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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강은교 시인

부흐고비 2021. 5. 22. 06:01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사랑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그 소리는 늘 분홍색이다 / 강은교
가시금작화가 필 때면 전화가 오긴 했다,/ 전화를 기다릴 때면 유리창을 닦곤 했다,/ 유리창에 세상은 더 뽀얗게 보이곤 했다,/ 유리창을 다 닦으면 커튼을 내렸다,/ 귀퉁이가 다 닳아진 열쇠를 들고,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쑤셔박았다,// 곧 똑똑 소리, 나는 지나가던 바람의 양귀를 잡아 양탄자처럼 폈다,/ 지나가던 종소리도 붙잡아 라디오처럼 켰다,/ 그대가 나를 껴안고 가시금작화 핀 벼랑을 달렸다,/ 벼랑 밑 어딘가 던져 놓았을 닻을 찾아,/ 그것은 내가 만진, 만족스러운 최초의 꿈꽃,// 가시금작화가 필 때면 거기에서 그것의 숨소리는/ 분홍색 혀를 달달 떨며 양팔 잔뜩 벌린채 파도 속으로 속으로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아, 전화가 왔다.//

한용운 옛집 / 강은교
모서리 다 닳은 등불처럼/ 등불의 외다리처럼/ 여기, 생의 거미줄에서/ 여기, 반들거리는 먼지의 영원에서/ 발끝마다 아득히/ 기다림의 댓돌 위에서// 아야아, 풀 먹인 삼베 같은 목소리//

빨래 너는 여자 / 강은교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전화 / 강은교
아마, 다이얼을 돌려본 이들은 알 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닿지 않는 것/ 을 닿게 하는지를. 뛰뛰거리는 신호음이 들릴 때면, 아 반가움, 그 사람/ 이 뛰어오고 있군요 ……가슴을 벌리고, 혀를 움칫거리며, 온몸의 동맥/ 과 정맥 들을 펄럭펄럭, 허파에 산소를 불러들이며 ……그러나 오늘은/ 부재, 저 공중을 건너 저 바람을 건너 저 안개를 건너 건너 아라비아 숫/ 자 여섯 싸늘하게 앉아 있을 뿐,// 눈부신 섬, 당신의 뼈.//

풀잎 / 강은교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들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겨자씨의 노래 / 강은교
그렇게 크지 않아도/ 돼./ 그렇게 뜨겁지 않아도/ 돼,/ 겨자씨만 하면/ 돼./ 겨자씨에 부는 바람이면/ 돼./ 들을 귀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가장 작은 것에/ 가장 큰 것이 눕는다.//

                                                                          장날 / 강은교
장날이었다,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했다, 알사탕이 오색의 무지개를 뻗치고 있는 리어카 옆에는, 빛나는 무우 눈부신 시금치, 한 곳에 가니 물고기들이 펄떡펄떡하고 있었다, 거기 돛폭 같은 지느러미 윤기 일어서는 살에선 바다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허연 눈동자가 잔뜩 기대에 차서 장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녁은 가깝고/ 아침은 머네/ 어기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어야디// 우리는 그 앞에 섰다, 두 마리를 2000원에 샀다, 그것을 검은 비닐 봉지에 넣었다, 튀어오르지 않도록 입구를 단단히 묶어 가방 속에 넣었다. 아마 그 녀석은 바다 속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바다 속의 정적과 자유이리라고.// 우리는 저물녘에 거기를 떠났다, 한밤 중 가방을 열고 봉지를 풀었을 때 너는 거기에 없었다, 얌전한 죽음 두 개가 비닐의 이불을 덮고 고요히, 누워 있었다.// 아침은 멀고/ 저녁은 가까우네/ 어기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어야디//


아벨 서점/ 강은교
아마도 너는 거기서/ 희푸른 나무 간판에 생이라는 글자가 발돋움하고 서서 저녁 별빛을 만지는 것을 볼 것이다/ 글자 뒤에선 비탈이 빼꼼히 입술을 내밀 것이다/ 혹은 꿈길이 금빛 머리칼을 팔락일 것이다/ 잘 안 열리는 문을 두 손으로 밀고 들어오면/ 헌 책장을 밟고 선 문턱이 세상의 온갖 무게를 받아 안고 낑낑거리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구불거리는 계단으로 다가서면/ 눈시울들이 너를 향해 쭈삣쭈삣 내려올 것이다/ 그 꼭대기에 겁에 질린 듯 새하얘진 얼굴로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철쭉 한 그루/ 아마도 너는 그때/ 사람들이 수첩처럼 조심히 벼랑들을 꺼내 탁자에 얹는 것을 볼 것이다/ 꽃잎 밑 나 닮은 의자 위엔 연분홍 그늘들이 웅성거리며 내려앉을 것이고/ 아 거길 아는가/ 꿈길이 벼랑의 속마음에 깃을 대고/ 가슴이 진자줏빛 오미자처럼 끓고 있는 그곳을/ 남몰래 눈시울 닦는 너울대는 옷소매들, 돛들을, 떠있는 배들을/ 배들은 오늘도 어딘가 아름다운 항구로 떠날 것이다.//

도마 위, 저녁노을 / 강은교
생선 한 마리가 눈을 든다. 도마 위에서// 생선 한 마리가 된 물고기 한 마리 부스스 팔을 뻗친다, 도마 위에서/ 생선 한 마리가 된 물고기 한 마리 지느러미를 펄럭인다, 도마 위에서/ 생선 한 마리가 된 물고기 한 마리 심장을 끄집어낸다, 도마 위에서/ 생선 한 마리가 된 물고기 한 마리 거뭇해진 심장을 푸른 강물에게 던진다./ 수도꼭지에서 너털너털 흐르는 푸른 강물에게// 저녁노을 비스듬히 눕는다, 창을 건너와 도마 위로/ 저녁노을의 분홍빛 눈까풀 방울방울 눈물이 맺힌다,/ 도마 위에서 일어나 식칼 옆으로.//

물길의 소리 / 강은교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딧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 바삐 은빛 달을 않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의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물이 햇살을 핥는 소리, 핥아대며 반짝이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 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혜화동 -어느 황혼을 위하여 / 강은교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는 곳. 황혼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 늦은 오후면 햇살 비스듬히 비추며 사람들은 거기서 두런두런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러다 내다본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걷는 것을, 그러다 듣는다, 슬며시 고개 들이미는 저물녘 바람 소리를// 오래된 플라타너스 한 그루 그 앞에 서 있다, 이파리들이 황혼 속에서 익어간다, 이파리들은 하늘에 거대한 정원을 세운다,// 아주 천천히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실뿌리들은 저녁잠들을 향하여 가는 발들을 뻗는다//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거대한 추억들 곁에 함초롬히 서 있는 곳// 허기진 너는 흠집투성이 계단을 올라간다// 이파리들이 꿈꾸기 시작한다//

빠알간 망사주머니 속에서 / 강은교
빠알간 망사주머지 속에서/ 빠알갛게 언 알몸을 비벼대고 있는/ 빠알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조심조심/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일 킬로그램의 양파들에게/ 전해 주게 이 말을/ 지금 이 별엔 봄이 왔다,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칼 / 강은교
이스탄불의 한 궁전에 가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칼이 있었네./ 손잡이는 푸른 에머랄드/ 수많은 진주가 뽀얀 안개를 만들며 칼을 호위하고 있었네./ 수많은 나그네들이 그 앞에 서 있었네./ 아, 아름다워라. 나그네들의 붉은 입술에서 한숨과 함께 탄성들이 솟아나왔네./ 칼이 갑자기 일어섰네./ 진주 허리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네./ 칼은 진주보다도 더 빛나며/ 에메랄드보다도 더 빛나며/ 나그네들을 찌르기 시작했네/ 악, 악, 악, 악./ 붉은 피들이 루비의 바위를 건너 흘렀네/ 그렇게 아름다운 허리에서 그렇게 날카로운 칼날이/ 일어서다니!// 뽀얀 안개의 진주 앞, 우리 모두 푸른 나그네인 정오.//

저쪽 / 강은교
허공에서 허공으로 달리며 그는 말했네/ 1천 광년이나 1억 광년 저쪽에서 보면/ 이 부르튼 지구도 아름다운 별이라고// 아무도 감동하지 않았지만/ 나는 감동했네// -뿌연 광대뼈와 흐린 눈의 우리도 뽀얀 살빛의 천사들처럼 저쪽에서 보면 아름다운 빛 속에 잠겨 있을 것이네/ -이 모오든 시끄러움, 이 모오든 피튀김, 이 모오든 욕망의 찌꺼기들, 눈물 널름대는 싸움들, 검은 웅덩이들, 넘치는 오염들 … 몰려다니는 쥐떼들에도 불구하고// 허공에서 허공으로 달리며/ 우리는 아름다운 별의/ 한 알의/ 빛이라고//

길 위에서 길을 - 추모시 / 강은교
지금쯤 어디메 하늘길 가고 계시는지요?/ 아니 다 가셨는지요?// 여기선 하늘이 참 멉니다./ 흐린 구름살(肉)만이 헌 돛처럼 펄럭거리고 있습니다// 길도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어둠의 발소리 길 위에 가득 울릴 뿐입니다/ 시간의 잔기침소리 길 위에 가득 춤출 뿐입니다// 길 위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언제나 길이셨던 당신/ 언제나 출렁이는 잎이셨던 당신// 아, 스테파노 님/ 지금쯤 어디메 가셨습니까/ 우리 길 위에서 길 잃었을 때// 어디메 쯤에서 당신의 뿌리 출렁이고 계시렵니까// 분홍 종소리가 울려오고 있습니다./ 당신의 뿌리가 달려오는 분홍 종소리 위에 사뿐 내려 앉는군요/ 내려와 어느새/ 저녁 걸어오는 세상 받쳐드는군요// 아, 스테파노님/ 그 분홍 종소리 위에서/ 오늘 당신은 불멸(不滅)이십니다.// 당신이 불멸이시니/ 오늘 우리도 불멸입니다// 그 잎 주십시오/ 그 살(肉) 주십시오/ 그 향기 주십시오/ 그 뿌리 주십시오// 우리 당신으로 하여 우리의 불멸 깊이깊이 받사오리니.//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 강은교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비 내리면 찬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 잎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나무가 말하였네 / 강은교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내 만일 / 강은교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살그머니 / 강은교
비 한 방울 또르르르 나뭇잎의 푸른 옷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가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도 살그머니 열리네// 햇빛 한 자락 소올소올 나뭇잎의 푸른 줄기세포 속으로 살그머니 살그머니 걸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쓰다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폭풍에 펄럭펄럭 휘날리는데/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로 걸어가는데/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를 쓰다듬는데/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 나뭇잎의 푸른 피톨들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살그머니 감싸안는데// 살그머니 너의 속살을 벗기고 가슴호주머니를 만지니, 살그머니 열리는 너의 수천 혈관의 문// 시간이 한층 두꺼워지네// 우리의 사랑도 살그머니 두꺼워지네.//

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 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 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동백 /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별 / 강은교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국화꽃 한 송이 / 강은교
국화꽃 한 송이/ 날아간다/ 날아가는/ 국화꽃 꽃잎 한 장/ 별이 붙든다/ 별은 젖어/ 가장 먼 곳에서/ 가장 가까이 달려오는/ 그대의 꽃잎 젖은/ 한 장//

서시 / 강은교
이제 눈뜨게 하십시오/ 눈떠 저희의 손과 발/ 바람 속에 흔들게 하십시오.// 수천킬로미터의/ 들판을 지나/ 들판에 겹겹이 앉아 있는 노을들과/ 굽이치는 죽음을 지나// 당신이시여/ 검붉은 피 여직 흐르는/ 슬픈 가슴이시여// 여기엔 머뭇거리는 길뿐이오니/ 여기엔/ 눈먼 안개와/ 허우적이는 그림자들뿐이오니// 아,이제 일어서게 하십시오./ 일어서 당신의 깊은 가슴 속/ 저희가 헤엄치게 하십시오/ 저희의 피가 수평선을 이루고/ 저희의 흐느낌이/ 함께함께/ 출렁이게 하십시오//

수평선 / 강은교
이제는 돌아갑시다/ 돌아가 깊이깊이/ 어둠에 얼굴을 담급시다/ 수만 주름살 가만가만/ 몸 흔드는 바닷가/ 철없이 나와 앉은 피안의 등불들/ 거품으로 거두고/ 큰 소리 한 번 외쳐 봅시다// 부서지는 것은/ 파도만은 아니리/ 부서지면서 온전한 것// 또한 바다만은/ 아니리//

순례자(巡禮者)의 잠 / 강은교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무기(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든 마차에 싣고/ 집 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낮만 내리는 비/ 낙과(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궁륭(穹隆)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들여다보면 안개 속을/ 문은 어디서 열리고 있는가./ 생전에 박아두었던/ 곤한 하늘 뿌리를 뽑아들고/ 폐허의 햇빛 아래 전신을 말리고 있는/ 눈먼 얼굴들이여// 떨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 이제 알았으리, 바람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이 늘 나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숲 /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이유 / 강은교
오늘 아침 그 간판이 떠지지 않는 눈 비비며 미소하는 이유는/ 그래서 거기 내리는 안개가 세상을 허옇게 칠하며 일어서는 이유는/ 그래서 바람 한 줌이 바위들의 어깨 위에 냉큼 올라앉는 이유는/ 그래서 이슬 한 방울이 부지런히 산을 오르는 이유는/ 부지런히 산을 오르며 모든 풀잎의 뺨을 쓰다듬는 이유는/ 모든 풀잎의 뺨 위에서 또로로록 빗방울과 손을 잡는 이유는/ 조만간 황금빛 햇님이 긴 치마를 펄럭이며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서라 풀아 / 강은교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어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희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이파리 스쳐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아름/ 쓰러지는 풀아/ 영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자전(自轉) / 강은교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數世紀)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 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23층의 햇빛 / 강은교
지금 막 심장에 도착했어/ 뼈 하나를 지났다구// 간을 지나/ 콩팥을 지나// 갈거야, 너의 피로// 그림자가 오면 그림자를 기대게 하면서/ 눈물이 오면 눈물을 기대게 하면서/ 바람이 오면 바람을 기대게 하면서// 햇빛의 금빛 손가락 끝에서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새까만 그림자의 손톱들이 차가운 벽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갈거야, 너의 핏 속으로/ 별이 오면 별을 기대게 하면서.//

가는 곳 / 강은교
달이 뜬다,/ 산 너머 칡 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배추들에게 / 강은교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파도 빛 이파리 허공에 악물어/ 펄럭펄럭 왼 동리에/ 눈물 섞어 휘날리며/ 허리춤엔 낙동강 흙내를/ 가슴께엔 두만강 솔바람을.// 모가지여/ 이 비탈에도 눈이 오면/ 한 무더기씩 두 무더기씩/ 없는 피 쏟아 내릴/ 모가지여/ 머리엔 흰눈이 내려/ 흰눈 펄펄펄 엎어져// 천지에 흐느낌 괴는 지금은/ 어스름 저녁, 잔별도 돋지 않는.//

감자 / 강은교
감자여// 거기 검은 비닐의 홑이불을 제치고/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공중을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온몸을 쭈글쭈글하게 하면서/ 금빛 욕망을 지구에 접속시키고 있는 너// 네 눈물의 소금기가/ 베란다를 적시고/ 엘리베이터를 적시고/ 아파트 정문으로 흘러내린다// 모든 향수와/ 모든 부재와/ 모든 유토피아// 어쩔 수 없구나// 일으켜 세우라/ 눈물이여,// 거기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지구를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거리 시(詩) / 강은교
컴컴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를 보십시오./ 쉴 새 없이 외치는 그 여자의 붉은 칠한 입술을 보십시오./ 그 여자의 입술이 흔들릴 때마다/ 몸 흔들며 달리는 찬바람을 보십시오./ 번쩍이는 불빛들을 지나서/ 바람에 문들이 가득 덜컹거리는/ 골목과 골목을 탐욕스럽게 핥으며/ 천지에 누운 먼지들/ 낮은 리어카 위에 쌓는 것을 보십시오./ "오리지날 골덴니트가 싸요, 싸―."/ 붉은 칠한 입술 속으로/ 세계의 흙들이 흐르고 있음을 보십시오./ 아직도 어둠은 빛의 어머니임을 보십시오./ 길을 삼키는 끝없는 길을 보십시오./ 꿈을 삼키는 끝없는 꿈을 보십시오./ 찬바람에 떠는 그 여자의 두 손이/ 무덤의 풀처럼 파아랗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것을 보십시오./ 흐르는 무덤들이 이 저녁 거리/ 흔들림도 없이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십시오./ 캄캄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 어둠이 빛인 그 여자.//

고독 / 강은교
잠자리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ㅍ 그 꽃의 기도 / 강은교
오늘 아침 마악 피어났어요/ 내가 일어선 땅은 아주 조그만 땅/ 당신이 버리시고 버리신 땅// 나에게 지평선을 주세요/ 나에게 산들바람을 주세요/ 나에게 눈 감은 별을 주세요// 그믐 속 같은 지평선을/ 그믐 속 같은 산들바람을/ 그믐 속 같은 별을/ 내가 피어 있을 만큼만/ 내가 일어서 있을 만큼만/ 내가 눈 열어 부실 만큼만// 내가 꿈꿀 만큼만//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 강은교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 비 내리면 찬 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일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그 여자 1 / 강은교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바람 한 점 없어도/ 일렁이는 주름 그 여자.//

손등엔 가득/ 먹구름 울고 우는 그 여자.//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그대의 들 / 강은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너를 부른다 -바리 연가, 또는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아홉 / 강은교
너를 부른다/ 저녁마다 어둠 가에 멈춰 서서 너를 부른다/ 어둠이 올 때면 지붕들은 더 파리해지지/ 창문들은 달달 떨며 가슴을 닫기우고/ 천정에 달린 알전구들은 알몸을 빛내기 시작하지// 너를 부른다/ 어디선가 걸어오는 자정과 자정 사이에서/ 자정과 자정 사이, 끓는 찌개 사이에서/ 하루치의 여행을 끝낸 신발들, 얌전히 양말을 벗고/ 마루 밑에서 마루를 그립게 쳐다 보고 있을 때// 자물쇠들은 철컥철컥 가슴의 문을 닫고/ 혼자 남은 별, 문밖에서 잠기는 자물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 너를 부른다/ 끓는 호박과 호박 사이, 부글부글 감자와 감자 사이/ 손가락 살짝 데이며 그리 그립게 기다리는 것들./ 사랑받으려 하지 말라, 사랑하라/ 내 잠들러 가면 거기까지 따라와 곁에 눕는 갈 곳 없는 그림자 하나/ 그동안 나는 너무 사랑받으려 하였다, 사랑하지 않았다// 너를 부른다/ 순간의 요를 펴니 손내미는 영원의 이불/ 영원의 이불을 덮으니 여기의 이불, 그 옆에 또 가슴 내밀고 있는 것을/ 살며시 다가와 다 식은 피톨 감싸안는/ 지금의 팔을 보라// 너를 부르고 부른다, 아직 열려 있는 길같은 문 앞에서//

꽃 / 강은교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아침 / 강은교
이제 내려놓아라/ 어둠은 어둠과 놀게 하여라/ 한 물결이 또 한 물결을 내려놓듯이/ 한 슬픔은 어느 날/ 또 한 슬픔을 내려놓듯이// 그대는 추억의 낡은 집/ 흩어지는 눈썹들/ 지평선에는 가득하구나/ 어느 날의 내 젊은 눈썹도 흩어지는구나./ 그대, 지금 들고 있는 것 너무 많으니/ 길이 길 위에 얹혀 자꾸 펄럭이니// 내려놓고, 그대여/ 텅 비어라/ 길이 길과 껴안게 하라/ 저 꽃망울 드디어 꽃으로 피었다//

아침에 관하여 / 강은교
그 여자는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낸다./ 그 여자는 낮게 중얼거린다./ 나에게 달려온 이 사과/ 그 여자는 계란 하나도 꺼내어 프라이 팬에 지진다./ 나에게 달려온 이 계란.// 멀고도 먼 길을 달려/ 빛과 그늘을 지나 달려/ 소리와 소리를 넘어 달려/ 그 여자는 버섯 몇 개도 꺼내어 프라이 팬에 넣는다// 지글지글지글/ 버섯들이 프라이 팬 안에서 고개를 맞대고 수군 거린다/ 나에게 달려온 이 기름// 구름이 힘들게 빛의 날개를 들고 있는/ 아침//

TV를 켜면 / 강은교
TV를 켜면 당신이 돌아오네/ 환히 웃으면서 넥타이를 깃발처럼 휘날리면서/ 마이크를 붙잡고 다정한 노래를 부르는 당신/ 이마도 참 잘 생긴 당신, 거기 있는 당신/ 옷을 벗어던지는 나에게 윙크하네// 스타킹을 벗으면서/ 내 가슴은 뛰네, 뛰네/ 가끔 조급증이 일어나는 듯 껑충 뛰어오르기도 하고/ 두 팔을 간절하게 벌리기도 하면서/ 나를 향해 오, 나만을 향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당신// 그럼, 그럼, 사랑뿐이야, 사랑뿐이지......../ 고개를 끄덕이는 내 가슴 앞에/ 흔들리는 그림자, 흔들리는 벽, 흔들리는 등불/ 환히 웃으면서 넥타이를 휘날리면서......// 이 처진 눈까풀, 구부정해진 등 앞에/ 염색한 머리칼 앞에.//

낙동강의 바람 / 강은교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첫 눈 / 강은교
첫눈이 내린다/ 흙에 닿으면 흙으로/ 눈물에 닿으면 눈물로/ 내리는 족족 녹으며/ 자꾸 내린다// 웬 슬픔들 여기엔 이리도 많은지/ 동구 밖 넓은 길 훠이훠이 떠돌다가/ 더는 몸비빌 곳 없어/ 찾아오신 넋들// 구름 위에서 구름이 부서진다/ 바람 앞에서 바람이 부서진다/ 어이 하리 못다한 우리네 사랑/ 내려 쌓이지 않으면 어이 하리// 첫눈을 맞는다/ 흙이 되어 흙을/ 눈물이 되어 눈물을 맞는다/ 살아서 형체도 없이 살아서/ 파란만장 골목마다/ 흩어지는 아우성들//어디 한번 당신 옷깃에/ 녹는 살 대어보리라며/ 가슴팍이란 가슴팍/ 끓는 김 되어 용솟음치리라며// 혹은 당신 이마 밑/ 얼음으로 깊이 깊이/ 합치리라며//

눈발 / 강은교
외롭지 않아요. 우린/ 함께 함께 내려가요. 우린// 머리칼 죄 뜯긴 나무 위에 풀 위에/ 몸살 앓는 잔돌 위에 산등성이 위에// 쇠꼬챙이 담벼락 위에/ 비둘기 날개 위에// 안녕 안녕, 돌아서는 사람들 솟은 어깨 위에/ 납작 누운 불경기 지붕 위에// 호텔 보드라운 창틀 위에/ 취기 오른 불빛 위에// 그리고 미사 위에/ 언제나 언제나 홀로 서 있는 십자가 위에// 끝내는 눈물이 되어// 눈물이 되어 온 땅/ 질퍽질퍽 흐느끼게 해요/ 함께 함께 흐느끼게 해요.//

돌아 / 강은교
너 아직 거기 있느냐/ 사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 가는/ 길모퉁이// 연탄재며 밥 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 앉아/ 깨진 머리로 빛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한 잎 가득 피 베어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쏟는 날에는/ 험집투성이 우리 가슴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선/ 우르르 우르르/ 우뢰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사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문댈 때를 기다려/ 일년이고 십년이고/ 수유리 한구석/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사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남아 있다 그 사월에.//

등불과 바람 / 강은교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모래가 바위에게 / 강은교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네./ 어둠과 거품과 슬픔으로/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으로/ 모든 세포와 세포의 사잇길을 지나/ 폭풍의 날개 속으로 스며든다네./ 한낮에도 가만가만 스며든다네.// 길 막히면 길 만든다네./ 바람 막히면 바람 부른다네./ 세계의 수억 싸움 속에/ 세계의 수억 죽음 속에/ 낮은 지붕 위란 지붕 위/ 썩은 살이란 살 위/ 넘치고 넘쳐서/ 우리는 꿈을 꾼다네./ 금빛 바위가 되는 꿈을 꾼다네.//

무엇이라고 쓸까 / 강은교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은빛 빗자루의 추억 / 강은교
어둠이 찐득찐득 벽아래/ 누워 있던 그 복도,/ 청소 도구함에 꽂혀서 천정을 보고 있던 빗자루 하나/ 공중을 향하여 자랑스레 고개를 쳐들고 있던 은빛 빗자루 하나// 찢어진 먼지알 하나도 가슴에 깊이 품는 빗자루 하나/ 그 먼지알 종일토록/ 껴안고 핥아대는 빗자루 하나/ 빗자루 하나의 통통한 가슴이 허공에 빛난다/ 누가 자꾸 여는가, 그 문/ 모래 투성이,/ 열어대는가,// 오늘 참 눈부시게 빛나는, 빛나는 빗자루 하나/ 은하의 별처럼 빛나는, 빛나는 빗자루 하나// 우리 모두 끌고 가는 은빛 빗자루 하나//

물방울의 시 / 강은교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도비도, 물길 / 강은교
서해안 갯벌에 지는 해처럼,/ 서성이다/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생애를 보았다/ 확 차고 뻗어가야 할 곳에서 한물 꺾고/ 허리 휘는 고비에서 한 번 더 방향 틀어/ 각을 오려낸,/ 탁마의 길// 승려 혜통이 속인이었을 때 수달 한 마리를 죽이고 뼈를 동산에 버렸는데, 이튿날 아침 그 뼈가 없어져 핏자국을 따라가 보았더니 굴속에서 다섯 마리의 새끼를 끌어안고 있었다 하지// 물길은 생명의 성스러운 핏자국이다/ 그 위를 눅눅한 시간들이 지나간 후/ 바람은 은빛으로 몸을 바꾸어 뒹굴어 보고/ 구름은 숱한 뿌리를 내려* 디뎌 보고 있다// 태양의 서쪽에서만 보이는 눈부신 恨 오백년//
* 강은교 <구름의 뿌리>에서 이미지 빌려옴

물에 뜨는 법 / 강은교
힘을 빼야 하네/ 어깨에서 어깨 힘을/ 발목에서 발목힘을/ 그런 다음/ 헐거워진 그대 온몸/ 곧게곧게 펴야 하네// 그대 어깨에서/ 키 큰 수평선들 달려나오고/ 그대 발목에서/ 꽃 핀 섬들 달려 나와/ 황금빛 지느러미/ 훨 훨 훨 훨/ 흔들 때까지// 예컨대/ 길이 길의 옷을 입을 때까지.//

너의 눈은 / 강은교
너의 눈은 나비/ 가장 먼 곳에서 가장 가까이 날아오는/ 속눈썹// 모든 아침과 아침 사이로 날며/ 모든 빛과 빛 사이로 날며/ 지상에 기쁨의 융단을 깐다// 너의 눈은/ 내가 모르는 나라의 호수/ 가장 작은 날개로/ 가장 가까이 잡아당기는/ 은물결// 나는 물결의 허리를 잡는다/ 나는 기쁨의 허리를 잡는다/ 나는 용서의 허리를 잡는다// 너의 눈은 샘물/ 퍼내고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가장 깊이 깊이 숨어 있는/ 이 땅의 감사// 너의 나라로 나를 안내해다오/ 사랑이여//

봄 / 강은교
노오란 아기 고무신 한 켤레/ 한길 가운데 떨어져 있네/ 참 이상도 하지/ 자동차 바퀴들이 떠들며 달려오다/ 멈칫 비켜서네// 쓰레기터 옆 버스정류소에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개나리 꽃망울/ 터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으대에여어 사아아랑의 미이로오여'//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구르는 돌 하나 냅다 차 던지니/ 한길 속 거기에 가 서네// 참 이상도 하지/ 햇볕에 젖은/ 노오란 아기 고무신/ 누군가 벗어놓은 살처럼 얌전히 꼼틀대는/ 봄의 깊은 뼈.//

가을 /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가을의 書 / 강은교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여자를/ 보아라/ 종이처럼 그 여자 오늘 구겨짐을/ 보아라/ 구겨지며 늘 비 흐름을/ 비 흐르며 그 여자 길 밖으로 떠나감을/ 보아라/ 모든 길 밖에 흐르는 길동무들을/ 보아라/ 언제나 싸우고 있는 길의 밤꿈을/ 보아라/ 정오엔 많은 바람으로 펄럭이다가/ 사라지는 그 여자의 꿈속/ 모든 가을길은 멀어서/ 마지막엔 그대도 보이지 않는걸// 보아라//

겨울밤 하늘의 달에게 / 강은교
혼자 오지 않는구나, 너는/ 오늘도 캄캄한 시간 아래/ 빛나는 고개 슬피 숙이고/ 탐스론 눈썹에는 찬 바람 둘러앉혀구나// 노을 밴 그늘마나/ 슬몃 내려앉아서는/ 앙상한 뼈마디 넘나드는/ 흉한 꿈들 이으며/ 굶주림들 이으며/ 침묵들 이으며/ 복종들 이으며....../ 삶은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것// 혼자 오지 않는구나, 너는/ 어제도 오늘도 이 후미진 곳/ 반짝이는 슬픔으로 오는구나/ 저리 먼 하늘 곳곳/ 양털구름떼같이/ 양털구름떼같이/ 한숨던지며 오는구나/ 수정별같이/ 수정별같이/ 눈물 심으려 오는구나.//

붉은 해 / 강은교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비 / 강은교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빗방울 하나가 5 / 강은교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진눈깨비 / 강은교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 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개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읽는 시마다 다 내 마음 같은 날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날이 참 좋다/ 초함리적 바보 즉 아주똑똑한 바보가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이게 내 스타일이다/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이 들 때/ 너는 언제나 내 곁에 있다//


연애 / 강은교
그대가 밖으로 나가네/ 등불 하나를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를 따라 깊어진 어둠도 밖으로 나가네/ 문에는 든든한 네 개의 열쇠를 채우고/ 늙어오는 길과/ 늙어 있는 길을 지나//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둘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이 다정한 뭍의 死者들/ 자정엔 헛소리를 꺼내 드는/ 아, 이 바닥없는 뭇 잠의 추억들//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셋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가 돌아오지 않네//

아주 오래된 이야기 / 강은교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한 여자가 있는 풍경 / 강은교
벚나무 밑에서/ 한 젊은 여자가 울부짖고 있다./ 제 가슴을 쥐어뜯는다./ 얇은 나일론 블라우스가/ 몰려 서 있는 은빛 안개를 흔든다.// 아침이 그치고/ 여기저기 젖은 창마다/ 푸시시한 얼굴들이 내걸린다./ 기웃거리는 은빛 안개.// 젊은 여자가 길고 높은 목소리/ 벚나무 굽은 가지를 흔들며/ 젖은 창마다 급히 달려가다가/ 오만하게 솟은 벽에 부딪혀/ 부스스 부서져 내린다./ 피가 흐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젖은 창들이 스르르 닫히고/ 여자의 옆에 팽개쳐진 잡동사니 그릇들에/ 이제 일어선 햇빛/ 핏빛으로 반짝이며 고여 들 뿐,// 우리들의 벽은 튼튼하고 튼튼하다.//

허총가(虛塚歌) 1 / 강은교
한밤중에 붉은/ 햇덩이 뜬다./ 하늘로 가자/ 하늘로 가자.// 풀 눕고 모래 눕고/ 새들도 누운 다음/ 돌아온 강물 끝에 뻘바람에/ 지붕을 거두어/ 지붕을 거두어.// 우훠넘차 슬프다/ 어허영차 슬프다.// 네 살은 내가 안고/ 내 살은 네가 업고/ 청천하늘 밝은 밤/ 없는 곳 없는 곳으로.// 길은 동서남북/ 길은 동남서북// 그림자 되어 너/ 한 꿈 그림자 되어 우리 함께/ 오늘도 수만 잠/ 헛되고 헛되었으니.//

* 가곡 이원섭 바리톤

빈자일기 / 강은교
우리는 언제나 거기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혀와 혀를 불/ 붙게 하며 눈물로 빛과 빛을 싸우게 하며 다정한 고름 고름 속/ 에 오래 서 있은 허리를 무너지게 하며, 황사 날아가는 무덤 가/ 장자리에서.// 그곳 천정은 불붙은 태양이었고 바닥은 썩은 이빨의 늪이었다./ 싸우는 이마 갈피로 등뼈 갈피 갈피로 언제나 종이 울렸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황혼을 알리는 종이.언/ 제나 종이 울렸다 임종을 알리는 종이.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그/ 보다 먼저 흘러갔다. 늦은 손목 눈짓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쩍이/ 는 허리며, 황금 돛대들 사이에서 흘러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 굳은 피 한 점 던질 때까지, 누/ 군가 쓸데없는 제 죽음 하나 내버릴 때까지, 우리가 헌 그 죽음/ 입고 검은 종소리 한 겹 듣지 않을 때까지.// 아아 돌아오지 말라 사랑하라, 그대 아버지가 그대에게 앵기는/ 독, 그대 나라가 그대에게 먹이는 독, 물의 독, 공기의 독, 흙의 독.// 다만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여기서. 한 고름에 다른/ 고름을 접붙이며 즐겁게 즐겁게, 할 일은 그뿐, 구걸하고 시들어/ 구걸하는 일뿐, 그러므로 결코 일어서지 않았다, 잠들지도 않은 채//

 


 

강은교(姜恩喬) 시인
1945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경기여자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김기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시집으로 《허무집》 《빈자일기》 《소리집》 《바람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벽속의 편지》 《어느 별에서의 하루》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초록 거미의 사랑》 《벽 속의 편지》등과 시선집 《풀잎》 《붉은 강》 《우리가 물이 되어》 《그대는 깊디 깊은 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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