 바다 저편 침묵으로 퍼져/ 방파제 끝에서 소녀가 손을 흔든다//

뒤 보이스 / 함기석
독이 퍼지는 하늘이다/ 블루베리 케이크 옆 비틀어진 손목이고/ 사각(死角)의 탁자다/ 그 위에 놓인 검은 브래지어 찬 구름이다/ 끓고 있는 빗물이고/ 차도르 쓴 이란 여인의 슬픈 눈동자다/ 몇 방울의 타액, 몇 점의 가지 빛깔 흉터들/ 새벽안개 속 무연고 무덤이다/ 아무도 없는 겨울 숲에 번지는 흰 총소리/ 뒤의 깊은 뒷면/ 납치된 피, 물속에서 피아노가 울고 있다//

백지와 나 / 함기석
백지는 무수한 질문의 책이자 우주다/ 하나의 말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죽음을 인간의 눈으로 기록하는 순간/ 우주는 백지 속의 바닥없는 해저로 가라앉고/ 침묵의 말들은 모두 물고기가 되어 바다 멀리 흩어진다// 그렇게 나는 표류 중인 어부다/ 미약한 인간의 언어로 물고기들을 건져 올리는 죽음의 낚시꾼/ 태초에 달아난 나의 시간 나의 우주/ 나의 피와 살과 꿈, 나의 유골을 건져 올리는 밤의 낚시꾼이다// 그렇게 백지는 내 임사(臨死)의 침실이다/ 백지는 내가 한 장의 창백한 백지임을 각인시키는 거울이다/ 백지는 세계를 기다리는 갈망의 장소가 아니라/ 내가 곧 무(無)라는 공포임을 공증하는 견딤과 황홀의 세계다// 죽음은 시간이 고용한 서기관(書記官)/ 그는 인간의 서책인 육체에 먹으로 낙서하길 아주 좋아한다/ 그 낙서를 어떤 이는 시(詩)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병(病)이라 부르고// 나도 이 서기관을 벗으로 곁에 두고 있으나/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날이 많아 그는 몹시 서운해 한다/ 그래서 가끔 연락도 없이 불쑥 나를 찾아와 술자리도 함께 하고/ 2차를 가자며 자기 집으로 나를 데려가기도 한다// 그가 사는 집터 이름 또한 백지(白地)/ 백지의 집엔 없는 게 없어서 온 세상과 우주가 다 만져진다/ 아무것도 안 보여서 다 보인다/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다 보여서 나는 황홀한 장님이 된다// 그렇게 눈 뜬 자는 눈이 멀고/ 그렇게 눈 먼 자는 광대한 암흑의 시야를 얻는다/ 그렇게 시인은 기존의 세계에 눈이 멀거나 스스로 눈을 태워버린 자이다/ 미지의 암흑, 미지의 시공, 미지의 빛과 감각을 찾기 위해// 백지는 눈의 실종 장소이자 감각 너머의 세계다/ 인간의 두 눈은 세계를 볼 때 자신을 보지 못한 채 세계를 확신한다/ 그러기에 인간의 기억이 사산된 망각의 발자국이라면/ 망각은 구름에서 쏟아지는 푸른 빗방울이다// 그렇게 기억은 무수한 점(點)으로 망각은 굴절된 선(線)으로/ 그렇게 인간의 몸에 시간은 야만의 족적을 남기고/ 그것이 인간의 언어라는 허명으로 백지 위에 깔릴 때/ 백지는 수사적 허위에 전율하니// 백지는 인간의 개입이 없을 때 백지 자체로 아름다운 신이다/ 시인은 신의 혀를 도절하는 낯선 이방인들/ 백지는 말의 무수한 선(線)과 색(色)의 분할 공간이자 결합 공간/ 인간의 눈이 닿는 순간 파들거리는 투명 생물체// 백지는 추상을 구현하여 대상을 무화하는 절대 극지이자/ 그 도구적 추상을 물질의 세계로 환원하는 생명의 땅, 광야다/ 백지는 백지의 형이상학을 붕괴시키는 나의 검은 육체/ 나의 무덤이자 자궁이고 천국이자 지옥이다// 나의 백지는 오늘도 밤의 태양을 기다린다/ 나의 백지는 오늘도 장미의 가시 돋은 하늘을 부른다/ 나의 백지는 오늘도 기나긴 팔을 뻗어 달의 허리를 만지고/ 나의 백지는 영원한 어둠이고 영원한 미지다// 미지의 형식이란 반역적 숨쉬기이자 죽음이 낳는 배설물/ 나의 똥과 피와 땀과 오줌이 내 시의 유일한 실재일 것이니/ 하하하! 시는 없고, 이 없음의 환멸과 유혹이/ 나를 다시 언어의 바벨탑으로// 가도 가도 결국은 헛것일 이 무자비한 유희/ 그러나 나는 혼신으로 사랑한다 세계의 허(虛)와 무(無)를/ 그것은 간절하고 절박한 나의 육체이지만 결코 나의 망명지는 아니니/ 나의 백지여! 백지는 백지를 찢고 다시 백지를 시작하라!//

슬픈 거인 / 함기석
명암저수지다 물은 눈꺼풀을 닫고 잠들어 있다/ 밤 깊어 천둥이 울자// 못처럼 비가 내린다/ 잠 깬 저수지 수면에 무수한 원의 얼굴들이 그려지고// 밤새 못 자국 낭자한 물 밑을 떠도는 잉어들/ 집 잃은 철거민 같다// 도시 외곽을 순환하는 동부 우회 도로 변에/ 17년째 혼자 서 있는 75미터 명암타워// 검게 녹슬어가는 몸, 등이 아프고 다리도 저린/ 슬픈 거인, 병든 신 같다// 이곳은 고독의 유원지/ 사방이 열려 있어 사방이 철저히 폐쇄된// 오리배 동동 떠 있고/ 우르르 쾅쾅, 우르르 쾅 쾅 쾅// 살려달라고, 잠긴 배 문을 쾅쾅 두드렸을 아이들처럼/ 세차게 쏟아지는 사월의 캄캄한 비// 저수지 저편 한국병원 장례식장 옥상에서/ 죽음이 젖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와 수면을 빙빙 돈다// 이곳은 빛의 유원지/ 아무도 풀 수 없는, 물속 깊고 아픈 명암의 명암//

검은 꽃 탄자니아 / 함기석
들판 여기저기 탄자니아 꽃이 검게 피어 있다 여자는 죽은 아이 아벨을 거적에 싸안고 노을 번지는 언덕을 내려온다 구릿빛 등의 남자는 샘을 파다 운다 인간의 혀보다 두렵고 거친 배신의 땅// 작은 돌들 사이에서 풀들이 웃고 있다 나는 붉은 천막처럼 펄럭이는 하늘을 배경으로 피 묻은 빨래를 널고 찢긴 마음을 넌다 진흙 논처럼 쩍쩍 갈라진 남자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흙물// 공중엔 무쇠 포탄보다 무거운 먹장구름 연대, 여자는 죽은 아이를 내려놓고 맨손으로 구덩이를 판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언덕 위로 아이와 놀던 강의 물고기들이 헤엄쳐와 구덩이 속을 엿보고// 남자는 말없이 또 땅을 판다 파고 파고 또 파도 나오지 않는 물줄기와 저린 어깨, 앙상히 뼈만 남은 나무뿌리 밑엔 더 앙상하게 뼈만 남은 노인들 아이들, 들판 저편에서 또 포성이 울린다// 거적 밖으로 삐져나온 아벨의 피 묻은 발 하나를 저녁 햇살이 가만히 어루만지고 있다 수시로 포탄이 날아오던 모래능선 위의 하늘이 유리사발처럼 쩍 갈라지고 꽃들의 눈썹이 검게 흩날린다// 깊은 땅 속에서 똥그랗게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 저 스스로를 직립으로 매장하려는 걸까 어디서 누가 또 죽었는지 흰 풀이 비명처럼 돋고, 여자는 거적에 덮인 아이를 꺼내다 울음을 터트린다// 구덩이 왼편 돌 틈에서 죽은 사람의 발을 닮은 꽃이 하늘하늘 웃고 있다 여자의 가냘픈 숨결처럼 찰랑찰랑 잔물결 일으키며 퍼지는 꽃가루, 약에 취한 새처럼 나는 나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잿빛 시를 낮게 웅얼거리며 빨래를 넌다 남자는 계속 땅 속에 둥지 잃은 새처럼 빈 울음으로 서 있고 지옥에서 날아온 부고엽서 같은 노란 나비 한 마리 아물아물 구덩이 주변을 맴돈다// 이 들판 저편 먼 아시아에도 촛불이 타오르겠지 맨드라미처럼 붉은 여자의 잇몸, 아이가 꾸던 단 꿈이 구덩이에 묻히고 남자는 검은 꽃의 지층 어딘가에 있을 천국을 찾아 더 깊은 곳으로 파들어간다//

검은 구두 / 함기석
공원 벤치 밑에 구두 한 짝/ 새처럼 잠들어 있다/ 벤치 위엔 남자/ 신문지를 덮고 잠든 둥근 둥지// 죽은 걸까, 꿈꾸는 걸까/ 검은 구두 속에서/ 하얀 물감 빛깔의 새벽이 흘러나와/ 남자의 몸을 수의처럼 감싸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 겨드랑이 사이로 샘물이 밀려와/ 한 방울 한 방울 신문지에 떨어지고/ 어린 꽃들이 단발머릴 흔들며 웃는다// 누구의 입일까 검은 구두/ 구두 속에서 흰 말이 날아오르고/ 밤사이 대기가 흘린 꿈이/ 남자의 입술 끝에 투명한 핏방울로 맺혀 있다//

어떤 소극장 / 함기석
극장 안은 어두웠다/ 계단을 따라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 나는/ 뒤에서 두 번째 줄 끝에 앉았다/ 무대엔 백발의 한 노인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휠체어 앞에는 나무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투명유리 찻잔에서 김이 올라왔다/ 테이블 맞은편엔 절망에 빠진 한 남자가 보였고/ 백지에 어두운 유서를 쓰고 있었다/ 흐린 핀 조명 아래서 노인은/ 자신이 살아온 진흙과 유리의 날들을 이야기하며/ 절망에 빠진 남자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 말게 자넨 오늘밤 죽지 않을 거네!/ 벽 너머에서 파도소리가 들려왔고/ 조명이 밝아지면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든 살의 나였다/ 남자는 마흔일곱 살의 나였고 무대 왼쪽에서/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무대 오른쪽으로 지나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난 금방 알아챘다/ 그 아이는 열한 살의 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걸어 나갔다/ 내가 등장하자 절망에 빠진 남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구겨진 유서를 손에 움켜쥔 채 내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무슨 일을 하시오?/ 시를 쓰는 서른 살 청년입니다/ 목숨을 걸 작정입니다 확신에 찬 내 대답에/ 남자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벽 너머 수평선만 바라보았고/ 극장은 둥둥 떠가는 거대한 눈동자였다/ 무대 오른쪽에서 자전거 탄 아이 둘이 나오더니/ 깔깔깔 떠들며 무대 왼쪽으로 사라졌다//

저녁의 비행운(飛行雲) / 함기석
아픈 아이를 안고 창밖을 본다/ 내일이 어린이날인데 하늘엔 어두운 핏줄만 뻗어가고/ 내가 가꿔온 꿈이 사마귀처럼 사각사각/ 내 내장을 파먹고 아이의 웃음을 파먹고 있다/ 옆집 무화과나무 아래 싹튼 상추들이 모두/ 만 원짜리 지폐로 보인다 저 싱싱한 지폐에 구름과 삼겹살을 싸/ 배터지게 먹고 돼지가 되고 싶은 날이다/ 대문가 목발을 짚고 올라온 어린 나팔꽃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저녁의 눈동자는 점점 커져 서녘하늘 전체가 붉은 갯벌로 변해가고/ 벼랑이 보이는 해안으로 새들이 날아간다// 햇살 하나가 가만히 다가와 아이의 상처 난 뺨을 혀로 핥아준다/ 흰 이가 막 돋아난 햇살의 빨간 잇몸/ 공기들이 만드는 투명한 파도가 쉼 없이 일렁이고/ 아이는 약에 취해 잠든다/ 나는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놀이터 모래밭을 바라본다/ 아침부터 온종일 허공을 날다 저녁에/ 모래밭에 떨어져 죽은 새/ 새가 남긴 마지막 무늬와 추상의 발자국들이/ 사람의 문장보다 아픈 저녁이다/ 나는 잠든 아이를 꼭 안고 속으로 울음을 삼킨다// 점점 붉게 지쳐가는 하늘과 대지/ 저 두 장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검붉은 침묵들/ 거미의 입으로 들어간 벌레와 빗방울과 어둠이/ 환한 허공의 집이 되기까지/ 삶의 습한 저지대를 비행하는 아픈 비행운들/ 멀리서 석양에 젖은 새들이 하늘을 돌고/ 나무의 흔들이 죽은 나뭇가지 끝에서 빠져나와 찬 물결처럼 고요히/ 허공 저편으로 퍼져가는 것이 보인다//

무중력 회전체 큐브 / 함기석
Open Your Eyes! Open Your Dream! 이상한 목소리에 잠에서 깬다 큐브다 2079년 여름아침이다 천장에 깔린 관모양의 수면캡슐에 내가 누워 있다 천장모서리에 의자가 거꾸로 붙어 있다 한 노인이 앉아 담배를 피고 있다 노인은 일어나 벽에 수직으로 붙은 화분에 물을 준다 난 자넬세 여긴 제64우주 뫼비우스의 공중기차역이고 지금은 2479년 겨울저녁일세 삼사라* 기차가 오면 난 곧 떠날 게야 찬 물줄기가 주르르 내 얼굴로 쏟아진다// 바닥으로 두 개의 금속창이 보인다 왼쪽 창으로 항구가 보이고 물개들이 보인다 임신한 어머니가 불가사리 해변에 쓰러져 있다 벼랑에서 누군가 몸을 던진다 어머니가 진통하며 나를 낳는다 개가 태반을 물고 벼랑 아래로 달리자 오른쪽 창으로 천 년 전의 몽골초원이 나타난다 초원에 해부대가 놓여 있다 마취도 없이 복제된 7인의 내가 해부되고 있다 공중으로 하얀 돌 하얀 모자들이 떠다니고 문자 없는 책들이 하늘을 날고 있다// 큐브를 탈출하려 출구를 찾는다 벽을 밟고 바닥으로 올라간다 다시 반대편 벽을 밟고 천장으로 내려온다 400년이 찰나에 지난다 내 몸은 온통 주름투성이고 머리는 백발로 변해 있다 벽은 온통 가시투성이 넝쿨식물로 뒤덮여 있고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바라본다 천장에 붙은 관모양의 수면캡슐에 또 다른 내가 누워 있다 꿈꾸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Open Your Eyes! Open Your Dream!//
* 삼사라(Samsara): 흘러가는 것. 끝없는 재탄생의 연결고리로 생명과 죽음이 순환하는 것.

자책한 과부가 부과한 책자 -전대미문의 문미대전 / 함기석
회문(回文)국 국왕 론의 주검을 뒤집어 검시하자/ 굴이 발굴됐다/ 굴은 총길이 416m 창자, 기나긴 악몽의 해협이었다/ 야음에 비밀잠수함이 지나가는// 론의 눈에서 독 묻은 탄환 나왔다/ 탄환은 웃으며 자기는 론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론의 찢긴 목구멍에선 푸른 가시벌레들이 계속 기어 나왔다/ 항문에선 죽은 흰개미들이 쏟아졌고// 신하들은 국왕의 죽음을 미화할/ 전대미문의 문미대전을 대대적으로 작란하기 시작했다/ 굴에선 계속 흡혈박쥐들이 날아올랐고/ 왕국의 하늘은 황량한 노을로 뒤덮인 위조지도가 되어갔다// 검시관이 론의 입에 손을 넣었을 때 처음 닿은 것은/ 물컹한 혀, 그것은 흑갈색 파도가 문신된 13cm 페니스였다/ 론의 성기는 죽어서도 웃고 있었다/ 그 소름끼치는 말뚝웃음 저편 까마득한 저승의 서해에서// 몰살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밀물로 울려왔다/ 바로 그때 왕국의 수도 바위산 아래 론의 일가가 살던/ 푸른 기와의 궁궐이 보였다/ 궁은 나풀거리는 회문(回文)의 책자였고 13부로 되어 있었다// 1부 건조할 조건/ 빨간 속눈썹 달린 개 두 마리가/ 거울 앞에 선 여왕의 궁둥이를 킁킁거리며 살살거렸다/ 호호 Madam I'm Adam 호호/ 밥그릇처럼 무덤만 즐비한 벌판을 바라보며 여왕은 독백했다/ 꽃도 염문도 법도 역사도-다들 잠들다// 2부 위대한 대위/ 웃는 백치여왕 adada 목엔 두 개의 장식용 머리가 달려 있었다/ 여야처럼 좌우처럼 전쟁은/ 불길이 끝나지 않고 정치적 섹스는 계속되었다/ 오래전 아버지 론이 대공조사실에서 어린 열사들의 눈을 태워/ 빨강괴물 그림자놀이를 즐길 때처럼// 3부 다 모호한 호모다/ 왕은 왕이어서 왕왕 Cooing과 Babbling 혼자만 놀았다/ 그리하여 <나>라는 <나라>는 항문 가득 파리가 알을 슨 변사체/ 그리하여 역사는 발작 중인 회문(回文)의 회문(會文)/ 입과 꼬리가 뒤바뀐 하마처럼/ 뇌물 먹다 뇌에 물이 괸 코 없는 코끼리처럼 끼리끼리// 핏기 없는 꿈들이 날마다 서해로 흘렀다/ 굴을 다시 뒤집자 론의 텅 빈 폐에 백야의 어둠이 가득했다/ 론의 사체에서 독재자 론(Lone)이 대를 이어 부활했고/ 회문(回文)국의 모든 음악과 춤과 시는 검은 감옥에 투옥되어// 어두운 회문(回問)이 되어갔다/ 거리마다 죽은 아이를 안은 여자들이 실성한 버드나무처럼 거닐었다/ 그들은 모두 무덤을 빠져나온 핏덩어리 구름들/ 불구의 땅이 낳은 불구의 해와 달과 별// <나>라는 <나라>는 눈알이 검게 썩어들었다/ 그리하여 아홉의 검시관은 전대미문의 시체사건을 최종 판결했다/ 대지엔 론의 기나긴 악행이 음담의 패설로 새겨졌고/ 땅의 곰팡이들이 빠르게 하늘로 번져갔다// 곰팡이들의 미친 웃음소리 따라, 야사의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고/ 죽어서도 눈이 감기지 않는 아이들은 모두 물새가 되어/ 굴의 폐쇄된 해저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마침내 굴의 반대편이 나왔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촛불이 타는 반도였다 반도는/ 자책한 과부가 부과한 거대한 피의 책자였고/ 또 다른 전쟁으로 4부 5부 6부 이후의 모든 서사는 불타 있었다//

할머니의 안부 / 함기석
오늘밤 흙에서 짐승의 비린 간 냄새가 난다 할머니와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집은 어두워 우린 태반에 싸인 채 버려진 핏덩어리들 같아 바람은 늙은 말처럼 울고// 디디, 너무 추워 찬 바닥에 살을 대고 밤마다 널 생각해 네 따듯한 등이 그리워 아침엔 내 눈에 코스모스가 뿌리를 내렸어 꽃을 피우면 봉오리에서 내 팔이 나올 거야// 이상해 어둠 속에서 돌들은 새의 음률로 울어 흙에선 계속 짐승의 비린 내장 냄새가 진동하고 풀들은 밤새 어두운 혀를 내밀어 허공이 제 몸에 뜬 문신들을 핥아주어// 디디, 할머니는 잘 계셔 이제 거의 다 썩었어 곧 내 귀에서도 억새풀이 돋아날 거야 내 입도 코도 눈도 거의 문드러졌어 며칠 전부턴 가시나무 뿌리가 내 폐를 뚫고 자라고 있어// 정오엔 우리가 암매장된 무심천에 햇살이 공작처럼 꼬리를 활짝 펴 난 하루 중 그때가 제일 좋아 햇살이 깔깔깔 우리 주변을 빙빙 돌며 무당춤을 추거든// 디디, 할머니와 내가 있는 이 집은 쌀자루야 네 토막이 났는데도 할머니는 웃기만 하셔 끈적끈적 살이 흐르고 벌레들이 꿈틀꿈틀 눈을 파고드는데도 함박꽃처럼 웃기만 하셔// 꽃은 피가 낭자한 식물의 광대뼈야 火印이야 유서야 죽고나서야 난 알았어 하지만 넌 이 땅속의 메아리조차 듣지 못하겠지 디디, 미안해 이번 생일엔 갈 수가 없어//

뽈랑공원 / 함기석
뽈랑 공원의 아름다운 정문이 열린다/ 꽃밭에서 햇빛과 나비들 춤춘다/ 뽈랑색 벤치들이 보인다/ 뽈랑새 두 마리 자유로이 공원을 날고 있다/ 물푸레나무 아래 꽁치처럼 예쁜 여자/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아기가 젖을 빨다 스르르 잠이 들자/ 여자는 하늘 한복판을 푸욱 찢어/ 아기의 어깨까지 살포시 덮어준다/ 찢어진 하늘에선 푸른 물고기들이 쏟아지고/ 여자는 유모차에서 책을 꺼낸다/ 아기를 위한 자장가 뽈랑송을 부르며 책장을 넘긴다/ 여자가 책을 보는 동안 아기는 꿈꾸고/ 물고기들은 나뭇가지 사이로 헤엄쳐 다니다/ 책속으로 사라진다/ 한 청소부가 후문에 나타난다/ 이상하게 생긴 뽈랑 빗자루로 공원을 쓴다/ 그러자 공원이 조금씩 조금씩 지워지면서/ 책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꽃밭이 사라진다/ 벤치들이 사라진다/ 나무들이 사라진다/ 하늘이 새들이 빛이 시간이 차례로 빨려 들어가고/ 여자가 사라지면서 손에 들려 있던 책이/ 청소부 발 아래로 떨어진다/ 청소부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다/ 책을 주워 들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말들이 피운다는 뽈랑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책을 펼친다/ 22페이지에 뽈랑 공원이 나타난다/ 함기석이라는 휴지통이 보인다/ 여백이 되어버린 하늘이 보인다/ 유모차를 끌고 행간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사라진 새들은 사라진 빛을 향해 날아가고/ 여자가 머물던 물푸레나무 그늘 속에서/ 투명한 물고기들이 헤엄쳐 나온다/ 샘물이 된 아기울음 흘러나온다//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 함기석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심장 잃은 새 이프 / 함기석
이프, 네가 내 눈이었을 때/ 나는 공중을 흐르는 사막 나는 말하는 돌/ 이프, 네가 내 귀였을 때/ 나는 흩날리는 집 나는 물고기 눈을 가진 낙타/ 이프, 네가 내 입술이었을 때/ 나는 생리 중인 백합 나는 주검을 맴도는 나비/ 이프, 네가 내 코였을 때/ 나는 고대 페르시아의 돌기둥 나는 아무도 없는 해저// 이프, 내가 너의 팬이 아니었다면/ 나는 새들의 감옥, 창살도 열쇠도 없는 미궁의 방/ 이프, 내가 너의 지하실이 아니었다면/ 나는 발코니에 놓인 구두, 고양이 울음소릴 내는 꽃/ 이프, 내가 너의 혀가 아니었다면/ 나는 풍차가 쏟아지는 하늘, 가면을 찢는 가면/ 이프, 내가 너의 스카프가 아니었다면/ 나는 흙바람 몰아치는 거리, 낭떠러지 봄// 이프, 나는 나의 차가운 도형/ 너는 무한을 향해 빅뱅중인 코스모스 백지/ 이프, 나는 영원히 나의 여집합/ 전생과 후생과 현생, 세 서클의 교집합 속에서 태어나는 말/ 이프, 이제 나는 나의 죽음을 끝마쳐야 해/ 너는 기억도 망각도 거역해버린 파란 눈의 세계수/ 이프, 다시 네 심장의 노래를 들려줘/ 저기 봐, 계단을 구르는 오렌지 뚝 뚝 악몽을 흘리는 촛불들//

개안수술집도록(開眼手術執刀錄)-執刀 49 / 함기석
잠자는 라이프 교수 곁엔 와이프, 서늘한 나이프다 그녀 머리맡엔 차고 흰 접시, 교수의 귀에서 흘러나온 붉은 꿈이 학술적 사과의 자세로 놓여 있다 아내의 잠에서 탈옥한 까마귀가 사과를 쪼고 있다 그때마다 차고 위의 달이 흰 피를 흘린다 새벽녘 교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뜬다 와이프는 은빛 나이프 자세로 요염하게 잠들어 있다 방금 꿈에서 목격한 고속고로의 죽은 말처럼, 검붉은 눈알 두 개가 창밖 사과나무에서 침실을 엿보고 있다 어떤 잠은 생살이 한 겹 한 겹 연어 살처럼 저미어져 쌓인 회 접시, 사람의 입술이 닿지 못하는 얼음 섬이야 교수는 혼잣말을 하고 담배연기를 길게 뱉는다 달은 폐가 따끔거리고 어둠 속에서 초토의 행성 닮은 얼굴 하나 사과껍질 도르르 벗겨지며 지붕으로 떨어진다 물컹물컹 와이프 눈에선 시퍼런 잠이 흘러나와 침대보를 적시고//

개안수술집도록(開眼手術執刀錄)-執刀 58 / 함기석
새벽은 아드레날린을 분비 중인 무척추동물이다 꿈 없는 잠의 늪을 뒤척이다 내과의사 Vector 초음파 이미지로 꿈의 병변을 분석 중이다 뒷면 거울에서 안개꽃 수염투성이 외과의사 벡터가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다 누가 보내 스파일까 누가 그녀의 꿈을 훔쳐가 거울 속 유리병원에 유기한 걸까 Vector가 잠옷 차림으로 마취실로 들어가자 흰옷 입은 시체들 광장이 나온다 검은 십자가 두건을 두른 신이 Vector의 노모를 잠재우고 있다 성경을 펼친 손은 새가 되어 날고 나이테처럼 퍼지는 레퀴엠 파르르 노모는 눈꺼풀 떨며 하늘을 본다 암세포 깔린 별들 사이로 살들이 떠가고 혈관들이 나무뿌리처럼 뻗어나가고 있다 여긴 어느 짐승의 내분기관일까 종양의 거리마다 불결한 산책을 끝낸 노인들이 벤치에서 틀니를 딱딱거리며 웃고 있다 Vector가 다가가자 드라이아이스처럼 증발하는 빌딩들//

음시 / 함기석
오늘밤 장미는 세계의 반(反)기획이다/ 죽은 자들의 죽지 않는 발이 해저를 걷고 있다 그것이 내 몸이다/ 천둥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아픈 발을 뿌리내릴 때/ 소리는 빗물이 꾸는 가시 꿈, 사방에서 악의 술어들이 취하고// 우리는 우리의 주검에 핀 살의 현상이고 음시다/ 수천의 혀를 날름거리며 피 흘리는 사전, 그것이 내 몽이다/ 에포케 씨가 살로 세계를 쓸 때, 끝없이 제 살을 찢어 흰 숨결에 섞는 파도/ 그것 또한 내 몸이니, 연기 내며 비는 귀부터 타오르고// 오늘밤 장미는 견고한 유머고 종이요새다/ 벼락 속에서 지상의 모든 이름을 버린 어휘들이 태어나 웃을 때/ 섬광으로 피는 꽃들은 혼들의 무수한 편재다/ 백(白)과 골(骨) 사이, 밤은 늘 검은 수의를 입고 창가를 서성이므로// 거대한 홀이 뚫린 이 세계의 중앙국 음부에서/ (이 괄호 안의 세계가 open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제2의 주어/ 당신은 언어 속에서 살해되는 ING 생체다/ (이 비극의 괄호 밖 세계도 open임을 확증할 수 없다)는 제3의 주어/ 나도 이미 언어 속에서 화형 중인 ING 사체이니// 장미는 장미의 유턴이고 돌에 고인 번개다/ 장미는 시가를 물고 흑풍 속에서 백발을 흩날리는 양초인간/ 이 비극을 빗줄기는 흰 척추를 드러낸 채 밤새 대지에 음사하는데/ 이 참극을 새들은 살을 흩뿌려 잠든 잠을 깨우는데// 망각되지 않는 어휘들, 오랜 연인처럼 내 살 속 해저를 걷고 있다/ 죽은 자들의 목이 해파리처럼 수면으로 떠오르고/ 절벽 위엔 팔만사천 개의 손들이 공중을 한 장 한 장 찢어 날리고/ 흰 사리 문 목어들이 북천에서 헤엄쳐오니// 오늘밤 장미는 불의 유마경, 얼음의 유머경이다/ 산 자들의 죽은 발이 꽃밭을 걷고 있다 그곳 또한 내 몸의 적도이니/ 에포케 씨는 펜을 던져, 천둥이 살던 지하의 관시를 파묘하라/ 악의 술이 번지고 번져 닿는 저 세계의 실뿌리들//

컬러 킬러의 흑백 사체 / 함기석
정오의 까마귀가 울고 비밀쪽지가 Karma Police에 배달된다 알파벳 서장! 난 당신이 추적중인 연쇄살해범 제로요 밤마다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소 죽은 자들이 죽은 말을 타고 나의 침실로 달려오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소 부탁이오 오늘밤 나를 죽여주시오// 서장은 옥상으로 올라간다 동쪽 도로를 바라본다 권태롭다 서쪽 광장을 바라본다 권태롭다 남쪽 로봇단지를 바라본다 권태롭다 북쪽 비행장을 바라본다 권태롭고 권태롭다 탄환을 장전하고 쪽지에 그려진 약도를 따라 제로가 머무는 모래빌딩으로 간다// 2층 옆에 3층이 있다 3층 위에 1층이 있고 2층 밑에 4층이 있다 지하실은 유폐된 섬처럼 공중에 떠 있다 빌딩 밖으로 우주선들이 날고 있다 서장은 나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타임실험실로 간다 시계들이 흰 피를 흘리는 벽 아래 제로가 울고 있다 어깨엔 날개가 등엔 붉은 지느러미가 돋아 있다// 바닥엔 세계지도가 음각으로, 천장엔 우주의 천궁도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서장이 발을 옮길 때마다 벽에서 모래가 흘러내린다 오른쪽 창으로 고대의 설원이 보인다 왼쪽 창으로 3천년 후의 지구가 보이고 어둠 속으로 무수히 명멸해가는 행성들이 보인다// 제로가 고통스럽게 말한다 난 시간의 몸이오 난 더 이상 불멸을 원하지 않소 불멸은 환멸이오 어서 나를 사살하시오 서장은 말없이 제로의 눈을 바라보다 권총을 발사한다 탄환이 제로의 심장에 정확히 명중된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텅 빈 진공이다// 갑자기 제로가 차디차게 웃는다 길고 파란 혀로 서장의 목을 휘감고는 얼굴을 핥는다 서장의 관자놀이에 총을 대고 말한다 알파벳 서장! 내게 죄의식이란 털끝만큼도 없소 잘 가시오 탕! 서장의 뇌를 관통한 탄환이 어둠 속을 날아간다 머나먼 미래에서 발사된 탄환이 너의 심장을 향해//

즐거운 소풍 / 함기석
1행이 걸어간다 해바라기 꽃길 따라/ 2행이 걸어간다 랄랄랄 시냇물 따라/ 3행이 걸어간다 겅중겅중 걸어간다/ 4행이 걸어간다 악기들과 걸어간다/ 5행이 걸어간다 콧노래 부르며 걸어간다/ 6행이 걸어간다 발 달린 가을도 걸어간다/ 7행이 걸어간다 하늘을 와삭와삭 베어먹으며/ 8행이 걸어간다 사과나무 걸어간다/ 9행이 걸어간다 포도나무 걸어간다//

 

오렌지 기하학 / 함기석
야옹 야옹 비가 내린다/ 인간의 뇌혈관 실핏줄 같은 비/ 비의 발톱이 정원을 쥐새끼처럼 찢어놓는다/ 나는 3층 2층 1층 0층을 차례로 올라가/ 공중의 지하실에 도착한다/ 거기서 비의 공격성이/ 인체와 정신에 미치는 충격을 수량화한다/ 시 대신 기하학문제를 풀며 오렌지랑 논다/ 3차원의 내가 1차원의 나를 초대해/ 2차원 마을에 사는 나를 찾아가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피로 물든 백지와 함께 나를 찾아온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그래도 야옹 야옹 비가 내린다 오렌지는 웃고/ 기하학은 기하학을 살해한다//

어떤 市 / 함기석
어떤 市를 가는데/ 어떤 커다란 돌이 굴러와 멈춘다/ 돌에서 다리가 쑥 나오더니 내 엉덩이를 걷어찬다/ 팔이 쑥 나오더니 내 뺨을 후려친다/ 내 가발을 빼앗아 쓰더니/ 내 바지를 빠앗아 입더니/ 내 가방을 빼앗아 열더니/ 노트에 깨알같이 적힌 미분방정식의 오류를 지적하더니/ 오류의 오류를 지적하더니/ 내 노트를 먹어치우기 시작하더니/ 내 가방도 구두도 마구 먹어치우더니/ 나까지 먹어치우더니/ 다시 데굴데굴 굴러간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삼복염천의 다리 밑에서 돌은/ 배를 두드리며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없는 나라 / 함기석
없는 초원에서/ 없는 말들이/ 없는 갈기를 휘날리며/ 없는 꿈길을 달려 내게로 온다/ 없는 안장에 나를 태워/ 없는 나라로 간다/ 없는 나라에 도착해보니/ 없는 사람들이 보인다/ 없는 길들이 보인다/ 없는 시계들이 걸어다닌다/ 없는 거울들이 나무들이 걸어다닌다/ 없는 시인들이 없는 시를 쓴다/ 없는 화가들이 0차원 그림을 그린다/ 없는 영화관에선 없는 영화가 상영되고/ 없는 개들이 없는 담배를 피우며 내게 묻는다/ 없는 당신!/ 없는 삶을 끌고 왜 여기까지 왔소?//

유의미양 실종 사건에 대한 현장검증 / 함기석

 

북소리 / 함기석


타임 호텔의 지그재그 25층엔 25시, 복도를 따라 하이힐 소리 걸어간다 계단을 오르는 콜걸 나온다 / 함기석


방향표시판 혹은 스텔스機 / 함기석

 

알파벳 형태로 가꾸어 놓은 꽃밭 / 함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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