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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근배 시인

부흐고비 2021. 4. 22. 08:56

세한도(歲寒圖)-벼루 읽기 / 이근배

 

1

바람이 세다

산방산(山房山) 너머로

바다가 몸을 틀며 기어오르고 있다

볕살이 잦아지는 들녘에

유채 물감으로 번지는

해묵은 슬픔

어둠보다 깊은 고요를 깔고

노인은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

가시울타리의 세월이

저만치서 쓰러진다

바다가 불을 켠다

2

노인이 눈을 뜬다

낙뢰(落雷)처럼 타 버린 빈 몸

한 자루의 붓이 되어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운다

이 갈필(渴筆)의 울음을

큰선비의 높은 꾸짖음을

산인들 어찌 가릴 수 있으랴

신의 손길이 와 닿은 듯

나무들이 일어서고

대정(大靜) 앞바다의 물살로도

다 받아낼 수 없는

귀를 밝히는 소리가

빛으로 끓어넘친다

노인의 눈빛이

새잎으로 돋는다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최고 걸작인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

  

광장 / 이근배

우리들의 슬픈 음반(音盤)은/ 눈이 내리는 벌판을 들려준다./ 바람과 나무, 그 모두가 소외(疎外)된 시간의 곁에서/ 우리들이 엎지른 밤도 젊음도/ 지금은 흩어진 몇 낱의 노래다/ 아아 분노(忿怒)여,/ 외치고만 싶은 산야에서/ 우리들의 내용은 무엇인가/ 불도 꺼진 어두운 지경(地境)에서/ 떨어져 우는 사랑의 미아(迷兒)/ 앓는 세계 속을 헤매는/ 우리들이 걷고 있는 길은 춥고 멀다/ 다만 외로운 피의 처분(處分)이/ 나부껴 오는 환상의 잎들로부터/ 저 눈먼 땅의 호흡과/ 우리들의 욕망은 끝나지 않는다/ 뜨거운 목마름으로 남는다.//

살다가 보면 / 이근배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보면//

들꽃 / 이근배

이름을 가진 것이/ 이름 없는 것이 되어/ 이름 없어야 할 것이/ 이름을 가진 것이 되어/ 기락에 나와 앉았다./ 꼭 살아야 할 까닭도/ 목숨에 달린 애린 같은 거 하나 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물들다가/ 바람에 살을 부비다가/ 외롭다가/ 잠시 이승에 댕겼다가 꺼진/ 반딧불처럼/ 고개를 떨군다./ 뉘엿뉘엿 지는 세월 속으로만.//

겨울풀 / 이근배

들새의 울음도 끊겼다/ 발목까지 차는 눈도 오지 않는다/ 휘파람 같은 나들이의 목숨/ 맑은 바람 앞에서/ 잎잎이 피가 돌아/ 피가 돌아/ 눈이 부시다/ 살아 있는 것만이/ 눈이 부시다.//

겨울행 / 이근배

대낮의 풍설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 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 날 당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 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 쓰러진 자리/ 생솔가지를 꺾던 눈발의/ 당신의 언 발이 짚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자꾸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노래여 노래여 / 이근배

1./ 푸른 강변에서/ 피 묻은 전설의 가슴을 씻는/ 내 가난한 모국어/ 꽃은 밤을 밝히는 지등처럼/ 어두운 산하에 피고 있지만/ 아카로스의 날개치는/ 눈 먼 조국의 새여/ 너의 울고 돌아가는 신화의 길목에/ 핏금진 벽은 서고/ 먼 산정의 바람기에 묻어서,/ 늙은 사공의 노을이 흐른다./ 이름하여 사랑이더라도/ 결코 나뉘일 수 없는 가슴에/ 무어라 피 묻은 전설을 새겨두고/ 밤이면 문풍지처럼 우는것일까//
2./ 차고 슬픈 자유의 저녁에/ 나는 달빛 목금을 탄다/ 어느 날인가, 강가에서/ 연가의 꽃잎을 따서 띄워 보내고/ 바위처럼 캄캄히 돌아선시간/ 그 미학의 물결 위에/ 영원처럼 오랜 조국을 탄주한다/ 노래여/ 바람부는 세계의 내 안에서/ 눈물이 마른 나의 노래여/ 너는 알리라/ 저 피안의 기슭으로 배를 저어간/ 늙은 사공의 안부를/ 그 사공이 심은 비명의 나무와/ 거기 매어둔 피 묻은 전설을/ 그리고 노래여/ 흘러가는 강물의 어느 유역에서/ 풀리는 조국의 슬픔을/ 어둠이 내리는 저녁에/ 내가 띄우는 배의 의미를/ 노래여, 슬프도록 알리라//
3./ 밤을 대안하여/ 날고 있는 후조/ 고요가 떠밀리는 야영의 기슭에서/ 병정의 편애는 잠이 든다/ 그 때, 풀꽃들의 일화 위에 떨어지는/ 푸른 빛의 사변/ 찢긴 날개로 피 흐르며/ 귀소하는 후조의 가슴에/ 향수는 탄흔처럼 박혀든다/ 아, 오늘도 돌아 누운 산하의/ 외로운 초병이여/ 시방 안개와 어둠의 벌판을 지나/ 늙은 사공의 등불은/ 어디쯤 세계의 창을 밝히는가/ 목마른 나무의 음성처럼/ 바람에 울고 있는 노래는/ 강물 풀리는 저 대안의 기슭에서/ 떠나간 시간의 꽃으로 피는구나.//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이근배

돌아가야 한다/ 해마다 나고 죽은 풀잎들이/ 잔잔하게 깔아놓은 낱낱의 말을 들으러/ 피가 도는 짐승이듯/ 눈물 글썽이며 나를 맞아줄/ 산이며 들이며 옛날 초가집이며/ 붉게 타오르다가는 잿빛으로 식어가는/ 저녁놀의 울음 섞인 말을 들으러/ 지금은 떨어져 땅에 묻히었으나/ 구름을 새어나오는 달빛에 몸을 가리고/ 어스름 때의 신작로를 따라나오던/ 사랑하는 여자의 가졌던 말을/ 끝내 홀로 가지고 간 말을 들으러/ 그러면 나이 먹지 않은 나의 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 나를 받으며/ 커단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잊었던 말들을 모두 찾아줄/ 슬픔의 땅, 나의 리야잔으로//
* 정지용의 '향수'에서 제목을 따옴

연가 / 이근배

바다를 아는 이에게/ 바다를 주고/ 산을 아는 이에게/ 산을 모두 주는/ 사랑의 끝 끝에 서서/ 나를 마저 주고 싶다// 나무면 나무/ 풀이면 풀/ 돌이면 돌/ 내 마음 가 닿으면/ 괜한 슬픔이 일어/ 어느새 나를 비우고/ 그것들과 살고 있다//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이근배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바다를 가두고 사는 까닭을 안다/ 바람이 불면 파도로 일어서고/ 비가 내리면 맨살로 젖는 바다/ 때로 울고 때로 소리치며/ 때로 잠들고 때로 꿈꾸는 바다//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하나씩 섬을 키우며/ 사는 까닭을 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눈이 내리는 섬/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볓빛을 닦아 창에 내걸고/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반짝이고/ 홀로 깨어있는 섬//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꿈의 둥지를 틀고/ 노래를 물어 나르는 새/ 새가 되어 어느 날 문득/ 잠들지 않는 섬에 이르러/ 풀꽃으로 날개를 접고/ 내리는 까닭을 안다//

냉이꽃 / 이근배

어머니가 김 매던 밭에/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되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들은 평생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신명 / 이근배

얼굴 씻은 산들이/ 거울 앞에 고쳐 앉고// 나무들이 팔을 벌려/ 하늘 듬뿍 안는 날은// 바람도 햇살에 익어/ 꽃씨처럼 터진다// 구름이네 낮달이네/ 강물은 들고 놓고// 지징징 춤사위로/ 들녘이 일어서면// 풀꽃도 사랑 한 가락/ 소리 높여 뽑는다//

서해안 / 이근배

무수한 시간들이 밀려와서 부서지고 부서진다./ 바다가 우는 것이라고 보면 우는 것이고/ 아득하다고 하면 하늘 끝은 아득하기만 할 뿐이다./ 억새풀아, 억새풀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바다의 무엇이 그리운 것이냐./ 밀물로 와서 주는 말/ 썰물로 가면서 남기는 말/ 모래톱은 씻기우면서 살 부비면서 쌓이고,/ 지나가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한 순간을 보일 뿐인 서해낙일/ 타는 숯덩이 같은 해를 바다가 삼킬 때,/ 세상의 적막이 다시 끓어오르는/ 외로움의 끝, 끝에서 사는 것이다.//

절필絶筆 / 이근배

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 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 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이근배 시인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61~1964년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에 시·시조 당선으로 등단. △시집 《노래여 노래여》 《추사를 훔치다》 등 다수와 시조집 《적일(寂日)》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등이 있음 △한국문학작가상, 유심작품상, 가람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육당문학상, 월하문학상, 편운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만해대상(문학 부문) 등 수상.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이근배 시인 "가장 한국적인 시가 위대한 시"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이근배(74) 시인은 무려 52년간 시를 써왔지만 아직도 시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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