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오세영과 백담사 / 오세영

부흐고비 2021. 4. 2. 13:57

나는 절을 좋아한다. 대개 우리나라의 절들이 명승지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절에 가면 웬일인지 마음이 평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찾은 절들은 모두가 나름으로 자연과 불심(佛心)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인상이 깊었던 절 하나를 들라하면 설악산의 백담사를 꼽겠다. 백담사는 우선 그 풍광이 빼어난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어 도량 그 자체가 마치 선경(仙境)에 든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여러 대덕들의 발자취가 스며 있어 한포기의 풀, 한 그루의 소나무, 한 개의 돌멩이도 무심치가 않다. 굳이 법당에 들지 않더라도 무연히 설악의 산봉우리를 바라만 보아도 저절로 선리(禪理)를 깨우칠 듯만 싶은 곳이다. 무자성공(無自性空)이란 바로 이런 심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나는 최근 몇 년째 겨울방학이면 길게는 20여 일을 짧게는 10여 일을 마치 동안거나 하는 심정으로 백담사의 요사채에서 머물곤 해 왔다. 주로 작품을 쓴다는 명목이지만 그보다는 그저 산과 물과 부처님이 무턱대고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어서 지난겨울에는 30여 편의 시를 써서 월간 《문학사상》지와 《현대시학》 지에 연재를 한 바 있고 이를 묶어 며칠전 《적멸(寂滅)의 불빛》(문학사상사 간)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백담사의 겨울은 그야말로 은산철벽(銀山鐵壁)이다. 봄, 여름, 가을로 그렇게 붐비던 관광객들이 거짓말처럼 단 한 명도 찾아오지를 않는다. 마치 세상의 인심을 보는 것같다. 그러니 홀로 겨울 백담사에 칩거하는 내자신이 마치 속세를 등진 선비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굳이 겨울철에만 백담사을 찾는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을지 모르겠다.

백담사에서 체류하는 동안 나는 방안에 앉아 글을 쓰다가 정신이 아득해지면 두툼한 목도리로 얼굴을 싸매고 눈이 부시도록 하이얀 눈에 덮힌 설악계곡을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정처 없이 걷곤하는 것을 즐겨한다. 이 같은 포행은 어느덧 하나의 버릇이 되어버렸는데 작년에는 그 버릇으로 인해 의외의 적선을 한 적도 있다. 등산로 옆의 눈 덮인 수로에 커다란 고양이 같기도 하고 작은 개 같기도 한 동물이 쓰러져 있는 것을 급히 속초의 동물보호소에 연락을 취해 그 생명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임신한 오소리로 겨울철이라 먹이를 구하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렸던 것이라고 한다.

이번 겨울에도 나는 백담사에 가서 며칠 머물려고 한다. 작품이 쓰여지건 쓰여지지 않건 별문제다. 지난겨울에 구해 준 그 오소리가 새끼를 데불고 혹시 나를 맞아줄지 누가 아는가. 그렇지 않더라도 보우대사의 그 비극적인 체취나 매월당의 그 오상고절이나 만해의 시향(詩香)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적멸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체험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고무신 / 김정화  (0) 2021.04.05
관계의 끈 / 지연희  (0) 2021.04.02
나의 정부(情夫) / 박미경  (0) 2021.04.02
백자 제기 / 정목일  (0) 2021.04.02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 문영숙  (0) 2021.04.02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