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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한용운 시인

부흐고비 2021. 5. 19. 06:47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나의 노래 / 한용운
나의 노래가락의 고저 장단은 대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오래가 세속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달파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 다르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까닭입니다./ 곡조는 노래의 결함을 억지로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곡조는 부자연한 노래를/ 사람의 망상으로 토막쳐 놓은 것입니다./ 참된 노래에 곡조를 붙이는 것은 노래의 자연에 치욕입니다./ 님의 얼굴에 단장을 하는 것이/ 도리어 흠이 되는 것과 같이, 나의 노래에/ 곡조를 붙이면 도리어 결함이 됩니다.// 나의 노래는 사랑의 신(神)을 울립니다./ 나의 노래는 처녀의 청춘을 쥐어짜서,/ 보기도 어려운 맑은 물을 만듭니다./ 나의 노래는 님의 귀에 들어가서 천국의 음악이 되고/ 님의 꿈에 들어가서 눈물이 됩니다.//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 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나는 압니다./ 나의 노래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루지 못할 때에/ 나의 노래가 님의 눈물겨운 고요한 환상으로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압니다./ 나는 나의 노래가 님에게 들리는 것을 생각할 때에/ 광영에 넘치는 나의 작은 가슴은/ 발발발 떨면서 침묵의 음보를 그립니다.//

빛과 어둠 / 한용운
님은/ 빛을 받아/ 빛과 함께 한동안 뛰어 놀더니// 님은/ 쓰디쓴 비감 씹으며/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 차디찬 몸 타오르는 넋 달래어/ 덮쳐오는 어둠 갈아 빛을 그리더니// 님은/ 바람 빠져 찌그러진/ 찌그러져 튀어오르지 못하는/ 납작한 공을 들고/ 머리 풀고 달려가는 바람 속을 떠돌더니// 님은/ 님의 땅에/ 몸 던져, 몸 심어/ 산천초목 생기 잃고 잠든 밤/ 땀 흘려 땀 흘려 불꽃을 쏘아올리더니/ 이 땅에 천둥 불똥 뚝뚝 떨구었네// 님은/ 빛을 받아/ 빛과 함께 서러움만 이루더니/ 천지 어둠 삼키고/ 짓눌린 신명/ 타오르는 죽움/ 풀어, 이 땅에/ 한 맺힌 빛 펼치고 있네//

심(心) / 한용운
심(心)은 심(心)이니라./ 심(心)만 심이 아니라 비심(非心)도 심이니, 심외(心外)에는 하물(何物)도 무(無)하니라./ 생도 심이요, 사도 심이니라./ 무궁화도 심이요, 장미화도 심이니라./ 호한(好漢)도 심이요, 천장부(賤丈夫)도 심이니라./ 신루(蜃樓)도 심이요, 공화(空華)도 심이니라./ 물질계도 심이요, 무형계도 심이니라./ 공간도 심이요, 시간도 심이니라./ 심이 생(生)하면 만유가 기하고 심이 식(息)하면 일공(一空)도 무하니라./ 심은 무의 실재요, 유의 진공(眞空)이니라./ 심은 인(人)에게 누(淚)도 여(輿)하고 소(笑)도 여하느니라./ 심의 허(墟)에는 천당의 동량도 유하고, 지옥의 기초도 유하니라./ 심의 야(野)에는 성공의 송덕비도 입(立)하고 , 퇴패(退敗)의 기념품도 진열하느니라./ 심은 자연전쟁의 총사령관이며 강화사니라./ 금강산의 산봉에는 어하(魚蝦)의 화석이 유하고, 대서양의 해저에는 분화구가 유하니라./ 심은 하시(何時)라도 하사 하물(何事何物)에라도 심 자체뿐이니라./ 심은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니라.//

무궁화(無窮花) 심으과저 / 한용운 –獄中詩(옥중시), 《開闢(개벽) 27호》1922년 9월호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네 나라에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마음 비춘 달아/ 계수(桂樹)나무 베어 내고/ 무궁화(無窮花)를 심으과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님의 거울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품에 안긴 달아/ 이지러짐 있을 때에/ 사랑으로 도우고자./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가이 없이 비친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넋을 쏘는 달아/ 구름재(嶺[령])를 넘어 가서/ 너의 빛을 따르고자.//

                  꿈과 근심 / 한용운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구나

   새벽 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을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간 데를 모르겠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 되어라

 

실제(失題) / 한용운 –1935년 7월 잡지 ‘삼천리’ 7권 6호
빗긴 볕 소 등 위에/ 피리 부는 저 아이야/ 너의 소 일 없거든/ 나의 근심 실어주렴/ 싣기는 어렵지 않으나/ 부릴 곳이 없노라//

 

꽃사움 / 한용운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이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사랑 / 한용운
봄물보다 깊으니라/ 갈산보다 높으리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달을 보며 / 한용운

달은 밝고 당신이 하도 기루었습니다./ 자던 옷을 고쳐입고 뜰에 나와 퍼지르고 앉어서 달을 한참 보았읍니다.// 달은 차차차 당신의 얼골이 되더니 넓은 이마 둥근 코 아름다운 수염이 역력히 보입니다./ 간 해에는 당신의 얼골이 달로 보이더니 오늘 밤에는 달이 당신의 얼골이 됩니다.// 당신의 얼골이 달이기에 나의 얼골도 달이 되얐읍니다./ 나의 얼골은 그믐달이 된 줄은 당신이 아십니까./ 아아 당신의 얼골이 달이기에 나의 얼골도 달이 되얐읍니다.//

수(繡)의 비밀 / 한용운
나는 당신의 옷을 다 지어 놓았습니다./ 심의(深衣)*도 짓고, 도포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습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작은 주머니에 수놓는 것뿐입니다.// 그 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짓다가 놓아두고 짓다가 놓아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아프고 쓰린 때에 주머니에 수를 놓으려면,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 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넣을 만한 무슨 보물이 없습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 것입니다.//
*심의(深衣) : 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던 웃옷.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잎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해당화 /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보리피리 / 한용운
보리피리 불며, 본언덕/ 고향 그리워/ 필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때 그리워/ 필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필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눈물의 언덕을/ 필닐니리.//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주검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어우렁 더우렁 / 한용운

와서는 가고 입고는 벗고/ 잡으면 놓아야 할/ 윤회의 소풍 길에/ 우린 어이타 인연 되었을꼬,// 봄날의 영화/ 꿈 인듯 접고 너도 가고/ 나도 가야 할 그 뻔한 길/ 왜 왔나 싶어도 그래도/ 아니 왔다면 후회 했겠지// 노다지 처럼 널린/ 사랑 때문에 웃고/ 가시 처럼 주렁한/ 미움 때문에 울어도// 그래도 그 소풍 아니면/ 우리 어이 인연 맺어 졌으랴// 한 세상 세 살다 갈 소풍 길/ 원 없이 울고 웃다가/ 말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단 말 빈 말 안되게/ 어우렁 더우렁 그렇게 살다 가보자//


복종 / 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더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행복 / 한용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나의 꿈 / 한용운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사랑의 존재 / 한용운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미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흑암면(黑闇面)을 반사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 존재입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고적한 밤 / 한용운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참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칼은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꺽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손을 마주잡고,/ 눈물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라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변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앗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첫 키스 / 한용운
마셔요 제발 마셔요/ 보면서 못 보는 체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입술을 다물고 눈으로 말하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뜨거운 사랑에 웃으면서 차디찬 잔 부끄러움에 울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세계의 꽃을 따면서 항분(亢奮)에 넘쳐서 떨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미소는 나의 운명의 가슴에서 춤을 춥니다. 새삼스럽게 스스러워 마셔요.//

그를 보내며 / 한용운
그는 간다. 그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니요, 내가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간다./ 그의 붉은 입술, 흰 이, 가는 속눈썹이 어여쁜 줄만 알았더니, 구름 같은 뒷머리, 실버들 같은 허리, 구슬 같은 발꿈치가 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걸음이 걸음보다 멀어지더니, 보이려다 말고 말려다 보인다./ 사람이 멀어질수록 마음은 가까워지고, 마음이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멀어진다./ 보이는 듯한 것이 그의 흔드는 수건인가 하였더니, 갈매기보다 작은 조각구름이 난다.//

나는 잊고자 / 한용운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이별 / 한용운
아아 사람은 약한 것이다, 여린 것이다, 간사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사랑의 이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 사랑을 바꾸는 님과 님에게야, 무슨 이별이 있으랴./ 이별의 눈물은 물거품의 꽃이요, 도금한 금방울이다.// 칼로 베인 이별의 「키스」가 어디 있느냐./ 생명의 꽃으로 빚은 이별의 두견주(杜鵑酒)가 어디 있느냐./ 피의 홍보석으로 만든 이별의 기념 반지가 어디 있느냐./ 이별의 눈물은 저주의 마니주(摩尼珠)요, 거짓의 수정(水晶)이다./ 사랑의 이별은 이별의 반면(反面)에 반드시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이다./ 혹은 직접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간접의 사랑이라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별하는 애인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애인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면, 무궁(無窮)을 회전하는 시간의 수레바퀴에 이끼가 끼도록 사랑의 이별은 없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참」보다도 참인 님의 사랑엔, 죽음보다도 이별이 훨씬 위대하다./ 죽음이 한 방울의 찬 이슬이라면, 이별은 일천 줄기의 꽃비다./ 죽음이 밝은 별이라면, 이별은 거룩한 태양이다./ 생명보다 사랑하는 애인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는 괴롭게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큰 희생이다./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죽지 못하는 가장 큰 고통이요, 보은(報恩)이다./ 애인은 이별보다 애인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까닭이다./ 사랑은 붉은 촛불이나 푸른 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 마음을 서로 비추는 무형(無形)에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잊지 못하고, 이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웃지 못하고, 이별에서 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인을 위하여는 이별의 원한을 죽음의 유쾌로 갚지 못하고, 슬픔의 고통으로 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차마 죽지 못하고, 차마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곳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애인의 포옹만 사랑할 뿐만 아니라, 애인의 이별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때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간단(間斷)이 없어서 이별은 애인의 육(肉)뿐이요,/ 사랑은 무궁이다.// 아아 진정한 애인을 사랑함에는 죽음은 칼을 주는 것이요, 이별은 꽃을 주는 것이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진이요 선이요 미다./ 아이 이별의 눈물은 석가요 모세요 잔 다르크다.//

꿈이라면 / 한용운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

당신 가신 때 / 한용운
당신이 가실 때에 나는 다른 시골에 병들어 누워서 이별의 키스도 못 하였습니다./ 그 때는 가을 바람이 첨으로 나서 단풍이 한 가지에 두서너 잎이 붉었습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 내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두 도막이 납니다./ 시간의 한 끝은 당신이 가지고 한 끝은 내가 가졌다가, 당신의 손과 나의 손과 마주 잡을 때에 가만히 이어 놓겠습니다.// 그러면 붓대를 잡고 남의 불행한 일만을 쓰려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당신의 가신 때는 쓰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 내겠습니다.//

칠석 / 한용운
「차라리 님이 없이 스스로 님이 되고 살지언정, 하늘 위의 직녀성은 되지 않겠어요, 네 네.」 나는 언제인지 님의 눈을 쳐다보며 조금 아양스런 소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견우의 님을 그리우는 직녀가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칠석을 어찌 기다리나 하는, 동정의 저주였습니다./ 이 말에 나는 모란꽃에 취한 나비처럼, 일생을 님의 키스에 바쁘게 지나겠다는, 교만한 맹서가 숨어 있습니다.// 아아 알 수 없는 것은 운명이요, 지키기 어려운 것은 맹서입니다./ 나의 머리가 당신의 팔 위에 도리질을 한 지가, 칠석을 열 번이나 지나고 또 몇 번을 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길 뿐이요, 무슨 복수적 저주를 아니 하였습니다./ 그들은 밤마다 밤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 건너다보며 이야기하고 놉니다./ 그들은 해쭉해쭉 웃는 은하수의 강안(江岸)에서, 물을 한 줌씩 쥐어서 서로 던지고 다시 뉘우쳐 합니다./ 그들은 물에다 발을 잠그고 반비식이 누워서, 서로 안 보는 체하고 무슨 노래를 부릅니다./ 그들은 갈잎으로 배를 만들고, 그 배에다 무슨 글을 써서 물에 띄우고 입김으로 불어서 서로 보냅니다. 그리고 서로 글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잠자코 있습니다./ 그들은 돌아갈 때에는 서로 보고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아니 합니다.// 지금은 칠월 칠석날 밤입니다./ 그들은 난초실로 주름을 접은 연꽃의 웃옷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한 구슬에 일곱 빛 나는 계수나무 열매의 노리개를 찼습니다./ 키스의 술에 취할 것을 상상하는 그들의 뺨은, 먼저 기쁨을 못 이기는 자기의 열정에 취하여 반이나 붉었습니다./ 그들은 오작교(烏鵲橋)를 건너갈 때에, 걸음을 멈추고 웃옷의 뒷자락을 검사합니다./ 그들은 오작교를 건너서 서로 포옹하는 동안에, 눈물과 웃음이 순서를 잃더니, 다시금 공경하는 얼굴을 보입니다./ 아아 알 수 없는 것은 운명이요, 지키기 어려운 것은 맹서입니다./ 나는 그들의 사랑이 표현인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나의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랑의 신성(神聖)은 표현에 있지 않고 비밀에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하늘로 오라고 손짓을 한대도,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칠월 칠석날 밤입니다.//

생의 예술 / 한용운
모른 결에 쉬어지는 한숨은 봄바람이 되어서, 야윈 얼굴을 비치는 거울에 이슬꽃을 핍니다./ 나의 주위에는 화기(和氣)라고는 한숨의 봄바람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수정(水晶)이 되어서, 깨끗한 슬픔의 성경(聖境)을 비칩니다./ 나는 눈물의 수정이 아니면, 이 세상에 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한숨의 봄바람과 눈물의 수정은, 떠난 님을 기루어하는 정(情)의 추수(秋收)입니다./ 저리고 쓰린 슬픔은 힘이 되고 열이 되어서, 어린 양과 같은 작은 목숨을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님이 주시는 한숨과 눈물은 아름다운 생의 예술입니다.//

생명 / 한용운
닻과 키를 잃고 거친 바다에 표류된 작은 생명의 배는/ 아직 발견도 아니된 황금의 나라를 꿈꾸는/ 한 줄기 희망의 나침반이 되고 향로가 되고/ 순풍이 되어서, 물결의 한 끝은 하늘을 치고,/ 다른 물결의 한 끝은 땅을 치는 무서운 바다에 배질합니다.// 님이여, 님에게 바치는 이 작은 생명의 파편은/ 최귀(最貴)한 보석이 되어서 조가조각이 적당히 이어져서/ 님의 가슴에 사랑의 휘장을 걸겠습니다./ 님이여, 끝없는 사막의 한 가지의 깃들일 나무도 없는/ 작은 새인 나의 생명은 님의 가슴에/ 으스러지도록 껴안아 주셔요./ 그리고 부서진 생명의 조각조각에 입맟춰 주셔요.//

명상(冥想) / 한용운
아득한 명상의 작은 배는/ 가이없이 출렁거리는 달빛의 물결에 표류(漂流)되어/ 멀고 먼 별나라를 넘고 또 넘어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라에는 어린 아기의 미소(微笑)와 봄 아침과 바다 소리가 합(合)하여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옥새(玉璽)의 귀한 줄도 모르고, 황금을 밟고 다니고,/ 미인(美人)의 청춘(靑春)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이 나라 사람은 웃음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합니다.// 명상의 배를 이 나라의 궁전(宮殿)에 매었더니/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天國)을 꾸미려고 돌아왔습니다./ 달빛의 물결은 흰 구슬을 머리에 이고/ 춤추는 어린 풀의 장단을 맞추어 넘실거립니다.//

찬송(讚頌) / 한용운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으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정천 한해(情天恨海) / 한용운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쏘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만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도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느려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이별은 미(美)의 창조 / 한용운
이별은 미(美)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 / 한용운
듣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백골(白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줍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주운 꽃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의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 홀로 그 노래를 까닭입니다.//

슬픔의 삼매(三昧) / 한용운
하늘의 푸른빛과 같이 깨끗한 죽음은 군동(群動)은 정화(淨化)합니다./ 허무의 빛인 고요한 밤은 대지에 군림하였습니다./ 힘없는 촛불 아래에 사리뜨리고 외로이 누워 있는 오 오, 님이여!/ 눈물의 바다에 꽃배를 띄웠습니다./ 꽃배는 님을 싣고 소리도 없이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슬픔의 삼매에 '아공(我空)' 이 되었습니다.// 꽃향기의 무르녹은 안개에 취하여 청춘의 광야에 비틀걸음 치는 미인이여./ 죽음을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게 여기고,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을/ 얼음처럼 마시는 사랑의 광인(狂人)이여.// 아아, 사랑에 병들어 자기의 사랑에게 자살을 권고하는 사랑의 실패자여./ 그대는 만족한 사랑을 얻기 위하여 나의 팔에 안겨요./ 나의 팔은 그대의 사랑의 분신인 줄을 그대는 왜 모르셔요.//

두견새 / 한용운
두견새는 실컷 운다./ 울다가 못다 울면/ 피를 흘려 운다./ 이별한 한이야 너뿐이랴마는/ 울래야 울지도 못하는 나는/ 두견새 못된 한을 또다시 어찌하리./ 야속한 두견새는/ 돌아갈 곳도 없는 나를 보고도/ ‘불여귀 불여귀(不如歸 不如歸)’//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떠날 때의 님의 얼굴 / 한용운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는 바로 볼 수가 없을만치 어여쁠 것입니다./ 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굴을 나의 눈에 새기겠습니다./ 님의 얼굴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무더 야속한 듯하지마는,/ 님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어여쁜 얼굴이 영원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겠습니다.//

가지 마셔요 / 한용운
그것은 어머니의 가슴에 머리를 숙이고,/ 아기자기한 사랑을 받으려고 삐죽거리는 입술로/ 표정하는 어여쁜 아기를 싸안으려는/ 사랑의 날개가 아니라 적의 깃발입니다./ 그것은 자비의 백호광명이 아니라/ 번득거리는 악마의 눈빛입니다./ 그것은 면류관과 황금의 누리와 죽음과를/ 본 체도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돌돌 뭉쳐서/ 사랑의 바다에 퐁당 넣으려는/ 사랑의 여신이 아니라 위안에 목마른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대지의 음악은 무궁화 그늘에 잠들었습니다./ 광명의 꿈은 검은 바다에서 자맥질합니다./ 무서운 침묵은 만상의 속살거림에/ 서슬이 푸른 교훈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아, 님이여! 이 새 생명의 꽃에 취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 거룩한 천사가 세례를 받는 순간 순결한 청춘을 똑 따서/ 그 속에 자기의 생명을 넣어 그것을 사랑의 제단에/ 제물로 드리는 어여쁜 처녀가 어디 있어요./ 달콤하고 맑은 향기를 꿀벌에게 주고/ 다른 꿀벌에게 주지 않는 이상한 백합꽃이 어디 있어요./ 자신의 정체를 죽음의 청산에 장사지내고/ 흐르는 빛으로 밤을 두 조각에 베이는 반딧불이 어디있어요./ 아아, 님이여! 정(情)에 순사(殉死)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그 나라에는 허공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우주만상의/ 모든 생명의 쇳대를 가지고,/ 척도를 초월한 삼엄한 궤율로 진행하는/ 위대한 시간이 정지되었습니다./ 아아, 님이여! 죽음을 방향(芳香)이라고 아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반비례 / 한용운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당신의 얼굴은 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光明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요//

 

論介愛人이 되어서 그의 / 한용운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섯는 矗石樓는 살 같은 光陰을 따라서 다름질칩니다/ 論介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論介/ 그대는 朝鮮의 무덤 가운데 피였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詩人으로 그대의 愛人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黃金의 칼에 베혀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當年回想한다/ 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鬼神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픈 그대의 마음은 비록 沈着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朝雲이냐 울음의 暮雨이냐 새벽달의 秘密이냐 이슬꽃의 象徵이냐/ 삐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지 못한 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러움에 하여 얼굴이 붉었다/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힌 언덕의 묵은 이끼는 驕矜에 넘처서 푸른 紗籠으로 自己題銘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機會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여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容恕하여요 論介金石 같은 굳은 언약을 저바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容恕하여요 論介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히 누워서 끼친 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黃金으로 새겨서 그대의 祠堂紀念碑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曲調烙印으로 찍어서 그대의 祠堂祭鍾을 올린대도 나에게 무슨 贖罪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遺言대로 그대에게다 하지 못한 사랑을 永遠히 다른 女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盟誓입니다/ 容恕하여요 論介여 그대가 容恕하면 나의 에게 懺悔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千秋에 죽지 않는 論介/ 하루도 살 수 없는 論介/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容恕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論介//

 

 

한 시 漢 詩


옥중 한시 1 / 한용운
가을 기러기 한 마리 멀리서 울고(一雁秋聲遠)/ 밤에 헤아리는 별 색도 다양하네(數星夜色多)/ 등불 짙어지니 잠도 오지 않는데(燈深猶未宿)/ 옥리는 집에 가고 싶지 않는가 묻는다(獄吏問歸家)// 하늘끝 기러기 한 마리 울며 지나가니(天涯一雁叫)/ 감옥에도 가득히 가을 소리 들리는구나(滿獄秋聲長)/ 갈대가 쓰러지는 길 저 밖의 달이여(道破蘆月外)/ 어찌하여 너는 둥근 쇠뭉치 혀를 내미는 거냐(有何圓舌椎)//

옥중 한시 2 / 한용운
헛된 삶 이어가며 부끄러워하느니(瓦全生爲恥)/ 충절 위해 깨끗이 죽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玉碎死亦佳)/ 하늘 가득 가시 찌르는 고통으로(滿天斬荊棘)/ 길게 부르짖지만 저 달은 밝기만 하다(長嘯月明多)//

咏燈影(영등영) / 한용운
夜冷窓如水 臥看第二燈(야랭창여수 와간제이등)// 雙光不到處 依舊愧禪僧(쌍광불도처 의구괴선승)//
밤이 차서 창문도 물과 같은 밤에/ 등 그림자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었네// 두 눈은 아무래도 잘 보이지 않고 희미한데/ 선승(禪僧)입네 소리쳤던 내가 되려 부끄럽구나.//

見櫻花有感(견앵화유감) / 한용운
昨冬雪如花 今春花如雪(작동설여화 금춘화여설)// 雪花共非眞 如何心欲裂(설화공비진 여하심욕렬)//
지난 겨울에 내린 눈은 꽃과 같았는데/ 올 봄에 피는 꽃은 흰 눈과 똑 같구나// 눈도 꽃도 모두가 진짜가 아니거늘/ 어찌하여 내 마음은 이리도 찢어지려고 하나.//

寄學生(기학생) / 한용운
瓦全生爲恥 玉碎死亦佳(와전생위치 옥쇄사역가)// 滿天斬荊棘 長嘯月明多(만천참형극 장소월명다)//
기왓장 같은 내 삶이 이리도 부끄러운데/ 옥같이 부서지는 죽음은 아름답구나.// 하늘 가득한 마음을 찌르는 가시들이 있는데/ 소리 내어 읊어보니 달빛만 밝아지는구나.//

砧聲(침성) / 한용운
何處砧聲至 滿獄自生寒(하처침성지 만옥자생한)// 莫道天衣煖 孰如徹骨寒(막도천의난 숙여철골한)//
어디서 다듬이 소리 이렇게 들려오는지/ 감옥 속에 가득히 찬 기운을 몰고 오네.// 천자의 옷이 따뜻하다고 말하지는 말게나/ 뼛속까지 스며드는 이 차가움을 그 누가 알리오.//

贈別(증별) / 한용운
天下逢未易 獄中別亦奇(천하봉미이 옥중별역기)// 舊盟猶未冷 莫負黃花期(구맹유미냉 막부황화기)//
같은 하늘 아래서 만나기도 어려웠는데/ 옥중에서 하는 이별 또한 기이하기도 하구나.// 옛 맹세는 아직도 식지 않고 있건만/ 국화꽃 피어오르면 다시 만날 기약 잊지 말게나.//

秋懷(추회) / 한용운
十年報國劒全空 只許一身在獄中(십년보국검전공 지허일신재옥중)// 捷使不來충語急 數莖白髮又秋風(첩사불래충어급 수경백발우추풍)//
십년 세월 보국하다 칼집은 완전히 비고/ 한 몸 다만 옥중에 있음이 허용 되었네.// 이겼다는 기별 아직도 오지 않았건만 벌레는 울어대고/ 또 다시 부는 가을바람에 늘어나는 백발이어라.//

雪夜(설야) / 한용운
四山圍獄雪如海 衾寒如鐵夢如灰(사산위옥설여해 금한여철몽여회)// 鐵窓猶有鎖不得 夜聞鐵聲何處來(철창유유쇄부득 야문철성하처래)//
사방 산은 감옥을 두르고, 내린 눈은 바다 같은데/ 무쇠처럼 차가운 이불 속에서 꾸는 꿈은 잿빛이어라.// 철창은 여전히 잠기어 열리지 않는데/ 깊은 밤 쇳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가.//

獄中吟(옥중음) / 한용운
壟山鸚鵡能言語 愧我不及彼鳥多(농산앵무능언어 괴아불급피조다)// 雄辯銀兮沈默金 此金買盡自由花(웅변은혜침묵금 차금매진자유화)//
농산의 앵무새는 언변이 좋기로 유명한데/ 내 언변 그 새에 미치지 못함이 부끄럽네.// 웅변은 은이라지만 침묵은 금이라 했으니/ 나는 이 금으로 자유의 꽃 몽땅 다 사버리겠네.//

獄中感懷(옥중감회) / 한용운
一念但覺淨無塵 鐵窓明月自生新(일념단각정무진 철창명월자생신)// 憂樂本空唯心在 釋迦原來尋常人(우락본공유심재 석가원래심상인)//
다만 깨닫기를 한 생각 깨끗하여 티끌도 없었는데/ 철창으로 새로 돋는 달빛만 고와라// 우락(憂樂)은 근본이 공이요, 오직 마음만 있거니/ 부처님도 원래는 보통 사람만 생각했으리.//

黃梅泉(황매천) / 한용운
就義從容永報國 一瞑萬古劫花新(취의종용영보국 일명만고겁화신)// 莫留不盡泉臺恨 大慰苦忠自有人(막류부진천대한 대위고충자유인)//
의로운 길로 객을 따라 영원히 보국하시니/ 한번 부릅뜬 눈, 만고에 새 꽃으로 피어나리// 끝나지 않은 황매천의 한, 남기지 마시라/ 큰 위로와 괴로운 충성 사람들 절로 알리.//

獨窓風雨(독창풍우) / 한용운
四千里外獨傷情 日日秋風白髮生(사천리외독상정 일일추풍백발생)// 驚罷晝眠人不見 滿庭風雨作秋聲(경파주면인부견 만정풍우작추성)//
4천리 밖에서 홀로 상심만이 더하더니/ 날마다 가을바람 불적마다 흰머리가 생기었네.// 낮잠에서 놀라 깨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뜰 가득 비바람 소리에 가을을 몰고오네.//

述懷(술회) / 한용운
心如疎屋不關扉 萬事曾無入微妙(심여소옥부관비 만사증무입미묘)// 千里今宵無一夢 月明秋樹夜紛飛(천리금소무일몽 월명추수야분비)//
마음은 성글어서 빗장 없는 집과 같아서/ 미묘한 것 무엇 하나 바른 것이 없어라.// 오늘 밤 천리밖엔 한 오라기 꿈도 없는 밤이건만/ 밝은 달 벗을 삼아 가을 잎만 우수수 지는구나.//

登禪房後園(등선방후원) / 한용운
兩岸寥寥萬事稀 幽人自賞未輕歸(양안요요만사희 유인자상미경귀)// 院裡微風日欲煮 秋香無數撲禪衣(원리미풍일욕자 추향무수박선의)//
양쪽 기슭 쓸쓸하여 모든 일 번거로움은 없고/ 유인이 스스로 가볍지 아니함 감상하고 돌아오네// 절 안에는 미풍 일고 햇볕은 찌는 듯한데/ 가을 향기만 끝없이 옷에 감기는구나.//

山晝(산주) / 한용운
群峰蝟集到窓中 風雪凄然去歲同(군봉위집도창중 풍설처연거세동)// 人境寥寥晝氣冷 梅花落處三生空(인경요요주기랭 매화낙처삼생공)//
봉우리 창에 모여 고슴도치인 듯하더니/ 눈바람 몰아치니 처연히 지난해인 듯 하네.// 인경(人境)이 고요하고 낮 기운도 차가운데/ 매화꽃 지는 곳마다 삼생(三生)의 공(空)이로세.//

自笑詩癖(자소시벽) / 한용운
詩瘦太감反奪人 紅顔減肉口無珍(시수태감반탈인 홍안감육구무진)// 白說吾輩出世俗 可憐聲病失靑春(백설오배출세속 가련성병실청춘)//
시를 너무 즐겨 야위었으니 사람을 탈진하게 했고/ 얼굴에 살 빠지고 입맛도 잃고 말았네.// 친구들은 세속을 떠난 양 말을 하지만/ 가련쿠려, 청춘을 삼켜버린 병이라고 소리하네.//

自樂(자락) / 한용운
佳辰傾白酒 良夜賦新詩(가진경백주 양야부신시)// 身世兩忘去 人間自四時(신세량망거 인간자사시)//
철이 마침 좋은지라 막걸리 한 잔 기울이고/ 이 좋은 밤 어찌 시 한 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나와 세상 둘이 같이 아울러 세사를 잊었으니/ 사람은 저절로 네 계절이 돌아가는 것 맞네.//

新晴(신청) / 한용운
禽聲隔夢冷 花氣入禪無(금성격몽냉 화기입선무)// 禪夢復相忘 窓前一碧梧(선몽부상망 창전일벽오)//
새 소리의 꿈 저쪽에선 차가움이 감돌고/ 꽃내음 무선(無禪)에 들어와 그냥 스러지고 마는구나.// 선과 꿈을 다시 잊은 곳이 있다면/ 창 앞의 한 그루 벽오동나무 뿐이려니.//

訪白華庵(방백화암) / 한용운
春日尋幽逕 風光散四林(춘일심유경 풍광산사림)// 窮途孤興發 一望極淸唫(궁도고흥발 일망극청금)//
봄날 그윽한 오솔길을 찾았더니/ 사방의 숲을 따라 가니 풍광(風光)이 새로워라.// 길은 비록 끊어졌으나 외로운 흥(興)만은 일어나서/ 한 번 바라보며 마음껏 푸른 시를 읊조리네.//

淸寒(청한) / 한용운
待月梅何鶴 依梧人赤鳳(대월매하학 의오인적봉)// 通宵寒不盡 ?屋雪爲峰(통소한부진 요옥설위봉)//
달을 기다리다 매화는 학인 양 야위어 있고/ 오동에 의지하니 사람 또한 봉황임을 알겠네.// 밤새도록 모진 추위 그치지 않더니만/ 눈이 집을 에워싸듯 산봉우리 이루고 있네.//

思鄕(사향) / 한용운
江國一千里 文章三十年(강국일천리 문장삼십년)// 心長髮已短 風雪到天邊(심장발이단 풍설도천변)//
천리라 머나먼 고향을 떠나 있어서/ 글속에 파묻혀 떠돌기 시작한 지 서른 해를 넘겼구나.// 마음이야 젊지만 몸은 이미 많이 늙어서/ 눈바람 속 하늘가에 이르고 말았으니.//

思鄕(사향) / 한용운
歲暮寒窓方夜永 低頭不寐幾驚魂(세모한창방야영 저두부매기경혼)// 抹雲淡月成孤夢 佛向滄洲向故園(말운담월성고몽 불향창주향고원)//
한 해가 가려는데 차가운 창엔 밤이 길어/ 잠 못 들고 몇 번을 내 혼백이 놀랐던가.// 구름 걸린 희미한 달의 꿈이 외로운데/ 창주(滄洲)를 향하지 않고 달려가는 고향 마음.//

思鄕苦(사향고) / 한용운
寒燈未剔紅連結 百髓低低未見魂(한등미척홍연결 백수저저미견혼)// 梅花入夢化新鶴 引把衣裳說故園(매화입몽화신학 인파의상설고원)//
심지를 따지 않아도 등잔불은 타고 있는 밤에/ 온 몸이 자지러지고 넋 또한 나가고 없네.// 꿈을 꾸니 매화가 학이 되어 나타나고/ 옷자락을 끌어당기면서 고향 소식 얘기하네.//

悟道頌(오도송) / 한용운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남아도처시고향 기인장재객수중)//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紅(일성갈파삼천계 설리도화편편홍)//
남아가 가는 곳은 어디나 고향인 것을/ 그 몇 사람들 객수(客愁) 속에 길이 갇혔나.// 한 마디 버럭 질러 삼천세계(三千世界) 뒤흔드니/ 눈 속에 점점이 복사꽃만 붉게 지네.//

龜巖寺初秋(구암사초추) / 한용운
古寺秋來人自空 匏花高發月明中(고사추래인자공 포화고발월명중)// 霜前南峽楓林語 纔見三枝數葉紅(상전남협풍림어 재견삼지수엽홍)//
옛 절에 가을이 되니 마음만은 저절로 맑아지고/ 달빛 속에 높이 달린 박꽃이 희구나.// 서리 앞 남쪽 골짜기 단풍나무 숲의 속삭임에/ 서너 가지 몇 잎새만이 겨우 붉어졌구나.//

與錦峯伯夜금(여금봉백야금) / 한용운
詩酒相逢天一方 蕭蕭夜色思何長(시주상봉천일방 소소야색사하장)// 黃花明月若無夢 古寺荒秋亦故鄕(황화명월약무몽 고사황추역고향)//
시와 술 서로 만나 즐기나 천리 타향인데/ 쓸쓸한 이 한밤 생각 아니 무궁하겠네.// 달 밝고 국화 피어 애틋한 꿈 없었으니/ 가을철 옛 절이기로 어디인들 고향 아니리.//

次映湖和尙香積韻(차영호화상향적운) / 한용운
蔓木森凉孤月明 碧雲層雪夜生溟(만목삼량고월명 벽운층설야생명)// 十萬珠玉收不得 不知是鬼是丹靑(십만주옥수부득 부지시귀시단청)//
숲은 썰렁하고 밝은 달빛은 외로운데/ 구름과 눈이 밝게 비추니 완연한 바다로구나.// 십만 그루나 되는 구슬이 하도 고와서/ 조화인 줄도 모르고 그림으로 착각했구먼.//

次映湖和尙(영호 화상의 시에 부쳐) / 한용운
詩酒人多病(시와 술 일삼으며 병이 많은 이 몸)/ 文章客亦老(문장을 벗하여서 선사도 또한 늙으셨구려)/ 風雲來書字(눈바람 치는 날에 보내주신 편지 받으니)/ 兩情亂不少(가슴에 뭉클 맺히는 이 정을 어떻게)//

贈映湖和尙述未嘗見(증영호화상술미상견) / 한용운
玉女彈琴楊柳屋 鳳凰起舞下神仙(옥녀탄금양유옥 봉황기무하신선)// 竹外短壇人不見 隔窓秋思杳如年(죽외단단인부견 격창추사묘여년)//
버드나무집 고운님의 거문고 타는 소리에/ 봉황은 춤을 추고 신선이 내려오네.// 대밭 건너 담 안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데/ 창밖엔 가을 시름으로 세월만 아득해라.//

過九曲嶺(과구곡령) / 한용운
過盡臘雪千里客 智異山裡진春陽(과진랍설천리객 지리산리진춘양)// 去天無尺九曲路 轉回不及我心長(거천무척구곡로 전회불급아심장)//
천리 밖 손객이 섣달 눈을 다 보내고서/ 지리산 깊은 골짝 봄볕에 길을 걸었네.// 하늘에 닿을 듯한 굽이굽이 구곡령 길엔/ 뒤틀린 내 마음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리.//

漁笛(어적) 1 / 한용운
孤帆風烟一竹秋 數聲暗逐荻花流(고범풍연일죽추 수성암축적화류)// 晩江落照隔紅樹 半世知音問白鷗(만강낙조격홍수 반세지음문백구)//
안개 낀 강에는 돛배 한 척이 한 대나무 가을인데/ 갈대꽃 따라서 피리 소리 흐른다네.// 단풍 든 저 너머엔 낙조(落照)만이 지는데/ 나의 반평생 지음(知音)일랑 백구만은 알리라.//

漁笛(어적) 2 / 한용운
韻絶何堪遯世夢 曲終虛負斷腸愁(운절하감둔세몽 곡종허부단장수)// 飄掩律呂撲人冷 滿地蕭蕭散不收(표엄율려박인랭 만지소소산부수)//
가락이 기막히니 둔세(遯世)의 꿈 어찌 견디랴./ 곡조 끝나도 애끊는 시름 달래지 못하네.// 그 소리 바람이 인 듯 날려 내 가슴을 치는데/ 천지에 가득한 쓸쓸함 스러질 줄 몰라라.//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과 영양실조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입적)하였다.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 편의 장편,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였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한용운의 독립 사상-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

 

우리역사넷

이 사료는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3⋅1 운동 당시 체포되어 일본인 검사의 심문에 답변할 내용을 구상하던 중 기초한 것으로 상해 임시 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자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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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공개된 한용운(1879~1944)이 담긴 서대문형무소 신상카드.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앞선 수형기록표와 대조했을 때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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