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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의 정부(情夫) / 박미경

부흐고비 2021. 4. 2. 08:56

그와의 만남은 백지(白紙)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에게 쏟아 놓고 위로받고 싶던 긴 시간들, 가슴속에서 뜨거운 전쟁으로 폭발하던 청춘의 열병. 그 끝에서 열에 들뜬 언어들이 가슴에서 서걱거릴 때 대학노트를 사기 시작한다.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풀어 봐. 외로워하지 말아. 너를 사랑해.’ 미색의 미끈한 제 속살을 드러내며 나를 유혹하던 가로 20cm, 세로 30cm의 하얀 공간....

한 해를 맞을 때마다 두꺼운 백지 노트를 사며 행복했다. 마치 순결함을 사는 것처럼 설레기도 했다. 손끝에 닿는 차갑고 미끈한 지질(紙質)의 감촉을 느끼며 스카이블루 잉크를 넣은 만년필로 노트의 첫 장을 메워 나가는 작업은 흥분과 좌절, 기쁨과 고통을 체험하는 경건한 의식과도 같았다.

맹렬한 창작에의 열망, 삶의 진수 같은 것에 눈뜨고 싶던 열망으로 밤이면 노트 앞에 일어나 앉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트가 쌓이고 시체처럼, 패잔병처럼 보이기 시작할 때 노트 사는 일을 그만 두었다.

일물일어(一物一語), 한가지 물체를 설명하는 데는 한 가지 언어뿐이라는 말은 언어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준다. 31만 개에 달하는 단어 중에서 정확하게 핀셋으로 집어 나열해 독자를 설득하고 감동시키는 작업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통찰력 앞에 나는 늘 머뭇거렸다. 가장 정확한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며, 예술이야말로 일류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자각이 들면서 문학은 내게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가 되어 버렸다.

어느 시인은 시 쓰는 일을 기둥서방 하나 데리고 산다고 표현한다. 그 기둥서방은 어찌나 질투가 심한지 조금만 다른 일에 신경 쓰면 금방 달아나 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외로움과 고통, 슬픔과 불행의 텃밭 속에서 더욱 잘 자라는 문학적 감성은 지나친 행복과 풍요로움에도 뿌리내리지 못한다.

매달 적금을 부으면 만기에 목돈으로 돌아오고, 사랑을 하면 확실히 예뻐지는 과학적 근거도 있는데 쓰는 일은 번번이 처음이고 아득해진다. 쓰면 쓸수록 돌아오는 것은 자신 없음과 열등감뿐이다. 그에게서 헤어나고 싶어 여러 번 도망치기도 하지만, 스스로 돌아오는 이 기이한 술래잡기는 무엇일까. 나는 학대받으며 쾌감을 느끼는 마조히스트인가.

설거지를 하다가, 집안 청소를 하다가 문득 책상에 가 앉는다. ‘일상이나 씻어내는 식기를 닦으며 / 내 젊은 피 닳히고 있으니’ 하는 시 구절을 떠올리며 컴퓨터에 부지런히 무엇인가 쓰고 지우고 한다. 곧 아이들이 올 텐데, 저녁 반찬은 무엇을 준비할까 하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하녀가 매일 되풀이하는 하찮은 집안일이 행복에의 소명’이라 말한 앙리 보스코를 떠올린다. 변색된 은수저에 치약을 묻혀 정성스레 닦아 낼 때, 저녁 식탁에 올릴 갈비를 갖은 양념으로 재울 때 내밀하게 스며드는 고즈넉한 행복감을 나는 알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무언가 그 이상일 수는 없을까를 생각할 뿐이다.

일상적인 안락에 길들여져 있으면서 자유와 창조를 동경하는 괴리와 갈등은 그를 완벽한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놓지 못한다.

나의 꿈과 사랑이고, 절망이며 정부(情夫)이기도 한 문학과 나는 이 영원한 불륜의 관계를 청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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