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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정희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히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수의를 입히며 / 고정희 논두렁 밭두렁에 비지땀을 쏟으시고/ 씨앗 여물 때마다 혼을 불어넣으시어/ 구릿빛 가죽만 남으신 어머니,/ 바람개비처럼 가벼운 줄 알았더니/ 어머니 지신 짐이 이리 무겁다니요/ 날아갈 듯 누우신 오 척 단신에/ 이리 무거운 짐 벗어놓고 떠나시다니요/ 이 짐을 지고 버티신 세월/ 억장이 무너지고 넋장이 부서집니다/ 구멍이란 구멍에 목숨 들이대시고/ 바람이란 바람에 맨가슴 비비시어/ 팔 남매 하늘을 떠받치신 어머니,/ 당신 칠 십 평생 동안의 삶의 무게가/ 마지막 잡은 손에 전류처럼 흐립니다/ 당신 칠 십 평생 동안에 열린 산과 들의 숨소리가/ 마지막 포옹에 화인처럼 박힙니다/ 얘야, 나는 이제 너의 담벼락이 아니다/ 나는 네가 머물 반석이 아니다/ 흘러라/ 내가 놓은 징검다리 밟고 가거라/ 뒤돌아보는 것은 길이 아니여/ 다만 단정하게 눈감으신 어머니/ 아흐,/ 우리 살아생전 허물과 죄악을/ 당신 품 속에 슬몃 밀어 넣고/ 베옷 한 벌로 가리워드립니다/ 그래도 마다 않고 길 뜨시는/ 어머니....//
유채꽃밭을 지나며 / 고정희
어머니, 이제 더는 말이 없으신/ 어머니/ 당신의 시신을 뒷동산 솔밭에 묻고/ 제 가슴에도 비로소 둥긋한 봉분 한구 솟아버린 채/ 서른아홉의 짐을 끌고 고향을 하직하던 날/ 소리나지 않게 울며/ 대문 밖에 서 계시는 어머니와 손 흔들던 날/ 저산리 모퉁이를 돌아서던 제 시야에/ 오늘처럼/ 눈부시게 흔들리는 유채꽃밭을 보았습니다/ 백야리를 지나고 배드레재 지날 동안/ 저를 따라오던 유채꽃밭에는/ 호랑나비 노랑나비 훨훨 날아들어/ 이 세상의 적멸을 쓰러뜨리며/ 찬란한 화관을 들어올리고 있었습니다/ 제발 가슴속의 봉분을 버려라/ 찾아오면 떠나갈 때가 있고/ 머물렀으면 일어설 때가 있나니/ 사람은 순서가 다를 뿐이다/ 유채꽃밭 속으로 걸어가던 어머니/ 그날처럼 오늘도/ 산천솔기마다 유채꽃 흐드러져/ 무겁고 막막한 슬픔을 쓰러뜨리며/ 이 세상의 적멸 끝으로/ 아름다운 하늘자락 흘러가고 있습니다/ 따스한 봄햇살 따라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집 / 고정희
고향집 떠난 지 십수 년 흘러 어머니, 스무 번도 더 이사짐을 꾸린 뒤 가상하게도 이 땅에 제집이 마련되었습니다 경기도 안산에 마련한 이 집, 서른일곱의 나이에 가진 이 집, 열쇠를 가진 지 두 해가 넘도록 아직 변변한 집들이 한번 못하고 동당거려온 이 집에 어머니, 오늘은 크낙한 고요와 청명이 찾아오고, 구석구석 청소를 끝낸 후 저 들판 마주하여 마음을 비워내니, 간절한 사람, 어머니가 이 집에 들어서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가 이 집을 돌아보는 꿈을 꿉니다// 공부방 둘러보고 이부저리 만져보고 유리창 활짝 열어 햇빛 들여오시며 이제 네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해거름녘 정물처럼 웃으시는 당신, 그 얼굴 그리워 몸서리 칩니다 그 얼굴 보고 싶어 가슴 두근거립니다// 왜 그닥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불현듯 상경하신 지난 가을, 얘야, 이승길 마지막 나들이다 네가 사는 문지방 넘어 보고 싶구나 왜 단호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바쁘다 매정하게 돌아서는 저에게 그냥 탈진한 사람처럼 손 흔들며 그래 내년 봄에 다시오마 해놓고선 정작 꽃삼월엔 아주 가시다니요 이게 살아 있는 날들의 아둔함인가 싶어 하염없는 눈물만 못외 되어 박힙니다//
군무(群舞) / 고정희
벗이여/말갛게 개인 하늘/ 패랭이, 패랭이 꽃 수천 송이/ 고개 댕겅 부러지며 흩어지는 오월/ 개나리 수백 그루/ 밑둥 싹둥 잘리워 길바닥에 짓밟히는 오월/ 백장미 지천으로 다발로 묶이고/ 푸리지아 수천 송이 아름으로 묶이어/동·서·남·북으로 실려 가면서/ 죽은 목숨이에요 죽은 목숨이에요 윙크하는 오월// 오월의 벗이여 너는 듣는가/ 쑥국새 눈물 같은 남도 판소리/ 아지랭이 가득한 한양 천리길 타고/ 휘몰이 장단으로 넘어오누나/ 어랑어랑 어화 넘어오누나/ 단몰이 장단으로 한강 허리 쿡 치르며/ <어찌하여 하늘은 이리도 푸른고/ 어찌하여 산천은 이리도 적막한고/ 어찌하여 우리 사람 한번 가면 안 오는고>/ 유채밭에 샛노란 부홧 뜬 얼굴들.// 오 벗이여/ 꽃 지는 오월은 잔인하여라/ 달맞이꽃 지는 오월 잔인하여라/ 해맞이꽃 지는 오월 잔인하여라/ 개망초꽃 지는 오월 잔인하여라/ 온갖 꽃 꺾이다 꺾이다 지는/ 오월 황혼 무렵은 어지러워라//
날개 / 고정희
생일선물을 사러 인사동에 갔습니다/ 안개비 자욱한 그 거리에서/ 삼천도의 뜨거운 불 기운에 구워내고/ 삼천도의 냉정한 이성에 다듬어 낸/ 분청들국 화병을 골랐습니다/ 일월성신 술잔 같은 이 화병에/ 내 목숨의 꽃을 꽂을까, 아니면/ 개마고원 바람 소릴 매달아 놓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장백산 천지연 물소리 풀어/ 만주 대륙 하늘까지 어리게 할까/ 가까이서 만져 보고/ 덜어져서 바라보고/ 위아래로 눈인두 질하는 내게/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지요/ 손님은 돈으로 선물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군요/ 이 장사 삼십 년에/ 마음의 선물을 포장하기란/ 그냥 줘도 아깝지 않답니다/ 도대체 그분은 얼마나 행복하죠?/ 뭘요.../ 마음으로 치장한들 흡족하지 않답니다/ 이 분청 화병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 선물을 타고 날아야 하는데/ 이 선물이 그의 가슴에/ 돌이 되어 박히면 난 어쩌죠?//
서울 사랑 -침묵에 대하여 / 고정희
다 평안하신지 잠잠한 오월/ 다 무고하신지 적막강산 오월/ 나 또한 단잠으로 살오른 오월에는/ 왜 이리 고향이 마음에 걸리는지/ 왜 이리 해남이 목젖에 걸리는지/ 다북솔밭 어디서나 철쭉꽃 흐드기고/ 백운대 어디서나 산목련 어지러운 오월에는/ 서울이 왜 이리 거대한 침묵인지/ 서울이 왜이리 조그만 술집인지/ 봄비에 젖어 눕는 수유리 숲에서는/ 나 또한 한 장의 한지로 젖어 누워/ 안익태의 코리안 판타지를 걸어 놓고/ 그것을 고향의 함성이라 이름한다/ 그것을 고향의 부름이라 이름한다/ 그것을 고향의 눈물이라 불러본다/ 그것을 고향의 脈이라 불러 본다/ 뿌리 있는 것들만 성난 오월에는/ 뿌리 있는 것들만 꽃지는 오월에는/ 바람이 따다 버린 병든 이파리를 보며/ 그것을 우리의 말이라 이름한다/ 그것을 우리의 믿음이라 불러 본다/ 그거을 우리의 사랑이라 불러 본다/ 그것을 우리의 침묵이라 불러 본다/ 바람이 몰고 가는 푸른 가랑잎을 보며/ 그것을 서울의 꽃이라 불러 본다/ 그것을 서울의 뿌리라 불러 본다/ 그것을 서울의 환상이라 불러 본다/ 다 잠드셨는지 어두운 오월/ 다 향복하신지 문 닫는 오월/ 병든 이파리처럼 말없는 오월에는/ 푸른 가랑잎처럼 떠나가는 오월에는/ 왜 이리 고향이 갈 수 없는 땅인지/ 왜 이리 고향이 신화보다 슬픈지//
서울 사랑 -절망에 대하여 / 고정희
황혼 무렵이었지/ 내 외로움만큼이나 흰/ 망초꽃 한아름을 꺾어 들고 와/ 하느님을 가진 내 희망이/ 이물질처럼 징그럽다고 네가 말했을 때/ 나는 쓸쓸히 쓸쓸히 웃었지/ 조용한 밤이면/ 물먹은 솜으로 나를 적시는/ 내 오장육부 속의 어둠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라서/ 한기 드는 사람처럼 나는 웃었지/ 영등포나 서대문이나 전라도/ 컴컴한 한반도 구석진 창틀마다/ 축축하게 젖어 펄럭이는/ 내 하느님의 눈물과 탄식을/ 세 치 혀로 그려낼 수는 없는 것이라서/ 그냥 담담하게 전등을 켰지/ 전등불 아래 마주 선 너와 나/ 30대의 불안과 외로움 너머로/ 유산없는 한 시대가 저물고 있었지/ 그러나 친구여, 나는 오늘밤/ 오만한 절망으로 똘똘 뭉쳐진/ 한 사내의 술잔 앞에서/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를/ 다시 쓸쓸하게 새김질하면서/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도/ 토악질하듯 음미하면서, 오직/ 내 희망의 여린 부분과/ 네 절망의 질긴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맞닿기를 바랐다/ 아프리카나 베이루트나 방글라데시/ 우울한 이 세계 후미진 나라마다/ 풍족한 고통으로 덮이시는/ 내 하느님의 언약과 부르심을/ 우리들 한평생으로 잴 수는 없는 것이라서, 다만/ 이 나라의 어둡고 서러운 뿌리와/ 저 나라의 깊고 광활한 소망이/ 한몸의 혈관으로 통하기를 바랐다//
관계 /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 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 고정희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새벽에 당신 사는 집으로 갑니다./ 깨끗한 바람에 옷깃을 부풀리며/ 고개를 수그러뜨리고 말없이 걷는 동안/ 나는 생각합니다./ 어제 부친 편지는 잘 도착되었을까/ 첫 줄에서 끝 줄까지 불편함은 없었을까/ 아직도 문은 열어두지 않았을까/ 아예 열쇠 수리공을 부를까/ 아니야, 그건 일종의 폭력이야/ 새벽에 어울리는 단정한 말들만이/ 내가 그에게 매달리는 희망인가?/ 신은 그 희망으로 목걸이를 약속하셨지/ 눈물로 혼을 씻는 자에게만 주시는 목걸이/ 아침이슬이 몸에 오싹하도록 걷고 또 걸어/ 나는 당신 집 앞에 발걸음을 멈춥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문은 굳게 닫겨 있습니다./ 삼백여든아홉 번째 부자를 누르지만/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습니다./ 품속에 간직한 초설 같은 편지 한 장/ 문틈에 꽂아놓고 하늘을 봅니다.//
시인 / 고정희
그대 눈썹 밑에 흐르는/ 미시시피 물안개에 사흘을 넋잃다/ 그것을 가지면 밥이 되고/ 갖지 않으면 돌이 된다//
그대 생각 / 고정희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가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그대 생각 / 고정희
아침에 오 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저녁에는 십 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꿈길에서 십 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꿈 깨고 오십 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무심함쯤으로 하늘을 건너가자/ 바람처럼 부드럽게 그대를 지나가자/ 풀꽃으로 도장 찍고/ 한달음에 일주일쯤 달려가지만// 내가 내 마음 들여다보는 사이/ 나는 다시 석 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하늘에 쓰네 / 고정희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 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 편지를 쓰고/ 허파에 숭숭한 외로움으로는/ 그대 그립다 안부 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 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오는 날은 비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히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강물 -편지1 / 고정희
푸른 악기처럼 내 마음 울어도/ 너는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암울한 침묵이 반짝이는 강변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종일/ 정결법 논쟁으로 술잔을 비우고// 너에게로 가는 막배를 놓쳐버린 나는/ 푸른 풀밭,/ 마지막 낙조에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이름과 비구상의 시간 위에/ 쓰라린 마음 각을 떠 널다가/ 두 눈 가득 고이는 눈물/ 떠나가는 강물에 섞어 보냈다//
不在 -편지2 / 고정희
너의 이름 가만히 불러보는 날은/ 창 너머 서산마루 어디에선가/ 퉁소 소리 한가닥 떠서 울고/ 너의 이름 애태우며 잠재우는 밤에는/ 나의 꿈속 어디에선가/ 일만의 장고 소리/ 일천의 징소리가 울었다// 너의 이름 북서풍에 날려 보내면/ 벼포기 우거진 들판 가득/ 어화넘차 어화넘차/ 상여 소리 떠가고/ 너의 이름 뱃고동에 실어보내고 나면/ 내 사지 핏줄 속에 떠도는 얼음조각/ 두 대의 레코드 소리로 울었다//
이별 -편지3 / 고정희
새벽 다섯시면/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드맑게 넘치다가/ 아침 나그네 목축여주고/ 머나먼 마을로 떠나고 있는 사람/ 머나먼 마을로 떠나다가/ 인천 만석동이나 온양에 이르러/ 한많은 사람들 발을 적시기도 하고/ 어린 물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거대한 들판을 가로질러/ 까마득한 포구로 떠나고 있는 사람// 떠날 수 없는 것들 뒤에 두고/ 바람처럼 깃발처럼 떠나고 있는 사람/ 아흐, 떠나면서 떠나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
빛 -편지5 / 고정희
너를 내 가슴에 들여앉히면/ 너는 나의 빛으로 와서/ 그 빛만큼 큰 그늘을 남긴다/ 그늘에 서 있는 사람/ 아벨이여/ 내가 빛과 사랑하는 동안/ 그늘을 지고 가는 아벨이여/ 너의 우울한 숙명/ 단 하나 너마저 놔야 하느냐?//
고백 -편지6 / 고정희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오늘 같은 날 -편지7 / 고정희
솔바람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무한천공 허공에 홀로 떠서/ 허공의 빛깔로 비산비야 떠돌다가/ 협곡의 바위 틈에 잠들기도 하고/ 들국 위의 햇살에 섞이기도 하고/ 낙락장송 그늘에서 휘파람을 불다가/ 시골학교 운동회날, 만국기 흔드는 선들바람이거나/ 원귀들 호리는 거문고 가락이 되어/ 시월 향제 들판에 흘렀으면 하지요// 장작불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아득한 길목의 실개천이 되었다가/ 눈부신 슬픔의 강물도 되었다가/ 저승 같은 추위가 온땅에 넘치는 날/ 얼음장 밑으로 흘러들어가/ 어둡고 외로운 당신 가슴에/ 한삼백 년 꺼지잖을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랑의 '사리'로 죽었으면 하지요//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편지9 / 고정희
고요하여라/ 너를 내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 바다 오동도 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네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편지10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편지11 / 고정희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끄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의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가의 잡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뿐,/ 문 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 밖에는 내가 오래 서 있으므로/ 말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술강 이루니/ 아뿔사, 내 슬픔 저리하다 이름했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아마 모레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열리지 않은 것은 문이 아니니/ 닫힌 문으로 나갈 것입니다//
겨울 노래 -편지12 / 고정희
툴툴 털어버릴 수 있다면/ 내 핏줄과 사지 속에 비로소/ 집을 짓기 시작한 네 정체를/ 단번에 뿌리뽑아버릴 수만 있다면/ 나의 오늘에서 내일로, 급기야는/ 내일에서 모레로 무단출입하기 시작한/ 이 건방진 광기를 와르르 쏟아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들 소박한 새 날의 시작은/ 얼마나 편안하며 또 눈부시랴// 눈물겹구나 우리 둘의 용기,/ 여수에 가 보면 동동 오동도로 떠 있고/ 충무항으로 가면 다도해 섬으로 통통통 다가오고/ 마산으로 가면 토산 미더덕찜이 되어/ 내 창자 깊숙이 들어앉는 그대여/ 나보다 먼저 와 기다리는 그대여// 여느 지붕마다 겨울은 깊어/ 북한산 능선마다 함박눈 소복하니/ 이제는 설산으로 마주앉는 그대여,/ 그렇구나/ 서울땅 덮고 남을 저 눈이/ 그대 여생 덮고 남을 내 그리움/ 그대 하늘 덮고 남을 내 상처라 해도/ 우리 둘의 용기로 떠받치는 세상/ 나는 이미 닻줄을 풀었구나//
편지 / 고정희
새벽 다섯시면/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드맑게 넘치다가/ 아침 나그네 목 축여주고/ 머나먼 마을로 떠나고 있는 사람// 머나먼 마을로 떠나다가/ 인천 만석동이나 온양에 이르러/ 한 많은 사람들 발을 적시기도 하고/ 어린 물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거대한 들판을 가로질러/ 까마득한 포구로 떠나고 있는 사람// 떠날 수 없는 것들 뒤에 두고/ 바람처럼 깃발처럼 떠나고 있는 사람// 아흐, 떠나면서 떠나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
가을 편지 /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
왼손가락으로 쓰는 편지 / 고정희
무정한 이여, 하고 소리쳐 부르면 앞산이 그 소리 삼켜 버리고 다시 무정한 이여, 하고/ 부르면 뒷산이 그 소리 삼켜 버리고 정말 무정한 이여, 하고 먼 산 향하여 토악질하면 안산/ 에 주룩비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일시에 안산에 적시는 주룩비 과천을 적시고 군포를 적시고 포일리를 적시는 주룩비 끝내/ 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주룩비, 내 생의 목마름 조금 적실 수도 있으련만, 아아, 주룩비, 잠/ 들지 못하는 것들 품어 함께 노래할 수도 있으련만, 외로움의 우산 밖으로 밖으로 미끄러져/ 내려 빠르게 떠나가는 물줄기는 꼭 당신 뒷모습 같아 나는 서러움에 목이 메이고 어디선가/ 소쩍새 우는 소리로 사랑의 축대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왼손가락으로 쓰는 편지 / 고정희
그대를 만나고 돌아오다가/ 안양쯤에 와서 내가 꼭 울게 됩니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그대 모습을/ 몇 번이고 천천히 음미하노라면/ 작별하는 뒷모습 그대 어깨쭉지에/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독자적인 외로움과 추위가 선명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대 독자적인 외로움과 추위가/ 안양쯤에 와서/ 더운 내 가슴에/ 하염없는 설화로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대 독자적인 외로움과 추위를 마주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처절합니다/ 되돌아가기엔 나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앞으로 나가기엔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대 땅에 뿌려놓았습니다// 막막궁산 같은 저 어둠 어디쯤서/ 내 뿌린 씨앗들이 꽃피게 될른지요/ 간담이 서늘한 저 외롬 어디쯤서/ 부드러운 봄바람 나부끼게 될른지요// 기우는 달님이 집 앞까지 따라와/ 안심하라, 안심하라, 쓰다듬는 밤/ 열쇠를 끄르며 나는 웃고 맙니다/ 눈물로 녹지 않을 설화는 없다!!/ 불로 녹지 않을 추위는 없다//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 고정희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따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독신자 / 고정희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 애정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그러므로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모든 영혼은 풀잎 위의 이슬과 같은 것,/ 풀도 이슬도 우주로 돌아가, 돌아가/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어라/ 잊어야 할까봐/ 나는 너를 잊어야 할까봐/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없으니까/ 하느님 보시기에 마땅합니까?/ 오 하느님/ 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 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저 칼날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내 두 눈을 감기신다//
디아스포라 -환상가에게 / 고정희
황제의 굳건한 안정을 믿으며/ 죽음의 집으로 돌아와/ 사방 넉 자짜리 자유의 벽지로/ 아방궁 같은 무덤을 도배했어/ 무덤은 언제나 밝고 아늑하네/ 황제가 내려 주신 모닥불에 둘러앉아/ 야구 경기와 권투 시합을 보며/ 입이 아프도록 승리를 신봉하고/ 머리맡에 예비된 숙면의 술잔으로/ 보다 깊이 잠드는 최면을 거네/ 황제는 꿈 속에서 빙그레 웃으시니/ 우리의 충정은 가이 눈물겹게/ 5호 활자 속에서 <예언>도 잠드시니/ 그제는 고향을 팔아 버렸고/ 어제는 의령을 잊어버렸고/ 오늘은 공약을 삼켜 버려야 하네/ 새 법이 오리라 믿어야 하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또 하나의/ 튼튼하고 아름다운 무덤을 건축하며/ 밤을 낮이라 어둠을 빛이라 이름함으로써/ <새 시대는 열렸다> 믿게 되었네// 오 우리들의 두 귀는 운다네/ 암호로 떠도는 이 시대의 언어를/ 망각으로 망각으로 망각으로 흘려 보내고/ 이 땅의 젊은은 잠시 전율하지만/ 그것을 잊는 데는 두 주일이 안 걸린다네/ 애오라지 밝고 아늑한 무덤의 평화/ 사방 넉 자짜리 미래를 의지하여/ 탐스런 꽃봉이들 영그는 중이니/ 황제는 꿈속에서 빙그레 웃으시고/ 우리들의 나날은 가이 고요하네//
디아스포라 -슬픔에게 / 고정희
흐리고 어두운 날/ 남산에 우뚝 선 해방촌 교회당은/ 날벼락을 맞아 검게 울고/ 무더위로 가라앉은 내 몸 속에서는/ 그리운 신호처럼 전신주가 운다/ 끝간데 없는 곳으로부터/ 예감처럼 달려오는 그 소리는/ 한순간 고요히 물로 풀어지다가/ 불로 일어서다가/ 분노가 되다가/ 이내 다시/ 내 고향 해남의 상여 소리가 되어/ 저승으로 뻗은 전신주를 따라 나간다/ 우리의 침묵 깊은 곳에서/ 민들레 한 송이/ 서늘하게 흔들리는 오후,/ 민들레로 떠도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디어/ 칼 쓴 예수가 갈짓자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 고정희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파도타기 / 고정희
둥근 젖무덤에 보름달 떠올라 하룻밤 사무치자 하룻밤 사무치자/ 팔 벌린 그 밤에 동쪽 샘이 깊은 물에 보름달 주저앉은 그 밤에...// 느닷없는 부드러움이 두 가슴을 옥죄이던 그 밤에/ 깊고 푸른 밤이 불을 켜던 그 밤에/ 사십도의 강물이 범람하던 그 밤에....// 불꽃춤 찬란하던 그 밤에/ 서해안의 파도소리 하얗게 부서지던 그 밤에/ 물미역 아름답게 흔들리던 그 밤에/ 별들이 내려와 드러눕던 그 밤에...// 새벽 달빛 호호탕탕 넘어 가던 그 밤에/ 아아 아홉가지 봉황깃털 창궁에 자욱한 그 밤에/ 그대와 나 수미산 꼭대기에 떠올라 우주와 교신하던 그 밤에....//
사십대 /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들국 / 고정희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친구가/ 경기도 들녘에서 꺾어온/ 들국 한아름을 꽂아놓고/ 불현듯 핑그르르 눈물이 돈다/ 그것은 시골에 그냥 핀 들국이 아니라/ 고향을 다녀올 때 본/ 어머니의 망연한 눈빛 같기도 하고/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수유리에서 해남쯤으로 떠도는/ 못다 핀 망령들의 이름 같기도 하고/ 좀더 길게 음미하노라면/ 서른아홉 살의 목숨을 거두고/ 두 마리, 빈곤을 상징하는 노새에 끌려/ 아틀랜타 시가지를 빠져나가던/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를 따르던 흑인영가 같기도 하고//
그해 가을 / 고정희
설흔두 살의 늦가을/ 징그러워라/ 설흔두 살 여자의 독기와 슬픔으로/ 설흔두 해 뿌리 내린 머리를 깎았다/ 나치 수용소의 유대 여자들처럼/ 나는 내 땅에서 삭발했었다/ 자수성가 세대의 아픔을 헤집고/ 즈믄 강물 휘도는 소리/ 간간이 들으면서/ 유대 여자처럼 거울을 보았다/ 파르스름한 벌거숭이산 위에/ 튼튼한 원목들 쿵쿵 쓰러지고/ 거센 마파람 맨발로 몰려와/ 열두 번도 더 추위를 덮었다/ 모자를 쓰고 거리로 나왔다/ 모자 속에서 너를 바라보았을 때/ 세상은 어김없는 빈집이었다/ 허천들린 외로움의 세상을/ 타는 목젖으로 벌컥벌컥 들이키며/ 유대 여자처럼 나는 걸었다/ (하느님도 침묵하신 잘 익은 땅이여)/ 껄끄러운 입안에서 아직/ 단내가 풍기지만 그래도/ 푸른 신호등이 잘 보이는 두 눈에/ 철철 넘치는 총명한 눈물,// 설흔두 해 뿌리 자르고 나서도/ 그리움 하나만은 끝내지 못했다/ 종말론적 벼랑에서 너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이제 어둠의 꽃이었다/ 단발령의 격문이었다.//
가을을 보내며 / 고정희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한 잔에서 목 축이지 못하는 오늘은/ 우리들 겸허한 허리를 구부려/ 서로의 잔에 그리움을 붓자/ 서로의 잔이 넘치게 하자//
꿈꾸는 가을 노래 / 고정희
들녘에 고개 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 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열어놓으니/ 만리에 용솟는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겨울 사랑 / 고정희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 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상처 / 고정희
당신이 조금만 더 친절했더라면 저 쓸쓸한 황야의 바람을 잠 재울 수 있었을 것 입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가슴을 열었더라면 저 산등성이 날아오르는 새들이 저무는 하늘에 신의 악/ 보를 연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더라면/ 세상은 한발짝씩 천국 쪽으로 운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벌써 까마득한 옛날,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의 기쁨과 편안한 강기슭과 아름다운 섬의 일박/ 이일이 또다시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합니다. 우리들이 함께 춤추던 밤의 힘찬 포옹과 무심/ 한 새벽 달빛과 무정한 세월 뒤에 속절없이 피고지는 산꽃 들꽃이 또다시 온몸을 들썩거리/ 게 합니다.// 아아 자나깨나 내 머리맡에 너무 큰 하늘이 내려와 있어 밤마다 서슬을 세운 별들이 명멸/ 하고 적막한 산천 처마 밑에서 노여운 내가 마녀처럼 울고 있습니다.//
강가에서 / 고정희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둑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쪽 둑 떼어/ 가거라 가거라 실어 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 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여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북한강 기슭에서 / 고정희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 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로의 등을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서 등을 기대지 못하고 돌아/ 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도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건너지 못할 강 하나/ 를 사이에 두고 미류나무잎새처럼 안타까이 손 흔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도 북한강이 흐르/ 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상에 안식이 깃드는 황혼녘이면 두 눈에 흐르는 강물들 모여 구만리 아득한 뱃길을 트고/ 깊으나 깊은 수심을 만들어 그리운 이름들 별빛으로 흔들리게 하고 끝끝내 못한 이야기들 자/ 욱한 물안개로 피워올리는북한강 기슭에서, 사랑하는 이여, 내 생에 적셔 줄 가장 큰 강물/ 또한 당신 두 눈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둥벌거숭이 노래 1 / 고정희
지도에도 없는 숲길을 갑니다/ 태양이 호수에서 금발을 흔들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바하의 악보를 오솔길에 깔았더니/ 무반주 첼로의 서늘한 그림자가/ 지구의 머리칼에 고요히 걸립니다/ 내가 당도할 문은 아직 멀었습니다/ 숲에 별 뜨고/ 바람 부는 밤/ 모든 언어에 빗장을 지른 뒤/ 찔레꽃 향기가 심장을 가릅니다/ 어둠뿐인 하늘에 당신을 그립니다/ 오늘밤은 이것으로 따뜻합니다//
천둥벌거승이 노래 2 / 고정희
새벽 달빛에 덮인/ 아득한 꿈 하나 일으켜세우고/ 어두운 강줄기 흐르는 곳에/ 삼십 년 지기인 바람의 끈을 풀어/ 평화주의자처럼,/ 갈잎 돛단배를 띄웠습니다/ 우주가 주저앉는 저 물굽이/ 먼 곳에 가라앉는 그대 음성,/ 그대 음성 속에는 늘/ 물망초 꽃벌판 희게 흔들리고/ 그대 음성 속에는 늘/ 미루나무 숲이 울고 음악이 부서지고/ 그대 음성 속에는 늘/ 폭풍우치던 밤의 어머니 달려와/ 갈잎 돛단배 위에 실은 내 생애/ 어여 가, 어여 가/ 손 흔들어줍니다//
천둥벌거숭이 노래 4 / 고정희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지렛대 하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운명의 바위를 제끼고/ 시간의 암초를 뒤엎어/ 새벽길 징검다리 볼가내는/ 지렛대,/ 사람은 누구나 혈관 속에/ 묵시의 강 하나 돌고 있는 법이다/ 거꾸로 북받치는 분노의 불을 삭이고/ 어둡게 뛰는 피 맑게 걸러내어/ 천체의 광명을 발산하는 초음파의/ 강, 가앙//
* 볼가내는: '발라내는'의 경상도 방언
천둥벌거숭이 노래 5 / 고정희
여의도 한강물에 너 떠나간다/ 눈부신 너 떠나간다/ 하느님도 모르시는 이 매혹의 이별/ 내 청춘에 내리꽂는 칼,/ 전대미문의 길이 뒤따라가고/ 전대미문의 슬픔이 반짝이며 뒤따라가고/ 해오라기 황망히 날아가는 날/ 울대까지 스며드는 빙산을 위하여/ 열두 대의 첼로가 운다//
천둥벌거승이 노래 6 / 고정희
한곳으로 한곳으로 달려가던 끈/ 탁 트인 하늘에 겁 없이 놔주고/ 흐르는 바람결에 아쉬움도 놔주고/ 자유가 서러워 서러워 울었지요/ 풀잎 뜯어 날리며 울었지요/ 내 쪽으로 부는 바람 있으리라 믿으면서/ 네 쪽으로 가는 길 있으리라 믿으면서/ 귀뚜라미 우는 쪽에/ 사랑을 묻었지요//
천둥벌거숭이 노래 10 /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열리던 밤의 모닥불 옆에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평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지리산의 봄 1 -뱀사골에서 쓴 편지/ 고정희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 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 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레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 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 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 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 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지리산의 봄 4 - 세석고원을 넘으며 / 고정희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 아래 산맥들을 굽어보노라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산머리에 어리는 기다림이 푸르러/ 천벌처럼 적막한 고사목 숲에서/ 무진벌 들바람이 목메어 울고 있다/ 나는 다시 구불거리고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막막한 생애를 넘어/ 용솟는 사랑을 넘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 빙산에/ 쩍쩍 금가는 소리 들으며/ 자운영꽃 가득한 고향의 들판에 당도해야 한다/ 눈물겨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봄비 /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눈물샘에 관한 몇 가지 고백 / 고정희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종기를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뇌졸중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자궁암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섬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풀잎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북풍한설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수중고혼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적막강산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흉곽 진동을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1990 소월시문학상 수상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 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 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행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 둘 수는 없습니다.//
더 먼저 더 오래 / 고정희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은 절망 중에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 부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서 솟은 사랑의 일곱가지 무지개// 이 세상 끝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베틀 노래 / 고정희 내 땀의 한 방울도 날줄에 스며 그대 영혼 감싸기에 따뜻하거라 고즈너기 풀어감은 고통의 실꾸리 한평생 오가는 만남의 잉아 우리님 생각과 실실이 짜여 새벽바람 막아줄 실비단이거라 기다리마 기다리마 기다리마 하루에도 열두 번 끊기는 실이여 무작정 풀리기엔 무서운 맘이거든 단번에 끝내기엔 아쉬운 밤이거든 허천들린 사랑가 평생 동안 불러주마 기다리다 흘린 눈물 모조리 스며 그대 아픔 덮어주는 비단길이거라 |
따뜻한 동행 / 고정희
해거름녘 쓸쓸한 사람들과 흐르던/ 따뜻한 강물이 내게로 왔네/ 봄 눈 파릇파릇한 숲길을 지나/ 아득한 강물이 내게로 왔네// 이십도의 따뜻하고 해맑은 강물과/ 이십도의 서늘하고 아득한 강물이/ 서로 겹쳐 흐르며 온누리 껴안으며/ 삼라의 뜻을 돌아 내게로 왔네// 사흘 낮 사흘 밤 잔잔한 강물 속에/ 어여쁜 숭어떼 미끄럽게 춤추고/ 부드러운 물미역과 수초 사이에서/ 적막한 날들의 수문이 열렸네// 늦게 뜬 별 둘이 살속에 박혔네/ 달빛이 내려와 이불로 덮혔네/ 저물 무렵 머나먼 고향으로 흐르던/ 따뜻한 강물이 내게, 내게로 왔네/ 외로운 사람들의 낮과 밤 지나/ 기나긴 강물이 내게, 내게로 왔네// 사십도의 따뜻하고 드맑은 강물 위에/ 열 두 대의 가야금소리 깃들고/ 사십도의 서늘하고 아득한 강물 위에/ 스물 네 대의 바라춤이 실렸네/ 그 위에 우주의 동행이 겹쳤네.//
동행 / 고정희
스산한 불빛들로 가득한/ 가리봉동의 밤거리를 걸으며/ 동행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음산한 어둠으로 가득한/ 구로동의 골목길을 더듬으며/ 저무는 우리 삶 어깨동무해 주는/ 동행의 기쁜 날 생각했습니다// 가리봉동에 엎드려 웃는 여자들이/ 지폐를 헤아리는 남자들의 발 아래서/ 여름날 수풀처럼 무성했다가/ 가을날 단풍처럼 무르익었다가/ 겨울날 눈밭처럼 휘날렸다가/ 진구렁 가랑잎 되어 뒹구는 길 돌아오며/ 동행하는 무서움 생각했습니다// 유방에 불을 켠 여자들이/ 동해안처럼 줄선 남자들의 발 아래서/ 실크로드의 황혼이 되었다가/ 허구한 날 강태공의 월척이 되었다가/ 홍등가 이무기의 횟감이 되었다가/ 더는 내려갈 수 없는 곳, 거문도/ 거문도로 내려가는 길 돌아오며/ 동행하는 분노를 생각했습니다// 오 거문도 해안에서 우는 여자들이/ 한반도의 썩은 물로 철썩이다가/ 한반도의 쓰레기로 솟구치다가/ 그러나, 그러나/ 세상의 더러움 다 걸러내고/ 푸른 해일 일으키며 달려오는 곳에서/ 깊은 바다 이끌며 돌아오는 포구에서/ 동행의 벅찬 힘 생각했습니다/ 동행의 소중함 생각했습니다//
포옹 / 고정희
사랑하는 사람이여 세모난 사람이나 네모난 사람이나/ 둥근 사람이나 제각기의 영혼 속에 촛불 하나씩 타오르는/ 이유 올리브 꽃잎으로 뚝뚝 지는 밤입니다//
다시 수유리에서 / 고정희
이제는 수유리를 떠나야 한다고/ 은밀히 내 심중에게 말하고/ 은밀히 수유리의 바람에게도 말했습니다.// 이제는 수유리에서 자유로와야 한다고/ 한국신학대학 푸른 청솔에게 말하고/ 4년 동안 조기가 게양되었던/ 수유리 하늘에게도 귀띔했습니다.// 이제 수유리는 수유리가 아니라고/ 경기도 양산리를 향해서 한번 말하고/ 찢어진 우리의 교기를 향해서도 한번 크게 외쳤습니다.// 연희동에 13평 전세아파트를 계약하고/ 길일을 따져 이삿날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친구여/ 나는 수유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계약금을 날리고/ 아파트의 자유를 날려버리면서도/ 나는 수유리의 흡인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개인주택 지하 1층에 살면서/ 에프엠 수신이 불가능하다 해도/ 하루 세 시간씩 출퇴근길에 파김치로 흔들린다 해도/ 수유리에 묻는 내 꿈을 버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수유리에 뿌리내린 이 나라의 기원이/ 눈부시게 휘날리는 날을 위하여/ 뜻맞은 우리 몇사람/ 수유리에 모여 앉아/ 뜨겁고 뭉클한 믿음을 포개며/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함을 알았습니다.//
사랑법 첫째 /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노여운 사랑 / 고정희
가을바람과 옷깃을 스친 뒤 세상이 지루하여 낮술을/ 마셨습니다 쨍그렁 소리가 나는 빈 술잔에 칸나꽃대 같은/ 노여움을 따라 부으며 꿈에 본 수미산도 잠기게 하고 날개/ 달린 낮달도 띄워 당신 생각 단풍으로 아롱지도록 술잔을/ 채우고 또 채웠습니다//
전보 / 고정희
그대 이름 목젖에 아프게 걸린 날은/ 물 한잔에도 어질머리 실리고/ 술 한잔에도 토악질했다/ 먼 산 향하여, 으악으악/ 밤 깊도록 토악질했다//
이별노래 / 고정희
한곳으로 한곳으로 달려가던 끈/ 탁 트인 하늘에 겁없이 놔주고/ 흐르는 바람결에 아쉬움도 놔주고/ 자유가 서러워 서러워 울었지요/ 풀잎 뜯어 날리며 울었지요/ 내 쪽으로 부는 바람 있으리라 믿으면서/ 네 쪽으로 가는 길 있으리라 믿으면서/ 귀뚜라미 우는 쪽에/ 사랑을 묻었지요//
묵상 / 고정희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연가 / 고정희
아픈 머리에 열이 가라앉고/ 창마다 환하게 불빛 고이는 저녁/ 겨울 난롯불에 내 혼을 쬐며 고린도전서 13장을 펴면/ 내 진실의 계단 어디쯤서 너는 오고 있는가/ 어둠을 쓰러뜨리며 난롯불은 조금씩 내 피를 뎁히고/ 꿈틀이며 꿈틀이며 타고 있는 글자들// 구름이 가는 곳을 묻고 싶은 황혼쯤/ 엉겅퀴 울타리를 밟고 가는 바람처럼/ 내 안에 서걱이는 한 무더기 공허/ 한 무더기 공허로도 비칠 수 없는 얼굴/ 불심지 휘감아도 살속 캄캄한 어둠 목구멍을 채우네// 지구 가득 부신 햇빛 부려놓고/ 노을을 물들이는 태양이여,/ 산마루 넘어가는 태양이여,/ 눈은 눈으로 구름은 구름으로 떠나고 있을 때/ 나무들 우쭐대는 진종일 바람은 바람으로 만나고 있을 때/ 내 깊은 눈물샘 어디쯤서 물그르매/ 물그르매 번쩍이는 너//
산지기를 노래함 / 고정희
<입산 금지> 팻말 뒤에서/ 시원하게 열린 그대 바라보는 날/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푸르게 우거진 그대 숲속으로/ 무량한 바람 흔적 없이 빨려들고/ 파란 하늘이 둥그렇게 떠오를 때/ 산은 한없이 으쓱해 보였다// 산에서 출렁이는 햇빛과 바람/ 산에서 부서지는 물 소리와 바람 소리/ 산에서 피어나는 밤안개 너머로/ 서서히 짙어지는 불빛, 그래/ 그대는 불빛이었다/ 내가 불빛을 따라가려 했을 때/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조심해, 입산 금지라구>/ 그래----그래----그래/ 푸른 산 푸른 숲에 가리운 그대여/ 그대는 거대한 산에 있으므로/ 흔들릴 뿌리 같은 건 없어야 하지// 그대 뒤로 하고 산을 내려올 때/ 툭 불거진 돌부리에도/ 내 생애 전부가 훅훅 뒤틀렸다/ 캄캄한 밤이었다//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 고정희
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줄을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루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선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기다림 썰어넣고/ 스무 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움 잘라넣고/ 삼 년 묵은 섭섭함/ 오 년 묵은 상처도 뽑아넣고/ 칠 년간 미련이며/ 구 년된 슬픔도 다져넣고/ 참나무숯불에 괄게괄게 달이니,/ 아 사랑의 길눈 밝아지고 있는지/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스무아흐레 동안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신 가슴에 내 목을 묻을 때 / 고정희
아아 당신 가슴에 내 고단함 묻을 때 나는 천국의 사과꽃밭을/ 지나가네 첫 동트는 햇살에 두 팔을 벌리듯 그 맑고 밝은 믿음/ 에 기대어 나는 애틋하고 아련한 추억의 강기슭을 내려가네 닻/ 을 내리는 편안함으로 당신 목이 내 목에 감기고 내 목이 당신/ 목에 감길 때 아아 날개 흰 새떼들 날아올라 천국의 사과꽃밭과/ 수선화 꽃밭에서 사랑의 명주실을 나르는 모습 황홀하네//
히브리전서(傳書) / 고정희
한 사나이가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한 사나이가 언덕을 오르고 한 사나이의 이마에 두 줄기 핏방울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사나이가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오르다 쓰러지고/ 맨살의 등줄기에 매섭고 긴 채찍이/ 수없이 내리치고 있었습니다./ 사나이는 쓰러지고/ 불볕 같은 햇빛 아래 사내는 지쳐 쓰러지고/ 갈릴리 해변은 한없이 적막한 바람에 뒤덮이고 아,// 한 사내가 골고다 언덕에 다시 쓰러지고 있었습니다. 목말라 비틀거리는 사내는 자기 키보다 더 큰 나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골고다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그녀의 한(恨)에 절은 눈물과 가슴을 외면한 채 주검보다 무거운 고독에 짓눌린 마리아 그녀의 폭탄 같은 오열을 외면한 채 사나이는 먼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그 사내는/ 대학을 다닌 적도 없습니다./ 부귀를 누린 자도 아닙니다./ 권력을 가진 적도 없습니다./ 그럴싸한 명사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 가난한 거리와 버림받은 이웃과/ 냄새나는 유대의 거리 그 천한 백성들의/ 눈물과 한숨이 있었을 뿐입니다./ 율법에 두 발 묶인 죄의 사슬로부터/ 무섭도록 외로운 삶의 멍에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뿐인 불쌍한 무리들,/ 동정받을 일밖에 없는 히브리의/ 단 하나 친구인 그리스도는/ 가진 것 없는 당신 주제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줘야만 했습니다./ 처음엔 기적을, 그 다음엔 정신을/ 그 다음엔 영혼을, 그 다음엔 전 생애와 주검까지도/ 죄 많은 유대에게 넘겨줘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부활까지라도 그/ 찢어지게 가난한 히브리에게/ 무더기로 넘겨준 사내, 멋진 사내 예수./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적도 없습니다./ 세도의 가문은 더욱 아니고/ 오직 별 볼일 없는 갈릴리 어촌의 목수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세상 죄 다 짊어지고/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쏟아버린/ 그 사내가 성금요일 오후 세시/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성당의 휘장이 갈라지고,/ 그를 본 영혼들은 한꺼번에 쩍,/ 금이 가고 있었습니다.//
행방불명 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 고정희
무릇 너희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에서 나온 말씀으로 거듭나리라, 수수께끼를 주신 하느님, 우리가 영에서 나온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미사일 핵무기고에서 나오는 살인능력 보유자와 우리들 밥줄을 틀어진 자를 구세주로 받드는 오늘날 이 세상 절반의 살겁과 기아선상의 대하여 어떤 비상정책을 수립하고 계신지요// 한나절을 일한 자나 하루 종일 일한 자나 똑같이 최대 생계비를 지불함이 하늘나라 은총이다 선포하셨건만, 반평생을 뼈빠지게 일한 자나 일년으로 혼빠지게 일한 자나 똑같이 임금을 채불당한 채 밀린 품삯 받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다국적기업 뒤꽁무니 쫓아간 우리 딸들이 임금 대신 똥물을 뒤집어쓰고 울부짖을 때 당신의 말씀은 침묵했습니다// 온갖 제국주의 음모와 죽음의 쓰레기들이 자유와 정의와 평화라는 식품 상표를 달고, 당신의 이름으로, 배고픈 나라의 백성을 향하여 무한대로 수출되고 있는 작금에도 당신의 말씀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아 살인병기를 자처하는 다국적군이 실로 처참하고 참혹하게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땅을 피바다로 싹쓸이할 때도 당신의 말씀은 침묵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미국은 새로운 전쟁시대의 첫 승리자이다” 부시가 오만불손하게 음성을 높일 때,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스무 번씩 기립박수를 칠 때도 당신은 온전히 침묵했습니다// 대답해 주시지요 하느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신지요 세상이 너무 재미없어 쟈니 윤의 쇼 프로그램에서 미국식 웃는 법을 익히고 계십니까, 아니면 힘이 무지 무지 센 나라의 현대판 노예 수출선에 팔려가고 계십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용용 죽겠지 꼭꼭 숨어라 목하 종말론이 생산중인 페르시아 만이나 바빌론의 무기창고에서 재고를 헤아리는 무기 상인들을 격려하고 계십니까? 아니아니 당신의 이름을 교수형에 처한 공산대륙이나 모스끄바 뻬레스뜨로이까 전철 속에 앉아 이단의 풍물을 감상하고 계십니까? 대답해 주시지요 하느님, 당신을 교회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교회의 창고부터 열어야 합니다// 이 곤궁한 시대에/ 교회는 실로 너무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교회는 너무 많은 재물을 가졌고 너무 많은 거짓을 가졌고/ 너무 많은 보태기 십자가를 가졌고/ 너무 많은 권위와 너무 많은 집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파당과 너무 많은 미움과/ 너무 많은 철조망과 벽을 가졌습니다/ 빼앗긴 백성들이 갖지 못한 것을 교회는 다 가졌습니다/ 잘못된 권력이 가진 것을 교회는 다 가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벙어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장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귀머거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침묵으로 번창합니다/ 의인의 변절을 탓하던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옳은 자들이 당신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않는 시대가 오기 전에/ 하느님, 가버나움을 후려치듯 후려지듯/ 교회를 옮음의 땅으로 되돌려/ 참회의 강물이 온갖 살겁의 무기들을 휩쓸어가게 하소서/ 새로운 참소리 태어나게 하소서/ 거기에 창세기의 빛이 있사옵니다 아멘......//
이 시대의 아벨* / 고정희
며칠째 석양이 현해탄 물구비에 불을 뿌리고 있었읍니다./ 이제 막 닻을 내린 거룻배 위에는/ 저승의 뱃사공 칼롱의 은발이/ 석양빛에 두어 번 나-부-끼-더-니, 동서남북/ 금촉으로 부서지며 혼비백산/ 숲에 불을 질렀읍니다./ 으-아, 솔바람 불바람 홀연히 솟아올라/ 둘러친 세상은 넋나간 아름다움/ 넋나간 욕망으로 끓어 오르고 있었읍니다./ 아세아를 건너지른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에 당도한 건 바로/ 이때입니다.// 오그덴 10호는/ 몇 명의 수부들을 바다 속에 처넣고/ 벼락을 때리며 외쳤읍니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안락한 처마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치상에서/ 주린 배 움켜 쥐던 우리들의 아벨/ 우물가에서 혹은 태평 성대 동구 밖에서/ 지친 등 추스르며 한숨짓던 아벨/ 어둠의 골짜기로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믿음의 아들 너 베드로야/ 땅의 아버지 너 요한아/ 밤새껏 은총으로 배부른 가버나움아/ 사시장철 음모뿐인 예루살렘아/ 음탕한 왕족들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야/ 너희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 독야청청 담벼락과 아벨을 바꿨느냐?/ 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 고통을 짊어진 아벨/ 너희 족보를 짊어진 아벨/ 너희 탐욕과 음습한 과거를 등에 진 아벨/ 너희 자유의 멍에로 무거운 아벨/ 너희 사랑가로 재갈물린 아벨/ 일흔 일곱 날 떠돌던 아벨을 보았느냐?/ 아흔 아홉 날 한뎃잠을 청하던 아벨을 보았느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 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물리라/ 지진이 솟구쳐 빗장을 뽑으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 오 불쌍한 아벨/ 외마디 소리마저 빼앗긴 아벨을 위하여/ 나는 너희 식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아방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별장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교회당과 종탑을 엎으리라/ 소돔아 너를 엎으리라/ 고모라야 너를 엎으리라/ 가버나움아 너를 엎으리라/ 예루살렘아 너를 엎으리라/ 천사야 너도 엎으리라/ 깃발을 분지르고 상복을 입히리라/ 생나무 마른 나무 함께 불에 던지고/ 바다더러 산 위로 오르라 하리라/ 산더러 너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울지 않는 종은 입에 칼을 물리고/ 뛰지 않는 말은 등에 창을 받으리/ 날지 않는 새는 뒷축에 밟히리/ 뒷날에 참회는 적당치 못하다/ 너희가 쫓아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어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고 부인한 아벨/ 너희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시치미뗀/ 아벨의 울음 소릴 들었느냐?/ 금동이의 술잔에 아벨의 피가 고이고/ 은소반의 안주에 아벨의 기름 흐르도다/ 촛농이 녹아 흐를 때 아벨이 울고/ 노랫가락 높을 때 아벨이 탄식하도다// 오 불쌍한 아벨을 찾을 때까지/ 나는 이 세상 어디든 달려가/ 너희 잔치상과 보신탕을 엎으리라/ 너희 축복과 토룡탕을 엎으리라/ 너희 개소주와 단잠을 엎으리라/ 돌들이 일어나 옥답을 일구고/ 지진이 솟구쳐 평지 풍파 일으키리라/ 바람더러 주인이라 주인이라 부르리라// 너희의 어둠인 아벨/ 너희의 절망인 아벨/ 너희의 자유인 아벨/ 너희의 멍에인 아벨/ 너희의 표징인 아벨/ 낙원의 열쇠인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그때 한 사내가/ 불 탄 수염을 쥐어뜯으며/ 대지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눈물 흘리는 동안만이라도/ 주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다음날 신문은/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의 대기권을 완전히 떠나갔다고/ 보도했읍니다.//
* 창세기 4장 2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첫아들 카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농부가 되었는데, 형 카인은 아벨에 대한 질투 때문에 아우를 들로 꾀어내어 쳐 죽였다. 이때 야훼께서 이렇게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 1981년 8월 초 한반도에도 상륙한 태풍 이름.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 고정희 -매춘여성의 실태, 구멍 팔아 밥을 먹는 여자이야기
(쑥대머리 장단이 한바탕 지나간 뒤 육십대 여자 나와 아니리조로 사설)// 구멍 팔아 밥을 사는 여자 내력 한 대목// 조선 여자 환갑이믄 세상에 무서운 것 없는 나이라지만/ 내가 오늘날 어떤 여자간디/ 이 풍진 세상에 나와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똥배짱으루/ 사설 한 대목 늘어놓는가 연유를 묻거든/ 세상이 묻는 말에 대답할 것 없는 여자,/ 그러나 세상이 묻는 말에 대답할 것 없는 팔자치고/ 진짜 할 말 없는 인생 못 봤어/ 내가 바로 그런 여자여/ 대저 그런 여자란 어뜬 팔자더냐(장고, 쿵떡)/ 팔자 중에 상기박한 팔자를 타고나서/ 부친 얼굴이 왜놈인지 뙤놈인지 로스케인지/ 국적 없는 난리통 탯줄 잡은 인생이요/ 콩 보리를 분별하고 철든 그날부터/ 가정훈짐 부모훈짐 쐬본 적 없는 인생이요/ 밥데기 애기데기 구박데기로/ 식자마당 밟아본 적 없는 인생이요/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추풍낙엽 동지섣달 긴긴 계절에도/ 거저 주는 밥 한 그릇 못 먹은 인생이라(허, 그래)// 조국 근대화가 나와 무슨 상관이며/ 산업발전 지랄발광 나와 무슨 상관이리/ 의지가지 하나 없는 인생이 서러워/ 모래밭에 혀를 콱 깨물고 죽은들/ 요샛말로 나도 홀로서기 좀 해보자 했을 때/ 아이고 데이고 어머니이/ 수중에 있는 것이 몸밑천뿐이라/ 식모살이도 이제 싫고/ 머슴살이도 이제 싫고/ 애기데게 부엌데기 구박데기 내 싫다,/ 깜깜절벽 같은 줄 하나 잡으니/ 그게 바로 구멍 팔아 밥을 사는 여자 내력이라(허, 좋지)// 내 팔자에 어울리는 말로 뽑자면/ (유식한 분들은 귀 좀 막아!)/ 씹구멍에 차려놓고 하/ 씹 - 할 - 놈의 세상에서/ 씹 - 할 - 년 배 위에 다리 셋인 인간 태우고/ 씹구멍 바다 뱃길 오만 리쯤 더듬어온 여자라/ (장고, 쿵떡)// 내 배를 타고 지나간 남자가 얼마이드냐,/ 손님 받자 주님 받자/ 이것만이 살 길이다,/ 눈 뜨고 받고 눈 감고 받고/ 포주 몰래 받고 경찰 알게 받고/ 주야 내 배 타기 위해 줄선 남자가/ 동해안 해안도로 왔다갔다 할 정도였으니/ 당신들 계산 좀 해봐/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선가 용산 가는 길에선가/ 그 여자 배 위로 지나간 남자가/ 한 개 사단 병력이었다고 하는디/ 내 배 위로 지나간 쌍방울은/ 어림잡아 백 개 사단 병력 가지고도 모자라(얼쑤 - )// 개중에는 별별 물건 다 있었제/ 말이라면 하늘의 별도 딸 수 있는 물건/ 돈이라면 처녀불알도 살 수 있는 물건/ 만원 한 장이믄 배 수척 작살내는 물건/ 여자 배타고 하늘입네 하는 물건/ 들어올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른 물건/ 돈만 내고 가겠네 하다가 꼭 하고 가는 물건/ 한 구멍 값 내고 다섯 구멍 넘보는 물건/ 하 동정입네 하면서 동정받고 가는 물건.....// 이런저런 물건들이/ 그 잘난 좆대가리 하나씩 들고/ 구멍밥 고파 찾아오는 곳이 홍등가여/ 그러니까 홍등가는 구멍밥 식당가다, 이거여/ 그것도 다 정부관청 인가받은 업소이제/ 아 막말로 지 구멍 팔아먹는 장사처럼/ 정직한 밥장사가 또 어디 있으며/ 씹할 때처럼 확실한 인간이 또 있어?/ 구척장신 영웅호걸이라 해도/ 겹겹이 입은 옷 다 벗고 보면/ 흰놈 검은 놈 따로 없고/ 잘난 놈 못난놈이 오십보 백보라(허, 그래)/ 인생이 다 밥 한 그릇 연유에 울고 웃는 순진한 짐생이야!// 그런디 세상은 하 요지경 속이라/ 오늘날 떵떵거리는 모모재벌기업 밥장사들/ 아름다운 금수강산/ 천가람에 독극물 풀어/ 수돗물에 악취오염 펑펑 쏟아지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않고 건재하는가 하면/ 세상 차별인생이 구멍밥 장사여/ 지 밑천 팔아 목숨 연명하는 인생을/ 세상은 '갈보'라고 쉬쉬해/ 구멍밥 장사가 생전에 무슨 죄가 있다고/ 아 요즘 그 흔한 동맹파업이니/ 몸값 인상 시위니, 씹할 권리투쟁 한번 안 일으켰는데/ 어찌하여 구멍밥 먹는 놈은 거룩하고/ 구멍밥 주는 년은 갈보가 되는 거여?/ 까마귀 뱃마닥 같은 소리 하지를 말어,/ 구멍 팔아 밥을 사는 팔자 중에/ 지 혼 파는 여자 아무도 없어/ 구멍밥 장사는 비정한 노동이야/ 물건 대주고 밥을 얻는 비정한 노동이야/ 혼 빼주고 밥을 비는 갈보로 말하면야/ 여자옷 빌려 입고 시집가는 정치갈보/ 지 영혼 팔아먹는 권력갈보가 상갈보 아녀?/ 아 고것들 갈보 데뷔식도 아주 요란벅적해/ 금테 두른 이름표 하나씩 달고/ 염색머리에 유리잔 부딪치면서/ 정경매춘 곷다발 여기저기 꽂아놓고/ 백성의 오복길흉이 마치/ 정치갈보 권력갈보 흥망에 달려 있는 것처럼/ 오구잡탕 거드름을 떨어 (장고, 쿵떡)/ (정치갈보 몰아내고 민주세상 앞당기자)// 내 식자마당 그림자도 밟아본 적 없고/ 지체 높은 집 문턱도 넘어본 적 없지만/ 구멍밥 장사로 백팔번뇌 넘다 보니/ 밥과 인생에 대해/ 명예박사학위 서넛쯤은 너끈해/ 구멍으로 쓰는 논문 좀 들어봐/ 인두겁이 벗겨지고/ 똥 내력이 뚜렷해질 거야(허, 시원하게 벗겨봐)// (삼현청 장단 자지러지면 오십대 여자 나와 중모리풍으로 사설)// 구멍밥으로 푸는 똥 내력 두 대목// 사람 사는 인생길이 다 한가지라 하지만두/ 따져보면 엄연히 옳고 그름 있으니/ 그 먹고 싸는 밥과 똥 연유라/ 세상이 두쪽 난 두 밥이 있을진대/ 자본주의 꽃이라는 섹스밥이 그 하나요/ 사회주의 꽃이라는 혁명밥이 그 둘이라(장고 쿵쿵떡)/ 밥그릇에 담긴다고 다 밥이 아니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다 밥이 아닐진대/ 위로 먹고 아래로 싸는 똥냄새 식별할 제/ 백폐만상 인생 내력애 바로 똥 내력이로구나/ (추임새 - 허, 똥 내력이로구나)//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물똥냄새야 물똥천지야/ 물정치 물난리가 무능 탓인지만 알았더니/ 육탈 안된 송장보다 썩는 냄새 충천하다/ 물정치 물난리가 썩기까지 하였으니/ 명경처럼 맑고 정한 천의 강과 호수/ 심산유곡 자태 울연한* 이 강토 산과 들에/ 왼갖 썩은물 굽이굽이 흘러들 제/ 남쪽에서 발원하는 바람이여/ 너마저 똥냄새로 창궁을* 채우는구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바람이여/ 너 또한 똥냄새로 해를 들어올리누나/ 수도꼭지마다 썩은물 콸콸 쏟아지는구나//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오/ 물밥 말아먹고 물똥 싸는 인생/ 꼭두밥 말아먹고 하수인똥 싸는 인생/ 낚시밥 말아먹고 도토리똥 싸는 인생/ 개밥 말아먹고 쉬파리똥 싸는 인생/ 변절밥 말아먹고 앵무새똥 싸는 인생/ 분단밥 말아먹고 피눈물똥 싸는 인생/ 매판밥 말아먹고 매국똥 싸는 인생/ 양키밥 말아먹고 칼똥 싸는 인생/ 착취밥 말아먹고 바늘똥 싸는 인생/ 유착밥 말아먹고 저승똥 싸는 인생/ 권력밥 말아먹고 음모똥 싸는 인생/ 부정밥 말아먹고 사자똥 싸는 인생/ 인맥밥 말아먹고 지역똥 싸는 인생/ 가부장밥 말아먹고 하늘똥 싸는 인생/(아 하늘이 왜 똥을 싸 똥을 싸긴!)// 아이구 구린내야 아이구나/ 똥 - 천 - 하 - 자본이야/ 개도 마다하는 이 똥천지를 보자보자 하니/ 그 입에서 노는 혓바닥과 똥이 매한쌍이다(허, 쳐라)/ 그 먹는 대로 싸는 것이 똥일진대/ 이제부터 인생은 똥이라 말해둬/ 그 취한 대로 먹는 것이 밥일진대/ 아제부터 똥을 봐야 밥을 안다 말해둬/ 진짜 밥을 먹어야 진짜 똥을 싸제/ 문전옥답 거름똥이 어뜬 똥이던가/ 지 땀으로 사는 인생 각자 밥이 있다 할 제// 한 생명을 태우고 먹는 첫국밥이 있고/ 일 나갈 때 먹는 새벽밥이 있고/ 민초끼리 나눠먹는 들밥이 있고/ 인정으로 나눠먹는 고봉밥이 있고/ 동지끼리 나눠먹는 주먹밥이 있고/ 배고픈다리 넘어가는 보리밭이 있고/ 허튼귀신 몰아내는 오곡밥이 있고/ 이웃끼리 나눠먹는 대동밥이 있을진대/ 이 밥을 먹고 나면 거름똥 아니던가// 자유세상 찾아 먹는 민주밥이 있고/ 평등세상 찾아 먹는 해방밥이 있고/ 통일세상 찾아 먹는 평화밥이 있고/ 공명세상 찾아 먹는 화합밥이 있고/ 개벽세상 찾아 먹는 민중밥이 있고/ 정의세상 찾아 먹는 사랑밥이 있을진대/ 이 밥을 먹고 나면 사람똥 아니던가/ (허, 얼쑤! 지화자 꼬르륵)// 아직도 인생이 무어냐고 묻거든/ 지 땀으로 사는 인생 거름똥이라 말해둬/ 순리대로 사는 인생 사람똥이라 말해둬/ 이제부터 물정치 물밭인생 물똥 끝장내고/ 허튼자본 허튼밥 허튼똥 끝장내고/ 분단세상 분단밥 끝장내고/ 억압세상 비리밥 끝장내고/ 백수건달 인생 혀끝 하나로 먹는 밥 끝장내고/ 지 땀으로 거두는 알곡인생 살자 할 제/ 자본주의 꽃이라는 섹스밥이여/ 허틀 섹스밥이 바로 매춘 내력이로구나/ 사회주의 꽃이라는 혁명밥이여/ 허튼 혁명밥이 바로 허튼 조국 내력이로구나/ (휘몰이장단이 한바탕 지나간 뒤 중년 여자 나와 자진모리퐁으로.....)// 허튼밥으로 푸는 매춘 내력 세 대목// 구멍 파는 것만 매춘이 아니요/ 홍등가에 있는 것만 매매춘이 아닐진대/ 자고로 허튼밥이 매매춘 근원이라// 흰밥을 검은밥으로 바꿔놓고/ 그른밥을 옳은밥으로 우격질하는/ 천하지본허튼자본님이 들어오실 제/ 허튼정치 허튼돈줄 권력매춘이요/ 허튼기업 허튼축재 양심매춘이요/ 허튼국방 허든행정 총칼매춘이요/ 허튼평화 허튼우방 매국매춘이요/ 허튼개혁 허튼숙청 지조매춘이라// 허튼교육 허튼배움 인생매춘이요/ 허튼자리 허튼헌신 신념매춘이요/ 허튼의리 허튼단결 감정매춘이요/ 허튼자유 허튼권리 정신매춘이요/ 허튼특권 허튼출세 영혼매춘이라// 어허라 사람들아/ 허튼사랑 있으니 허튼욕심이 있고/ 허튼욕심 있으니 허튼밥이 있구나/ 허튼밥이 있으니 허튼길이 있고/ 허튼길이 있으니 허튼꿈 천치구나/ 허튼꿈 있으니 허튼섹스 천지구나/ 어허라 사람들아/ 저승사자도 아니 먹는 허튼밥 세상이로다/ 몽달귀신도 마다하는 허튼사랑밥 세상이로다/ (휘몰이장단에 칼춤......)// 이제부터 인생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삶 삽질하는 힘이라 말해둬/ 이제부터 목숨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넋 몰아내는 칼이라 말해둬/ 대쪽 같은 사람들아/ 금족 같은 사람들아/ 각자 목숨에 달린 허튼밥줄 가려내!// 각자 연혁에 얽힌 허튼돈줄 잘라내!/ 진짜밥 진짜사랑 뉘 아니 그릴쏜가/ 허튼밥줄 끊고 나면 눈이 뜨일거야/ 허튼돈줄 자르고 나면 새 길이 열릴거야/ 새벽이 오기 전에 매춘능선 넘어가세/ 이 밤이 가기 전에 허튼꿈 불을 놓으세/ 허,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허튼넋 허튼바람 활활 타는 불이로다// 아니리 - 판소리에서 소리와 소리사이에 곡조를 붙이지 않고 이야기 하듯 극적 줄거리를 설명하는 부분)//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 고정희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 낳았지//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사랑을 낳는다네// 모든 여자는 생명을 낳네/ 모든 생명은 자유를 낳네/ 모든 자유는 해방을 낳네/ 모든 해방은 평화를 낳네/ 모든 평화는 살림을 낳네/ 모든 살림은 평등을 낳네/ 모든 평등은 행복을 낳는다네.//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호박 / 고정희
호박이 익었다/ 우리나라 땅에서만 자라온/ 토종호박들이/ 불볕 더위 아래 이리 딩굴 저리 딩굴/ 누릿누릿 호박이 익었다/ 조선땅 어디서나 흙에 심기만 하면/ 토담이고 울타리고 쑥쑥 뻗어올라/ 못생긴 꽃타래를 피워내고/ 하대받는 풋호박을 주렁주렁 달아/ 놀고먹는 건달들이 쿡쿡 찔러보는/ 토종호박/ 흉년 들면 서민들의 밥이 되고/ 난세에는 마적떼들의 죽밥이 되는/ 조선 토종호박이 익었다// 호박은 호박인 탓으로, 그러나/ 손톱에 할퀸 데는 할퀸 자죽을 내고/ 도리깨질 당한 데는 당한 자죽을 내고/ 군화발에 밟힌 데는 밟힌 자죽을 내고/ 철사줄에 묶인 데는 묶인 자죽을 그대로// 지난 아픔 그대로/ 또렷이 익어버린 조선호박,/ 삼천리의 밥인 호박/ 케이농장에서 호박이 익었다/ 노릿노릿 뭉실뭉실/ 호박이 익었다/ 엿 해먹기 좋은 호박이 익었다/ 에잇, 엿먹어라//
망월리 비명(碑銘) -황일봉에게 / 고정희
한 세대 긋고 지난 업보가 어디/ 망월리에 잠든 넋뿐이랴만/ 한 시대가 쌓아올린 어둠의 낟가리에/ 불쏘시개 되어 하늘 툭 틔우고/ 황산벌 숯가마로 묻힌 저들이/ 오늘은 가는 달 붙잡고 묻는구나/ 내 죄값을 달에게 묻는구나/ 한 세대 긁고 지난 칼 자국이/ 어디 내 죄값뿐이랴만/ 내가 달과 마주 서니 속물일 뿐이어서/ 국화 한 다발도 속될 뿐이어서/ 달로 떠오르는 네 외짝눈과 만나니/ 부끄럽구나/ 한 평 땅 덮지 못할 내 빛/ 무력한 근심이나 보태는 오늘//
남남북녀 사랑노래 / 고정희
우리는 꿈꾸네 한사랑 꿈꾸네/ 둘이 살다 하나 되는 큰세상 꿈꾸네/ 기쁨이면 나누고/ 고통이면 맞들어/ 우리는 꿈꾸네 한살림 꿈꾸네// 우리는 길을 가네 한겨레 길을 가네/ 둘이 가다 하나되는 한민족 길을 가네/ 힘든 길은 의지하고/ 험한 길은 쉬엄쉬엄/ 우리는 길을 가네 통일의 길을 가네//
고정희(高靜熙, 1948 ~ 1991) 시인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였고, 한국신학대학을 나왔다.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1983년 《초혼제》로 ‘대한민국문학상’을 탔다. 1991년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 사고로 작고했다. 광주 YWCA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 법률 상담소 출판부장 등을 지내며 사회 활동을 했고, 특히 1980년대 초부터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동인으로 참여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기행》 《초혼제》 《이 시대의 아벨》 《눈물꽃》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여성해방출사표》 《아름다운 사람하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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