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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춘수 시인

부흐고비 2021. 4. 23. 08:29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날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시인은 후일 고심 끝에 마지막 구절에서 ‘의미’란 말을 ‘눈짓’으로 바꾸었다. ‘꽃’은 두 가지 버전을 가지고 있다.

꽃을 위한 서시(序詩) /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 김춘수

다뉴브강(江)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가로수(街路樹)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黃昏)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數發)의 쏘련제(製) 탄환(彈丸)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瞬間),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上空)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靈魂)은 감시(監視)의 일만(一萬)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江)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江)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슈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旋律)일까, 음악(音樂)에도 없고 세계지도(世界地圖)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漢江)의 모래 사장(沙場)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 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韓國)의 소녀(少女)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惡魔)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열 세 살 난 한국(韓國)의 소녀(少女)는 잡히는 것 아무 것도 없는 두 손을 허공(虛空)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少女)여, 네가 한 행동(行動)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漢江)에서의 소녀(少女)의 죽음도 동포(同胞)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젖어든다. 기억(記憶)의 분(憤)한 강(江)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同胞)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英雄)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항쟁(抗爭)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銃)뿌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人類)의 양심(良心)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弱)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前) 세 번이나 부인(否認)한 지금, 다뉴브강(江)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 겨울 가로수(街路樹)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黃昏)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數發)의 쏘련제(製) 탄환(彈丸)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少女)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同胞)의 치욕(恥辱)에서 역(逆)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非情)의 수목(樹木)들에서보다 치욕(恥辱)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自由)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人間)의 비굴(卑屈)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威脅)하고 한밤에 불면(不眠)의 염염(炎炎)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少女)여,//

구름과 장미 / 김춘수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눈 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장미와/ 마주 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꽃의 소묘 / 김춘수

1./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花紛이며...... 나비며 나비며/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2./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의 阡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3./ 네 미소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할 수는 없다/ 금술 은술을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을 쓰고/ 그 아가씨도/ 新婦가 되어 울며 떠났다//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肝을/ 쪼아먹는다// 4./ 너의 미소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멀고 먼 곳에서/ 너는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너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

 

나비 / 김춘수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美다./ 나비가 앉으면 순간에 어떤 우울한 꽃도 환해지고 多彩로와진다./ 變化를 일으킨다./ 나비는 福音의 天使다./ 일곱 번 그을어도 그을리지 않는 純金의 날개를 가졌다./ 나비는 가장 가비야운 꽃잎보다도 가비야우면서 영원한 沈默의 그 空間을 한가로이 날아간다./ 나비는 新鮮하다.//

꽃밭에 든 거북 / 김춘수

거북이 한 마리 꽃 그늘에 엎드리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조심성 있게 모가지를 뻗는다.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곤/ 머리를 약간 옆으로 갸웃거린다. 마침내 머리는 어느 한 자/ 리에서 가만히 머문다. 우리가 무엇에 귀 기울일 때의 자세다./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것일까,)/ 이윽고 그의 모가지는 차츰차츰 위로 움직인다. 그의 모가지가/ 거의 수직이 되었을 때, 그때 나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있는 대로 뻗은 제 모가지를 뒤틀며 입을 벌리고, 그는 하늘을/ 향하여 무수히 도래질을 한다. 그동안 그의 전반신은/ 무서운 저력으로 공중에 완전히 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울음이 아닐까,)/ 다음 순간, 그는 모가지를 소로시 움츠리고, 땅바닥에 다시 죽은/ 듯이 엎드렸다.//

너와 나 / 김춘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저자에게 / 김춘수

중노中老의 한 열쇠장수. 그는 도수 높은 안경을 코끝에 슬쩍 얹어놓고 안경알 너머로 뭔가를 응시하고 있다. 입에는 긴 빨부리를 물었다. 빨부리 끝에는 다 탄 꽁초가 물려져 있다. 담배가 타고 있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빨부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무의식 중의 어떤 조화인 듯하다. 그는 지금 자기가 빨부리를 물고 있는지 안 물고 있는지도 자각 못하고 있으리라. 앞가슴에서부터 아랫배까지 늘어찬 형형색색의 열쇠들은 그와는 아랑곳없다는 표정들이다. 누가 그에게 지금 열쇠를 사겠다고 해도 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열쇠장수인 것을 잊고 있을는지도 모르는 그에게 열쇠가 무슨 뜻을 가진다고 할까.//

모른다고 한다 / 김춘수

산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속잎 파릇파릇 돋아나는 날/ 모른다고 한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내가 이처럼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산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강우 / 김춘수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왜 갑자기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노새를 타고 / 김춘수

기러기는 울지 마,/ 기러기는 날면서 끼루룩 울지 마,/ 바람은 죽어서 마을을 하나 넘고 둘 넘어/ 가지 마, 멀리 멀리 가지 마,/ 왜 이미 옛날에 그런 말을 했을까./ 도요새는 울지 마,/ 달맞이꽃은 여름 밤에만 피지 마,/ 언뜻언뜻 살아나는 풀무의 불꽃,/ 풀무의 파란 불꽃,//

밤의 시(詩) 김춘수

왜 저것들은 소리가 없는가 집이며 나무며 산(山)이며 바다며 왜 저것들은 죄(罪)지은 듯 소리가 없는가 바람이 죽고 물소리가 가고 별이 못 박힌 뒤에는 나뿐이다 어디를 봐도 광대무변한 이 천지간에 숨쉬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목메인 둣 누를 불러볼 수도 없다 부르면 눈물이 작은 호수(湖水)만큼 쏟아질 것만 같다 ―이 시간(時間) 집과 나무와 산(山)과 바다와 나는 왜 이렇게도 약(弱)하고 가난한가 밤이여 나보다도 외로운 눈을 가진 밤이여//

숲에서 / 김춘수

이리로 오너라 단둘이 먼 산울림을 들어보자 추우면 나무 꺾어 이글대는/ 가슴에 불을 붙여주마 산을 뛰고 산 뛰고 저마다 가슴에 불꽃이 뛰면/ 산꿩이고 할미 새고 소스라져 달아난다/ 이리와 배암떼는 흙과 바위 틈에 굴을 파고 숨는다 이리로 오너라 비가/ 오면 비 맞고 바람불면 바람을 마시고 천둥이며 번갯불 사납게 흐린 날엔/ 밀빛 젖가슴 호탕스리 두드려보자/ 아득히 가버린 萬年! 머루먹고 살았단다 다래랑 먹고 견뎠단다./ 짓푸른 바닷내 치밀어들고 한 가닥 내다보는/ 보오얀 하늘 ......이리로 오너라 머루 같은 눈알니가 보고 싶기도 하다/ 단 둘이 먼 산울림을 들어보자 추우면 나무 꺾어 이글대는 가슴에 불을/ 붙여주마//

홍 방울새 / 김춘수

널 날려보내고 누가/ 울고 있다/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고/ 운다는 말의 울타리 안에서/ 울고 있다/ 널 날려보내고 울고 있는/ 저 하늘, 어쩌나/ 제 혼자 저렇게도 높은,//

서풍부 (西風賦) / 김춘수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 라는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 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 냄새를 널어 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 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 가 그런 얼굴을 하고......//

* 제12회 세일 한국가곡콩쿠르 작곡부문 2위 이지현 : 김춘수의 시, 서풍부

갈대 섰는 풍경 / 김춘수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산보(散步)길 / 김춘수

어떤 늙은이가 내 뒤를 바짝 달라 붙는다. 돌아보니 조막만한 다 으그러진/ 내 그림자다. 늦여름 지는 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

소년 / 김춘수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은 졸고 있었다.)// 열린 책장 위를/ 구름이 지나고 자꾸 지나가곤 하였다.// 바람이 일다 사라지고/ 다시 일곤 하였다.//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강설降雪 / 김춘수

역사는 비껴 서지 않는다./ 절대로, 그러나/ 눈이 저만치 찢어지고 턱이 두툼한/ (그 왜 있잖나?)/ 그는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오는 거다./ 그는,/ 기다림이 겨울에도 망개알을 익게 하고/ 익은 망개알을 땅에 떨어뜨린다./ 또 한 번 일러주랴./ 역사는 비껴서지 않는다./ 절대로, 땅에 떨어진/ 망개알을 겨울에도 썩게 한다./ 썩게 하여 엄마가 아기를 낳듯 그렇게/ 땅을 우비고 땅을 우비게 한다./ 그는 온다고 지금도 오고 있다고,/ 오지 않는 것이 오고 있는 거라고,/ 바라보면 멀리 통영/ 내 생가가 눈을 맞고 있다. 내 눈에/ 참 오랜만에 보인다./ 기왓장 우는 소리.//

마음의 태양 / 김춘수

꽃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라// 가시밭길을 넘어 그윽히 웃는 한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나라의 원광(圓光)은 떠오르노라// 푸른하늘로 푸른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 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라//

품을 줄이게 / 김춘수

뻔한 소리는 하지 말게/ 차라리 우물 보고 숭늉 달라고 하게./ 뭉개고 으깨고 짓이기는 그런/ 떡치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 두게./ 훌쩍 뛰어 넘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딱 떼게./ 한여름 대낮의 산그늘처럼/ 품을 줄이게/ 시는 침묵으로 가는 울림이요/ 그 자국이니까.//

눈물 / 김춘수

男子와 女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 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나의 하나님 /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제22번 비가(悲歌) / 김춘수

지금 꼭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고 싶은데 너는/ 내 곁에 없다./ 사랑은 동아줄을 타고 너를 찾아/ 하늘로 간다./ 하늘 위에는 가도 가도 하늘이 있고/ 억만 개의 별이 있고/ 너는 없다. 네 그림자도 없고/ 발자국도 없다./ 이제야 알겠구나/ 그것이 사랑인 것을,//

제26번 비가(悲歌) / 김춘수

나는 바다가 될 수 있을까,/ 나는 하늘이 될 수 있을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마음이 어디에 있나,/ 내 작은 가슴 속에/ 내 작은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작은 가슴 속의/ 그 작은 마음이 어찌/ 그 큰 바다를 다 담을 수가 있을까,/ 그 큰 하늘이 다 담길까,/ 그것도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작은 가슴 속의 내 작은 마음에는/ 어떤 날치가/ 어떤 고지새가 살게 될까,/ 궁금하구나, 정말/ 궁금하구나,//

제32번 비가(悲歌) / 김춘수

송사리떼가/ 개천을 누비고 있다/ 송사리는 떼단위로/ 몰려갔다 몰려왔다 한다./ 잠도 떼단위로 자고 떼단위로 잠을 깬다/ 송사리에게는 我라는 것이 없다./ 너무 작아/ 있다 해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송사리는 혼자서 태어나고 혼자서 죽는다./ 송사리떼가/ 개천을 누비고 있다./ 개천에 자기 그림자를 만든다./ 자기 그림자를 만들어놓고/ 송사리떼는 어디로 갔나/ 보자기만 한 그림자 하나가 이리저리/ 개천을 누비고 있다//

물망초 / 김춘수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 하늘의 별일까요 ?//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 나를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수련별곡睡蓮別曲 / 김춘수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 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 땐가 다시 한 번/ 낙화落花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 번 죽어야 한다면/ 죽음이 그대 눈시울을/ 검은 손바닥으로 꼭 한 번/ 남김없이 덮어야 한다면/ 살아서 그대 이고 받든/ 가도가도 끝이 없던 그대 이승의 하늘/ 그 떫디떫던 눈웃음을 누가 가지리오?//

 

바위 / 김춘수

바위는 몹시 심심하였다. 어느 날,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바위는/ 제 손으로 제 몸에 가느다란 금을 한 가닥 그어 보았다. 오, 얼마나/ 몸 저리는 一瞬이었을까, 바위는 열심히 제 몸에 무늬를 수놓게 되/ 었던 것이다. 점점점 번져 가는 희열의 물살 위에 바위는 둥둥 떴다./ 마침내 바위는 제 몸에 무늬를 수놓고 있는 것이 제 자신인 것을 까/ 마득히 잊어 버렸다./ 바위는 모르고 있지만, 그때부터다. 내가 그의 얼굴에 고요한 미소를/ 보게 된 것은...... <바위야 왜 너는 움직이지 않니,> 이렇게 물어 보아/ 도 이제 바위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네가 가던 그날은 / 김춘수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중섭 2 / 김춘수

아내는 두 번이나/ 마굿간에서 아이를 낳고/ 지금 아내의 모발은 구름 위에 있다/. 봄은 가고/ 바람은 평양에서도 동경에서도/ 불어 오지 않는다./ 바람은 울면서 지금/ 서귀포의 남쪽을 불고 있다./ 서귀포의 남쪽/ 아내가 두고 간 바다,/ 게 한마리 눈물 흘리며,/ 마굿간에서 난/ 두 아이를 달래고 있다.//

능금 / 김춘수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분수 / 김춘수

발돋음하는 발돋음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鮮然)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타령조(3) / 김춘수

지귀(志鬼)야,/ 네 살과 피는/ 호젓이 혼자서 타지 못할까,/ 환장한 네가 종로를 가면/ 남녀노소의 구둣발에 차일 뿐이다./ 금팔찌 한 개를 벗어주고/ 선덕여왕께서 떠나신 뒤에/ 지귀야,/ 네 살과 피는 삭발을 하고/ 호젓이 혼자서 타지 못할까,/ 환장한 네가 종로를 가면/ 남녀노소의 구둣발에 차일 뿐이다./ 때마침 내리는/ 밤과 비에 젖을 뿐이다./ -오한이 들고 신열이 날 것이다./ 지귀야,//

S를 위하여 / 김춘수

너는 죽지 않는다.// 너는 살아 있다./ 죽어서도 너는// 시인의 아내,// 너는 죽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너는// 그의 시 속에 있다./ 너의 죽음에 얹혀서// 그도 죽지 않는다./ 시는 시인이 아니지만// 죽은 너는// 시가 되어 돌아온다./ 네 죽음에 얹혀서 간혹// 시인도 시가 되었으면 하지만,// 잊지 말라,// 언제까지나 너는 한 시인의// 시 속에 있다./ 지워지지 않는 그// 메아리처럼,//

옹두리와 뿌다귀 / 김춘수

옹두리란 말이 있다./ 몹시 동글다./ 나무에 가서 곧잘 붙는다./ 나무에 혹/ 목류라고 한다./ 뿌다귀란 말이 있다./ 몹시 삐딱하다./ 아무데도 가서 붙지를 못한다./ 삐딱한 것은 뾰족하다. 언젠가 뜻아니/ 자네 목구멍에 걸린 그 생선가시.//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시인
경남 통영에서 출생하여 통영공립보통학교, 경기공립중학교, 일본으로 유학했다. 평생 전교 3등 이내를 넘어가 본 적이 없는 수재로, 1945년 통영문화협회 창립과 함께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통영중학교 교사로 부임한 후 마산중, 해인대학, 경북대, 영남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81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1947년 첫시집 『구름과 장미』이후, 『인인』『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타령조 기타』『처용』『김춘수시선』『꽃의 소묘』『남천』『비에 젖은 달』『처용 이후』『처용 단장』『서서 잠드는 숲』등 25권을 출간했으며 다수의 시론집을 내놓기도 했다. 시인은 대학교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했으며,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이 1928년 권재순 여사와 결혼식을 올릴 때 김춘수 시인이 화동으로 참석했다는 건 또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이다. 두 분의 나이가 14년 차인데 김춘수 시인이 마침 권재순 여사가 원장으로 있던 유치원의 원생이었음이 그 까닭이겠다.
한국시인협회상, 경상남도 문화상, 대한민국문학상, 문화훈장 등을 수상, 대한민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말년에 강동구 고덕동에서 정거(靜居)하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꽃의 시인' 말고도 존재의 본질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시를 주로 써 '인식의 시인'으로 불린다. 통영에는 그의 생가에 ‘대여 김춘수선생 유품전시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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