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허영자 시인

부흐고비 2021. 5. 26. 08:23

기도 / 허영자

 

어머니의 기도 말이 바뀌었다

평생 이웃과

가족을 위하여 올리던 기도

 

비로소

자신을 위하는

간절한 기도가 되었다.

 

"하느님 좋은 날 좋은 시에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말고

잠자듯 가만히

저 세상 가게 하소서.

 

어머니 말씀 / 허영자
고개 수그리고 걷는/ 겨울바람 속에/ 어머니 가만한 말씀 들려온다// “얘야 차 조심하거라”// 갈 곳 몰라 비틀거리는/ 외로운 저녁답/ 어둠 속에 어머니 음성 들려온다// “얘야, 마음 편한 것이/ 제일이다”// 옛날 그 옛날엔/ 잔소리같이 들리던 말씀/ 옛날 그 옛날엔/ 쓸데없는 걱정같이 들리던 말씀// “녜! 어머니/ 차 조심 하겠습니다/ 녜! 어머니/ 욕심없이 마음 편히 살겠습니다.”//

사모곡(思母曲) / 허영자
1 은(銀)나비// 손톱 발톱 잦아지게/ 남 유다른 세월에// 짚동 한숨은/ 소금 부벼 삭이고// 엄니 엄니/ 울 엄니는/ 나래도 빛나는/ 나비라 은(銀)나비.// 2 눈밝애 귀밝애// 다음에/ 죽은 다음에도/ 또 세상 있으믄// 자비하신 석가세존/ 그 말씀대로/ 삼월(三月)에 제비 오는 세상 있으믄야// 엄마야 오늘같이/ 바느질하는 엄마 옆에서/ 바늘에 긴 실 꿰어드리지// 새아씻적/ 옛말은/ 인두에 묻어나고// 어룽진 앞섶자락/ 섧디섧은 눈빛을/ 물려줄 테지// 이 다음에/ 죽은 다음에도/ 이런 세상에// 엄마는 울 엄마/ 나는 또 까망머리/ 엄마 딸 되리// 눈밝애 되리야/ 귀밝애 되리야.// 3 해빙기(解氷期)// 우수절(雨水節)/ 남(南)녘 바람에/ 강(江)얼음 녹누만은// 엄니 가슴 한(恨)은/ 언제 바람에/ 풀리노// 눈감아/ 깊은 잠 드시고야// 저승 따/ 다 적시는/ 궂은 비로 풀리려나.//

너무 가볍다 / 허영자
나 아기 적에/ 등에 업어 길러주신 어머니// 이제는/ 내 등에 업히신 어머니// 너무 조그맣다/ 너무 가볍다//

피리 / 허영자
어머니의 뼈는/ 피리가 되었다// 속이 빈 피리/ 어머니의 뼈는// 천파千波 만파萬波/ 헤쳐온 삶// 구십 년 세월을/ 노래로 푼다.//

말세(末世) / 허영자
거룩한 수호천사/ 어머니// 더 이상/ 당신의 후예가 없습니다//

은발 / 허영자
머리카락에/ 은발 늘어 가니/ 은의 무게만큼/ 나/ 고개를 숙이리.//

재앙의 날에 –코로나19 / 허영자
입마개를 난 한 채/ tnad를 쉬고 말을 하는 일상의 일이/ 실은 더없이 소중한 삶이던 걸 깨닫는다// 당신을 만나 반갑게 손을 잡고/ 함께 차를 마시는 소소한 일이/ 실은 더없이 행복한 삶이던 걸 깨닫는다// 침노하는 붉은 좀벌레군 앞에/ 어이없이 호피 사피엔스의 성이 무너진 날/ 재앙의 땅을 향하여 달려가는 영웅들/ 헌신과 봉사의 의인들이 천사인 날// 저자 거리에선 아직도 재앙을 팔아/ 금송아지를 사는 무리들/ 음모의 도적떼들 횡행하여도/ 예사로운 일이 예사롭지 않은 일이 되는/ 재앙의 날/ 아득한 회색의 날//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 모두는 또 누구인가/ 눈 뜬 달은 저 위에/ 벌떡이는 심장을 올려 놓는다//

재앙의 날에 2 –코로나19 / 허영자
괴질이 사람을 가두니// 다시/ 산이 산 되고/ 물이 물 되었네// 하늘이 푸르러지고/ 바다가 맑아졌네// 하나로 이어진 천지만물/ 목숨 목숨의 사슬// 홀로 앓는 이의 슬픔은/ 곧/ 홀로 앓지 않는 이의 슬픔// 비워둔 자리마다/ 짐승이 뛰놀고 물고기가 헤엄치고/ 들꽃들 피어 흐드러진 기적// 재앙의 그림자는 짙어도/ 세상 어딘가에는/ 화나게 눈부시게 빛 드는 곳 있으리.//

봄밤 / 허영자
봄밤에는/ 응달 속에 갇혔던 魂들이/ 줄줄이 어깨 겯고 살아나와 춤을 추고// 속으로 삼킨 울음/ 몰래 숨긴 사랑도/ 더는 못 참아 뛰어나와 왜장 치고// 참말 어쩔 수 없어라/ 봄밤에는// 엎드린 저 山川도/ 옷 가슴 풀어헤쳐/ 거친 잠도 자노니……//

긴 봄날 / 허영자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눈물겹기야/ 어찌 새 잎뿐이랴// 창궐하는 역병/ 죄에서조차/ 푸른 미나리 내음 난다/ 긴 봄날엔....// 숨어 사는 섧은 정부/ 난쟁이 오랑캐꽃/ 외눈 뜨고 쳐다본다/ 긴 봄날엔...//

여름 소묘 / 허영자
견디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불벼락 뙤약볕 속에/ 눈도 깜짝 않는/ 고요가 깃들거니// 외로운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저토록 황홀하고 당당한 유록도/ 밤 되면 고개 숙여/ 어둔 물이 들거니.//

가을날 / 허영자
세상엔 가을이/ 우리한텐 이별이 왔다.// 안녕히/ 늘 안녕히!// 우리는 가난한 연인이나/ 가진 것 모두 서로 주었기/ 빈 알몸으로/ 후회는 없다.// 꽃이나 나무나/ 온갖 식물이 그러하듯/ 나도/ 빛나는 사랑의 열매 하나 달고/ 이 수심(愁心) 깊은 계절을 견디리라// 정녕/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던 열정의 시간/ 보랏빛 추억의 때를/ 저 높다란/ 구름선반 위에 갈무리 하느니// 더욱 넉넉히 허용될/ 아름다운 날을 향하여/ 낙엽 쌓인 조롱길이 열린다/ 가앙가앙 푸르른/ 가을 하늘이 열린다//

가을날 2I / 허영자
쓸쓸하나 조용히/ 살기로 했다// 밤 사이/ 세상은 변하여/ 頹落의 빛에 싸이고// 그 한때/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던 때// 속삭여/ 魂을 홀리던/ 유혹의 소리......// 사랑하며/ 미워하며/ 너무 젊었었느니// 오늘에야/ 한밤중에 눈떠도/ 울지 않는다// 벅수넘어 까물치던/ 마음아 잠자거라/ 그지없이 고요한 미소의 江물// 한 폭 그림으로/ 추억의 무지개/ 걸어두고// 쓸쓸하나 조용히/ 살기로 했다.//

가을 다저녁때 / 허영자
나무들이/ 울음을 삼키고 있다/ 돌들이/ 울음을 삼키고 있다/ 조그만 귀또리도/ 울음을 삼키고 있다/ 가을/ 어느 다저녁때/ 울구 싶은 나도/ 울음을 삼키고 있다.//

가을 기도 / 허영자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쓰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먼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가을 달빛 / 허영자
달빛도 이제는/ 해쓱하게 바래어져/ 사람의 발 앞을 비추질 않고/ 가만가만 등뒤로만 따라오누나// 다소곳이 고개 숙인/ 반백(斑白)의 아내처럼/ 묻는 말에 조그맣게 대답이나 하며/ 한 걸음 뒤 처져서 따라오누나//

가을 바다 / 허영자
먼 발치에서/ 흘낏 보는 네 모습/ 나는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머니의 자궁속/ 내 육체의 고향인 그곳이/ 너를 닮았던 탓일까?/ 뿌리를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늘나를 잡아 이끌어/ 돌아와 다시 네 앞에 서면/ 그 눈빛 마다 새롭고/ 포옹마다 충족한/ 너와의 만남//

가을비 내리는 날 / 허영자
하늘이 이다지/ 서럽게 우는 날엔/ 들녘도 언덕도 울음 동무하여/ 어깨 추스리며 흐느끼고 있겠지// 성근 잎새 벌레 먹어/ 차거이 젖는 옆에/ 익은 열매 두엇 그냥 남아서/ 작별의 인사말 늦추고 있겠지// 지난 봄 지난 여름/ 떠나버린 그이도/ 혼절하여 쓰러지는 꽃잎의 아픔/ 소스라쳐 헤아리며 헤아리겠지.//

가을나무처럼 2 / 허영자
어여쁜 꽃을 떨구고/ 무성한 잎을 떨구고/ 드높은 향기를 떨구고서야// 비로소/ 한 톨/ 씨앗을 얻었구나/ 가을나무여// 꽃을 버리듯/ 잎을 버리듯/ 향기를 내버리듯/ 우리 둘이 서로를 버리면// 거기/ 진실은 남을 것인가/ 저 야문 씨앗 같은 것으로,//

씨앗 / 허영자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씨앗을 받으며 / 허영자
가을 뜨락에/ 씨앗을 받으려니/ 두 손이 송구하다// 모진 바람에 부대끼며/ 먼 세월 살아오신/ 반백의 어머니 가을 초목이여// 나는/ 바쁘게 바쁘게/ 거리를 헤매고도// 아무 얻은 것 없이/ 꺼멓게 때만 묻혀 돌아왔는데// 저리/ 알차고 여문 황금빛 생명을/ 당신은 마련하셨네// 가을 뜨락에/ 젊음이 역사한 씨앗을 받으려니// 도무지/ 두 손이 염치없다//

겨울 햇볕 / 허영자
내가 배고플 때/ 배고픔 잊으라고/ 얼굴 위에 속눈썹에 목덜미께에/ 간지럼 먹여 마구 웃기고// 또 내가 이처럼/ 북풍 속에 떨고 있을 때/ 조그만 심장이 떨고 있을 때/ 등어리 어루만져 도닥거리는// 다사로와라/ 겨울 햇볕!//

겨울연가 / 허영자

그리운 사람아/ 그리운 사람아/ 눈이 오는 겨울밤/ 말굽쳐 달리는 북풍을 싣고/ 은빛 사랑의 화살들/ 시위를 떠나거든/ 아/ 그리운 사람아/ 그리운 사람아/ 손이 닿지않던곳의 어언 과녁도/ 이밤에는 마침내 꿰뚫리거라/ 아/ 붉게물든 뜨거운 피 흘리거라/ 그리운 사람아//

7월바다 / 허영자
7월바다는 청람색 무도복을 차려입은 요정들의 굿판이다./ 찬란히 흔들리는 몸짓으로 노래사고 춤을 추는 굿판이다./ 꿈과 절망과 기쁨과 즐거움과 괴로움 모두를 한 바탕 놀이로 풀어내고 있다// 7월 바다는 흰갈기를 세운채 떼지어 달려오는 짐승들이다/ 물어 뜯을 듯 집어 삼킬 듯 뭇을 향해 달려드는 짐승들이다/ 천 길 벼랑을 사나운 발톱으로 할퀴다가도 긴 혓바닥으로 모해톱을/ 핥고는 질펀히 드러눕는다.// 7월 바다는 어질고 순한 큰 가슴이다/ 온 세상 고뇌를 받아안은 채 뭇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거룩한 가슴이다/ 삶도 죽음도 저 넓이와 깊이와 영원의 시간 앞에는 한 순간의 반짝임일뿐// 보아라/ 어부는 황금 그물을 던져 불면의 7월 바다를 후리거니/ 그가 낚는 것은 퍼덕이는 우주의 신비/ 침묵하는 심연의 허무에서 건져 올리는 빛나는 생명의 은비늘이다.//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 허영자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묵은 편지의 답장을 쓰고/ 빚진 이자까지 갚음을 해야 하리//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욱을 남겨야 하리// 주름이 잡히는 세월의 이마/ 그 늙은 슬픔 위에// 간호사의 소복 같은 흰눈은 내려라/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두엄 / 허영자
아, 어쩌면/ 꽃처럼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잎처럼 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붉디붉은/ 그 향기가 아니라면// 푸르디푸른/ 그 숨결이 아니라면// 두엄더미! 두엄더미!// 아지랑이 질펀히/ 젖어 오는 봄 들판// 문둥이처럼 썩고 있는/ 두엄더미!//

밤꽃밭 / 허영자
입술에/ 입술 포개고// 뺨에/ 뺨 부비어// 꽃들은 잠자네// 어둠은 흘러/ 땅을 적셔도// 꺼지지 않는/ 밤하늘 별빛// 눈물에/ 눈물 섞고// 마음에/ 마음 겹쳐// 아아/ 꽃들은 잠자네.//

감 / 허영자
이 맑은 가을 날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못의 시인 / 허영자
“김종철 시인!”/ 하고 부르면/ 박혔던 못이 뽑혀 올라오듯이/ 이 세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돌아와서는/ “까뜨린느 드누브!”하고/ 큰소리로 나를 놀리고는/ 호탕한 웃음소리/ 쩌렁쩌렁 울렸으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수의 아들/ 못 박혀 돌아가신 성인/ 세상의 아픈 못을 뽑으러 오셨던 분// 못을 노래한 못의 시인 그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돈독하고 신실한 신도/ 저 세상 가서도 못통을 들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못을 박고 못을 뽑으며/ 다 못한 못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무명시인 2 / 허영자
―한 시인이 말하였네 “저는 무명시인입니다.”// 너 고단하고 외로운 날/ 고개 들어 밤하늘을 보아라/ 이름 아는 별들 몇 개나 있나// 너 몹시도 울고 싶은 날/ 나아가 들판을 거닐어라/ 이름 아는 꽃과 풀 몇 개나 있나// 저리도 찬란하게/ 밤하늘 꾸미는 건/ 이름 없는 별무리// 저리도 눈부시게/ 들판을 꾸미는 건/ 이름 없는 꽃과 풀// 인류의 역사인들/ 이와 다르리//

겸손한 사람은 참 아름답다 / 허영자
겸손이란/ 참으로 자신 있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인격이다.// 자신과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열등 의식이나 비굴감은 있을지언정/ 겸손한 미덕을 갖추기 어렵다.// 겸손은 자기를 투시할 줄 아는/ 맑은 자의식을 가진/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다.// 자기의 한계를 알고/ 한정된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영원 무변성과를 대비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만이 겸손할 수가 있다.// 또한 겸손은 생명 있는 모든 것,/ 혹은 무생물의 모든 것까지/ 애련히 여기는 마음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그들의 존재함에 대한/ 외경심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뜻,/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모두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겸허함을 가진 이의 삶은 경건하다.//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함부로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며,/ 운명을 수긍하고 인내하고/ 사랑함으로써 극복하는 이이다.// 그런 사려 깊은 삶을 사는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대의 별이 되어 /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그 나무 / 허영자
어느 날 홀연히/ 그 나무가 사라졌다// 주소록에서 이름 하나를/ 또 지워야겠다// 검은 새 한 마리 기울뚱/ 서편 하늘로 날아간다.//

                       나목에게 / 허영자


  캄캄한 밤은/ 무섭지만//

  추운 겨울은/ 더 무섭지만//

  나무야 떨고 섰는/ 발가벗은 나무야//
  시련 끝에/ 기쁨이 오듯이//

  어둠이 가면/ 아침이 오고//
  겨울 끝자락에/ 봄이 기다린단다//

  이 단순한 순환이/ 가르치는 지혜로//
  눈물을 닦아라/ 떨고 섰는 나무야//


내 속에 / 허영자
천둥소리가/ 내 속에 있었으면……// 세상살이에 지쳐/ 고단한 나의 영혼/ 간사스럽고 비굴해/ 그만 무릎 꿇으려 할 때/ 스스로 우는 자명고처럼/ 천둥소리 큰 꾸중 있었으면// 번갯불이/ 내 속에 있었으면……// 자잘한 일에 울고 웃는/ 소인배 되어/ 얼굴 붉히고 다툼질할 때/ 천만 도의 저 불로 담금질하여/ 다시 태어날 수 있었으면/ 아아/ 한 그릇의 정갈한 정화수가/ 내 속에 있었으면……// 때묻어 더러워지는/ 내 얼굴 내 손/ 나날이 쌓이는 아집과 노욕/ 찬물로 맑게 헹구어내어/ 새로 씻은 빨래처럼/ 깨끗해질 수 있었으면//

떡살 / 허영자
고운 네 살결 위에/ 영혼 위에/ 이 신비한/ 사랑의 문양 찍고 싶다// '이것은 내 것이다'// 땅속에 묻혀서도/ 썩지를 않을/ 저승에 가서도/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표적을 해두고 싶다//

마중물 / 이영자
언제나/ 좋은 면만 보려고/ 감사한 것만 생각하려고/ 애쓰는 당신/ 당신은/ 행복을 펌푸질 하려고/ 내 가슴에 부어 놓은/ 마중물 입니다.//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 것 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꽃피는 날 / 허영자
누구냐 누구냐/ 또 우리 맘속 설렁줄을/ 흔드는 이는// 석 달 열흘 모진 추위/ 둘치같이 앉은 魂을/ 불러내는 손님은// 팔난봉이 바람둥이/ 사낼지라도/ 문 닫을 수 없는/ 꽃의 맘이다.//

목련 / 허영자
​달빛 아래선/ 너를 대하여/ 터져 나오는노래/ 사랑의 충동을 알았네.// 한해, 또 한해/ 다시 네 모습 벙그는세월을/ 나는 노래하며 기다리리니/ 네가 나의 뜰에머문/ 이 봄날 늦은밤/ 아이처럼 이리도 가슴두근거리며/ 앉았음은/ 아직도 네 어여쁨에/ 눈 떠있는/ 내 순수를 향한기쁨 때문일까?//

나팔꽃 /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킬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할미꽃 –터득 / 허영자
아/ 이렇게 사는 수도/ 있었구나// 잇몸으로/ 먹고// 잇몸으로/ 웃는.//

민들레 / 허영자
누가 불렀니// 가난한 시인의/ 좁은 마당에/ 저절로 피어난/ 노오란 민들레// 해질녘/ 골목길에 울고 섰던/ 조그만 애기/ 두 눈에/ 눈물 아직 매달은 채로/ 앞니도 한 개 빠진 채로/ 대문을 열고 들어섰구나// 만 가지 꽃이 피는/ 꽃밭을 두고/ 가난한 시인의/ 좁은 마당에// 환하게 불을 켠/ 노오란 민들레//

연 / 허영자
꽃아/ 정화수(井華水)에 씻은 몸/ 새벽마다/ 참선(參禪)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欲情)/ 그 어두움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물 / 허영자
산 속 맑은 냇물에/ 손을 씻는다// 아차/ 또 죄를 지었구나// 깨끗한 물을/ 더럽힌 죄// 손이 지은 죄를/ 물이 또 씻어낸다//

아! / 허영자
여든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늘 궁금했는데// 여든 넘어도/ 봄꽃 피면/ 아!/ 하고 놀라는 마음// 여든 넘어도/ 어여쁜 사람 만나면/ 아!/ 하고 설레는 마음// 여든 너머에도/그 놀람 그 설렘/ 그대로인 부끄러움.//

길 / 허영자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다//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다//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임 / 허영자
그윽히/ 굽어보는 눈길// 맑은 날은/ 맑은 속에// 비오며는/ 비 속에// 이슬에/ 꽃에/ 샛별에...// 임아// 이/ 온 삼라만상에// 나는/ 그대를 본다.//

빗 / 허영자
인연은 질겨라/ 두렵기도 하여라// 선생에 내가 빗던/ 참빗 얼레빗// 이승까지 따라온/ 하늘 위의 조각달// 내 마음이 헝클리나/ 지켜보고 있구나//

삶 / 허영자
살고 싶어라/ 아파/ 살고 싶어라// 한 웅큼/ 다수운 햇살에 촉이 트는/ 그런 민감함으로// 한 오리/ 가벼운 바람결에 풀잎 흔들리는/ 그런 섬세함으로// 하늘 한켠/ 슬며시 일었다 스러지는 구름/ 그런 無爲의 몸짓으로// 얼음 속 불꽃으로/ 감추인 끓는 가슴으로/ 病들며 또한 나으며......//

잡초 / 허영자
왜 이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 풀아/ 잡풀아/ 나 닮은 것아!//

가만한 시간 / 허영자
지금은/ 가만한 응시의 시간입니다/ 별도 하늘도 땅도 사람도/ 새로 태어나는 시간입니다// 사랑, 행복, 슬픔, 인연/ 모두 새로 출발하는 시간입니다// 생명 있는 것/ 생명 없는 것/ 모두 가없어 눈물 나는 시간입니다/ 무한 영원의 한 끝에서/ 제가 저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비 오는 날 / 허영자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비 맞고 서 있는 나무처럼/ 마음 젖어 서러이 흐느끼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아득히 비 내리는 신비한 바깥/ 머언 머언 내일을 내다보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박쥐우산 하나를 바람막이로/ 용감하게 세상을 밀고 가던 그때//

비 오는 밤에 / 허영자
잠이 안 옵니다/ 바깥은 밤새 비가 따루고......//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여자였습니다// 무시무시한/ 戰場에서 돌아오신 당신// 쓸쓸한 저녁답/ 거리 주막을 기웃거리는/ 당신의 고독을// 단 한 번도/ 위로할 줄 몰랐습니다// 차겁게 피가 얼은/ 도회지 여자를/ 슬프디슬프게 바라보던 당신// 뉘우침이런 듯/ 아픔이런 듯/ 이 밤은 새도록 비가 따루고......// 잠이 안 옵니다/ 자꾸/ 목이 마릅니다.//

          빈 들판을 걸어가면 / 허영자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오래오래 마음으로 사모하던/ 어여쁜 사람을 만날 상 싶다//

꾸밈없는/ 진실과 순수/ 자유와 정의와 참 용기가/ 죽순처럼 돋아나는/ 의초로운 마을에 이를 상 싶다//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아득히 신비로운/ 神의 땅에까지 다다를 상 싶다.//


어떤 날 / 허영자
쓸쓸한 날엔/ 벌판으로 나가자// 아주 매 쓸쓸한 날엔/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갈잎은 바람에/ 쑥대머리 날리고// 강물을 거슬러/ 조그만 물고기 떼/ 헤엄치고 있을 게다// 버려진 아름다움이/ 몸을 부벼 외로이/ 모여 있는 곳// 아직도 채/ 눈물 그치지 않거든/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얼음과 불꽃 / 허영자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속에/ 얼음과 눈보라를 지니고 있다// 못다 이룬 한의 서러움이/ 응어리져 얼어붙고/ 마침내 마서져 푸슬푸슬 흩내리는/ 얼음과 눈보라의 겨울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타오르는 불꽃을 꿈꾼다// 목숨의 심지에 기름이 끓는/ 황홀한 도취와 투신/ 기나긴 불운의 밤을 밝힐/ 정답고 눈물겨운 주홍빛 불꽃을 꿈꾼다.//

완행열차 /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 허영자
먼 옛날 하늘이 열리는 날/ 태벽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베풀어 펼친/ 거룩한 홍익인간의 정신/ 그 지혜를 연연히 이어온 반만년입니다// 쑥과 마늘/ 쓰겁고 매운맛을 이겨 낸 힘으로/ 고난과 고통과 억압과 슬픔의 사슬/ 아리는 아픔을 견뎌온 이 땅 백성들입니다// 비바람 회오리바람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새 문자를 만들어 등불을 밝히고/ 시와 노래와 춤 청청한 신명으로/ 가꾸고 다듬어 온 이 나라입니다// 산이여 들이여 강이여 그리고 출렁이는 바다여/ 나무여 풀이여 뭇 짐승이여 벌레들이여 그리고 사람들이여/ 우리들의 살 속에는 피속에는/ 흘러간 역사의 솔바람 소리 맑게 배어 있거니// 이제 즈믄 해의 닭 울음소리 새벽을 앞두고/ 백두와 한라가 두 손을 마주잡은 잔치에/ 둥둥 북소리 높이 올리며/ 흰옷입고 달려갈 배달 겨레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빛도/ 우리들 소망위에 영롱히 비치거니/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하늘 중심을 겨누어 활활 타오릅니다//

자수(刺繡) /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낼 듯// 머언/ 극락정토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친전(親展) / 허영자
그 이름에/ 살 속에 새긴다/ 暗靑(암청)의 文身// 不可思議(불가사의)의 윤회를 거쳐/ 마침내/ 내 영혼이 고개 숙이는 밤이여/ 무거운 운명이여// 절망의 눈비/ 회의의 미친 바람도/ 숨죽여 坐禪(좌선)하는 고요/ '사랑합니다'// 참으로 큰/ 슬픔일지라도/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살 속에/ 그 이름 새기며/ 이 봄밤/ 눈떠 새운다.//

                      행복 / 허영자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윗 틈새 같은 데에/ 나뭇 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한강 / 허영자
세상에는/ 수많은 강이 있지만/ 내 나라 육백 년 은성한 도읍의/ 맑은 하늘을 싣고 흐르는 강은/ 한강 뿐이리// 세상에는/ 수많은 강이 있지만/ 북악과 삼각산 푸른 그리매/ 그 굽힘없이 기상을 담아 흐르는 강은/ 한강뿐이리// 귀 기울이면/ 흰 옷 입은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또 귀 기울이면/ 먼 내일의 창망한 세월을 노래하는/ 강물 소리// 세상에는/ 수많은 강이 있지만/ 진정 사랑하올손 어머님의 젖줄/ 구비구비 우리가슴 한 가운데를 적시며 흐르는 강은/ 한강 뿐일리//

선거판 / 허영자
1// 꿀단지 옆으로 파리 떼 꼬이듯이/ 구린내 나는 곳에 구더기 들끓듯이/ 참말로 가관이구나 시정잡배 투전판.// 2// 우습고 우습구나 배꼽 잡게 우습구나/ 어제는 주홍색 오늘은 초록으로/ 내일은 무슨 색으로 변신할래 팔색조.//

             바람소리 / 허영자

이 바람소리/ 그대는 듣느냐//

솔숲끼리 부대끼며/ 아파라! 하는 소리//

대숲끼리 부대끼며/ 아파라! 하는 소리//

그대 듣는 소리/ 나는 듣느냐//

꽃잎이 꽃잎끼리/ 사람이 사람끼리//

스치며 부대끼며/ 아파라! 하는 소리.//

   * 교향시 연주: 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


소의 입장 / 허영자
아픔을 머금은 내 흰 피는/ 모두 어디로 흘러갔나?/ 우유라는 이름으로// 불고기 육회 산적 너비아니 육포 장조림 떡갈비……/ 갈비탕 설렁탕 곰탕 내장탕 꼬리탕 사골탕……/ 스테이크 스튜 로스트 커틀릿 햄버그……// 목심 등심 안심 채끝 우둔살/ 설도 사태 갈비 양지머리 앞다릿살/ 안창살 부챗살 살치살 업진살 토시살 치마살 제비추리// 모두 인간들이 내 살과 뼈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고/ 입맛대로 조각조각 내 몸에 붙여준 이름이다// 맞다, 인간들에게는/ 새김질하는 한 마리 소/ 정육점 갈고리에 걸린 한 뭉치 붉은 고깃덩어리// 하지만 내게도/ “음매”하고 부르면 돌아보는 엄마가 있고/ “음매”하고 부르면 몸 부비는 아가가 있단다.//

뻐꾸기 / 허영자
돌아온/ 각설이/ 저 각설이// 내가 왔다/ 내가 또 왔다/ 울어제끼면// 얼었던 흙살은/ 절로 터져/ 갈라지고// 벗은 나무/ 아랫도리/ 초록물로 젖는다.//

투명에 대하여 / 허영자
내가 비겁하고/ 비루할 때/ 투명은 슬피 울고 있었다// 내가 미움이고/ 어둠일 때// 내가 거짓이고/ 가면일 때// 내가 허명이고/ 풍선일 때// 내가 교거하고/ 자만할 때// 내가 인색하고/ 도척(盜?)일 때// 내가 침노하고/ 강탈할 때// 내가 시기하고/ 질투할 때//

아껴두기 / 허영자
그대 그리운/ 그리움/ 흙으로 치면/ 山만큼 쌓이고// 그대 보구 싶은/ 보구지움/ 물로 치면/ 바닷물로 질펀하여도// 아껴두기/ 사랑이라 그 말씀은/ 아껴두기// 무거워라 무거워/ 더 못 지탱한/ 서러운 毁節// 山은 무너져/ 사태나고/ 바닷물 메말라/ 쓰라린 소금으로 굳는다 해도// 아껴두기/ 정녕/ 아파라 그 말씀은/ 아껴두기.//

바다 / 허영자
우리들의 신명나는/ 춤과 노래가 모여서/ 출렁이는 저 파도가 되었을까// 우리들의 애달픈/ 그리움이 모여서/ 아득한 저 수평선이 되었을까// 우리들의 하염없는/ 눈물이 모여서/ 짜디짠 저 소금이 되었을까// 우리들의 다함없는/ 꿈이 모여서/ 돛단배 떠나가는 저 뱃길을 열었을까// 우리들의 안타까운/ 기다림이 모여서/ 갈매기 날으는 저 포구가 되었을까.//

저물녘 / 허영자
저물녘이면/ 그대 생각/ 깃으로 돌아오는/ 새처럼......// 저물녘이면/ 호젓한 외로움/ 말뚝에 몸 부비는/ 바람처럼......// 저물녘이면/ 그리운 마음/ 빈 마당에 고이는 달빛처럼......//

한 역설(逆說) / 허영자
당신이/ 내 연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눈짓과 손짓/ 슬픔과 기쁨에/ 마음 흔들리지 않게// 당신이/ 내 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캄캄한 밤하늘/ 아득한 거리에/ 눈물지우지 않게// 아아 당신이/ 내 조국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찢어진 산과 강/ 자욱한 아우성에/ 이토록 애끓이지 않게.//

사소한 개혁 / 허영자
아침에/ 일찍 깨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달라보이겠느냐// 아침에/ 일찍 깨어 일어나/ 창문 하나 여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달라보이겠느냐// 아침에/ 일찍 깨어 일어나/ 창문 하나 열고/ 찬물에 세수하고/ 깨닫는다// 세상은/ 도끼로만 고쳐지는 것이/ 아니구나.//

이순(耳順)을 넘어 / 허영자
검은 새떼들/ 멀리 날아가버린/ 빈 하늘은/ 몇 만 리//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아득히 사라져버린/ 마음 속 빈 하늘은/ 또 몇 만리.//

동그라미 / 허영자
세모돌이 네모돌이 모를 세워 싸우는데/ 달려온 동그라미 품을 열어 말한다/ 얘들아 내 안에 들어 둥글고도 둥글거라.//

적막 / 허영자
늙은이 설움은 한 두 가지 아니지만/ 사랑의 매를 드신 스승님 안 계신 것/ 섧은 일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적막일래.//

그리움 / 허영자
생선 장수 우리 어머니 몸에 밴 생선 냄새/ 남들에겐 비린내지만 나에겐 어머니 냄새/ 어머니 그리운 날은 기웃이는 어판장.//

아픈 친구 / 허영자
나는/ 삶을 이야기하는데/ 너는/ 죽음을 이야기한다// 나는/ 내일을 생각하는데/ 너는/ 순간을 생각한다// 그렇구나// 여기/ 금강석보다 영롱하고/ 영원보다 긴 순간이/ 잉걸불로 타고 있구나//

설경 2 / 허영자
지워라/ 고요히……// 눈 앞의 한 그루/ 나무를 지우고// 머나먼 외오리 길을/ 길 위의 발자욱도 지워라// 목이 메는 노래도 사랑도/ 아편의 죄(罪)도// 지우고/ 지우느니// 마침내/ 비극은 없다.//

마리아 막달라 15 / 허영자
벌레들에게/ 살을 다 뜯긴/ 잎맥만 남은 나무들이/ 그래도 가을이라고/ 고운 물이 들었습니다// 노랑, 빨강 눈부시게/ 남루(襤褸)를 물들였습니다// 마리아 막달라/ 가여운 어머니.//


관음보살님 / 허영자
보살님// 누리 고즈넉이/ 잠든 밤/ 향을 돋우어/ 영접하옵니다// 제일로 아파하는 마음에/ 제일로 소원하는 마음에/ 현신하시는/ 보살님// 그 자비로서 이 밤을/ 가난한 골방/ 형형이 타는/ 한 자루 촛불빛에 납시옵니까// 살피소서/ 사바세계의 얼룩이를/ 이쁨과/ 미움과/ 즐거움과/ 노여움// 오체를 땅에 던져/ 몸부림 치옵거니/ 어지러운 번뇌는/ 정작 탐욕에서 비롯이라 이르십니까// 한낱 티끌의 일로서/ 가장 가까운 것을 멀리두고/ 가장 정다운것에 이별하는/ 크낙한 눈이야 어느새 뜨리이까// 견딜수 없는 일을/ 참고 견딤에/ 대낮같이 열리는 사랑의 문이라면// 매향 피흐르는/ 머리 검은 영혼을/ 어느 세월에 달래보리까// 바늘 구멍 만큼도 빛이 안되는/ 칠흙 어둠의/ 울음우는 여인을/ 함께 눈물 지우시는/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고향집 / 허영자
그 날은 온 집안이/ 초상집 같았다/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강아지풀/ 송아지는 음메 음메 울고/ 아이들도 따라서 큰 소리로 울고/ 어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미소가 팔려가는 날.// 그 날은 온 집안이/ 잔칫집 같았다/ 밤새 불이 켜진 마굿간/ 가마솥에서는 물이 설설 끓고/ 어른들은 큰 소리로 웃고/ 아이들도 신나서 잠 안자고 지켰다// -새 송아지 태어나는 날.//

고향 이야기 -지리산 / 허영자
지리산은/ 오늘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토벌대원이 죽은 오늘.// 지리산은/ 한 달 전에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빨지산이 죽은 그날.// 차마/ 마주보질 못하던 두 얼굴/ 형과 아우/ 칼빈총과 따발총// 주의도 사상도 벗어놓은/ 늙은 곰배팔이와 절뚝발이/ 품에 품고 지리산은/ 그날도 오늘도 젖도록 울었다.//

고향 이야기 –멧돼지 / 허영자
농투산이 마을에는/ 아직도/ 저녁연기가 따습다// 둠벙을 푸면/ 살찐 추어가/ 한 망태기// 아이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당산나무는/ 당당히/ 마을을 지키고// “네 이 녀석들 멧돼지들아/ 논밭을 갈지도 씨 뿌리지도 않은 네가/ 곡식을 축내다니…”// 쩌렁쩌렁 울리는/ 늙은 음성이/ 아직도 우렁차다.//

성지(聖地) 상림(上林 ) / 허영자
태초에 조물주는 산을 일으켜 세우시고 평평한 들판을 만드시고 그 위에 금을 그어 물길을 열으셨다.// 산에 나무 심고 들판에 오곡 뿌리고 물속에 물고기를 노닐게 하여 인간이 살기 좋은 땅을 창조하시었다.// 지리산 한 자락을 깔고 앉은 마을,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서켠 위천 옆에는 조물주의 이 손길이 다하지 못한 창조의 마무리를 대신한 곳이 있으니 이름 하여 상림上林.// 신라의 명철사 최고운崔孤雲을 도와 흰 옷 입고 머리에 흰 띠 두른 함양 사람들, 흙을 나르고 숲을 옮기고 물길을 돌려 만든 땅 상림은 그래서 벌레도 없고 쥐도 뱀도 없는 신령한 땅이 되어 지금도 함양 사람들의 큰 절을 받고 있다. 어른께서 세배 받으시듯이 큰 절 받고 있다.//

함양의 햇빛 / 허영자
내 고향 함양에 내리는 햇빛은/ 눈부신 순금가루로 쏟아지고 있다// 솜씨 좋은 징깽맹이/ 쟁쟁 징소리로 내리고 있다// 옷이 없어 헐벗은 날에도/ 밥이 없어 배고픈 날에도// 맨살에 순금가루 바르고/ 징소리 신명으로 발을 굴렸다// 지리산 밑자락의 궁벽한 동네/ 서울이 어딘지도 궁금치 않았던 마을// 긴 이빨 드러내고 웃는 사람들/ 버섯 같은 초가지붕에 쏟아지던 순금가루.//

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 / 허영자
함양 사람들은/ 영산靈山지리산을 가슴 속에 품고 삽니다// 서운瑞雲어린 준봉峻峰/ 그 푸른 기상을 품고 삽니다// 괴로울 때나 슬플 때/ 언제나 품을 열어 맞아주는 산// 기쁠 때나 즐거울 때/ 맑은 이마를 들어 닥아 오는 산// 피로 얼룩진 역사의 한 장을/ 위천수 맑은 물로 씻어내고// 반달곰과 애기 노루/ 산나리 고사목도/ 어울려 사는 그윽한 골짝// 예나 지금이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언제 어디서나/ 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 영산 지리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일두一蠹 선생 고택古宅에서 / 허영자
그 뜨락에 서면/ 잔잔한 햇빛과 바람/ 선생의 고결한 정신인양/ 옛 숨결 그대로 고여있네// 맑음이 죄가 되고/ 옳음이 시기猜忌를 불러오던/ 탁류와 같은 세월 속에서도/ 마냥 꼿꼿하던 선비의 기상/ 소슬한 한 채 고택에 깃들어 있네//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라/ 몸소 실천하여 가르치신 만세의 귀감/ 문득 옷깃을 여미게 하네// 모진 귀양살이도/ 귀한 목숨까지도/ 대의를 위하여는 서슴없이 내맡긴/ 선생의 생애 그 향기 그대로 스며있네.//

마음 / 허영자
마음이 모나면 세상도 모나고/ 마음이 둥글면 세상도 둥글단다/ 오늘은 마음 푸르니 세상 또한 푸르러라.//

휘발유 / 허영자
휘발유같은/ 여자이고싶다/ 무게를 느끼지 않게/ 가벼운 영혼/ 뜨겁고도 위험한/ 가연성의 가슴/ 한 올 찌꺼기 남지 않는/ 순연한 휘발/ 정녕 그런 액체같은//

 



허영자(許英子) 시인
1938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했으며, 서울 경기여고와 숙명여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성신여대 인문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1962년 《현대문학》에 〈도정연가〉,〈사모곡〉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가을 어느 날〉,〈꽃〉,〈자수〉 등이 있으며 주요 시집으로 《가슴엔 듯 눈엔 듯》,《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그 어둠과 빛의 사랑》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은의 무게만큼》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면》 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목월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문화저널21≫ 스미되 젖지 않는 원숙함, 물들되 바래지 않는 절제

허영자 시인허영자 시인을 만날 때마다 드는 느낌이 있다. 세월의 파도를 정면에서 응수하면서도 사뭇 부드럽게 타고 넘는 사람들의 결기와 여유 같은

www.mhj21.com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어수 시인  (0) 2021.05.28
김달진 시인  (0) 2021.05.27
김광림 시인  (0) 2021.05.25
고정희 시인  (0) 2021.05.24
이원규 시인  (0) 2021.05.2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