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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나희덕 시인

부흐고비 2021. 5. 20. 07:02

 

삼베 두 조각 / 나희덕
눈 내리는 아침/ 할머니는 손수 지어놓으신 수의로 갈아입으셨다/ 수의는 1978년 7월 15일자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수의를 지어놓고도 이십년을 더 사신 할머니는/ 백살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이 되어서야/ 연듯빛을 군데군데 넣어 만든 그 수의를/ 벽장 속에 숨겨둔 날개옷처럼 차려 입으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버선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도 허지, 그것을 안 맨들 양반이 아닌디 아닌디....../ 어리등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할머니의 두 입술은 설핏 웃는 듯도 하였다/ 상자 속에는 버선 대신 삼베 두 조각이 들어 있어서/ 그걸로 잘 마른 장작 같은 두 발을 싸드렸다/ 삼베 두 조각을 두고/ 할머니는 왜 끝내 버선을 만들지 않으셨을까/ 1978년 7월 15일자 신문지 에 싸여 있던/ 수의 한벌과 삼베 두 조각으로 따뜻하게 여며 입고/ 할머니는 1998년 1월 19일 아침/ 횐눈이 내리는 새로운 집으로 걸어들어 가셨다//

뿌리에게 / 나희덕 - 1989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언덕 / 나희덕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언덕은/ 내려오고 있다// 늙은 고양이/ 어슬렁거리며/ 언덕을 내려올 때/ 언덕도 몇 발짝 따라 내려오고// 마른 흙 위에/ 나비 앉았다 날아가면/ 언덕도 몇 줌 따라 날아가고// 개나리가 언덕 아래/ 몸을 부리고 있는 동안/ 언덕은 또 얼마나 많이 내려와 있는지/ 중턱의 소나무 몇 그루가 간신히 붙잡고 있다/ 언덕을 내려오는/ 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언덕이 조금씩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어느날 아침/ 사람들은 말하겠지/ 언덕은 대체 어디로 갔지?/ 나무들은, 꽃잎들은, 고양이는, 나비는?/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다들 어디로 갔지?//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빛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삶을 꿰메는 마지막 한맘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을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어떤 아이들 / 나희덕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두세살부터/ 영재교실에서 과외를 받는 아이들// 유치원에서 피아노, 주산, 태권도, 컴퓨터까지/ 하루 종일 바쁘신 아이들// 30평은 30평끼리/ 17평 주공은 17평 주공끼리/ 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짝을 맞추어 잘 노는 아이들// 프라이드를 타고 온 친구의 아버지를/ 비웃을 줄도 아는 콩코드의 아이들// 지나가는 사람에게/ 돈 줄 테니 저 공 좀 건져달라고/ 벌써 유능하게 사람을 부리는 사장님의 아이들// 뛰놀 만한 언덕 하나 없어/ 5층 아파트 옥상에서 연을 날리며/ 얼레를 풀어 동심을 날려보내는 아이들// 그 위태로운 하늘 끝,/ 어디선가 날아온 새 한 마리가/ 쓸쓸한 어깨 위를 맴돌고 있다//

어떤 항아리 / 나희덕
이건 금이 간 항아리이면서/ 금이 갔다고 말할 수 없는 항아리// 손가락으로 퉁겨보면/ 그런 대로 맑은 소리를 내고/ 물을 담아보아도 괜찮다// 그런데 간장을 담으면 어디선가 샌다/ 간장만 통과시키는 막이 있는 것일까// 너무나 짜서 맑아진,/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 그의 감식안//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 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 詩라는 항아리//

방을 얻다 / 나희덕
담양이나 평창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저어, 방을 한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서 일할 공간이 필요해서요/ 나는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켰고/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이씨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배추의 마음 / 나희덕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보다//

어떤 出土 /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 하려고 밭에 다시 가 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두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계산에 대하여 / 나희덕
계산을 하지 말고 살아야겠다/ 모든 계산은/ 부정확하지는 않아도/ 불가능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계산을 하는 동안에도 자본은/ 운동을 멈추지 않기 떄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구좌에선가/ 이자가 올라가고 있고/ 수수료와 세금과 연체료가/ 빠져나가고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계산은 불어가거나/ 녹아가고 있다// 모든 존재는/ 언덕 아래로 굴러내리는/ 눈덩이와 같으니/ 모든 계산은 그 눈덩이의/ 지름을 재는 일과도 같다// 계산을 한다는 것은/ 순간을 환산할 수 있다는/ 장담처럼/ 영원을 측량할 수 있다는/ 믿음처럼 어리석은 일,/ 계산을 마치는 순간/ 그 수치는 돌덩이가 되어/ 나를 누루고 구르는 동안/ 욕망의 옷을 입기 시작할 것이다// 부디 계산을 마치지 말자/ 그래도 우리는 그 위에/ 꽃 피우며 잘도 산다/ 돌 위에 뿌리내린 풍란처럼/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제법 향기롭게//

비에도 그림자가 있다 / 나희덕
소나기 한차례 지나가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를 맞은 채 앉아 있던 자리/ 사과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그림자/ 아직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하늘 한 조각//

하얀 손수건 / 나희덕
그들은 가장 소중한 자신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말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맑고 깨끗한 영혼의 날개를 접었습니다/ 가장 쓸쓸한 날에 못견디게 그리운 날에/ 그래도 눈물이 나는 날에/ 그 손수건은 날개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 제일 높은 곳에서/ 조그맣게 눈발처럼 흔들리는 깃발이 될 것입니다/ 바람도 한참 흩뿌린 후에/ 무늬마저 지워진 손수건은/ 白紙가 될 것입니다/ 그 백지를 들여다보며 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聖(성) 느티나무 / 나희덕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창녕 덕산리 느티나무는 올봄도 잎을 내었다/ 잔가지 끝으로 하늘을 밀어올리며 그는/ 한 그루 용수처럼/ 제 아궁이에서 자꾸만 잎사귀를 꺼낸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렇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시커먼 아궁이 하나 들여놓고/ 그는 오래오래 제 살을 달여 놓는다/ 낮의 새와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 하는,/ 바람도 가만히 숨을 모으는 그 검은 아궁이에는/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 까마귀 깃들었다 날아간 자리에/ 검은 울음 몇 가지가 뻗어 있기도 한다/ 발이 묶인 채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들고 있다//

음지의 꽃 / 나희덕
우리는 썩어가는 참나무떼,/ 벌목의 슬픔으로 서 있는 이 땅/ 패역의 골짜기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겨울을 난다/ 함께 썩어갈수록/ 바람은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흔들고/ 이윽고 잠자던 홀씨들 일어나/ 우리 몸에 뚫렸던 상처마다 버섯이 피어난다/ 황홀한 음지의 꽃이여/ 우리는 서서히 썩어가지만/ 너는 소나기처럼 후드득 피어나/ 그 고통을 순간에 멈추게 하는구나/ 오, 버섯이여/ 산비탈에 구르는 낙엽으로도/ 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으로도/ 덮을 길 없는 우리의 몸을/ 뿌리 없는 너의 독기로 채우는구나//

땅끝 / 나희덕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 나희덕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친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 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멀고 귀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 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 나오며/ 단 한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 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빗방울, 빗방울 /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그곳이 멀지 않다 / 나희덕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 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 주었다//

물소리를 듣다 / 나희덕
우리가 싸운 것도 모르고/ 큰애가 자다 일어나 눈 비비며 화장실 간다/ 뒤척이던 그가/ 돌아누운 등을 향해 말한다// ……당신 …… 자? ……/ 저 소리 좀 들어봐…… 녀석 오줌 누는 소리 좀/ 들어봐…… 기운차고…… 오래 누고……/ 저렇도록 당신이 키웠잖어…… 당신이……// 등과 등 사이를 흘러가는 물소리를/ 이렇게 듣기도 한다// 담이 결린 것처럼/ 왼쪽 어깨가 오른쪽 어깨를 낯설어할 때/ 어둠이 좀처럼 지나가주지 않을 때/ 새벽녘 아이 오줌 누는 소리에라도 기대어/ 보이지 않는 강을 건너야 할 때//

기억의 자리 / 나희덕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몰약처럼 비는 내리고 / 나희덕
뿌리뽑힌 줄도 모르고 나는/ 몇줌 흙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구나/ 자꾸만 목이 말라와/ 화사한 꽃까지 한무더기 피웠구나/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弔花인 줄도 모르고// 오늘밤 무슨 몰약처럼 밤비가 내려/ 시들어가는 몸을 씻어내리니/ 달게 와닿는 빗방울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 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진물이/ 낮은 흙 속에 스며들었으니/ 한 삼일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겠다// 저기 웅크린 채 비를 맞는 까치는/ 무거워지는 날개만큼 말이 없는데/ 그가 다시 가벼워진 깃을 털고 날아갈 무렵이면/ 나도 꾸벅거리며 밤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 고맙다, 비야. …고맙다. …고맙다.…//

들리지 않는 노래 / 나희덕

날개와 발톱이 있다면/ 당신은 새-여자/ 꼬리와 지느러미가 있다면/ 당신은 물고기-여자/ 몸이 조금씩 변해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물에 비친 모습을 보았지/ 당신은 머리를 빗어내리며 노래를 불렀지/ 물거품처럼 떠가는 노래/ 오래전 당신이 부르던 노래/ 아기를 업어 재우며 부르던 노래/ 슬픔의 베틀 앞에 앉아 부르던 노래/ 피에서 솟구친 노래는 어떻게 떨어져내리나/ 모래언덕을 잃어버린 파도는 어떻게 출렁거리나/ 사랑을 잃고/ 그 때문에 목소리마저 잃은 당신/ 침묵이 가장 무거운 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도 있었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낡은 거푸집을 헤치고 날아오르느라/ 날개가 부러진 흔적이 있다면/ 당신은 새-여자/ 찢긴 지느러미를 지니고 있다면/ 당신은 물고기-여자//

 

이 복도에서는 / 나희덕
종합병원 복도를 오래 서성거리다 보면/ 누구나 울음의 감별사가 된다/ 울음마다에는 병아리 깃털 같은 결이 있어서/ 들썩이는 어깨를 짚어보지 않아도/ 그것이 병을 마악 알았을 때의 울음인지/ 죽음을 얼마 앞둔 울음인지/ 싸늘한 죽음 앞에서의 울음인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복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울음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말 것/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걸어갈 것// 마른 시냇물처럼 오래 흘러온/ 이 울음의 야적장에서는 누구도 그 무게를 달지 않는다//

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이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 나희덕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살아 있어야 할 이유 / 나희덕
가슴의 피를 조금씩 식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 가슴을 문질러/ 온갖 열망과 푸른 고집들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여/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 저리도 눈부시고 환한 일이라고/ 땅에 뒹굴면서도 말하는 이여/ 한번은 제 슬픔의 무게에 물들고/ 붉은 석양에 다시 물들며/ 저물어가는 그대, 그러나 나는/ 저물고 싶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떨어져내리는 시절이라 하지만/ 푸르죽죽한 빛으로 오그라들면서/ 이렇게 떨면서라도/ 내 안의 물기 내어줄 수 없습니다/ 눅눅한 유월의 독기를 견디며 피어나던/ 그 여름 때늦은 진달래처럼//

와온(臥溫)에서 / 나희덕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번은/ 짠물과 뻘흙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풍장(風葬)의 습관 / 나희덕
房에 마른 열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구석구석 마른 꽃들이 놓여 있다는 것도./ 부엌 찬장에는 병마다/ 담근 술과 잼이 담겨 있다는 것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 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들은 향기를 잃는 대신 영생을 얻었을지/ 모른다고, 단단한 껍질을 어루만지면 중얼거려본다./ 지난 가을 내 머리 위에 후둑후둑 떨어져 내리던/ 도토리들도 종지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그 중 한 알을 흔들어보니 희미한 종소리가 난다./ 마른 찔레 열매는 아직도 붉다./ 싱싱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 꽃다발을 보면서도/ 스스로의 습기에 부패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을 장사지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때이른 風葬의 습관으로 나를 이끌곤 했다./ 바람이 잘 드는 양지볕에/ 향기로운 육신을 거꾸로 매달아/ 피와 살을 증발시키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었던,/ 또는 고통의 설탕에 절인 과육을/ 뜨거운 불 위에 올려놓고 나무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어딘가로 달아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심지어 홍시를 가지째 벽에 매달아놓고/ 그것이 노파의 젖가슴처럼 오그라붙을 때까지 기다리던,/ 나는 일종의 건조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누군가 나에게 꽃을 참 잘 말린다고 말했지만 그건 유목의 피를 잠재우는 일이었을 뿐이라고,/ 오늘 아침 房에 들어서는 순간/ 후욱 끼치던 마른 꽃냄새, 그 겹겹의 입술들이,/ 한번도 젖은 허벅지를 더듬어본 적이 없는 그 입술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나비처럼 가벼워진 꽃들 속에서/ 나는 보았다, 그들과 함께 風化되고 있는 자신을.//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나 서른이 되면 / 나희덕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러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겨울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잘 길들여진 발과/ 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발을 함께 달고서/ 그렇게 라도 걷고 걸어서/ 나 서른이 되면/ 그것들의 하나됨을 이해하게 될까/ 두려움에 대하여 통증에 대하여/ 그러나 사랑에 대하여/ 무어라 한마디 말할 수 있게 될까/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가는 개미들처럼/ 그 주검으로도/ 어린것들의 살이 오른다는 걸/ 나 감사하게 될까. 서른이 되면.//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우리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석류 / 나희덕
석류 몇 알을 두고도 열 엄두를 못 내었다/ 뒤늦게 석류를 쪼갠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처럼/ 앙다문 이빨로 꽉 찬,/ 핏빛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네 마음과도 같은 석류를// 그 굳은 껍질을 벗기며/ 나는 보이지 않는 너를 향해 중얼거린다// 입을 열어봐/ 내 입속의 말을 줄게/ 새의 혀처럼 보이지 않는 말을/ 그러니 입을 열어봐/ 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이/ 내 혀를 적시도록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

흔들리는 것들 / 나희덕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흔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가자,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 가만히 들었습니다/ 흰 실과 검은 실을 더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한 삽의 흙 / 나희덕
밭에 가서 한 삽 깊이 떠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 오래 묻혀 있던 돌맹이들이 깨어나고/ 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 사금파리와 마른 뿌리들로 이루어진 말의 지층/ 빛에 마악 깨어난 세계가/ 하늘을 향해 봉긋하게 엎드려 있다/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놓고 가버렸으면/ 그러면 처음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엎드려 있을텐데/ 물기 머금은 말들을 마구 토해낼 수 있을 텐데/ 가슴에 오글거리던 벌레들 다 놓아줄 텐데/ 내속의 사금파리에 내가 찔려 피 흘릴 수 있을 텐데/ 마른 뿌리에 새 순을 돋게 할 수는 없어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말을 웅얼거릴 수 있을 텐데/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놓은 한 삽의 흙속으로 들어가는 것//

저 물결 하나 / 나희덕
한강 철교를 건너는 동안/ 잔물결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빼서 서울을 떠난 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한강./ 어제의 내가 그 강물에 뒤척이고 있었다/ 한 뼘쯤 솟았다 내려앉는 물결들./ 서울에 사는 동안 내게 지분이 있었다면/ 저 물결 한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결 하나 일으켜/ 열 번이 넘게 이삿짐을 쌌고/ 물결 하나 일으켜/ 물새 같은 아이 둘을 업어 길렀다/ 사랑도 물결 하나처럼/ 사소하게 일었다 스러지곤 했다/ 더는 걸을 수 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운 것도/ 저 낮은 물결 위에서였다/ 숱한 목숨들이 일렁이며 흘러가는 이 도시에서/ 뒤척이며, 뒤척이며, 그러나/ 한 번도 같은 자리로 내려앉지 않는/ 물결 위에 쌓았다 허문 날들이 있었다/ 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 물결 하나가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건넸다/ 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못 위의 잠 /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깨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 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연못 속에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천천히 가라앉고 있네/ 저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 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소만(小滿) / 나희덕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은 빈 것도 같게/ 조금은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小滿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小滿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북극성처럼 빛나는 / 나희덕
멀리 보이는 흰 바위섬,/ 뱃사람은 그것을 오지바위라 부른다/ 가까이 가보니 새들의 분뇨로 뒤덮여 있었다/ 가마우지떼가 겨울을 나는 섬이라고 한다/ 수많은 바위섬을 두고 유독/ 그 바위에만 날아와 앉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마우지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모여사는 것은/ 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다/ 포식자의 눈과 발톱을 피하기 위해/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떼를 지어 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이 바위를 희게 만들었다/ 절벽 위에서 서로를 견디며/ 분뇨 위에서 뒹굴고 싸우고 구애하는 것은/ 새들만이 아니다/ 지상의 집들 또한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지 않은가/ 가파른 절벽 위에 뒤엉킨 채/ 말라붙은 기억, 화석처럼 찍힌 발톱자국,/ 일렁이는 파도에도 씻기지 않는/ 그 상처를 덮으러 다시 돌아올 가마우지떼/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힘은/ 파도 위 북극성처럼 빛나는 저 분뇨자국이다//

속리산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갚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비 오는 날에 / 나희덕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꽃바구니 / 나희덕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이 허리를 꽂은/ 한 바구니의 신음을/ 대지를 잃어버린 꽃들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지요./ 서로 뿌리가 다른 같은 시간을/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며/ 바구니에서 떨어져 내리는 꽃들이 있네요/ 물에 젖은 오아시스를 거절하고/ 고요히 시들어가는 꽃들/ 그들은 망각의 달콤함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꽃바구니에는 생기로운 꽃들이 더 많아요/ 하루가 한 생애인 듯 이 꽃들 속에 숨어/ 나도 잠시 피어나고 싶군요/ 수줍게 꽃잎을 열듯 다시 웃어보고도 싶군요/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서시 /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욕탕 속의 나무들 / 나희덕
저 나무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늙은 왕버들 한 그루가 반쯤 물에 잠겨 있다/ 더운 김이 오르는 욕탕,/ 마을 어귀 아름드리 그늘을 드리우던 그녀가/ 오늘은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이 더 검게 보인다/ 그 많던 잎사귀들은 다 어디에 두고/ 빈 가지만 남은 것일까/ 왕버들 곁으로 조금 덜 늙은 왕버들이 다가와/ 그녀의 등과 어깨를 천천히 밀어 준다/ 축 늘어진 배와 가슴도, 주름들도,/ 주름들 사이에 낀 어둠까지도 환해 진다/ 나무 껍질 벗기는 냄새에/ 나도 모르게 두 왕버들 곁으로 걸어 간다/ 냉탕에서 놀던 어린 버들이 뛰어오고/ 왕버들 4代/ 나란히 푸른 물속에 들어가 앉는다/ 큰 굽쇠를 향해 점점 작아지는 굽쇠들처럼/ 나는 당신에게서 나왔다고 말하는 몸들,/ 물이 찰랑찰랑 흘러 넘친다/ 오래 전 왕버들의 새순이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천장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 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찬비 내리고 /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돼지머리들처럼 / 나희덕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며/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입 끝을 집어올린다./ 자, 웃어야지, 살이 굳어버리기 전에.// 새벽 자갈치시장, 돼지머리들을/ 찜통에서 꺼내 진열대 위에 앉힌 주인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웃는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웃어야지, 김이 가시기 전에.// 몸에서 잘린 줄도 모르고/ 목구멍으로 피가 하염없이 흘러간 줄도 모르고/ 아침 햇살에 활짝 웃던 돼지머리들.// 그렇게 탐스럽게 웃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적당히 벌어진 입과 콧구멍 속에/ 만 원짜리 지폐를 쑤셔 넣지 않았으리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진열대 위에 얹혀 있다는 생각,/ 자, 웃어, 웃어봐, 웃는 척이라도 해봐,/ 시들어가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긴다.// 아―에―이―오―우―/ 그러나 얼굴을 괄약근처럼 쥐었다 폈다/ 숨죽여 불러보아도 흘러내린 피가 돌아오지 않는다.// 출근길 백미러 속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머리 하나.//

실려가는 나무 / 나희덕
풀어헤친 머리가 땅에 닿을락 말락 한다/ 또다른 생(生)에 이식되기 위해/ 실려가는 나무,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입술을 달싹여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언어의 도끼가 조금은 들어간 얼굴이다/ 오래 서 있던 몸에서는/ 자꾸만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걸 받아 적으며 따라가다가/ 출근길을 놓치고 길가에 부려진 나는/ 나무 심는 인부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지만,/ 나무 모르게 그 나무를 따라간 것은/ 덜컹덜컹 어디론가 실려가면서/ 언어의 도끼에 다쳐본 일이 있기 때문일까/ 어떤 둔탁한 날이 스쳐간 자국,/ 입술을 달싹이던 그 말들들 다시 읽을 수 없다//

저 물방울들은 / 나희덕
그가 사라지자/ 사방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를 아무리 힘껏 잠가도/ 물때 낀 낡은 씽크대 위로/ 똑, 똑, 똑, 똑, 똑 ……/ 쉴 새 없이 떨어져내리는 물방울들// 삶의 누수를 알리는 신호음에/ 마른 나무뿌리를 대듯 귀를 기울인다// 문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발자국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기도 한// 아, 저 물방울들은/ 나랑 살아주러 온 모양이다// 물방울 속에서 한 아이가 울고/ 물방울 속에서 수국이 피고/ 물방울 속에서 빨간 금붕어가 죽고/ 물방울 속에서 그릇이 깨지고/ 물방울 속에서 싸락눈이 내리고/ 물방울 속에서 사과가 익고/ 물방울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물관을 타고 올라와/ 빈 방의 침묵을 적시는 물방울들은/ 글썽이는 눈망울로 요람 속의 나를 흔들어준다/ 내 심장도 물방울을 닮아/ 역류하는 슬픔도 잊은 채 잠이 들곤 한다// 똑, 똑, 똑, 똑, 똑, 똑 ……/ 빈혈의 시간 속으로 흘러드는 낯선 핏방울들//

누에 / 나희덕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부패의 힘 /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옥수수밭이 있던 자리 / 나희덕
텅 비어 있다/ 어제까지 열려있던 문이 닫혀있다/ 바람에 소리를 내던 옥수수밭이 사라져버렸다/ 옥수수가 사라지면서/ 흔들림도, 허공도 함께 베어졌다/ 허공은 달빛을 안을 수 있는 팔들을 잃었다/ 소리내어 울 수 있는 입술들을 잃었다/ 갑옷과 투구 부딪치는 소리,/ 석탄을 지닌 산줄기가 먼저 폐허가 되듯이/ 열매가 실한 순서대로 베어져 나갔다/ 밑둥에는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옥수숫대,/ 형기가 유예된 수인처럼/ 한 종족이 거기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 밭은 더 어두워질 것이고/ 성근 열매들은 여분의 삶을 익혀 갈 것이다/ 희고 붉고 검은 옥수수알들이 익어갈 것이다/ 수확한 옥수수를 자루에 넣는 손들./ 피 흘리는 허공도 함께/ 푸른 자루를 실은 트럭이 산모퉁이를 돌아간다//

홍신을 신고 / 나희덕
음악에 몸을 맡기자/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 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춤추는 발이/ 빵집을 지나 세탁소를 지나 공원을 지나 동사무소를 지나/ 당신의 식탁과 침대를 지나 무덤을 지나 풀밭을 지나/ 돌아오지 않아요 어쩌면 좋아요/ 세상은 나에게 계속 춤추라고 외쳤죠/ 꼬리 잘린 고양이처럼 다리를 잘린다 해도/ 음악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다니,/ 그것도 나에게 꼭 맞는 분홍신을 신고 말이에요/ 내 핏속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둑을 넘어가는 물소리,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이곳은 아무리 춤을 춰도 해가 지지 않아요/ 물이 둑을 넘어 흘러내리듯/ 내 속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나와요/ 실들이 뒤엉키고 길들이 뒤엉키고/이 도시가 나를 잡으려고 도끼를 들고 달려와도/ 이제 춤을 멈출 수가 없어요/ 오래 전 내 발에 신겨진, 그러나 잠들어 있던/ 분홍신 때문에/ 그 잠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에//

종점 하나 전 / 나희덕
집이 가까워 오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깨어 보면 늘 종점이었다/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 속을 내딛듯 골목으로 사라져 가고/ 한 정거장을 되짚어 돌아오던 밤길,/ 거기 내 어리석은 발길은 뿌리를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늘 막다른 어둠에 이르러야 했던,/ 그제서야 터벅터벅 되돌아오던,/ 그 길의 보도 블록들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그래서 길은 기우뚱거렸다/ 잘못 길들여진 말처럼/ 집을 향한 우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종점 다방의 불빛과/ 셔터를 내린 세탁소, 쌀집, 기름집의/ 작은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낮은 지붕들을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지붕들 사이로 숨은 나의 집이 보였다/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갈증 / 나희덕
어디서 물 끓는 소리 들린다/ 저 불을 꺼야 하는데, 꺼야 하는데,/ 손을 허공에 내저어보지만/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다/ 물이 잦아든 주전자가 달아오른다/ 쇠 타는 냄새/ 플라스틱 손잡이 녹는 냄새/ 녹은 플라스틱이 다시 엉기는 냄새/ 급기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았는데/ 물 끓는 소리 계속 들린다/ 어서 저 불을 꺼야 하는데, 꺼야 하는데....// 비등점 위의 날들이 계속되고, 비는 내리지 않고, 마른 웅덩이/ 에는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개구리떼 울음소리, 누구의 목이 이리/ 도 말라 물기란 물기는 다 거두어 가는가, 일어나, 일어나, 저 불/ 타는 혀가 너를 삼키기 전에. 소리쳐 보아도 이내 되돌아와 불타/ 는 소리. 물 끓는 소리. 아무것도 모른채 잠이 든 마음을 업고 나/ 는 그 연기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풍선은 얼마나 무거운가 / 나희덕
풍선이 터지는 것은 쉬운 일,/ 그러나 터지기 직전의 풍선은 얼마나 무거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차마 그 부푼 속을 찌를 수가 없고/ 그냥 두고 지켜보자니/ 그것이 조금씩 시들어가는 동안에도/ 나의 절망은 무디어져간다,/ 한 줄의 고통을 말하는 동안에도/ 연필이 무디어지듯이./ 풍선은 터지기 쉬운 일,/ 탱탱한 풍선은 얼마나 무거운가//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상현(上弦) /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해일 / 나희덕
숲은 만조다/ 바람이란 바람 모두 밀려와 나무들 해초처럼 일렁이고/ 일렁임은 일렁임끼리 부딪쳐 자꾸만 파도를 만든다/ 숲은 얼마나 오래 웅웅거리는 벌떼들을 키워온 것일까/ 아주 먼 데서 온 바람이 숲을 건드리자/ 숨죽이고 있던 모래알갱이들까지 우우 일어나 몰려다닌다/ 저기 거북의 등처럼 낮게 엎드린 잿빛 바위,/ 그 완강한 침묵조차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출렁거린다/ 아니라 아니라고 온몸을 흔든다 스스로 범람한다/ 숲에서 벗어나기 위해 숲은 肉脫한다/ 부러진 나뭇가지들 떠내려간다//

조찬(朝餐) / 나희덕
깃인가 꽃인가 밥인가/ 저 희디흰 눈은/ 누구의 허기를 채우려고/ 어제부터 내리고 있는가// 뱃속에 들기도 전에 스러져버릴/ 양식을, 그러나 손을 펴서/ 오늘은 받으라 한다// 흰밥을 받고 있는 언 손들// 木튤립나무 마른 열매들도/ 꽃봉오리 같은 제 속을 다 비워서/ 송이송이 고봉밥을 먹고 있다// 박새들이 한 사흘 쪼아먹고 가겠다//

 




나희덕(羅喜德) 시인
1966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그녀에게》《파일명 서정시》 등이 있으며 시론집으로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한 접시의 시》가 있다. 제17회〈김수영문학상〉, 제12회 〈김달진문학상〉, 제9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학 부문, 제48회〈현대문학상〉, 제17회〈이산문학상〉, 제22회〈소월시문학상〉, 제10회 〈지훈상〉 문학 부문, 제6회 〈임화문학예술상〉, 제14회 미당문학상, 제2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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