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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고영민 시인

부흐고비 2021. 4. 26. 00:06

                                                                                      앵두 /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흰 토끼 일곱 마리는 / 고영민

청보리밭을 보면/ 나는 왜 흰 토끼 일곱 마리가 떠오를까// 우리 밭의 보리 싹을/ 누가 뭉텅뭉텅 낫으로 베어가고// 아버지가 그 집을 찾아가/ 어린 토끼를 한 마리씩 우리에서 꺼내/ 귀때기를 잡고/ 마당 한가운데 힘껏/ 내동댕이치는데// 토끼가 먹었으니 토끼를 죽여야지!// 어린 토끼는 땅을 맞고/ 바르르 떨다가 죽고/ 죽고/ 죽고/ 또 죽고// 어스름 녘 일곱 마리 토끼가 죽어 있는/ 그 집 마당/ 그 집 식구들//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끌며 큰 소리로/ 집에 가자!/ 토끼가 먹었으니 토끼를 죽인겨!// 싹둑 베어진 청보리밭을 지날 때쯤/ 뒤돌아보았던/ 그 집 마당의 작고 어린/ 흰 토끼 일곱 마리는//

봄의 정치 / 고영민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 얼음이 풀린다/ 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 떨지도 않고 걷는다/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 따뜻한 눈송이들/ 지난겨울의 노인들은 살아남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단단히 감고 있던 꽃눈을/ 조금씩 떠 보는 나무들의 눈시울/ 찬 시냇물에 거듭 입을 맞추는 고라니/ 나의 딸들은/ 새 학기를 맞았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흰죽 / 고영민

무엇을 먹는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때는/ 비싼 정찬을 먹을 때가 아니라/ 그냥 흰죽 한 그릇을 먹을 때// 말갛게 밥물이 퍼진/ 간장 한 종지를 곁들여 내온/ 흰죽 한 그릇// 늙은 어머니가 흰쌀을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이는/ 가스레인지 앞에 오래 서서/ 조금씩 조금씩/ 물을 부어 저어주고/ 다시 끓어오르면 물을 부어주는,/ 좀더 퍼지게 할까/ 쌀알이 투명해졌으니 이제 그만 불을 끌까/ 오직 그런 생각만 하면서/ 죽만 내려다보며/ 죽만 생각하며 끓인// 호로록,/ 숟가락 끝으로 간장을 떠 죽 위에 쓰윽,/ 그림을 그리며 먹는//

찔레나무 / 고영민

한낮의 대중탕,/ 중년 사내가 물바가지로/ 중요 부위를 덮어놓고 잠들어 있다/ 저 엎어놓은 물바가지 속에는/ 새가 한 마리 있다/ 뱀이 한 마리 있다/ 급히 볼일을 보고/ 덮어놓은 똥이 한 무더기 있다/ 한 소절의 노래와한 다발의 꽃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찔레나무 가지 위란 말인가//

계란 한판 / 고영민

대낮, 골방에 쳐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 …(짧은 침묵)/ 계란 한 판 …(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 …(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인이 박혀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공손한 손 /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손등 / 고영민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어떤 미동으로 꽃은 피었느니/ 곡진하게/ 피었다 졌느니/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마음이 불러/ 둥근 알뿌리를 인 채/ 듣는/ 저녁 빗소리//

너와 동침을 한다 / 고영민

시외버스를 탄다/ 운주사행 표를 들고 자리를 찾으니 한 여자/ 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슬며시 다리를 비킨다/ 창문은 계속 풍경만을 버릴 뿐/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순간 여자가 불상처럼 잠들어/ 나도 그녀의 이불 속에 입정한다/ 아, 너였구나/ 문득 내 어깨에 얹혀지는 머리/ 여자는 내 어깨 위 열반인 양 들고/ 삼천의 인연이었을 이 옷깃의 여자/ 등받이를 적당히 눕혀/ 외간 남자와 나란히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이불은 계속 울음을 틀어막지만/ 한 계집아이가 붉은 이불 속에서 기어나오고/ 미륵의 사내아이가 기어나오고/ 기어나오고,/ 날은 저물어 버스는 오체투지로/ 들녘을 넘고 고개 능선을 지나/ 마을마다 돌 하나를 올려놓는다/ 그녀와 하룻밤 천불천탑을 쌓고/ 와불을 일으켜 세울 즈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어쩌나, 첫닭이 운다/ 그러나 아, 진정 용화세계가 너였구나/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시 추스르며/ 와불은 스스로 일어난다/ 성급히 차문 밖으로 나오니,/ 일주문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 천천히 불상 속으로 들어가 천년을/ 그 자리에 누워 있다//

적막 / 고영민

매년 오던 꽃이 올해는 오지 않는다/ 꽃 없는 군자란의/ 봄이란// 잎새 사이를 내려다본다/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어찌 봄이 꽃으로만 오랴마는/ 꽃을 놓친/ 너의 마음이란// 봄 오는 일이/ 결국은 꽃 한송이 머리에 이고 와/ 한 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임을// 뿌리로부터/ 흙과 물로부터 오다가/ 끝내 발길을 돌려/ 왔던 길 되짚어갔을/ 꽃의 긴 그림자//

꽃눈이 번져 / 고영민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누군가 이 시간, 눈 빠알갛게/ 나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나를 흔들어 깨운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눈 부비고 일어나 차분히 옷 챙겨 입고/ 나도 잠깐, 어제의 그대에게 멀리 다니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다녀올 동안의 설렘으로 잠 못 이루고/ 소식을 가져올 나를 위해/ 돌을 괸 채/ 뭉툭한 내가 나를 한없이 기다려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순간, 비 쏟아지는 소리/ 깜박 잠이 들 때면/ 밤은 더 어둡고 깊어져/ 당신이 그제서야/ 무른 나를 순순히 놓아줬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도 지극한 잠속에 고이어 자박자박 숨어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에게 다녀간 내가/ 사뭇 간소하게 한 소식을 들고 와/ 눈 씻고 가만히 몸을 누이는/ 이 어두워/ 환한 밤에는//

깻대를 베는 시간 / 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 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 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 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간 것들을 옮겨 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 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즐거운 소음 / 고영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숨의 기원 / 고영민

1./ 이불 밖으로 나온 딸아이의 다리를 슬며시 이불 속으로 넣어줍니다. 아이는 슬며시 눈을 떠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잠은 다시 딸아이의 눈을 감기고 가슴을 부풀려 숨을 고르고 세월을 만듭니다 숨소리는 영혼이 나갔다가 갈 곳이 없어 다시 제 집을 찾아오는 아득한 소리입니다 날숨은 어제 같고 들숨은 오늘 같습니다//

2./ 팔을 뻗어 딸아이가 제 어미의 옷섶에 손을 찔러 넣습니다 아내가 잠결에 슬몃 눈을 뜨고는 벽에 기댄 채 무릎을 안고 있는 나에게 왜, 안자고 있어? 라고 물어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묻는 것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가만히 그러쥘 때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을까요 무언가를 가만히 쥐고 싶어 부러 빈손을 한번 움켜쥐는 밤입니다 나는 등으로 전해오는 냉기와 이불 밖으로 잠깐 삐져나왔던 딸아이의 한쪽 다리와 작은 손에 쥐어진 아내의 따듯한 유방을 생각합니다// 딸아이도, 아내도 숨이 깊어집니다 일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합니다 아이의 숨은 짧고 아내의 숨은 더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발품입니다// 이제 앞강으로 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이 차갑게 알을 슬어놓고는 한 生을 전해주려 떠내려 올 시간입니다 방안은 온통 숨소리뿐입니다 나는 딸과 아내의 숨소리 사이로, 내 숨소리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어디를 갔다 오는 곡절입니까,/ 기척입니까//

과수원 / 고영민

내가 하는 일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하루 종일 약통을 저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호스를 당겨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1만평 과수원의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빠짐없이 농약을 쳤는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햇빛에 앉아 막대기로 커다란 농약 통을 젓는 것이 여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 긴 막대기로 약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발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인순의 이름도 썼다가 지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나절 사과나무에 약을 친 아버지가 물큰 농약냄새를 풍기며 내게 걸어와 마스크를 벗으며 하시는 말이, 너 하루 종일 약통에다 뭐라 썼는지 내 다 안다! 라며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웃으시는데//
내가 저은 약통의 농약이 어머니가 당기던 길고 긴 호스를 타고 흘러 아버지가 들고 있는 분무기 노즐을 빠져나올 때 ~발씨발씨발, ~지보지보지 이렇게 나왔던 걸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고 나는 국광처럼, 홍옥처럼, 아오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

갈대 / 고영민

어머니가 개밥을 들고 나오면/ 마당의 개들이 일제히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살랑살랑살랑// 고개를 처박고/ 텁텁텁, 다투어 밥을 먹는 짐승의 소리가 마른 뿌리 쪽에서 들렸다/ 빈 그릇을 핥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마른 들판 한가운데 서서/ 얼마나 허기졌다는 것인가, 나는// 저 한가득 피어있는 흰 꼬리들은/ 뚝뚝, 침을 흘리며/ 무에 반가워/ 아무 든 것 없는 나에게 꼬리를 흔드는가/ 앞가슴을 떠밀며, 펄쩍/ 달려드는가//

머루 / 고영민

새끼를 두 번 지우고 유두가 검어졌대지/ 유두가 검은 년은 남자 복이 없다는데,/ 봐라, 네 년도 나처럼 남자 복은 글렀네// 넝쿨에 기대 앉아/ 눈 감고 생각하건대/ 한때 네 눈(目)이 생기던 그 곳을/ 머루라 하고,/ 아예, 캄캄한 네 이름을 머루라 하고// 너도 나처럼/ 유두가 검고,/ 머루는 익고,/ 너는 새끼를 두 번 지우고/ 유두가 검어졌대지//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이 저녁엔 사랑도 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을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을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 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한 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 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 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주말연속극 / 고영민

팔순의 어머니 아버지 두 분만 사시는 고향집에 내려가니 그동안 그럭저럭 나오던 TV가 칙칙거리며 나오지 않는다. 늙은 어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고 늙은 아버지는 대문간을 지키고 젊은 나는 세워놓은 안테나를 동서남북 돌려보다 신통치 않아 아예, 통째로 뽑아들고 감나무 옆, 뒤란 시누대밭, 장독대 뒤 곁으로 왔다갔다한다.//
내가 대문간의 늙은 아버지한테 잘 나와요? 라고 물으면 늙은 아버지는 대문 앞에 서 있다가 할멈, 잘 나와? 라고 묻고 늙은 어머니가 아까보담 더 안 나와요, 하면 늙은 아버지가 다시 말을 받아 아까보담 더 안 나온다, 하고 젊은 나한테 외친다.//
나는 또 자리를 옮겨 잘 나와요? 하고 묻고 늙은 아버지는 늙은 어머니에게 똑같이 재우쳐 묻고 늙은 어머니는 늙은 아버지에게 대답하고 늙은 아버지는 젊은 나에게 대답한다.//
젊은 나는 반나절 팥죽땀을 쏟으며 그 기다란 안테나를 들고 뒤뚱거린다. 세 사람이 연신 묻고, 묻고 대답하고, 대답한다. 늙은 아버지가 대문간을 지키고 있기가 따분한지 담배 한 개비를 피워물며 쭈그리고 앉아 대강 나오면 그냥 저냥 보제, 하던 차 굴뚝 옆에 자리를 잡아 안테나를 돌리니 방안에서 아이구야 겁나게 잘 나온다, 라는 늙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늙은 아버지를 통하지 않더라도 내 귀까지 선명하다. 돌아가지 않게 단단히 비끄러맨다. 방 안에 들어와 채널을 돌려보니 7번, 9번, 11번 다 화면이 선명하다.//
저녁 늦게 서울에 올라와 마누라, 자식새끼랑 주말연속극을 본다. 늙은 아버지도 늙은 어머니도 시골집에서 주말연속극을 본다. 참, 오랜만에 늙은 아버지, 늙은 어머니, 젊은 자식놈이 안테나가 맞아 저무는 주말 저녁, 함께 연속극을 본다. 가슴 뭉클하고 선명한 주말연속극.//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 고영민

그동안 저 가지를 지그시 물고 있던 것은/ 모과의 입이었을까//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나무는 저 노랗고 둥근 입속에 무엇을 집어넣었을까/ 부드러운 혀였을까/ 입김이었을까// 가진 것 없이 매달린 내가/ 너에게 오래오래 가닿는 길은/ 축축하고 무른 땅에 떨어져 박히는 것/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거부해도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다시 혀를 밀어넣듯//

해감 / 고영민

민물에 담가놓은 모시조개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몇 번을 소리쳐 부르자 당신은 간신히 한쪽 눈을 떠보였다 눈꺼풀 사이 짠 물빛이 돌았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나를 제 몸속에 새겨 넣겠다는 듯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르렁, 그르렁 입가로 한 움큼의 모래가 토해졌다. 간조선(干潮線)을 지나 들어가는 당신의 흐린 물빛을 따라 축축한 한 생애가 패각의 안쪽에 헐겁게 담겨져 있었다 짠물을 걸러내며 당신은 물무늬 진 사구를 온몸으로 기고, 몸을 잊으려 한쪽 눈을 마저 닫자 날이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울컥, 울컥, 검은 모래가 걷잡을 수 없이 토해졌다 나는 당신의 손을 움켜쥔 채 더 깊은 물밑까지 따라 들어갔다 여윈 갈빗대에서 해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제 오지 마라! 따라오지 말라고 이놈아! 라는 당신의 불호령을 들었다 두꺼운 껍질 밖으로 나는 움찔, 한순간 떠밀려 나왔다 패각을 움켜쥔 채 꼭 사나흘만 더 묵고 싶다던 당신의 늙은 아내가 밀려나왔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제 몸 밖으로 검은 해변을 푸륵푸륵, 싸놓았다 시끄럽던 한 생애가 말갛게 비워지고 있었다//
* 海감 : 바닷물 따위에서 흙과 유기물이 썩어 생기는 냄새나는 찌꺼기

용접 / 고영민

당신과 나는 외따로 떨어져 있다/ 맞대는 당신의 뼈와 나의 뼈를 붙일까/ 성기와 성기를 붙일까/ 그러면 하나가 될까/ 너의 살을 녹여 나에게 붙일까/ 나의 살을 녹여 너에게 붙일까/ 얼굴에 철가면을 쓰고 몰래 남의 살을 훔쳐다가/ 푸른 토치불꽃을 치어다보며/ 얼른 당신과 나를 붙일까/ 신음소리를 붙일까/ 하하하, 웃음소리를 붙일까/ 아이 하나를 쑹덩 낳아/ 잠든 사이 그 아이를 녹여 이음새에 붙일까/ 살만큼 사신 팔순의 노모를 홀려/ 두 눈 딱 감고 이음새에 붙일까/ 冬至와 夏至의 긴 밤낮을 붙일까/ 그 하늘을 돛단배처럼 날던/ 반딧불과 하루살이와 잠자리와 비와 눈/ 해와 달을 붙일까, 우뢰를 붙일까/ 불시에 찾아오던 침묵,/ 초조와 불안의 두꺼운 상판을 붙일까/ 그러면 얼싸안고 하나가 될까/ 이 튀는 불똥에 눈은 까맣게 죽고/ 나는 끝내 무엇을 녹일까/ 당신과 나, 영영 붙을까//

푸른 고치 / 고영민

시골집에서 박스에 찰옥수수를 담아/ 소포로 보내왔다/ 포장이 단정하다/ 옥수수를 내려다보니/ 옥수수는 단단히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다/ 몇 겹 포장지에 겹 싸여 있다/ 포장지를 벗기니/ 그 안, 다칠까/ 또, 실뭉치가 가득하다/ 자신이 얼마나 귀하여/ 옥수수는 이토록 스스로를/ 꼭 감싸 안았을까/ 나는 나를/ 이만큼 사랑하지 못했다//

허밍, 허밍 / 고영민

해질녘 저 밭은 무엇인가/ 해질녘 저 흐릿한 논길은/ 해질녘 밭둑을 돌아 학교에서 돌아오는 거미 같은 저 애들은 무엇인가// 긴 수숫대/ 매양 슬픈 뜸부기 울음// 해질녘 통통통 경운기의 짐칸에 실려 가는/ 저 텅 빈 아낙들은 무엇인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오는 저 굽은 불빛은 무엇인가// 해질녘 주섬주섬 젖은 수저를 놓는/ 손(手)/ 수레국화 옆에서 흙 묻은 발목을 문지르는 저 고단함은/ 해질녘 내 이름 석 자를 적어온/ 이 느닷없는 통곡은 무엇인가// 해질녘, 해질녘엔/ 세상 어떤 것도 대답이 없고/ 죽은 사람은 모두 나의 남편이고 아내이고/ 해질녘엔 그저 멀리 들려오는/ 웃는 소리, 우는 소리//

식물 / 고영민

코에 호스를 꽂은 채 누워 있는 사내는 자신을 반쯤 화분에 묻어놓았다 자꾸 잔뿌리가 돋는다 노모는 안타까운 듯 사내의 몸을 굴린다 구근처럼 누워 있는 사내는 왜 식물을 선택했을까 코에 연결된 긴 물관으로 음식물이 들어간다 이 봄이 지나면 저를 그냥 깊이 묻어주세요 사내는 소리쳤으나 노모는 알아듣지 못한다 뉴스를 보니 어떤 씨앗이 700년 만에 깨어났다는구나 노모는 혼자 중얼거리며 길어진 사내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준다 전기면도기로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레 흔들어본다 몇날며칠 병실 안을 넘겨다보던 목련이 진다,// 멀리 천변의 벚꽃도 진다 올봄 사내의 몸속으론 어떤 꽃이 와서 피었다 갔을까 병실 안으로 들어온 봄볕에 눈꺼풀이 무거워진 노모가 침상에 기댄 채 700년 된 씨앗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다//

명랑 / 고영민

나는 내가 좋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좋습니까// 낮에 당신은 당신에게 뭐라 말합니까/ 밤에 당신은 당신에게 뭐라 말합니까// 오늘 당신에게 내 생각이 잠깐/ 다녀갔습니까/ 오늘 나에게 당신 생각이/ 잠깐 다녀갔습니까// 북쪽보다 더 북쪽/ 남쪽보다 더 남쪽인 당신은/ 가볍게 오고 싶지 않습니다/ 가볍게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는 내가 좋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좋습니까//

사슴공원에서 / 고영민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어디까지가 여름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을일까/ 누가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놓았다/ 오늘 나는 아주 먼 곳에 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은/ 침엽수처럼 무표정하다/ 젊은 어느 날의 책 속처럼 지금도/ 사슴공원 어딘가에선/ 사랑이 생기고, 비가 내리고/ 멀리 빈 들판엔 철새가 돌아온다/ 누가 구름을 사라지게 하고/ 비를 멈추게 할 수 있나/ 투명 비닐봉지에 금붕어를 담아 들고/ 한 소년이 급히 어딘가로 달려간다/ 공원에 잇닿아 있는 장례식장 마당에서/ 어느 가족이 늦은 상복을 갈아입고 있다/ 사슴 울음소리[鹿鳴*]를 들으며/ 나도 서둘러 당신에게 가야 한다/ 사랑이 식기 전에/ 밥이 식기 전에//

일가(一家) / 고영민

아침나절 물가로 나갔던 거위들이/ 줄지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지/ 나는 조용히 그걸 바라보고 있지/ 어김없이 울타리를 돌아/ 풀이 우거진 돌배나무 곁을 지나/ 말뚝을 지나/ 저녁의 어두운 마당을 지나/ 왔던 길 그대로/ 인색하게, 아주 인색하게/ 바깥에서 안으로, 안으로/ 어디에도 한눈팔지 않고/ 고스란히/ 엉덩이를 흔들며/ 한 발 한 발 거위 속으로 들어가는/ 일가(一家)//

사랑 / 고영민

늦은 저녁, 텅 빈 학교 운동장에 나가/ 철봉에 매달려본다// 너는 너를/ 있는 힘껏 당겨본 적이 있는가/ 끌려오지 않는 너를 잡고/ 스스로의 힘으로/ 끌려가본 적이 있는가// 당기면 당길수록 너는 가만히 있고/ 오늘도 힘이 부쳐/ 내가 너에게/ 부들부들 떨면서 가는 길// 허공 중 디딜 계단도 없이/ 너에게 매달려 목을 걸고/ 핏발 선 너의 너머 힘들게 한번/ 넘겨다본 적이 있는가//

중년(中年) / 고영민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에서/ 아버지가 보였다// 중년이라고/ 중얼거려보았다// 어제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옛 친구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친구의 아버지, 어머니 들이 고스란히 불려나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내가 아닌,/ 아버지를 부축했다/ 잠결엔 아버지가 내 아내의 몸을 더듬었다// 죽은 아버지가 내 집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신다//


 

고영민 시인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학교 문창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악어> <공손한 손> <사슴공원에서> <구구> <봄의 정치>

박재삼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지리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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