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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초혜 시인

부흐고비 2021. 5. 18. 09:17

조종현,조정래,김초혜 가족문학관

어머니 / 김초혜
한 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알아/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 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어머니 2 / 김초혜
우리를/ 살찌우던 당신의/ 가난한/ 피와 살은 삭고/ 부서져 허물어지고// 한 생애 가시어/ 묶여 살아도/ 넘어지는 곳마다/ 따라와/ 자식만 위해/ 서러운 어머니// 세상과/ 어울리기/ 힘든 날에도// 당신의 마음으로/ 이 마음 씻어/ 고스란히 이루어냅니다.//

어머니 3 / 김초혜
엎어지고/ 두려워도/ 편히 잠들고 깨서// 즐거운 새날이/ 되게 하시던 어머니/ 무덤에 볼을 대고/ 귀 기울이면/ 아직도 이별 못한/ 덜 삭은 뼈의 울림소리// 당신이/ 잃어버린 날을/ 되살려내며// 세상에서 제일로/ 고요한 웃음 그 웃음에/ 실리어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 4 / 김초혜
겨울 가고/ 봄이 와도/ 텅 비인 한나절/ 거친 삼베옷에// 흙덩이 베고/ 홀로 누운 어머니// 새 살로 돋아난/ 무덤의 들꽃/ 울면 울음이 되고/ 웃으면 웃음이 되어 주고// 언 가슴 매어 놓고/ 그곳에서는/ 봄으로 지내소서.//

어머니 5 / 김초혜
앉지도/ 눕지도 않고/ 한 평생/ 서서 지내던/ 어머니// 당신 살에/ 머물러 있는/ 눈물은/ 흐리고 햇볕 나고/ 춥고 더운 것을/ 다스리는/ 해입니다// 해를 싣고 떠나신 지/ 일 년 삼백 육십 일이/ 스무 번은 지났어도/ 다숩던/ 당신의 가슴이/ 아파 웁니다.//

어머니 6 / 김초혜
빈천도/ 고단하지 않은/ 당신의 의지는/ 미운 것 고운 것/ 삭임질하여/ 웃음으로 피우고// 작은 몸뚱이/ 힘에 부쳐도/ 가녀린 허리/ 닳지 않는 살로/ 우리의/ 담이 되어 주고// 인생의 무게/ 그날그날이/ 첫날처럼/ 무거워도/ 자식 앞에선/ 가볍게 지는 어머니//

어머니 7 / 김초혜
하늘과 땅은/ 갈라져 있어도/ 같이 있듯// 저승에 계신/ 어머니는/ 자식의 가슴에서/ 이승을 함께 하시고// 아플 일/ 아니어도/ 아프고/ 아파도/ 아프지 않은 마음// 저가/ 어미 되어 알고/ 깊이 웁니다.//

어머니 8 / 김초혜
안 감기는 눈/ 감으시고/ 감은 체/ 떠난 어머니// 골수가 흐르게/ 아파와도/ 약으로 나을 병/ 아니라시며/ 약 없이/ 천명(天命)으로/ 견디신 어머니// 어머니 떠나신 후/ 생명 안에서/ 죽음을/ 죽음 안에서/ 생명을/ 풀어가며 삽니다.//

어머니 9 / 김초혜
뇌출혈이라는 의사의 진단/ 정신을 놓으신 초췌한 모습/ 눈이 내리는 병원의 숲/ 그렁 고이는 눈물// 새벽은/ 아직도 혼수상태/ 나리꽃처럼/ 잠든 베드// 세상이 뒤집히는/ 어지러움 속에서도/ 내가 아는 건/ 혈압, 체온, 맥박/ 그리고 호흡/ 밤이 지나도 지나도/ 물이 오르는/ 뒤늦은 효도// 117호 병실에 가득 찬/ 그늘진 얼굴/ 흐느끼는 다리/ (혈압이 얼마죠)/ (120에 70입니다)/ 간호원의 한마디는/ 간사스럽게도/ 평정을 준다.//

어머니 10 / 김초혜
가시울을/ 껴안듯 살아도/ 피었다 이우르는/ 꽃을 보아도/ 조용한 그 모습// 하얀 가리마에/ 홀로 새긴/ 슬픔이 고였대도/ 정녕/ 임종이어야 합니까// 촛불을 켜도/ 비인 방/ 반가운 이 와도/ 비인 집// 어머니/ 참말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까// 바늘쌈에/ 아직도/ 바늘은 꽂혔는데/ 머리를 풀어라/ 머리를 풀고 곡을 하란다.//

어머니 11 / 김초혜
꿈에/ 울고 난 새벽/ 가슴에 묻힌/ 어머니 무덤에/ 무슨 꽃이 피었던가// 뒷산골에/ 부엉이 울다 가면/ 그 산에 가득한/ 어머니 얼굴// 현(絃)이 끊기고/ 말았던가/ 하늘빛이/ 변했던가// 꽃필 날/ 다시없을/ 뿌리가 뒤집힌/ 나무들은/ 생명이 병보다/ 더 아프단다.//

어머니 12 / 김초혜
어머니는 무덤에 계시면서도/ 농 속에도 계시고/ 부엌이나 장독대/ 시장 구석구석/ 어물전에도 계시어/ 손끝에 묻은/ 생활의 때를/ 빛내주신다// 어둑해오는 봄날 저녁/ 상긋한 산나물에서도/ 숱한 이야기는 살아나/ 살이랑마다/ 고뇌를 짠다// 살면서 멀어질 줄 알았던/ 베쪽같이 해쓱한/ 마지막 모습은/ 이승과 저승에 다리를 놓는다// 퍼덕이는 외로움 물고/ 젖은 구름을 타고/ 떠난 어머니/ 살 익은 입김에/ 가슴 메여/ 뒤채이다 나면/ 남겨두신 정(情)에 운/ 꿈이었다.//

어머니 13 / 김초혜
홀로 삭이어/ 보내신 일월(日月)/ 마디마다 고여 오는/ 피멍든/ 그리움에/ 천추(天秋)의/ 길목에 서서/ 울고 계시던/ 어머니// 차곡차곡 접어둔/ 옷 갈피 사이에/ 하얗게 바래진/ 당신의 멍에// 임 없던 빈자리에/ 묻어둔 고통이/ 싸늘한 체온 되어/ 임종입니다.//

어머니 14 / 김초혜
무덤의 습기가/ 가슴을 적시었대도/ 어머니/ 아직은 눈을 감지 마셔요// 목숨의 불꽃을/ 끄고 가시던 삼월/ 가슴에 힌 댕기 들여놓고/ 비 되어 오늘까지/ 눈물입니다// 꽃밭처럼 필 웃음도/ 한숨으로 삼키시고/ 혼자서/ 작게 움츠러들던/ 어머니// 다정한 그 목소리/ 바람 되어 들림일까/ 바람 부는 날에는/ 더욱 못 잊는/ 이 아픔// 지금/ 어메도 아베도 다 가고/ 설움은 버릇이 되었어도/ 서로가 아파하고/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 15 / 김초혜
오늘은 추석입니다 어머니/ 뜨거운 목소리를 남긴 채/ 홑적삼만 입고 가신/ 우리 어머니/ 첫 애기 안고 와서/ 이렇게 웁니다// 이 들녘은 다 비었습니다/ 인생은 한번 노래하고/ 꿈꾸는 것이라고/ 아무것에도/ 감동되지 않던 마음인데/ 풋풋한 밤 대추가/ 가슴을 칩니다// 유언 대신 두고 가신/ 저고리 섶에 꽂혔던/ 바늘에 찔려/ 나온 피/ 문득 뜨락에 와 계신/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내 가슴 가에서/ 헤메던 그 손이/ 잠이 깨어도/ 잠이 들어도/ 꿈을 꾸게 합니다// 어머니/ 오늘은 추석입니다.//

어머니 16 / 김초혜
충청북도 괴산/ 깊은 산골에/ 무슨 고요가/ 이리도 아프답니까// 당신이 원하던 것/ 이루어내/ 달려와 봐도/ 닫혀진 무덤/ 열리지 않고// 자식의 가슴에서/ 어머니/ 오늘 하루 낮이라도/ 행복으로/ 묶어 주소서.//

어머니 17 / 김초혜
배고파하고/ 추워하고/ 힘겨워 하는 건/ 불효가/ 아닌 줄 알았어라// 한숨을/ 짓는 것도/ 아픈 표를/ 내는 것도/ 달고 쓴 맛을/ 표정에 나타내는 것도/ 불효인 줄 몰랐어라// 거친 것을 먹고/ 굵은 베옷을 입고/ 고통만 더하면/ 불효가/ 끝나는 줄 알았어라//

어머니 18 / 김초혜
모자람도 흠도/ 깨달아 알 때까지/ 감탄도 나무람도/ 없던 어머니// 잊고 싶은 것은/ 아픈 불효 아니고/ 저입니다// 어머니// 흐린 소견/ 알려드리러/ 무덤에서/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19 / 김초혜
참는 괴로움을/ 즐기시는 어머니/ 세상에 그런 일/ 어찌 있으랴// 불효가 다시는/ 얼씬 못하게/ 뿌리를 뽑아/ 당신을 빛내려는 날/ 어둠 속에서/ 밝아 오십시오// 당신의 몸과 생각/ 자식에게 주고도/ 자식에게 의지하면/ 눈물로 흔들린다고/ 의지함을/ 버리신 어머니// 괴로움이 없다는 말씀은/ 즐거움도 끝이라는 걸/ 이제 와/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20 / 김초혜
온갖 괴로움/ 그 몸에 모였어도/ 밀어내어 마음에/ 근심하는 일/ 없으신 어머니// 살이 아프고/ 뼈가 틀어지는/ 세속적인 갈등을/ 어찌 덧없음으로/ 보셨습니까// 만족할 때 없어/ 괴로움에 얽히다가/ 당신의 말씀/ 떠올리며/ 마음의 속된 이익에/ 부끄럽습니다.//

어머니 21 / 김초혜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모두 참으시던/ 어머니// 괴로운 일도/ 혼자서 풀고/ 혼자서 묶으며/ 수수백년의 설움으로/ 당신의/ 육신은 헐리어지고// 평생의/ 구차하고 비굴한 일/ 없으시지 않으련만/ 빈 기쁨으로/ 작은 웃음을 짓던/ 어머니//

어머니 22 / 김초혜
긴 한숨 거두시고/ 가신 그날로/ 이십년 나날이/ 한숨입니다// 웃음소리 있는/ 세상보다/ 어둠의 끝/ 그곳이 편안해/ 햇빛을 끌고/ 그곳으로 가시었소// 무덤 앞에 서서/ 당신의 허물인/ 나를 울며/ 갈 곳 없어/ 돌아섭니다//

어머니 23 / 김초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모진 일은/ 하지 말라시던/ 어머니// 자식을 사랑하되/ 결점을 알아/ 나무람 주셨고/ 나무람 하되/ 장점을 알아/ 대견하다/ 꽃피워 주시던 어머니//오십사 년 지탱하신/ 생명을/ 미련 없이 벗으시고/ 자식의 가슴에서/ 길게 사시는/ 우리 어머니.//

어머니 24 / 김초혜
무언 일이건/ 때가 있고/ 끝이 있는데/ 불효엔 끝이 없어/ 느껴웁니다// 꽃필 적엔/ 덧나는 그리움/ 꿈에라도 만나지면/ 아프게/ 사무칠세라// 어머니 가신 곳/ 헤어짐과 만남의/ 설움 없어/ 마음을 쉬게 하고// 고달픔 저절로 풀리어/ 고요하기/ 하늘보다 위인 곳이건만/ 오고 가는 것/ 어렵기에/ 남은 삶을 무엇하리.//

어머니 25 / 김초혜
어머니 곁일 땐/ 해의 밝기가/ 더하였고/ 떠나시니/ 달의 밝기가/ 더하오// 서리땅 밟으며/ 살아도/ 시름으로/ 가슴 조이지/ 않으셨고// 속된 세상 괴롬/ 외면하며/ 가난하게 웃던/ 차마 모를/ 어머니 마음/ 어디서 다시 만나리.//

어머니 26 / 김초혜
떠나신 후/ 세상의 행복을/ 구하기도 싫고/ 얻기도 싫었습니다// 진실의 웃음도/ 괴로웠고/ 행복함에도/ 슬픈 생각만/ 더해왔습니다// 세속의 소망도/ 잿더미 되고/ 고통도 끝내/ 무상(無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제 뿌리를/ 뒤집어/ 비틀거리며/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어머니 27 / 김초혜
무슨 일이든/ 다하여도/ 다함은 없어// 마음대로/ 성내고/ 하고 싶은 것/ 즐겨도/ 괴로움은 있기 마련// 자신을 다스려/ 고요한/ 즐거움을 지키라는/ 어머니// 자식 사랑하시듯/ 세상 일/ 거두어 잡고/ 한갓되이/ 근원을 닦으시는 어머니// 어찌해/ 괴롬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괴롬으로써 벗어나려 하십니까//

어머니 28 / 김초혜
태에 들어서/ 지금까지/ 서투러운 괴로운/ 자식 노릇이오만/ 어머니 있어/ 즐거운 집// 눈이 멀어도/ 겁나지 않고/ 세상이 멈추어도/ 두렵지 않아/ 봄날과 같이 생에 취해/ 우르르 몰려오는/ 행복을 봅니다// 미움도 싫음도/ 모르시지 않으련만/ 어제나 오늘이나/ 한날같이/ 사람의 도리에/ 순응하시는 어머니//

어머니 29 / 김초혜
듣고 배워도/ 안 배움만 못하면/ 배움이 욕이 되고// 내 속 짚어/ 남의 속이라고/ 마음의 눈을/ 열어주던/ 어머니// 작은 마음으로/ 삶을 지키는 일/ 생활로 보이며/ 당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은 어머니// 당신의 따뜻한 손목/ 다시 잡고 싶어라.//

어머니 30 / 김초혜
세상을 낳고/ 사랑을 낳아서/ 그 속에 자식을 낳아/ 기르신 당신이어라// 당신은/ 고통으로/ 아픈 가슴 아닌/ 사랑으로/ 아픈 가슴 지녔어라// 자식의 번민은/ 눈치 채이지 않게/ 당신의 가슴에/ 품어 삭였어라// 기쁨과 슬픔을/ 달리해본 적이 없기에/ 자식 일엔/ 두려움 또한/ 없으셨어라//

어머니 31 / 김초혜
고향 떠난 자식/ 꿈꾸어 그리어도/ 오늘의 고통이/ 소망이기 바래/ 저무는 황혼에 서서/ 자식을 지키시는/ 어머니// 당신의 희망이/ 고통 속에 묻혀버려도/ 맑은 그늘 속/ 얼굴빛/ 언제나 고왔어라// 어머니/ 삼켜버린/ 고통의 무게/ 얼마입니까// 불효는 저희를/ 주저앉혀/ 일어서지 못하게 해도/ 고달픈 눈을 감고/ 어머니의/ 꿈 속으로 갑니다.//

어머니 32 / 김초혜
자식을 즐기는/ 어머니 사랑/ 자식의 가슴에/ 물로 새겨지고// 어머니를 그리는/ 자식의 사랑/ 어머니의 가슴에/ 불로 타면서// 주고받음이 아니게/ 줌으로써/ 섞이게 한다/ 숨어 있으나/ 영원한 근원// 어둠도 빛도/ 묽게 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운다.//

어머니 33 / 김초혜
다른 이의 몸을/ 아끼면/ 좋은/ 빛 속에 살고// 내 몸을/ 아끼면/ 어둠 속에서 산다던/ 어머니// 다른 이의 몸/ 아끼기/ 어려운줄/ 내 몸을 아끼며/ 알게 되었어도// 당신의 말씀/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꽃으로 핍니다.//

어머니 34 / 김초혜
헤어져/ 흐려지지 않는/ 얼굴 없고/ 멀어져/ 잊히지 않는/ 정이 없는데// 잊는다 생각는다/ 구별없이/ 오래도록/ 다하지 않는 것 있어라// 자식의 것이라면/ 더러움도/ 당신의 것이라/ 덮어 숨기고// 자식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태웠기에/ 달다 삼키지 않고/ 쓰다 뱉지 않으며/ 키우고 깨우는 일/ 마땅하다 건느셨네//

어머니 35 / 김초혜
낳아 기르고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희생이라고/ 생각지 않아/ 더 큰 사랑//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아/ 눈멀고/ 귀멀게 한 사랑// 일 년에 하루라도/ 불효라 이름하여/ 무거운 사랑/ 부려 놓으소서//

어머니 36 / 김초혜
고운 옷보다는/ 덕을 쌓으라던/ 당신의 소박함이/ 뿌리를 내려/ 화려함은/ 부끄럽습니다// 사치하면/ 검소해지기 어려우니/ 검소함 몸에 익혀/ 쓸데없는 꾸밈/ 벗으라던 말씀/ 지금도 들립니다// 사람으로 쓰이지 못하면/ 부모에게 누가 되니/ 자기를 이겨내/ 몸과 목숨/ 헛되이 말라는 말씀/ 저를 겹으로/ 두룹니다.//

어머니 37 / 김초혜
이승과 저승을/ 합할 수 없어도/ 어머니는/ 이승의 반쯤으로/ 나를 지키고/ 나는/ 저승 가까이/ 어머니 곁입니다// 살아 계시나/ 않으나/ 생각키 나름/ 나를 두르는/ 당신의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되어/ 본성을 편케 합니다.//

어머니 38 / 김초혜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입이 어눌한 사람/ 더 믿으시고// 지식을 알고/ 세상을 아는 것도/ 중하지만/ 참을 줄 아는 것이/ 제일이니/ 심성을 구부릴 줄/ 알라 하시고// 내보이는 정(情)보다/ 간직한 정이/ 더 깊은 것이라고/ 그늘이 빛인 것도/ 알게 하셨네.//

어머니 39 / 김초혜
필경엔/ 어버이 될 줄/ 어이 알았으리// 원하옵건데/ 지난 세상/ 있었던 일/ 모두 버리고/ 다시 자식으로/ 태어나기를// 지극한/ 마음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지는데/ 비길 데 없는/ 괴롬// 의지없이/ 제 갈길 보지 못해/ 허둥댑니다.//

어머니 40 / 김초혜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날리며도/ 불효에 묶이면/ 울게 됩니다// 가면/ 오지 않는/ 사람의 목숨/ 모르지 않았어도/ 허물로 지내다가/ 금가버린/ 당신의 육신을/ 허물었습니다// 어떠한 뉘우침도/ 고통을 멈추게 못하고/ 불효는/ 당신의 눈물입니다.//

어머니 41 / 김초혜
밤이면 꿈 속에/ 자주 오십시오/ 꿈 속에 오시었다/ 행여 발길이/ 돌려지지 않을까// 오다가 가십니까/ 제 빛대로 살기 어려운/ 분분한 세상/ 켜켜이 쌓인 적막/ 달래주러 오십시오//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면/ 당신의 모습 겹쳐와/ 나를 지웁니다// 웃음 속 눈물이/ 모여서 흐르며/ 자꾸 나를 지웁니다.//

어머니 42 / 김초혜
더울세라 추울세라/ 자식 걱정 어이하고/ 그리 바삐 떠나셨오// 서리 내리면 얼음 어는/ 쉬운 이치 무에 어려워/ 떠나신 후 비로소/ 불효에 웁니다// 하루는 그 하루를/ 무너지게 해도/ 침묵으로/ 주시는 말씀 저를/ 일어서게 합니다.//

어머니 43 / 김초혜
형제와 우애롭지 못하며/ 어찌 친구와는/ 사귈 수 있느냐고/ 먼 데 사람/ 가까이 하려 말고/ 가까운 형제와/ 구순하게 지내라던/ 말씀 그리워// 우애 하고자 해도/ 그 형제 흩어져/ 못 미침이니 불효와/ 버금가는 괴롬// 삶을 아프게 하고/ 한 몸에서 나뉘인 형제// 정의 깊기로 하자면/ 더 무엇 있으리// 나와 같은 너를/ 너와 같은 나를/ 어머니는 한 몸으로/ 사랑 하시는데//

어머니 44 / 김초혜
번민에 잠겨도 오직/ 어머니 계시기에/ 긴 밤도 짧게/ 순결한 잠을 거졌어라// 빛나며 흐르는/ 당신의 눈물은/ 고달픈 꿈이 주어져도/ 영원한 생을 있게 했어라// 사랑과 미움의/ 구별을 잃어/ 모자란 자식이/ 무안을 느길까/ 일부러 돌아 앉아/ 못 본 체하였어라// 고생스럽기/ 더할 수 없어도/ 일생 속에 홀로 앉아/ 행복은 나누고/ 슬픔은 혼자 가진/ 어머니를/ 자식은 울어라.//

어머니 45 / 김초혜
어느 때 한 번/ 음식으로 정성껏/ 모시지도 못했고/ 잠자리 편안케/ 해드리지도 못했으며/ 더구나 그 뜻/ 따르지 못했어라// 당신의 가슴에/ 있는 기운(氣運)/ 거슬려서는 안 되는 줄/ 그 기운 식은 후에/ 알게 되었고// 소용없이 슬픔만 깊고/ 제사만 지극해도/ 엎드린 자식을/ 일으키시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46 / 김초혜
목숨이/ 끝나는 건 아니면서/ 떠나신 날부터/ 몸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서 자식에게/ 괴로움 주지 않으려/ 감정을 감추며/ 조심스레 사셨는데도/ 당신은/ 괴로움만 길게 합니다// 슬퍼하고 그리는 마음/ 무엇을 다시/ 할 수 없어도/ 불효만/ 더하고 키워서/ 한 세상을 건넙니다.//

어머니 47 / 김초혜
세상의 일/ 욕심대로 되지 않으니/ 욕심을 줄이라는/ 말씀// 애써 하려 해도/ 안 되는 것 있고/ 저절로 두어도/ 되는 일은 된다고// 모든 허물은/ 제가 지어/ 제가 입는 것이니/ 그것에 매이지 말고/ 스스로 억제하는 힘/ 기르라는/ 당신의 뜻/ 따르기 어려워라.//

어머니 48 / 김초혜
배움은 있으나/ 덕이 없는 사람보다/ 비록 배움 없대도/ 덕이 있는 사람/ 귀히 여기셨고// 재간이 있는 이보다/ 무뚝뚝해도/ 한결같은 이/ 가까이 하셨고// 자식이 밖으로/ 떠돌 때는/ 끌어당겨/ 안으로 밝혀주시고// 오랜 고통도/ 잠깐의 기쁨으로/ 흡족 하시던 어머니/ 온 마음 다해도/ 아득하여/ 도달할 수 없어라.//

어머니 49 / 김초혜
매를 들고 성내고/ 미워하는 일 뒤로 하고/ 우선은 가르쳤어라// 가르침이 없는 사랑은/ 자식을 자라지/ 못하게 함을 알아/ 뜻은 받아주지 않으면서/ 허물은 눈감아주셨어라// 남과 다투었을 땐/ 자식이 옳은 줄 알아도/ 두둔하지 않으시고/ 아서라 다투지 마라// 서로 흠을/ 만들지 말고/ 되도록 유순하게/ 하였어라.//

어머니 50 / 김초혜
빛 중에/ 해가 으뜸이듯이/ 사람 중에/ 어머니 제일이시네// 학문을 많이/ 익힌 건 아니지만/ 사람의 법도(法道)/ 잘 다루시었고// 의학을 몰라/ 의술은 아니어도/ 자식의 병/ 신통으로 다스리시고/ 당신의 병은/ 깊어도/ 앓지 않으시고/ 작은 몸 어디에/ 그런 힘/ 숨어 있답니까//

어머니 51 / 김초혜
저승길이 멀다해/ 어머니 가실 곳이/ 저승인 줄 몰랐오// 세월이 긴 줄 알아/ 몸도 마음도 잊어/ 무심 하였더니// 아침에 웃으시던 모습/ 저녁나절 걷우시고/ 북망산 그 길로 누굴/ 만나러 홀로 가시었오// 해를 넘겨 어둠 와도/ 달을 지워 날 밝아도/ 흙으로 다지고/ 떼를 입혀 막아도/ 들립니다// 그 목소리/ 달은 져서 어두워도/ 하늘에 있듯/ 가슴에 무덤을 안고서/ 어허 어허이 어허 어허이//

어머니 52 / 김초혜
오백리 떨어진 고향이/ 세월이 갈수록/ 더 가깝습니다// 봄에 안겨/ 자식을 안고/ 누워있는/ 어머니// 스무해를 당신 앞에/ 무릎 꿇어 울어도/ 불효는 불어나기만 하고/ 덮힐세라// 가슴 죄며 울고/ 덮은 흙무덤인데/ 오늘은 떼를 밟으며/ 긴 봄날을 보냅니다.//

                                   사랑 / 김초혜
   소리없이 와서
   흔적도 없이 갔건만
   남은 세월은 눈물이다

   무쇠바퀴 돌아간 마음 위에
   그대 감아 버린 가슴은
   울음으로 녹아 있고

   서로 먼 마음 되어 비껴 지나도
   그대 마음 넘나드는 물새가 되고

   물과 물이 섞이듯 섞인 마음을
   나눠 갖지 못하면서
   나눠 갖지 않으면서.

 

모성 / 김초혜
“어머니는/ 자식의 바늘에/ 만 번을 찔려도/ 찔린 줄도 모르다/ 아버지는/ 한 번만 찔려도/ 숨겨 둔/ 바늘쌈을 찾는다."//

부자유친하고 / 김초혜
아버지가 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면/ 웃음이 떠날 날이 없고/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 엄숙함이 떠날 날이 없다//

안부(安否) / 김초혜
강을 사이에 두고/ 꽃잎을 띄우네// 잘 있으면 된다고/ 잘 있다고// 이때가 꽃이 필 때라고/ 오늘도 봄은 가고 있다고// 무엇이리/ 말하지 않은 그 말//

길 / 김초혜
길을 매어놓고/ 길을 단련시킨다/ 아직 지나야 할/ 늪은 먼데/ 조그만 어둠에도/ 걸려 넘어진다/ 길은/ 앞으로 나아갈 때만/ 길이다/ 머물러 있는 곳에서는/ 길은 숨어버린다/ 숨어 있는 길은/ 무덤이다//

멀고 먼 길 / 김초혜 -2018년 제26회 공초문학상 수상작
오 하느님/ 나이는 먹었어도/ 늙은 아이에 불과합니다/ 햇살은 발끝에 기울었는데/ 내 몸이나 구하자 하고/ 굽은 마음 어쩌지 못해/ 얼굴을 숨기기도 합니다/ 몸 안에 가득 들여놓은 꽃은/ 붉은 조화 나부랭이였습니다/ 어찌/ 고요를 보았다 하겠습니까//

귀로 / 김초혜
흙은 흙으로/ 바다는 바다로/ 너는 너로/ 나는 나로/ 이르는 곳을 알아/ 이르러야 하리/ 그 그치는 곳을 알아/ 그쳐야 하리//

현대시 / 김초혜
자기도 뜻을 모르고/ 남은 더 모르게 쓴다/ 시가 울고 있다//

벌레가 된 그대 / 김초혜
부탄 벌레는 무엇이든/ 등에 진다/ 더는 얹을 수 없는 것도 모른 체/ 허공도 등에 진다/ 지고 또 지고/ 마침내/ 짐이 되어/ 짐 속에 갇힌다//

그리움 / 김초혜
천둥소리 내 안에서/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다 보면// 그대/ 이마를 적시는/ 비가 되어/ 내릴 수도 있으리라//

동백꽃 그리움 / 김초혜
떨어져 누운 꽃은/ 나무의 꽃을 보고/ 나무의 꽃은/ 떨어져 누운 꽃을 본다/ 그대는 내가 되어라/ 나는 그대가 되리//

달밤 / 김초혜
한 해에 한 번/ 운다는 바다가/ 오늘 밤/ 달과 함께 울고 있다// 아마도/ 나를 대신/ 우는 모양이다// 먼 데 있는/ 그대의/ 마음이 일렁이도록/ 밤새워 울 것 같다.//

동무 / 김초혜
거울을 보면/ 늙음이 보이는데/ 그대와 만나면/ 늙은 모습/ 서로 잊고서/ 젊음을 나눈다.//

일상 / 김초혜
은은한 차향기/ 쓸쓸하나 아름다운 일몰/ 담 밑에/ 무심히 핀 과꽃/ 우연찮게 듣게 되는/ 가을 노래/ 간간이 내리는 비/ 마음으로 주고받은 꿈/ 그러나/ 고요 속에 지고 있는 삶/ 기억 한 자락/ 하루를 보낸다.//

세월 / 김초혜
그대가 존재하는 까닭은 오래되었다/ 나의 어디에나 그대는 있다/ 오래되어 쓰지 못하는 만년필에도 있고/ 쓰임새가 없어 버려진 손수건에도 있고/ 책갈피에 넣어둔 냉이꽃에도 있다/ 그대와 일상언어로 주고받던 웃음에도 있고/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에도 있고/ 싹트는 소리가 들리는 봄밤에도 있다/ 달그림자가 꽃그늘이 아름다운 밤에도 있고/ 눈이 내려 쌓아는 밤에도 있고/ 한밤중 잠들어도 그대는 온다/ 삶의 마지막 순간/ 의식 없는 의식 속에도/ 그대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대와 내가 없다면/ 해가 진들/ 달이 뜬들/ 무슨 소용이랴.//

짧은 인생 / 김초혜
한순간이었지만/ 사십 년 전엔 나도/ 무한한 황홀경에 빠졌던/ 스무 살이었다오// 목련꽃으로 단장했던/ 서른 살도 있었다오// 가슴에 하늘을/ 가득 가두고/ 처음 찾아온 사랑처럼/ 잠 못 이루는 밤도 있었다오.//

죽음 / 김초혜
나를 떠나/ 멀리 있는 것이리// 남들 속에 있지만/ 내 것은 아닌 것이리// 내가 남이 되면/ 그 남 속에 있는 것이리//

그리운 집 / 김초혜
사람으로 올 때/ 가지고 온 보따리에는/ 평범한 나날들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도달하여 지나가게 될/ 이정표도 있었다// 밤과 낮이 있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절도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모으기 시작하자/ 그 자체가/ 하나의 집인 것을 알게 되었다// 방황하는 영혼을 쉬게 하는/ 집 속에는/ 태어남과 삶, 죽음과 매장/ 분노와 고통과 무지와 권태가/ 이웃하며 살고 있었다// 사람이 이룬 최상의 것은/ 그래도 그것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빈집에 누워 / 김초혜
지난 허물 부끄럽다고/ 어물거리다가/ 새로운 허물에/ 쉽게 얽혀드니/ 나라는 게/ 그토록 미궁인가//

​친구에게 / 김초혜
묶이운 몸이 싫어지면/ 이 바닷가에 와서/ 뜬구름처럼/ 한가로이/ 지내다 가오// 거친 세월에/ 바람만 얽혀 있다고/ 적막해하지 말고/ 된서리 내리기 전/ 한번 다녀가시오// 기쁨도/ 이기지 못할/ 나이가 되었으니/ 길게/ 바라지 맙시다//

​첫눈 / 김초혜
구름이 낮아지더니/ 눈이 내린다// 과거는 현재로 오고/ 현재는/ 과거로 돌아선다// 허름한 세월에/ 어두운 저녁에/ 고요하게 내리는/ 눈// 하늘이 땅에/ 내려앉아서/ 쉬어가려나 보다// 눈이 내리면/ 갈 길이/ 다른 사람과도/ 함께 걷고 싶다//

변명 / 김초혜
바람이 매화 가지를/ 꺾었다 마십시오// 매화 가지가 꺾이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마음의 덮개가/ 열리고 닫히는 것은/ 귀신도/ 못 봤습니다//

그러나 그대 / 김초혜


그대 마음

내가 가진 줄 모르고

그대가 이 마음

가진 줄 알았어라

둘아서며 만나자 아니 했지만

마음에 있는 말

다 하기 어려워라


고향 / 김초혜
산 너머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어머니,/ 하고 부른다//

황혼 / 김초혜
빨리 흐르라고/ 떠밀지 않아도// 낙엽 한 잎 띄우고// 강물은/ 사정없이 흐른다//

마음 화상(火傷) / 김초혜
그대가/ 그림 속의 불에/ 손을 데었다 하면/ 나는 금세/ 3도 화상을 입는다// 마음의 마음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화상을 입는다//

인연설 / 김초혜
어제 그대에게/ 머물렀던 바람이// 오늘은 내게 불어와// 일천 겹 그리움의/ 파도를 이룬다//

​편지 / 김초혜
먼저 핀 꽃도/ 나중 핀 꽃도/ 모두 다 지는 꽃이라/ 그대가 어제 피운 꽃 한 송이/ 오늘은 내게 와서 지고 있다//

가을의 시(詩) / 김초혜
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 적막에 길들으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 ​

만월(滿月) / 김초혜
달밤이면/ 살아온 날들이/ 다 그립다// 만 리가/ 그대와 나 사이에 있어도/ 한마음으로/ 달은 뜬다// 오늘 밤은/ 잊으며/ 잊혀지며/ 사는 일이/ 달빛에/ 한 생각으로 섞인다//

세상 / 김초혜
잘린 손가락들이/ 하나 둘씩/ 잘린 채로 모여서/ 추위를 녹이고 있다/ 이제 무심舞心이어라/ 밤과 낮은/ 천 날 만 날/ 어디서 갈린다더냐/ 어쩔 수 없이/ 어쩔 수도 없이/ 사람은 사람 안에서 고독하다//

삶의 이랑 / 김초혜
매일 조금씩 떠난다/ 꾸릴 짐도 없고/ 길 떠날 채비도 간단하다/ 삶의 매듭으로 묶인/ 무의미함만이/ 끈질기게 동행을 한다/ 꽃을 피운 적도 있고/ 노래를 지어본 적도 있지만/ 지금은/ 감정의 격랑이 일지 않는다/ 오랜 고뇌 저편에/ 상실의 우울증으로 있던/ 그대를 버려두고/ 오늘도 나는 혼자서/ 땅끝으로 더 멀리/ 조금씩 조금씩 떠나고 있다.//

강 건너 봄이 / 김초혜
한밤에 나는 아무도 몰래/ 저 강을 건널 것이다// 언 물이 안 녹고 있어도/ 어떻게든 저 강을 건너/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리라// 고달픈 세월의 기슭에서 깨어나/ 누추한 몸과 마음 이기고/ 가슴을 터놓고/ 마주할 그대에게/ 꿈이 되기도 하면서/ 꽃이 되기도 하면서/ 한가로이 기대어 쉬리라//

아집 / 김초혜
해는 해를 보지 못하고/ 달은 달을 못 보듯/ 그대는 그대를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르리//

손자를 위하여 / 김초혜
하루에 삼천 번을 만난대도/ 어찌 반갑지 않으랴/ 웃는 모습도/ 우는 모습도/ 참으로 눈부셔라// 봄 다음에도/ 봄만 오게 하는 아이야/ 잎이 피고 자라고/ 꽃이 피고 만개해// 앞으로 오는/ 100년 내내 봄이거라.//

연가 / 김초혜
그리울 땐/ 눈을 감으면/ 별이 되어/ 떠난 사람이 온다// 서로 목숨이었던 때의/ 빛으로/ 가슴을 부빈다// 자살도 한 번 못해 보고/ 삼킨 죽음/ 상처의 증거도/ 선뜻 보일 용기도 없어/ 감탄사로만 숨을 쉰다// 그가 간 날부터/ 발목엔 고리가 채워지고/ 돌아서는 연습만 하다가/ 진통하는 九泉// 달을 봐도/ 울지 말고/ 비었던 가슴에/넘치도록/ 몸살을 앓게 하자// 피범벅으로 삭여진/ 암시로/ 빈 터전에/ 갈대꽃이라도 피우자// 오늘은 絶命歌 대신/ 하늘이 들어앉는/ 가슴을 연습하자.//

신념의 나무를 키우자 / 김초혜
사람이/ 자기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올바로 될 수 없어라./ 훌륭함은 참음으로 이루어지니/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뿌리가 되리라./ 우리가 꿈을 잃지 않으면/ 기쁨은 우리를 향해/ 손짓해 올 것이니/ 쉬거나 섰지 말고/ 열매를 위해/ 신념의 나무를 키우자.//

새 아침에 / 김초혜
새해에는/ 모든 기쁨/ 남에게서 구하게 말고/ 내게서 구하게 하시고/ 괴로움과 고통/ 번갈아 귀찮게 해도/ 몸을 거두고/ 마음을 이겨/ 기쁨이 되어 살게 하소서/ 구석지고 어두워/ 절망까지 절망한 이에게도/ 자기 생명 속에 있는/ 새벽을 알게 하시고/ 우리들이/ 인생에 던진/ 서투른 그물에도/ 고운 모습만 남게 하소서//

눈(雪) / 김초혜
눈 오는 구석에 홀로 서/ 눈과 함께 녹아/ 그대 가슴에 내 모습을/ 새기고 싶다// 눈발이 온 천지에 들 듯/ 그대 부신 눈빛/ 온 마음에 들어와// 이 마음의/ 고요를/ 휘젓고 가고/ 그리움은 갑절로 커져/ 빈 가슴에/ 되살아 오는/ 눈 온 날// 스쳐가는 바람 속에/ 잊는 것을 할 수 있대도/ 내가 소생할 데는/ 잃어진 당신이다.//

동행 / 김초혜
많지 않은날이 오래인것 같고 오래인 날이/ 순간인것 같아 나를 눈물이게 하는사람/ 소식없이 만나지 않아도 순한 목숨으로/ 언제나 동행인 사람/ 많은날 많은 생각으로 괴로워도 고난에/ 약해지지 않고 다시 아침으로 일어서게 하는 사람//

사랑굿 1 / 김초혜
그대 내게 오지 않음은/ 만남이 싫어 아니라/ 떠남을/ 두려워함인 것을 압니다/ 나의 눈물이 당신인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감추어 두는/ 숨은 뜻은/ 버릴래야 버릴수 없고/ 얻을래야 얻을 수 없는/ 화염(火焰) 때문임을 압니다/ 곁에 있는/ 아픔도 아픔이겠지만/ 보내는 아픔이/ 더 크기에/ 그립고 사는/ 사랑의 혹법(酷法)을 압니다/ 두 마음이 맞비치어/ 모든 것 되어도/ 갖고 싶어 갖지 않는/ 사랑의 보(褓)를 묶을 줄 압니다.//

사랑굿 2 / 김초혜
우리도 썩어서/ 울리어 보자/ 이지러진 마음일랑/ 홀로 버리고/ 울릴 듯한 울릴 듯한/ 징이나 되어서/ 마음껏 그대나/ 그리워 하자/ 그대 부르는/ 발돋음으로/ 돌이 되어도/ 용솟음으로/ 엉클어진/ 숨결이 되자/ 시작도 끝도 없이/ 천역살로 온 그대/ 혜어지기도 하면서/ 만나기도 하면서/ 끝까지 이렇게 걸어가 보자.//

사랑굿 3 / 김초혜
나는 너에게/ 무엇이든 되고 싶다/ 누가 알면 큰일나는/ 겹도록 감추어 둔/ 비밀이고 싶다/ 종일을 숨어/ 그대 생각해도/ 마음 한금 건드리지 못하고/ 가난하고 약해지는/ 뚝 뚝 눈물이 되는 버릇/ 남은 살 몇 점/ 더 태워/ 삐인 발목 절룩이며/ 울고 섰는데/ 거울 앞에 서지 않는/ 너의/ 피곤한 미혹/ 그대/ 살을 우비는 냉정함의/ 절대한 그리움을/ 주저 앉히진 못할지라도/ 가거든 아니오기를.//

사랑굿 4 / 김초혜
잊어버리자 해도/ 다년생(多年生) 종기처럼/ 전신 발열을 일어키는/ 시들지 않는/ 나의 전체/ 그대 허락지 않은 땅에/ 피로 거른 눈물로/ 꽃을 피우는/ 헛된 영혼의 나들이/ 너는 나의 칼/ 원하면 원할수록/ 치사량의 피가 흐르고/ 가면 가는 만큼/ 물러서는 그대/ 살아 못하면/ 죽어 하리라는/ 순백의 눈물도 되는/ 나의 가엾음.//

사랑굿 5 / 김초혜
모른 체하는/ 사람 옆에서/ 목숨 하나/ 진실하게 울고 있다/ 보이지 않음인지/ 못 본 체했음인지/ 시침을 떼도/ 끝이 없는 빛줄기를/ 지울 길 없어/ 마음을 달래어/ 허울로 온 것을/ 밀어도 다가서려는/ 진실이라 믿으마/ 얼굴도 심장도 없애/ 성한 모습 무너진 것/ 부끄런 줄 모르고/ 어쩌다/ 선연한 눈물이랴/ 당신이 찾을 때까지는/ 먼 등불로/ 비밀한 늑골 하나/ 숨이 차도/ 모른 체 있으마.//

사랑굿 6 / 김초혜
제가 저를 괴롭히는/ 마음이라는 것/ 목도 조이고/ 혀도 되어서/ 죄의 큰 그물을 엮어/ 뿌리를 먼저/ 삭게 한다/ 자르고 베어도/ 잊힐 리야 없을/ 그대 향한/ 나의 마음/ 어둠인 듯 감추었다가/ 흔들림 없게/ 크게 빛내이고 싶다/ 태울 듯 불 붙을 듯/ 멍에 멘 마음에/ 그대 넘나들지 마시고/ 더러 생각나거들랑/ 가다가 멈추어 서서/ 못 잊는 내 허물/ 탓하지나 마시라//

사랑굿 7 / 김초혜
갇히어도 가리/ 열락인 너에게/ 내 생의 제일로/ 깨끗한 날/ 수식 대신/ 걸망한 누더기 걸치고/ 외쪽발인 체/ 단숨에 달아가리/ 집착 않고/ 이별 없이/ 서로 비쳐/ 함께 적시는/ 둥지 만들리/ 아직은 허공에 핀 꽃/ 열매 맺지 않고/ 한 발자국도 오지 않으며/ 내게 무너져 오는/ 혹시나 그대.//

사랑굿 8 / 김초혜
그대 만남이/ 사막과 사막 사이 놓인/ 샘물이라면/ 나만 혼자 알고 있는/ 그대 마음을/ 가슴에 묻어서/ 등불 만들고/ 불멸로 지은/ 오막집/ 옳은 듯 빗나간 듯/ 기둥 세우고/ 부러진 축(軸)을/ 가질 수도/ 버리지도 못해/ 무릎을 꿇으며//

사랑굿 9 / 김초혜
내가 먼저 사랑한 사람/ 먼저 잊게 해주오/ 목까지 자란 그리움을/ 거짓말처럼 잘라낸 후/ 이제 남루를 벗고 싶으오/ 그대 도리질의 이유는/ 헤아려도 추측할 길 없고/ 앉지도 서지도 못하리라면 없어져 진주 되고 싶으오/ 끝내 분할이 안되어/ 내 몫이 없을/ 불꽃이라면/ 뼈가 운대도 비겨 잊으리다/ 그대여/ 기침과 심술운 그만/ 하나의 별만을 빛나게 할/ 꽃등을 켜들고/ 남몰래 숨어서/ 몇천 겁(千劫)을.//

사랑굿 10 / 김초혜
내 한숨 바람 되어/ 그대 목에 감기어 들면/ 그게 난 줄 알아/ 모른 체 비켜 주오/ 살을 베어 살을/ 벌지 못하듯 물이 피가 될 리 없겠지마는/ 잊은 마음 전혀 없어/ 바람이려오/ 몇천 년을 살려고/ 그대 나의/ 기쁨이어서는/ 아니 되오/ 허리 묶인/ 홍사(紅絲) 풀어내고/ 나도 그대의/ 꽃이 되고 싶으오/ 돌을 심어 싹이 나도/ 아니 오시겠오/ 바람 불면/ 멀어 있는/ 달로 오시게.//

사랑굿 11 / 김초혜
그대/ 물음표 투성이의/ 가슴을 가르고 들어가/ 생 빛 한 줄기/ 찾으려 했네/ 얼굴도 눈도 없이/ 허공만 숨어 사는/ 그대 몸 전체에서/ 거듭되는 어제를 지켜보며/ 동행할 빛을 잃었네/ 몇 번이나 헛짚은 그대/ 흠집이 많은 얼굴을/ 망설임 없이 물리치며/ 새로 낯설어지네/ 난파된 목숨 짐짓 가지고/ 돌아서면 돌아오는 그대/ 문득 궁금해지면/ 분장하지 말고 오게.//

사랑굿 12 / 김초혜
빗장을 풀어/ 한 꿈을 모조리 내보내고/ 나를 동여매던 벌(罰)을 풀고/ 빛처럼 살아 보자/ 아무도 끝나지 않은 여분이 있거들랑/ 태워 버리고/ 풀어졌던 살들을/ 돌아오게 하여/ 현을 울리게 하자/ 부러진 허리를/ 곧추 세우고/ 죽었던 살을 깨워/ 뿌리를 돋게 하자/ 일제히 깨어난 빛이/ 허공에 걸린/ 불붙은 머리칼을/ 베어 버릴 것이다 피멍을 닦어내고/ 늑골에 고인/ 자멸을 지져내며 푸른 살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며 사는 거다.//

사랑굿 13 / 김초혜
서로 잊으며/ 켜지 않는 불/ 잡혀지지 않는 것/ 붙잡지 않으면서/ 어쩌려고/ 얼굴엔/ 얼룩울짓나/ 하나의 눈짓을/ 다른 눈짓으로/ 베어 내려/ 눈부신 어지럼증/ 러깨비의 울음 말고/ 조그만 웃음이 되어/ 그대/ 마음에 뜨는/ 달이고 싶다.//

사랑굿 14 / 김초혜
날을 수 없는/ 날개를 가지고/ 날개인 줄 알고/ 그대에게 간다/ 마음은 마르고/ 말라서 갈라진 채로/ 허물어지며 있어도/ 그대 웃음이 비치면/ 대번에/ 물이 흐른다/ 평탄을 버려/ 거친 길이 열/ 되풀이의 길/ 나를 잃으며/ 네게 가야 되는/ 시험엔/ 눈물이란 답이.//

사랑굿 15 / 김초혜
그대 소유하지 않은 것/ 소유하려는 데에/ 피곤은 가혹해지고/ 집착 없는/ 집착의 징조가/ 의식하지 않는/ 무의식의 허느낌이/ 아파서/ 깨지는 거울/ 네게 가까이 가려면/ 불 속에서 떨고/ 얼음 속에 불타야 하고/ 그대에게 가지 않으면/ 천지도 생겨/ 만월로 뜰 수가 있고.//

사랑굿 16 / 김초혜
불 속에서 태워지면서/ 고독마저 없어지고/ 행할 것과/ 행해서는 안될 것이/ 어떤 건지도/ 어둡게 되고/ 끝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시작되는/ 아린 사랑을/ 도로 불 속에 던지며/ 화상으로 완성되는/ 어리석음이게 하소서.//

사랑굿 17 / 김초혜
가장 큰 모습은/ 형태가 없듯/ 보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참 많이 어디에나/ 있는 그대/ 발돋움은/ 오래 서지 못하는/ 비뿐 길인데/ 생각만으로도/ 바로 서지 못하는/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딘가.//

사랑굿 18 / 김초혜
점을 쳐 괘를 푸니/ 욕심따라 성급히/ 서둘지 말고/ 마음을 정히 닦아/ 푸닥거리나 하라한다/ 오늘 하루 마음대로/ 너를 사랑해/ 만남 지옥 헤어짐 지옥/ 질끈 묶어서/ 모든 지옥/ 구석구석 잊어나 보란다/ 불 갖추고 못한 사랑/ 장생불사 오만 잡귀야/ 귀신놀음은 고만/ 간도 피도 다 말리고/ 말릴 게 없어/ 말릴 게 없어/ 형벌하며 하는 말/ 푸닥거리나 하라한다.//

사랑굿 19 / 김초혜
피어서는 안 될 꽃이/ 피는 것은 눈물이오/ 그대 의해 피워지는/ 꽃이라면 갈증이오/모순을 증거할 수 없어/ 병들고 잠들다가/ 내가 나를 견뎌내/ 이제야 그대가 보이오/ 목마른 내게/ 불만 주는데도/ 모순은 반짝임처럼/ 사랑이 되오/ 땅은 땅밖에 모르듯이/ 다른 형상의 모습 말고/ 그대 내 詩가 되어/ 남아 있어야 하오.//

사랑굿 20 / 김초혜
가면서 남긴/ 너의 목소리/ 칭칭 나를 동여매도/ 끄르지 않고/ 남겨 두는 뜻은/ 뼈를 울리고/ 살을 울려/ 언 땅에 나를 묻은/ 너를 만나기 위해/ 결박을 조여/ 누구도 풀 수 없이/ 꽁꽁 묶이인/ 이대로/ 하늘 밖으로/ 가고 싶은 뜻은/ 네가 없고 내가 상실되어/ 마음대로 소생하며/ 네게 이르기 위해.//

사랑굿 21 / 김초혜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 쓰러지고/ 다시 네 앞에 일어나/ 쓰러지고/ 불시에 불구(不具)가 되어/ 눈물이사/ 그대 내 살 속에/ 풀어 놓은 징벌/ 우리 목숨의 분량은/ 얼마나 남았나/ 건강한 매무새로/ 모두 퍼낸 다음/ 떠밀리는 물결이 아니게/ 꽃배를 타고 싶다/ 다감(多感)을 사루어 버린/ 지금은 작별의 때/ 새롭게 감기는/ 밧줄을 끊고/ 출항을 하련다/ 떠나 보내며/ 어쩌면 외로울지 모르는/ 나의 그대여/ 날으는 새가 되어/ 그때 만나자.//

사랑굿 22 / 김초혜
너는 나의 그물이다/ 내 자신이 잘 보일 때/ 무섭고 겁날 때는/ 빛 낡은/ 의지도 걸리고/ 곤비(困憊)함도 걸린다/ 나는 너의/ 가난한 부분이다/ 무슨 설레임이/ 우리 둘 사이를/ 가난하게 만들었나/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입도 없는 채/ 너는 나의 변증법이다/ 포박된 줄을 끊으면/ 사랑도 되고/ 미움도 되고/ 단단한 미지수도 되면서/ 끝내/ 의문부로 남는다/ 나는 너의 영혼이다/ 뼈가 흙이 되고/ 살이 물이 되어/ 의지가 흐려져도/ 너의 눈에/ 깨끗한 꽃으로/ 다시 맑아 흐르마.//

사랑굿 23 / 김초혜
남겨 놓은/ 가능성은/ 아픔이오/ 움직이지도/ 잠자지도 않는/ 녹슬은 생명은/ 그날부터/ 생떼로/ 사랑 목록을/ 소매하오/ 당신을 얻은/ 허무 있기 전/ 마법의 입김은/ 걷히어지고/ 서투르지만/ 돌을 기르며/ 견뎌내고 있소.//

사랑굿 24 / 김초혜
나는 너를/ 언제나 오역(誤譯)한다/ 혀를 감아 버리고/ 말을 잊고 싶다/ 지침(指針)을 뽑아내고/ 너는 언제부터/ 나의 무게가/ 되었느냐/ 벌(罰)을 상(賞)으로/ 선택하여/ 겪어내면서/ 갈망한다/ 누구도/ 예감(豫感)할 수 없는/ 어려운 악보를 준/ 그대를.//

사랑굿 25 / 김초혜
너와 내가 합쳐서/ 하나의 별이 되자/ 아무도 못 보게/ 억만 광년 빛으로/ 반짝거림이 되자/ 입이 메어지도록/ 고통이 들어차도/ 변덕부림 없이/ 나뉘인 육신을/ 서로 잡아 주자/ 제일로 가까운/ 첫번째의 별에/ 집을 짓고 맹목을 심어/ 태양도 여기에선/ 휘어지게 하자/ 아무 것도 못 아는/ 무재주를 사랑하며/ 차 있으나 넘쳐 흐르지 않는/ 순한 불이 되자.//

사랑굿 26 / 김초혜
내겐 절단이/ 너에겐 획득이 되어/ 나만 다리를 절며 간다/ 약발도 안 들어/ 불칙하게 말라가는/ 수족(手足)엔 관심도 없이/ 나의 외과의(外科醫)는/ 처방전에/ 남의 눈에 뜨이지만 않으면/ 감쪽같다고/ 써 주었다/ 한쪽 발이 짧아/ 절름거리면/ 다른 쪽을 맞추어 놓고/ 맞추어진 다리가 짧아지면/ 달아나며 따라와/ 시술을 자꾸만 뒤집어 보지만/ 마침내는/ 서지 못하는 다리를 준/ 너는 나의 외과의(外科醫).//

사랑굿 27 / 김초혜
충실한 얼굴이었던/ 어제가/ 바람에 날리는/ 넘마 되었고/ 억지를 부려 보아도/ 마음은 칼날을/ 닮지 못해/ 부어오르는 고통/ 하늘도 진(盡)해 버릴/ 변덕스런 마음은/ 감정이 홈 속에 숨어/ 톱니를 만들고/ 노여워짐이/ 무가치함임을 알고/ 불투성이가 되어/ 녹아내린다.//

사랑굿 28 / 김초혜
분칠한 그대 얼굴에/ 분칠하지 않은 내 얼굴이/ 포개질 때/ 꿈인 듯 가졌던 그대를/ 잃을까 겁나/ 허물어진 날/ 나의 주제(主題)가 되어/ 거짓으로라도 감추어다오/ 그대 지닌 허물을/ 쓴 것도 쓴 줄 모르고/ 거절도 거절로 모른 채/ 반(半)은 타며/ 반은 식으며/ 전폐된 의지를 깨우지 못하는/ 나는 너의 어릿광대/ 그대 역겹게 하는 어리석은 불꽃을/ 용납치 않으며/ 진실을 허위로 바꾸어/ 잊지 못해 떠나 본다.//

사랑굿 29 / 김초혜
손금에 나타난/ 사주팔자엔/ 아무 사연/ 어떤 까닭도 없건만/ 젖은 형틀을 메고/ 가파른 길을 간다/ 흐르게 두어라/ 뛰다가 서면/ 넘어지듯이/ 막으면 넘치는/ 사랑법을/ 흐르게 두자/ 내가 울어 보낸/ 핏물 하나/ 그대 가슴에/ 질척이는 눈물 말고/ 별이 되어/ 빛나고 싶다.//

사랑굿 30 / 김초혜
바다는 비를/ 다시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고/ 흙은/ 물을 마시어도/ 물이 아니어듯/ 눈 먼 영혼을 가진 그대여/ 나의 헌납을/ 속박없이 받으시라/ 나의 오감(五感)은/ 그대에게 가는 빛을/ 막지 못하고/ 수렁에 빠져도/ 새롭게 접목되며/ 너로 가득차고 싶다/ 무엇으로 바꾸지 않을/ 나의 오욕(汚辱)을/ 아름답게 견뎌내며/ 묶인 채 자전(自轉)하리라.//

사랑굿 31 / 김초혜
멀어서 있는 그대/ 그대는/ 시작이고 끝이다/ 끝과 시작은/ 언제나 내게 머물러/ 일어서게 하고/ 허물어지게 하고/ 그대/ 나를 위해 울어 준다면/ 해도 지지 않고/ 달도 뜨지 않는다/ 눈(目)도 아니고 혀도 아닌/ 너의 암시는/ 내게 악성(惡性)만 자라게 해/ 하루에 밤을 두 번 있게 한다/ 새벽이 두 번 있는/ 하루를 기다리며/ 사랑 없이 사랑하리라.//

사랑굿 32 / 김초혜
이제 마음을 얘기하지 않으리/ 사랑으로 사랑을 벗어나고/ 미움으로 미움을 벗어나리/ 죽어 묻히는 날까지/ 그대 떠난다 해도/ 마음 속에 살게 하리/ 끝없는 불꽃되어/ 재까지 태우며/ 던졌던 생명을 거두어/ 천천히 빛나게 하리/ 갈망하지 않고 꿈꾸면서/ 혼자서 가져 보는 그대/ 고운 병 만들어 앓으며/ 짓궂은 그대 허위/ 벗기지 않으리.//

사랑굿 33 / 김초혜
나만 흐르고/ 너는 흐르지 않아도/ 나는 흘러서/ 네가 있는 곳으로 간다/ 흐르다 만나지는/ 아무 데서나/ 빛을 키워 되얻는/ 너의 모습/ 생각이 어지러우면/ 너를 놓아 버리고/ 생각이 자면/ 네게 가까이 가/ 몇 개의 바다를/ 가슴에 포갠다.//

사랑굿 34 / 김초혜
생명의 중간쯤에서/ 낯선 죄를 만나게 되었다/ 혀가 겹쳐져서/ 말을 발견하지 못하고/ 친근하나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너를 본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인 너/ 복합체의 성정을 지닌 네가/ 전과 달라야 되는데/ 다름이 없어/ 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피차에 아주/ 낯설은 사람이 되자/ 서로를 위한 것이/ 서로에게/ 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죽은 흙이 되자.//

사랑굿 35 / 김초혜
백 개의 뼈마디를/ 여섯 개의 내장을/ 열고 보아도/ 물(物)로만 있는 것/ 모르는 것 아니어도/ 어찌하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고/ 부어도 넘치지 않는/ 너로 하여 느는 괴롬/ 해결되지 않는/ 사슬은 매어/ 무엇하리/ 원근(遠近)을 잊는/ 너와 나의 사이에/ 바람이 불어도/ 혼백은 섞이어/ 해를 향해 솟기도 하고/ 달을 향해 숨기도 하리니.//

사랑굿 36 / 김초혜
구름에 가려도/ 제 빛인 하늘/ 먼지에 흐려도/ 맑은 그대/ 서로 비워/ 환한 우리/ 시들지 않게 두자/ 그르다 해서/ 치우지 말고/ 옳다 해서/ 애쓰지 않으며/ 안에 있는 울음과/ 밖에 있는 웃음이/ 다르다 해서/ 조바심도 말며/ 이쪽에 있어야/ 저쪽이 보이듯/ 멀어 있으며/ 종내 못 잊는/ 우리가 되자.//

사랑굿 37 / 김초혜
꿈 속에서는/ 현실과 만나/ 울어 버리고/ 현실에서는/ 꿈을 만나/ 미망(迷忘)에 속고/ 무엇도 될 수 없는/ 속수무책을 피해/ 돛도 없이/ 돛대도 없이/ 거꾸로 가라앉아/ 멀리 갈수록/ 네게 이르고/ 살아 있음과/ 죽음의/ 구별이 없을/ 백 년 뒤에나/ 무상의 기쁨으로/ 함께 빛나자.//

사랑굿 38 / 김초혜
그대, 어디로 가는가/ 어둠에서도 빛을 나눌/ 다사로움 마련했으니/ 정화(淨化)의 불 속에서/ 새로 태어납시다/ 엇갈려 감겨 있는/ 여러 생각 풀어 버리고/ 만나면 우리/ 백치가 됩시다/ 눈물은 물리고/ 탈 바꾸어/ 아무 데서나/ 서로 향해 오는/ 등불이 됩시다/ 속된 일에/ 고달프지 말고/ 많이씩 우둔하면서/ 세속 밖의/ 꿈을 꿉시다.//

사랑굿 39 / 김초혜
네게 줄수록/ 내게 더 많이/ 쌓이는 불/ 불은 불로 끄고/ 물을 물로 막고/ 나도 없고/ 너도 없게/ 그대의 모습으로/ 나를 지운다/ 네가 보낸/ 꽃보다 타는 눈짓은/ 몸체의 바퀴를/ 떨어져 나가게 하고/ 하늘의 뜻이라/ 죄를 기르며/ 나를 달랜다.//

사랑굿 40 / 김초혜
물이어라/ 이룬 것 없는 듯/ 이루는/ 너를 잠기게 할 수 있고/ 네 속에 들 수 있는/ 죽어도 딴 마음/ 가질 줄 모르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머물게 하는/ 나를 잃지 않으면/ 너를 붙잡아 둘 수 있는/ 물이어라.//

사랑굿 41 / 김초혜
하늘에/ 해가 하나이듯/ 물 흐르는 도리에/ 두 가지가 없어라/ 그대로가 하나이어/ 마음에/ 두 길을 내지 못하고/ 짧은 생명에 갇히어/ 내 영혼은 울어라/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채/ 어지러움을 견디며/ 세월을 돌려 놓아도/ 눈면 돌 속에/ 아득히 있는 그대.//

사랑굿 42 / 김초혜
얼굴을 돌려도/ 그림자는 남듯/ 그대 떠난대도/ 그리움 되일어/ 날마다 반기오/ 멀어지지도/ 다가오지도 않으며/ 한숨과 웃음을 지니고/ 가던 길로/ 돌아오는 그대/ 죽음은/ 몸과 마음을 갈라놓지만/ 그대와 나/ 죽음도 건너/ 뿌리 없어도/ 꽃을 피우리.//

사랑굿 43 / 김초혜
오늘은 강물이/ 무슨 일로/ 한밤내/ 울고 있는가/ 흔들리며/ 웅얼웅얼/ 어떤 추억을/ 우는 것인가/ 달도 쉬어가고/ 그리움도 쉬어가는/ 월유봉(月留峯)에/ 분꽃은 수줍은데 /건드리면/ 눈물이 될/ 마음을 안고/ 그대에게/ 가야 하리/ 불이 꺼져도.//

사랑굿 44 / 김초혜
그대 길 떠나면/ 나는 길이 되고/ 밤으로 그대 오면/ 나는 달이 되리/ 빈 자리 마련하고/ 충족에 있기보다/ 남루만 가지려/ 목숨 빛나는데/ 그대 내게/ 중심없는 혼란 주어/ 시간 밖에서/ 시간 안에서/ 마음이 잃어지면/ 가로놓인/ 설운 산을 무너뜨리고/ 아무래도 나는/ 떠나야 할까 보다.//

사랑굿 45 / 김초혜
그대 바람이어도/ 흔들리지 않으려/ 내가 될 수 없는 나를/ 안으로 숨겼건만/ 내게로 오면/ 빛이 되는/ 그대/ 넉넉한 웃음소리/ 가까이 와도/ 멀기만 더한/ 먼데 있는 그대를/ 가득 울고 있는데/ 어리석음으로/ 다하지 못한/ 어리석은 이/ 못 떠나면 어이하리오.//

사랑굿 46 / 김초혜
얼굴 속의 얼굴을 보여다오/ 백 번을 거듭나도/ 그대 하나/ 태우지 못해/ 숨어 우는 뜻/ 어찌하랴/ 세속도 어기고/ 진실도 버리며/ 사정없이 추운/ 나의 눈먼 이치가/ 어찌 그대 허물이랴/ 매일의 죽음 속에서/ 살아나는 나의 꽃은/ 그대 얼룩지게 하지만/ 어둠에선/ 어둠만 살 듯/ 사랑에선/ 사랑만 남음에랴.//

사랑굿 47 / 김초혜
불타 버려도/ 옮겨 붙어/ 다시 타서/ 차마 못 타도/ 불이 되어/ 불로 태워/ 사루어 주고/ 물이 되어/ 물로 식혀/ 씻어 주시고/ 물에도 젖지 않는/ 뿌리를 내리시고/ 불에도 뜨겁잖은/ 근거를 주시어/ 잊어질 때까지/ 모습을 상하지 않게 해/ 형체를 지키어/ 잠들어 꿈꾸게 하소서.//

사랑굿 48 / 김초혜
다르다 하면/ 하나로 되고/ 같다고 보면/ 거리가 있어지는/ 그대/ 누구시오/ 가까이 있을 땐/ 가까와 못 가고/ 멀리 있을 땐/ 멀어 못 가/ 맘 졸이며/ 그대신가 기다리고/ 잊지도 않고/ 구하지도 못하며/ 네 속에 네가 숨어도/ 내 속에 내가 숨어도/ 감추어지지 않는/ 사랑이란 말/ 차마 쓰기 어려워/ 더디게 울어 보내오.//

사랑굿 49 / 김초혜
입으로 보내고/ 마음으로 놓지 못하는/ 괴로움의 덩이/ 네게 가는 마음/ 머무르거나/ 그치지 않고/ 버려질 모습으로/ 녹고 있고/ 사랑도 저를 먼저 해치고/ 미움도 저를 먼저 해치니/ 그대 건너/ 다시는 미혹하지 않으리/ 오래지 않아/ 돌아가리니/ 몸을 헐고/ 마음은 떠나가고/ 잠깐 머무는데/ 무엇을 울게 하리.//

사랑굿 50 / 김초혜
높고 멀게/ 담을 쳐도/ 나는/ 불어나며 넘쳐/ 네게 이른다/ 얽어 묶어도/ 만나면 갈리는 줄/ 알고 알아도/ 놓아 버리고/ 풀어 가고/ 벗어나지 못해/ 흔들리며/ 멀미를 한다/ 생명으로/ 지우지 못할/ 너의 모습/ 꼭 한 번/ 마음대로 젖게 하라.//

사랑굿 51 / 김초혜
내 모양을/ 내가 부수고/ 마음의 때 씻어내/ 뜻을 풀어/ 괴로움과 멀게 하소서/ 어리석음에 얽혀/ 어두움에 들어도/ 세상 습관을 잊으며/ 하루라도/ 마음을 쉬게 하소서/ 내게서 자란 꽃순이/ 그대 밝히는/ 해가 된다면/ 허(虛)해도/ 불을 품은 채 잊게 하소서/ 어제는 연기로/ 날려 보내고/ 거듭/ 몸살을 앓으며/ 새로운 나를 낳게 하소서.//

사랑굿 52 / 김초혜
그대에게 가는 길이/ 저승에서도/ 더 먼 길인 걸/ 모르는 것 아니어요/ 들키지 않을/ 눈짓만/ 넉넉한 그대 이마에/ 얹어 놓고/ 서 있는 이 자리가/ 어둡고/ 험해도/ 노래할 테요/ 일찌기 가졌던 것/ 모두 버리고/ 타지 않으며/ 그대 곁에 머무를 것이어요.//

사랑굿 53 / 김초혜
그대 있기에/ 이 봄을/ 버릴 수가 없으니/ 꽃도 아파라/ 살이 아파하는 소리/ 뼈가 못 들은 채/ 이대도록 반나절/ 갈피를 못 잡고/ 나 못 들은 체/ 그대 못 들은 체/ 눈물도 가두고/ 기쁨도 가두고/ 잊어버리자/ 허리 꺾어/ 내려 누르는/ 이 머언 뜻을.//

사랑굿 54 / 김초혜
더운대로 추운대로/ 새순을/ 피우는/ 그대 또 그대/ 물되어 간 나를/ 불되어 간 나를/ 용서하라/ 그대여/ 이대로 말라서/ 물이 되지 않는 살을/ 타다가 이대로/ 불이 되지 않는 뼈를/ 그대여/ 무정(無情)하게 흐르게 하라/ 돌아서 가건/ 돌아와 서건/ 모르는 채 그대여/ 그렇게 맑아라.//

사랑굿 55 / 김초혜
몸이 있어/ 병이 있듯/ 그대 있기에/ 설움 있네/ 물을 묶지 못하는/ 그때나 이제나/ 더하지도/ 덜하지도 못한/ 이 마음/ 끝끝내 못 묶어/ 일렁이노니/ 참말로 사랑 아니거든/ 서지도/ 오지도 말며/ 저만치 뒤에서/ 잡아나 주어/ 구김없이 흐르도록/ 도와 주소서.//

사랑굿 56 / 김초혜
그대에게 얽매이면/ 두려움 일어/ 마음 태우거늘/ 그대에게서 벗어나면/ 잠시라도/ 기쁨 있어/ 번뇌의 불꽃 스러지네/ 진심도 괴로움도 끊고/ 이제는/ 그리움도/ 만나지 않으며/ 마음을 굴리어/ 하늘을 닮으면/ 못난 생각/ 잠깐도 나지 않아/ 고통에서 고통으로/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리.//

사랑굿 57 / 김초혜
잊었노라 함은/ 잊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벗어났다 함은/ 결박을 말하는 것이리/ 바람의 발을 붙들어도/ 그대 붙들 수 없어/ 무너져도/ 못 무너지는 마음/ 어찌해/ 애닯지 아니하리/ 미혹이 진실인 줄 알아/ 한 생각 잘못하면/ 모든 것 떠나가니/ 뿌리를 파내어/ 서로를 버리는 일/ 마땅이 없이 하리.//

사랑굿 58 / 김초혜
낮에도 밤에도/ 줄어드는 목숨이지만/ 마음으로 삭이면/ 죽은 나무에서도/ 꽃이 핀다/ 서로 갈려/ 떠나가도/햇빛으로/ 다시 피어/ 어둠에서 밝음으로 흐르고/ 그대 변하는/ 형상 따라/ 이 마음/ 움직이는 것 아니니/ 매어 묶지 않아도 되리/ 세상에 살면서/ 세상일에/ 묻히지 않으면/ 바다 속에서/ 흙도 디딜 수 있으리.//

사랑굿 59 / 김초혜
달은 날마다/ 둥들어/ 다시 이지러지고/ 한 달내/ 제마음 길들이며/ 편해진 심사/ 이렇듯 어두운/ 어질병을 일으키고/ 서른 밤 변해도/ 둥글어지듯/ 아픔으로/ 어리석음으로/ 얼기설기 얼어도/ 그대 불로 켜지는/ 그리움이리.//

사랑굿 60 / 김초혜
그대 곁/ 머물 데 없어도/ 마음의 집착/ 덜어내면/ 세상 가득/ 걸림 없이/ 그대 곁에/ 이를 수 있으리/ 아픔의 형태가/ 다른 모습으로/ 커와도/ 세상과 다른 쪽으로/ 돌아누워/ 제일로 맑은 넋/ 자랑하며/ 서로 새로워지리.//

사랑굿 61 / 김초혜
낡은 피 다 버리고/ 네게 간 나를/ 붙들어 둘 수 없어/ 떠날 수 없는 그대/ 다음에 만날 때면/ 그대여/ 어둠 속 그늘로 오지 말고/ 빛에서 빛으로 오시게/ 눈물 속에 되흐르는/ 그대 말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강물로 흘러 주게/ 잊을 수 없어/ 아무래도 못 견뎌/ 물로 흘러가거든/ 그대여/ 한 번만 넘치어 보게.//

사랑굿 62 / 김초혜
놓아 버림 후에/ 가까워지는/ 그대/ 그대 모습/ 뚜렷이 볼 수 없음은/ 눈물에/ 믿음이 없어서이고/ 나의 내부(內部)/ 끝없는 곳에/ 끝없이 있는 그대/ 떠돌던 생명은/ 한 줄기 눈물로/ 새롭게 맑아지고/ 몇 백만의 몇 백만의 시간을/ 돌아서게 두어도/ 눈물로/ 다시 오는 그대.//

사랑굿 63 / 김초혜
밤이 되어면/ 꿈에 만나자/ 마음과 뜻으로/ 모든 허망 안 보며/ 물 없는 데서/ 물을 내라 해도/ 좋은 얼굴이 되자/ 내 허물에/ 네가 더럽혀져도/ 편안히 받아들이면/ 어떠한 마음이/ 그것을 분별하랴/ 부릴수록 느는 것/ 욕심만이 아니듯/ 미워하면 미움 늘어/ 낯설어지니/ 서로는 빛이 되어/ 맹목에 살자.//

사랑굿 64 / 김초혜
형상도 빛깔도 없는/ 헛된 모습에 묻혔던/ 나를 무엇으로든/ 가리고 싶으오/ 그대 공간(空間)을/ 여행하던 빛을/ 모조리 꺾어/ 햇빛 쪽으로 흐르게 하고/ 이마에 묻은/ 허물을/ 씻을 길 없어/ 꿈을 끊노니/ 뜻밖의 하늘로/ 내게 와/ 상실에서/ 건져내 주오.//

사랑굿 65 / 김초혜
다툼도/ 허물도 없이/ 친하지도/ 소홀하지도 않으며/ 막지도/ 비키지도 않고/ 밝지도/ 눈부시지도 않게/ 웃음도/ 기르지 않고/ 울어/ 달이 되지도 않으며/ 돌같이/ 아무렇게나/ 그대 곁에 구르리.//

사랑굿 66 / 김초혜
마실 수 있는 이에게서/ 물을 빼앗고/ 마시지 못할 이에게/ 물을 주는 것은/ 오를 수 없는 하늘을/ 오르게 하려는 벌(罰)/ 볕으로도/ 줄지 않고/ 바람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바다처럼/ 무슨 설움으로도/ 바뀌지 않는 마음/ 이루어냄에도/ 허물어짐에도/ 아서라/ 마음 쓰지 말고/ 모두 두고 가는 물처럼/ 그렇게 흐르리.//

사랑굿 67 / 김초혜
불꽃 속에/ 들어가는/ 악(惡)이 되어도/ 먼데 사람 아닌 거기/ 있고 싶다/ 좋은 얼굴 헐리고/ 낯빛은 시들어도/ 본래의 모습 아닌/ 어리석음 이대로/ 물러나 뉘우치고/ 아플지라도/ 그대 눈 속에/ 내 눈을 심고/ 그대 울음 속에/ 내 울음 심어/ 안으로 안으로 상해도/ 그대/ 받아들이는/ 이것이 무엇인가.//

사랑굿 68 / 김초혜
내 수치를/ 아는 것도/ 나를 피하려/ 비켜서는 것도/ 나를 조금도/ 숨길 수 없는 것도/ 의지의 문을/ 부수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 것도/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는 것도/ 한 덩이 무덤인/ 나입니다/ 최초로/ 그늘 속에/ 햇빛으로/ 서신 이/ 그것만 당신입니다.//

사랑굿 69 / 김초혜
하루 낮의 기쁨인들 어떠리/ 꽃 피울 수 없어/ 씨앗을 기르지 않는/ 서러운 그대/ 꽃 꺾어 머리에 이고/ 나 몰라라/ 그대에게 가/ 하루만 보름달이면 어떠리/ 그대 배경으로/ 조금은 남은 향기/ 씻기어지지 말라고/ 더 어리석어지면 어떠리/ 작은 흐름을 내어/ 천리에 이르는/ 물을 이루어/ 그대 얽매지 않으려 해도/ 무릎을 꿇으며/ 멀어가는 그대를/ 무슨 용서로/ 섬길 수 있으리.//

사랑굿 70 / 김초혜
등불과 어둠은/ 같은 빛이라/ 등불이듯/ 어둠이듯/ 그런 마음을 가지고/ 등불로 잠들고/ 어둠으로 깨어나도/ 가슴을 딛고/ 달아나는 그대를/ 붙잡지 못하는/ 아직도 시린/ 맨손이어라/ 깊고 무거운/ 사슬로/ 묶이어 간/ 그대가/ 오늘 아침/ 이 길로 온다 해도/ 맞을 수 없는/ 빈손이어라.//

사랑굿 71 / 김초혜
등불과 어둠은/ 같은 빛이라/ 등불이듯/ 어둠이듯/ 그런 마음을 가지고/ 등불로 잠들고/ 어둠으로 깨어나도/ 가슴을 딛고/ 달아나는 그대를/ 붙잡지 못하는/ 아직도 시린/ 맨손이어라/ 깊고 무거운/ 사슬로/ 묶이어 간/ 그대가/ 오늘 아침/ 이 길로 온다 해도/ 맞을 수 없는/ 빈손이어라.//

사랑굿 72 / 김초혜
불 속에/ 두 손을 넣고/ 나를 넓혀/ 그의 모습을/ 지워 주소서/ 지운다 그렇대도/ 나의 외로움/ 그대/ 눈빛으로/ 가라앉혀 주시고/ 오래 새롭게/ 만나기 위해/ 높으게 사는 목숨/ 이어지고/ 이어가게 하여 주시어/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더불어/ 빛나는 노래/ 부르게 하소서.//

사랑굿 73 / 김초혜
반드시 이루어지리/ 괴로움에 결박된 마음/ 저절로 풀리고/ 고운 것 더러운 것/ 모두 거두어/ 푸르게 흐르게 하리/ 묶인/ 손목이 저리어와도/ 스스로 부른 괴롬/ 새로 또 지어/ 꽃다움 이루어/ 스러져도 좋으리/ 세상일 버리고/ 마음으로도/ 원하지 않으며/ 하늘을 바라지 못한다해도/ 귀나 밝혀/ 바람소리 들으며 살리.//

사랑굿 74 / 김초혜
봄이 오면/ 첫 불을 밝히는/ 꽃을 아는가/ 그대여/ 꽃에 묻힌/ 그대 모습/ 그릴 길 없어/ 짐 풀고 싶을 때/ 기쁨도 슬픔도/ 내 몫이 아니던/ 날은 지나/ 푸른빛 울리고/ 서로 갈고 닦기에/ 새로운/ 봄은/ 꽃이어라.//

사랑굿 75 / 김초혜
그대 아니 오는데/ 눈부신 빛이면/ 무얼하리/ 이제 짐 풀고 앉아/ 마음으로 지은 죄/ 붉은 눈물로 받으리/ 한 번만/ 마주 보려고/ 헛된 열망 여러 번/ 어둠을 피해 서며/ 죄 아니게/ 사랑하는 이/ 그대 내 뜻과 같았음을/ 뒷날 깨닫는대도/ 어찌 원망 없이/ 그대 맞을 수 있으리.//

사랑굿 76 / 김초혜
생(生)과 죽음의 사이에서/ 꿈을 꾸었소/ 흔들리면서/ 엇갈리면서/ 꿈과 꿈 사이에서/ 꿈으로 굳처지고/ 귀먹고/ 눈멀어/ 말을 잃어도/ 깨어나지 않고/ 그대에게 이르기/ 바랐었지만/ 보다 높은 꿈속에서/ 그대/ 되찾기 위해/ 미움과 고움/ 버리고/ 넓게 빛나려 하오.//

사랑굿 77 / 김초혜
나를 낳게 하라/ 무엇을 더/ 허락할 수도 없이/ 절명한 생명/ 그대 속에서/ 죽어간 시간은/ 빛으로도/ 깨쳐지지 않고/ 가슴은/ 숨길수록 아픈/ 변명에/ 에이는데/ 하늘도 허리 굽힌/나의 진실을/ 무작정 무겁다고/ 돌아선 그대.//

사랑굿 78 / 김초혜
땅이 눈을 뜨자/ 하늘을 섬겼듯/ 아이와 같이/ 무조건이게 하소서/ 의식하지 않으면/ 죽음도 오지 않듯/ 그대 얻으려 않으면/ 잃지 않아도 되고/ 가장 겁났던 것/ 쏟아 버리고/ 괴로움도 쉬게 하여/ 확실한 밝음이게 하소서.//

사랑굿 79 / 김초혜
마음으로 생긴 세상/ 마음으로 머무르며/ 마음따라 기쁨 내니/ 마음에 의지한/ 비좁은 몸은/ 마음을 접으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어/ 저절로 허공이 되고/ 마음과 마음 아닌 것/ 하나 되지 못하니/ 이루고/ 무너짐을/ 탓하지 말고/ 마음 안에 있었던 것/ 모두 부수어/ 마음 밖으로 밀어내리.//

사랑굿 80 / 김초혜
달은 깨끗하고/ 해는 빛나고/ 그대는/ 하나를 지켜/ 고요하라/ 그대와 나/ 해와 햇빛이기에/ 달과 달빛이기에/ 끝간 데 없는/ 기쁨이어라/ 한 생각도/ 어지러움 없이/ 목숨 더함 얻어/ 기쁨에 섞이니/ 그대는/ 하늘 중의 하늘이어라.//

사랑굿 81 / 김초혜
불로도/ 태워지지 않고/ 물로도/ 잠기지 않는/ 허공보다/ 높이 있는 그대/ 빛의 으뜸으로/ 밝음이 되어/ 마음의/ 바탕이 되어 주오/ 그리움도 번뇌도/ 걸러냈으나/ 온종일 생각해도/ 즐겁고/ 싫지 않은 그대/ 돌무더기/ 서러워도/ 그대 바래 살려오.//

사랑굿 82 / 김초혜
떠난다 하면/ 미련 생기고/ 잊자 하면/ 그리움 깊어지니/ 떠난다/ 잊는다는/ 마음 버리고/ 그대가/ 파낸 뿌리/ 묻어/ 올리는/ 흙이 된다면/ 사랑이 풀이어/ 괴오움 떠나리.//

사랑굿 83 / 김초혜
아무 구함도 없는/ 밝은/ 섬이 되리/ 조그만 죄/ 심장에 가두어 두고/ 무거운 고통과/ 움직임 없는/ 절망이 와도/ 그대에게/ 정직하고 싶어라/ 그대와의/ 세월은/ 아픔으로 쌓여 있고/ 그대 덜/ 사랑할 수 있다면/ 빛의 그늘에 누워/ 봄만 머무는/ 섬이 되리니.//

사랑굿 84 / 김초혜
해도/ 달도/ 어둡고/ 그대도/ 나도/ 오늘은 모두/ 어둠으로 들어/ 어둠이/ 어둠 위로 밀리고/ 배에/ 스며드는 어둠/ 퍼내어도/ 뱃머리를 돌려도/ 변하지 않는 건/ 고뇌뿐/ 어찌해도/ 어둠이여/ 용서하도록/ 용서받도록/ 도와 주소서.//

사랑굿 85 / 김초혜
어려울 것도/ 쉬울 것도 없이/ 너그러워지는/ 마음은/ 외홀로 흐르고/ 말하기 싫어/ 말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서/ 모르지는 않는 그대/ 말 안에 없는 말/ 말 밖에 있는 말/ 모두 안다 해도/ 어둠에 빛일 수는 없는 그대/ 빛을 못 보고/어둠만 본다 해도/ 새로운 시간을 걸고/ 지금은/ 무심(無心)이어야 하는/ 때.//

사랑굿 86 / 김초혜
기쁘지 않게 오고/ 서럽지 않게 가며/ 꿈속에 머무는/ 그대/ 하늘은 잴 수 있어도/ 그대 마음/ 헤아릴 수 없어/ 잠들어도/ 우는 나를/ 어찌하란 말이냐/ 병을 안고/ 죽음 오듯/ 목숨이 무너져도/ 네게 흐르는/ 나를/ 멈출 길 없으니/ 뜨지 마라/ 달아/ 나의 이 설움/ 끝날 때까지.//

사랑굿 87 / 김초혜
고통이 기쁨/ 가져온다면/ 금빛 시간/ 기다리며/ 그대가 건네준/괴로움/ 달다 받으리/ 많이도 데었던/ 아픔도 잊고/ 달이 차면/ 남 몰래/ 넘어오는 그리움/서로 가졌던 것/ 버리기 아까워/ 노상/ 달만 탓하오.//

사랑굿 88 / 김초혜
봄을 보채/ 무너지는 꿈/ 일어나지 못하는/ 잠이고 싶다/ 새 한 마리/ 마음 낚아/날개짓도/ 닿을 수 없는/ 달 속으로 날은 후/ 나는 보이지 않고/ 하늘과 땅/ 가득하게/ 너만 있었다.//

사랑굿 89 / 김초혜
그리는 사람 있어/ 얼굴은 빛나/ 꽃과 같고/ 어리석고 미련해/ 얼굴빛 잃어/ 근심에 얽히네/ 하늘과 땅이/ 닫히어/ 바다가 끓어도/ 무너지지 않는/ 마음으로/ 불무더기 잊으며/ 얽힘에서 벗어나/ 괴로움과/ 즐거움 함께하리.//

사랑굿 90 / 김초혜
백년의 인연을/ 벌(罰)로 받아/ 눈물이/ 되었음에/ 꿈만 가졌던/ 가난한 마음에/ 달은/ 눈물만 되고/ 그대/ 휘파람소리/ 하늘 열어/ 천지에 꽃이더니/ 이제는/ 거꾸로/ 시간을 끊어/ 나를 묶었네.//

             사랑굿 93 / 김초혜
화염의

옷을
벗을 수도
벗길 수도 없어
태워지면서
형극의
길로 든다
살들이
타고 남은 재
영혼을
맑게 하고
그대 만이
벗길 수 있는
이 옷은
타지도
낡지도 않고
나를 태운다.

 

장사익 사랑굿 110 / 김초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대로 인해/ 죽을 수 있는/ 죽음은/ 다 죽어 보았서/ 죽을/ 죽음이 없어도/ 다시 죽기 위해/ 안 끝나는/ 죽음을 시작하려오/ 돌아설 수 있을 때/ 돌아설 것을/ 그대를/ 나처럼 여긴 후부터/ 먼 날음을 위해/ 날지 못할/ 날개를 준비하고 있다오.//

사랑굿 111 / 김초혜
그곳이 어디든/ 무심한 곳으로/ 나는 가고 싶네/ 세상살이로/ 흐려진 눈/ 밀어버리고/ 혼자서 무어라/ 지껄인대도/ 들어줄 이 없는/ 적막에 싸여/ 그대를/ 조금씩 단념하면서/ 적막을 보태어/ 살다가 보면/ 설움도 나를/ 놓아주리니//

사랑굿 112 / 김초혜
그대를/ 이기는 일은/ 평온함으로/ 돌아가는 일/ 견딜 수 없음을/ 견디는 일/ 참다운 크기로/ 그대를/ 볼 때까지/ 고쳐 일어서며/ 병으로/ 나를 지탱하는 일/ 새로/ 태어나는/ 아침을 기다리며/ 아직도/ 울 수 있는 것을/ 마음의/ 기쁨으로 여기는 일.//

사랑굿 163 / 김초혜
그대와 보낸/ 세월은/ 짧기만 한데/ 그대 기다리는/ 하루는/ 길기만 하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얼굴로/ 돌아와/ 내게/ 절을 하고 섰는/ 그대/ 인사도 없이/ 떠나려든/ 내 손을 잡아주오/ 그대 손을 놓고/ 편안히 떠나려오//


 

김초혜 시인
1943년 경성부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상북도 안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훗날 충청북도 청주에서 성장했다. 청주여자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 《현대문학》에 ‘길’이 추천돼 등단했다.

시집으로 『떠돌이 별』『사랑굿1』『사랑굿2』『사랑굿3』『섬』『어머니』 『세상살이』『그리운 집』 등이 있다. 수필집으로 『생의 빛 한줄기 찾으려고』『함께 아파하고 더불어 사랑하며』 등이 있다. 한국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현대문학상·정지용 문학상 등을 받았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의 부인이다.

 

'조종현·조정래·김초혜 가족문학관' 전남 고흥에 개관 | 연합뉴스

(고흥=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한국의 문학 거장인 조정래(74) 작가와 그의 선친인 시조시인 조종현(1906∼1989), 조정래의 아내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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