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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최승자 시인

부흐고비 2021. 5. 16. 07:59

자화상 / 최승자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 최승자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아침이 밝아오니 / 최승자
아침이 밝아오니/ 살아야 할 또 하루가 시큰거린다/ “나는 살아있다”라는 농담/ 수억 년 해묵은 농담//

얼마나 오랫동안 / 최승자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아왔나/ “보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아으 비려라/ 이 날 것들의 生)// 구름이 우르르 서쪽으로 몰려간다//

나는 벽만 바라보고 있구나 / 최승자
혁명은 인류의 낡은 꿈/ 이미 잊혔어야 할 꿈// 삭막하다 막막하다/ 사회적 고통 없이는 존재 감각을 못 느끼는 저급한 동물이 인간이다// (나는 벽만 바라보고 있구나)//

쓸쓸한 文明 / 최승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노자와 장자의 말씀이다/ 혁명은 제3차원적인 사회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희비극적 풍경이다/ “인간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그 풍경의 한 철학적 극치이다// 낯가리고 울다 웃는 이 文明의 본성// 쓸쓸히 한 文明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초월이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시들어 떨어져도/ 허공 속엔 여전히 바람이 불어가고 있겠지요)//

참 우습다 / 최승자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쓸쓸해서 머나먼 / 최승자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스스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또다시 병실 / 최승자
또다시 병실/ 마치 희곡 같다// "무대는 그녀의 집 안방"/ "무대는 또다시 어느 병실"// 세계가 환자들만 있는/ 병실이라면, 끔찍한 생각.// 구나 제 집 제 방에서/ 달팽이처럼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행복스럽다// 왜 어떤 사람들은/ 이리 불리우고 저리 불리우면서/ "이 거리 한 세상을 저어가*"는 것인지//
* 본인의 시 "부질없는 물음" 중에서 나오는 구절임

비, 꽃, 상처 / 최승자
하늘에서 푸른 물의 상처가 내린다./ 떠도는 스물 넷의 이마 위에,/ 하나씩 버리며 벗어 버리며/ 내가 마지막으로 눕는 꿈 위에/ 쏟아지는 비의 푸른 채찍질.// 꽃잎에서 슬픔의 수액이 돋는다./ 부끄럽게 비어 버린 알몸에/ 죽은 꿈의 문신이 돋아난다. 시간이 황량하게 고인다.// 누가 열렬한 슬픔의 눈을 뜨고/ 꽃의 중심에서 울고 있나/ 하나씩 꿈을 떠나보내며/ 누가 빈 몸으로 울고 있나// 허리에 감기는 비의 푸른 채찍/ 꽃. 상처. 스물 넷.//

삼십세 /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마흔 / 최승자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미흔, 가을 / 최승자
누군가,/ 옛다. 먹어라./ 던져주시네.// 내 입 전면에 처박힌/ 땡감도 못 되는/ 홍시도 못 되는,/ 이 감.// 에잇, 이 감을,/ 에잇, 냅다/ 뽑아 되던지려 하니,// 가을 하늘이데,/ 홀로 청청한 하늘님이데.//

내 청춘의 영원한 /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어떤 아침에는 / 최승자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내가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숨죽일 때/ 속절없이 다가오는 한 풍경./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 (내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이십 세기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외롭지 않기 위하여 /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해남 대흥사에서 / 최승자
깊은 밤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고/ 우리의 손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찾는다./ 우리 몸 속에서 오래 잠자던 물살이/ 문득 깨어나 흐르고// 비가 오리라/ 바다 건너서/ 그대의 땅을 적시며,// 산사의 계곡/ 하늘의 빈 술잔엔/ 서푸른 취기의 바람이 일렁이고/ 지금 어느 산맥 뒤에서/ 두 연인의 손이 만난다.//

下岸發(하안발) / 최승자
그는 안에서 열고/ 밖에서 잠근다./ 혹은 밖에서 열고/ 안에서 잠근다.// 그는 밖으로 나가며 안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가며 밖을 잠근다.// 그에겐 안이 온 세상,/ 밖이란 온 세상 안에 널린 모래알들 중의 하나,/ 그는 더 안으로 들어가며 또 밖을 잠근다./ 그는 더 더 안으로 들어가며 또 또 밖을 잠근다.//

下岸發 1 / 최승자
詩로써 깃발을 올릴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내가 詩로써/ 무슨 깃발을 올릴 수 있으랴./ 나의 삶 자체가/ 시종 펄럭거리는/ 찢어진 깃발인 것을.// ---오, 바람에 끊임없이/ 창문들이 휘날리는군./ 네 머리를 잘 걸어둬./ 날아갈라. 날아가, 그나마/ 하수구에 처박힐라.//

下岸發 2 / 최승자
하지만 이젠 정말 모르겠어./ honey인지 money인지,/ root인지 roof인지.// 하지만 이젠 정말 모르겠어./ 슬픔인지 수프인지./ 실체가 없어졌어./ 혓바닥의 감각이 없어졌어.// (이 고통의 개밥 그릇을/ 내 앞에서 치워다오./ 나는 개가 아니다.)//

下岸發 3 / 최승자
나는 개종하고 싶다.// 커다란 수족관 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 전기 장치로 공급되는/ 산소와 미네랄과 또 무엇과 무엇과/ 정부와 국가와 민족과 글로벌이…… 있고/ 그 안에 또 어떤 물고기들이/ 벌이는 걸프전이 있고……/ 이 하염없는, 미지근한 수족관에서/ 나를 바다로 이주시켜다오.// 나는 개종하고 싶다.//

下岸發 5 / 최승자
죽은 사람의 손톱 발톱 머리칼 자라듯,/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누워 있는 흐린 구름장들을 바라보면서/ 키 작은 여자는 낮은 창 곁에서/ 하루하루를 살해한다.// 현세는 너무 비좁은 감옥이라고,/ 꿈꿀 수 있는 가장 큰 지도를 그리겠다고,/ 흐린 구름들이 엎어질 둣/ 코를 박고 있는 낮은 창 곁에서/ 키 작은 여자는 하루하루를 삭제시킨다.// 오직 한개씩의 커다란 눈망울만을 달고 흔들리는/ 해바라기들, 해바라기 들판의 무한을 꿈꾸면서.//

참, 소나 나나 / 최승자
댓 마리의 소가 하루종일 씹고 있다. 먹이가 없는데도 무진장 씹고 있다. 하릴없이 창가에 턱 괴고 앉아 나도 정처없이 씹는다. 소들이 반추로써 풀이하는 세계를 나도 열심히 씹어 풀이해볼 수 있지 않을까 반추하면서// 가엽기도 해라. 되씹기는 게으른 자들의 그림자 밟기 놀이 아니겠는가. 참, 소나 나나.//

서역 만리 / 최승자
우린 마치 저 쇼 윈도에 보이는/ 줄줄이 꿰인 채 돌아가며 익혀지는 통닭들 같아./ 우린 실은 이미 죽었는데, 죽은 채로/ 전기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회전하며 구워지는 거,/ 그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지. 죽음은 시시한 것이야./ 왜냐하면 우린 이미 죽어있으니까./ 이미 죽어 꽂혀져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기가 막히게 그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야./ 삶이 이미 죽어 있는데, 죽음이란 얼마나 시시한 것이겠어?/ 그건 하나님이 전기 콘센트에서 플러그를 배버릴 때/ 우리 모두가 무표정하게, 일동 멈춰섯! 하는 것 뿐이야.// 이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역 홍대 입구에서 문지사까지/ 걸어가는 그 거리가 얼어붙은 서역 만리로구나.//

물 위에 씌어진 2 / 최승자
현존재는 저마다 하나의 항구여서/ 밀물 썰물 수시로 들락거려도/ 존재는 먼 등대 위로/ 홀로 비상하는 자유의 갈매기// (허공 저 멀리/ 구름 산수화 한 점/ 아득히 흘러가고 있다)//

未忘 혹은 備忘 3 / 최승자
생명의 욕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죽음의 새,/ 죽음의 헛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삶의 새.// 한 마리 새의 향방에 관하여/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하늘은 늘 푸르를 것이다./ 보이지 않게 비약의 길들과/ 추락의 길들을 예비한 채./ 마침내의 착륙이 아니라./ 마침내의 추락을 예감하며/ 날아오르는 새의 비상―/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춤추는/ 작은 새의 상한 깃털.//

未忘 혹은 備忘 4 / 최승자
넘치는 현존의 거리,/ 그만큼 또한 넘치는 부재적 실존들이여./ 그 모든 부재들 중의 부재로서/ 나 피어났네./ 검은 독버섯처럼.// 뛰기 싫어 내 인생은 지각했고/ 걷기 싫어 내 인생은 불참했지.// 오 그 모든 빛나는-/ 내가 불참했던,/ 오 그 모든 빛나는-/ 내가 부재했던,/ 그 자리들이여./ 이제 내가 내 부재의 그림자로서/ 전세계 위에 뻗어 누우려 하네.//

未忘 혹은 備忘 5 / 최승자
어떻게 잠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할 것인지./ 이제 개들은 머뭇거리며 골목 안으로 꼬리를 숨기고/ 침묵은 오래도록 홀로 신음할 것이다.// 잠으로 들어가는 저 입구가 두렵다./ 검은 굴속에서 꿈은 또 물고늘어질 것이다./ 꿈은 물어뜯고 물어뜯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악몽의 환각이,/ 두려운 생시의 파편들이 번갯불처럼 번쩍일 것이다./ 한 테마의 연속적인 꿈들과/ 그 사이의 단절된 악몽의 환각들의 폭발./ 잠으로 들어가는 저 입구가 두렵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독한 하이타이로/ 수백 번 빨아 헹구고 쥐어짠/ 거덜난 누더기 옷감처럼 나는 또다시/ 아침의 햇빛 속에 내동댕이쳐져 있을 것이다.//

未忘 혹은 備忘 6 / 최승자
말로든 살로든 못내 비비고/ 싶어하는 한 마리의 포유 동물./ 그 뇌 속 회백질의 긴 회랑 속에서/ 언제나 울리고 있는 발자국 소리들./ 사라지지 않는 발자국 소리들.// 그래, 이 시간에도 추억들이,/ 차디찬 도랑물 속에 추억들이,/ 눈 꼭꼭 감은 시체들이 줄지어 떠내려가고,/ 기억의 짐을 싣고 밤배는 또 고단히/ 요단강을 거슬러오를 것이다.//

未忘 혹은 備忘 8 / 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쁜 물소리로 가득하고/ 길들 모두 명상의 침묵으로 가득하리니/ 그때 비로소/ 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 새로 하나 트이지 않겠는가.//

未忘 혹은 備忘 13 / 최승자
고독이 창처럼 나를 찌르러 올 때/ 나는 무슨 방패를 집어들어야 하나./ 오 그 방패는 어디 있나./ 그냥 온몸 온 정신이 방패인 것을.// 어느 날 마침내 죽음을 동반한 고독이 찾아올 때까지는,/ 영원 불멸, 신생 부활의 방패인 것을.// 그러므로 오늘도 고독의 창 앞에 쏟아부을/ 충분한 피를 준비해두자./ 살아 있는 한 내 피는 항상 충분하므로.//

未忘 혹은 備忘 14 / 최승자
나를 빨아들이는 길./ 나를 뱉아내는 길./ 빠져나올 수 없는 길./ 들어갈 수 없는 길.// 영원토록 길이 나를 가둔다./ 영원토록 길이 나를 해방시킨다.// 떠나야 할 시각이 길게 드리워진다./ 그가 끝나도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길 모퉁이에 이따금씩/ 추억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우연의 형식들로 다가오는 모든 필연을 견디면서/ 이미 추억이 다 된 나무 한 그루/ 백발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未忘 혹은 備忘 15 / 최승자
이미 지나왔던 이 길, 이제 비로소 선택하리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길./ 망막의 뒤편에 쌓인 응집된 추억들은 다시 한 올씩 풀려지고 기억 속의 들꽃들이 저 혼자 흔들리는 곳,/ 이제 처음으로 시작하는 길, 되돌아가는 길./ 희망은 길고 질기며 절망은 넓고 깊은 것을……//

너에게 / 최승자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청계천 엘레지 / 최승자
회색 하늘의 단단한 베니아판 속에는/ 지나간 날의 자유의 숨결이 무늬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청계천엔/ 내 허망의 밑바닥이 지하 도로처럼 펼쳐져 있다./ 내가 밥먹고 사는 사무실과/ 헌책방들과 뒷골목의 밥집과 술집,/ 낡은 기억들이 고장난 엔진처럼 털털거리는 이 거리/ 내 온 하루를 꿰고 있는 의식의 카타곰.// 꿈의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돼지처럼 살찐 권태 속에 뒹굴며/ 언제나 내가 돌고 있는 이 원심점,/ 때때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튕겨져 들어와 돌고 있는 원심점,/ <그것은 슬픔>//

봄 / 최승자
(잎도 피우기 전에 꽃부터 불쑥 전시하다니,/ 개나리, 목련, 이거 미친년들 아니야? 이거 돼먹지 못한 반칙 아니야?)// 이 봄에 도로 나는 환자가 된다./ 마음 밑 깊은 계곡에 또다시/ 서늘한 슬픈 물결이 차오르고/ 흉부가 폐광처럼 깊어진다.// 아, 이 자지러질 듯한 봄의 풍요 속에서/ 나 어릴 때 흥얼거렸던 그 노래/ 이젠 서러운 찬송가처럼 들리네.// “설렁탕 거룩한 탕 끓여 가려고/ 오늘도 모여 있네, 어린 동포들.“//

올여름의 인생 공부/ 최승자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x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x x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가을 / 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흐린 날 / 최승자
흐린 날엔 골 뚜껑을 닫아라./ 그 위에 굵은 대못을 꽝꽝 박아라./ 모든 입력과 출력을 거부하라./ 전원을 off하라./ 네 뇌수의 화면엔/ 아무것도 들어가지 못하고/ 아무것도 나타나지 못하고// 그저 화면 자체의/ 희뿌연 빛으로만 빛나게 하라.//

비오는 날의 재회 / 최승자
하늘과 땅 사이로/ 빗줄기는 슬픔의 악보를 옮긴다/ 외로이 울고 있는 커피잔/ 무위를 마시고 있는 꽃 두 송이/ 누가 내 머릿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현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흙 위에 괴는 빗물처럼/ 다시 네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너는 생생히 웃는데/ 지나간 시간을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네 입맞춤 속에 녹아 있던 모든 것을/ 다시 만져 볼 수 없다.// 젖은 창 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기울고 있다/ 이제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장마 / 최승자
넋 없이 뼈 없이/ 비가 온다/ 빗물보다 빗소리가 먼저/ 江을 이룬다/ 허공을 나직이 흘러가는/ 빗소리의 강물/ 내 늑골까지 죽음의 문턱가지/ 비가 내린다/ 물의 房에 누워/ 나의 꿈도 떠내려간다//

 

                그거 / 최승자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는거, 그거/
담배는 끊어도 커피는 못 끊겠는 거, 그거/
커피는 끊어도 목숨은 못 끊겠는 거, 그거//

믿지 못하는 사이/ 두 발이 푹푹 빠져들어간다/ 빠져들어가는 것까지도/ 믿지 못하는 사이로/ 두 발은 더욱 습한 곳으로/ 푹푹 빠져들어간다//

(나의 이성과 감정은 언제나/ 나의 현실보다 뒤지는 거, 그거)//


무슨 꽃을 / 최승자
무슨 꽃을 보여주랴?/ 마술 상자 속에 꽃이 다 떨어졌으니.// 아마도 이대로 이렇게,/ 초월인지 체념인지/ 햇빛인지 달빛인지/ 육십 평생이 맥빠진 산문처럼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내 귀 가까이에선/ 분명한 시계 초침 소리./ 일초일초 분명히 나를 비웃으며/ 시간이 내게 초치는 소리.// 삼십대의 허공에서 어느 한 순간,/ 너무도 지겨운 어느 한 순간,/ 나는 내 목숨의 끈을 가볍게 놓아버릴 수는 없을까?//

불안 / 최승자
깊은 밤하늘 위로/ 숨죽이며 다가오는 삿대 소리./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죽음이 나를 겨누고 있다./ 어린 꿈들이 풀숲으로 잠복한다./ 풀잎이 일시에 흔들리며/ 끈끈한 액체를 분비한다./ 별들이 하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쨍! 죽음이 나를 향해 발사한다./두 귀로 넘쳐오는 사물의 파편들./ 어둠의 아가리가 잠시 너풀거리고/ 보라! 까마귀 살점처럼 붉은 달이/ 허공을 흔들고 있다.//

일찌기 나는 /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족 / 최승자
몇 행의 시라는 물건이/ 졸지에 만원짜리 몇 장으로 휘날릴 수 있는 시대에/ 똥이 곧 예술이 될 수 있고, 상품이 될 수 있는 이 시대에/ 쓰자, 그까짓 거,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짓거./ 영혼이란 동화책에 나오는 천사지.// 돈 엄마가 돈 새끼를,/ 자본 엄마가 자본 새끼를 낳는,/ (오 지상을 뒤덮는 자본 종족)이 세상에서/ 자본의 새끼의 새끼의 새끼의 새끼가 시일 수 있다면/ (모든 시인은 부복하라)/ 오 나는 그 새끼를 키워 어미로 만들리라./ 인간이라는 고등 포유 동물을 넘어서는/ (저 아리안족 같은) 고등 자본 동물을 만들리라.// 곳곳에서 넘쳐나는 저 자본 동물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인간들이/ 자본科 파충류로 변해가는 것을,/ 오 내 팔뚝에 뱀의 살 무늬가 새겨지는 것을 지켜보는 이 슬픔./ 새들도 자본 자본 하며 울 날이 오리라.// (나에게 뽀스또 모단의 방식을 가르쳐다오,/ 나는 왜 이렇게 정통적으로밖에 얘기할 수가 없는지.)//

내가 구원하지 못할 너 / 최승자
어두운 너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등 돌리고 홀로 서 있는 너,/ 슬픔의 똥, 똥의 밥이다./ (너의 두 손은 뭉그러져 있었다.)// 내가 꿈에서도 결코 구원하지 못할 너./ 나는 다만 행간에서 행간으로/ 너를 곁눈질로 읽으면서/ 행간에서 행간으로/ 너를 체념하거나 너를 초월하면서……// 허무의 사제인 나는 오늘밤도/ 너를 위한 허무의 미사를 집행할 뿐이다.//

다 묻고 / 최승자
다 묻고/ 떠나자./ 삶은/ 서울은/ 더러운 것.// 문둥이가/ 제 상처를 핥으며/ 제 상처를 까발려 전시하며/ 끊임없이 생존을 구걸하는// 삶은/ 서울은/ 더러운 것.//

셔ᄇᆞᆯ 슐로스 / 최승자
입이 꿰매어져도/ 입이 떨어져나가도,/ 입이 기억하고 있는 입맛들이/ 없는 입 안에서 회오리칠 때,// 또 오누나, 저년/ 저 귀신 같은 년/ 천 번이나 나를 속여먹은,/ 화사하게 분 바르고 연지 곤지 찍은/ 여우 귀신 같은 저년/ 희망 혹은/ 내가 죽어야 사라질 신기루의 그림자./ 셔ᄇᆞᆯ 슐로스// 오늘도 측량사 K는 자신이 만든 지도를/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며 찢어버린다.//

악순환 / 최승자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무서운 초록 / 최승자
땅이 비밀의 열기를 뿜는다./ 새 소리가 허공에서 시든다./ 흰 하늘이 가만히 물러나고/ 몸 저린 잎잎이 뒤척인다./ 갈증난 푸르름이 점점 커진다./ 마침내 초록의 무서운 공황이 쏟아진다./ 모든 것은 끝나리라./ 시간은 멈추리라./ 공중에서 불타는 초록의 비웃음.// 땅 밑으로 밑으로 수액이 빨려들어간다./ 빈사의 공간이 너울거린다./ 태양이 영원히 정지한다./ 세상엔 귀신 같은 푸르름만 남는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에/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오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나는 기억하고 있다 / 최승자
길이 없었다/ 분명 길이 있었는데/ 길길이 뛰던 길이 있었는데// 길 끊어진 시간 속에서/ 어둠만이 들끓고 있었다// (셔터가 내려진 상가/ 보이지 않는 발자국들만 저벅거리는/ 불 꺼진 어둠의 상가)// 오십 년이 고요히 끝나 가고 있다/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길이 있었음을/ 길길이 뛰던 길이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기억의 집 / 최승자
그 많은 좌측과 우측을 돌아/ 나는 약속의 땅에/ 다다르지 못했다.// 도처에서 물과 바람이 새는/ 허공의 방에 누워, "내게 다오,/ 그 증오의 손길을, 복수의 꽃잎을"/ 노래하던 그 여자도 오래 전에/ 재가 되어 부스러져내렸다.// 그리하여, 이것은 무엇인가./ 내 운명인가, 나의 꿈인가,/ 운명이란 스스로 꾸는 꿈의 다른 이름인가.// 기억의 집에는 늘 불안한 바람이 삐걱이고/ 기억의 집에는 늘 불요불급한/ 슬픔의 세간살이들이 넘치고,// 살아 있음의 내 나날 위에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일찍이 나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하나이지만,/ 잠시 눈감으면 다시 닫히는 벽,/ 다시 갇히는 사람들./ 갇히는 것은 나이지만,/ 벽의 안쪽도 벽, 벽의 바깥도 벽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 세계/ 벽이 꾸는 꿈.// 저무는 어디선가/ 굶주린 그리운 눈동자들이 피어나고/ 한평생의 꿈이 먼 별처럼/ 결빙해가는 창가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귀여운 아버지 / 최승자 

눈이 안 보여 신문을 볼 땐 안경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박씨보다 무섭고,/ 전씨보다 지긋지긋하던 아버지가/ 저렇게 움트는 새싹처럼 보일 수가.// 내 장단에 맞춰/ 아장아장 춤을 추는,/ 귀여운 아버지,// 오, 가여운 내 자식//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 최승자
많은 사람들이 흘러갔다./ 욕망과 욕망의 찌꺼기인 슬픔을 등에 얹고/ 그들은 나의 창가를 스쳐 흘러갔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래, 끊임없이 나를 호출하는 전화 벨이 울리고/ 나는 피해 가고 싶지 않았다./ 그 구덩이에 내가 함몰된다 하더라도/ 나는 만져 보고 싶었다./ 운명이여.// 그러나 또한 끊임없이 나는 문을 닫아 걸었고/ 귀와 눈을 닫아 걸었다./ 나는 철저한 조건반사의 기계가 되어/ 아침엔 밥을 부르고/ 저녁엔 잠을 쑤셔 넣었다.//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물론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내가 당신을 창조했다는 것까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그 전화선의 마지막 끝에 동굴 같은/ 썩은 늪 같은 당신의 口腔이 걸려 있었다./ 어느 날 그곳으로부터 죽음은/ 결정적으로 나를 호명할 것이고/ 나는 거기에 결정적으로 응답하리라./ 타들어가는 내 운명의 도화선이/ 당신의 썩은 口腔 안에서 폭발하리라./ 삼십 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완성하기 위하여.// 늙은 니힐리스트, 당신은 피묻은 너털웃음을 한번 날리고/ 그 노후의 몸으로 또다시 고요히/ 허무의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리라./ 몇 천 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 위하여// 3.2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폰 가갸 씨의 肖像/ 최승자
9시, 사무실 출입문이 폰 가갸 씨를 기운차게 연다./ 의자가 걸어와 폰 가갸 씨 위에 앉는다./ 볼펜이 그의 손가락을 꼬나쥐고/ 활자들이 그를 꼬나보기 시작한다.// 12시, 점심이 그를 잘도 먹어 치우고/ 때가 되면 오줌이 유유하게 그를 갈긴다./ 때때로 심심해서 전화가 자꾸 그를 걸어 본다./ 여보십니까? 여보십니다! (존재의 딸국질)/ 시간이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면서/ 이윽고 월급 봉투가 그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6시 반, 54번 버스가 다시 폰 가갸 씨를 올라탄다./ 원효대교가 다시 홀라당 그를 넘어간다.// 현관문이 그를 열고 집어 넣는다./ 따뜻한 방바닥이 그를 때려눕힌다./ 잠이 아작아작 그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윽고!/ 꿈 속에서 대한민국이 열렬하게 그를 찬양하고/ 여의도 광장 한가운데에 그의 기념비를 세운다./ 코러스도 웅장하게 울려 퍼지며/ 우러러 찬미할지어다!//

가고 갑니다 / 최승자
하늘은 늘 파아란 해변// 한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먼 풍경// 이 식은 詩 한 사발 속에/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역사와 낙서/ 구름 공장들/ 민주주의라는 겉멋에 관한/ 민주주의라는 속맛에 관한 속살거림들// (가고 갑니다/ 이것도 가고/ 저것도 가고/ 가고 갑니다)//

언젠가 다시 한번 / 최승자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舞蹈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한 목소리가 / 최승자
한 목소리가 허공에 숨어 있다./ 눈빛을 반짝이며 십년을/ 숨어 떠돌던 목소리,/ 언젠가 누군가의 베개맡에서/ 사랑해라고 말했던 목소리.// 이윽고 말갛게 씻겨져 나간/ 백골의 추억으로 그대는 일어선다./ 그대의 비인 두 눈구멍을 뚫고/ 두 줄기의 바람이 불어 간다.// 뼈의 기타 가락이 별빛처럼 부서지며/ 별빛 같은 물이 흘러나오고/ 한번 스쳐가는 바람의 활에도/ 석회질의 추억은 맑게 울리며/ 홀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바다 위의 내 집에는/ 흰 파도의 침실이 하나......//

어디서 또 쓸쓸히 / 최승자
쓸쓸히 한 하늘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쓸쓸히 한 세계가/ 지고 있습니다// 어디서 또 쓸쓸히/ 꽃잎들은 피어나겠지요// 바람은 여전히/ 불어 가고 있겠지요// (전격적인 무궁한/ 해체를 위하여)// (오늘도 새 한 마리/ 허공을 쪼아 먹고 있군요)//

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 / 최승자
한밤중 흐릿한 불빛 속에/ 책상 위에 놓인 송곳이/ 내 두개골의 살의(殺意)처럼 빛난다./ 고독한 이빨을 갈고 있는 살의,/ 아니 그것은 사랑,// 칼날이 허공에서 빛난다./ 내 모가지를 향해 내려오는/ 그러나 순간순간 영원히 멈춰 있는,// 쳐라 쳐라 내 목을 쳐라./ 내 모가지가 땅바닥에 덩그렁/ 떨어지는 소리를, 땅바닥에 떨어진/ 내 모가지의 귀로 듣고 싶고/ 그러고서야 땅바닥에 떨어진/ 나의 눈은 눈감을 것이다.//

酸化 / 최승자
이 도시가 나를 산화시킨다./ 보이지 않는 벽에 들러붙어/ 천천히 나는 녹슬어간다.// 거대한 철판 같은 도시의/ 환한 어둠 위로/ 비가 내리고/ 나는 골목을 돌아 들어가고// 어느 싸구려 여인숙/ 客은 이미 잠들고/ 티브이 화면만이/ 주인 없는 셀룰로이드의 기억들을/ 저 혼자 지지거리고 있다.// (이제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최승자 시인은
1952년 충청남도 연기 출생, 고려대 독어독문과 수학.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 창작과 번역을 같이 해왔다. 2001년 이후 투병을 하면서 시작 활동을 한동안 중단하다 2006년 다시 시를 발표했다. 최승자는 현대 시인으로는 드물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시집으로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무덤, 푸르고》 《주변인의 초상》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 《물 위에 씌어진》 《빈 배처럼 텅 비어》 산문집으로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어떤 나무들은》 번역서로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 《침묵의 세계》 메이 사튼(May Sarton) 《혼자 산다는 것》등이 있다. 대산문학상, 지리산문학상, 편운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정신분열증… 11년 만에 시집을 낸 시인 최승자

"어떤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귀에서 환청(幻聽)이 들리고 내가 헛소리를 마구 내뱉고 있었지요." 시인 최승자(58)의 음성에서 쇳소리가 났다. 살가죽이 겨우 붙은 얼굴과 그 속의 쑥 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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