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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영춘 시인

부흐고비 2021. 4. 19. 06:26

때로는 물길도 운다 / 이영춘

냇가에 앉아 물소리 듣는다/ 물소리에 귀가 열리고 귀가 젖는다// 물길이 돌부리에 걸린다/ 풀뿌리에 걸린다/ 걸린 물길 빙-빙 원 그리며 포말이 된다// 물길도 순리만은 아니였구나/ 이 지상의 길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밀려나고 밀어내는 등() 뒤편 같은 것,// 오늘 이 봄, 냇가에 앉아// 물길도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소리 없는 소리로 울며 간다는 것을 알았다//

 

해, 저 붉은 얼굴 /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 만 원 없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 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 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닿고 있다//

담임선생님 / 이영춘

밥상은 너무 가벼웠다/ 냉수 한 사발에 옥수수 몇 통, 그리고/ 숨죽이고 누워 있는 열무김치 한 접시,// 툇마루엔 산 그림자를 안고 넘어가는 햇살이/ 밥상을 기웃거리고// 할머니는 굽은 등 굽히시며 무슨 잘못이라도 한 듯 연신 손등을 비비신다// 아이는 너무 창피하여 미닫이 쪽문 뒤에 숨어서 그 광경 훔쳐보는데/ 선생님은 옥수수 한 입 뜯어 물고/ 옥수수 알갱이처럼 우물우물 말씀하신다// 실은 교납금 때문에 왔습니다. 영춘이가 아직 교납금이 미납되었습니다.// 쪽문 뒤에서 숨어 듣던 그 아이,/ 아이는 열한 살이었다// 열한 살 그 아이의 체증, 뱃속 깊숙이 숨어서 꼬르륵꼬르륵/ 깊은 허기로 신호를 보내온다// 그 얼굴 아직도 태양초처럼 붉어지고 있다고/ 그 체증 아직도 쿵쿵 복통을 일으킬 때가 많다고//

아들과의 산책 / 이영춘

서른을 훌쩍 넘긴 아들과 강둑길을 걷는다/ 오래 묵은 이야기들이 체증을 뚫는 듯/ 강물도 흥겨워 흥얼거린다// 느닷없는 아들의 말, 심장을 파고든다/ “엄마, 우리들 키우느라고 고생하셨어요./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를 이 집 저 집에 맡기면서....../ 직장 다니시느라고......“// 아들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노을이 걸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하늘이 쿵- 내려앉는 듯/ 오래오래 삭혔던 눈물이 혈관을 타고 올라온다//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사각의 틀(型) 속에서/ 화장실에 가 젖을 꾹꾹 짜 버리면서도 먹이지 못했던/ 한의 눈물, 한의 핏물, 거꾸로 솟는다/ 하늘이 버얼겋게 눈을 뜬 채 내 얼굴을 포옥 감싸 안는다// 아들은 어느새/ 이 어미의 몸과 마음이 불꽃처럼 아프던/ 그 나이에 이르러/ 어미 발자국에 고인 눈물의 내력을 알아차렸는가/ 어미의 뒷모습에 걸린 고단한 그림자의 기억을 읽어내었는가// 나는 오래도록 숨죽이며 내 안에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듣는다/ 아들과 잡은 손에 따뜻한 피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듯이//

 

() / 이영춘 

항상 옆구리에서 문이 열린다 앞에서 문이 열려야 하는데/ 새벽은 오지 않고 잠이 먼저 일어나 문을 찾는다 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평생 살아온 길인데도 문을 찾을 수가 없다/ 궁핍한 새벽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채 , 어떻게 살아야 하나?’/ 푹푹 한숨 쉬는 방백, 방안 하나 가득 새벽이 아프다// 

 

포장마차 어머니 / 이영춘

어머니는/ 새벽 세 시에야 돌아오고/ 우리들은 늘/ 어머니 손길 대신/ 조그만 뜰에 내려와/ 싸늘하게 졸고 있는/ 별들과 이야기하며/ 밤을 지샜다/ 우리들의 밥상에는 늘/ 밥 대신/ 라면이나 국수올들이/ 어머니 사랑처럼/ 줄지어 오르고,/ 그러나 끝끝내 우리들의 공백은/ 채워지지 않았다// 새벽 세 시에야 돌아와 누운/ 어머니의 긴 앓음 소리에/ 우리가 먹은 국수올들이/ 새삼/ 어머니의 목숨이란 것을 알았다//

 

어머니의 강, 그 눈물 / 이영춘

밤마다 갈잎 부서지는/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어머니 상처 난 심장의/ 여울물 소리를 듣습니다// 어머니,/ 한 생애 온통 달빛 속 같으시더니/ 아직도 마른 한 구석 눈물이 고여/ 그토록 많은 눈물 밤마다 길어 내십니까// , 가을 잎새처럼 젖어 떨고 있는 어머니/ 이제 어머니의 날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깃털 빠진 상처뿐입니다// 간밤에는 별이 지고/ 어머니 숨결처럼 고르지 못한 미풍이/ 문풍지를 흔들다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작은 가슴에/ 큰 불씨로 살아 계신 어머니/ 깜박이는 등불 앞에/ 어머니 실낱같은 한 생애를/ 누군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어둠속에서 자꾸 당기고 있습니다// 저 광활한 안개 속으로.//

 

아버지의 가방 / 이영춘

물방울이 뜬다 생각이 뜬다 풀잎이 뜬다 묘지가 뜬다 아버지가 뜬다 아버지 가방이 뜬다 가방 속에 넣고 다니던 아가였던 우리들이 뜬다 우리가 다시 아버지를 가방 속에 넣고 메고 다닌다 불룩한 가방, 불룩한 배, 무덤 가방이다 무덤 가방에서 아버지가 파란 새 싹으로 손을 흔든다 아버지의 손이 산을 흔든다 이름 없는 무덤 깃발, 이름 있는 무덤 가방, 아버지의 해가 둥그렇게 눈을 뜬다 둥그런 해가 둥그렇게 눈을 뜨고 일어난다 온 산이 흔들린다 불룩한 아버지의 배가 흔들린다//

들풀 / 이영춘

세상이 싫고 괴로운 날은/ 바람 센 언덕을 가 보아라/ 들풀들이 옹기종기 모여/ 가슴 떨고 있는 언덕을// 굳이 거실이라든가/ 식탁이라는 문명어가 없어도/ 이슬처럼 해맑게 살아가는/ 늪지의 뿌리들// 때로는 비 오는 날 헐벗은 언덕에/ 알몸으로 누워도/ 천지에 오히려 부끄럼 없는/ 샛별 같은 마음들// 세상이 싫고 괴로운 날은/ 늪지의 마을을 가보아라/ 내 가진 것들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한순간//

 

풀꽃들의 집 / 이영춘

북 카페 창가에 앉아 창 앞에 초라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화단을 본다./ 이 화단은 봄인데 꽃 한 포기도 없구나! 주인이 꽃 몇 포기라도 사다가 저/ 홀쭉하게 메마른 몸뚱이에 옷을 좀 입혀 주었으면, 생각하다가 그것도 다 돈을/ 들여야 하겠지, 라고 변명하다가 그렇지, 다른 꽃들을 사다가 옷을 입히면 저기/ 저 이름 없는 어린 풀꽃들이 집을 잃고 말겠지! 저것들도 다 이 세상 살겠다고/ 태어나 저리도 가냘픈 몸 떨고 있는 것을.//

 

우주 한 채 / 이영춘

적막이 빈 집을 지킨다/ 벌레 먹은 햇살이 기웃기웃 적막을 건드린다/ 움칠, 긴 그림자 하나/ 허공을 가른다/ 땔감을 진 노인이 노을을 지고 돌아온다/ 적막이 길게 하품을 하며/ 노인의 품에 덥썩 안긴다/ 초가 한 채가 온통 우주를 흔든다//

 

노자의 무덤을 가다 / 이영춘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한 줌 바람으로 날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지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상은 빈 그릇이었다// 사람이 숨 쉬다 돌아간 발자국의 크기/ 바람이 숨 쉬다 돌아간 허공의 크기,// 뻥 뚫린 그릇이다, 공空의 그릇,// 살아있는 동안 깃발처럼 빛나려고/ 저토록 펄럭이는 몸부림들,// 그 누구의 그림자일까?/ 그 누구의 푸른 등걸일까?// 온 지상은 문을 닫고/ 온 지상은 숨을 멈추고/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그릇,// 빈 그릇 하나 둥둥 떠 있다//

 

어느 날 태백산 능선에 앉아 / 이영춘

산 능선에 앉아/ 바닥을 생각한다/ 바닥은 하늘이 된다는 것을// 오르지 못한 것들의 바닥은 뿌리가 되고/ 뿌리들은 땅의 기운이 된다는 것을/ 오늘 하늘 능선에 올라 와서야 비로소 알았다// 오월모일 태백산에 올랐다가 알았다/ 환웅은 바닥을 행해 내려온 하늘의 아들이라는 것을/ 웅녀는 하늘을 받아 안은 땅의 딸이라는 것을/ 하늘과 땅 두 손뼉 마주쳐 불꽃 튀는 개벽으로/ 탄생된 제국/ 제국은 곧 바닥의 뿌리들이 모여 사는 곳/ 바람들이 모여 사는 곳// 나는 오늘 그 바닥의 맨 밑바닥에서/ 뿌리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봉평 가는 길 / 이영춘

길이 없다/ 이효석도 없다/ 내 어리던 날 다니던 약물벼랑/ 증둔지 쇠판이 써근새 갬박골/ 모두 어디 있나?/ 봉평면 원길리 부드레골/ 산모퉁이를 돌아/ 내 태어난 집을 찾아간다/ 정지 밖 사립문 밖으로 웬 낯선/ 나그네 지나간다/ 낯모르는 아낙들 중얼거리는 소리/ 소리에 묻혀/ 까마득히 아이는 멀어져 가고/ 내 태를 태운 지붕 훌훌 벗겨져/ 붉은 슬레이트 도시 풍으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절벽이다/ 절벽 속에서 환한 길을 만든다/ 봉평 사람들은//

 

봉평 장날 / 이영춘 

올챙이국수를 파는 노점상에 쭈그리고 앉아/ 후루룩 후루룩 올챙이국수를/ 자시고 있는 노모를 본다/ 정지깐 세간사 뒤로 하고/ 한 세기를 건너 와 앉은/ 푸른 등걸의 배후,/ 저문 산 그림자 결무늬로/ 국수 올들이 꿈틀꿈틀/ 노모의 깊은 주름살로 겹치는/ 허공,/ 붉은 한 점 허공의 무게가/ 깊은 허기로 내려 앉는/ 한낮.// 

 

가시 / 이영춘

가시에 찔려 본 사람은 안다// 그 생채기 얼마나 쓰리고 아픈가를/ 피 멍울멍울 솟아나는 진통을/ 한 사람의 독기 어린 혓바닥이/ 우리들 가슴에 얼마나 많은 피를 솟게 하는가를// 가시에 찔려 본 사람은 안다/ 나는 또 얼마나 많이 남의 가슴에 가시를 박았을 것인가를// 한 치 혓바닥에서 묻어나는 그 독기./ 돌밭, 가시밭에 몸 박고 사는 엉겅퀴처럼 툭툭/ 불거진 가시가 얼마나 큰 암 덩어리였던가를// 가시에 찔려본 사람은 안다/ 내 몸에 가시가 박혀 피 철철 흘리듯/ 남의 가슴에도 피 흘리게 하였을 것인가를//

 

제사상() / 이영춘

아버지 기제사 지내러 온 동생이 어지럽다면서 자주 드러 눕는다/ 왜 어지럽느냐고 물었더니 요새 고기를 안 먹어서 그런 것 같다고 한다/ 좀 사 먹지 그랬느냐고 했더니/ "시퍼렇게 눈 뜨고 살처분 되는 그 눈을 보고 그 살()을 어떻게 먹느냐!"고 한다// 음복상 앞에 둘러 앉았던 가족들 중 누군가는 젓가락을 내려 놓고/ 입속에 든 음식을 우물우물 새김질하며 소처럼 꿈뻑꿈뻑 깊은 생각에 들고/ 또 누군가는 그들의 팔자는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니까 우리가 먹어줘야 한다며/ 젓가락질이 계속되고// 이구동성 입술 바람들이 바람을 일으키는데/ 소처럼 살다난 아버지의 긴 울음소리가 휙―― 젯상을 흔들며 지나간다//

 

운성(隕星)으로 가는 서사 / 이영춘

저 푸른 가지 끝에 등불 하나 달려 있다/ 그 불빛 아래 서성이는 거인의 목neck같이/ 긴 기다림의 목 줄기가 욕망이란 이름으로 매달려 있다/ 운명은,/ 어느 날은 서쪽으로 목이 기울고/ 어느 날은 동쪽 가지 끝에 매달려/ 그 성문 앞에서 일렁이는 그림자 하나/ 나를 판화 한다// 오늘 이 순간, 동쪽으로 가는 문 활짝 열어 줄 거인은 누구인가/ 수성 성씨를 가진 물줄기의 기운으로/ 둥근 해를 건져 올릴 귀인은 누구인가/ 동쪽에서 온다는 나의 운수는/ 어느 하늘 아래서 나침판을 돌리고 있는가// 갈 길을 잃고, 방향을 잃고/ 아득한 저 방파제 너머 그린 듯 앉아 있는 어부의 칼끝에서/ 가쁜 숨 몰아쉬고 있는 흰 고래 한 마리,/ 컥 울컥 비린 부유물 쏟아내며/ 붉은 햇덩이 안고 돌아올 거인을 기다리고 있다/ 내 안에서 죽은 햇덩이 안고 돌아갈 저 아득한 천공,/ 그 빙하의 한 세기 앞에서//

 

매미허물 같은 / 이영춘

매일 그 자리에 누워 있는 매미/ 땅 속 깊이 잠들어 있는 매미,/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눈 흐린 형광등과 고성을 지르는 TV속 정치인들의 정쟁과/ 볼모로 누워 있는 국민이라는 풀잎 같은 이름들과/ 무심하게 돌아가는 둔탁한 분침과 초침의 숨소리와/ 바가지 없는 바가지를 긁어대는 내외內外라는 이름들과/ 코로나 19라는 괴상한 짐승과/ 우후죽순 밀려나는 실업자 청년들과/ 골목마다 숨 멈춘 창문틀의 돌쩌귀와/ - - 꽉 막힌 세상, 꽉 막힌 땅 속 매미 껍질들,/ 나의 껍질은 어느 나무에 붙어서 울어야 하나?/ 날개 잃은 겨울 매미 어디로 날아가야 하나?//

 

비닐봉지속 세상 / 이영춘

1998년 정월 초하루,강릉 강문 앞바다 대관령 횟집에서 우럭 두 마리를 샀다 세종대왕 다섯장.아주 비싸다. 두겹 세 겹 비닐봉지 속에 넣어 버스안 내 옆 자리에 앉혔다 비닐 봉지속에서 펄떡거리는 우럭 두 마리. 금방 숨이 넘어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닐봉지의 아구리를 빼꼼히 열어 놓았다 그러나 우럭은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잠잠하다 겁이 더럭 났다 그토록 종횡무진하던 놈의 최후,어둠이 자욱하다 점점 옥죄어 온다 비닐 봉지는 금세 세상속으로 녹아들고 아가리를 벌린 알몸뚱이만 세상 밖으로 축 늘어진다 내가 헤엄쳐 다니던 길도 보이지 않는다 비닐 봉지 속보다 더 어둔 세상 한 복판에 우리는 막막히 서 있다//

 

다섯 살 그 아이는 / 이영춘

계모 손에 자라던 그 아이는/ 하루는/ 말 안 듣는다고 두드려 맞고/ 하루는/ 오줌 쌌다고 두드려 맞고/ 하루는/ 밥 빨리빨리 안 먹는다고 두드려 맞고/ 하루는/ 운다고 두드려 맞고// 그리고 오늘 또 하루는/ 늦게까지 안 일어난다고 빗자루를 든 계모가/ 홀로 자는 아이 방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어 있더라고……// 밥 안 먹어서 빗자루로 조금 때린 것뿐인데/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노라……// 어느 날 저녁 뉴스에서 얼굴 가릴 줄도 알고, 말할 줄도 아는/ 털 없는 큰 짐승 하나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나는 밤새 화면 뒤에서 짐승처럼 꺽- - 젖은 몸으로/ 아이가 아파서/ 울었다//

 

시간의 옆구리 / 이영춘

김도연의 소설을 읽으면 시간의 옆구리 같은 걸 느낄 수 있단 말야!"/ 소설가 이외수의 말이다/ 난 그 말의 의미를 한참 생각했다/ 시간의 옆구리? 시간의 옆구리라?// 정상적인 상황에서 벗어난 것들/ 보편적인 진리에서 벗어난 것들/ 과거, 현재, 미래에서 툭 튕겨져 나간 것들/ 가야할 길 위에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 있어야할 사람 집에 다른 무엇이 살고 있는 것/ 과거, 현재, 미래 속에 다른 시제가 생성된 것// 엉뚱한 것들, 엉뚱한 짓들,// 정상적인 혹은 보편적인 상황 위에/ 또 하나의 엉뚱한 상황,// 지하도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나라/ 석 박사가 되어도 일할 곳이 없는 나라/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나라/ 툭 터져 나간 옆구리 시간의 나라// 작년 가을 내 칸나는 40세 젊은 나이로/ 옆구리 나라로 툭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아픈 시간의 옆구리,/ 피 철철 흘리는 옆구리 나라의 사람들//

 

돌의 부화 / 이영춘

돌은 부화할 수 없는가?/ 돌이 물속에 있다/ 물속에 있는 돌은 알까기가 가능하지 않는가?/ 돌은 자란다 물속에서// 나는 아침마다 베란다 좌대에 앉아있는 돌에 물을 준다 물속에서도 자라지 못하는 그림자 하나, 그림자는 언제나 내 등 뒤에 숨어서 나를 끌어 올리지 못한다 돌 속에서 자라는 그림자의 함정이다// 아득히 먼 고원의 땅에서 유목민으로 살다 간 내 종족의 피톨/ 돌 속에서 굳어진 피톨, 날개 잃은 새의 죽음 점점이 푸른 반점으로 돋는다/ 푸른 혈맥의 반점, 여기저기 푸른 상처로 내 몸을 거부한다// 내일은 어느 계곡에서 어느 툰드라의 골짜기에서 부화를 꿈꿀 수 있을까?// 돌이 물속에 엎드려 있다 부화하지 못한 돌 물속에 죽어 있다/ 죽은 새의 부리가 돌 속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부화하지 못한 물고기 한 마리,/ 구름 떼 같은 거품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겨울 참새 / 이영춘

겨울 빈 나뭇가지에 포동포동한 참새들이/ 꽃송이처럼 앉아서 논다/ 한 놈이 휙—햇살 줄기를 가르며 자리를 옮기자/ 옆에 있던 다른 놈들도 포르릉 따라가 앉는다// 빈 가지에서 무엇을 쪼아 먹으려는 몸짓인지,/ 그냥 놀러 나온 것인지,/ 살폿살폿 내려앉는 발가락들,/ 幻이다// 햇살들은 쪼악쪼악 고것들의 똥구멍을 쪼여주고/ 포롱포롱 날개 죽지 밑에 숨긴 입술들은/ 햇살 그림자를 따라 출렁인다// 나는 어느 새 겨울 동화의 나라로 돌아가/ 동화 속 빨간 아이의 얼굴이 되어 중얼거린다// 초가지붕 처마 밑에서 쌔근쌔근 잠들었던 조것들의 붉은 심장에/ 깊숙이 손 내밀어 홱—잡아챘던 그 어린 날의 가가소可呵笑/ 너희들 고렇게 앙증맞고 고요로운 평화의 몸/ 내가 왜 그리 탐했었는지 모르겠다 참새야, 미안하다/ 너희 알몸 가려주는 햇살 앞에서 내가//

물새 / 이영춘

어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다리가 무너져 강물에 기대 울었다/ 강물은 내 눈물인 듯 더 많은 강물로 흘러갔다/다리가 젖은 물새들은 무심히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포롱포롱 자리를 옮겨 앉는다 잠시, 내 눈물이 멈춰 일렁인다/ 조것들 속에는 어떤 생生이 살고 있을까? 앙증맞고 가벼워 날 수 있는 저들의 몸,/ 저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닮고 싶어 사람도 죽으면 새가 되길 갈망하는 것일까?/ 나는 눈물을 거두고 지인에게 문자 편지를 쓴다/ 오늘은 내 존재가 슬퍼서 강가에 와서 울었노라고/ 그 눈물의 근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다리 때문이었노라고/ 위에서 흐르는 물은 강 밑바닥을 보지 못한다고/ 밑바닥은 언제나 부유물 같은 이끼일 뿐이라고/ 나도 눈감으면 물새가 되고 싶노라고//

 

바다 / 이영춘

수레는 보이지 않는다/ 콧날이 시어지는/ 원경,// 멍에도 없다/ 육신뿐이다/ 점차 흙을 닮아가는 육신// 길은 노상 그 길인데/ 입엔 거품이 물리고/ 연두빛 꽃잎을 키운다// 실오리 같은 연두빛 꽃잎/ 그 꽃술에 매달려/ 진물이 나도록 걸어야 하나// 길은 노상 그 길,/ 낯선 듯, 낯익은 듯/ 아슬한 슬픔뿐// 수레는 보이지 않는다/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 흙을 닮아가는/ 사람뿐이다//

 

곡비(哭婢) -천안함 1주기 돌비석 아래서 / 이영춘

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통곡하는/ 어미들을 위해 아비들을 위해/ 나는 얼마나 울어 줄 수 있는가, 울 수 있는가/ 싸늘한 시체 어루만지듯 돌비석 부둥켜안고 우는 저 어미, 아비들/ 심장 다 터져 내려앉은 각혈, 각혈로 쌓은 제단 돌무덤/ 돌무덤 속에서 묻어나는 저 눈물들을/ 내 눈물은 어디만큼 가서야 저들의 가슴 밑바닥에 닿을 수 있을까/ 안타까이 안타까이 TV 화면만 쳐다보며 꺽꺽 눈물을 보탠다/ 좌충우돌 얼룩지는 개 같은 세상에 한 마디 보탤거나/ 생때같은 내 아들 다 사라져 만져볼 수도 안아볼 수도 없다고/ 훠이훠이 허공 끌어안고 허공처럼 무너지는/ 저 눈물 앞에서도/ 우리들 한 곡조로 울지 못하는 이 겨레의 비운, 비운이여!/ 어느 강 상류에 이르러 우리들 한 뿌리 아니었으랴!// 오호 통재라, 곡비된 몸으로/ 곡비될 수 없는 이 세대의 아픔으로/ 만장(輓章) 펄럭이는 이 거리에서/ 어디쯤 더 내려가서야 우리 한 몸으로 울 수 있을까//

 

귀의 외출 / 이영춘

세상이 싫은 날은 산을 오른다/ 사람의 소리, 세상의 소리/ 귀 밖으로 멀다/ 솔잎 새로 흘러가는 바람 소리/ 새들이 양말 벗고 노는 소리/ 꽃들이 침묵으로 앉아 웃고 있는 소리/ 풀잎들이 어깨동무하고 걸어가는 소리/ 선승 같은 나무들이 무() 의 말로 경() 읊는 소리/ 어느새 하늘이 걸어 내려와 내 손목 잡고/ 산 능선을 넘는다/ 천지가 온통 한 몸이다/ 내 귀가 환하다//

 

만해마을에서의 하룻밤 / 이영춘

큰 산이 나를 안고 잠을 잤다/ 나는 밤새 그의 품속에서/ 하얗게 설레였다// 몇 억겁이나 흐르면/ 그를 닮은 큰 아이 하나/ 낳을 수 있을까//

 

월담 / 이영춘

아파트 아래층 정원에서/ 살금살금 하늘줄기 타고 올라온 나팔꽃 한 송이/ 우리 집 베란다 창틀에 두 팔 걸치고/ 슬금슬금 내실을 살핀다/ 고것 참 이상도 하다/ 우리 집엔 소녀도 처녀도 없는데// 꽃등 위에 엎드려 며칠을 속살거리던 햇살/ 오늘 그 햇살의 아이들이 색색의 입술로/ 하늘하늘 손 흔들며/ 우리 집 창틀에 매달려 하얗게 웃고 있다//

 

독거노인 / 이영춘

내 이웃에 혼자 사는 한 노인/ 점심때가 되면 울밖에 나가/ 솟대처럼 서 있다/ 하루 한 끼 동사무소에서 자원봉자자가 갖다주는 도시락,/ 그 밥이 고마워 연신 도시락에 대고 인사를 하는데// “평생 마누라 배도 제대로 못 채워주고 살다간 남편보다 나으이!”/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담!---어디 있어!---/ 누룽지 같이 꺼끌꺼끌한 손가락 펴/ “나랏님 잘 되라고 나라도 빌어야제, 그래야 내가 배불리 먹지!”// 하루에 열 두 번도 더 고맙다는 말, 입에 달고 사는 노인// 나는 하루 세 끼 먹는 내 밥이 부끄러워 뒷짐 지고 하릴없이/ 내 집 마당을 어슬렁거리는데//

 

클로토의 베틀 / 이영춘

어둠의 날개들이 불을 켜고 달려온다 천 개의 날개가 달린 알바트로스, 천 개의 눈이 달린 모이라이*. 내 어둠의 날개 어디만큼 비켜 갈 수 있을까 알바트로스의 깃털, 깃털 같은 길 보이지 않는다 어둠의 손, 어둠의 날개 밤마다 퍼덕인다 아트로스*의 거역할 수 없는 가위손, 운명의 손이 어둠을 퍼 나른다 어둠이 불꽃으로 튄다 불꽃 연기 하늘에 닿는다 아트로스의 가위로 내 어둠을 잘라낼 수 있다면 불 밝히고 누울 나의 집, 나의 동굴 환하겠다 지붕 없는 그 집, 길 없는 그 집, 사방이 꽉 막힌 내 자유의 해방구다 해방구 한 쪽으로 알바트로스의 날개 퍼덕인다 그 집에 이르는 길, 돌 속에서 꽃을 피우듯 절름거리며 간다 암호처럼 별처럼 일렁이는 산 그림자 지우며 간다 저무는 산길에 산 꿩 한 마리 날아간다 흰 눈 내려 산길을 까맣게 지운다//

*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들

 

슬픈 도시락. 1 / 이영춘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1반 류창수./ 고슴도치 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아이는 늘 혼자가 된다 혼자서 먹는 도시락./ 내가 살짝 도둑질 하듯 그의 도시락을 훔쳐볼 때면/ 그는 씩 웃는다 웃음 속에 묻어나는 쓸쓸함./ 어머니 없는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 싶은 것이다 도시락 속에 숨어서 울고/ 싶은 것이다. "어른들은 왜 헤어지고 싸우고 만나는 것인지?,/ 깍두기 조각 같은 슬픔이 그의 도시락 속에서 빠꼼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슬픈 도시락. 2 / 이영춘 

고등학교 삼년 내내 도시락 한 번 싸 간 적 없었던/ ,/ 오늘 그 교정에서 아이들이 도시락 먹는 광경을 본다/ 저 많은 무리 속에도/ 옛날 나와 같이 도시락 퍼즐게임에서 밀려난 아이 있겠지?/ 밥과 밥 사이에 고추장을 발라 도시락을 싸 갖던 단 한 번의/ 기억,/ 왈칵 눈물이 난다.//

 

밥장사하는 제자 / 이영춘 

먹고 산다는 것,/ 밥과 입의 등식이다/ 한 아줌마가 단 혼자서 주방을 들락거린다/ 살집 다 빠진 팔 다리로 저 가득한 입을 들어나르는/ 밥의 무게,/ 새삼 깨닫게 만드는 요즘 불황 풍경이다/ 저들 가족의 한 끼 양식을 위해/ 한 주발의 땀을 흘려야 하는 출구와 배설의 등식,// 아프다/ 그녀의 등 휘어지는 허리가, 다리가,/ 냉수 한 사발에 보리개떡 담긴 소반 받쳐 들고/ 문지방을 넘다 넘어진 내 어머니처럼// 아프다/ 이 불황의 팔다리가.// 

 

닭갈비집에 앉아 죽은 달걀을 생각한다 / 이영춘

이른 아침 닭갈비집에 닭갈비 사러 갔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시간을 기다리며/ 간밤 눈밭에 발자국 찍듯 드문드문 목덜미 웅크린 사람들 지나가고/ 나는 닭갈비집 창턱에 턱을 고이고 앉아 죽은 달걀을 생각한다// 목 웅크리고 살다간 할머니와 달걀과,/ 달걀 한 알 못 넘기고 떠난 할머니를 생각한다// 매일 둥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달걀을 꺼내는 일/ 삶아서 시아버님께 바치는 일/ 그녀의 몫이었단다// 마른 군침 꿀꺽꿀꺽 삼키던 어느 날/ 하나 딱 까서 입속에 넣는 순간/ 뒤통수를 꽝 때리는 발자국 소리,// 씹지도 못한 채 꿀꺽 삼켰던 삶은 달걀/ 죽은 달걀이 식도와 기도氣道를 막고 몸부림치던 삼일 째 되던 날// 아침/ 기침과 함께 탁 튀어나왔다는 새까맣게 탄 달걀,// 닭갈비집 유리창을 통해/ 서리 낀 둔덕 비탈에 죽은 달걀 같은 봉분 하나/ 어른어른 힘겹게 지나간다//

 

쌈밥집 / 이영춘

제자가 점심 먹자고 불러서 쌈밥집에 갔다/ 쌈밥들이 여기저기 모여앉아 야채 밭을 먹고 있다/ 야채 밭에서 먹히는 열굴들이/ 엄마 얼굴 같다 엄마는 늘 그렇게/ 밭 한 복판에서 먹히기만 하다가 돌밭에서/ 돌아가셨다//

 

던킨도너츠 / 이영춘

던킨도너츠 집에 앉아 도너츠 같은 사랑을 생각한다// 층층으로 이어진 긴 유리창에/ 우울 같은 가을비 내리고/ 젊은 입술들의 꽃잎 같은 언어들이/ 유리창에 길게 누워 흐른다// 던킨도너츠 입술 위에 그림자 같은 얼굴 하나 겹친다/ 축축한 반죽으로 발효시켰던 회灰가루 같은 사랑,/ 내 사랑도 거기 둥둥 떠 긴 창을 타고 흐른다// 둥근 던킨도너츠처럼 환하게 부풀었다가/ 허리 뒤틀린 꽈배기처럼 떠난 그림자, 그 그림자// 하루 종일 유리창엔 비가 내리고/ 꽃잎 언어들은 지칠 줄 모른 채/ 도너츠 같이 둥근 사랑을 구워내고 있다.//

 

컵라면 / 이영춘

오글오글한/ 머리들이 모여 있다/ 혹은 웃는 듯도 하고/ 혹은 우는 듯도 한/ 그 얼굴들은/ 마치 내 동생이/ 직공 생활을 하면서/ 야간 학교를 마치던/ 마산 어느 공단의 여공들 얼굴 같아서/ 감히 나는/ 컵라면을 먹을 때마다/ 목줄기가 배배 꼬여진다/ 마치 내 동생의/ 피와 살이/ 내 건강한 폐부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아서.//

 

매장, 마지막 정리 / 이영춘

남춘천역에서 아침 일곱 시 삼십 분에 떠나는 기차를/ 기다린다// 철길 저 건너편으로 신발, 마지막 매장 정리라는/ 현수막이 펄럭인다/ 누군가의 가슴 한 쪽이 현수막에 걸려 펄럭거린다// 이 시대,// 얼마나 많은 마지막 매장 정리가 거리에서 나부꼈던가!/ 얼마나 많은 붉은 심장들, 허공에 걸려/ ‘매장 정리를 외치고 있었던가!// 내 몸이 붉은 바퀴에 밀려 어딘가로 실려 나가고/ 지하 셋방에 살던 그 누구도 어딘가로 떠나가고// 물기 마를 날 없는 신발, 신발들/ 침묵으로 매달려 있다// 저들의 붉은 심장에 매달린 허기진 입들,/ 내일은 또 어느 곳에 이르러 현수막을 걸어야 하나// 현수막 속에서 펄럭이는 저들의 붉은 혓바닥과 목구멍,/ 어디쯤 더 바퀴를 굴려야 이 시대, 마지막 허기를 내릴 수 있을까// 다 해진 신발 뒤축,/ 오늘 따라 무겁기만 하다//

 

혀로 밭을 갈다 / 이영춘

나의 그녀는 이름 없는 시인이다/ 내가 가끔 봉급을 타 옷가지며 먹을 것을 사 보낼 때면/ ‘아이구 야아! 네가 혀로 밭을 갈아 번 돈인데 함부로 쓰지 마라신다/ 혀로 밭을 갈다니! 학교라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그녀,/ 그녀의 입에서 이런 시가 탄생되는 저 깊은 생의 옹이,/ 옹이는 샘물이 되고 길이 되고 그녀를 견디게 하는 기()가 되어/ 오늘은 시인이 되었나 보다//

 

광장, 그리고 광야 / 이영춘

신이 창조한 율법들이/ 무지개로 번진다/ 우르릉 쾅--천둥번개 소리 같은 것,/ 쇠사슬 끌리는 소리/ 말발굽 구르는 소리// 강물 속으로 달이 떠간다 행려병자 같은 달빛 얼굴, 어지러운 풀꽃들, 귀 막아야 할 소리들, 지상의 한복판에서 둥둥 떠다니는 붉은 입술의 껍질들, 껍질의 몸통들, 푸른 옷을 입은 번개와 붉은 옷을 입는 태양과 거리의 악사들, 검은 소음의 광장, 광장에서 죽어가는 풀꽃들, 풀꽃 같은 언어의 시체들, 새로운 세기의 한 역사가 퇴폐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 얼룩무늬 광장, 하얀 박새들 떠도는 광장에서// 오늘 내가 건너는 이 강, 알 수 없는 미궁의 길,/ 누가 우리를 저 지구 밖 행성으로 던져놓았는가/ 심판도 심판관도 없이 단두대가 올라간다/ 가시면류관을 쓴 얼굴들이/ 수만 개의 길 속에서 길을 잃고 길을 찾는다//

 

길을 잃다 / 이영춘

밤새 철석이는 파도의 발자국/ 길을 찾아가는 모든 것들은 길 없는 길을 간다./ 허공을 날아가는 새들의 길과/ 파도 갈피에 날개를 젖는 갈매기 떼의 길과/ 밤하늘에서 제 빛으로 길을 내고 있는 달빛의 길,/ 어둠 이 쪽에서 길을 잃고 있는 내 늑골의 길은/ 어느 암갈색의 암벽을 오르고 있는가// 어느 고생대에서 화석이 된 화석의 뼈로/ 길을 묻고 있는가/ 누구를 저주했거나 원망했다면/ 그 죄의 피 한 방울 내 몸으로 흘러 들어/ 길을 잃고 길을 찾는 것일까/ 암벽 저 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저 어둠의 날개/ 펄럭이는 어둠의 날개에 걸린/ 새 한 마리/ 허공에서 운다//

 

보도블럭을 밀고오는 구름꽃 / 이영춘

꽃잎처럼 툭툭 떨어지는 이름들/ 복숭아 꽃잎만큼이나 햇살 밝은 대낮에/ K도 달려오고 Y도 달려오고 X도 달려오고// 숨죽이고 엎드려 있는 보도블럭의 맨발/ 네 거리 사각의 길모퉁이에서/ 피카소 안경을 걸친 피카소 안경점에서/ 떨어진 구름 조각들을 줍고/ 잃어버린 시간들을 주워/ 안경 속 시신경들이 기억의 시간에 불을 붙여 들고/ 달려오는 이름들/ 손수건에 싼 이름들을 포켓에서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시간에 섞어 버무리고 있을 때/ 흩어진 구름 조각들이 알몸으로 보도블럭에 툭툭 떨어지듯// K도 가고 Y도 가고 X도 가고/ 내 그림자마저 빠르게 뛰어가는 이 봄날//

 

가을 산사에서 / 이영춘

가을 산사에서 하룻밤을 지샌다/ 깊이 잠든 별도 쳐다보고/ 숲 속에서 이는 바람소리도 들으면서/ 큰스님의 이야길 듣는다/ 내 진작 어려서부터 중은 안 되더라도/ 절을 가까이 하면서 살았더라면/ 스님의 깊은 언저리라도 배웠을 것을./ 밤 깊어 스님은 풍경 속으로 잠들고/ 슬프도록 적막한 고요 속에서/ 나는 홀로 귀 세운 짐승처럼/ 어디선가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산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밤은 이 산사에서 귀를 뉘이고/ 내일은 또 어느 곳에 가서/ 잠들 것인가를 생각한다//

 

다하는 것 / 이영춘

진심을 다하고/ 몸을 다하고/ 시간을 다하고/ 삶을 다하고/ 믿음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고/ 맞추기를 다하고/ 흐르는 마음속을/ 아이처럼 다하는 것//

 

별 우체국 / 이영춘

너무 멀리 갔다/ 발자국이 지워진 너의 길/ 지상의 풀벌레도 어느 새 길을 잃고/ 밤새 목청 터지도록 너에게로 가는 길을 묻는다// 계절을 끌고 가는 저 허공의 길/ 허공을 채우는 별 잎사귀들이/ 점점이 붉은 방점으로 너를 깨우는데/ 별 우체국,/ 너는 어느 유목민의 자손인가/ 아득히 소식이 멀다// 그 먼 나라에 잠들었을 너에게/ 나는 수신인 없는 편지를 쓴다/ 어느 별 우주 정거장에서 붉은 귀 세우고 있을까/ 별들이 소리 없이 우는 밤,/ 그 울음소리에 귀 묻고 앉아 귀먼 편지를 쓴다/ 밥알처럼 한 스푼씩 떠 음미할 눈물을 쓴다// 지상에는 네가 사랑하던 너의 꽃잎들 소식은 멀고/ 네가 등 기대고 눕던 붉은 탯줄도/ 너를 따라 그 나라에 든 지 오래다/ 지상은 청 빈 정거장/ 붉은 꽃잎들 뚝뚝 떨어져 빈집뿐이다/ 네 혈흔처럼, 발자국처/ 나는 오늘 밤 아득한 그 나라에/ 별 우표를 붙인다//

 

세월 / 이영춘

한 폭도 못 되는 내 손등을 들여다보면서/ 손등 면적보다도 넓고 깊게 골진/ 세월을 읽는다.// 애써 공들이지 않았어도/ 애써 힘들이지 않았어도/ 이토록 골 깊이 뿌리내린 세월.// 한많은 그 광음 속에/ 진정 내가심은 것은 무엇인가?/ 새삼 내 정원이 텅 빈 것을 알았을 때/ 어이없게도 그 텅 빈 사잇길로/ 구름 몇 조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따뜻한 편지 / 이영춘

은행 창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춘천 우체국에 가면 실장이 직접 나와 고객들 포장박스도 묶어 주고/ 노모 같은 분들의 입?출금 전표도 대신 써 주더라.“고 쓴다/ 아들아, 이 시간 너는 어느 자리에서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쓴다/ 나도 내 발자국을 수시로 돌아보겠지만/ 너도 우체국 실장처럼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고 싶은 시간이다// 겨울날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 받아 안 듯/ “비오는 날 문턱까지 손수 우산을 받쳐 주는 그런 상사도 있더라.”고 덧붙여 쓴다// 살다보면 한쪽 옆구리 뻥 뚫린 듯 휑한 날도 많지만/ 마음 따뜻한 날은 따뜻한 사람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한다// 빗줄기 속에서, 혹은 땡볕 속에서/ 절뚝이며 걸어가는 촌노를 볼 때가 있을 것이다/ 네 엄마, 네 외할머니를 만난 듯/ 그들 발밑에 채이고 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마음 눈 속에 옷을 입혀야 한다// 공부라는 것, 성현의 말씀이란 것,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람 위에 사람을 보지 말고/ 사람 아래 사람을 보는 눈을 키워라, 그러면/ 터널처럼 휑한 그들 가슴 한복판을 가득 채우는 햇살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아들아,/ 비오는 날 은행 창가에서 순번 기다리다 지쳐 이 편지를 쓴다//

 

골목 안 맨 끝 집 / 이영춘

골목 안 맨 끝 저 집에 귀 뉘인 자 누구일까/ 신발 두 켤레 댓돌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문틈 새로 희미한 불빛 가쁜 숨 고른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저 속의 삶,/ 어디론가 집 떠난 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것 칭얼대는 소리, 남루한 창틀 흔들리는 소리/ 갈퀴같이 마디 굵은 손으로 양은 냄비 달그락대는/ 저 빈 그릇의 헛한 마음,// 발자국 소린가 귀 기울여도 돌아오지 않는 소리// 어느새 골목 안은 죽은 듯 깊은 잠에 바지고/ 홀로 잠들지 못하는 이 동네 맨 끄트머리 저 집엔/ 누가 있어 이 밤도 등불 내리지 못하고 있는가//

 

호흡공장 운영 사무실 / 이영춘

비가 온다/ 빗줄기 속에/ 비처럼 우는 한 사람이 걸어간다./ 비에 목이 걸린 한 사람이 걸어간다./ 빗줄기가 빗물에 감기면서/ 머리털 빠진 한 여자가// 빗속으로 죽은 그녀가 걸어간다./ 빗물에 둥둥 떠 간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침묵의 아우성/ 체인-스톡 브리딩! 체인-스톡 브리딩!*/ 찰나적 마침표, 그 숨소리/ 그 소리 하늘로 올라간다./ 빗줄기 속에, 빗물 속에// 천지가 온통 문을 닫는 방점의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 우주를 걸어나간다.//

* cheyne-stoke brearhing

 

죽은 새를 만나다 / 이영춘

청평역 플랫폼에/ 밤톨만 한 새 한 마리 쓰러져 있다/ 고, 어린 것이 왜 죽었을까?/ 노랑색 바탕에 파랑색 줄무늬 날개옷을 입은/ 환상의 무지개다/ 스크린도어가 궁전인 줄 알고 날아들다 유리문에 박혀 뇌출혈을 일으킨 걸까?/ 어느 산속 외딴 숲에서 사람이 그리워 내려왔던 길일까?/ 바람의 시샘에 집을 잃은 것일까?/ 고, 작은 예쁜 몸으로 무엇이 그리웠을까?/ 지상에는 흉악한 물건과 눈알과 불빛과 송곳과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이 살고 있는데/ 어린 너는 '천진, 순진'만 믿고 세상이 그리워 왔던 것인가 보다/ 말없이 애타게 불쌍하게 죽은 네 어린 목숨을 보며/ 무기력한 나를 원망한다/ 더구나 너의 작은 몸을 내 손수건에 고이 감싸 안고 와/ 어느 개울가 돌무덤에, 혹은 꽃나무 가지 밑에 묻어주지 못한 나를 후회한다/ 나는 나를 장사 지내야 한다/ 판결문 한쪽에 비수를 꽂듯이/ 비정했던 나의 몸과 마음에/ 붉은 수의를 입히고 있는 밤이다//

 

평행선 애인 / 이영춘

분명, 한 탯줄을 타고 나온 아이였는데/ 네 사상의 분자들은 강 저쪽에 떠 흐르고/ 내 사상의 알갱이는 강 이쪽에 떠 흐르는구나/ 먼지 낀 세상의 창은 흐리기만 한데/ 도수 놓은 안경을 끼어도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너는 흐린 창 저 너머에서 세상 읽는 법을 찾는구나/ 한 탯줄에서 분화된 입자들이/ 낱낱, 실오라기 같은 생각의 날개를 달고/ 서로 다른 창 밖을 달리고 있구나/ 미망의 도시, 미명의 거리,/ 고전의 장벽 같은 성(城)안에서/ 등불은 누구를 위한 횃불인가/ 혁명은 누구를 위한 깃발인가/ 사상의 바람이 갈지자로 횡행하는 이즘/ 한 탯줄 한 배꼽에서 자란 목숨들이 길을 잃고/ 서로 다른 눈먼 길을 가고 있구나//


 

이영춘 시인은
△1941년 강원도 평창 출생, 경희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76년 《월간문학》등단

△시집: 『시시포스의 돌』 『귀 하나만 열어 놓고』 『네 살던 날의 흔적』 『슬픈 도시락』 『시간의 옆구리』 『봉평 장날』 『노자의 무덤을 가다』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와 시선집 『들풀』 『오줌발,별꽃무늬』 등이 있음. △윤동주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인산문학상, 강원도문화상, 동곡문화예술상, 한국여성문학상, 유심작품상 특별상, 경희문학상, 대한민국향토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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