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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허영자
어머니의 기도 말이 바뀌었다
평생 이웃과
가족을 위하여 올리던 기도
비로소
자신을 위하는
간절한 기도가 되었다.
"하느님 좋은 날 좋은 시에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말고
잠자듯 가만히
저 세상 가게 하소서.
어머니 말씀 / 허영자
고개 수그리고 걷는/ 겨울바람 속에/ 어머니 가만한 말씀 들려온다// “얘야 차 조심하거라”// 갈 곳 몰라 비틀거리는/ 외로운 저녁답/ 어둠 속에 어머니 음성 들려온다// “얘야, 마음 편한 것이/ 제일이다”// 옛날 그 옛날엔/ 잔소리같이 들리던 말씀/ 옛날 그 옛날엔/ 쓸데없는 걱정같이 들리던 말씀// “녜! 어머니/ 차 조심 하겠습니다/ 녜! 어머니/ 욕심없이 마음 편히 살겠습니다.”//
사모곡(思母曲) / 허영자
1 은(銀)나비// 손톱 발톱 잦아지게/ 남 유다른 세월에// 짚동 한숨은/ 소금 부벼 삭이고// 엄니 엄니/ 울 엄니는/ 나래도 빛나는/ 나비라 은(銀)나비.// 2 눈밝애 귀밝애// 다음에/ 죽은 다음에도/ 또 세상 있으믄// 자비하신 석가세존/ 그 말씀대로/ 삼월(三月)에 제비 오는 세상 있으믄야// 엄마야 오늘같이/ 바느질하는 엄마 옆에서/ 바늘에 긴 실 꿰어드리지// 새아씻적/ 옛말은/ 인두에 묻어나고// 어룽진 앞섶자락/ 섧디섧은 눈빛을/ 물려줄 테지// 이 다음에/ 죽은 다음에도/ 이런 세상에// 엄마는 울 엄마/ 나는 또 까망머리/ 엄마 딸 되리// 눈밝애 되리야/ 귀밝애 되리야.// 3 해빙기(解氷期)// 우수절(雨水節)/ 남(南)녘 바람에/ 강(江)얼음 녹누만은// 엄니 가슴 한(恨)은/ 언제 바람에/ 풀리노// 눈감아/ 깊은 잠 드시고야// 저승 따/ 다 적시는/ 궂은 비로 풀리려나.//
너무 가볍다 / 허영자
나 아기 적에/ 등에 업어 길러주신 어머니// 이제는/ 내 등에 업히신 어머니// 너무 조그맣다/ 너무 가볍다//
피리 / 허영자
어머니의 뼈는/ 피리가 되었다// 속이 빈 피리/ 어머니의 뼈는// 천파千波 만파萬波/ 헤쳐온 삶// 구십 년 세월을/ 노래로 푼다.//
말세(末世) / 허영자
거룩한 수호천사/ 어머니// 더 이상/ 당신의 후예가 없습니다//
은발 / 허영자
머리카락에/ 은발 늘어 가니/ 은의 무게만큼/ 나/ 고개를 숙이리.//
재앙의 날에 –코로나19 / 허영자
입마개를 난 한 채/ tnad를 쉬고 말을 하는 일상의 일이/ 실은 더없이 소중한 삶이던 걸 깨닫는다// 당신을 만나 반갑게 손을 잡고/ 함께 차를 마시는 소소한 일이/ 실은 더없이 행복한 삶이던 걸 깨닫는다// 침노하는 붉은 좀벌레군 앞에/ 어이없이 호피 사피엔스의 성이 무너진 날/ 재앙의 땅을 향하여 달려가는 영웅들/ 헌신과 봉사의 의인들이 천사인 날// 저자 거리에선 아직도 재앙을 팔아/ 금송아지를 사는 무리들/ 음모의 도적떼들 횡행하여도/ 예사로운 일이 예사롭지 않은 일이 되는/ 재앙의 날/ 아득한 회색의 날//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 모두는 또 누구인가/ 눈 뜬 달은 저 위에/ 벌떡이는 심장을 올려 놓는다//
재앙의 날에 2 –코로나19 / 허영자
괴질이 사람을 가두니// 다시/ 산이 산 되고/ 물이 물 되었네// 하늘이 푸르러지고/ 바다가 맑아졌네// 하나로 이어진 천지만물/ 목숨 목숨의 사슬// 홀로 앓는 이의 슬픔은/ 곧/ 홀로 앓지 않는 이의 슬픔// 비워둔 자리마다/ 짐승이 뛰놀고 물고기가 헤엄치고/ 들꽃들 피어 흐드러진 기적// 재앙의 그림자는 짙어도/ 세상 어딘가에는/ 화나게 눈부시게 빛 드는 곳 있으리.//
봄밤 / 허영자
봄밤에는/ 응달 속에 갇혔던 魂들이/ 줄줄이 어깨 겯고 살아나와 춤을 추고// 속으로 삼킨 울음/ 몰래 숨긴 사랑도/ 더는 못 참아 뛰어나와 왜장 치고// 참말 어쩔 수 없어라/ 봄밤에는// 엎드린 저 山川도/ 옷 가슴 풀어헤쳐/ 거친 잠도 자노니……//
긴 봄날 / 허영자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눈물겹기야/ 어찌 새 잎뿐이랴// 창궐하는 역병/ 죄에서조차/ 푸른 미나리 내음 난다/ 긴 봄날엔....// 숨어 사는 섧은 정부/ 난쟁이 오랑캐꽃/ 외눈 뜨고 쳐다본다/ 긴 봄날엔...//
여름 소묘 / 허영자
견디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불벼락 뙤약볕 속에/ 눈도 깜짝 않는/ 고요가 깃들거니// 외로운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저토록 황홀하고 당당한 유록도/ 밤 되면 고개 숙여/ 어둔 물이 들거니.//
가을날 / 허영자
세상엔 가을이/ 우리한텐 이별이 왔다.// 안녕히/ 늘 안녕히!// 우리는 가난한 연인이나/ 가진 것 모두 서로 주었기/ 빈 알몸으로/ 후회는 없다.// 꽃이나 나무나/ 온갖 식물이 그러하듯/ 나도/ 빛나는 사랑의 열매 하나 달고/ 이 수심(愁心) 깊은 계절을 견디리라// 정녕/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던 열정의 시간/ 보랏빛 추억의 때를/ 저 높다란/ 구름선반 위에 갈무리 하느니// 더욱 넉넉히 허용될/ 아름다운 날을 향하여/ 낙엽 쌓인 조롱길이 열린다/ 가앙가앙 푸르른/ 가을 하늘이 열린다//
가을날 2I / 허영자
쓸쓸하나 조용히/ 살기로 했다// 밤 사이/ 세상은 변하여/ 頹落의 빛에 싸이고// 그 한때/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던 때// 속삭여/ 魂을 홀리던/ 유혹의 소리......// 사랑하며/ 미워하며/ 너무 젊었었느니// 오늘에야/ 한밤중에 눈떠도/ 울지 않는다// 벅수넘어 까물치던/ 마음아 잠자거라/ 그지없이 고요한 미소의 江물// 한 폭 그림으로/ 추억의 무지개/ 걸어두고// 쓸쓸하나 조용히/ 살기로 했다.//
가을 다저녁때 / 허영자
나무들이/ 울음을 삼키고 있다/ 돌들이/ 울음을 삼키고 있다/ 조그만 귀또리도/ 울음을 삼키고 있다/ 가을/ 어느 다저녁때/ 울구 싶은 나도/ 울음을 삼키고 있다.//
가을 기도 / 허영자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쓰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먼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가을 달빛 / 허영자
달빛도 이제는/ 해쓱하게 바래어져/ 사람의 발 앞을 비추질 않고/ 가만가만 등뒤로만 따라오누나// 다소곳이 고개 숙인/ 반백(斑白)의 아내처럼/ 묻는 말에 조그맣게 대답이나 하며/ 한 걸음 뒤 처져서 따라오누나//
가을 바다 / 허영자
먼 발치에서/ 흘낏 보는 네 모습/ 나는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머니의 자궁속/ 내 육체의 고향인 그곳이/ 너를 닮았던 탓일까?/ 뿌리를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늘나를 잡아 이끌어/ 돌아와 다시 네 앞에 서면/ 그 눈빛 마다 새롭고/ 포옹마다 충족한/ 너와의 만남//
가을비 내리는 날 / 허영자
하늘이 이다지/ 서럽게 우는 날엔/ 들녘도 언덕도 울음 동무하여/ 어깨 추스리며 흐느끼고 있겠지// 성근 잎새 벌레 먹어/ 차거이 젖는 옆에/ 익은 열매 두엇 그냥 남아서/ 작별의 인사말 늦추고 있겠지// 지난 봄 지난 여름/ 떠나버린 그이도/ 혼절하여 쓰러지는 꽃잎의 아픔/ 소스라쳐 헤아리며 헤아리겠지.//
가을나무처럼 2 / 허영자
어여쁜 꽃을 떨구고/ 무성한 잎을 떨구고/ 드높은 향기를 떨구고서야// 비로소/ 한 톨/ 씨앗을 얻었구나/ 가을나무여// 꽃을 버리듯/ 잎을 버리듯/ 향기를 내버리듯/ 우리 둘이 서로를 버리면// 거기/ 진실은 남을 것인가/ 저 야문 씨앗 같은 것으로,//
씨앗 / 허영자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씨앗을 받으며 / 허영자
가을 뜨락에/ 씨앗을 받으려니/ 두 손이 송구하다// 모진 바람에 부대끼며/ 먼 세월 살아오신/ 반백의 어머니 가을 초목이여// 나는/ 바쁘게 바쁘게/ 거리를 헤매고도// 아무 얻은 것 없이/ 꺼멓게 때만 묻혀 돌아왔는데// 저리/ 알차고 여문 황금빛 생명을/ 당신은 마련하셨네// 가을 뜨락에/ 젊음이 역사한 씨앗을 받으려니// 도무지/ 두 손이 염치없다//
겨울 햇볕 / 허영자
내가 배고플 때/ 배고픔 잊으라고/ 얼굴 위에 속눈썹에 목덜미께에/ 간지럼 먹여 마구 웃기고// 또 내가 이처럼/ 북풍 속에 떨고 있을 때/ 조그만 심장이 떨고 있을 때/ 등어리 어루만져 도닥거리는// 다사로와라/ 겨울 햇볕!//
겨울연가 / 허영자
그리운 사람아/ 그리운 사람아/ 눈이 오는 겨울밤/ 말굽쳐 달리는 북풍을 싣고/ 은빛 사랑의 화살들/ 시위를 떠나거든/ 아/ 그리운 사람아/ 그리운 사람아/ 손이 닿지않던곳의 어언 과녁도/ 이밤에는 마침내 꿰뚫리거라/ 아/ 붉게물든 뜨거운 피 흘리거라/ 그리운 사람아//
7월바다 / 허영자
7월바다는 청람색 무도복을 차려입은 요정들의 굿판이다./ 찬란히 흔들리는 몸짓으로 노래사고 춤을 추는 굿판이다./ 꿈과 절망과 기쁨과 즐거움과 괴로움 모두를 한 바탕 놀이로 풀어내고 있다// 7월 바다는 흰갈기를 세운채 떼지어 달려오는 짐승들이다/ 물어 뜯을 듯 집어 삼킬 듯 뭇을 향해 달려드는 짐승들이다/ 천 길 벼랑을 사나운 발톱으로 할퀴다가도 긴 혓바닥으로 모해톱을/ 핥고는 질펀히 드러눕는다.// 7월 바다는 어질고 순한 큰 가슴이다/ 온 세상 고뇌를 받아안은 채 뭇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거룩한 가슴이다/ 삶도 죽음도 저 넓이와 깊이와 영원의 시간 앞에는 한 순간의 반짝임일뿐// 보아라/ 어부는 황금 그물을 던져 불면의 7월 바다를 후리거니/ 그가 낚는 것은 퍼덕이는 우주의 신비/ 침묵하는 심연의 허무에서 건져 올리는 빛나는 생명의 은비늘이다.//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 허영자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묵은 편지의 답장을 쓰고/ 빚진 이자까지 갚음을 해야 하리//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욱을 남겨야 하리// 주름이 잡히는 세월의 이마/ 그 늙은 슬픔 위에// 간호사의 소복 같은 흰눈은 내려라/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두엄 / 허영자
아, 어쩌면/ 꽃처럼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잎처럼 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붉디붉은/ 그 향기가 아니라면// 푸르디푸른/ 그 숨결이 아니라면// 두엄더미! 두엄더미!// 아지랑이 질펀히/ 젖어 오는 봄 들판// 문둥이처럼 썩고 있는/ 두엄더미!//
밤꽃밭 / 허영자
입술에/ 입술 포개고// 뺨에/ 뺨 부비어// 꽃들은 잠자네// 어둠은 흘러/ 땅을 적셔도// 꺼지지 않는/ 밤하늘 별빛// 눈물에/ 눈물 섞고// 마음에/ 마음 겹쳐// 아아/ 꽃들은 잠자네.//
감 / 허영자
이 맑은 가을 날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못의 시인 / 허영자
“김종철 시인!”/ 하고 부르면/ 박혔던 못이 뽑혀 올라오듯이/ 이 세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돌아와서는/ “까뜨린느 드누브!”하고/ 큰소리로 나를 놀리고는/ 호탕한 웃음소리/ 쩌렁쩌렁 울렸으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수의 아들/ 못 박혀 돌아가신 성인/ 세상의 아픈 못을 뽑으러 오셨던 분// 못을 노래한 못의 시인 그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돈독하고 신실한 신도/ 저 세상 가서도 못통을 들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못을 박고 못을 뽑으며/ 다 못한 못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무명시인 2 / 허영자
―한 시인이 말하였네 “저는 무명시인입니다.”// 너 고단하고 외로운 날/ 고개 들어 밤하늘을 보아라/ 이름 아는 별들 몇 개나 있나// 너 몹시도 울고 싶은 날/ 나아가 들판을 거닐어라/ 이름 아는 꽃과 풀 몇 개나 있나// 저리도 찬란하게/ 밤하늘 꾸미는 건/ 이름 없는 별무리// 저리도 눈부시게/ 들판을 꾸미는 건/ 이름 없는 꽃과 풀// 인류의 역사인들/ 이와 다르리//
겸손한 사람은 참 아름답다 / 허영자
겸손이란/ 참으로 자신 있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인격이다.// 자신과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열등 의식이나 비굴감은 있을지언정/ 겸손한 미덕을 갖추기 어렵다.// 겸손은 자기를 투시할 줄 아는/ 맑은 자의식을 가진/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다.// 자기의 한계를 알고/ 한정된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영원 무변성과를 대비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만이 겸손할 수가 있다.// 또한 겸손은 생명 있는 모든 것,/ 혹은 무생물의 모든 것까지/ 애련히 여기는 마음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그들의 존재함에 대한/ 외경심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뜻,/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모두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겸허함을 가진 이의 삶은 경건하다.//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함부로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며,/ 운명을 수긍하고 인내하고/ 사랑함으로써 극복하는 이이다.// 그런 사려 깊은 삶을 사는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대의 별이 되어 /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그 나무 / 허영자
어느 날 홀연히/ 그 나무가 사라졌다// 주소록에서 이름 하나를/ 또 지워야겠다// 검은 새 한 마리 기울뚱/ 서편 하늘로 날아간다.//
나목에게 / 허영자 캄캄한 밤은/ 무섭지만// 추운 겨울은/ 더 무섭지만// 나무야 떨고 섰는/ 발가벗은 나무야// 시련 끝에/ 기쁨이 오듯이// 어둠이 가면/ 아침이 오고// 겨울 끝자락에/ 봄이 기다린단다// 이 단순한 순환이/ 가르치는 지혜로// 눈물을 닦아라/ 떨고 섰는 나무야// |
내 속에 / 허영자
천둥소리가/ 내 속에 있었으면……// 세상살이에 지쳐/ 고단한 나의 영혼/ 간사스럽고 비굴해/ 그만 무릎 꿇으려 할 때/ 스스로 우는 자명고처럼/ 천둥소리 큰 꾸중 있었으면// 번갯불이/ 내 속에 있었으면……// 자잘한 일에 울고 웃는/ 소인배 되어/ 얼굴 붉히고 다툼질할 때/ 천만 도의 저 불로 담금질하여/ 다시 태어날 수 있었으면/ 아아/ 한 그릇의 정갈한 정화수가/ 내 속에 있었으면……// 때묻어 더러워지는/ 내 얼굴 내 손/ 나날이 쌓이는 아집과 노욕/ 찬물로 맑게 헹구어내어/ 새로 씻은 빨래처럼/ 깨끗해질 수 있었으면//
떡살 / 허영자
고운 네 살결 위에/ 영혼 위에/ 이 신비한/ 사랑의 문양 찍고 싶다// '이것은 내 것이다'// 땅속에 묻혀서도/ 썩지를 않을/ 저승에 가서도/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표적을 해두고 싶다//
마중물 / 이영자
언제나/ 좋은 면만 보려고/ 감사한 것만 생각하려고/ 애쓰는 당신/ 당신은/ 행복을 펌푸질 하려고/ 내 가슴에 부어 놓은/ 마중물 입니다.//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 것 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꽃피는 날 / 허영자
누구냐 누구냐/ 또 우리 맘속 설렁줄을/ 흔드는 이는// 석 달 열흘 모진 추위/ 둘치같이 앉은 魂을/ 불러내는 손님은// 팔난봉이 바람둥이/ 사낼지라도/ 문 닫을 수 없는/ 꽃의 맘이다.//
목련 / 허영자
달빛 아래선/ 너를 대하여/ 터져 나오는노래/ 사랑의 충동을 알았네.// 한해, 또 한해/ 다시 네 모습 벙그는세월을/ 나는 노래하며 기다리리니/ 네가 나의 뜰에머문/ 이 봄날 늦은밤/ 아이처럼 이리도 가슴두근거리며/ 앉았음은/ 아직도 네 어여쁨에/ 눈 떠있는/ 내 순수를 향한기쁨 때문일까?//
나팔꽃 /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킬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할미꽃 –터득 / 허영자
아/ 이렇게 사는 수도/ 있었구나// 잇몸으로/ 먹고// 잇몸으로/ 웃는.//
민들레 / 허영자
누가 불렀니// 가난한 시인의/ 좁은 마당에/ 저절로 피어난/ 노오란 민들레// 해질녘/ 골목길에 울고 섰던/ 조그만 애기/ 두 눈에/ 눈물 아직 매달은 채로/ 앞니도 한 개 빠진 채로/ 대문을 열고 들어섰구나// 만 가지 꽃이 피는/ 꽃밭을 두고/ 가난한 시인의/ 좁은 마당에// 환하게 불을 켠/ 노오란 민들레//
연 / 허영자
꽃아/ 정화수(井華水)에 씻은 몸/ 새벽마다/ 참선(參禪)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欲情)/ 그 어두움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물 / 허영자
산 속 맑은 냇물에/ 손을 씻는다// 아차/ 또 죄를 지었구나// 깨끗한 물을/ 더럽힌 죄// 손이 지은 죄를/ 물이 또 씻어낸다//
아! / 허영자
여든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늘 궁금했는데// 여든 넘어도/ 봄꽃 피면/ 아!/ 하고 놀라는 마음// 여든 넘어도/ 어여쁜 사람 만나면/ 아!/ 하고 설레는 마음// 여든 너머에도/그 놀람 그 설렘/ 그대로인 부끄러움.//
길 / 허영자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다//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다//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임 / 허영자
그윽히/ 굽어보는 눈길// 맑은 날은/ 맑은 속에// 비오며는/ 비 속에// 이슬에/ 꽃에/ 샛별에...// 임아// 이/ 온 삼라만상에// 나는/ 그대를 본다.//
빗 / 허영자
인연은 질겨라/ 두렵기도 하여라// 선생에 내가 빗던/ 참빗 얼레빗// 이승까지 따라온/ 하늘 위의 조각달// 내 마음이 헝클리나/ 지켜보고 있구나//
삶 / 허영자
살고 싶어라/ 아파/ 살고 싶어라// 한 웅큼/ 다수운 햇살에 촉이 트는/ 그런 민감함으로// 한 오리/ 가벼운 바람결에 풀잎 흔들리는/ 그런 섬세함으로// 하늘 한켠/ 슬며시 일었다 스러지는 구름/ 그런 無爲의 몸짓으로// 얼음 속 불꽃으로/ 감추인 끓는 가슴으로/ 病들며 또한 나으며......//
잡초 / 허영자
왜 이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 풀아/ 잡풀아/ 나 닮은 것아!//
가만한 시간 / 허영자
지금은/ 가만한 응시의 시간입니다/ 별도 하늘도 땅도 사람도/ 새로 태어나는 시간입니다// 사랑, 행복, 슬픔, 인연/ 모두 새로 출발하는 시간입니다// 생명 있는 것/ 생명 없는 것/ 모두 가없어 눈물 나는 시간입니다/ 무한 영원의 한 끝에서/ 제가 저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비 오는 날 / 허영자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비 맞고 서 있는 나무처럼/ 마음 젖어 서러이 흐느끼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아득히 비 내리는 신비한 바깥/ 머언 머언 내일을 내다보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박쥐우산 하나를 바람막이로/ 용감하게 세상을 밀고 가던 그때//
비 오는 밤에 / 허영자
잠이 안 옵니다/ 바깥은 밤새 비가 따루고......//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여자였습니다// 무시무시한/ 戰場에서 돌아오신 당신// 쓸쓸한 저녁답/ 거리 주막을 기웃거리는/ 당신의 고독을// 단 한 번도/ 위로할 줄 몰랐습니다// 차겁게 피가 얼은/ 도회지 여자를/ 슬프디슬프게 바라보던 당신// 뉘우침이런 듯/ 아픔이런 듯/ 이 밤은 새도록 비가 따루고......// 잠이 안 옵니다/ 자꾸/ 목이 마릅니다.//
빈 들판을 걸어가면 / 허영자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오래오래 마음으로 사모하던/ 어여쁜 사람을 만날 상 싶다// 꾸밈없는/ 진실과 순수/ 자유와 정의와 참 용기가/ 죽순처럼 돋아나는/ 의초로운 마을에 이를 상 싶다//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아득히 신비로운/ 神의 땅에까지 다다를 상 싶다.// |
어떤 날 / 허영자
쓸쓸한 날엔/ 벌판으로 나가자// 아주 매 쓸쓸한 날엔/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갈잎은 바람에/ 쑥대머리 날리고// 강물을 거슬러/ 조그만 물고기 떼/ 헤엄치고 있을 게다// 버려진 아름다움이/ 몸을 부벼 외로이/ 모여 있는 곳// 아직도 채/ 눈물 그치지 않거든/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얼음과 불꽃 / 허영자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속에/ 얼음과 눈보라를 지니고 있다// 못다 이룬 한의 서러움이/ 응어리져 얼어붙고/ 마침내 마서져 푸슬푸슬 흩내리는/ 얼음과 눈보라의 겨울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타오르는 불꽃을 꿈꾼다// 목숨의 심지에 기름이 끓는/ 황홀한 도취와 투신/ 기나긴 불운의 밤을 밝힐/ 정답고 눈물겨운 주홍빛 불꽃을 꿈꾼다.//
완행열차 /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 허영자
먼 옛날 하늘이 열리는 날/ 태벽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베풀어 펼친/ 거룩한 홍익인간의 정신/ 그 지혜를 연연히 이어온 반만년입니다// 쑥과 마늘/ 쓰겁고 매운맛을 이겨 낸 힘으로/ 고난과 고통과 억압과 슬픔의 사슬/ 아리는 아픔을 견뎌온 이 땅 백성들입니다// 비바람 회오리바람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새 문자를 만들어 등불을 밝히고/ 시와 노래와 춤 청청한 신명으로/ 가꾸고 다듬어 온 이 나라입니다// 산이여 들이여 강이여 그리고 출렁이는 바다여/ 나무여 풀이여 뭇 짐승이여 벌레들이여 그리고 사람들이여/ 우리들의 살 속에는 피속에는/ 흘러간 역사의 솔바람 소리 맑게 배어 있거니// 이제 즈믄 해의 닭 울음소리 새벽을 앞두고/ 백두와 한라가 두 손을 마주잡은 잔치에/ 둥둥 북소리 높이 올리며/ 흰옷입고 달려갈 배달 겨레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빛도/ 우리들 소망위에 영롱히 비치거니/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하늘 중심을 겨누어 활활 타오릅니다//
자수(刺繡) /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낼 듯// 머언/ 극락정토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친전(親展) / 허영자
그 이름에/ 살 속에 새긴다/ 暗靑(암청)의 文身// 不可思議(불가사의)의 윤회를 거쳐/ 마침내/ 내 영혼이 고개 숙이는 밤이여/ 무거운 운명이여// 절망의 눈비/ 회의의 미친 바람도/ 숨죽여 坐禪(좌선)하는 고요/ '사랑합니다'// 참으로 큰/ 슬픔일지라도/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살 속에/ 그 이름 새기며/ 이 봄밤/ 눈떠 새운다.//
행복 / 허영자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윗 틈새 같은 데에/ 나뭇 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
한강 / 허영자
세상에는/ 수많은 강이 있지만/ 내 나라 육백 년 은성한 도읍의/ 맑은 하늘을 싣고 흐르는 강은/ 한강 뿐이리// 세상에는/ 수많은 강이 있지만/ 북악과 삼각산 푸른 그리매/ 그 굽힘없이 기상을 담아 흐르는 강은/ 한강뿐이리// 귀 기울이면/ 흰 옷 입은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또 귀 기울이면/ 먼 내일의 창망한 세월을 노래하는/ 강물 소리// 세상에는/ 수많은 강이 있지만/ 진정 사랑하올손 어머님의 젖줄/ 구비구비 우리가슴 한 가운데를 적시며 흐르는 강은/ 한강 뿐일리//
선거판 / 허영자
1// 꿀단지 옆으로 파리 떼 꼬이듯이/ 구린내 나는 곳에 구더기 들끓듯이/ 참말로 가관이구나 시정잡배 투전판.// 2// 우습고 우습구나 배꼽 잡게 우습구나/ 어제는 주홍색 오늘은 초록으로/ 내일은 무슨 색으로 변신할래 팔색조.//
바람소리 / 허영자 이 바람소리/ 그대는 듣느냐// 솔숲끼리 부대끼며/ 아파라! 하는 소리// 대숲끼리 부대끼며/ 아파라! 하는 소리// 그대 듣는 소리/ 나는 듣느냐// 꽃잎이 꽃잎끼리/ 사람이 사람끼리// 스치며 부대끼며/ 아파라! 하는 소리.// * 교향시 연주: 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 |
소의 입장 / 허영자
아픔을 머금은 내 흰 피는/ 모두 어디로 흘러갔나?/ 우유라는 이름으로// 불고기 육회 산적 너비아니 육포 장조림 떡갈비……/ 갈비탕 설렁탕 곰탕 내장탕 꼬리탕 사골탕……/ 스테이크 스튜 로스트 커틀릿 햄버그……// 목심 등심 안심 채끝 우둔살/ 설도 사태 갈비 양지머리 앞다릿살/ 안창살 부챗살 살치살 업진살 토시살 치마살 제비추리// 모두 인간들이 내 살과 뼈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고/ 입맛대로 조각조각 내 몸에 붙여준 이름이다// 맞다, 인간들에게는/ 새김질하는 한 마리 소/ 정육점 갈고리에 걸린 한 뭉치 붉은 고깃덩어리// 하지만 내게도/ “음매”하고 부르면 돌아보는 엄마가 있고/ “음매”하고 부르면 몸 부비는 아가가 있단다.//
뻐꾸기 / 허영자
돌아온/ 각설이/ 저 각설이// 내가 왔다/ 내가 또 왔다/ 울어제끼면// 얼었던 흙살은/ 절로 터져/ 갈라지고// 벗은 나무/ 아랫도리/ 초록물로 젖는다.//
투명에 대하여 / 허영자
내가 비겁하고/ 비루할 때/ 투명은 슬피 울고 있었다// 내가 미움이고/ 어둠일 때// 내가 거짓이고/ 가면일 때// 내가 허명이고/ 풍선일 때// 내가 교거하고/ 자만할 때// 내가 인색하고/ 도척(盜?)일 때// 내가 침노하고/ 강탈할 때// 내가 시기하고/ 질투할 때//
아껴두기 / 허영자
그대 그리운/ 그리움/ 흙으로 치면/ 山만큼 쌓이고// 그대 보구 싶은/ 보구지움/ 물로 치면/ 바닷물로 질펀하여도// 아껴두기/ 사랑이라 그 말씀은/ 아껴두기// 무거워라 무거워/ 더 못 지탱한/ 서러운 毁節// 山은 무너져/ 사태나고/ 바닷물 메말라/ 쓰라린 소금으로 굳는다 해도// 아껴두기/ 정녕/ 아파라 그 말씀은/ 아껴두기.//
바다 / 허영자
우리들의 신명나는/ 춤과 노래가 모여서/ 출렁이는 저 파도가 되었을까// 우리들의 애달픈/ 그리움이 모여서/ 아득한 저 수평선이 되었을까// 우리들의 하염없는/ 눈물이 모여서/ 짜디짠 저 소금이 되었을까// 우리들의 다함없는/ 꿈이 모여서/ 돛단배 떠나가는 저 뱃길을 열었을까// 우리들의 안타까운/ 기다림이 모여서/ 갈매기 날으는 저 포구가 되었을까.//
저물녘 / 허영자
저물녘이면/ 그대 생각/ 깃으로 돌아오는/ 새처럼......// 저물녘이면/ 호젓한 외로움/ 말뚝에 몸 부비는/ 바람처럼......// 저물녘이면/ 그리운 마음/ 빈 마당에 고이는 달빛처럼......//
한 역설(逆說) / 허영자
당신이/ 내 연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눈짓과 손짓/ 슬픔과 기쁨에/ 마음 흔들리지 않게// 당신이/ 내 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캄캄한 밤하늘/ 아득한 거리에/ 눈물지우지 않게// 아아 당신이/ 내 조국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찢어진 산과 강/ 자욱한 아우성에/ 이토록 애끓이지 않게.//
사소한 개혁 / 허영자
아침에/ 일찍 깨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달라보이겠느냐// 아침에/ 일찍 깨어 일어나/ 창문 하나 여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달라보이겠느냐// 아침에/ 일찍 깨어 일어나/ 창문 하나 열고/ 찬물에 세수하고/ 깨닫는다// 세상은/ 도끼로만 고쳐지는 것이/ 아니구나.//
이순(耳順)을 넘어 / 허영자
검은 새떼들/ 멀리 날아가버린/ 빈 하늘은/ 몇 만 리//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아득히 사라져버린/ 마음 속 빈 하늘은/ 또 몇 만리.//
동그라미 / 허영자
세모돌이 네모돌이 모를 세워 싸우는데/ 달려온 동그라미 품을 열어 말한다/ 얘들아 내 안에 들어 둥글고도 둥글거라.//
적막 / 허영자
늙은이 설움은 한 두 가지 아니지만/ 사랑의 매를 드신 스승님 안 계신 것/ 섧은 일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적막일래.//
그리움 / 허영자
생선 장수 우리 어머니 몸에 밴 생선 냄새/ 남들에겐 비린내지만 나에겐 어머니 냄새/ 어머니 그리운 날은 기웃이는 어판장.//
아픈 친구 / 허영자
나는/ 삶을 이야기하는데/ 너는/ 죽음을 이야기한다// 나는/ 내일을 생각하는데/ 너는/ 순간을 생각한다// 그렇구나// 여기/ 금강석보다 영롱하고/ 영원보다 긴 순간이/ 잉걸불로 타고 있구나//
설경 2 / 허영자
지워라/ 고요히……// 눈 앞의 한 그루/ 나무를 지우고// 머나먼 외오리 길을/ 길 위의 발자욱도 지워라// 목이 메는 노래도 사랑도/ 아편의 죄(罪)도// 지우고/ 지우느니// 마침내/ 비극은 없다.//
마리아 막달라 15 / 허영자
벌레들에게/ 살을 다 뜯긴/ 잎맥만 남은 나무들이/ 그래도 가을이라고/ 고운 물이 들었습니다// 노랑, 빨강 눈부시게/ 남루(襤褸)를 물들였습니다// 마리아 막달라/ 가여운 어머니.//
관음보살님 / 허영자
보살님// 누리 고즈넉이/ 잠든 밤/ 향을 돋우어/ 영접하옵니다// 제일로 아파하는 마음에/ 제일로 소원하는 마음에/ 현신하시는/ 보살님// 그 자비로서 이 밤을/ 가난한 골방/ 형형이 타는/ 한 자루 촛불빛에 납시옵니까// 살피소서/ 사바세계의 얼룩이를/ 이쁨과/ 미움과/ 즐거움과/ 노여움// 오체를 땅에 던져/ 몸부림 치옵거니/ 어지러운 번뇌는/ 정작 탐욕에서 비롯이라 이르십니까// 한낱 티끌의 일로서/ 가장 가까운 것을 멀리두고/ 가장 정다운것에 이별하는/ 크낙한 눈이야 어느새 뜨리이까// 견딜수 없는 일을/ 참고 견딤에/ 대낮같이 열리는 사랑의 문이라면// 매향 피흐르는/ 머리 검은 영혼을/ 어느 세월에 달래보리까// 바늘 구멍 만큼도 빛이 안되는/ 칠흙 어둠의/ 울음우는 여인을/ 함께 눈물 지우시는/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고향집 / 허영자
그 날은 온 집안이/ 초상집 같았다/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강아지풀/ 송아지는 음메 음메 울고/ 아이들도 따라서 큰 소리로 울고/ 어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미소가 팔려가는 날.// 그 날은 온 집안이/ 잔칫집 같았다/ 밤새 불이 켜진 마굿간/ 가마솥에서는 물이 설설 끓고/ 어른들은 큰 소리로 웃고/ 아이들도 신나서 잠 안자고 지켰다// -새 송아지 태어나는 날.//
고향 이야기 -지리산 / 허영자
지리산은/ 오늘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토벌대원이 죽은 오늘.// 지리산은/ 한 달 전에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빨지산이 죽은 그날.// 차마/ 마주보질 못하던 두 얼굴/ 형과 아우/ 칼빈총과 따발총// 주의도 사상도 벗어놓은/ 늙은 곰배팔이와 절뚝발이/ 품에 품고 지리산은/ 그날도 오늘도 젖도록 울었다.//
고향 이야기 –멧돼지 / 허영자
농투산이 마을에는/ 아직도/ 저녁연기가 따습다// 둠벙을 푸면/ 살찐 추어가/ 한 망태기// 아이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당산나무는/ 당당히/ 마을을 지키고// “네 이 녀석들 멧돼지들아/ 논밭을 갈지도 씨 뿌리지도 않은 네가/ 곡식을 축내다니…”// 쩌렁쩌렁 울리는/ 늙은 음성이/ 아직도 우렁차다.//
성지(聖地) 상림(上林 ) / 허영자
태초에 조물주는 산을 일으켜 세우시고 평평한 들판을 만드시고 그 위에 금을 그어 물길을 열으셨다.// 산에 나무 심고 들판에 오곡 뿌리고 물속에 물고기를 노닐게 하여 인간이 살기 좋은 땅을 창조하시었다.// 지리산 한 자락을 깔고 앉은 마을,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서켠 위천 옆에는 조물주의 이 손길이 다하지 못한 창조의 마무리를 대신한 곳이 있으니 이름 하여 상림上林.// 신라의 명철사 최고운崔孤雲을 도와 흰 옷 입고 머리에 흰 띠 두른 함양 사람들, 흙을 나르고 숲을 옮기고 물길을 돌려 만든 땅 상림은 그래서 벌레도 없고 쥐도 뱀도 없는 신령한 땅이 되어 지금도 함양 사람들의 큰 절을 받고 있다. 어른께서 세배 받으시듯이 큰 절 받고 있다.//
함양의 햇빛 / 허영자
내 고향 함양에 내리는 햇빛은/ 눈부신 순금가루로 쏟아지고 있다// 솜씨 좋은 징깽맹이/ 쟁쟁 징소리로 내리고 있다// 옷이 없어 헐벗은 날에도/ 밥이 없어 배고픈 날에도// 맨살에 순금가루 바르고/ 징소리 신명으로 발을 굴렸다// 지리산 밑자락의 궁벽한 동네/ 서울이 어딘지도 궁금치 않았던 마을// 긴 이빨 드러내고 웃는 사람들/ 버섯 같은 초가지붕에 쏟아지던 순금가루.//
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 / 허영자
함양 사람들은/ 영산靈山지리산을 가슴 속에 품고 삽니다// 서운瑞雲어린 준봉峻峰/ 그 푸른 기상을 품고 삽니다// 괴로울 때나 슬플 때/ 언제나 품을 열어 맞아주는 산// 기쁠 때나 즐거울 때/ 맑은 이마를 들어 닥아 오는 산// 피로 얼룩진 역사의 한 장을/ 위천수 맑은 물로 씻어내고// 반달곰과 애기 노루/ 산나리 고사목도/ 어울려 사는 그윽한 골짝// 예나 지금이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언제 어디서나/ 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 영산 지리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일두一蠹 선생 고택古宅에서 / 허영자
그 뜨락에 서면/ 잔잔한 햇빛과 바람/ 선생의 고결한 정신인양/ 옛 숨결 그대로 고여있네// 맑음이 죄가 되고/ 옳음이 시기猜忌를 불러오던/ 탁류와 같은 세월 속에서도/ 마냥 꼿꼿하던 선비의 기상/ 소슬한 한 채 고택에 깃들어 있네//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라/ 몸소 실천하여 가르치신 만세의 귀감/ 문득 옷깃을 여미게 하네// 모진 귀양살이도/ 귀한 목숨까지도/ 대의를 위하여는 서슴없이 내맡긴/ 선생의 생애 그 향기 그대로 스며있네.//
마음 / 허영자
마음이 모나면 세상도 모나고/ 마음이 둥글면 세상도 둥글단다/ 오늘은 마음 푸르니 세상 또한 푸르러라.//
휘발유 / 허영자
휘발유같은/ 여자이고싶다/ 무게를 느끼지 않게/ 가벼운 영혼/ 뜨겁고도 위험한/ 가연성의 가슴/ 한 올 찌꺼기 남지 않는/ 순연한 휘발/ 정녕 그런 액체같은//
허영자(許英子) 시인
1938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했으며, 서울 경기여고와 숙명여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성신여대 인문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1962년 《현대문학》에 〈도정연가〉,〈사모곡〉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가을 어느 날〉,〈꽃〉,〈자수〉 등이 있으며 주요 시집으로 《가슴엔 듯 눈엔 듯》,《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그 어둠과 빛의 사랑》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은의 무게만큼》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면》 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목월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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