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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정진규 시인

부흐고비 2021. 4. 28. 16:00

 

 

별 /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水月觀音圖 / 정진규

고려 佛畫 水月觀音圖를 보러 갔다 다른 건 보이지 않고 그분의 맨발 하나만 보였다 도톰한 맨발이셨다 그런 맨발을 나는 처음 보았다 연꽃 한 송이 위에 놓이신 그분의 맨발, 요즈음 말로 섹시했다 열려 있었다 들어가 살고 싶었다 버릇없이 나는 만지작거렸다 1310년, 687년 전에도 섹시가 있었다 419.5×245.2! 장대하셨으나 장대하시지 않음이 거기 있었다 당신을 뵈오려고 전생부터 제가 여기까지 맨발로 걸어왔어요 제 맨발은 많이 상해 있어요 말하려 하자 그분의 손이 내 입술 위에 가만히 얹히었다 무슨 뜻이셨을까 돌아오는 길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함께 갔던 미스 김과 차를 마시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당신을 뵈오려고 전생부터 제가 여기까지 맨발로 걸어왔어요 그게 화근이었다 순간! 미스 김이 관음보살이 되고 말았다 지울 수 없었다 미스 김은 나를 굳게 믿었다 그날 이후 나는 관음보살 한 분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내 사는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맨발로 나를 마음대로 걸어다니시는 감옥 하나 지어드렸다 실은 관음보살께서 미스 김이 되셨다//

심검당(尋劒堂)에서 / 정진규

명산(名山)에 들면 보인다 어김없다 단서(端緖)를 잘 잡고 서 있는 봉우리가 하나씩 있다 붓끝과 같다 하여 그 첨단을 필봉(筆峰)이라 이른다 너의 단서에 내 혀를 나의 단서를 처음 댔을 때 그토록 와서 닿았던 우주의 뜨거운 율단(律端), 떨리던 필봉과 필봉 그게 모든 사물들에게도 꼭 하나씩 꼭지로 솟아있다고 믿는 단서(但書)로 나의 시들은 그간 씌어왔음을 ... (중략) ... 헛것만 보인다 필봉이 솟지 않는다 어제 오늘 내리는 난분분(亂紛紛)의 춘설(春雪)들 눈송이 하나하나에도 단서가 있는 법이어서 저리 난분분을 지으는 것인데 형상을 보이는 것인데 그 속에도 산수유 노오랗게 치를 떠는 것인데 나도 치를 떠는 것인데 우수 경칩도 지났다 지척인 봄, 어디 갔느냐 심증은 잡았다 물증을 잡아야 하리 단서를 얽은 단서를 끊어내야 하리 다른 길 없다 심검(尋檢)이다 칼을 찾아라!//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 / 정진규

남들도 다 그런다가하기 새 집 한 채를 고향에 마련할 요량으로 그림을 그려가다가 늙은 아내도 동참시켜 원하는 걸 그려보라 했더니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되었다고 했다. 남들이 탐하지 않도록 눈에 뜨이지 않게만 하라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實用도 끝이 있구나! 나는 놀랐다 내 텅빈 실용 때문에 텅빈을 채우려고 육십 평생을 소진했구나 아내의 실용이 바뀌었구나 눈물이 한참 났다 이제서야 사람 노릇 좀 한 번 하려고 실용 한 번 하려고 나는 실용의 그림을 잔뜩 그려 넣었는데 없는 실용의 실용을 아내가 터득했구나 눈에 뜨이지 않게까지 알아버리다니 다 지웠구나 나는 아직 그냥그탕인데 마침내 一字無識으로 빈 하늘에 걸린 아내의 빨랫줄이여! 구름도 탁탁 물기 털어 제 몸 내다 말리는구나 염치없음이여, 조금 짐작하기 시작한 나의 일자무식도 거기 가서 잠깐 잠시 끼어들었다 염치없음이여, 또다시 끼어드는 나의일생이여 원추리 핀다 채송화 핀다//

밥 / 정진규

이런 말씀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이젠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는 말씀, 그 겸허, 실은 쓸쓸한 安分, 그 밥, 우리나란 아직도 밥이다. 밥을 먹는 게 살아가는 일의 모두, 조금 슬프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길떠난 나를 위해 돌아오지 않는 나를 위해 언제나 한 그릇 나의 밥을 나의 밥그릇을 채워놓고 계셨다 기다리셨다 저승에서도 그렇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다 이토록 밥이다 하얀 쌀밥이면 더욱 좋다 나도 이젠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면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올린다 오늘은 나의 사랑하는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드리고 싶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으로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분들은 자주 밥알을 흘리실 것 같다 숫가락질이 젓가락질이 서투르실 것 같다 다 내어주시고 그분들의 쌀독은 늘 비어있을 터이니까 늘 시장하였을 터이니까 밥을 드신지가 한참 되셨을 터이니까//

밥을 멕이다 / 정진규

어둠이 밤새 아침에게 밥을 멕이고 이슬들이 새벽 잔디밭에 밥을 멕이고 있다 연일 저 양귀비 꽃밭엔 누가 꽃밥을 저토록 간 맞추어 멕이고 있는 겔까 우리 집 괘종 붕알시계에게 밥을 주는, 멕이는 일이 매일 아침 어릴 적 나의 일과였던 생가에 와서 다시 매일 아침 우리 집 식구들 조반을 챙기는 그러한 일로 하루를 열게 되었다 강아지에게도 밥을 멕이고 마당의 수련들 물항아리에도 물을 채우고 뒤꼍 상추, 고추들 눈에 뜨이게 자라오르는 고요의 틈서리에도 봄철 내내 밥을 멕였다 물밥을 말아주었다//
*멕이다 : 먹이다의 안성 사투리

입춘 / 정진규

햇볕들도 재잘재잘 작아질 때가 있다 사량도 앞바다에 떨어져선 예쁘게 구겨졌다 자주자주 몸을 펴는 햇볕들 뒤채긴다는 말은 너무 무겁다 느리다 저토록 끝없는 바다가 각자 작아지다니! 눈이 부시다 빛들이 일시에 출산을 하고 있다 입자들, 진종일 내 사랑도 자주자주 사소해졌다 만평쯤 예쁘게 사소해졌다//

 

수련睡蓮 / 정진규

닫기는 고요로 피는 꽃, 꽃이 터질 때마다 꽃을 꿰매는 무봉無縫의 손을 보았다 닫기는 고요를 보았다 그렇게 터지는 또 다른 꽃을 보았다 한낮이 지나면 수련들은 어김없이 입을 다문다. 닫기는 꽃이여, 닫겨서 피는 꽃이여 터지는 고요여, 고요의 비수匕首//

 

자정향 / 정진규

모든 사물들을 실물크기로 그리고 싶다 내 사랑은 언제나 그게 아니 된다 실물크기로 그리고 싶다 사랑하는 자정향(紫丁香) 한 그루를 한번도 실물크기로 그려낸 적이 없다 늘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이 내 솜씨다 오늘도 너를 실물크기로 해질녘까지 그렸다 어제는 넘쳤고 오늘은 모자랐다 그게 바로 실물이라고 실물들이 실물로 웃었다//

비 오는 날 / 정진규

빗속에서 저 맨몸 빗줄기들 자연분만 된 줄로만 알고 있었더니 빗줄기속에서 비가 비로소 몸을 얻고 있음을 여기 와 보았다 비 젖고 섰는 큰 느티나무를 비가 와서 만든 줄 알았더니 느티나물 만나서 비가 비로소 느티나물 크게 적시게 되었음을 알았다 느티나무에게 잘 모시겠다고 큰 절을 했다 이 늦봄 새벽, 사랑이 와서 초록 풀밭 아득히 적시는 빗소리를 귀 열고 있었더니 맨몸 적시고 있었더니 오래 전에 있었던 풀밭이 비로소 사랑을 몸 부리고 있음을 알고 큰 절 했다 노박이로 비 맞고 은하 건너 온 칠석날 까치 두 마리도 아침 뜨락에 와서 이미 알고 있었다고 두어 번 짖었다//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 정진규

얼마라던가 그 정확한 단위는 잊었지만 아무튼 몇 만 톤, 그런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 이른 봄 언 땅 밀고 나오는 여린 새싹 한 잎의 힘을 그 초록 힘을 수치로 산출해보면 그렇다고 했다 우리 여자들이 밀물 썰물로 제 몸 속에 가두고 있는 바다, 애기를 낳는 힘, 그 절대 순간의 힘, 낳는 힘! 그것과 똑같다고 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풀밭에서 그 초록 힘들의 무리를, 낳는 힘들을 보았다 뾰족뾰족 땅을 들추고 있었다 나도 이 봄에 손자 하나를 더 보았다 손자가 둘이다! 그렇다면 나도 이제 십만 톤은 넘는다 할 수 있다 이 풀밭의 새싹들의 초록 힘들을, 낳는 힘들을 모조리 모으면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엘리자베스여왕 인사동 방문에 부쳐 / 정진규

서울의 일정이 즐겁고 편안하십니까. 우리는 조상 제사를 모시고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살아가는 일의 첫번째 순위로 삼고 있는데 그것도 만에 하나 국빈이신 여왕을 모시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통문화의 거리라고 하는 이곳 서울 인사동을 둘러보신 감회는 어떠하셨는지요. 거리엔 청사초롱도 밝히고 우리의 풀꽃, 할미꽃이며 민들레들을 새로 심어 꽃단장을 하기까지 한 것을 보고 저윽이 안심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걱정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잘 정돈된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시려면 중앙박물관이나 특히 추사 (秋史) 의 묵향 (墨香) 으로 깊고 그윽한 멋을 자아내는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이라도 둘러보시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었는데 굳이 인사동 거리라니 처음엔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옛 일상이 살아 숨쉬는 물건들이긴 합니다만, 손때에 절은 떡살 다식판 따위의 목기류들이나 낡은 고서들이 되는 대로 귀한 고려 청자며 조선백자들 사이에 섞여 널부러져 있는, 어찌 보면 오죽잖은 이 거리가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사동 한켠 모래틈만하게 터잡고 30여년간 시를 써온 저로서는, 요즈음 새로 생긴 인사동 초입 '밀밭' 국수집의 조개를 듬뿍 넣어 끓인 칼국수 맛이 제격인데 이걸 여왕께 점심으로 대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골목 주점 주점들에서 오늘도 이어지고 있는 조선 시인묵객들의 맑고 드높은 예술적 대화를 여왕께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내심 혼자서 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평소 성격대로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면을 최대한 줄이고 대신 한국민의 문화와 역사의 향기를 찾는데 일정을 맞추셨다니 이곳 여항 (閭巷) 의 허트러진 멋이 더 친근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징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상징의 실체란 저래야 한다는 느낌을 깊게 받았습니다. 정장 투피스, 모자, 장갑으로 단장하신 예의 당신의 모습은 친근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징을 실체로 지닌 영국민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특유의 자존과 질서를 지녀온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당신을 뵙는 순간 우리의 신라적 선덕여왕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연민과 너그러움과 사랑과 위로의 성정과 실천이 뛰어나신 그런 분이셨다고 합니다. 언감생심 여왕에 대한 짝사랑으로 불타고 있었던 미친 지귀 (志鬼) 라는 사내의 누워 자는 가슴에 황금팔찌를 벗어 놓아 그의 사랑의 불꽃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우리의 가슴에 각인 (刻印) 되어 있는 그런 여왕이시기도 합니다. 실은 이 글을 쓰면 제격이셨을 우리의 대시인 미당 (未堂) 서정주 선생은 '선덕여왕의 말씀' 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너무들 인색치 말고 있는 사람은 병약자한테 시량 (柴糧) 도 더러 노느고 홀어미 홀아비들도 더러 찾아 위로코, 첨성대 위엔 첨성대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놔라 별을 바라보며 평화의 나라 도리천을 꿈꾸던 시인의 신화적인 사랑과 너그러움과 그윽한 의지가 담겨 있는 '선덕여왕의 말씀' , 그걸 당신 엘리자베스의 미소에서도 느꼈다면 과장이 되겠습니까.//

율려집 8 - 수련 / 정진규

닫히는 고요로 피는 꽃, 꽃이 터질 때마다 꽃을 꿰매는 무봉(無縫)의 손을 보았다 닫히는 고요를 보았다 그렇게 터지는 또 다른 꽃을 보았다 한낮이 지나면 수련들은 어김없이 입을 다문다. 닫히는 꽃이여, 닫혀서 피는 꽃이여 터지는 고요여, 고요의 비수(匕首)여//
* 율려(律呂) : 우주의 생체 리듬

율려집 28 - 胎 / 전진규

여자들은 무엇에나 한 그릇 밥을 고봉으로 슬어놓는다 하얀 알을 슬어놓는다 지어놓는다 낳는 일과 짓는 일은 다르지 않다 고추 농사지을 때마저 그렇게 한다 가득 밴 노오란 고추씨들 가을 햇살 아래 쏟아진다 배를 따고 있다 그래야 직성(直星)이 풀린다 다행이다//

산수유 -알1 / 정진규

수유리라고는 하지만 도봉산이 바로 지척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인데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 훌륭하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벌떼들, 꿀벌떼들, 우리집 뜨락에 어제 오늘 가득하다 잔치잔치 벌였다 한 그루 활짝 핀, 그래, 滿開의 산수유, 노오란 꽃숭어리들에 꽃숭어리들마다에 노오랗게 취해! 진종일 환하다 나도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두근거렸다 잉잉거렸다 이건 노동이랄 수만은 없다 꽃이다! 열려 있는 것을 마다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 사전을 뒤적거려 보니 꿀벌들은 꿀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왕복한다고 했다 그래, 왕복이다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 그래, 무엇이든 왕복일 수 있어야지 사랑을 하면 그런 특수 통신망을 갖게 되지 광케이블을 갖게 되지 그건 아직도 유호해! 한 가닥 염장 미역으로 새카맣게 웅크려 있던 사랑아, 다시 노오랗게 사랑을 採蜜 하고 싶은 사람아, 그건 아직도 유효해!//

플러그 -알2 / 정진규

이번 여름 전주 덕진공원 연못 가서 햇살들이 해의 살들이 이른 아침, 꼭 다문 연꽃 봉오리들마다에 플러그를 꽂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이내 어둠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좀 지나 연못 하나 가득 등불들 흔들리고 끄집어낸 어둠의 감탕들을 실은 청소차들이 어디론가 바삐 달려갔다 뒷자리가 깨끗했다 나도 플러그 공장을 하나 차리리라 마음먹었다 그대들의 몸에 그걸 꽂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좌르르르 빛의, 욕망의 코인들이 쏟아져나오는 슬롯머신! 햇빛기계! 플러그 공장을 독과점하리라 마음먹었다 플러그를 빼앗기고 모두 정전상태가 되어 있는 어둠들에게 나는 은빛 절정이 되리라 폭력을 쏘는 폭력! 폭력의 대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뒷자리가 깨끗한!//

포도를 먹는 아이-알7 / 정진규

목욕을 시켰는지 목에 뽀얗게 분을 바른 아이가 하나, 사람의 알인 아이가 하나 해질 무렵 골목길 문간에 나앉아 터질 듯한 포도알을 한 알씩 입에 따 넣고 있었다 한 알씩 포도라는 이름이 그의 입 안에서 맛있게 지워져 가고 있었다 이름이 지워져 간다는 것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나는 때묻은 중랑천 언덕에서 비에 젖으며 안간힘으로 버티고 섰는, 추하게 지워져 가고 있는 망초꽃이라는 이름 하나를 본 적이 있다) 아이는 마지막 한 알까지 다 먹었다 포도라는 이름이 완전히 지워졌다 아이가 말랑말랑하게 웃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이름이 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제 자러 갈 시간이었다//

잠적-알8 / 정진규

내 이승의 살을 내가 만져보니 많이 수척해 있었다 누구의 가슴에든 온전히 밀봉되고 싶은 그런 내 육신의 잠적을 생각했다 목이 마르다 이젠! 어떤 따스한 햇살에도 몸 내밀지 않는 네 마음의 꽃을 나는 알고 있다 언제 피어나려느냐 더 흉해지기 전에 네 몸 속에 내가 벌거숭이로 온전히 이 몸의 감옥을 지을 수 있다면 몸 내어밀겠느냐 살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네 몸 속에 내가 벌거숭이로 묻혀 꽃거름이 되랴 꽃거름이 되랴 내가!//

황홀-알13 / 정진규

내가 만난 황홀들은 늘 도둑같이 왔다 담장을 넘어왔다 잠들다 깨어나 보면 맨몸으로 곁에 누워 있었다 햇볕 대낮 속에서도 도둑같이 왔다 어두움의 장막을 치고 담장을 넘었다 그것도 얼굴 가리운 복면으로 왔다 돌들은 돌들의 담장을 넘었으며 풀잎들은 풀잎들의 담장을 넘었다 새들은 새들의 담장을 깃털 속에 감추고 왔다 따뜻한 담장이었다 그렇게 황홀들은 왔다 저마다의 열쇠 꾸러미가 속주머니 속에서 절그럭대고 있었는데 그 용도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집 대문은 언제나 잠긴 채로엿다 다만 한껏 바알갛게 열린 사물의 잎들, 이를테면 滿開의 영산홍 한 그루, 그를 이 봄에도 어김없이 만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눈물 -알19 / 정진규

소설가 이청준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인데, 나긋나긋하고 맛있게 들려준 이야기인데,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슬픈 이야기인데, 그의 입술에는 끝까지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깊이 내 가슴을 적셨던 아흔 살 어머니의 그의 어머니의 기억력에 대한 것이었는데, 요즈음 말로 하자면 알치 하이머에 대한 것이었는데, 지난 설날 고향으로 찾아뵈었더니 아들인 자신의 이름도 까맣게 잊은채 손님 오셨구마 우리집엔 빈방도 많으니께 편히 쉬었다 가시요 잉 하시더라는 것이었는데.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책을 나무라 하고 이불을 멍서기라하는가 하면, 강아지를 송아지라고, 큰며느님더러는 아주머니 아주머니라고 부르시더라는 것이었는데, 아, 주로 사물들의 이름에서 그만 한없이 자유로워져 있으셨다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사물들의 이름과 이름 사이에서는 아직 빈틈 같은 것이 행간이 남아 있는 느낌이 들더라는 것이었는데, 다시 살펴보니 이를테면 배가 고프다든지 춥다든지 졸립든지 목이 마르다든지 가렵다든지 뜨겁다든지 쓰다든지 그런 몸의 말들은 아주 정확하게 쓰시더라는 것이었는데, 아, 몸이 필요로 하는 말들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정확하게 갇혀 있으시더라는 것이었는데, 몸에는 몸으로 갇혀 있으시더라는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어떤 빈틈도 행간도 없는 완벽한 감옥이 있더라는 것이었는데, 그건 우리의 몸이 빚어내는 눈물처럼 완벽한 것이어서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었는데, 그리곤 꼬박꼬박 조으시다가 아랫목에 조그맣게 웅크려 잠드신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子宮 속 태아의 모습이셨더라는 것이었는데//

아, 둥글구나 -알34 / 정진규

우리는 똑같이 두 팔 벌려 그 애를 불렀다 걸음마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애가 풀밭을 되똥되똥 달려왔다 한 번쯤 넘어졌다 혼자서도 잘 일어섰다 그래 할아버지가 된 나는 그 애가 좋아 하는 초콜릿을 들고 있었고 그 애 할머니가 된 나의 마누라는 그 애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들고 있었다 그 애 엄마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빈손이었다 빈가슴이었다 사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달려온 그 애는 우리들 앞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초콜릿 앞에서 바나나 앞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제 엄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본시 그곳이 제자리였다 알집이었다 튼튼하게 비어 있는, 아, 둥글구나!//

슬픔 -알44 / 정진규

몸은 튜브야, 오늘 아침 새 치약의 뚜껑을 열면서 몸은 튜브라는 믿음이 왔어 열심히 짜내자는 생각을 했어 내가, 나를 짜내자는 생각을 했어 이젠 네가 나를 짜낼 생각을 그만두었으니까 그렇게 되었으니까 우리들의 사랑이 이젠 그리움의 경영만으로 족하게 되었으니까 그래야 하니까 伏地不動 그래야 하니까 (웬일일까, 그 많은 소들이 오늘 아침 일시에 그 뽀얀 젖들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기별이 왔다 음악을 틀어줘도 伏地不動, 기별이 없다고 했다 동무의 목장이 큰 걱정이다) 물론 슬프지, 슬픔은 슬픔으로 밀고 갈 수밖에!//

이별 -알62 / 정진규

서러워 말자 나는 늘 경계만 헤맨다 넘어가지는 않는다 너를 드나들지는 않는다 넘어가면 내 집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나는 안다 너 또한 그러하리 우리는 위험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이별을 익혀왔다 간절해지면 겨우 경계까지 가기는 간다 경계만 헤맨다 해질 때까지 거기서 놀다가 돌아온다 그래, 나는 경계를 가지고 논다 그것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경계는 이어진 곳이 아니라, 넘어가는 다리가 아니라 나를 지켜주고 있는 극단이다 이별이 허락하는 극단의 내 집이다 극단의 약이다 부드러운 극약이다 나는 이 극약을 먹으며 논다 맛있는 슬픔, 오래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있고 네가 있다//

이별 -알63 / 정진규

어제는 안성 칠장사엘 갔다 잘 생긴 늙은 소나무 한 그루 나한전(羅漢殿) 뒤뜰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마다 골고루 잘 벋어나간 가지들이 허공을 낮게 높게 어루만지고는 있었지만, 모두 채우지는 않고 비어 있는 자리를 비어 있는 자리로 또한 채우고 있었지만, 몸의 경계를 제 몸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허공이 있고 늙은 소나무가 있었다 서러워 말자//

동백꽃 -알64 / 정진규

나무들은 기름 잘 먹은 심지들을 가지고 논다 봄이 오면 흠뻑 젖어 있는 초록 심지들, 거기 수없이 많은 불꽃들을 달아내고 있다고 꽃피웠다고 작년처럼 말할까 하다가 수없이 내어걸린 등불들이라고 바꾸어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몸이 있어 보였다 불꽃들이라고 말했을 때는 목이 말랐는데 살 타는 냄새가 났는데 등불들이라고 말하자 나도 따뜻하게 젖어들었다 는개 속에 누운 길들이 저마다 관절을 풀고 있었다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가서 그걸 겪었다 모든 것은 그렇다 같지만 다르다 무엇보다, 오늘의 너는 그렇게 말하자 환히 꽃피웠으며 몸을 보였으며 작년의 너는 울고 떠난 까닭이 작년의 내 사랑이 그 지격이 되었던 까닭이 바로 거기 있었다 무엇보다!//

알시 33-감나무 새순들 / 정진규

눈 뜨는 감나무 새순들이 위험하다 알고 보면 그 밀고 나오는 힘이 억만 톤 쯤 된다는데 아기를 낳는 여자, 그 죽음 직전, 직전의 직전까지 닿아 있는 힘과 같다는 것인데 햇살 속에 반짝이는 저 몸짓들이 왜 저리 연하디 연할까 다를게 없다 가장 힘센 것은 가장 여린 것을 겨우 만들어 낸다 억만 톤의 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처음부터라야 완벽하다 위험하다//

몸시·36 -물속엔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 / 정진규

기억나지 않지만 물속엔 깨끗한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른 새벽에 안개를 헤치고 가서 풀밭을 한참 걸어가서 물가에 당도하여서 젖은 발로 그걸 보고 들었다고!// 그는 다시 말했다 햇살이 그의 따뜻한 혀로 이슬들 핥기 시작한 바로 그때쯤, 마침내 물속에서 솟아오른 꽃을 두고 오, 물이 알을 낳았다고!// 그러니까 꽃은 알이다. 그러니까 물은 子宮이다. 두근거림이란, 회임한 내 아내의 배에 귀를 대고 내가 듣던 바로 그런 소리다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상처를 핥아다오, 물속 꽃의 두근거림아!//

몸시·86 -낙산 의상대 가서 / 정진규

길이 열릴 때 보면 밝음이 늘 어둠 안쪽에서 몸을 키워 키를 키워 밤을 새워 어둠 밖으로 길을 내놓던데, 엄지발가락 하나가 상해 있던데, 어렵게 거미줄 뽑듯 시작하던데, 오늘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다 직방으로 왔다 길이 밝음 그대로 몸이 되어 덩어리로 그냥 걸어나왔다 낙산 의상대 가서 바다에서 뜨는 해를 새롭게 만났다 어둠과 이미 한평생 잘 살고 나온, 한살림 차렸던 흔적이 역력한, 이미 싸움을 끝낸, 피냄새가 나지 않는 해를 새로 보았다//

몸시·55 -상처 / 정진규

속으로만 입고 있던 상처를 요즈음엔 몸에도 내고 다닌다 흉하다고 사람들은 피한다 그럴수록 나는 나의 꽃이라고 향내가 있다고 다가가 부벼댄다 사람들은 혼비백산 도망친다 요즈음 나의 상처는 속엣것이 넘쳐! 밖으로 기어나오고 있음이 분명한데 사람들은 自害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나는 몸에다 칼을 댄 적이 없다 꽃이 피는 순서는 밖에서 안이 아니다 고마우신 햇살과 단비도 있으셨겠지만 안에서 밖이다 일단은 고여서 밖이다 눈으로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이 되는 빠듯한 충만의 순서! 나는 그걸 아직 믿고 있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 그걸 아직 믿고 있다//

몸시·86 -낙산 의상대 가서 / 정진규

길이 열릴 때 보면 밝음이 늘 어둠 안쪽에서 몸을 키워 키를 키워 밤을 새워 어둠 밖으로 길을 내놓던데, 엄지발가락 하나가 상해 있던데, 어렵게 거미줄 뽑듯 시작하던데, 오늘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다 直方으로 왔다 길이 밝음 그대로 몸이 되어 덩어리로 그냥 걸어나왔다 낙산 의상대 가서 바다에서 뜨는 해를 새롭게 만났다 어둠과 이미 한평생 잘 살고 나온, 한살림 차렸던 흔적이 역력한, 이미 싸움을 끝낸, 피냄새가 나지 않는 해를 새로 보았다//

따뜻한 상징 / 정진규

어떤 밤에 혼자 깨어 있다 보면 이 땅의 사람들이 지금 따뜻하게 그것보다는, 그들이 그리워하는 따뜻하게 그것만큼씩 춥게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지 모르겠다 조금씩 발이 시리기 때문에 깊게 잠들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꿈에도 소름이 조금씩 돋고 있는 것이 보이고 추운 혈관들도 보이고 그들의 부엌 항아리 속에서는 길어다 놓은 이 땅의 물들이 조금씩 살얼음이 잡히고 있는 것이 보인다 요즈음 추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요즈음 추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의 문전마다 쌀 두어 됫박쯤씩 말없이 남몰래 팔아다 놓으면서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싶다 그렇게 밤을 건너가고 싶다 가장 따뜻한 상징, 하이얀 쌀 두어 됫박이 우리에겐 아직도 가장 따뜻한 상징이다//

우리 집 쓰레기통은 네 개 / 정진규

저로서는 과분하게도 우리 집 房이 네 개입니다 하나는 우리 內外가 쓰고 하나는 저의 長男이 쓰며 하나는 제 사랑스러운 딸이 또 하나는 제 막내가 외할머니와 함께 쓰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네 개의 쓰레기통을 버리는 것이 저의 소임입니다 무심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막내와 외할머니의 쓰레기통엔 졸음에 겨운 옛날 이야기의 꼬리가 버려져 있고 나의 딸의 쓰레기통엔 한밤내 만난 꿈의 꽃잎 하나가 실로 부끄럽게 떨어져 있으며 나의 長男의 쓰레기통엔 英雄 몇 명이 무릎 꿇어 깊은 잠에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 內外의 쓰레기통은 언제나 비어 있습니다 버릴 것이 없사오며 없사온 까닭인즉 저들의 쓰레기통을 채워주고 다시 채워주어도 모자라는 탓이오며 용서를 바라옵기는 가득히 비어 있는 충만을 또한 사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세상의 쓰레기통 속엔 무엇이 버려지고 있는지요//

모과 썩다 / 정진규

올해는 모과가 빨리 썩었다 채 한 달도 못 갔다 가장 모과다운 걸, 가장 못생긴 걸 고르고 골라 올해도 제기 접시에 올렸는데 천신하였는데 그 꼴이 되었다 확인한 바로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은 모과였기 때문이라는 판명이 났다 썩는 것이 저리 즐거울까 모과는 신이 나 있는 눈치였다 속도가 빨랐다 나도 그렇게 판명될 수 있을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을까 글렀다 일생(一生) 내가 먹은 약만 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 나는 아예 글렀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그토록 일찍 끝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을까 첫사랑은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연고다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 절정에서는 금방인 저쪽이 화안하다 비알 내리막은 속도가 빠르다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저승내는 시고 달다 그런 연고다//

조간(朝刊) / 정진규

참 내가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앙뉘, 앙뉘, 累積의 內部에서 잃었던 表情이 되살아난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새벽, 아직 어두운 門前에 거기에도 例外없이 어두움은 고여 있었는데 그 門 틈서리로 빠져 떨어지는 아침 소리. 朝刊의 音響을 듣고.//

속살 / 정진규

한 채의 생각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한 채의 말씀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 한 채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터전을 닦는 일은 이미 끝내었습니다 네 귀퉁이를 반듯하게 닦았습니다 한 그루 대추나무는 그대로 놓아 두었습니다 우리들의 가난한 糧食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대패질을 합니다 나무들의 속살이 화안하게 드러납니다 이 싱그런 속살, 당신의 속살과도 처음인 듯 만납니다 나 온갖 거짓과의 결별을 끝냅니다 대패질을 합니다 나는 지금 요염합니다 머리꼭지까지 가득 차오르는 이 땅에서 가장 정결한 물, 물빛과도 만나고 있습니다//

연필로 쓰기 / 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홍옥 한 알 / 정진규

한겨울 눈 오는 날 청계천 헌 책방엘 갔다 김종삼 특집 낡은 시 잡지 표지에 이름도 없는 내가 김수영 전봉건 김종문 신동문 김광림 시인과 함께 섞여 내다보고 있었다 움, 무순, 무순(無順), 번외(番外)라고 금방 끼룩거렸다 성중천(性中天)이 거기 있었다 맨 꽁무니 기러기 한 마리여// 그즈음 어느 겨울날 아리스 다방 골목길 과일 가게에서 김종삼 시인이 하얀 손수건 꺼내 조심스럽게 싸들던 홍옥 한 알과 김하림 시인도 이 겨울 생각났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열애중인 그들이었다//

서서 자는 말 / 정진규

내 아들은 유도를 배우고 있다/ 이태 동안 넘어지는 것만/ 배웠다고 했다/ 낙법만 배웠다고 했다// 넘어지는 것을 배우다니!/ 네가 넘어지는 것을/ 배우는 이태 동안/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았다// 한 번 넘어지면 그뿐/ 일어설 수 없다고/ 세상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잠들어도 눕지 못했다/ 나는 서서 자는 말// 아들아 아들아 부끄럽구나/ 흐르는 물은/ 벼랑에서도 뛰어내린다// 밤마다 꿈을 꾸지만/ 애비는 서서 자는 말//

비누 / 정진규

비누가/ 나를 씻어준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믿고서 살아왔는데/ 나도 비누를 씻어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몸 다 닳아져야 가서 닿을 수 있는 곳,/ 그 아름다운 소모를 위해/ 내가 복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누도 그걸 하고 있다는 걸/ 그리로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내 당도코자 하는 비누의 고향!/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바 아니며/ 다만/ 아무도 혼자서는 씻을 수 없다는/ 돌아갈 수 없다는//

장마 / 정진규

비 듣는 소리를 듣고 있다/ 진종일 귀가 열리고 있다/ 안이 꽤 깊다 틈서리마다 젖어들어서/ 불어난 집의 부피와 무게들이 내 마음의 용량위에/ 푸른곰팡이의 눈금을 하나씩 더 올려놓고 있다/ 슬픔이 살찐다/ 다친 다리가 쑤시기 시작한다/ 감당키 어려운 대목이 이런 날엔/ 어김없이 응답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새고 있다/ 집이 새고 있다/ 그게 모이다/ 새는 낮게 낮게 뒷산 허리를 날아가고 있다/ 비리게 속까지 젖어서 높게 뜨지 못한다/ 새는 어디를 다치셨는가 새도 새고 있다/ 둥지가 새고 있다/ 슬픔이 새로 살찐다/ 한참 비안개 자욱하다/ 새어서 새어서 너에게서도 새어서/ 나는 여기까지 왔구나 다친 몸은 정직하시다//

안개 / 정진규

이른 새벽/ 내가 아직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 집에 제일 먼저 당도해 있는 건/ 한 병의 우유와/ 조간 한 장/ 풀밭도 지나왔는지/ 촉촉이 이슬에 젖어 있었다/ 이로써 오늘도 안녕이었다./ 내 일용할 양식은 언제나 든든했다/ 한 병의 우유만으로도/ 내 삼시 세끼는 넉넉하였으며/ 한 장의 조간만으로도/ 내 영혼의 가난을 다스릴 수 있었다/ 허지만 이 가난한 용납이/ 요즘은 어려워진다/ 내가 깨어 있는 동안에도 당도해 주지 않았다/ 하늘나라의 통신에 의하면/ 이른 새벽길을/ 정체불명의 안개가 가로막는다는 것이었다/ 나날이/ 안개의 숲이 깊어만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하리,/ 이제는 나도 마중을 나가야만 하겠다/ 그간 나의 헛간에서/ 잠들어 있던 단단한 골격의 도끼/ 그가 가장 완강하게 일어서고/ 아아, 마침내/ 한 그루씩 넘어지는 안개의 벌목./ 이제는 나도 마중을 나가야만 하겠다//

햇빛 냄새 / 정진규

시골집 뒷마당에서 빨래를 거둬 안고 들어오며 서울 며느리, 아까워라 햇빛 냄새! 빨랫줄 허공에 혼자 남아 있겠네 빨래 아름에 얼굴 깊게 묻었다// 향기로운 탄내, 햇빛 냄새!//

초록초(草) / 정진규

이른 아침 새로 뜬 눈으로/ 날마다 나무 초록 풀 초록/ 실컷 바라보는 게 유익하다// 마음을 위해서도 그렇다/ 생가에 내려와 십 년,/ 사무치도록 그걸 했더니/ 어머니도 다녀가셨다// 세상에 다친 눈이 많이 좋아졌다//

연가 / 정진규

석달 열흘 먹구름 속 천둥이 울고/ 비만 내리더니/ 이제 맑고 밝은 햇살이어요// 우리들의 우리들의 가슴은/ 마침내 말끔히 말끔히 씻기어 있어요/ 텅 비인, 비어 있는 충만을 아시나요/ 가득히 와 고이는 푸른 하늘을/ 둘이서 길어 올렸지요/ 하루종일 끝남이 없데요// 거기 둘이서 알몸으로, 알몸으로/ 익사해도 좋은가요 좋은가요/ 좋은가요 하느님//


 

정진규(1939~2017) 시인
193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인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팔서정」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만해전집 편찬에 간행위원으로 참여해 원고를 발굴하고 정리하면서 만해의 문학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그의 시문학에는 불교적 사유가 농후하다.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하고, 산문시의 거장으로 불린다. 시집으로 『마른 수수깡의 평화』『비어있음의 충만을 위하여』『연필로 쓰기』『몸詩』『알詩』『도둑이 다녀가셨다』『본색』『껍질』『공기는 내 사랑』『율려집ㆍ사물들의 큰언니』등이 있으며 월탄문학상, 공초문학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현대불교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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