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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배한봉 시인

부흐고비 2021. 4. 16. 12:47

동백꽃 사랑 / 배한봉

가을이 갔다고
영영 겨울이겠나
겨울 왔다고
꽃 한 송이 피지 않겠나

눈 내리는 날
여수 오동도
매서운 바닷바람에도 동백꽃
동백꽃은 숨 가쁜데

겨울이라고 꽃 한 송이 못 피운다면
그건 사랑 아니지

동백꽃 그만큼 뜨겁게 피니까
봄은 오는 거다

춥고 어둔 날에는 나도
내 마음 속의 동백꽃을 꺼내
두손 꼬옥 감싸 안는다

 

복사꽃 아래 천년 / 배한봉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아이가 걸어 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 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과수원 시집 / 배한봉

봄 과수원에/ 파릇파릇 돋는 저것은 풀이 아니다/ 노랗게 발갛게 피는 저것은 꽃이 아니다// 바람에게 물어봐라/ 햇빛에게 물어봐라// 대지를 물들이는 저 쑥과 냉이, 씀바귀에 대해/ 과수원 언저리를 온통 노랑물살 지게 하는 저 유채꽃에 대해// 산비둘기가 나뭇가지에 두고 간 울음/ 그 여운 끝자락을 붙잡고 화들짝 꽃봉오리 여는 홍매에 대해// 지난겨울의 눈바람을 먹고/ 열병처럼 퍼지는 가뭄을 먹으며/ 온몸으로 대지가 쓰는 시, 나무가 쓰는 시// 뻐꾹새에게 물어봐라/ 벌, 나비에게 물어봐라// 저 시 없다면 누가 봄이라 하겠나// 저 시집 한 권 읽지 않고 어떻게 봄을 말할 수 있겠나// 별과 달이 밤새도록 읽다 펼쳐둔/ 과수원 시집/ 나는 거름 져다 나르며 읽고/ 앞산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

과수밭은 둥글다 / 배한봉

복숭아나무가 감나무 손을 잡고/ 감나무가 자두나무 손잡는 걸 보니/ 새삼 눈물 난다/ 저 가지들이 내 인생에 들어와/ 은근슬쩍 연애라도 하자 하면/ 둥글게 과일 익어가듯 연애하다 보면/ 나도 둥글게, 둥글게 이웃 손을 잡고 있을까/ 그러다 동서남북 서로 얽힌 저 나무뿌리들이/ 내 삶을 송두리째 점령한다면/ 거대 자본이 뿜어내는 소비사회의 강풍에도/ 끄떡없는 검푸른 숲 되어 있을까/ 절제 없이 가지 뻗어 얽힌 나무 풍경이야/ 어제오늘 보는 것만도 아닌데/ 나는 왜 새삼 가슴이 다 아픈 것이냐/ 강강수월래, 나무가 나무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 산이 산의 어깨를 곁고/ 강강수월래, 햇빛이 바람의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누가 저 둥근 춤, 멈추게 할 수 있으랴//

복숭아를 솎으며 / 배한봉

열매를 솎아보면 알지/ 버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 처음엔/ 열매 많이 다는 것이 그저 좋은 것인 줄 알고/ 아니, 그 주렁주렁 열린 열매 아까워/ 제대로 솎지 못했다네/ 한 해 실농(失農)하고서야 솎는 일이/ 버리는 일이 아니라 과정이란 걸 알았네/ 나무는 제 살점 떼어내는 일이니 아파하겠지만/ 굵게 잘 자라라고/ 부모님 같은 손길로 열매를 솎는 5월 아침/ 세상살이 내 마음 솎는 일이/ 더 어렵다는 걸 알았네//

식목 / 배한봉

과수밭에 매실나무를 심었다. 고희를 맞은 어머니, 칠순 잔치하느니 나무 몇 그루라도 심자는 말씀에 어머니 마음 닮은 뿌리 실한 묘목 심어놓고 내년 내후년 봄을 기다린다. 하루를 밭 갈지 않으면 1년 내내 배부르지 못하다는// 춘분(春分), 잔치 대신 땀 흠뻑 흘렸다./ 어머니 마음이 내는 길, 나무는 그 길의 중심 같다.//

어린 봄 / 배한봉

과수원 귀퉁이 밭 일구러 갔다가/ 그곳이 적멸보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햇빛의 말/ 바람의 말/ 진눈깨비의 말을 기억하는/ 쑥 냉이 씀바귀/ 구만 구천 어린 나한들이 뿜어내는/ 초록 향기 외엔 아무 것도 없는/ 적멸보궁/ 땅 깊숙이 삽날을 박으면/ 흙에서도/ 이슬 머금은 젖비린내/ 달빛 머금은 젖비린내/ 내 발목을 감고/ 얼굴까지 올라와서는/ 훅! 목젖 적시는 봄비의 옹알이/ 과수원 가장자리 적멸보궁에 들어/ 나는 소란스런 침묵으로 뛰노는/ 어린 봄을 만났던 것입니다.//

뜨거운 몸 / 배한봉

마당 구석 음식찌꺼기 모으는 구덩이에/ 이 겨울, 채 썩지 않은/ 썩을 것들을 모아 쓸어 넣다가/ 나는 본다/ 그 구덩이 옆/ 반쯤은 바스라져 흙이 된 낙엽더미 아래/ 꿈틀거리는 용암 붉은 줄기들/ 언 수돗물 녹인다고/ 나는 함부로 뜨거운 물을 붓기도 했는데,/ 지렁이들은 이렇게/ 제 노동의 열기로 언 땅을 녹이고/ 선홍빛 선연한 암장(岩漿)되어 솟은 것이다/ 아직도 그 훈기 머금은 분변토/ 용암 붉은 줄기 위에/ 나는 다시 낙엽을 덮는다/ 겨울에도 땅 속엔/ 썩지 않아 불안한 썩어야 할 것들을 분해해/ 봄을 만드는 뜨거운 몸들이 있다//

악기점 / 배한봉

나무들은 몸 속에/ 악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악보는 태양과 구름과 바람/ 별과 어둠, 그대와 나의 삶과 생각들// 오늘도 나는 악기들을 조율하러 과수밭에 오른다/ 전지하고, 열매 솎고, 풀을 베고/ 열매 따며 악기의 음계를 따라가면/ 어느새 악기들은 나를 조율하는 조율사가 되어있다/ 내 삶의 곁가지를 전지하고 욕망을 솎고/ 억세게 뻗쳐 오른 번뇌를 조율하고 있다// 나무는 나를 조율하고/ 세계를 조율하고 지휘한다/ 나무 몸 속에서 악기들이 흘러나와 걸어간다/ 나무는 나무 자신을 조율하고 탄주할 뿐인데/ 비 내리고 폭설이 쏟아지고/ 폭풍 몰아치고 해일이 인다/ 봄, 여름이 가고 가을도 가고 겨울이 온다// 나무는 연주를 마칠 때마다 몸 속에/ 하나씩 나이테를 그린다/ 나무 몸 속에 매미와 뻐꾸기/ 태양과 별의 숙명이 머물고/ 나무는 명상한다, 정적과 혼돈 뒤섞인/ 끝없는 생명에 대하여// 한 알 과일을 먹은 뒤 오래도록/ 우리 입 속에 남는 과일의 향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과즙이여/ 나무 악기의 음률이여/ 오래도록 행복해지는 우리여/ 나무 악기의 빛, 나무 악기의 어둠/ 허공과 영혼을 소진하고, 시간을 금빛으로 소진하고/ 이 세계의 생명으로 스며드는 침묵의 탄주여/ 대지로부터 하늘로 치솟은 악기의 소용돌이여//

나물 삑까리 / 배한봉

우리 과수원에는 풀이 없다/ 나물 삑까리다/ 꼬사리, 정구지, 둘훕, 치나물/ 음지 양지, 천지 삑까리로 쌔빌맀다/ 지난주엔 쑥털털이를 쪄먹었고/ 어젠 씬냉이 나물을 무쳐 먹었다/ 나 귀가한 뒤 토끼도 봄나물 생각나 다녀갔는지/ 나생이밭에 동글동글 까만 똥이 깔렸다/ 봄날엔 나도 토끼도/ 반찬 걱정은 없다/ 오늘은 나생이국 대신 돈냉이 쪼리개/ 개울가 첫물 머구 몇 장이면 쌈밥도 거뜬하지/ 밥맛 타령하던 옆집 김씨 위해/ 달롱개도 한 줌/ 지는 해가 금싸라기 뿌려놓아/ 겨울초꽃들 더 노랗게 자지러지는 과수원/ 꽃밥 비법 알려준 미식가도 있지만/ 제비꽃 민들레, 그 어여쁜 꽃만은 차마 따지 못했다/ 나는 지금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이 시대의 변죽 / 배한봉

변죽을 아시는지요/ 그릇 따위의 가장자리, 사람으로 치면/ 저 변방의 농군이나 서생들/ 변죽 울리지 말라고 걸핏하면 무시하던/ 그 변죽을 이제 울려야겠군요/ 변죽 있으므로 복판도 있다는 걸/ 당신에게 알려줘야겠군요/ 그 중심도 실은 그릇의 일부/ 변죽 없는 그릇은 이미 그릇이 아니지요/ 당신, 아시는지요/ 당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변죽,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하는/ 변죽,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변죽, 삼거웃 없는 마음을/ 중심에 두고 싶은,/ 변죽을 쳐도 울지 않는 복판을 가진/ 이 시대의 슬프고 아픈 변죽들을//

육탁(肉鐸) /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이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그늘을 가진 사람 / 배한봉

양파는/ 겨울 한파에 매운맛이 든다고 한다/ 고통의 위력은/ 쓸개 빠진 삶을 철들게 하고/ 세상 보는 눈을 뜨게 한다/ 훌쩍 봄을 건너뛴 소만 한나절/ 양파를 뽑는 그의 손길에/ 툭툭, 삶도 뽑혀 수북이 쌓인다/ 둥글고 붉은 빛깔의/ 매운 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수확한 생각들이 둥글게, 둥글게 굴러가는/ 묵시록의 양파밭,/ 많이 헤맸던 일생을 심어도/ 이젠 시퍼렇게 잘 자라겠다/ 외로움도 매운맛이 박혀야 알뿌리가 생기고/ 삶도 그 외로움 품을 줄 안다/ 마침내 그는/ 그늘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아침 / 배한봉

흐르는 물은 쉬지 않는다/ 이제 막 바다에 닿는 강을 위해/ 먹빛 어둠 뒤에서/ 지구가 해를 밀어 올리고 있다/ 너의 앙다문 입술과 너의/ 발등에서 태어나는 시간과 사랑과 눈물이/ 가 닿는 세계도 그러할 것이다/ 오늘 하루치의 바람 잊지 않으려고/ 나뭇잎들이 음표를 던진다 새가 하늘을 찢는다/ 새카맣게 젖은 눈빛 꺾이던 골목에도/ 쿠렁쿠렁, 힘찬 강 열리고/ 푸른 햇빛 일어서는 소리 들린다/ 흐르는 물은 반드시 바다에 가 닿는다//

희망을 위하여 / 배한봉

아침이라서 해 뜨는 것이 아니라/ 해 뜨니까 아침이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해를 가진 사람/ 삶이 빛나서 희망도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 주저앉아 흙탕에 젖고 황혼에 젖고/ 혹한에 떨며 벼랑 아래로/ 한없이 무너지던 만신창이 영혼// 그 시간 너머에서 해는 뜬다/ 오늘 아침은 오늘 〈나〉의 아침/ 구름도 바람도 오늘 〈나〉의 노래/ 희망이 있으니까 삶은 빛난다/ 눈보라 끝에 꽃봉오리 터트린/ 저 눈부신 홍매처럼!//

아름다운 수작 / 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빈 곳 / 배한봉

벽 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풀꽃도 피어 있다./ 틈이 생명줄이다./ 틈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른다./ 틈이 생긴 구석./ 사람들은 그걸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팔을 벌리는 것./ 언제든 안을 준비 돼 있다고/ 자기 가슴 한쪽을 비워놓은 것./ 틈은 아름다운 허점./ 틈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낳고 사랑을 기른다./ 꽃이 피는 곳./ 빈곳이 걸어 나온다./ 상처의 자리. 상처에 살이 차오른 자리./ 헤아릴 수 없는 쓸쓸함 오래 응시하던 눈빛이 자라는 곳.//

흰 불 / 배한봉

홍시 떨어진 뒤에도/ 붙들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듯 가지는/ 가을에 과일을 매달았던 무게로/ 휘어진 채 겨울을 지낸다// 눈이 내리고/ 연필 굵기 만한 가지에도 눈은 쌓여/ 가지는, 시위를 당긴 활처럼 팽팽하다/ 오래도록 놓지 못한 그 무엇이라도 있단 말인가// 쌓인 눈이 얼고/ 얼어서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각궁角弓으로 거듭 태어난/ 시위를 당겨라, 별빛으로 만든 살을 날리면/ 어둠의 가장 깊은 곳에서/ 허공을 가르는 금속성 바람소리/ 시위를 당겨라, 오랫동안 놓지 못한 그 무엇은/ 가장 높은 꼭대기의 가지로 달을 사냥하는 것/ 사냥한 달을 나뭇가지에 꿰어/ 불에 구워먹는 것// 후두둑 가지 끝 얼음꽃이 떨어진다/ 고요히 타오르는 흰 불/ 비로소 나무는 긴 휴식에 들고/ 나는 너에게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캄캄하게 밝은 나무의 흰 불/ 지상에서 가장 투명하게 타올라 뿌리로 스미는 불의 책//

빗방울 화석 / 배한봉

나는 지금 1억년 전의 사서(史書)를 읽고 있다/ 빗방울은 대지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돌 속에 북두칠성을 박아놓고 우주의 거리를 잰다/ 신호처럼 일제히 귀뚜리의 푸른 송신이 그치고/ 들국 몇 송이 나즉한 바람에 휘어질 때/ 세상의 젖이 되었던 비는, 마지막 몇 방울의 힘으로/ 돌 속에 들어가 긴 잠을 청했으리라/ 구름 이전, 미세한 수증기로 태어나기 전의 블랙홀처럼/ 시간은 그리움과 기다림을 새긴 화석이 되었으리라/ 나는 지금 시(詩)의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1억년 전의 생명선(線) 빗방울을 만난다/ 사서에 새겨진 원시 적 우주의 별자리를 읽는다//

우포늪 왁새 / 배한봉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 소리꾼이 있었다./ 신명 한 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 내리치는/ 한 대목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황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맸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옥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 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

우포늪 풍물패 / 배한봉

모내기 끝난 논두렁에서/ 개구리 울음을 듣는다/ 여름 밤바람 소리가 진양조라면/ 개구리 소리는 자진모리다/ 한참 울다가 일시에, 뚝 그칠 때의 고요/ 비로소 어둠 속 사물이 보이고/ 벼 살찌는 소리 들린다/ 오늘 꽹과리는 보름달/ 참개구리 앞소리로 상쇠 잡으면/ 벼들은 상모 돌리고/ 징울음 북울음 장고소리, 어깨춤 한 바탕에/ 왁자그러 왁자그러 목청 잠기는/ 개구리 풍물꾼/ 논두렁콩 심어라 논두렁콩 심어라/ 오늘은 밤새도록 휘모리 장단 넘어간다//

가시연꽃 / 배한봉

우포늪 가득 덮은 잎들 사이에 검초록 투구 같은 꽃봉오리가 무더기 무더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늪의 자궁이 한해 마지막으로 생산한 생명의 도화선인 갈색 줄기를 따라 지름 1.5미터 억센 잎을 찢어발긴 채 솟아 있다. 온몸에 돋은 가시로 제 살을 물어뜯지 않고서는 터질 수 없는 선지빛 꽃의 뇌관. 그 고통과 상처의 시간이 창천마저 시퍼렇게 질리게 한다. 저와 같은 탄생의 처절한 아름다움을 나는 한 번이라도 가졌던가. 범람하던 분노와 증오. 탄식마저 사랑해야 할 여름의 끝, 빈손으로 돌아온 이들을 위해 불을 당기는 저 꽃 앞에서 나는 자꾸만 울고 싶은 것이다.// 참혹하고도 황홀한 저 방화./ 오늘도 가시연꽃이 핀다./ 70만 평 우포늪 물도 끄지 못하는 내 마음 습지의 화염.//

붉은 달 / 배한봉

붉은 달을 뚫고 새 떼가 날아갔다// 외줄기 바람이 그냥, 일 없이 미루나무 가지 끝을 흔들/ 었다// 어깨 구부정한 산줄기가/ 시냇가에/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백하게 낙엽 몇 장을 옮겨주었다.// 붉은 달을 품은 새 떼가 어릴 때 죽은 형의 새까만 눈망/ 울처럼 날아갔다.// 자꾸 먼 곳이 만져졌다./ 별이 한 번 떴다 지면 백년이 고인다는 먼 곳.// 지구의 목덜미에 찍힌 우주의 지문이 다 보였다./ 너무 맑아서 담백하게 외로운/ 먼 곳이 자꾸, 지구인들의 거주지로 걸어오는 것 보였다.//

푸른 힘이 은유의 길을 만든다 / 배한봉

벌레 한 마리 나뭇잎을 갉아먹고 있다// 바람 불고 잎들이/ 뒤척거린다/ 그 아래 잎들의 신음이 쌓여/ 그림자가 얼룩지고 있다/ 산책 나온 아침, 눈이 동그래진다// 나뭇잎에 허공 길이 뚫리고/ 거기 헛발 디딘 햇빛/ 금싸라기를 쏟아 세상이 다 환해진다/ 아, 나뭇잎 허공/ 벌레 먹은 이 자리가/ 우화를 기다리는 은유의 길이라니,// 허공에 빠진 내 생각 뜯어먹으며/ 또 살찐 벌레 한 마리 지나간다//

큰 밥상 / 배한봉

나 여직껏 네가 차려 준 밥상/ 받기만 하며 살아왔다/ 텃밭 고추며 상추, 과수원 열매들/ 내 땀으로 농사지었다지만/ 아니다 아니다/ 이 모든 것, 네가 차려 놓은 큰 밥상이었다/ 햇볕과 물과 바람이 너의 농사라는 걸/ 너의 농사가 길러 낸 것이/ 우리 식구의 일용한 양식이 되어 왔다는 걸/ 가뭄 뒤에 내리는 단비 보며 안다/ 상추쌈 싸먹으며 안다/ 네가 농사지어 차리는 밥상이 건강할 때/ 우리도 건강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문명의 식욕 / 배한봉

옷의 식욕은/ 왕성하다, 성욕보다 수면욕보다 힘이 세다// 나는 옷의 배를 불리는 양식이다// 양말을 신자, 발이/ 사라진다, 양말이, 발을 먹었다// 왼쪽 다리를 먹은 바지가/ 오른쪽 다리를 밀어 넣으니 오른쪽 다리마저/ 먹어버린다// 왼팔을 넣으면 왼팔을, 오른팔을 넣으면/ 오른팔을 먹는 재킷/ 씹지도 않고/ 삼켜버리는 재킷// 나는 이제 어깨도 가슴도 없다/ 나는 이제 한 벌의 옷이다!// 거리에 사람을 갖춰 입은/ 옷들이 둥둥 걸어 다닌다/ 숫제 개나 고양이를 갖춰 입은 옷도 있다// 아침부터 왕성하게 나를 먹어치운 옷은/ 저녁이면/ 나를/ 생산한다// 살아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끊임없이/ 소비된다//

지구의 눈물 / 배한봉

둥근 것들은/ 눈물이 많다, 눈물왕국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칼로 수박을 쪼개다 수박의 눈물을 만난다/ 어제는 혀에 닿는 과육 맛에만 취해/ 수밀도를 먹으면서 몰랐지/ 사과 배 포도알까지 둥근 몸은 모두/ 달고 깊은 눈물왕국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걸// 나는 눈물왕국을 사랑하는 사람/ 입맛 없을 때마다 그 왕국에 간다// 사람 몸 저 깊은 곳/ 생명의 강이 되는 눈물,/ 그리하여 사람 몸도 눈물왕국 되게 하는 눈물,// 그렇기 때문인가? 사람들은/ 둥근 것만 보면/ 깎거나 쪼개고 싶어한다// 지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숲을 깎고 땅을 쪼개 날마다 눈물을 뽑아 먹는다/ 번성하는 문명의 단맛에 취해/ 드디어는/ 북극의 눈물까지 먹는다//

둥근 멈칫거림 / 배한봉

소낙비 그치자/ 감의 매끄러운 과피(果皮)를 타고 흘러내리던/ 빗물이 멈칫거린다/ 멈칫거리다가 물방울로 맺힌다/ 몇 점 구름 데리고 파란 하늘이/ 물방울 속에 들어온다/ 감은 마지막 이 한 방울을 위해/ 둥근 자기 몸 끝에/ 아주 작은 침 하나 만들었던 것이다/ 침 끝에 매달린 한 방울의 작은 우주/ 작은 우주의 둥근 멈칫거림/ 그런 것이다, 자연이 쓰는 시는/ 감과 물방울 사이/ 환한 그늘 둥글게 말아 올린 멈칫거림이다//

궁리 / 배한봉

용추계곡 숲길에서 내 운동화 한 짝만 한 어린 산토끼와 만났다/ 좁은 길 한 가운데 앉아 나를 바라보는 토끼/ 나도 꼼짝 못하고 토끼만 바라보는 시간/ 어린 토끼가 가던 길 어서 마저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간/ 가볍게 바람을 쐰 뒤 얼른 돌아가야 하는, 내 사정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 보드랍게 토끼의 잿빛 털을 쓰다듬고 있는,/ 바람의 저 천만 개 가느다란 손가락/ 허공을 유영하는 멸치 떼 같은 은빛 바람의 손가락/ 지상의 파란을 모두 기억하는 바람도 어린 토끼 놀랄까 봐 그런 자세로 한참을 궁리하는 시간//

염소 / 배한봉

염소가 말뚝에 묶여/ 뱅뱅 돌고 있다. 풀도 먹지 않고 뱅뱅 돌기만 하는 염소가// 울고 있다.// 우는 염소를 바람이 툭툭 쳐본다. 우는 염소를 햇볕이 톡톡 쳐본다. 새까맣게 우는 염소를 내가 톡톡 다독여본다.// 염소주인은 외양간 서까래에 목매달고 죽은 사람.// 조문을 하고 국밥을 말아먹고 소피를 보고,/ 우는 염소 앞에서 나는 돌 한개를 주워 말뚝에 던져본다.// 말뚝은 놀라지도 않고 아파하지도 않고 꼼짝하지도 않으면서 염소 목줄을 후려 당긴다.// 자기 생의 말뚝을, 하도 화가 나서 앞도 뒤도 없이 원심력도 같이 뜯어 먹어버린 염소 주인./ 뿔로 공중을 들이박을 줄도 모르고/ 세상쪽으로 힘껏, 터질 때까지 팽팽히, 목줄 당겨볼 줄도 모르던 주인처럼 뱅뱅 제자리 돌기만 하는 염소가/ 울고 있다. 환한 공중에 동글동글 새까만 울음을 누고 있다.//

꽃 속의 음표 / 배한봉

꽃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제 몸 속 암술 수술의 음표들이 가락/ 퉁기기 때문이리, 벌 나비 찾아드는 것 또한/ 그 가락 장단이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이리/ 그대여, 사랑은 눈부신 그 음표들이/ 열매 맺고 향기롭게 익는 일과 같을 것이니,/ 우리는 어떤 가락 장단으로 세상을 걷고/ 어떤 열매를 키우며 서로 바라보는 것이냐/ 나 오늘, 만개한 복사꽃을 보며/ 내 몸 속에서는 어떤 음표들이 가락을 퉁기는지/ 궁금하여 햇살 속에 마음 활짝 펼쳐본다.//


 

배한봉 시인은

1962년 경남 함안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과정.

1984년 박재삼 시인의 추천을 받아 ‘경인문예’(현재는 폐간) 에 등단.

1998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재등단.

시집: 《흑조(黑鳥)》 《우포늪 왁새》, 《악기점》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주남지의 새들》 등

2003년 중학교 3학년 우리말 우리글에 ‘아름다운 수작’, 2010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우포늪 왁새’ 수록

수상: 경남문학 우수 작품상, 제11회 현대시작품상, 제2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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