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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광림 시인

부흐고비 2021. 5. 25. 09:01

해인사 암자 설경, 사진=김상석

산 9 / 김광림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 두 암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가 돌아.//

산 4 / 김광림
아침이면/ 눈을 부라리고 꽈리를 부는/ 짐승이 있다.// 터진 황금(黃金)의 풍선(風船)에서 흩어져 나온/ 은혜(恩惠)로운/ 한낮이다// 지루한 속앓이를 외색(外色) 못하는 진종일/ 부신 가루를 회수(回收)해다 환약(丸藥)을 빚고 나면/ 저녁이다// 장엄(壯嚴)하게 투약(投藥)을 받아 마시고는/ 잠이 드는/ 짐승이 있다.//

선과 연 / 김광림
젊었을 땐/ 좋은 일을 서둘러라/ -고/ 늘 들어 왔지만// 고희(古稀)의/ 이 나이엔/ 사랑은 서둘러라/ -인걸//

산의 IMAGE / 김광림
1 메아리// 실은, 기억(記憶) 밖에도/ 너는 없을 터인데// 한, 천년(千年) 쯤 살다 가는/ 수목(樹木)들의/ 호사스런 죽음 때문에// 너는 있다.// 변신(變身)을 거듭하는/ 곤충의 변덕은/ 생성(生成)의 극한(極限)으로 하여// 너는 있다.// 관념(觀念)을 사살(射殺)하는/ 인간(人間)들의 배리(背理)는/ 마침내/ 아름다움이나 사랑의/ 모아드린 의미(意味)와/ 내용(內容)을 헐고// 상심(傷心)을 떨구는/ 풍화(風化)의 손은/ 의식(意識)의 울 안에선/ 잠들기 마련인데// 실은, 기억(記憶) 밖에도/ 없을 너는// 있는 것이다.// 2 도루소// 이, 기막힌 `도루소'의 기복(起伏)은/ 꿈이 없는 잠결에나/ 보았을까.// 깨어난 채/ 있달 순 없는/ 무게랄까.// 자각(自覺)이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면/ 아픈 데가 어디인가를/ 살피는 버릇인데// 살덩이가 썩어서 겹쳐진/ 이, 무수한 가슴들은/ 하필이면 안으로만 집혀 왔을까.// 한번은/ 울홧김에 터뜨린/ 의지(意志)의 조각들이 흩어져/ 잘못 생겨 난/ 바윗돌이나 낭떠러지나……차츰/ 인동(忍冬)의 땀방울이나// 혹은, 마지막/ 기침소리가 멍들어서/ 꽃이었거나// 죽고 사는 일을 버리고 난 이제는/ 아무렇게나 피어 버릴/ 목숨들의// 어쩌다가/ 처음이자/ 끝장만 지켜 보게 됐을까.// 결국엔, 언어(言語)나 고독(孤獨)이/ 사치(奢侈)하달 수밖에 없는/ 인간(人間)들의 시(詩)가 됐을까.// 3 정점(頂點)// 가장 아픈 데,/ 이왕이면 들 내 놓은 부끄러운 데,// 서로/ 붙안고/ 성가시게 차리는 인사에게/ 모름지기 자세를 거부한……// 어디쯤 뚫린/ 하늘일까.// 가지 끝에 매어 달린/ 꽃은/ 이파리들의/ 눈이 시린 자각(自覺)인가.// 손끝이 닿기만 하면/ 금시 굳어지거나/ 죽어 가야 하는/ 의미(意味)의// 그런/ 역리(逆理)/ 점(點)―// 이건/ 또 하나/ 웬/ 비정(非情)의 생채길까.// 지금은/ 긍정(肯定)도 부정(否定)도 할 때가 아니라/ ―고.// 이미/ 신화(神話)는/ 첫날 밤에 끝나 버린 것.// 나머지는/ `다나이드'의 밑창 난/ 두레박.// 속죄(贖罪)의 줄을 놓아 버릴 수 없게 마련 된/ 웅크린/ 계집애야.// ………// 가장 아픈 데,/ 이왕이면 들 내 놓은 부끄러운 데,// `카오스'의 산정(山頂)이여./ 비여. 바람이여./ 덮어 버릴 눈보라여.// 마침내/ 나는/ 소멸(消滅)할까.//

허수아비 / 김광림 -제10회 청마문학상 수상
허탈 하고플 때가 있다./ 미운 것도 고운 것도 모른 채/ 높은데도 낮은데도/ 아랑곳없이/ 그저 허공을 향해/ 십자목에 걸친 채/ 의연히 서서/ 소슬바람에 옷자락 날리다가/ 마침내 '허리케인'에 휘말려/ 속사정 다 드러내고/ 나뒹구는/ 허수아비 마냥/ 미련 없이/ 존재하고플 때가/ 간혹 있다.//

청과靑果 / 김광림
무르익은 손을 불러/ 수줍게 떨어지는/ 과일이듯// 한 낮에 열린/ 햇망울은/ 천도(天桃)/ 요령을 흔들어 놓은 듯이/ 수 없는 햇씨가/ 쨍쨍이 반짝이며 떨어지는 소리.// 야만의 과도를/ 번득여/ 미각을 나누지만// 사랑의 모습처럼/ 밝아오는/ 빛깔.// 청과는 비로소/ 묻은/ 햇살의 푸른/ 먼지.// 과일 속에 스며들면/ 단맛으로 빚어지는 종교(宗敎)가 된다.//

석쇠 / 김광림
1// 도마 위에서/ 번득이는 비늘을 털고/ 몇 토막의 단죄가 있은 다음/ 숯불에 누워/ 향을 사르는 물고기// 고기는 젓가락 끝에서/ 맛 나는 분신이지만/ 지도 위에선/ 자욱한 초연(哨煙) 속/ 총칼에 찝히는 영토가 된다.// 2// 날마다 태양은/ 투망을 한다./ 은어 떼는/ 쾌청(快晴)이고/ 비린내는/ 담천(曇天)과 같아.//

                        쥐 / 김광림

하나님/ 어쩌자고 이런 것도/ 만드셨지요/

야음을 타고/ 살살 파괴하고/ 잽싸게 약탈하고/
병폐를 마구 살포하고 다니다가/ 이제는 기막힌 번식으로/ 백주에까지 설치고 다니는/ 웬 쥐가/ 이리 많습니까/ 사방에서/ 갉아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연신 헐뜯고/ 야단치는 소란이 만발해 있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 즐거운 세상을/ 살고 싶도록 죽고 싶어/ 죽고 싶도록 살고 싶어/ 이러다간/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교활한 이빨과/ 얄미운 눈깔을 한/ 쥐가 되어 가겠지요/

하나님/ 정말입니다//


0 / 김광림
예금을 모두 꺼내고 나서/ 사람들은 말한다/ 빈 통장이라고/ 무심코 저버린다/ 그래도 남아 있는/ 0이라는 수치// 긍정하는 듯/ 부정하는 듯/ 그 어느 것도 아닌/ 남아 있는 비어 있는 세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 죽어 있는 것도 아닌/ 그것들마저 홀가분히 벗어버린/ 이 조용한 허탈// 그래도 0을 꺼내려고/ 은행 창구를 찾아들지만/ 추심(推尋)할 곳이 없는 현세/ 끝내 무결할 수 없는/ 이 통장// 분명 모두 꺼냈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수치가 있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계가 있다//

덤 / 김광림
나이 예순이면/ 살 만큼은 살았다 아니다/ 살아야 할 만큼은 살았다/ 이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더 살면 덤이 된다/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宗三*은 덤을 좀만 누리다 떠나갔지만/ 피카소가 가로챈 많은 덤 때문에/ 仲燮*은 진작 가버렸다/ 가래 끓는 소리로/ 버티던 芝薰도/ 쉰의 고개턱에 걸려 그만 주저앉았다/ 덤을 逆算한 천재들의 밥상에는/ 빵 부스러기 생선 찌꺼기 초친 것 등/ 지친 것이 많다/ 그들은 일찌감치 숟갈을 놓았다/ 素月의 죽사발이나/ 李箱의 심줄구이 앞에는/ 늘 아류들이 득실거린다/ 누군가 들이켜다 만/ 하다못해 맹물이라도 마시며/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 宗三: 시인 김종삼, 仲燮: 화가 이중섭

풍경 A / 김광림
기중기(起重機)는/ 망가진 캐시어스 클레이의 철권(鐵拳) 수만 개를/ 들어 올린다/ 흔들린다/ 헛기침도 않고/ 건달 같은 자세로/ 시장한 벽에/ 부딪친다/ 압도해 오는 타이거 중전차(重戰車)에/ 거뜬히 육탄(肉彈)한다/ 나를 매달아 놓았던 내장(內臟)의 사슬이 끊어진다/ 기중기를 벗어난 철추(鐵椎)는/ 현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한 마리의 새가/ 포물(抛物)로 날아간다//

상심(傷心)하는 접목(接木) / 김광림
일없이 부러진 가지를 보면/ 그 다음의 가장귀가 안 됐다.// 요행히도/ 전쟁에서 살아 남았을 땐/ 우리는 어쩌다 애꾸눈이 아니면 절름발이었고// 다음엔/ 찢기운 가슴의/ 어느 모퉁이가 허물어졌을 것이다.// 몇번째나/ 등골이 싸느랗게 휘여졌다가는/ 도루/ 접목같은 세월을 만났다.// 새털의 악보를 타고/ 하야라니 나리는 것은/ 눈보란가./ 꽃보란가.// 꽃도/ 무너지면 두려운 것./ 요즈막엔/ 사랑도 목을 졸라대는/ 미안한 기별의/ 나날이다.// 그것은/ `항가리안'의/ 꺼진 가슴들이 뿜어 올린 옹굿싹이 아니면// 아름다움을 넘어 선 인간들의 녹색 눈방울이 먹물져 가던/ 내일의/ 황혼이다.// 그리고/ 꽃이 열매의 협주를 잃어버린/ 다음의/ 나의 나무들에게 인사하는 계절이// 문안처럼/ 묻었을 뿐이다.// 지금도,// 일없이 부러진 가지를 보면/ 그 다음의 가장귀가 안 됐다.//

멍청한 사내 / 김광림
눈길 가는 곳/ 멍청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슨 일이 있나요/ 생판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건네 온다/ 그리고 호기 어린 눈빛으로/ 내 시선이 머무는 것을 뒤지기 시작한다/ --무슨 일인데요/ 두 번째 사내가/ 어깨 너머로 발돋움하며/ 첫 번째 사내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뭔가를 찾아내려 안달이 안다/ 이쯤 되면/ 세 번째 사내가 곧 다그치게 마련/ --무슨 일이요/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어/ 나와 같은 쪽을 향해 웅성대기 시작한다/ 뒤가 무겁다는 여편네도 한몫 낀다/ 뉘의 사주를 받은 것도 아닌데/ 안 뵈는 것을 보려 한다/ 안 뵈는 것을 느끼려 한다/ 안 뵈는 것을 가지려 한다/ 그제서야/ 멍청한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내심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댄다/ --무슨 일은 무슨 일//

가로수 / 김광림
이제는 되돌아 설 수도/ 내쳐 갈 수도 없는/ 막바지에서// 한번도 꽃피워 보지 못한/ 감정의 흐름을/ 아끼듯이………/ 음악이 꺼지던 날.// 제자리에서 당한/ 무안의 비는/ 폭소처럼 나리고// 한낮의 현기를 타고/ 꿀벌의 밀항이 가능했던 시절의/ 나비를 몰아 낸 녹색의 심사.// 한때는/ 무성히 휘저은/ 손이여. 팔이여. 그 또 무엇이여.// 벌거숭이 그대로의 다만/ 이 솔직한 자리여.// 지금은 사정없이 정만 떨구면 그만인/ 가을 날인가.//

갈등 / 김광림
빚 탄로가 난 아내를 데불고/ 고속버스/ 온천으로 간다./ 십팔년 만에 새삼 돌아보는 아내/ 수척한 강산이여// 그동안/ 내 자식들을/ 등꽃처럼 매달아 놓고/ 배배 꼬인 줄기/ 까칠한 아내여// 헤어지자고/ 나선 마음 위에/ 덩굴처럼 얽혀드는/ 아내의 손발/ 싸늘한 인연이여// 허탕을 치면/ 바라보라고/ 하늘이/ 저기 걸려 있다.// 그대 이 세상에 왜 왔지/ —— 빚 갚으러//

님 그리는 / 김광림
고요한 밤 나무 잎이/ 나누는 사랑 이야기가/ 마음 여는 소리 던가// 깊은 밤 닥아오는/ 님의 옷깃 스치는 소리가/ 사랑 찾는 소리 던가// 그리운 마음 가슴 열고/ 괴로움에 네쉬는 깊은숨이/ 한숨 짓는 소리 던다// 이슬비 처름 내리는/ 하염없는 눈물이/ 그리움에 우는 소리 던가// 당신이 속삭이는 입김에/ 흐느끼는 그 마음이/ 님 그리는 소리입니다//

첫 소망 / 김광림

한껏 던진 원반모양 떠오르는 해/ 빈 가지에 앉으면 새소리로 충만하는 아침이다/ 말끔히 세수하는 일곱시/ 넥타이를 고쳐매듯/ 아무하고나 손을 잡아왔으면/ 차츰 약해지는 시력이 물상을 선명히 보듯/ 새삼 의식하고픈 평범이여/ 아아 우직하게 天然래봤으면//

나는 / 김광림
그만 일렁이게 하십시오./ 알맞춤한 거리를 두고.// 나는 펄럭이지 않는 기(旗),/ 잎새 없는 현화식물(顯花植物),/ 울림 없는 산,//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그리움.// 맨발로 가게 하십시오./ 바위도 칡넝쿨도 말고.// 나는 빈 손이면 잡히는 마음,/ 바람 없이 돌아가는 팔랑개비,/ 때 없이 알리는 괘종시계,// 물러날수록 더욱 깊이 들어서는 거울.// 쉬는 이대로 눈뜨게 하십시오./ 들볶이지도 편안하지도 말고.// 다만 나는 죽어서 해마다 피고 지고픈 꽃나무,/ 마냥 기다리는 보람을 일깨워 주는 솔바람,/ 먼 둘레의 낮은 구름 언저리,// 매맞을수록 어느 현량(眩量)의 극한에서 바로 서는 팽이처럼.//

연가 / 김광림
그만 묻어두고 싶다./ 그 말씀을//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듯이// 바라는 것이 많아서/ 바램이 무엇인지 모르듯이// 조용히 일러 주리라./ 조금만 다가오라고.//

연가 2 / 김광림
어딜 가나/ 나 안에 당신/ 당신 안에 나/ 저녁이면 아침이 오고/ 오밤중엔 대낮을 생각듯이/ 참으로 많은 세월/ 당신 안에 나를 불러 왔을까/ 나 안에 당신을 되찾았을까/ 저승에선 이승을 알지만/ 이승에선 저승을 모르듯이/ 무얼 하나/ 당신 안에 나/ 나 안에 당신//

황혼 / 김광림
엠마오로 가는 길은/ 먼지가 일었다/ 누군가 뒤따르며/ 자꾸 말을 건네온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유카리나무 잎새 하나/ 힘없이 떨어지고/ 해질녘// 예루살렘을 등진/ 나귀의 눈망울이 젖어 있다//

한산·습득(寒山·拾得) / 김광림
버리고 나서/ 맨발로/ 이름 모를 산속에/ 때아닌 더벅머리/ 둘/ ―스승은 지금 안 계시다/ 하나이 밥을 지으면/ 하나이 반찬을 하고/ 혼자서는 군불도 지피지 않는다/ 하나이 걷어들이면/ 하나이 내쳐버리느라고/ 늘/ 벌렁이는 들창코에/ 그득한 꽃향기/ 마주보곤/ 웃고/ 또 웃는다/ 절로 눈 감기는 웃음을//


여체 / 김광림
震源이다 잠들지 못하는 대륙은/ 늘어났다 포개졌다/ 포개졌다 늘어났다/ 무시로 背理가 뒤집히기도/ (반도는 태풍권내)/ 자벌레가 한 마리 접근해오고 있다//


사랑 2 / 김광림
갈릴리에서 인 바람은/ 나무 잎새 하나 떨구지 않았지만/ 지금도 이승의 벽은/ 무너지고 있다/ 비 한 방울 거느리지 않고/ 이천 년의 마른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골고다에서 진 바람은/ 아무런 기적도 나타내지 않았지만/ 진실은/ 찢기고 바래인 누더기임을/ 피 흘려 쓰러지며/ 무력해서 강한 것임을/ 일러주었다// 남에게 마냥 베풀 수는 있어도/ 자신에겐 끝내 베풀지 못한/ 사랑은/ 바보스런 힘/ 그토록 무량한 것은/ 이 세상에/ 따로/ 또/ 없었다//

백일타령(百日打令) / 김광림
헤아릴 길 없는 날/ 날들 속에서/ 하필이면 百日이/ 제일 만만한 듯//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 百日되던 한겨울/ 발가벗겨져 찍힌 내 모습/ 지금도 눈앞에 삼삼한데// 줄줄이 내 밑엔/ 누이동생만 넷이라/ 내 몸 가누기 막막하던 참에/ 옳지 꼬추 동생 태어나// 이놈 百日 때/ 선뜻 北에서 南으로/ 百日 곱하기 百日의 곱절이 되어도/ 못 돌아가는 신세가 되었느니//

반노인(半老人) 1 / 김광림
버스를 타면/ 나를 향해 아저씨 하기보다/ 할아버지라는 말이 더 들린다/ 아가씨가 그렇게 부를라치면/ 기가 딱 막힌다/ 나는 아직도 그녀의 싱싱한 부분을/ 열심히 훔쳐보고 있는데/ 그녀는 영 나를 열외로 취급한다/ 주책없이 머리만 세어/ 그럴 수밖에// 전철역에 서면/ 나는 노인 대접을 못 받는다/ 자동판매대에서 나온/ 우대권을 내밀면/ 칠순이 넘었느냐고 윽박지른다/ 아 미안/ 칠순이 넘어야만 노인이던가/ 같은 우대권을 또 한 장 끊으란다/ 예서는 이중의 우대가 푸대접이다// 세상을 자꾸자꾸 가다보면/ 잊어버리는 것이 많아진다/ 뻔히 아는 길도 잊어버리고/ 방향 감각이 흐려진다/ 내가 젊었는지 늙었는지/ 어디를 가고 있는지/ 잊어버린다/ 미운 것도/ 사랑스러운 것도/ 잊어버린다/ 내가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다//

매화 한 송이 / 김광림
매화 한 송이./ 어쩌다가 몸부림하는 心像./ 비비 꼬인 줄기./ 툭 붉어져 나온 開發.// 매화 한 송이/ 파도치듯/ 일렁이는 속에서/ 부여잡는 마음 자락./ 뽑아 낸 외가지./ 부스럼을 틔우는 눈망울.// 매화 한 송이/ 오늘은 참/ 맵시있게 사린/ 어깨받이나 겨드랑쯤에서/ 하얀 날개가 돋는다./ 고요가 充滿하여/ 極에 닿은 平凡.//

망각 / 김광림
세월 속에 세월이 묻히고/ 낙엽 위에 낙엽이 쌓인다/ 바다가 바닷속에 침몰하고/ 내 마음속에 네 마음이 와 잠긴다/ 사랑으로 무너진 가슴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얼마나 오랜 망각이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짐승스런 눈을/ 의식하지 못하는/ 저 꽃은//

등불 / 김광림
소한에서 대한으로 치닫는 사이/ 신정과 구정 사이/ 지난 해 크리스머스와 오는 부활절 사이/ 집과 집 사이/ 이승과 저승 사이를/ 한 걸인이 서성이고 있었다/ 노크를 잊은 천사처럼/ 남루의 관을 쓰고서// 그가 자는 곳은 아무도 모른다/ 그가 먹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밤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가난한 창가에 기대 서서/ 눈 부비며/ 잠시 성경 한 구절을/ 소리나지 않게 읽고 가는 일뿐이다.//

마지막 객기 / 김광림
부모 형제/ 일가 친척 아무도 없는/ 한반도 남쪽에/ 홀로 와서/ 반세기 넘게/ 용케도 견디며/ 자식 손자 수북이 두고// 이제 다시/ 이국땅/ 섬나라까지 건너와/ 한동안/ 혼자서 견뎌보는/ 이 객기를/ 무심코 오가는/ 전차 소음이 달래주느니//

도망친다 / 김광림
요즘 나는 날마다 도망친다// 가진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고갈된 상상력으로부터 도망치고/ 몽정없는 안타까움에서 도망친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손자의 어리광에서 도망치고/ 손녀의 재롱으로부터 도망친다// 살아서 호사스런 비석 세우는 일에서 도망치고/ 죽어서 박물관에 보관 안 돼도 되는 이름 석 자를/ 떠들썩하게 내건 상으로부터 도망친다// 이제 더 버틸 수가 없다/ 뚝심을 잃은/ 둑으로부터 멀리 도망친다// 끝내 나는/ 도깨비 놀음 같은 정치 흥정/ 그 쥐꼬리만한 명분으로부터 도망친다//

내성적(內省的) / 김광림
공부는 않고 얘기책만 읽는다고 어머니는 매일같이 꾸중이었다 아버지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내가 환쟁이가 될까봐 걱정이었고 외할머니는 외삼촌의 책을 건드릴까봐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어쩌다 아버지가 빌려 보시는 것을 예사로 새치기하여 읽곤 했다 중학 2년 하계방학 때 객지에서 돌아온 나는 외할먼네 인사하러 갔다가 슬며시 다락으로 숨어들었다 그 곳에 평소 내가 잔뜩 노리고 있던 두툼한《世界文學全集》(新潮社刊)이 줄빗이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 때 외할머니는 내가 집에 돌아간 것으로 알고 집에서는 외할먼네에 있으려니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저녁때가 되어서야 나의 증발이 탄로났다 애가 오간 데가 없다며 밖에서는 야단법석이었지만 나는 다락에 촛불을 켜놓고 진종일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에 넋을 앗기고 있었다// 그 후론 제 때에 끼니만 찾아 먹으면 얘기책 봐도 된다는 허락을 받게 되었다.//

꽃의 반항 / 김광림
꽃은 꺾인 대로 화병에 담아 채우면/ 금시 향기로워 오는/ 목숨인데/ 사람은 한번 꺾어지면/ 그만 아닌가// 지금은/ 한 아람씩 피어 물은 입술로/ 神의 이름을 핥으며 있는 시간/ 꽃은 열반으로도/ 관음보살의 발바닥에서/ 피는데/ 전쟁만 남고/ 억울한 것은 상기도 젊은 건가// 아름다움과 동경을/ 잃어버린/ 다음은/ 꽃은 검은 눈시울/ 꽃은 스스로의 눈짓을 돌리는 아픔/ 꽃은 십자가에 걸리는 죽음/ ―인가// 결국은/ 한없이 꺼져드는 울음을/ 속으로만 물어뜯다가/ 죽은 자를 모반하여 피는/ 꽃은 수없이 무너뜨린 가슴에게/ 미안한 열매를 마련하지 못하는 구실의/ 화병인데/ 사람도 그만 향기로울 데만 있으면/ 담아질 꺾이어도 좋을/ 꽃이 아닌가//

꽃의 서시(序詩) /김광림
하나의 持論 같은 고집 덩어리/ 꽃망울은/ 달라져가는 미의식의/ 이파리들/ 앞에선/ 凝香이고저/ 하는 듯// 인간의 손목이면 꺾이는/ 꽃가진데도/ 肝을 씹는 전쟁의/ 하루 아침// 죽음들/ 뒤안길에 피어서/ 神의 뜻대로/ 있는 듯// 꽃/ 시공을 넘어서는/ 우렁찬 음악// 관념의 울안에서/ 밖을/ 밝히는/ 훤히 꺼진 눈시울//

꽃의 문화사(文化史) 초(抄) / 김광림
1// 처음, 인간(人間)에게 들킨 아름다움처럼/ 경악(驚愕)하는/ 눈, 눈은, 그만/ 꽃이었다.// 애초엔 빛깔/ 보다도, 내음 보다도/ 안·속으로부터 참아 나오는 울음/ 소릴 지른 것이/분명했다.// 지구(地球)를 꽃으로 변용(變容)시킬/ 신의 의도가/ 좌절되기에/ 앞서―// 수액(樹液)을 보듬어 잉태(孕胎)하는 생성(生成)의/ 아픔. 아픔/ 개념(槪念)이/ 꽃이었다.// 2// 따로 태아(胎兒)에게 일러 줄/ 감격(感激)은 없을까// 장미전쟁(薔薇戰爭)을 일으킨 녀석들의 찬란한/ 꽃잎이나 심장이나/ 다를 것이 없겠구나// 바보이기에 더욱/ 착하게/ 매료(魅了)되는/ 눈시울 같구나.// 인간(人間)들이 서로 저지르는/ 과오(過誤)의 아름다운/ 역정(逆情). 역정(逆情)에 겨워 굳어버린// 아/ 저마치 서서 생각하는/ 꽃이었다.// 3// 사랑한다는 것을 의식(意識)하였을/ 땐, 꽃잎은/ 벌써 져 갈 차비를 한다.// 진실로 미움을/ 아는 사람에겐, 꽃은/ 총뿌리 앞에서도 정작/ 웃는 낯으로 대해 준다.// 기도(祈禱)는 차라리/ 졸음의 형태(形態)인가/ 오늘, 찢어진 깃폭은/ 나비의 깃쭉지 같은데……// 까닭 모를 죽음을/ 지켜서, 증언(證言)할/ 천만(千萬) 되풀이 되는 부활(復活)의/ 꺼지지 않는 형상(形象) 앞에서/ 군화(軍靴)를 밟는/ 자욱, 자욱은/ 꽃이었다.// 4// 갈증(渴症)난 세월을 불사르듯이/ 지금은, 나의/ 목숨은 타고 있다.// 일찌기 결단난 것들은/ 나의 것이다.// 초토(焦土)는 한때의/ 꽃동산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있을 것을 있게 하고/ 변용(變容)시키는/ 것. 나의// 꽃은 눈이 아프다./ 꽃은 충격(衝擊)된 가슴이다.// 죽음보다도 크게 못박혀 오는/ 생리(生理)의, 그만/ 그것은 어쩌다가/ 꽃이었다.//

꽃·베고니아 / 김광림
줄기를 향한 한 가닥의 그것은 때로/ 붉게 타오르기도 하며// 잎에 묻은 향기에/ 꽃이 샘을 내는 한낮은/ ……바다가 가까운 노대(露臺)쪽에 대인다.// 퉁명스런 생리(生理)의 하오(下午)는/ 유리(琉璃)가 먹고// 땡볕을 가라 마시던 여인(女人)은/ 마지막 숨지는 꽃뭉치를 뿌리친다.// 때로는 생채기같은 이유(理由)의 손길이 닿기도 하며/ 부끄러운 가슴으로 쥐어 뜯는다.// `막다레나·마리아'의 몸둥이를 휘감아 도는 저 머리카락이라면/ 벌겋게 달아 오르는 봄따지며 귀 언저리…… 그밖에/ `예수·크리스도'의 맨발을 닦은/ 너의 거짓같은 솜씨의// 꽃이여!// 차암// 너희들 앞에선/ 나의 아름다워야 할 욕정(慾情)은 모두가 타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

꽃과 잃어버린 신(神) / 김광림
아름다움은 버얼써 우리의 것이/ 아니다.// 착한 것과/ ―그 앞에/ 굴복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늘…….// 희망과 절망에 얽히며/ 피어 나는 것이다.// 그것은 진작 아름다워야 하는/ 내일과/ 또 없는 내일에// 꽃을 가꾸는 사실 앞에서/ 눈이 먼/ 인간들에 의하여// 꽃과/ 잃어버린 신(神)과/ 꽃이 팔리는 경우랄까.//

심통부리기 / 김광림
버스 앞바퀴가 구르는/ 굽 높은 빈자리 옆에 앉으려니/ 한 중년 여인이/ 서슴없이 백발 앞에 다가와/ 얼마간 주춤대고 서 있더니/ 불쑥 내뱉는 소리가/ ―나 허리가 안 좋아서/ 하며 은근슬쩍 내 자리를 양보하란다/ 순간 나는/ ―난 심사가 안 좋아서/ 못 내놓겠다는 듯이/ 잠자코 버티고 있으려니/ 다짜고짜 내 무르팍을 가로타고/ 냉큼 바퀴 윗자리에 앉아버린다/ 진작 그럴 것이면/ 쉬 들어갈 수 있도록 비켜줬을 텐데/ 오오라 피차간 안 좋은 데가 있군 그래//

교외선 / 김광림
서울로 가는 표를 사들고/ 서울을 떠난다.// 어색하지 않게/ 빈 손으로.// 두 차례를 돈/ 깜장 스카프의 소녀는/ 가도 가도 제자리인 서울 길에서/ 눈 내리는 시집을 펼쳐 들고// 한 바퀴를/ 돈/ 나에게/ 다소곳이 안겨 오는 봄.// - 이상하다.// 서울에서/ 서울로 가는 표.// 나에게서/ 나에게로 가는 내면.//

가을 / 김광림
고쳐/ 바른/ 단청빛/ 하늘이다// 경내는/ 쓰는 대로/ 보리수 잎사귀/ 한창이다// 잎 줄기에서/ 맺혀 나온/ 염주알/ 후두둑 떨어진다// 벼랑 위에/ 나붓이 앉으신/ 참 당신/ 보인다//


가을 / 김광림
1// 아쉬운 화투(花鬪)짝을 내던지는 그 뭐랄까/ 알맹이는 죄다 거둬 들이고/ 빈 껍질만 내굴리는/ 시월(十月)에 남는 단풍(丹楓)을// 꽃에도 낙일(落日)이 있다는/ 로댕의 말처럼/ 나의 낙일(落日)은/ 단풍(丹楓)에도 묻었을까// 오뉴월에 이은/ 더운 가슴을/ 깔아 뭉갠/ 서늘했던 지난 여름// 지금은 조용히 검불만 지핀다/ 시월(十月)은/ 마른내가 풍길 때/ 먼 길은/ 떠날 수 없는/ 그 뭐랄까// 2// 여울목 물구비도 잦아들었다/ 담 모퉁이를 돌아서 숨어 울던 새댁도 떠나갔다/ 바람을 벌판에 돌려보내라/ 꽃잎을 씨앗에 돌려보내라/ 뜻뜻한 아랫목은 나그네에게/ 질화로에 바알간 숯불을/ 까마귀엔 나목(裸木) 가지에/ 그리고 너는 나에게// 빈 들은 서리맞은 허수아비에게 돌리고/ 충만(充滿)은 후미진 가슴마다 고이게 하라// 나는 한자락 펄럭이는 바람이고 싶다.//

계절(季節) / 김광림
한 때는/ 나의 어지러운 꽃구름이 개이던/ 날. 아침같은/ 참, 환한/ 거리.// 가로수(街路樹) 이파리는 여지없이/ 푸른 부정(否定)의/ 손짓처럼 달려서/ 새삼 부끄러워지는 건, 밤새/ 상심(傷心)하던 일이다.// 숫제/ 장난같은 날씨의/ `삼월(三月)은 바람'과/ `사월(四月)은 비'와/ `꽃들의 오월(五月)'이/ 가면, 그러면// 유월(六月)은/ 입술을 떼인 나무 잎.// 범벅된 가슴./ 서로 물어 뜯고파 하는 심사(心事).// 그것은, 아무래도/ 아는 일을 제쳐 놓으면/ 실상, 모를 일만이 명백(明白)해 지는/ 고집(固執)들이다.//

구릉(丘陵) 1 / 김광림
1// 나직이 구비치고 잠잠하라./ 우리의 소망은/ 등성이에 얹힌 구름./ 가벼운 생각./ 조용한 낙일(落日)./ 내쳐 걷다가 그만 돌아다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여유(餘裕).// 2// 조금씩 나로부터 멀리 하시는/ 당신의 거동을 살피게 다가 서고픈 기복(起伏).// `로댕의 가데도랄'/ `윌리암·텔의 서곡(序曲)안 해돋이'/ 그리고 당신의 여문 가슴.// 나는 무료(無聊)하지 않지만./ 나는 울고 싶지 않지만.//

되살아 온 동정(童貞) / 김광림
지금은 나의 모오든/ 관념(觀念)의 내 것들은, 지난 날/ 전쟁(戰爭)에서 마구 내던진 동정(童貞)이/ 되살아 왔음인가.// 초토(焦土)를 짓이겨서 다시금 피어나는/ 것. 풀밭에 아롱지다 꺼진/ 꽃의 이름들만큼이나 근지러운/ 생채기의 무수한/ 구멍. 벌집같은/ 나의 안·속을 환히 들여다 보는/ 음악(音樂)………. 요즈막 나의/ 거미줄에 얽힌 머리 속엔/ 한 마리, 먼지를 묻힌/ 찢어진 날개, 파닥이다 기진(氣盡)한/ 나비의 가사(假死)를 보는 듯.// 그것은 날빛을 잃고 난/ 아침. 파도의 자욱을 따라 나서는/ 조용한 눈빛같은/ 단념(斷念). 설움이 목에 차면/ 손수건보단 가볍게 찢어지는 건/ 마음인가./ 꽃인가.// 아름다움이 무너져 간 자리에/ 아직은 배리(背理)의 가슴 여미는/ 돌이여. 사랑에도 지쳐 버린/ 다음의, 팔굽이나, 무릎이 맞닿아/ 문드러져 나간/ 기막힌 속심과/ 기가 차는 나날을 삭이며 있을/ 또 하나의/ 이런 생활(生活)속에 희망(希望)과/ 그리고, 여느때보다 못내 들볶이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여.// 착하고 따스하여 오히려 미안하게 어지러운/ 너무도 아슬하여 조심스레 살피다가 눈이 먼/ 황홀(恍惚). 그러면 막상 당신과 나의 나직한 속삭임이/ 벅차게 밀려드는/ 밀월(密月)의, 잃어버린 대사(臺詞)가/ 가까스로 입술 언저리에 맴돌아 오는/ 그런 `핑크'빛의 장미학(薔薇學)을 배우는 낯선/ 일요일(日曜日). 저녁 노을에 잠기어 드는/ 모두가/ 사람의 일이기엔/ 서로끼리의 곁이 아쉽고 그리운, 새삼/ 나의/ 다만 아까운 건/ 너다.// 지금은 나의 모오든/ 관념(觀念)의 내 것들은, 지난 날/ 전쟁(戰爭)에서 마구 내던진 동정(童貞)이/ 되살아 왔음인가.//

말뚝 / 김광림
말뚝이 잘 뽑히지 않았다/ 반쯤 부러진 채/ 끊긴 가시줄에 엉기어 있었다/ 출품(出品)되지 않은 조각(彫刻)처럼/ 뒷발을 든 강아지가/ 오줌을 갈기고 달아나자/ 에펠탑(塔)을 보고 화를 버럭 내었던/ 말라르메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양철 지붕에선/ 쉴새 없이 빗물이 떨어지고/ 녹슬어 가는 가시줄 사이로/ 새 잎사귀가 돋아났다/ 이웃간의 지경(地境)처럼 망측한 것은/ 또 없었다//

바다의 역설(逆說) / 김광림
Ⅰ// 어떻게 모양할 수만 있다면/ 나는 꿈꾸지 아니 할 것을// 이/ 거센/ 망각(忘却)의 파도를 일깨워// 다시금/ 나를 있게 할 것을// 지금은 그냥 범벅인 채/ 살아얄/ 때, 어데쯤에서/ 드리운 자락을 짚어 댈까.// 한 잎새에서/ 이슬이 바다를 보듬고 궁굴었을/ 땐, 낙화(落花)는/ 얼마나 아름다운 변용(變容)을/ 머금었을까.// 나를 닫아 버린/ 창(窓) 밖엔/ 새론 질서(秩序)의 눈이 트이든가// 아무래도/ 시끄러운 귀ㄹ 잃어 버리든가// 어느 날엔/ 후미진 가슴인데/ 속이 빈 골짝엔/ 소나기ㄹ 몰아댈까.// 어떻게 가눌 수만 있다면/ 나는 거역(拒逆)치 아니 할 것을// Ⅱ// 한갓/ 무덤은 고요롭지만 아니하고/ 죽음에서 끝난 것도 없다.// 일찍이/ 위대(偉大)하였던 것은 침몰(沈沒)하고/ 조개껍질엔/ 전설(傳說)보다 고운 가난이 묻어 있다.// 꽃이 질/ 때, 꽃은/ 스스로의 자세(姿勢)를 바꾸는거다.// 저토록/ 풍요(豊饒)한 손에서도/ 가을은 무르익은 한낱의 순수(純粹)를 지탱하여/ 관념(觀念)의 용기(容器)가 되는데// 사람은 죽음으로도/ 어떻게 자신의 작은 우주(宇宙)를/ 무너뜨릴 순 없는 거다.// Ⅲ// 이름 할 수 없는…… 그것은/ 무엇이라는 것일까.// 한 마리의 나비는 무변(無邊)의 들을/ 날으고. 한 인간(人間)의 생각이 다다라 버린/ 끝에서/ 처음 돋아나기 시작한 것은/ 울음같은 형상(形象)인가.// 지금 울고 있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제작(制作)하는 손도/ …… 그렇다. 절실(切實)한 것은 모두가/ 땀방울이 흐르듯이/ 온몸에서 배어나는 생각이다.// 차츰, 하나도 의미(意味)아닌 것이 없어질/ 때, 의미(意味)는 버얼써/ 둔갑(遁甲)하는 흙이나 돌이기도 하다.// 워낙/ 겁초(劫初)의 푸름이나 움직이는 무변(無邊)의 덩어린/ 일없이 불러대는 인간(人間)들에 의하여/ 그저 벌판이나 바다 같은 것으로만/ 무난(無難)히 이름할 순 없는 거다.//

볕 / 김광림
1// 신(神)도 기계(機械)도 이미 떠나가 버린/ 다음에 오는 것.// 미움이 오히려 착하게/ 앞서는 오후(午後).// 따끈히 마신 소주(燒酒)같이/ 취(醉)해 오는 것.// 2// 내가 졸려운 것은/ 한폭 쯤의 볕살과 풀밭이// 아직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일 수 있었던/ 그 어느 날에는// 어떻게 꽃버섯처럼/ 자꾸 돋아날 수만 없기 때문이다.// 3// 언제쯤이면 떠나가 있는 사람의/ 그리운 소식같은 날.// `모나리자'의 봄·언저리에 떠오르는/ 미소(微笑)가……아마 까닭도 없이 잠들게 하는 것은// 너무 뜨겁지도 않게 그러면 당신의 차겁지도 못한/ 인정(人情)이고 싶기 때문인가.// 4// 힘을 놓아 한 아람 피어난/ 꽃망울보다는// 아, 아기의 주먹이 꼬옥 저렇게/ 쥐어져 있는데,// 너와 나와는, 너와 나와의 사이에서/ 젖빛 구름이 번지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

새 / 김광림
새를 겨누어/ 호흡을 멈추었다/ 멈춘 호흡 사이로/ 한 마리/ 사나운 짐승이 눈을 부라렸다/ 야만의 창끝처럼 번득였다/ 켕긴 나뭇가지/ 시원(始原)의 나뭇가지를 두고/ 마지막 잎새가 떠나갔다/ 휑 하니 공간이 뚫렸다/ 죽음이 소용돌이를 빠져 나오는/ 일순(一瞬)에도/ 총끝에서 노래하는/ 천연(天然)의 새가 있다//

소용돌이 / 김광림
타래지는 마음의 끝간데/ 모른다. 소용돌이 속/ 깊다. 들어설수록 동구(洞口) 밖은/ 고빗길. 돌아 가는 비탈진/ 생각 하늘 밖이라/ 소라 속. 그만큼 비었다.//

아드바룬이 떠 있는 풍경(風景) / 김광일
내가 허리띠를 끌러서/ 목에 거는 시늉을 하면// 아내는 어느새 만삭(滿朔)이 되어/ 숨이 차 오른다― 나.// 오늘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달고/ 귀로(歸路)에 서서/ 나는 얼마나 허전한가.// 나날이 부족(不足)되어 가는/ 생활(生活)의 궁지(窮地)위에 떠서/ 가능(可能)의 허구(虛構)를 맴도는 것은// 어려서 못한 숙제(宿題)를/ 고쳐 하는 셈인가// 그리고// 인력(引力)에의 항거(抗拒)가 이루어지는/ 감청(紺靑)의 하늘은 찢어져 가고/ 뜰에 뱉는 헛기침같은/ 너의 형상(形象)이여// 목을 꺾으며 지는/ 꽃이든가// 아니면/ 자포(自暴)의 의지(意志)로 남을까― 나.//

사중주(四重奏) / 김광림
도처에서 장롱 뒤지는 소리/ 반쯤 열린 대지(大地)의 서랍에서는/ 나프탈린 냄새가 난다/ 망각(忘却)의 유니폼을 꺼내 입으면/ 세상은 다시/ 초록의 사월(四月)이다// 지금 남녘에서는/ 융동(隆冬)의 껍질을 터치는/ 내면(內面)의 소리로 그득하다/ 북(北)으로 겨눈/ 꽃망울의 격발(擊發)이 한창이다// 턱수염을 밀어대는/ 면도(面刀)날의 쾌미(快美)/ 전지(剪枝)의 사월(四月)을 어루만지는/ 바람이 인다// 사월(四月)은 주저하지 않는다/ 사월(四月)은 곧이 곧대로 나선다/ 사월(四月)은 증오(憎惡)를 증오(憎惡)하고/ 사월(四月)은 적(敵)을 사랑하지 못한다// 싸움은 지겹지만/ 총칼이 측은할 때도 있다/ 자다가도 그리운 평화(平和)/ 누려도 아쉬운 자유(自由)/ 이 망각(忘却)의 유니폼을/ 다시 꺼내 입으면/ 사월(四月)은 한바탕/ 초록을 뒤집어 쓰는 세상이다//

음악 / 김광림
건반 위를 달리는 손가락./ 울리는 상아(象牙)해안의 해소(海嘯)./ 때로는 꽃밭에 든 향내 나는 말굽이다가/ 알프스 정상에 이는 눈사태.// 안개 낀 발코니에서/ 유리컵을 부딪는/ 포말(泡沫)이다가// 진폭(桭幅)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오는/ 나긋한 피날레// 그 화음(和音)을.//

음역(音域)에서 / 김광일
느티나무 밑에서/ 고향을 볼까.// 가지 사이로/ 옮아 앉으며/ 슬렁이는 잎새를/ 노래할까.// 간만(干滿)으로 되새긴/ 바다 기슭에서/ 소라 껍질을/ 불면// 천/ 천/ 히/ 굽은 줄기가/ 별안간에 교향(交響)하여/ 산마루에다/ 구름을/ 얹/ 듯// 눈 날리는/ 하늘에/ 잊어버린 악보(樂譜)나/ 불러댈까./ 일렁이는 마음이 협주(協奏)하는/ 별들을 볼까.//

의문(疑問)의 가지 / 김광일
한 알의 풋 실과(實果)를 위하여/ 뻗은 가지는/ 엄청나게 잎새를 피웠다간/ 도루 피나게 뜯는 까닭을 상기도 나는 모른다.// 이/ 조용한 저립(佇立)의 인사(人事) 앞에서/ 배꼽을 핥는 여유(餘裕)의/ 버릇같은 어느 날.// 덩어리로 목을 감던 설움이며 기쁨을 겪고/ 난 다음의/ 남은 일처럼이나// 어슷이 짜리는 인정(人情)의 눈짓을/ 지긋이 가누고 서서/ 표정(表情)을 깨무는/ 그런 황혼(黃昏)에// 한 알의 풋 실과(實果)를 위하여/ 알맞게 꽃 피운 보람을/기가 차서 떨구는/ 실성(失性)한 이유(理由)처럼/외따로 비껴 서서// 한때는/ 꽃나비를 안고 타래지다 말고/ 여늬 때보다 조용히 내미는/ 팔.// 가장귀여.// 나무는/ 의문(疑問)의 위치(位置)에서/ 무료(無聊)히 저무는 하루의 근지러움을 타는/ 일과(日課) 속에서/ 가장 가까운 데 닿을 하늘에/ 언제쯤 손을 얹게 될/ 아무튼 그렇게 다정한 어깨쭉지가 있으리라고/ 생각는 것이다.//

자화(自畵) / 김광일
이따금 내 얼굴은/ 난포질 하는 산(山)이다./ 메아리는 귀 먹어 들고/ 기우는 해 소일(消日)엔/ 조으는 기호(嗜好)./ 어느 날은 하락(下落)을 생각는/ 원만(圓滿)한 과일이다./ 미끈한 낭떠러지 위에 얹혀진/ 골돌한 바위이다.//

전쟁과 꿀벌 / 김광일
그것은 부러진 꽃가지 끝에/ 망울진/ 꽃봉오리와 더불어/ 터지며// 그것은 총성에 쓰러진/ 꿀벌과/ 또/ 저렇게도/ 입술이 타서/ 꿀을 치던 그날의 이야기랑 더불어// 심한 몸살 끝에/ 독이 빠져/ 죽어 가는 경우다.// 그것은― 수다한 꽃의/ 향기로운 눈시울이 꺼져 간/ 어느 소녀의 쥐어진 손바닥에서/ 따스하게 느껴진 것이다.// 아직은 티지 못한 숨결이/ 싸움의/ 언저리를 감돌며……// 그것은 오늘.// 아무렇게나 지아비가 된/ 나의 전쟁에 대해서/ 피어나는/ 잎의/ 경우와// 부러진 꽃가지마다/ 꽃이 묻는/ 계절에// 차차로 독이 빠진/ 꿀벌과/ 또/ 꿀을 치던/ 마지막의 이야기다.//

철교 / 김광일
철교를 건널 때는/ 공중에 발디딤하고/ 대지를 건너 뛰는/ 비약을 한다// 텅 빈 가슴엔/ 강물이 흘러 들고/ 애증도 없이/ 울고 있다./ 웃고 있다.// 무시로 달라지는 풍경처럼/ 얼룩이는 감정이지만/ 감정에 못 박힌 철교에선/ 매양 같아지는/ 너와 나의 차창가 표정이다.// 철교를 건널 때는/ 소리 내어 흔들리는/ 가벼운 율동/ 상하기 쉬운 마음이다.//

황홀 / 김광일
1// 금실에 매어 달린/ 꽃씨 풍선이 날아 오르면/ 열두 가지로 물드는/ 하늘의 까닭,/ 깨치는 구름이다.// 나를 바래이기에/ 더욱 맑아 오는 물소리/ 금모새 위에 궁구는 불수레가/ 체를 친 듯/ 흩어지는 먼지,/ 하늘 가득히/ 햇씨가 피어 난다.// 2// 가시밭도 헤치노라면/ 훈훈한 꽃밭 길.// 어느 때는 시장기를 알리는/ 달가운 속삼임이다.// 날음으로 하여/ 잠드는 누에 속,// 언제쯤 투명한 웃음으로 발했을까.// 상기도 기다리는 말씀을/ 다하지 못한 강물이다.//

잡초밭을 일구며 / 김광림
1// 천년의 蓮밥이 눈을 떴다는/ 희한한 소식을 전해들으며/ 오늘도 잡초밭을 일군다// 땀 흘려/ 배추씨 무씨랑/ 뿌려 보지만/ 수확을 한 적은 없어// 벌레 먹고 병들어/ 내쳐버리기가 일쑤라/ 그래도 싹을 틔운 보람으로/ 우린 흐뭇해// 2// 오랫만에 더덕을 캐며/ 수확의 기쁨 누려 본다/ 뿌리는 가꿀 줄 몰라도 돼/ 절로 엄지만큼씩은 자라니까// 여직 애기 손가락만한 것/ 차마 뽑아낼 수 없어/ 도로 고히 묻어/ 내년 이맘 때까지/ 잊어버리기로// 족히 십 년은 되었을라/ 마당 한구석에 묻어 둔/ 蛇酒 생각난다// 3// 얼마나 더 기다려야/ 흙에 묻힌 사람/ 다시 눈을 뜨나// 속 빈 미이라는/ 혼령이 돌아오기만 기다려/ 마냥 누웠는데//

환상통 / 김광림
아픈 것도/ 아픈 곳 나름이지만/ 아픈 데가 없는 데/ 아픈 것이/ 기막힌 아픔이라// 우리는 늘/ 아픔을 재며 사는가/ 가시에 찔린 아픔은/ 무릎이 까진 아픔을 따르지 못해// 어느 날/ 피댓줄에 감겨/ 쇠바퀴에 으스러진/ 뼈// 끝내/ 팔을 잘라내고서야/ 목숨을 건진 사내가/ 느닷없이/ 손가락이 아프다고 보채는데// 어렵쇼/ 없는 것이/ 있는 것마냥 아픈 것이/ 더 기막힌 아픔이라//

괜한 소리 / 김광림
혈압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중학 동창은/ 마지막 대작(對酌)을 위해 일부러 나를 찾았단다/ 반세기가 넘어도 상기「야」「자」로 통하는 사이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한때는 혀가 굳어져 제대로 말도 못했다며/ 다시 굳어지기 전에 꼭 해야겠다고/ 느닷없이 들고 나온 한마디/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 했니?/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 간신히 기어드는 목소리로/ -아니/ 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금방 가슴 속의 응어리가 터질 것만 같다./ -이 자슥아! 너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앞세워 우리 집에 찾아오셨단 말야 너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길래 나도 놀랐지 무슨 말씀이냐고 되물었지만......「제 에미도 동생들도 다 모른다니 이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야」/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하긴 그래/ 어머니는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인들 말렸을까/ 남행열차를 탄 내게 마냥 손을 흔들어 쌌던/ 누이의 모습이 지금도 삼삼한데/ 아버지의 노여움에/ 모두가 모른다고 잡아뗀 모양이다./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 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 기세가 등등해진 녀석은/ 취기까지 가세하여 사뭇 심문조다./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 그만 울먹이는 소리가 돼버렸는지/ 「야」 「자」하던 친구가/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아냐 잘했어/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 이승에서 다시 못뵈올 부모님 생각에/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리고 싶어/ 상기된 얼굴을 들이대자/ 이번엔 「야」 「자」가/ 잘못 눈물단지 건드렸나 싶었던지/ 시무룩한 목소리로/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어쩌랴//

한겨울 산책 / 김광림
안강 버스 정거장 대합실/ 톱밥 난로에/ 갈색 코오트 자락을 태우다/ 옥산 서원 앞은/ 이가 시린/ 계곡/ 어느 시골 국민학교 식물채집장이란/ 팻말이 비스듬히 떨고 있다./ 여태 동몽선습 첫장도 채 넘기지 못한/ 나요/ 광림이요/ 한참 겨울 햇살이 독락당 뜨락에서 놀다 사라졌다./ 무심코 줏어든 조약돌 하나/ 예서는 포항도 경주도 곧장인데/ 기계는 장날/ 난 대구가 향교라서/ 그만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문풍지 / 김광림 -1948년 《연합신문》에 발표
낡은 문풍지에서/ 서낭당 기와 냄새가 풍기다/ 보고/ 또 보고// 이윽히 들여다 보면/ 아슬 아슬 옛 이야기가 생각나다// 해 묵은 風紙 위에/ 빗자욱이 서려/ 千年 묵은/ 壁畵 맛이 돋아오르다//

양지 / 김광림
아가는 손바닥을 턴다.// 純粹에 부디친/ 꽃씨가 떨어진다.// 앞자락엔/ 한아람 풀내음이/ 안긴 채,어느새/ 뜰에 고인 햇살이/ 그득히/ 視力 앞에/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다릿목 / 김광림
기다려 달라던 어긋난 위치와/ 시간은 틀림없이/ 1950년의 변두리에서/ 하마 눈먼 계절/ 나비의 화분을 묻힌/ 손목은 꺾이어 갔다./ 장미의 눈시울이/ 가시를 배앝은/ 가장 참혹했던 달/ 유월은/ 포탄의 자세들로 터져 간/ 내 또래 젊음들은/ 바리케이트로 넘어져 갔다.// 포복처럼 느릿한 155마일/ 휴전선의/ 겨드랑 쑥밭길/ 지금/ 꽃과 과실과 새와 털 그리고/ 노래를 장만하며 있을 너와 나와의/ 사랑 찬 계절을 짓밟고/ 1950년/ 전차가 밀리던 해의/ 가슴팍/ 무너진 유월은/ 캐터필라의 두 줄기 자욱만 남기고 갔다//

G·마이나 / 김광림
물/ 닿은 곳// 神羔(신고)의/ 구름밑// 그늘이 앉고/ 杳然(묘연)한/ 옛/ G·마이나//

돌각담 / 김광림
廣漠(광막)한地帶(지대)이다기울기/ 시작했다잠시꺼밋했다/ 十幸型(십행형)의칼이바로꼽혔/ 다堅固(견고)하고자그마했다/ 흰옷포기가포겨놓였다/ 돌담이무너졌다다시쌓/ 았다쌓았다쌓았다돌각/ 담이쌓이고바람이자고/ 틈을타凍昏(동혼)이잦아들었/ 다포겨놓이던세번째가/ 비었다//

자연발생적 / 김광림
새가 운다/ 아니 우는 게 아니라/ 노래한다/ 아니 노래하는 게 아니라/ 외쳐댄다/ 아니다/ 그저 목청껏 울어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곧잘/ 사회니 겨레니 하며/ 그걸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들먹이지만// 글쎄 새가 운다니까/ 그래 새 울음소릴 듣고/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지만/ 실상 새는 누굴 위해 우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우는 건 더더욱 아니라/ 행복과는 상관없이/ 울고 싶어 울 뿐// 어차피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가 울 듯이/ 자연발생적으로/ 꾸밈새 없는/ 그저 하고 싶어 하면 된다//

 




김광림(金光林) 시인
1929년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忠男’이다. 고려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1948년 〈연합신문〉에 시 「문풍지」를 발표하며 시작 활동. 필명 광림은 김광균의 '光'과 김기림의 '林'을 따서 지었다. 원산과 개성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1948년 월남하여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징집되어 복무하였다.
시집으로 《상심하는 접목》《심상의 밝은 그림자》《오전의 투망》《학의 추락》《갈등》《한겨울 산책》 《언어로 만든 새》《바로 설 때 팽이는 운다》《천상의 꽃》《말의 사막에서》《곧이곧대로》《대낮의 등불》《앓는 사내》《놓친 굴렁쇠》《이 한마디》《시로 쓴 시인론》《허탈하고 플 때》《버리면 보이느니》《불효막심으로 건져낸 포에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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