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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푸리가 눕는다
기도(祈禱) / 김수영
부제: 사․일구(四․一九)순국학도(殉國學徒)위령제(慰靈祭)에 붙이는 노래
시(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戀人)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革命)의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大自然)의 법칙(法則)을 본받아/ 어리석을만치 소박(素朴)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革命)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삵괭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쟝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海底)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殺人者)와 강도(强盜)가 남아있는 사회(社會)/ 이 심연(深淵)이나 사막(砂漠)이나 산악(山岳)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社會)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삵괭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악어가 되고 표범이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여우가 되고 수리가 되고 빈대가 되더라도/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 이번에는/ 우리가 혁명(革命)이 성취하는 마지막 날에는/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나의 죄(罪)있는 몸의 억천만 개의 털구멍에/ 죄(罪)라는 죄(罪)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는 않으려니// 시(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戀人)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이른 아침 / 김수영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統覺)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비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리라/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으리라//
채소밭 가에서 / 김수영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강바람은 소리도 고웁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다리아가 움직이지 않게/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무성하는 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돌아오는 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
파밭 가에서 / 김수영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石鏡)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사랑 / 김수영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刹那)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가다오 나가다오 / 김수영
이유는 없다--- /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 같기도 한 것이니//
이유는 없다---/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과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 ‘4월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잿님이 할아버지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린 다음에/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일년 열두 달 쉬는 법이 없는/ 걸찍한 강변밭 같기도 할 것이니//
지금 참외와 수박을/ 지나치게 풍년이 들어/ 오이, 호박의 손자며느리 값도 안 되게/ 헐값으로 넘겨버려 울화가 치받쳐서/ 고요해진 명수 할버이의/ 잿물거리는 눈이/ 비둘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동안에/ 나쁜 말은 안하니/ 가다오 가다오//
지금 명수할아버이가 멍석 위에 넘어져 자고 있는 동안에/ 가다오 가다오/ 명수 할버이/ 잿님이 할아버지/ 경복이 할아버지/ 두붓집 할아버지는/ 너희들이 피지 섬을 침략했을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들은 아직 젖도 떨어지기 전이었다니까/ 명수 할버이가 불쌍하지 않으냐/ 잿님이 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두붓집 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가다오 가다오//
선잠이 들어서/ 그가 모르는 동안에/ 조용히 가다오 나가다오/ 서푼어치 값도 안되는 미·소인은/ 초콜렛, 커피, 페치코트, 군복, 수류탄/ 따발총…을 가지고/ 적막이 오듯이/ 적막이 오듯이/ 소리없이 가다오 나가다오/ 다녀오는 사람처럼 아주 가다오!//
여편네의 방에 와서-신귀거래1 / 김수영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이렇듯 소년처럼 되었다/ 흥분해도 소년/ 계산해도 소년/ 애무해도 소년/ 어린 놈 너야/ 네가 성을 내지 않게 해주마/ 네가 무어라 보채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 성을 내지 않는 소년// 바다의 물결 작년의 나무의 체취/ 그래 우리 이 성하(盛夏)에/ 온갖 나무의 추억과/ 물의 체취라도/ 다해서/ 어린 놈 너야/ 죽음이 오더라도/ 이제 성을 내지 않는 법을 배워주마//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 나는 점점 어린애/ 태양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죽음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언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애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사유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간단(間斷)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간단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점(點)의 어린애/ 베개의 어린애/ 고민의 어린애//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 너를 더 사랑하고/ 오히려 너를 더 사랑하고/ 너는 내 눈을 알고/ 어린 놈도 내 눈을 안다//
구름의 파수병 / 김수영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해진 물체만들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 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 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 늦은 거미같은 존재 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 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가/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 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국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격문(檄文)-신귀거래2 / 김수영
마지막의 몸부림도/ 마지막의 양복(洋服)도/ 마지막의 신경질(神經質)도/ 마지막의 다방(茶房)도/ 기나긴 골목길의 순례(巡禮)도/ ‘어깨’도/ 허세(虛勢)도/ 방대한/ 방대한/ 방대한/ 모조품(模造品)도/ 막대한/ 막대한/ 막대한/ 막대한/ 모방(模倣)도/ 아아 그리고 저 도봉산(道峰山)보다도/ 더 큰 증오(憎惡)도/ 굴욕(屈辱)도/ 계집애 종아리에만/ 눈이 가던 치기(稚氣)도/ 그밖의 무수한 잡동사니 잡념(雜念)까지도/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깨끗이 버리고/ 농부(農夫)의 몸차림으로 갈아입고/ 석경을 보니/ 땅이 편편하고/ 집이 편편하고/ 하늘이 편편하고/ 물이 편편하고/ 앉아도 편편하고/ 서도 편편하고/ 누워도 편편하고/ 도회(都會)와 시골이 편편하고/ 시골과 도회(都會)가 편편하고/ 신문(新聞)이 편편하고/ 시원하고/ 뻐쓰가 편편하고/ 시원하고/ 하수도(下水道)가 편편하고/ 시원하고/ 뽐프의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나온다고/ 어머니가 감탄하니 과연 시원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 시인(詩人)이 됐으니 시원하고/ 인제 정말/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 시원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 이건 진짜 시원하고/ 이 시원함은 진짜이고/ 자유(自由)다//
성性 /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는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의 순간이다 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여자 / 김수영
여자란 집중된 동물이다./ 그 이마의 힘줄같이 나에게 설움을 가르쳐준다/ 전란도 서러웠지만/ 포로수용소 안은 더 서러웠고/ 그 안의 여자들은 더 서러웠다./ 고난이 나를 집중시켰고/ 이런 집중이 여자의 선천적인 집중도와/ 기적적으로 마주치게 한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쟁에 축복을 드렸다.// 내가 지금 6학년 아이들의 과외공부집에서 만난/ 학부형회의 어떤 어머니에게 느끼는 여자의 감각/ 그 이마의 힘줄/ 그 힘줄의 집중도/ 이것은 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여자의 本性은 에고이스트/ 뱀과 같은 에고이스트/ 그러니까 뱀은 先天的인 捕虜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贖罪에 祝福을 드렸다.//
모르지? / 김수영
이태백이가 술을 마시고야 시작을 한 이유,/ 모르지?/ 구차한 문밖 선비가 벽장문 옆에다/ 카잘스, 그름, 쉬바이쩌, 에프스타인의 사진을 붙이고 있는 이유,/ 모르지?/ 우리집 식모가 여편네가 외출만 하면/ 나한테 자꾸 웃고만 있는 이유,/ 모르지?/ 함경도친구와 경상도친구가 외국인처럼 생각돼서/ 술집에서 반드시 표준어만 쓰는 이유,/ 모르지?/ 오월혁명 이전에는 백양을 피우다/ 그후부터는/ 아리랑을 피우고/ 와이샤쓰 윗호주머니에는 한사코 색수건을 꽂아뵈는 이유,/ 모르지?/ 아무리 더워도 베와이샤쓰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넣지 않는 이유,/ 모르지?/ 아무리 혼자 있어도 베와이샤쓰의 에리를/ 안쪽으로 집어넣지 않는 이유,/ 모르지?/ 술이 거나해서 아무리 졸려도/ 의젓한 포오즈는/ 의젓한 포오즈는 취하고 있는 이유,/ 모르지?/ 모르지?//
거대한 뿌리 /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 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는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역사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_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광야 / 김수영
이제 나는 광야에 드러누워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나를 발견하였다/ 시대의 지혜/ 너무나 많은 나침반이여/ 밤이 산등성이를 넘어 내리는 새벽이면/ 시인이 쏟고 죽을 오욕의 역사/ 그러나 오늘은 산보다도/ 그것은 나의 육체의 융기// 이제 나는 광야에 드러누워도/ 공동의 운명을 들을 수 있다/ 피로와 피로의 발언/ 시인이 황홀하는 시간보다도 더 맥없는 시간이 어디있느냐/ 도피하는 친구들/ 양심도 가지고 가라 휴식도-/ 우리들은 다 같이 산등성이를 내려가는 사람들/ 그러나 오늘은 산보다도/ 그것은 나의 육체의 융기// 광야에 와서 어떻게 드러누울 줄을 알고 있는/ 나는 너무나도 악착스러운 몽상가/ 조잡한 천지여/ 간디의 모방자여/ 여치의 나래 밑의 고단한 밤잠이여/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떻게 뒤떨어지느냐가 무서운 것’이라고 죽음의 잠꼬대여/ 그러나 오늘은 산보다도/ 그것은 나의 육체의 융기//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詩人)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自由)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사령(死靈) / 김수영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아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의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달나라의 장난 /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淫蕩)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삼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悠久)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 수용소의 제십사(第十四) 야전 병원(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悲鳴)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洞會)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 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65년의 새해 / 김수영
그때 너는 한살이었다/ 그때 너는 한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그때 너는 여섯살이었다/ 그때 너는 여섯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그때 너는 열여섯살이었다/ 그때 너는 열여섯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너의 의지는 싹트기 시작했다/ 너의 의지는/ 학교 안에서 배운 모든것이/ 학교 밖에서 본 모든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의지를 발표할 줄 알았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놀랐다// 그때 너는 열일곱살이었다/ 그때 너는 열일곱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너의 근육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너의 근육은/ 학교 밖에서 얻어맞은 모든것이/ 골목길에서 얻어맞은 모든 것이/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너의 어린 행동은/ 어린 상징을 면하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우리 키만큼 되었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놀랐다// 너는 이제 열아홉살이었다/ 너는 이제 열아홉살이었다/ 너는 여전히 기적이었다/ 너의 회의는 굳어가기 시작했다/ 너의 회의는/ 나라 안에서 당한 모든것이/ 나라 밖에서 당한 모든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포부는/ 불가능의 한계를 두드려보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우리 키보다도 더 커졌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놀랐다// 너는 이제 스무살이다/ 너는 이제 스무살이다/ 너는 여전히 기적일 것이다/ 너의 사랑은 익어가기 시작한다/ 너의 사랑은/ 38선 안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 38선 밖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 전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는 너의 힘을 다해서 답쌔버릴 것이다/ 너의 가난을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가난을/ 이 엄청난 어려움을 고통을/ 이 몸을 찍는 부자유를 부자유를 나날을....../ 너는 이제 우리의 고통보다도 더 커졌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놀란다// 아니 네가 우리를 보고 깜짝놀란다/ 네가 우리를 보고 깜짝놀란다/ 65년의 새얼굴을 보고/ 65년의 새해를 보고//
봄의 뜰안에 / 김수영
초봄의 뜰안에 들어오면/ 서편으로 난 欄干(난간)문 밖의 풍경은/ 모름지기/ 보이지 않고// 荒廢(황폐)한 강변을/ 靈魂(영혼)보다도 더 새로운 解氷(해빙)의 破片(파편)이/ 저멀리/ 흐른다// 寶石(보석)같은 아내와 아들은/ 화롯불을 피워가며 병아리를 기르고/ 짓이긴 파냄새가 술취한/ 내 이마에 神藥(신약)처럼 생긋하다// 흐린 하늘에 이는 바람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데/ 옷을 벗어놓은 나의 精神(정신)은/ 늙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추워라// 겨울이 지나간 밭고랑 사이에 남은/ 孤獨(고독)은 神의 無才操(무재조)와 詐欺(사기)라고/ 하여도 좋았다//
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기/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눈 /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공자의 생활난 / 김수영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폭포 /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병풍(屛風) / 김수영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醉)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向)하여서도 무관심(無關心)하다./ 주검의 전면(全面)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龍)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虛僞)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거미 /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꽃잎 1 / 김수영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革命)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
꽃잎 2 / 김수영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苦惱)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時間)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偶然)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돌아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싫은 노란 꽃을//
꽃 2 / 김수영
꽃은 과거(過去)와 또 과거(過去)를 향(向)하여/ 피어나는 것/ 나는 결코 그의 종자(種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움의 귀결(歸結)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설움이 없기 때문에 꽃은 피어나고// 꽃이 피어나는 순간(瞬間)/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 한 가지와 줄기의 내면(內面)은/ 완전(完全)한 공허(空虛)를 끝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중단(中斷)과 계속(繼續)의 해학(諧謔)이 일치(一致)되듯이/ 어지러운 가지에 꽃이 피어오른다/ 과거(過去)와 미래(未來)에 통(通)하는 꽃/ 견고(堅固)한 꽃이/ 공허(空虛)의 말단(末端)에서 마음껏 찬란(燦爛)하게 피어오른다//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 김수영
야 손들어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빵! 빵! 빵! 빵!/ 키크야! 너는 저놈을 쏘아라/ 빵! 빵! 빵!/ 쨔키야! 너는 빨리 말을 달려/ 저기 돈보따리를 들고 달아나는 놈을 잡아라/ 죠ㄴ! 너는 저 산 위에 올라가 망을 보아라/ 메리야 너는 내 뒤를 따라와// 이 놈들이 다 이성망이 부하들이다/ 한데다 묶어놔라/ 애 이 놈들아 고갤 숙여/ 너희놈 손에 돌아가신 우리 형님들/ 무덤 앞에 절을 구(九)천육(六)백삼십오(三五)만번 만 해/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두목! 나머지 놈들도 다 잡아왔습니다/ 아 홍찐구 놈도 섞여있구나/ 너 이 놈 정동 재판소에서 언제 달아나왔느냐 깟땜!/ 오냐 그놈들을 물에다 거꾸로 박아놓아라/ 쨈보야 너는 이성망이 놈을 빨리 잡아오너라/ 여기 떡갈나무 잎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와이 영사한테 보여라/ 그리고 돌아올 때는 구름을 타고 오너라/ 내가 구름운전수 제퍼슨 선생한테 말해놨으니까 시간은/ 이(二)분 밖에 안 걸릴 거다/ 이 놈들이 다 이성망이 부하들이지/ 이 놈들 여기 개미구멍으로 다 들어가/ 이 구멍으로 들어가면 아리조나에 있는/ 우리 고조할아버지 산소 망두석 밑으로 빠질 수 있으니까/ 쨈보야 태평양 밑의 개미 길에/ 미국사람들이 세워 놓은 자동차란 자동차는/ 싹 없애버려라/ 저 놈들이 타고 들어가면 안된다/ 야 빨리 들어가 하바! 하바!/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아리조나 카보이야//
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俗돼간다 俗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헬리콥터 / 김수영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 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 또한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하여왔으며/ 그것도 간신히 떠듬는 목소리밖에는 못해왔기 때문이다/ 설움이 설움을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젊은 시절보다도 더 젊은 것이/ 헬리콥터의 영원한 생리이다// 1950년 7월 이후/ 이 나라의 비좁은 산맥 위에 자태를 보이었고/ 이것은 처음 탄생한 것은 물론 그 이전이지만/ 그래도 제트기나 카아고보다는 늦게 나왔다/ 그렇지만 린드버어그가 헬리콥터를 타고서/ 대서양을 횡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동양의 풍자를 그의 기체 안에 느끼고야 만다/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그의 설운 모양을/ 우리는 좁은 뜰안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항아리 속에서부터라도 내어다볼 수 있고/ 이러한 우리의 순수한 치정을/ 헬리콥터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을 짐작하기 때문에/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 자유/ ―― 비애// 더 넓은 전망이 필요없는 이 무제한의 시간 우에서/ 산도 없고 바다도 없고 진흙도 없고 진창도 없고 미련도 없이/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가면서/ 안개처럼 가벼웁게 날아가는 과감한 너의 의사 속에는/ 남을 보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보이는/ 긍지와 선의가 있다/ 너의 조상들이 우리의 조상과 함께/ 손을 잡고 超동물세계 속에서 영위하던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을/ 너는 또한 우리가 발견하고 규정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으며/ 오늘에 네가 전하는 자유의 마지막 파편에/ 스스로 겸손의 침묵을 지켜가며 울고 있는 것이다//
말 / 김수영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도 내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비 / 김수영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悲哀)여// 결의하는 비애(悲哀)/ 변혁하는 비애(悲哀)……/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김수영 [金洙暎, 1921. 11. 27 ~ 1968. 6. 16] 시인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 1946년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하였으나 중퇴. 1946년 《예술부락[藝術部落]》에 시 <廟庭(묘정)의 노래>를 실으면서 작품 활동 시작.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출간.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시와 시론, 시평 등을 잡지, 신문 등에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으나, 1968년 6월 15일 밤 교통사고로 사망. 사후 시선집 『거대한 뿌리』(1974) , 『사랑의 변주곡』(1988) 과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등과 1981년 『김수영전집』 간행됨. 2001년 10월 20일 금관 문화훈장 추서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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