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김종삼 시인

부흐고비 2021. 5. 21. 09:13

포천 고모호수공원 내 김종삼 시인의 시비

어머니 / 김종삼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아들 넷을 낳았다/ 그것들 때문에 모진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 아우는 비명에 죽었고/ 형은 64세때 죽었다/ 나는 불치의 지병으로 여러 번 중태에 빠지곤 했다/ 나는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부인터 공동 묘지를 향하여/ 어머니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세상에 남길 만한/ 몇 줄의 글이라도 쓰고 죽는다고/ 그러나/ 아직도 못 썼다고//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

엄마 / 김종삼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 엄만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行商이란다// 너희들 오늘도 나와 있구나 저물어 가는 山허리에// 내일은 꼭 하나님의 은혜로/ 엄마의 지혜로 먹을거랑 입을거랑 가지고 오마.// 엄만 죽지 않는 계단//

묵화(墨畵) / 김종삼
물 먹은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물통 / 김종삼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땅 위에선//

올페 / 김종삼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後世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나의 직업은 시가 못된다/ 宇宙服처럼 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환 時刻 未定.//

미사에 참석한 이중섭씨 / 김종삼
내가 많은 돈이 되어서/ 선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맘놓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리니// 내가 처음 일으키는 미풍이 되어서/ 내가 불멸의 평화가 되어서/ 내가 천사가 되어서 아름다운 음악만을 싣고 가리니/ 내가 자비스런 신부가 되어서/ 그들을 한 번씩 방문하리니//

라산스카 / 김종삼
바로크 시대 음악 들을 때마다/ 팔레스트리나 들을 때마다/ 그 시대 풍경 다가올 때마다/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

라산스카 3 / 김종삼
미구에 이른/ 아침// 하늘을/ 파헤치는/ 스콥소리//

시인학교 / 김종삼
공고(公告)//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풍경 / 김종삼
싱그러운 거목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 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북치는 소년 / 김종삼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서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평화롭게 / 김종삼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그런 날들이/ 그날들이/ 영원토록 평화롭게--//

장편(掌篇) 1/ 김종삼
아작아작 크고 작은 두 말의 염소가 캬베스를 먹고 있다/ 똑똑 걸음과 울음소리가 더 재미있다/ 인파 속으로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 나 같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녀석들을 죽이지 않겠다//

장편(掌篇) 2 / 김종삼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균일상 밥집 문턱에/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고향 / 김종삼
예수는 어떻게 살아갔으며/ 어떻게 죽었을까/ 죽을 때에 뭐라고 했을까/ 흘러가는 요단의 물결과/ 하늘나라가 그의 고향이었을까 철따라/ 옮아다니는 고운 소릴 낼 줄 아는/ 새들이었을까/ 저물어가는 잔잔한 물결이었을까//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원정(園丁) / 김종삼
평과(平果)나무 소독이 있어/ 모기 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어느 날이 되었다// 며칠 만에 한 번만이라도 어진/ 말 솜씨였던 그인데/ 오늘은 몇 번째나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는 길을 기어이 가리켜 주고야 마는 것이다.// 아직 이쪽에는 열리지 않는 과수(果樹)밭/ 사이인/ 수무나무 가시 울타리/ 긴 줄기를 벗어나/ 그이가 말한 대로 얼만가를 더 갔다.//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식물이 풍기어 오는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 쪽을 향하여 갔다.// 안쪽과 주위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무변(無邊)하였다./ 안쪽 흙 바닥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깔의 과실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째를 집어 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 갔다.//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

노주점(露酒店) / 김종문
카아바이드 램프 주위에 떠도는 하루살이 떼/ 한놈 낙하하여 술잔에 뜬다./ 인생이란 오말 하이얌의 시,/ 인간의 실체는 아무데도 없고, 그저/ 취중왕생(醉中往生)만이 단 하나의 건강법, 아니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수면(睡眠)만이 절대의 행운./ 밑창 난 술잔, 세계의 술은 말랐소이오니까/ 박코소, 나의 전능의 신이여!/ 다시 기우리는 술병은 피사의 사탑./ 늘어지는 취객들, 안팎이 굳어지는 무생물인가/ 기대는 대화는 꼬마들이 쓰다버리는 석고부스러기,/ 가자! 이상기후의 서울의 여름밤, 어둠의 거리를/ Quo Vadis Domine?//

극형 / 김종문
빗방울이 제법 굵어진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먼 산 너머 솟아오르는/ 나의 永園(영원)을 바라보다가/ 구멍가게에 기어들어가/ 소주 한 병을 도둑질했다/ 마누라한테 덜미를 잡혔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토큰 몇 개와/ 반쯤 남은 술병도 몰수당했다/ 비는 왕창 쏟아지고/ 몇 줄기 光彩(광채)와 함께/ 벼락이 친다/ 强打(강타)/ 連打(연타)//

죽음을 향하여 / 김종삼
또 죽음의 발동이 걸렸다/ 술 먹으면 죽는다는 지병이 악화되었다 날짜 가는 줄 모르고 폭주를 계속/ 하다가 중환자실에 幽閉(유폐)되었다 무시무시한 육신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 다 고통스러워 한시바삐 죽기를 바랄 뿐이다./ 희미한 전깃불도 자꾸만 고통스럽게 보이곤/ 했다/ 해괴한 팔자이다 또 죽지 않았다/ 뭔가 끄적거려 보았자 아무 이치도 없는//

의음(擬音)의 전통 / 김종삼
오래인 한도표(限度表)의 정둔(停屯)된 밖으로는/ 주간(晝間)을 가는 성하(星河)의 흐름 속을 가며/ 오는 구김살이 희박(稀薄)하였다.// 모호한 빛발이/ 쏟아지는 수효와의 역(驛)라인이/ 엉키어 영겁(永劫)의 현재라는 길이/ 열리어 지기 전(前)// 고집(固執)되는 야수(夜水)의 그늘이 되었던/ 얕이한 집들, 울타리였다.// 분만(分娩)되는/ 뜨짓한 두려움에서// 영겁(永劫)의 현재 라는/ 내부(內部)가 비인/ 하늘이 가는/ 납덩어리들의......// 있다는 신(神)의 묵수(墨守)는/ 차츰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민간인 / 김종삼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트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고 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5학년 1반 / 김종삼
5학년 1반입니다./ 저는 교외에서 살기 때문에 저의 학교도 교외에 있습니다./ 오늘은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므로 오랜만에 즐거운 날입니다./ 북치는 날입니다./ 우리 학굔/ 높은 포플러 나무줄기로 반쯤 가리어져 있습니다./ 아까부터 남의 밭에서 품팔이하는 제 어머니가 가물가물하게 바라다보입니다./ 운동 경기가 한창입니다./ 구경 온 제 또래의 장님이 하늘을 향해 웃음지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가져온 보자기 속엔 신문지에 싼 도시락과 삶은 고구마 몇 개와 사과 몇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옮겨 놓는 어머니의 손은 남들과 같이 즐거워 약간 떨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품팔이하던 밭이랑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고구마 이삭 몇 개를 주워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잠시나마 하느님보다도 숭고하게 이 땅 위에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어제 구경 왔던 제 또래의 장님은 따뜻한 이웃처럼 여겨졌습니다.//

부활절 / 김종삼
성벽에 일광이 들고 있었다/ 육중한 소리를 내는 그림자가 지났다// 그리스도는 나의 산계급이었다고/ 죄없는 무리들의 주검 옆에 조용하다고// 내 호주머니 속엔 밤 몇 톨이 들어/ 있는 줄 알면서/ 그 오랜 동안 전해 내려온 전설의/ 돌층계를 올라와서/ 낯모를 아이들이 모여 있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무거운 거울 속에 든 꽃잎새처럼/ 이름이 적혀지는 아이들에게/ 밤 한 톨씩을 나누어주었다//

동트는 지평선(地平線) / 김종삼
연인의 신호처럼/ 동틀 때마다/ 동트는 곳에서 들려오는/ 가늘고 선명한/ 악기의 소리/ 그 사나이의 유목민처럼/ 그런 세월을 오래오래 살았다/ 날마다 바뀌어지는 지평선에서//

그리운 안니·로·리 / 김종삼
나는 그동안 배꼽에/ 솔방울도 돋아/ 보았고// 머리 위로는 몹쓸 버섯도 돋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는/ '맥웰'이라는/ 老醫의 음성이// 자꾸만/ 넓은 푸름을 지나/ 머언 언덕가에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만치 하면 좋으리마치/ 리봉을 단 아이들이 놀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는/ 얕은/ 파아란/ 페인트 울타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처마밑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그 아이는/ 얼마 못 가서 죽을 아이라고// 푸름을 지나 언덕가에/ 떠오르던/ 음성이 이야기ㄹ 하였습니다// 그리운/ 안니·로·리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의 본적(本籍) / 김종삼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내가 죽던 날 / 김종삼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주먹만하다 집채만하다/ 쌓이었다가 녹는다/ 교황청 문 닫히는 소리가 육중/ 하였다 냉엄하였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비드상 아랫도리를 만져보다가/ 관리인에게 붙잡혀 얻어터지고 있었다//

궂은 날 / 김종삼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고통 견디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도 죽은 이가 있고/ 오늘은 딴 병실로 옮아간 네 살짜리가/ 위태롭다 합니다// 곧 연인과 死刑 간곡하였고/ 살아 있다는 하나님과/ 간혹/ 이야기ㄹ 나누고 걸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한 손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드빗시 산장 / 김종삼
결정짓기 어려웠던 구멍가게 하나를 내어놓았다.// '한푼어치도 팔리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오늘도 지나간 것은 분명 차 한 대밖에…// 그새/ 키 작고 현격한 간격의 바위들과/ 도토리나무들의/ 어두움을 타 들어앉고/ 꺼먼 시공뿐./ 선회되었던 차례의 아침이 설레이다.// - 드빗시 산장 부근//

G·마이나 -전봉래(全鳳來)형(兄)에게 / 김종삼
물/ 닿은 곳// 신양(神恙)의/ 구름밑// 그늘이 앉고// 묘연(杳然)한/ 옛/ G·마이나//

꿈속의 나라 / 김종삼
한 귀퉁이// 꿈나라의 나라/ 한 귀퉁이// 나도향/ 한하운씨가/ 꿈속의 나라에서// 뜬구름 위에선/ 꽃들이 만발한 한귀퉁이에선//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구스타프 말러가/ 말을 주고받다가/ 부서지다가/ 영롱한 달빛으로 바뀌어지다가//

돌각담 / 김종삼
광막한지대이다기울기/ 시작했다잠시꺼밋했다/ 십자형의칼이바로꽂혔/ 다견고하고자그마했다/ 흰옷포기가포겨놓였다/ 돌담이무너졌다다시쌓/ 다쌓았다쌓았다돌각/ 담이쌓이고바람이자고/ 틈을타凍昏이잦아들었/ 다포겨놓이던세번째가/ 비었다//

스와니강(江)이랑 요단강(江)이랑 / 김종삼
그해엔 눈이 많이 나리었다. 나이 어린/ 소년은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다./ 스와니강(江)이랑 요단강(江)이랑 어디메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눈이 많이 나려 쌓이었다./ 바람이 일면 심심하여지면 먼 고장만을/ 생각하게 되었던 눈더미 눈더미 앞으로/ 한사람이 그림처럼 앞질러갔다.//

서부(西部)의 여인 / 김종삼
한 여인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자도 병들어가고 있었다/ 일 년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일 년은 너무 기일었다// 그녀는 다시 술집에 전락되었다가 죽었다// 한 여인의 죽음의 문은/ 서부 한복판/ 돌막 몇 개 뚜렷한/ 어느 평야로 열리고// 주인 없는/ 마(馬)는 엉금엉금 가고 있었다// 그 남잔 샤이안족이/ 그녀는 목사가 묻어주었다.//

소금바다 / 김종삼
나도 낡고 신발도 낡았다/ 누가 버리고 간 오두막 한 채/ 지붕도 바람에 낡았다/ 물 한 방울 없다/ 아지 못할 봉우리 하나가/ 햇볕에 반사될 뿐/ 조류(鳥類)도 없다/ 아무것도 아무도 물기도 없는/ 소금 바다/ 주검의 갈림길도 없다.//

앙포르멜 / 김종삼
나의 무지(無知)는 어제 속에 잠든 망해(亡骸) 세자아르 프랑크가/ 살던 사원 주변에 머물렀다./ 나의 무지는 스테판 말라르메가 살던 목가(木家)에 머무렀다.// 그가 태우던 곰방댈 훔쳐 내었다/ 훔쳐낸 곰방댈 물고서/ 나의 하잘 것이 없는 무지는/ 반 고흐가 다니던 가을의 근교 길바닥에 머물렀다./ 그의 발바닥만한 낙엽이 흩어졌다./ 어는 곳은 쌓이었다.// 나의 하잘 것이 없는 무지는/ 장 폴 사르트르가 경영하는 연탄공장의 직공이 되었다./ 파면되었다.//

아우슈비츠 라게르 / 김종삼
밤하늘 호숫가엔 한 가족이/ 앉아 있었다/ 평화스럽게 보이었다// 가족 하나하나가 뒤로 자빠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인형 같은 시체들이다// 횟가루가 묻어 있었다// 언니가 동생 이름을 부르고 있다/ 모기 소리만하게// 아우슈비츠 라게르//

어부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회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술래잡기 / 김종삼
심청일 웃겨 보자고 시작한 것이/ 술래잡기였다./ 꿈 속에서도 언제나 외로웠던 심청인/ 오랜만에 제 또래의 애들과/ 뜀박질을 하였다.// 붙잡혔다./ 술래가 되었다./ 얼마 후 심청은/ 눈가리개 헝겊을 맨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술래잡기 하던 애들은 안 됐다는 듯/ 심청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배음(背音) / 김종삼
몇 그루의 소나무가/ 얕이한 언덕엔/ 배가 다니지 않는 바다,/ 구름 바다가 언제나 내다 보였다// 나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줄여야만 하는 생각들이 다가오는 대낮이 되었다./ 어제의 나를 만나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골짜구니 대학건물은/ 귀가 먼 늙은 석전은/언제 보아도 말이 없었다.// 어느 위치엔/ 누가 그린지 모를/ 풍경의 배음이 있으므로,/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소공동 지하 상가 / 김종삼
두 소녀가 가즈런히/ 쇼 윈도우 안에 든 여자용/ 손목시계들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하나 같이 얼굴이 동그랗고/ 하나같이 키가 작다/ 먼 발치에서 돌아다 보았을 때에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들여다 보고 있었다/ 쇼윈도우 안을 정답게 들여다 보던/ 두 소녀의 가난한 모습이/ 며칠째 심심할 때면/ 떠 오른다/ 하나같이 동그랗고/ 하나같이 작은.//

두꺼비의 역사(轢死) / 김종삼
갈 곳이 없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비 한 마리가 맞은편으로 어기적뻐기적 기어가고 있었다/ 연신 엉덩이를 들석거리며 기어가고 있었다. 차량들은 적당한/ 시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수없는 차량 밑을 무사 돌파해 가고 있으므로 재미있게 보였다// ………// 대형 연탄차 바퀴에 깔리는 순간의 확산(擴散) 소리가 아스팔트/ 길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비는 더욱 쏟아지고 있었다/ 무교동에 가서 소주 한잔과 설렁탕이 먹고 싶었다//

서시 / 김종삼
헬리콥터가 지나자/ 밭이랑이랑/ 들꽃들이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갔으리라.//

기동차가 다니던 철뚝길 / 김종삼
할아버지 하나가 나어린 손자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할아버진 아침마다 손때 묻은 작은 남비,/ 나어린 손자를 데리고/ 아침을 재미있게 끓이곤 했다./ 날마다 신명께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이들은 그들만인 것처럼/ 애정과 희망을 가지고 사는 이들은/ 그들만인 것처럼/ 때로는 하늘 끝머리에서/ 벌판에서 흘러오고 흘러가는 이들처럼// 이들은 기동차가 다니던 철뚝길/ 옆에서 살고 있었다//

따뜻한 곳 / 김종삼
남루를 입고 가도 차별이 없었던 시절/ 슈벨트의 歌曲이 어울리던 다방이 그립다// 눈내리면 추위가/ 계속되었고/ 아름다운 햇볕이/ 놀고 있었다//

최후의 음악 / 김종삼
세자아르 프랑크의 음악(音樂) <바리야송>은/ 야간(夜間) 파장(波長)/ 신(神)의 전원(電源)/ 심연(深淵)의 대계곡(大溪谷)으로 울려퍼진다// 밀레의 고장 바르비종과/ 그 뒷장을 넘기면/ 암연(暗然)의 변방(邊方)과 연산(連山)/ 멀리는/ 내 영혼의/ 성곽(城廓)//

음악(音樂) -마라의 『죽은 아이를 追慕(추모)하는 노래』에 부쳐서 / 김종삼
日月(일월)은 가느니라/ 아비는 石工(석공)노릇을 하느니라/ 낮이면 大地(대지)에 피어난/ 만발한 뭉게구름도 우리로다// 가깝고도 머언/ 검푸른/ 산줄기도 사철도 우리로다/ 만물이 소생하는 철도 우리로다/ 이 하루를 보내는 아비의 술잔도 늬 엄마가 다루는 그릇 소리도 우리로다// 밤이면 大海(대해)를 가는 물거품도/ 흘러가는 化石(화석)도 우리로다// 불현듯 돌 쪼는 소리가 나느니라 아비의 귓전을 스치는 찬바람이 솟아나느니라/ 늬 棺(관) 속에 넣었던 악기로다/ 넣어 주었던 늬 피리로다/ 잔잔한 온 누리/ 늬 어린 모습이로다 아비가 애통하는 늬 신비로다 아비로다/ 늬 소릴 찾으려 하면 검은 구름이 뇌성이 비 바람이 일었느니라 아비가 가졌던 기인 칼로 하늘을 수없이 쳐서 갈랐느니라/ 그것들도 나중에 기진해지느니라/ 아비의 노망기가 가시어지느니라/ 돌 쪼는 소리가/ 간혹 나느니라// 맑은 아침이로다/ 맑은 하늘은 내려앉고// 늬가 즐겨 노닐던 뜰 위에/ 어린 草木(초목)들 사이에/ 神器(신기)와 같이 반짝이는/ 늬 피리 위에/ 나비가/ 나래를 폈느니라// 하늘에선/ 자라나면 죄 짓는다고/ 자라나기 전에 데려간다 하느니라/ 죄 많은 아비는 따 우에/ 남아야 하느니라/ 방울 달린 은피리 둘을/ 만들었느니라/ 정성들였느니라/ 하나는/ 늬 棺(관) 속에/ 하나는 간직하였느니라/ 아비가 살아가는 동안/ 만지작거리느니라.//

유성기 / 김종삼
한 노인이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몇 그루의 나무와 마른 풀잎들이 바람을 쏘이고 있었다 BACH의 오보의 주제가 번지어져 가고 있었다 살다 보면 자비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 갑자기 해가 지고 있었다//

 



김종삼(1921~1984) 시인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도요시마 상업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7년 월남하였다. 1951년 시 ‘돌각담’을 발표한 후 시작에 전념. 1953년 신세계에 '원정'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과격한 줄임과 건너띰이란 시의 본질을 꿰뚫는 방법으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약 200편의 시를 남겼다.
시집으로 <십이음계(十二音階)> <북치는 소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등이 있다. 1971년 현대시학상, 1983년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종삼

한 늙고 추레한 노인이 가난한 산동네의 구멍가게에 들어온다. 무허가 집들이 들어찬 산 8번지의 한 구멍가게다. 그 동네에는 개백정도 살고, 상처한 복덕방 영감도 살고, 막노동꾼도

100.daum.net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원규 시인  (0) 2021.05.23
강은교 시인  (0) 2021.05.22
나희덕 시인  (0) 2021.05.20
한용운 시인  (0) 2021.05.19
김초혜 시인  (0) 2021.05.18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