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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관계의 끈 / 지연희

부흐고비 2021. 4. 2. 14:04

짙은 녹음의 6월 숲이다. 키 작은 산딸나무, 청단풍나무, 이팝나무들이 서로 키 재기를 하며 몸을 흔들고 있다. 마치 개구쟁이 소년인 돌이와 꽁이처럼 서로 몸을 당기거나 부딪치기도 하며 숲의 동심을 자아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은 자세로 앉아 아름드리 굵은 나무 밑둥을 내려다보면 선태식물인 이끼들의 조용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잎과 줄기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아 서로 스크럼을 짜듯 무리를 이루고 있는 모양이 마치 럭비선수들 같다. 서로 똘똘 뭉쳐 머리를 낮추고 몸을 끌어안고있는 듯 단결된 모양새다. 너와 나의 끈으로 올곧게 연결된 관계의 회로속에 다소곳이 숨 쉬고 있다.

나뭇가지와 바람, 그리고 나뭇잎- 그들 사이로 스며와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모두가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무슨 기쁨인지 몰라도 무슨 행복인지 몰라도 가지를 흔들던 바람과 그 바람의 손끝에서 춤을 추는 나뭇잎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햇살의 미더운 숨결이 이들의 일상을 윤기 나게 어루만진 결과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어제와 같은 아침이 창문가에 햇살을 앉혀 놓고, 참새 몇 마리 전깃줄에 지저귈 때면 내 새날의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해진다. 한걸음 돌아서면 누군가 내 곁을, 무엇인가 내 곁에 눈을 맞추고 있다는 안위이다.

죽녹원 대숲 속에 들어서면 조용한 미풍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세기를 더하는 대숲의 숨소리를 듣게 된다. 쏴아 쏴- 모래사장에 밀려드는 바닷물의 청정한 음조音調 같기도 하여 눈을 감아 보았다. 6월의 대숲이 전하는 밀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더하다가 먼 듯 가까운 듯 취각을 흔드는 향기에 걸음을 멈춰서고 말았다. 바람이 전해주는 선물이었다. 미세한 향기에 취하고 나서야 하늘 높은 높이의 대나무 밑 불쑥불쑥 솟아오른 죽순들과 눈을 마주쳤다. 저 어린 생명들이 있어 죽녹원 숲의 역사는 겹겹이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너와 나로 잇는 은밀한 관계의 시작을 보았다.

사람의 숲에 들어서면 도로변 수없이 많은 인파 속에서 옷깃 하나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에 연유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산딸나무, 청단풍나무가 소나무 곁이나 자귀나무 밑에 뿌리를 내려 사는 까닭도 전생의 인연에 연유한 것이라 한다. 시인 한 분이 카카오톡에 탤런트 김수미와 김혜자의 우정어린 미담을 보내와 감동스럽게 읽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앉은 김수미의 사정을 알고 김혜자는 전 재산이 든 통장을 내주었다고 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기꺼이 전 재산을 내어 줄 수 있었던 김혜자에게 김수미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을 만큼의 사랑을 보내고 있었다. 긴박한 삶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신뢰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관계의 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숲은 때로는 잠잠하고 조용한 고요의 늪이 되기도 하지만, 가끔은 폭풍우 몰아치는 아우성으로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불협화음의 대상과 대상들이 서로 등을 돌리는 관계가 되어 기둥이 무너지고 가지가 꺾이는 아픔을 겪고 있다. 뜻하지 않은 폭풍우가 숲을 비집고 가지를 휘어잡으면 아름드리 느티나무도 키 낮은 나무들의 몸체를 무너뜨리고 만다. 양식 없는 무뢰한들이 어린 소녀들의 아직 피워내지도 못한 꽃봉오리를 꺾어 놓고 평생 상처의 아픔으로 앓게 하는 이 참담한 현실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잘 가꾸고 다듬어 미래의 재목으로 키워내야 할 꽃나무 한 그루였다. 너는 누구이고 너와 관계를 소통하고 있는 나는 누구로부터 비롯되어 세상을 호흡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더욱 필요한 시기인 듯하다.

가까이 곁을 이루는 너와 나의 관계는 더욱 상처가 되기 쉽고, 상처를 입기 쉽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신뢰가 서로에게 놓여진 불신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디딤돌이 되겠지만 삶은 너와 나를 잇는 소중한 관계의 끈이다.너의 곁에 낮은 자세로 서 있는 ‘나’일 수 있고 ‘너’일 수 있다는 이 아름다움이 어쩌면 하루에 절은 고단을 치유하고, 내일을 여는 희망으로 존재하는지 모른다. 무심코 곁을 이루더니 어느 날 네가 대관령 자연 휴양림의 한그루 아름드리 소나무가 되어 내 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고맙고 은혜로운 일, 이 인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지연희 수필가 : 충북 청주 출생.

『월간문학』 수필 등단. 『시문학』 시 당선.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회장,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여성문학인회 부이사장. 계간 문파문학 발행인.

수상 : 동포문학상, 한국수필상, 소월문학상, 대한문학상 대상, 예총 예술문학상 문학부문.

수필집: 『사계절에 취하다』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 외 12권, 시집: 『남자는 오레오라고 쓴 과자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외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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