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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허형만 시인

부흐고비 2021. 4. 29. 08:19

 

문 열어라 / 허영만

산 설고 물설고// 낯도 선 땅에/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잠긴 문 열어제치니/
찬바람 온몸을 때려/ 꼬박 뜬눈으로 날을 샌 후//
문 열어라//
아버님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 
어젯밤에도/ 문 열어라.//

 

 

밤비 / 허형만

비가 나리는 밤이면/ 어머니는/ 팔순의 외할머니 생각에/ 방문여는 버릇이 있다// 방문을 열면/ 눈먼 외할머니 소식이/ 소문으로 묻어 들려오는지/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기대앉던/ 육순의 어머니// 공양미 삼백석이야 판소리에나 있는 거/ 어쩔 수 없는 가난을 씹고 살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하다시며/ 외가댁에 다녀오신 오늘// 묘하게도 밤비 내리고/ 방문을 여신 어머니는/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젖어// "차라리 돌아가시제/ 돌아 가시제"//

무심(無心)에 관하여 / 허형만

무심하다고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뜬금없이 사십 년간 소식을 몰랐던 대학 동창이/ 자기도 무심했지만 절더러 더 무심하다 했습니다/ 닫혀진 인연이 다시 열린다는 건 분명 전율입니다/ 지금 열려 있는 인연들도 언젠가는 모두 닫혀질 터이지만/ 세상에, 사십 년 전 그 친구/ 육십의 고개를 넘어와 어느 풀밭에서 쉬다가/ 어쩌자고 문득 제 생각이 났을까요/ 어쩌다가 사십 년 간 쳐둔 마음의 빗장이 열렸을까요/ 그 친구와 통화를 끝내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고독해진다는 것이리라/ 고독해진다는 것은 마음의 빗장 앞에서 서성이는 것이리라/ 날은 흐리고 왠지 서글퍼졌습니다/ 잊혀졌던 시간들이 일제히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벼운 빗방울 / 허형만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매달릴 수 없지/ 가벼워야 무거움을 뿌리치고/ 무거움 속내의 처절함도 훌훌 털고/ 저렇게 매달릴 수 있지/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나뭇잎에 매달리고/ 그래도 매달릴 곳 없으면 허공에라도 매달리지/ 이 몸도 수만리 마음 밖에서/ 터지는 우레 소리에 매달렸으므로/ 앉아서 매달리고 서서 매달리고/ 무거운 무게만큼 쉴 수 없었던 한 생애가 아득하지/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문장이 될 수 없지/ 그래서 빗방울은 아득히 사무치는 문장이지//

동전 한 닢 / 허형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길바닥에 버려진 동전 한 닢/ 조심스럽게 주워 들었습니다.// 흙 속에 묻혀 삭아들지 않고/ 발바닥에 밟혀/ 누그러들지 않고/ 차바퀴에 깔려 오그라들지 않고// 길바닥에 버려진/ 동전 한 닢/ 정성껏 닦고 닦아 빛을 냈습니다.// 따스한 손 바닥에 꼭 쥐고/ 밟히고 깔려 멍이 들었을/ 아픔을 감싸 주었습니다.//

파도 / 허형만

파도를 보면/ 내 안에 불이 붙는다/ 내 쓸쓸함에 기대어/ 알몸으로 부딪히며 으깨지며/ 망망대해/ 하이얗게 눈물꽃 이워내는/ 파도를 보면/ , 우리네 삶이란/ 눈물처럼 따뜻한 희망인 것을.//

* 장사익의 노래 : 파도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홀로 걸을 때 / 허형만

이 신선한 바람이 얼마나 달콤한지/ 나도 모르게 입맛 다시며 두 손 모아 기도하네.// 이 초록 내음이 얼마나 귀를 간질이는지/ 나도 모르게 귀를 활짝 열고 그분을 찬송하네.// 햇살은 나뭇잎 위에서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고/ 멧새 두 마리가 가지 사이로 윤슬처럼 통통통 튀네.// 홀로 걸을 때,/ 나는 혼자가 아니네.// 바람과 초록 내음과 햇살이/ 수호천사처럼 동행하고 있네.//

산거山居 / 허형만

버드나무 하얀 꽃가루가/ 무슨 기쁜 소식처럼/ 계곡을 타고 둥둥 날아오른다/ 해맑은 새소리도/ 부리를 반짝이며 날아오르는 게 보인다/ 숲은 순식간에 들뜬다/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통통 뛰어 다니는/ 봄날 어린 햇살들/ 나는 약초밭에 물을 주다 말고/ 이런 광경을 신비롭게 바라본다.//

송광사의 아침 / 허형만

아침이라고는 하나/ 산문을 채 빠져나가지 못한 안개가/ 층층나무 무량층에 걸터앉아/ 조계산 등성이를 마악 건너온/ 넋새 한 마리 밤이슬 젖은 머리/ 쓰다듬어주고 있다 그려 그려/ 고생했네 고생했네/ 삭신도 내려놓으면 홀연/ 이 아침처럼 화엄이 보일 터/ 노스님 예불 소리에/ 처머 끝 풍경이 운다, 울어/ 깨끗해지는 한 생애여/ 무성한 시간의 수풀 사이로/ 나도 돌아갈 길이 보이는 듯.//

하안거 / 허형만

나도 이젠 홀로다, 이 나이에/ 언제라도 목숨 건 사랑 한 번 있었던가/ 저 미치게 푸르던 하늘도 눈에 묻고/ 살결 고운 강물도 귓속에 닫은 채/ 시간의 토굴 속에 가부좌 튼다/ 내 살아온 긴 그림자 우련하거니/ 누구를 만났던 기억은 더욱 가뭇하거니/ 아직도 무슨 미련 그리도 짙어/ 설풋설풋 서러워지느냐, 울고 싶어지느냐/ 알고 보면 인연이란 참으로 깊은 우물과 같은 것/ 평생을 누추한 내 안에서/ 우물을 파며 살아온 햇살이며 별들까지/ 목구멍에 손가락 쑤셔 넣어 토해 놓고/ 나도 이젠 홀로다, 이 나이에.//

백담사 가는 길 / 허형만

찔레꽃머리/ 아득히 흐르는 구름/ 먼산에 우렷하게 걸리고/ 구룡동천 계곡 아삼삼한/ 강대소나무 한 그루 미륵불로 서서/ 어서 오너라 환한 웃으심 보이십니다./ 여기서 백담사는 얼마나 남았지요/ 묻는 내 속마음 다 안다는 듯/ 애기똥풀 꿀을 빨던 모시나비/ 모시진솔 펄럭이며/ 저만치 앞서 날아갑니다./ 굼 깊은 산 물소리도/ 넌출넌출 따라갑니다.//

토굴(土窟) / 허형만

일찍이 다산 선생께서 이르시길/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거든 행동하지 말라 하셨거니/ 그 말씀 새삼 뼈에 사무쳐/ 수도원으로 갈까 절집으로 갈까/ 아니면 그 옛날 교부들처럼 사막으로 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법이 없더니/ 궁하면 통한다고 떠오른 묘수/ 바로 내 심장을 토굴로 삼기로 했지/ 이 심장 토굴에서 가부좌 틀고/ 눈 막고 귀 막고 입도 막기로 했지//

가짜 / 허형만

스님, 김남조 시인이 누님이시라면서요/ 옆자리에 앉은 오탁번 시인이 장난을 거신다/ 글쎄, 그게, 중이란 게 나이를 알지 못해서/ 큰 스님이 딴 청을 피우시다가 한 말씀 하시는데/ 나는 중 옷만 입었지 가짜 중이야/ 그 말씀이 끝나자마자 내 정수리가 뻥 뚫리는 듯했다/ 저리 큰 스님이 가짜 중이시라니, 그럼 나는?/ 가짜 교수? 가짜 시인?/ 어쩐지 요즘 육십 세월이 헐겁더라니/ 그날 밤 나는 오탁번 시인과 왕십리에서 대취했다//

황홀 / 허형만

세상의 풍경은 모두 황홀하다/ 햇살이 노랗게 물든 유채꽃밭이며/ 유채꽃 속에 온몸을 들이미는 벌들까지/ 황홀하다 더불어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내가 다가가는 사람이나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모두/ 미치게 황홀하다 때로는 눈빛이 마주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오, 황홀한 세상이여 황홀한 세상의 풍경이여 심장 뜨거운 은총이여//

그늘이라는 말 / 허형만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그 깊고 아늑함 속에/ 들은 귀 천년 내려놓고// 푸른 바람으로나/ 그대 위해 머물고 싶은//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영혼의 눈 / 허형만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 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냄새와 물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기억한다 / 허형만

나는 이스탄불에 가보지 못했지만/ 1902년에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터키의 혁명시인을 기억한다./ 1962년 3월 28일/ 예순 살이 되어 프라하 - 베를린 간/ 기차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못할 여행처럼/ 세상이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며/ 밤이 내리는 것을 좋아한/ 터키의 외롭고 쓸쓸한 시인을 기억한다./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들'*을/ 내 나이 칠십 중반에서야 깨닫게 해준/ 나짐 히크메트를 기억한다.//
* 나짐 히크메트(1902~1963)의 시 제목

안개 / 허형만

밤새 머물지 못한 영혼들이 있었으리// 그래 새벽은 안개를 낳고/ 떠다니는 영혼, 그 중에서도/ 상처받은 영혼들을 감싸주고 있으리//

저녁은 / 허형만

어떤 이는 돈에 목말라 하고/ 어떤 이는 사랑에 목말라 하고/ 어떤 이는 권력에 목말라 하고/ 그렇게 목말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처럼 저녁은 시원한 바람을 강물처럼 풀어 놓는다/ 지금처럼 저녁은 목말라 하는 자들을 잠 재운다/ 어찌 어찌 숨어 있는 야생화처럼/ 영혼이 맑은 삶들만 깨어 있어/ 갈매빛 밤하늘 별을/ 무슨 상처처럼 어루만지고 있다.//

가는 길 / 허형만

이제부터는 그냥/ 웃기만 하기로 했다/ 실성했다 해도/ 허파에 바람 들었다 해도/ 이제부터는 그냥/ 웃기만 하기로 했다/ 내가 가는 길/ 훤히 트이어 잘 보이므로.//

이름을 지운다 / 허형만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대로/가까우면 가까운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 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 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

뒷굽 / 허형만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석양 / 허형만

바닷가 횟집 유리창 너머/ 하루의 노동을 마친 태양이/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솔광이다!'/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좌중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더는 늙지 말자고/ '이대로!'를 외치며 부딪치는/ 술잔 몇 순배 돈 후/ 다시 쳐다본 그 자리/ 키 작은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바닷물도 눈자위가 불그족족했다.//

석도에서 / 허형만

이곳에선 신라인/ 장보고를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장보고를 찾으려면/ 장보고를 묻지마라/ 장보고를 아는 사람은 없고/ 법화원을 아느냐 물어야/ 비로소 장보고를 만날 수 있느니/ 장보고가 세웠다는/ 赤山 법화원/ 나도 NO.0012534번째 손님으로/ 석가여래 옆 그림 속/ 신라인 장보고를 가까스로 만났느니.//

사리를 거느리시는 분 / 허형만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가 되셨다는/ 느티나무 한 그루 가부좌 틀고 계셨다/ 수많은 사리들을 거느리시며// 내가 보기엔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이시지만/ 원래 사람이 매긴 나이란 게/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되는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 넓으신 그늘에 쉬다가// 어찌나 한기가 드는지 벌떡 일어나/ 두 손 모으고 우듬지가 보일 때까지 우러렀다/ 한사코 햇살 탓만은 아닐 터/ 휘추리와 애채 사이를 포롱포롱 건너다니는/ 멧새의 깜직한 발가락이 은비늘처럼 번득였다/ 그때였다 수많은 사리들은 서로 몸을 비벼댔고/ 고요한 파동은 서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와는 무관한/ 수많은 사리를 거느리신 분 한 분 계셨다/ 세상의 발자국도 가는체로 걸러내시며/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이순耳順의 어느날 / 허형만

달빛에 흔들리는 댓잎처럼/ 여직 내 몸에서/ 푸른 비린내 서걱이는 소리 들린다/ 이 나이면 낯빛 우럭우럭 해지는/ 해거름 바닷가에 쯤 나앉아 있는 듯 하여/ 구름발치 머언 들목 쪽 향해/ 깨금발 딛고 목 뺄일 없을 듯 하여/ 산절로 나절로/ 이 아침 맑은 바람이나 벗삼고/ 연꽃처럼 풍란처럼/ 멀리 갈수록 맑아지는 향기나 머금으려 했더니/ 어인 일이냐 내 몸이여/ 댓잎에 흔들리는 달빛처럼/ 아직도 자욱한 달안개 속이라니//

바람칼 / 허형만

새가 지상을 박차 오르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날개는/ 칼이 된다./ 예리한 칼날이 된다./ 잠시라도 한눈팔면/ 허공에 갇히거나/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발버둥치는 시의 날개가 바로/ 바람칼이다.//

괭이밥 / 허형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땅을 기어보았느냐// 그 누구도 눈길 주지 않는/ 이 후미진 땅이 하늘이라면/ 한 목숨 바쳐 함께 길 수 있겠느냐/ 기다가 기다가/ 결국 온몸을 놓아버린 자리에서/ 키 작은 꽃 하나/ 등불처럼 매단다면 곧이듣겠느냐.//

번짐과 스밈 / 허형만

번지는 것과 스미는 것은 차이가 있을까요?// 유치원 앞을 꺾어 돌 때/ 아직 아이들이 등원하기에는 이른 시각/ 보랏빛 나팔꽃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아이들이 깔깔깔 유치원에 들어서면/ 나팔꽃은 환한 얼굴로 반길 것입니다./ 조금 뒤에 도착해 문 앞에 서 계시던 하느님도/ 아이들과 나팔꽃을 배경으로 셀프카메라를 찍으시겠지요.// 번지는 것과 스미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없을 겁니다.//

풀꽃은 풀꽃끼리 / 허형만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가난이야 하나님이 주신 거/ 때로는 슬픔의 계곡까지 몰려갔다가/ 저리 흐르는 게 어디 바람뿐이랴 싶어/ 다시금 터벅터벅 되돌아오긴 하지만/ 도회지 화려한 꽃집이 부러우랴/ 밤안개 아침 이슬 모두 함께이거늘/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외로움이야 하느님이 주신 거/ 사람 속에 귀염받는 화사한 꽃들은/ 사람처럼 대접받고 호강이나 하겠지만/ 때로는 모진 흙바람 속에/ 얼마나 시달리며 괴로워하리./ 때로는 무심히 짓밟는 발에 뭉개져/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리./ 시르렁 시르렁 톱질한 박일랑/ 우리사 연분없어 맺지 못해도/ 궂은 날 갠 날도 우리 함께이거늘/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초여름 / 허형만

물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

푸른 냉장고 / 허형만

천하의 전기는 푸른 눈빛을 번득이며 다 이곳으로 모이죠 들어 보세요 심호흡을 끝낸 새가 절벽에서 날아오르려는 찰나의 숨소리 전류를 타고 도착했어요 사막여우의 발끝에서 튕긴 따가운 햇살도 꼬리를 내리고 막 도착했네요 수은등보다 더 은밀한 불빛이 반란을 꿈꾸는 시간, 안개보다 짙은 선팅으로 감추려 해도 꿈은 늘 들키기 마련이지요 쪽방에서 발견된 시체처럼 아껴 놓은 사과 한 알이 이미 굳어 있어요 축제 때 받은 붉은 꽃잎도 입술이 보라색으로 변해 버렸네요 칸칸마다 푸른 인광이 번득이는 풍문이 빙하처럼 둥둥 떠 다녀요 밀폐 용기는 믿을 게 못 돼요 그러니 함부로 문 열지 마세요 문단속 잘하세요 머리카락 보이지 않게 꼭꼭 잘 숨으세요 풍문이 탈출하면 풍문은 태풍으로 돌변해요 냉장고는 그래서 늘 위태해요//

가을노래 / 허형만

가을에는 그대여 서로 위로하자/ 햇살은 빛나/ 강물의 피부가 저리 곱고/ 들꽃 한 송이도/ 따뜻한 대지에서 향그롭나니/ 우리네 삶이/ 비록 흔들리는 절망이래도/ 가을에는 그대여/ 서로의 슬픔을/ 꼬옥 껴안을 일이다// 가을에는 그대여/ 서로 감사하자/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길손이 안식을 찾듯/ 우리네 지나온 세월/ 삶의 이랑이랑 넘치던 치욕/ 이제는 조용히/ 안으로 다스리고/ 풍성한 식탁 위에/ 한 줄기 사랑의 등불을 밝혀/ 가을에는 그대여/ 눈물겨운 감사의 기도를/ 서로 간직할 일이다//

맨발 / 허형만

미얀마에서는 파고다에 들어설 때마다/ 신발을 벗어야 한다/ 미얀마에서는 부처님 앞에서/ 맨발이어야 한다/ 맨발처럼 가장 낮은 마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지상의 고독, 지상의 슬픔도/ 모두 맨발보다 더 위에 떠도는 것/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공처럼 구부려야/ 따가운 지상과 입 맞추는 맨발이 보이느니/ 맨발은 자신이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존재임을 안다/ 맨발은 자신이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가장 순수한 영혼임을 안다//

생명의 무게 / 허형만

모든 생명의 무게는 동일하다./ 한 방울의 물에도 갚아야 할 빚이 있고/ 눈송이 하나가 댓잎을 구부리며/ 풀잎 한 촉도 살 떨리는 칼날을 품는 법,/ 저 알몸으로 빛나는 자작나무 우듬지 끝/ 피 흘리지 않고 지켜낸 목숨이 어디 있을까./ 북한산이 내려 보낸 중랑천 물줄기가/ 마침내 서해에 닿기 전 꿈의 비늘로 번득이는 것을/ 상상하던 시인의 지혜도 그랬으리라./ 내가 숲속에서 참나무와 오리나무 곁을 지날 때/ 바람이 살짝 내 뒤통수를 치고, 잎들은 살 섞는/ 푸른 냄새로 부풀어 오를 때/ 십리 밖쯤에서 터지는 우레 소리였던가 아무튼/ 이 지상의 모든 생명의 무게는 동일하다.//

詩의 房 / 허형만

부끄러운 힘.// 손 한 마리 끌/ 힘도 없으면서// 문고리 문고리마다/ 있는대로 다/ 끌어당기려고 하는구나.//

왜 이다지도 유정해지는냐 / 허형만

봄날/ 하늘하늘 날리는/ 꽃잎만 보아도 눈물이 난다/ 꽃잎에 반짝/ 머금은 햇살에도 눈물나더니/ 소주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보고 싶다 생각만으로/ 눈물부터 피잉 도니 어인 일이냐/ 보이는 것마다/ 생각하는 것마다/ 왜 이다지도 유정해지느냐/ 몹쓸 눈물이 먼저 뽀르르 앞서느냐//

풀벌레 소리 / 허형만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 중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새벽 산책 중에 들었던 소리 중에서/ 가널가널한 풀벌레 소리만 입력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땅으로 되돌려 보내세요/ 먼 훗날 어느 새벽 별 하나 돋듯/ 고객님의 음성사서함이 켜지면/ 갈매빛 만만한 풀벌레 소리/ 비로소 가슴 적시는 사랑인 줄 알겠지요//

운석隕石을 어루만지며 / 허형만

함께 있다는 것, 길림성吉林省운석박물관에서 8백 만 년 전에 길을/ 잃은 별 하나 어루만지며, 함께 있다는 것이 이토록 짜릿한 걸 잊고/ 살았다. 사랑하는 당신, 지금 나의 손바닥에 신호를 보내고 있는 이/ 우주의 박동소리처럼 나도 당신의 심장 속에 별로 박히고 싶다.//

시인 나무 / 허형만

시인이 죽어 나무로 서 있다// 그 흔한 시비도 없이/ 죽은 시인은 비목처럼 서 있다/ 강화도 전등사 뒷산/ 김영태 시인 나무 어깨 너머/ 오규원 시인 나무 서 있다/ 시인 오규원은 소나무/ 시인 김영태는 느티나무/ 두 나무 사이를 오가며/ 사람도 저리 나무가 될 수 있음을 본다/ 나무도 이리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안다//

이성선 시인 / 허형만

신선봉이 어느날 사람 옷 입고 세상에 나와/ 세상을 거닐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이성선이라고도 하고 시인이라고도 하고 그가/ 육십 년을 살았다고도 전하나 그를 다스렸던/ 설악산이 보기엔 그는 풀잎이었고 이슬이었고/ 별이었고 구름이었다 적요의 골짜기를 흐르는/ 한줄기 바람이었다// 그가 세상을 건너간 뒤/ 세상엔/ 무엇 하나 건드려진 게 없었다/ 무엇 하나 상한 게 없었다//

생강나무 / 허형만

누군가가 목매달기로는 너무 부드러운/ 세상에서 가장 선한 빛으로 물든 나무를/ 동네 뒷산에서 만났네.// 모시나비 날개처럼 투명한 이파리마다/ 시간의 물결소리 번지는 듯/ 저 푸른 하늘 더욱 푸르기만 한데// 한 세상 치명적인 만남은/ 아예 아니 만남만 못한 것이라// 본향의 침묵으로 되돌아가고자 염원하는// 세상에 병든 영혼 하나/ 말없는 생강나무를// 두 손 모아 우러러 경배하고 있네.//

시골 공소 돌담 아래 /허형만

시골 공소 돌담 아래/ 한쪽 뿌리가 잘린 고욤나무/ 가슴에 받아/ 온몸으로 보듬고 앉아 있는/ 소나무 한 그루 있다// 세상을 건너가다 보면/ 나도 누군가의 포근한/ 가슴이 되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살면서 누군가의 따뜻한/ 눈물이 되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랑론 / 허형만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땐 한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 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 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 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녁 창가에 앉아/ 새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눈부신 날 / 허형만

참새 한 마리/ 햇살 부스러기 콕콕 쪼아대는/ 하, 눈부신 날//

홍매(紅梅) / 허형만

나무 의자 하나가/ 늙은 홍매 아래에서/ 온몸으로 꽃잎을 받는다/ 꽃잎 사이 사이/ 꽃그늘도 받는다// 꽃잎과 꽃그늘에 어린/ 한 삶이 저리 고울 수가 없다//

사랑의 등불이 빛나는 아침 / 허형만

춘설차 새잎 돋는 소리로/ 귀가 시려운/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분다.// 머언 인생의 향로 위에/ 펄럭이는 의지의 깃발을 꽂고/ 우리네 사랑의 등불 하나/ 불 밝혀 빛나는 아침,// 이제 돛을 올려라/ 두 몸이 한몸 되어/ 힘차게 향로를 달리리라.// 때로는 비바람 풍랑 속에/ 때로는 깊은 밤 어둠 속에/ 고난의 뱃길에도/ 사랑의 등불만은 더욱 빛나리니// 主여, 어둠을 헤치시고/ 主여, 비바람을 막으시고/ 우리네 사랑의 등불을 지키소서./ 영원에서 영원으로/ 빛나는 불빛이/ 사그러들지 않게 하소서./ 꺼지지 않게 하소서.//

녹을 닦으며 -공초14 / 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환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었던 뽀요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평창 / 허형만

내가 처음 평창에 갔을 때/ 은빛 피라미 떼처럼 반짝이는/ 계곡 물소리에 하늘이 참 빛났다/ 내가 다시 평창에 왔을 때/ 그 빛났던 물소리 꽃으로 피어/ 만나는 사람마다 손에서 향기가 났다//


 

허형만 시인
194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중앙대 국문과 졸업, 성신여대 대학원 문학박사. 국립 목포대학교 인문대학장,교육대학원장,인문과학연구원장 역임.. 1973년 『월간문학』등단.

시집으로 『淸明』『풀잎이 하나님에게』 『모기장을 걷는다』 『입맞추기』 『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供草』 『진달래 산천』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비 잠시 그친 뒤』 『영혼의 눈』 『가벼운 빗방울』 『불타는 얼음』 『황홀』 등 17권과 일본어시집 『耳を葬る』(2014), 중국어시집 『許炯万詩賞析』(2003). 활판시선집 『그늘』(2012), 한국서정대표시 100인선 『뒷굽』이 있다. 시선집으로 『새벽』, 평론집으로 『시와 역사 인식』 『영랑 김윤식 연구』 등이 있다.

전라남도문화상 우리문학작품상 편운문학상 한국예술상, 한국시인협회상, 심연수문학상, 펜문학상, 광주예술문화상 대상, 순천문학상, 월간문학상 동리상, 영랑시문학상, 문병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2년 영국 IBC인명 사전에 <세계의 시인>으로 등재되었고 2005년 영국 IBC인명 사전에 <세계 100대 교육가>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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