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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장경린 시인

부흐고비 2021. 12. 22. 08:32

장경린 시인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 《문예중앙》, 1990년 《현대시세계》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넋이야 있고 없고」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 『토종닭 연구소』 『간접 프리킥』이 있다.

시와 시학 젋은 시인상을 수상하였다.

 



가족 / 장경린
물고기들이 돌 속에 박혀 놀고 있다/ 물처럼 부드러워지는 돌// 나는 그곳에서 추방되었다/ 내가 그곳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그곳은 파괴되지 않고/ 완만하게 잘 돌아갈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추방된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이/ 잘된 일이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지나/ 비바람에 씻겨/ 뒹구는 돌//

시인 / 장경린
한 폭의 풍속도였습니다./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나 들여다볼 수가 없고/ 누구나 속해 있는/ 그런/ 풍속도였습니다.//

김춘수의 꽃 / 장경린
나와 섹스하기 전에는/ 그녀는 다만/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았다.// 나와 섹스를 하고 난 후/ 그녀는 더 이상 꽃인 체하지 않는/ 利子가 되었다.// 내가 그녀와 섹스를 한 것처럼/ 세일즈맨이든 경찰이든 꽃이든 망치든 컴퓨터든/ 무엇이든 내게 와서/ 나의 떨리는 가슴에 온몸을 비벼다오/ 그와 한 몸이 되어 이자가 되고 싶다./ 나도 그로부터 자유로운 이자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한 송이의 이자가 되고 싶다/ 나는 너의 이자가 되고 싶다/ 너는 나의 이자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꽃보다 아름다운 이자가 되고 싶다//

낙타가 되어 / 장경린
利子의 손이 닿으면 시냇물은/ 퀴퀴한 폐수가 되어 복개된 후 지도에서 사라지고/ 검은 대리석은 묘비가 되어 일어나 앉고 캐리가/ 보신탕이 되어 식탁 위로 올라오고/ 달걀이 날아가 바위를 부수고 앉아 있는 등나무 의자에서/ 새싹이 돋아나오고 어느 날 갑자기/ 中共이 中國이 되고 나는 몸서리치며 사표를 던져야지/ 다짐하게 되고 이자의 손이 닿으면 그녀는 내게/ 절교를 선언하며 돌아서고 낙태된 아이가 낙타가 되어/ 도시를 배회하고 장난감이 양로원으로 보이고 어리석음과/ 분노가 사라지고 금붕어가 책꽂이에 알을 낳고/ 오해가 풀리고 이자의 손이 닿으면 내가 내 삶의/ 엑스트라처럼 보이고 중산층답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지하철에서 신문의 숨은그림찾기나 해가면서/ 이자의 손이 닿으면 이게 뭔가 싶어 이자를 덥석/ 움켜쥐고는 어리둥절 터무니없이 화풀이를 해대고 외설이/ 예술이 되고 예술은 횡설수설이 되고// 이자의 세계에서/ 이자가 이자를 위해서 이렇게 장황하게 이자를 쓰고 있는 것도/ 이자들의 이자를 위한 것일지 모르지만/ 이자의 손에 닿으면//

달래야 / 장경린
매화는 다시 매화가 되려 하고/ 수련은 다시 수련이 되려 하고/ 북한산도 다시 북한산이 되려 하는데/ 걸쭉하게 몸 버린 한강도/ 다시 한강이 되려 하는데/ 쓰러진 강아지풀도/ 강아지풀로 일어나려 하는데// 나는 뭐가 돼야 쓰겠소/ 응?//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 / 장경린
나는 보았다 利子에 비틀거리는 청년들 성당 입구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흘러간 가요를 애절하게/ 利子하는 장님들 해남 대흥사 뒤뜰에 노랗게 핀/ 이름 모를 작은 꽃들 현금자동지급기 앞에 늘어서서/ 현금을 찾고 있는 利子들 불란서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불문학 교수가 된 시인들 설악산 대청봉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던 보이스카웃 대원들 나는 보았다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TV에서 울창한 숲과 탁 트인 바다에서 백화점에서 종로에서 영등포에서 나는 보았다/ 利子 위에서 현란한 춤을 추며 노래 부르는 가수들/ 검은 옷을 걸치고 근엄하게 검은 의자에 앉아/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 利子를 빨며 곤히 잠든 아이들/ 파고다공원 뒤에서 利子를 꼬시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동성연애자들 석양으로 물든 利子에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 利子를 깨서 상대방의 머리를 내리치던 주먹들/ 利子를 잉태한 어머니들 백사장에 누워 작열하는 利子에/ 몸을 태우고 있는 비키니들 나는 보았다/ 利子가 利子와 뒤엉켜 몸부림치는 광경을 나는/ 보았다 利子가 利子들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利子를 잡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利子의 무리를//

넋이야 있고 없고 / 장경린
사발시계 태엽 풀어/ 깨끗이 시간을 설거지하고/ 책상다리로 앉아 있던 오른발/ 왼발 아래로 보내고/ 목포의 눈물 흥얼흥얼 식어버린 아버지/ 정종으로 따끈하게 덥혀드리고/ 꽃순이는/ 개밥 그릇 앞으로 보내고/ 넋 놓고/ 흐르는 세월 꺽어진 구두 뒤축에게 보내고/ 피 묻는 달결 한 판 사서/ 냉장고를 채우고/ 막막한 사랑/ 무식하게 털어 놓고//

개화(開花) -김영태 시인에게 / 장경린
아들 목우(木雨) 결혼식에서/ 형님이 입은 가다마이는/ 소매가 삶은 호박잎처럼 흐늘흐늘했지요/ 삐딱하게 서서,/ 마땅히 둘 곳 없는 시선을/ 가봉하듯 늘어뜨리고// 저는 속이 가벼워서/ 결혼이라는 걸 못해봤어요/ 블라우스 자락에 클립으로 집어놓은 메모 쪽지처럼/ 건들건들 사연들을 달고 있다 보면/ 어느 날 블라우스는 온데간데없고/ 허공에/ 홀로 꽂혀 있는 클립/ 철(鐵)꽃 같아요// 사람 하나 간신히 비집고 올라갈 수 있는/ 중국집 개화(開花)의 목조 계단은/ 옛날보다 더 삐걱거려요/ 자장면 면발은 눈에 띄게 가늘어졌죠./ 불황 탓이거니 여기고// 싱싱한 양파나 한 접시 더 시켜 먹으면/ 그게 그겁니다//

막간(幕間) / 장경린
기차표를 끊어 놓고/ 시간 죽이러 들어간 청량리 뒷골목 극장/ 기형도 시인이 쓰러졌던/ 파고다극장보다 작고 음침한 그곳에는/ 세상과 담을 쌓기 위해 숨어든 백수들과/ 부랑자들이 굴러들어온 호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때 절은 잿빛 스크린 펄럭이며/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흉측스런 공룡보다/ 찢어진 스피커의 소름끼치는 소음이/ 사람 잡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흘리던 쥬라기의 팝콘들// 그때 슬그머니/ 내 허벅지를 타고 넘어오는/ 옆자리 중년 남자의/ 부드러운 손길// 시간을 넘나드는 영화도 보았고/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영화도 보았다/ 聖이 性을 뛰어넘지 못하는 영화도 보았고/ 바다가 육지를 덮치는 영화도 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남자를 뛰어넘지 못하고 무너지는/ 그 영화 같은 현실 앞에서/ 덥석 공룡에게 물린 듯/ 식은땀을 흘리며//

거기가 어디였더라 / 장경린
눈부시도록 탁 트인 장지였다// 부슬부슬 떨어져 나가는 바위 틈에서/ 조개껍질들이 나왔다/ 바다 속처럼 고요한 산/ 삽날이 잘 먹지 않았다/ 온 세상이 물에 잠긴 적이 있다고/ 산모의 양수와/ 바닷물 성분이 그래서 같은 거라고/ 누군가 구덩이 속에서 아는 체를 했다/ 언젠가 불의 심판이 내리면 예외가 없을 거라고/ 숲을 헤치고 날아오른 새들이/ 푸른 허공을/ 깊이 파 들어가고 있었다/ 점점 깊어지는 구덩이를 보며// 일회용 커피로/ 일회용 몸뚱어리 녹여가며//

그게 언제였더라 / 장경린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단골 약국의 친근한 약병들/ 검은 열차들/ 작은 집과 다리와 먼 山/ 나를 스쳐 지나가는 젊은 풍속과 늙은 불안감들/ 욕망들 詩와 담배 연기로 지워버린/ 가랑비 웅덩이에 고인 빗물// 그게 언제였더라/ 갈매기들이 해안 초소에서 튀어나오던 저녁/ 해물탕 꽃게 다리를 빨아먹던 저녁/ 작은 하늘에서 큰눈이 쏟아지던 날/ 자신의 일기에 밑줄을 그으며/ 낯설고 기뻐서 술별을 따던 저녁//

당신과 나 사이에 / 장경린
당신의 1은 나의 1보다 크다/ 나무의 1은 바위의 1보다 크다/ 귀뚜라미의 1은 나무의 2보다 크다/ 서울의 1은 경상도나 전라도의 2보다 크다/ 아니 작다// 1과 1사이에/ 당신과 내가 있고/ 당신과 나 사이에/ 0이 있다/ 우리는 교미 중이다/ 우리는 출산 중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생명을 꺼내/ 어둠 속으로 돌려보내는 중이다// 당신과 나 사이에/ 달걀이 한 알 있고/ 달걀 속에는 깨진 토마토가 가득하고/ 깨진 토마토 속에는 합의서와/ 1은 1보다 작다는 합의서와 압력밥솥이 있고// 당신과 나 사이에/ 토막 난 시체들이 즐비하고/ 그 토막 끝에서 새벽이 돋고/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을 토막 내고/ 토막을 또 토막 토막 내고// 당신과 나 사이에/ 0이 있다/ 는 사실 때문에 나는 1을 사랑하고/ 당신도 1을 사랑하고/ 내가 당신 속에서 나를 찾는 동안/ 당신은 내 속에서 토종닭을 잡아먹고// 당신과 나 사이에/ 또 다른 0이 있다/ 는 사실 때문에 배추밭에 나비가 날아오고/ 한강이 흐르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장경린
23시 45분 : 않았다. 식빵을 커피에 적셔서 빨아먹는/ 25시 26분 : 비가 온다. 아주 많은 비가 아주 큰 밤을/ 적시고 있다. 비의/ 26시 34분 : 개고기가 먹고 싶다// 29시 51분 : 나의 모든 것을 내가 아닌 모든 것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나의 모든 것이란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이 내게 준 그것이다. 네온/ 사인으로 만든 십자가처럼 확실하게// 45시 86분 : 최순호가 쓰러진다. 게임이 잠시 중단된다./ 최순호가 일어난다. 재개된다. 이제 고작/ 3분 정도 남은 시간을 허겁지겁// 98시 421분 : 確信이 날 찾아왔다. 나는 그를 달래서/ 돌려보낸다. 다시는 날 찾지 마라 알겠니?// 388시 914분 : 하품을 하다. 하품도 내게는 아픔이다./ 삶을 너무 과식했나 보다. 배탈이 날 것/ 같다. 해탈도 내게는 배탈이다. 과식이// 489시 973분 : 기어가고 있다. 숨 죽이고 있는 나는/ 그가 휘둘러보는 한 폭의 인물화다. 들고/ 있던 思想으로 내려친다. 바퀴벌레의 흰/ 내장이 바퀴벌레의 왼쪽 옆구리 밖으로/ 삐져나온다. 다리처럼 思想을 잘게 끊으며,/ 나는 시효가 지나버린 연극 초대권이다.// 617시 5245분 :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이/ 시작이나 될 수 있었겠는가?// 999시 9996분 : 방바닥에서/ 999시 9997분 : 침으로 담뱃재를 찍어들고/ 999시 9998분 : 조심스레/ 999시 9999분 : 재떨이 앞으로 기어가며 나는//

토종닭 연구소 / 장경린
임시로 설치해놓았던 가을이/ 철거되고 있었다// 부도 맞고 쓰러진 토종닭 연구소 입구/ 널브러진 닭 한 마리/ 나사처럼 꽉 조여 있던 검은 눈빛은/ 벌써 풀려/ 땅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잡풀에 발목 잡혀 낡은 정보를 흘리는/ 빛바랜 신문지들/ 복제된 소가 전생을 기억한다고?/ 쌀 한 톨에/ 도서관이 들어간다고?/ 그럼, 내 속엔?// 인기척에 놀라 튀어나온 무당개구리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길흉을 등에 지고/ 혼(魂)마중 거리굿을 벌이고 있었다// 자욱히 피어오른 하루살이들이/ 점점이/ 지는 해를 끌어안고/ 허둥대고 있었다//

지글지글 / 장경린
구파발에서 좌회전하자마자/ 버거킹은/ 속력을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서울을 지나// 지하철워털루역. 백인소녀가벽에기대어휴대폰으로통화를하고있다. 울먹이며벽을향해돌아선다.이마로마구벽을찧는소녀. 벽속으로걸어들어가기라도하려는듯. 라고 적힌붉은광고벽보가곁에서소녀를위로하고있다. 휴대폰을바닥에내던지는소녀. 달려들어오는전동차. 창밖을물끄러미내다보고있는인형들. 그파란눈동자들.// 지글지글/ 맛있는 버거킹으로 오세요!/ 와퍼 세트를 드신 후 쿠폰 3장을 모아 오시면/ 세트 하나를 그냥 드립니다// 행사기간 : 7/32 ~ 7/45//

재개발지역 4 / 장경린
1/ 빚에 떠밀려 주민들이 떠난 음산한 폐가/ 지난 여름 달력이 비키니 차림으로 웃으며/ 빨간 색연필로 8월 2일자에 적어놓은/ '母제사'를 축하하고 있었다 집 안 여기저기/ 체납되어 버려져 뒹구는 납세고지서들/ 기가 죽어 축 처진 전깃줄들/ 깨진 유리창을 기웃거리던 햇빛은/ 불알이 떨어져나간 벽시계 뒤로 숨고/ 이 언덕배기 골목길을 오르며/ 얼마나 무거운 숨을 토해댔을까 쩍쩍 갈라진/ 시멘트 바닥 틈 사이사이/ 통통하게 물이 오른 검푸른 이끼들/ 주둥이가 깨진 빈 병이 계단에 누워/ 기어들어오는 그늘을 토닥이며// 2/ 그것을 순서대로 읽으면 인생이 되고/ 여기저기 무작위로 읽으면 꿈이 된다/ 고 말한 사람은 쇼펜하우어/ 그러나 차근차근 읽어나간 내 삶이/ 이렇게 뒤죽박죽되고 만 것은/ 꿈인가 생인가? 생이 꿈인가?// 포크레인이 툭, 치자/ 맥없이 쓰러지는/ 낡은 집// 꿈처럼 일어나는 먼지구름//

재개발지역 5 / 장경린
햄버거를 먹고 있는 아이의 입가에/ 21번 염색체 이상으로/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이의 입가에/ 인간의 色이 전혀 물들지 않은/ 태초의 입가에/ 너울거리는 봄// 아파트 철책 따라 만개한 개나리꽃들/ 空에서/ 노란 色으로 빠져나와/ 배드민턴공처럼 생긴 제 몸에 놀란 듯/ 팅! 팅!/ 色을 튕기며/ 아파트 철책 따라 달리는// 햄버거처럼 생긴 도시/ 염색체 이상으로/ 높이 솟구치며 골다공증을 앓고 있는 아파트 속에/ 속눈썹이 자꾸 빠지는/ 초승달 아래//

재개발지역 10 / 장경린
나는 내가/ 나를// 쓰고 내다 버리는/ 쓰레기통/ 이다 잠든 내 얼굴/ 퀴퀴한/ 그 재활용 쓰레기봉투 귀퉁이를/ 뜯어보는/ 당신의 허기// 굶주린 고양이의 비린 발톱//

퀵 서비스 / 장경린
봄이 오면 제비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씀바귀가 자라면 입맛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비 내리는 밤이면/ 발정 난 고양이를 담장 위에/ 덤으로 얹어드리겠습니다 아기들은/ 산모 자궁까지 직접 배달해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상품권으로 교환해드리겠습니다/ 꽁치를 구우면 꽁치 타는 냄새를/ 노을이 물들면 망둥이가 뛰노는 안면도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혼백은/ 가나다순으로 잘 정돈해두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제비들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쌀쌀해지면 코감기를 빌려드리겠습니다//

갈릴리 김밥 / 장경린
어렵게 쓴 사직서 끝내 구겨 버리고/ 갈릴리 김밥집에서 꾸역꾸역/ 검은 김밥을 쑤셔 넣는다/ 특별 보너스 주겠다는 유혹을 마다하고/ 자유도 마다한 이유 찾지 못해/ 머리를 쥐어뜯는 갈릴리/ 자신을 세상에 내다 판 죄/ 종신형 받는 게 아닐까/ 노동형 인간으로 거듭나라는 뜻일까/ 갈릴리 대형 거울에 갇힌 내 허상이/ 나를 향해/ 저 등신 하며 눈 흘기는 이 業을/ 씹으며// 식탁에 말라붙은 고춧가루 갈릴리//

회전문 / 장경린
어느 날 그는 탈주에 성공했다/ 몸담았던 조직의 육중하고 거대한 회전문을 밀고/ 드디어 속 시원히 나왔다/ 고 그는 믿었다 그물 같은 조직의/ 아래 위를 오가며/ 사방으로 얽혀 있던 관계의 고리를 끊고/ 간신히 회전문을 빠져나왔다/ 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문을 밀고 나오는 순간 더 빨리 돌아가는/ 그 문의 회전 속도에 휘말려/ 다시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다시 밖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그의 의지보다 더 세고 효율적인/ 회전문에 오래도록 그는 갇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탈주에 성공했다/ 고 믿었다 아침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박찬호 경기를 라이브로 즐기고 발목이 잘린/ 비둘기에게 과자를 주면서/ 시시각각 움직이는 주가를 지켜보다 배팅을 하고/ 동네 쓰레기 소각장의 연기가/ 어느 쪽으로 날아가는지 살펴가면서/ 듣지도 않는 레코드판 먼지를 닦아내면서/ 그는 탈주에 성공했다/ 고 믿었다 어제처럼 어제의 어제처럼은 살지 않겠다/ 고 말하면서 열심히 회전문처럼/ 돌아가면서// 어느 날 그는 탈주에 성공했다/ 고 믿었다 유로라인을 타고 파리로 떠나면서/ 먹다 남은 고추장과 라면을/ 런던 민박집 아주머니에게 다 털어 주면서/ 파리의 출출한 밤/ 그 고추장과 라면을 아쉬워하면서//

아스피린 / 장경린
바닥이/ 빤히 보이는/ 정기예금 통장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며칠째 물만 마시며/ 아스피린처럼 웅크리고 있는/ 속으로 녹고 있는// 그가 시를 쓸 때는/ 몸에서/ 백질 타는 냄새가 난다/ 낙엽 긁어모으는 소리/ 낮게 깔리기도 한다//

오토리버스 / 장경린
방사선 끊고/ 항암제마저 끊고 난 뒤/ 가족도 끊어진 밤 홀로 있다 보면/ 냉동배아 은행실의 배아가 된 듯하다고/ 너는 한숨지었다/ 이런 몸에서도 손톱이 자라다니// 그건 물을 마셔도 올라오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너를 위해/ 자연이/ 자연을 다듬어 만들어준/ 작은 정원이었다// 의약분쟁으로 의사들이 파업한 썰렁한 병원/ 북적이는 영안실에서/ 오토리버스 되어 흘러나오던 독경 소리/ 오토리버스 되어 풀리던/ 저녁노을//

버섯찌개 / 장경린
야근과 몸살 덕분에/ 55킬로그램에서 52킬로그램으로/ 가볍게 몸을 구조조정시키고/ 몸 밖으로 퇴출시킨 물질만큼 탈속해진/ 반물질이 되어/ 모처럼 만난 구름머리/ 주문한 버섯찌개가 나오는 동안/ 메추리알만한 침묵 소금에 찍어 먹으며// 소리 한 점 없는 침묵도/ 잡다한 소음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사기 쳤던 존 케이지( ~ 1992)/ 버섯을 연구했던 음악의 대가/ 누군가 물었다 하필이면 왜 버섯이냐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무명한 것이기에,/ 음악 한답시고 골을 비워놓으면 습기가 차니까……/ 국물 속에서 건진/ 내 거시기처럼 생긴 송이버섯/ 얼른 입으로 가져가 뜨겁게 감추며/ 존 케이지를 아느냐고/ 춤추는 남자를 사랑했던 존 케이지를 아느냐고/ 애꿎은 고인 들먹여/ 눈길을 돌려가며// 로그인// 내 속에는// 누군가/ 나보다 먼저 다녀간/ 흔적이 있다//

손에 강 같은 평화 1 / 장경린
사람 손가락이 열 개인 까닭에/ 십진법이 생겼다고 한다/ 이 손이 소처럼 뭉툭했다면/ 번잡한 삶 얼마나 단순하고 평화로웠겠는가/ 새의 날개 같았다면/ 가볍게 떨리는 마음으로도/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었을까// 내 손은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 간다/ 낡은 도자기처럼 은은하게 잔금이 깔리고/ 푸르렀던 힘줄도/ 스웨터에서 풀려 나온 실처럼 느슨해져/ 세상을 움켜쥐기보다/ 누구나 손잡기 쉽게 되었다// 이 손 강 같았으면/ 남원 어느 샛강처럼/ 둔덕을 끼고 느리게 돌아가는 강 같았으면/ 신발 벗어들고 생을 건너다/ 흰 발등 내려다보며 아득해진 마음이여/ 그 마음 쓰다듬는 얕은 강이여/ 내 손 그런 강 같았으면//

손에 강 같은 평화 2 / 장경린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다가/ 안경알을 깼다 항암제를 투약하면서도/ 도수를 높여가며 집착하던 안경이었다/ 점점 흐려지는 세상을/ 그저 그러려니 밀쳐두고 살았다면/ 암에 걸리지도 않았을 텐데 아쉬워하면서/ 깨진 안경알을 치우다가 손을 베었다// 스스로 불러들인 암과 타협해서/ 마음의 초점이나 잘 맞추고 지냈다면 편했을 텐데/ 한 치라도 자식들을/ 가까이 끌어당겨 보고 싶었던 것일까/ 도수를 높여가며/ 점점 멀어져가는 生과의 거리를/ 좁히고 싶었던 것일까// 어머니를 한동안 따뜻하게 왜곡시켜주었을/ 깨진 안경알을 보며/ 마음의 초점이 흐려져 상이 잘 잡히지 않는/ 눈 대신에/ 베인 손가락에 침을 묻혀/ 깨진 안경알 조각들을 더듬더듬//

몽유도원도 2 / 장경린
/ 위 네모 안에/ 마음속으로 점 하나를 찍으시오/ 그 점에서 솟구쳐 흘러내리는 샛강을 끼고// 차를 몰아 비포장도로를 달리시오/ (흙먼지가 일면 창문을 닫아도 좋소)// 고구마 밭이 나오면 하차해서/ 네모 틀 밖으로 나오시오/ 강이 휘돌아 나가는 여울목을 따라/ 트렁크에 싣고 온 암벽으로/ 병풍을 치시오/ (여유가 있으면 잘게 갈아/ 강변에 백사장을 깔아도 좋소)/ 강물에 발 담그고/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캔 맥주를 따시오// 문득 그곳에 눌러 살고 싶어졌다면/ 흐르는 강물에/ 임의의 점 하나를 찍으시오 그 점 주위에/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며/ 점을 찍어보시오 그중 하나의 점에게/ 사랑을 고백해도 좋소/ 모든 점들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소//

몽유도원도 11 / 장경린
어느날드디어바겐세일이시작된다/ 그는백화점으로달려가/ 몰려든사람들틈에끼어그것을골라든다/ 아가씨이게 40% 할인된가격이오?/ 아니요거기서40%를깎아드려요/ 마음이바쁜그의쇼핑백은순식간에가득찬다/ 불룩한쇼핑백들고돌아온그는/ 지친몸과그것을거실에던져놓고성취감에젖어널브러져있다가/ 비씨카드만한깨달음하나를얻는다/ 그렇다원하는것은/ 그무엇이든40%나할인된가격이었다/ 그는온라인으로들어가도토리를모두털어주고/ 50%할인된칼을산다는그는번쩍이는그칼로/ 더듬이가떨어져나간/ 구형텔레비전을60%싸게산다그는그것을팔아/ 90%나싸게나온돌아가신어머니를사들고온다/ 밤늦도록회포를풀고난뒤/ 한결밝아진어머니를새옷입히고화장해서/ 내다팔기로한다그러나어머니/ 아무리싸게판다해도/ 죽은여자를어느누가사겠어요어머니/ 어쩔수가없군요어머니그는엄마와자기를세트로묶어/ 헐값으로시장에내놓는다하루이틀사흘/ 모자가울고있다다시또/ 하루이틀사흘/ 이제그는온라인을빠져나가야겠다고마음먹는다/ 40%정도빠졌다면어쨌거나/ 만족할만한수준인것이다//

몽유도원도 17 / 장경린
광합성 작용을 하며 걸었다/ 식물보다 느리게 걸었다/ 식물보다 더 멀리 갔다/ 돌아오는 길 벌써 날은 저물고/ 낯선 곳에서/ 책을 읽으며 버텼다/ 불을 켜자/ 활자들이 먼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뒤따라 걸었다/ 자꾸만 자빠졌다/ 점점 뒤쳐지고 있었다// 처럼 거나해져 목청들 높아지고 있다/ 문간에서 구걸하고 있는 목발 짚은 노인 쪽으로/ 청어 굽는 푸른 연기가 빠져나가고/ 천장에서 건들건들 내려와/ 텔레비전에 내려앉는 거미/ 나잇값을 해 이 양반아 술을 똥구멍으로 마셨어/ 면박을 주는 주모/ 허름한 인생들을 받아 낸 그녀의 욕설에는/ 힘이 있다 야생동물 같은/ 신문지를 말아 쥐고 주모가 다가가자/ 부리나케 달아나는 거미의// 느닷없이 쏟아지는 우박/ 느닷없이 쏟아지는 눈동자//

몽유도원도 45 / 장경린
​발가락이 뭉개진 비둘기들이/ 세일즈맨처럼 통통걸음으로 뛰어다닌다/ 흩날리는 눈발과 뒤섞여 뒹구는/ 팝콘을 쫓아// 몸살로 사나흘 떨었다/ 중국산 건전지를 꽂고 간신히 북한산에 올라/ 저 멀리 도시를 굽어본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파트들/ 대파 밭 같다 아니 덕장 같다/ 그 속에서 벌레들이 하나 둘 불을 켜고 있다//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말아놓았던/ 겨울이 풀리면서 강가에 철새들이 날아든다/ 환율이 떨어지고 금리가 날아오른다/ 몇 송이 남지 않은 환율마저 떨어지고 나면/ 봄이 오려나 봄은 오려나//

그래야 단풍다운 가을 단풍 / 장경린
중국집에 잡혀 먹은 손목시계처럼/ 최신판 영한사전처럼/ 맛이 진한 몽고간장처럼 미군 야전잠바처럼/ 돼지 껍데기처럼// 요즘도 헌책방에서 제법 거래가 되는 『思想界』처럼// 조계사 대웅전/ 문지방 위/ 꼬리를 떨며 교미 중인 고추잠자리처럼// 1리터에 1,450원에서/ 1,390원으로 다시 1,530원으로/ 미친 듯이 널뛰는/ 휘발유처럼// 단풍이여/ 오늘만큼은 잠시 세상 접어두고/ 분배냐 성장이야 누가 뭐래도/ 북핵 위기니 인구 감소니 독도니 뭐니 다 잊고/ 단풍이여 그냥 좀더 붉게 타야 쓰겠다/ 가을 단풍이여// 아파트 값이 폭등했지만/ 더 오를지 몰라/ 이사도 못 가고 있는 나처럼/ 자식 과외비 마련하러 노래방 도우미로 나갔다가/ 뽕짝에 푹 빠진 아줌마처럼// 뻔질나게 날아오는 스팸 메일처럼// 가을 단풍이여/ 이제는 붉게 타다 가는 수밖에 없는/ 그거밖에 할 게 없는/ 그래야 단풍다운 가을 단풍이여//

다시 대한 늬우스 / 장경린
진관내동 해장국집/ 처마 밑/ 서울 인근에서 여간해 볼 수 없는/ 제비 일가족을 보았다// 식당에서 쓰고 버린 초록색 이쑤시개들이/ 비녀처럼 꽂혀 있는 둥지// 머리만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는/ 제법 의젓한 새끼들/ 다가가 살펴보니/ 울음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노란 고무 패킹으로/ 주둥이( ~ 2004)가 정성껏 여며져 있었다//

대동여지도 7 -주기도문 / 장경린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의(삶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깨진 소주병의(삶의) 섬짓함에 놀라는/ 발바닥처럼/ 민주적 민주적 민주적 자유(구속)보다는/ 비민주적 비민주적 비민주적 자유(자유)처럼/ 어거지가 좀 섞인/ 노동조합의 붉은 구호처럼/ 저를 시험에 들게 하여 주옵시고/ 식당의 라면상자 뒤를(역사적인나날들을) 뻔질나게/ 오가면서도/ 상자에(역사에) 큼직하게 써 있는/ ‘農心라면’/ 을 못 읽는 약삭빠르지만 무식한 고양이들처럼/ 커피가 담긴 보온병을 쟁반에 얹어/ 보자기로 감싸들고/ 껌을(자본주의를) 질겅질겅 씹으며 걸어가는/ 다방여급(한국사)처럼/ 열외시킬 때는/ 확실하게 시험으로부터 열외시켜 주옵시고/ 어떤 동물이 살았던 곳이라기보다는/ 그 동물이 죽은 곳을 암시해주는/ 化石 같은/ 化石 같은 도시에 처박힌 나날들이/ 化石 같은 시들이/ 고장난 구형 전기세탁기와 함께/ 흙더미 속에서 발견되는 일이 없도록/ 당신이 실장으로 계시는 실험실의(현실의)/ 화학반응 검사용 시약으로/ 거듭 재활용하여 주소서//

뱀 / 장경린
뱀의 꼬리는/ 뱀의 전신이다// 뱀은 기어다닌다/ 다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가슴과/ 배가 있으므로// 나의 전신은 나의 꼬리다//

라면은 퉁퉁 / 장경린
라면은 퉁퉁// 우리 관군이 육전에서 패배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 일본 함대를 적멸시켜//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었다. 4번 타자/ 김봉연이 타석에 들어서자/ 관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묵묵히 걸어나갔다. 최루탄 가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그들은// 콘돔이나 좌약식 피임약을/ 상용하였으므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외동아들이거나 외동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면은 퉁퉁/ 불어 있었다. 정확히 물을 3컵 반/ 재어서 부어넣었는데, 어떻게, 면발이 퉁퉁//

정월 / 장경린
이쑤시개 같은 내 나이에도/ 성애가 끼기 시작했다 면도칼로 성애를/ 긁어내면 유리창에 박혀 웃고 있는/ 미이라 같은 내 몰골이/ 보인다 복도에는 야근을 마친 직원들/ 수군거리는 소리 멀리 중앙우체국/ 대형 현수막 불불불 불조심이 미친 듯이/ 펄럭이고 오전에 마시다 남은/ 빙그레 우유에 흰 앙금 같은 자본주의가/ 떠 있다 정월이 재떨이에서 가장 쓸 만한 나를/ 집어물고 불을 당긴다 불을 당긴다 타들어가던/ 나의 주미등록번호가/ 월간 조선 대통령선거 특집기사 위로/ 툭툭 떨어지고/ 속살 떨어져나간 홍합들/ 간이주점 탁자 밑 패총 같은 내 발등 위에//

말갈족 / 장경린
나는 내 양심의 변두리에 사는/ 말갈족이올시다./ 정벌해 주십시오.// 어둠을 박차고/ 북방큰귀박쥐들이 날아오고 있다. 세 마리/ 다섯 마리/ 열 마리// 말갈족이올시다만/ 나는 내 양심의 변두리에 사는/ 원주민이올시다./ 정벌해 주십시오./ 내 마음 속 무수한 말갈족들을/ 도대체 나는/ 그들을 정벌할 수가 없습니다.// 어둠을 박차는 소리만/ 가슴에 자욱하다.//

자화상 / 장경린
에프킬러를 뚫고/ 하루살이 두 마리가/ 날아들었다 내 넋을 빼놓은/ 고호의 화집 위에서/ 자식들/ 뒹글며 교미중이다// 하루치의/ 일생의// 보리밭 같은/ 고호의 자화상 위에서//

인물화 / 장경린
1/ 두 다리 덜미잡힌 방아깨비처럼/ 온몸을 주억거리며/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고려에서 코리아로/ 고무신을 꺾어신고 달리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쿵 쿵 쿵 쿵/ 그들이 달리는 시간은/ 언제나 삼경이고/ 역사와 역사 사이/ 사랑과 사랑 사이를/ 교묘히 빠져나온 그들의 이목구비는/ 오늘따라 유난히 수려합니다./ 무교동에서/ 영등포에서/ 비어홀에서//
2/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수초 그늘에서 고개를 처박고 죽은 달/ 젠장./ 바람이 불면 쩍 쩌억 금이 가던데/ 위험해, 그저 앞만 보고 가라니까/ 어른어른거리다 사라져 버리는 저 달빛 속으로?//
3/ 06시40분. 부활하려면 20분이나 남은 시간./ 숙면으로 완벽하게 무너진 그 사내의 나이는 그런/ 대로 아직은 쓸 만합니다. 먼지 털고 방수액을 바/ 른 다음, 눈 코 입 귀를 틀어막으면 누가 보더라도/ 번듯한 항아리 같습니다. 불만과 욕정 또는 소주/ 와 소시민성을 담기에 편리한 자루 같습니다.// 07시./ 자, 일어나 부활하십시오./ 출근을 서두르십시오.//
4/ 지하철을 타고/ 꾸벅꾸벅/ 통조림 속 고등어 건데기처럼 꿀렁이면서//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 장경린
1/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금 당신이 거신 전화번호는/ 703국으로 국번만 변경되었습니다.//
2/ 당나라 군사들이 출정했다는/ 전갈이 왔다. 갑자기/ 아카시아 나무에서/ 돼지기름 냄새가 났다./ 물론 천년 전의 일이다./ 물론 천년 전// 예 맞습니다. 예, 제가요?//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자꾸 흘러내리는/ 나이를 추켜올리며/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이따금/ 슬쩍 들러보는 명동의 화교소학교에서/ 몇 살이지? 하고 다가서는 나를 보고/ 볼우물을 패며 달아나는 소녀들은/ 당나라 군사의 딸 같지는 않다. 불시착한/ 중공 비행기 같은 건 오히려 나다. 물론/ 천년 전의 일이 아니다. 물론//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닌데요, 예, 예/ 여태라뇨?//
3/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금 당신이 거신 전화번호는// 기억나세요?/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오 임금님/ 마포갈비집 숯불 주위에/ 삥 둘러앉아 배추벌레처럼/ 푸성귀와 웃음과 음담패설을/ 씹으며, 거뭇거뭇하게 익어가는 갈비를/ 자, 드시죠/ 그러나 자살골을 차넣듯이/ 출근부에 도장을 찍어대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안계신다니까요./ 아 글쎄, 그 사람은// 왕관을 새로 근엄하게 고쳐쓰고/ 퇴근버스를 타려 할 때/ 누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4/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금 당신이// 고장이 났나 보다. 오늘은/ 별들이 켜지지 않는다./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진통제처럼 내리는 빗줄기/ 약기운이 촉촉이/ 온몸을 껴안고 이슬처럼/ 구르고 싶다. 이슬처럼// 하룻밤의 몽상에/ 미래를 모두 소모해 버린 아침/ 낡은 미래를 딛고 밀려오는/ 방탕과 피곤/ 낯익은 안개/ 비켜/ 비켜//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베개가/ 내 강산을 감싸주었다. 어느새 나는/ 내 안개의 끝에/ 맺혀 있었다.//

게르니카 / 장경린
그의 허리는 약간 굽어 있다 벽에 기댈 때/ 그는 쿠션을 사용한다 그의 굽은 허리 굽은 어깨는/ 마치 전기 스탠드처럼 책 읽기 좋게 휘어져 있다/ 냉장고에서 4와 7을 꺼내 먹으며 그는 다리를 쭉 뻗고/ 벽에 기댄다 담배를 피며/ 4에 취해 의식이 몽롱해지고 나른해져/ 벽에 기대 있던 몸을 방바닥으로 서서히 끌어내리는 그/ 그는 어린 시절 꿈이었던 9가 되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뿌듯해한다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진 얼굴 위에서/ 날벌레들이 교미를 하고 있다 선풍기 바람에 날려/ 11의 검은 털이 부르르 떠는 밤/ 애국가와 함께 흘러나오는 설악산 포항제철/ 삼성전자 88올림픽 한려수도가 그의 전신을 핥고/ 경부고속도로가 가슴을 가로질러 뻗어나간다.//

허리운동 / 장경린
이 얼 싼 쓰/ 우 류 치 빠/ 명동 2가 83번지 화교소학교/ 열 살 남짓/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앞으로 굽혔다가/ 뒤로 젖혔다가/ 허리운동을 합니다/ 뽀얀 모래먼지 이는 운동장/ 담장을 타고 넘는/ 이 얼 싼 쓰/ 우 류 치 빠/ 조국은 크고 머나먼 나라/ 굽혀도 굽혀도/ 손 끝에 발등이 닿지 않는/ 머나먼 나라//

블랙 먼데이 / 장경린
절정에서 맛본 탐욕의 기쁨을/ 공포와 교체했다/ 주가가 폭락한 블랙 먼데이/ 마음이 여려서 마모가 심한 자동차 앞바퀴를/ 교활하게 늘 거리를 두고 따라다니기만 하는 뒷바퀴와 교체했다/ 보톡스를 맞은 애인의 사라져버린 주름살과/ 보톡스를 맞고도 시치미를 떼는 애인을 교체했다/ 활짝 핀 생의 정점에서/ 제 목을 꺾어들고 뚝뚝 떨어지는 능소화여/ 월스트리트 펀드매니저와 소말리아 아이의/ 바싹 마른 입술을 일대일로 교체했다/ 원관념은 사라지고/ 중국제 보조관념만 즐비한 인사동/ 어제의 당신이 사라지고 내일의 당신도 사라졌다/ 저 꽃은 너무 아름다워서/ 뿌리를 약하게 할 거야/ 목젖이 부었다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집이 나가지 않는다 목젖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대통령이 나가지 않는다 관절염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열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채식에서 육식으로 식성을 교체했다 그 후로/ 창가의 선인장 가시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동네 개들은 꼬리를 내렸다 나도 꼬리를 내렸다/ 오늘도 나는/ 나를 임의의 나로 교체했다/ 내가 나만 쫓아다니며 꼬리치지 못하도록//

블랙 먼데이 2 / 장경린
마우스기 세상을 선택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아직도 구르고 있으며/ 매순간 멈춰 서 있다/ 유방은 유행한다/ 풀밭 위로 세월이 지나갔다/ 잔디 깎는 기계처럼/ 현대와 삼성과 청와대와 프로야구와 삼강오륜이 합병됐다/ 나는 하도 급해 불을 마셨다/ 고 진이정은 말했다 그리고 요절했다/ 기다려다오 체험은 인생이 아니다/ 이곳은 야생동물이 출현하는 구역이니/ 안전운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육체 속에 있다/ 유방은 진지하지 않으니 기다려보자/ 됐어요 충분해요 시간은 언제나 충분했어요/ 마우스가 세상을 선택했다/ 가치는 없고 가격만 있다/ 조물주가 만든 명사에 당신은 형용사만 붙인다/ 가격을 붙인다/ 가격과 당신은 합병됐다/ 두루미 그림자가 두루미에 붙어 함께 걸어가고 있다/ 달빛과 달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파마가 풀어지듯이/ 그것은 언젠가 풀어질 것이다 내 속에서/ 나는 하도 급해 나를 팔았다/ 잘 팔았지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가치는 모르겠다//

블랙 먼데이 4 / 장경린
502호가 외출하나 보다/ 문이 닫히는 자동 잠금장치 소리에 이어서/ 방울 소리가 들린다/ 502호가 개와 함께 산책을 가나 보다// 집만 나서면 아파트가 떠나갈 듯/ 사납게 짖어대던 개가 어느 날 갑자기 조용해진 뒤로/ 내 머릿속은 오히려 더 소란스러워졌다/ 정적이 짖어대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눈에 선해/ 문밖의 그 헛것에 더욱더 긴장하게 되었다/ 이글거리는 눈망울/ 움켜쥔 주먹처럼 떡이 된 털뭉치들/ 허공을 물어뜯으며 울부짖지만/ 성대가 제거되어 쉰 소리 하나 토해내지 못하고/ 축 늘어지는 혓바닥// 야심한 밤/ 502호 연금생활자가 종일 시간만 죽이다가/ 개를 끌고 나가는 산책길/ 성대가 제거된 개가/ 현실이 제거된 502호를 끌고 나가는 산책길// 환상통을 서로 교감하게 된 것일까/ 밤거리를 배회하고 돌아오는 방울 소리가/ 오늘따라 낭랑하다//

간접 프리킥 / 장경린
튀김을 먹다가/ 간장을 엎질렀다. 기울어지던//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에 힘입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막강한 전력의/ 브라질 팀이/ 우리 편 문전을 향해서/ 간접 프리킥을 차려는 순간/ 사타구니를 쥐어짜듯 감싸고/ 일렬횡대로 늘어선// 1919. 3. 1./ 1945. 8. 15./ 1950. 6. 25./ 1961. 5. 16.// 한 접시의 식어 버린 튀김들/ 질질 흘러내리는 간장에/ 주눅이 든 채로/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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