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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 / 김달진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청시(靑枾) / 김달진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암록색(暗綠色)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벌레 / 김달진
고인 물 밑/ 해금 속에 꼬물거리는 빨간/ 실날 같은 벌레를 들여다보며/ 머리 위/ 등 뒤의/ 나를 바라보는 어떤 큰 눈을 생각하다가/ 나는 그만/ 그 실날 같은 빨간 벌레가 되다.//
씬냉이꽃 / 김달진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철 놀이 간다 야댠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 보았다.// 이 우주/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 날은다.//
목련꽃 / 김달진
봄이 깊었구나/ 창 밖에 밤비 소리 잦아지고/ 나는 언제부터선가/ 잠 못 자는 병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난밤 목련꽃 세 송이 중/ 한 송이 떨어졌다./ 이 우주 한 모퉁이에/ 꽃 한 송이 줄었구나.//
아카시아꽃 / 김달진
밤 깊어 혼자 돌아오는/ 교외의 어두운 산기슭 외로운 길/ 얼컥 안기는 내음새 있다/ 향긋이 젖은 날카로운 향기--/ 다발바달 드리운 아카시아꽃이/ 石蠟 등불처럼 히뿌엿이 빛난다.//
열무우꽃 –7월의 향수 / 김달진
가끔 바람이 오면/ 뒤울안 열무 꽃밭 위에는/ 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가난한 가족들은/ 베적삼에 땀을 씻으며/ 보리밥에 쑥갓쌈을 싸고 있었다.// 떨어지는 훼나무 꽃 향기에 취해/ 늙은 암소는/ 긴 날을 졸리고 졸리고 있었다.// 매미소리 드물어 가고/ 잠자리 등에 석양이 타면/ 우리들은 종이등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둔 지붕 위에/ 하얀 박꽃이/ 별빛따라 떠오르면// 모깃불 연기이는 돌담을 돌아/ 아낙네들은/ 앞개울로 앞개울로 몰려가고 있었다.// 먼 고향 사람 사람 얼굴들이여/ 내 고향은 남방 천리/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생각이여.//
목단 / 김달진
옅은 제 얼굴에 한 잎 두 잎 지쳐 누운 목단牧丹꽃 조각/ 빛이 너무 붉어 여름 한나절이 애진케 깊었으니// 꿈길처럼 아스라한 먼 산 아지랑이/ 뻐꾸기 소리 빈 골을 울려오는 게으른 창 앞// 보던 책 덮고 팔짱 끼며 고요히 눈감아보니/ 마음은 햇볕 아래 조으는 노란 장미꽃에 비최일 듯 환하다.//
바다 / 김달진
너 얼마나 깊은 회한이기에,/ 너 얼마나 큰 괴롬이기에,/ 아닌 듯 겨우 물거품 지우는다?/ 찬 바윗돌에 가슴을 비비는다?// 바다야, 너 바다야.//
그리는 세계 있기에 / 김달진
그리는 세계 있기에 그 세계 위하여/ 生의 나무의 뿌리로 살자/ 넓게, 굳세게, 또 깊게/ 어둠의 고뇌속을 파고 들어/ 모든 재기와 현명 앞에 하나 어리섞은 침묵으로--/ 그 어느 劫外의 하늘 아래 찬란히 피어나는 꽃과/ 익어가는 열매 멀리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사람 / 김달진
누구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창밖의 달은 저리도 밝고/ 떨어지는 나무잎은 뜰에 쌓이고/ 찬 바람은 저리도 스산스럽게 분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만/ 앞 뜰의 풀벌레는 저리도 울어댄다.// 어둠 속에 갑자기/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그 빛을 사람이 질러가고/ 자동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다리는 사람들 / 김달진
무슨 약속이기에, 무엇이 온다는 어떤 약속이기에, 기다리며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 기다리고 기다려도 무엇인지 모르고 기다리며 사는 사람. 아침 햇빛 따라 온다던가, 흰 비둘기 타고, 깊은 밤 잠든 사이 어린 바람처럼 골목골목 기웃거리며 꿈길 밟고 온다던가? 먼 산을 우러러, 먼 바다 바라며, 굽이굽이 돌아지나간 길 하얗게 빛나는 길 끝을 바라며 그만 돌아서려 해도 아침 꽃이 서러워, 저녁볕이 안타까워, 어둔 밤 도깝불 인정이 눈물겨워, 한나절 회오리바람 길가에 서서 옷자락 날리다가, 어느새 하루 해 저물어 기다리던 손님, 찾아온 그 손님 누구기에, 무슨 약속이기에, 산비탈 소실길로 멀리 오는 종소리 함께 바쁜 듯 가는 사람, 가는 사람들// 이리하여 사람들은 기다리던 손님 모습 영원히 볼 길 없이, 무한한 어둔 밤하늘의 궤도를, 목성처럼 걸어가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애인 / 김달진
깊은 밤 뜰 위에 나서/ 멀리 있는 애인을 생각하다가/ 나는 여러 억천만 년 사는 별을 보았다.//
사랑 / 김달진
찬 별인 양 반짝이는 눈동자/ 날 부르는 손길은 쉴 새 없이/ 나부끼어 나부끼어, 버들잎처럼// 광명과 암흑의 숨바꼭질하는 곳,/ 비애와 환희가 넘나드는 속에서....// 오라, 그대, 나의 침실로, 면사포 벗고/ 창에 어린 푸른 달빛에 이마를 들라./ 그대의 미도, 지혜도, 광영도, 축복도/ 어둔 안개처럼 가슴에 그늘지련다.// */ 없다기 너무 分明ㅎ고/ 있다기 진정 애매한 사랑이매/ 나의 懶弱은 날로 자라나거니,// 감각과 靈이 조화되는 곳,/ 바람과 향기가 섞여 사는 속에서...// 오라, 그대, 나의 침실로, 면사포 벗고/ 창에 어린 푸른 달빛에 이마를 들라.//
사랑을랑 / 김달진
모든 것 다 없어져도/ 사랑을랑 버리지 말자.// 찬비 나리는 지리한 날에/ 두 손발 얼어서 어이 가리.// 여기저기 토깝불 이는 밤/ 빛 함께 떠오는 장미꽃 향기.// 우리 사랑을랑 버리지 말고/ 모든 것 대신해 지니고 가자.//
빗발 속으로 / 김달진
황혼에 여윈 빗발을 바라보고 앉았노니/ 눈앞에 떠오르는 커다란 환영이 없는가/ 달콤한 감상, 그리고 애틋한 애수가 없는가/ 빨간 작약순이 조록 젖었다/ 무너진 옛담에 이끼 그저 푸르렀다/ 앞산머리로 설레이는 저문 안개 속에는/ 떠도는 시름의 아득한 꿈도 없는가.//
병(病) / 김달진
한 종일 창 밖에는/ 궂은비가 오고 있었다./ 빈 방에 꽃 한송이도 없는/ 고적을 고적대로 참고 누워 있었다./ '약'이라는 나 어린 계집애 소리에/ 놀라 깨니 고향 천리, 꿈을 꾸고 있었다./ 괴론 꿈을 깨어 땀을 씻고 앉았으면/ 창경 밖 실버들이 물처럼 흔들렸다./ 한동안 뜬 열을 잊고 있었다./ 생각은 금강산을 달리고 있었다./ 감긴가 몸살인가 몰라도/ 분명한 오직 衆生病이다./ 어둔 방에 시간은 흐르고, 흐르고/ 아, 모든 것은 이미 덧없었다.//
눈(雪) / 김달진
하이얗게 쌓은 눈 우에/ 빨간 피 한 방울 떨어뜨려보고 싶다/ -속속드리 스미어드는 마음이 보고 싶다//
겨울 아침 / 김달진
까치 한 마리 날아와 우는 아침/ 어여삐 전해 오는 기별에/ 환히 밝아오는 겨울 빛// 먼 산간 마을에는/ 반가운 사람을 맞이하러/ 남빛 연기가 길 따라 피어오르고/ 겨울나무 가지에 쌓인/ 함박눈이 한 움큼 떨어져 내릴 때/ 환한 빛 속으로 날아가는// 까치 한 마리/ 적요한 겨울을 흔들던/ 꽁지가 나무 가지 우듬지에 새하얗다//
겨울밤 / 김달진
냉철한 겨울밤 하늘 아래/ 어찌하야 네 그림자는 땅에 얼어붙었느뇨/ 푸른 달빛이 너무 차서/ 빛나는 댓잎 위에 바람이 잔다.//
자유 / 김달진
자유!/ 너는 그리도 값진 것이드뇨?/ 너는 생명!/ 모든 것이 너를 얻어 살고,/ 너는 광명!/ 모든 것이 너를 얻고 빛나고,/ 너는 환희요, 미의 여신!/ 모든 것이 너에게서 즐겁소 아름답거나,/ 너는 모든 것의 본연의 모습./ 그러나 너는 진정 實되어/ 거저 오지 않나니,/피를 주고/ 눈물을 주고,/ 목숨을 주고.../ 그러므로/ 무덤 속에서 솟아나는 생명,/ 어둠 속에서 비춰오는 광명,/ 불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
고독한 동무 / 김달진
묵은 책장을 뒤지노라니/ 여기저기서 기어 나오는 하얀 벌레들/ 나는 가만히 그들에게 이야기해 봅니다 -/ 고독과 적막의 슬픈 사상을// 그들은 햇빛 아래 빛나는 이 세상 인정이 더욱 쓰리다는 것을 잘 아는// 나의 어린 동무들입니다.//
단장 / 김달진
1// 아무 마음 없이/ 나 홀로 여기까지 걸어 왔구나./ 숲 속은 좁은 산길 위에/ 엷은 저녁 햇방울이 떨어져 있다.// 2// 몇 날을 두고/ 아침 산보길에서 만나는 여인이기에/ 그 이름을 알고 싶었다.// 3// 기다려 기다려도 비는 오지 않고/ 쨍쨍 쪼이는 한낮 창 앞에/ 멀리 어디서 포소리 들려 오더니/ 건너 산에서 흰 연기 구름 처럼 떠 오른다.// 4// 밝은 달빛이 가득차 넘치는 넓은 이 마당/ 별처럼 반짝이는 이 숱한 벌레소리 속에 서면/ 해질녘가지 그처럼 시끄러이 놀던 애들의/ 꿈 속에 벌어지는 화려한 놀이판.// 5// 아침 산 그늘이/ 모시 적삼에 스미는 썰렁한 기운./ 아 이제 대지에는/ 그 숱한 나뭇잎이 알고 모르고 꽃잎처럼 내리겠구나.//
모려(牡蠣)의 꿈 / 김달진
흰 갈매기 새벽을 차며 하늘가로 날을 때,/ 깊은 숲 속에 빨간 딸기 향기로이 익어갈 때,/ 먼 수평선 너머로 저녁 별 떨어질 때,/ 따스한 등불 앞에 사랑이 피어날 때.......// 오직 듣는 萬古의 물결소리, 바람 소리,/ 해와 달 돌아가고/ 짠 냄새 찌들어든 돌옷 속에-/ 흑산호처럼 깊어가는 침묵// 먼 바다 외딴 섬,/ 섬가의 바위 위에/ 한 마리 늙어가는 牡蠣,/ 한 마리 늙어가는 외로운 牡蠣여!//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위대한 孤獨者,/ 영원을 마시며,/ 萬古의 별빛 아래/ 紅寶石처럼 익어가는 생명의 열매,/ 오직 '나'를 지키어 자라나는 꿈길이여./ 너는 孤島의 바다 위에 살고,/ 너는 우주의 중심에 산다.//
* 모려(牡蠣) : 굴의 살을 말린 것
햇볕 / 김달진
미닫이창에 가득히 밀려든 한나절 햇볕/ 무엇을 잊은 듯 서운하야 눈을 감아본다/ 한 겹 눈꺼풀 속에도 햇볕을 스미어들어/ 장미빛 바늘같이 눈 속을 폭폭 찔러/ 나는 그만 슬픈 귀또리새끼처럼 그늘로 숨고 싶었다.//
우후(雨後) / 김달진
비 온 뒤 산에 올랐다가/ 아무것도 없어/ 송화 가루 젖은 채 어지러이 깔려 있는 붉은 흙 보고/ 그저 무심한 양 泛然한 양 시름없이 돌아온다//
유월 / 김달진
고요한 이웃집의/ 하얗게 빛나는 빈 뜰 우에/ 작은 벚나무 그늘 아래/ 외론 암탉 한 마리 백주(白晝)와 함께 조을고 있는 것/ 판자 너머로 가만히 엿보인다.// */ 빨간 촉규화(蜀葵花) 한낮에 지친 울타리에/ 빨래 두세 조각 시름없이 널어두고 시름없이 서 있다가/ 그저 호젓이/ 도로 들어가는 젊은 시악시 있다.// */ 깊은 숲 속에서 나오니/ 유월 햇빛이 밝다/ 열무우 꽃밭 한 귀에 눈부시며 섰다가/ 열무우꽃과 함께 흐들리우다.//
여름방 / 김달진
긴 여름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앉아/ 바람을 방에 안아들고/ 녹음을 불러들이고/ 머리 위에 한 조각 구름 떠있는/ 저 佛岩山마저 맞아들인다.//
비명(碑銘) / 김달진
여기 한 自然兒가/ 그대로 와서/ 그대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갔다.// 풀은 푸르라/ 해는 빛나라/ 자연 그대로.// 이승의 나뭇가지에서 우는 새여./ 빛나는 바람을 노래하라.//
사촌(寺村) / 김달진
뒷절에서 울려오는 경쇠 소리에/ 七月 한낮은 더욱 길었다.// 툇마루에 그늘은 깊었다. 새로 내온 하얀 골자리. 風化된 난간에 기대 앉아 우거진 藤넌출을 우러르고 있었다. 파리 벌 한 마리가 圓을 돌고 있었다.// 햇볕 쨍한 좁은 뜰 안에, 아름아름 감길 듯 두 눈이 부시었다. 병아리 두 세 마리 박잎 그늘에 졸고 있었다. 한 떨기 金蓮花― 타는 듯 가련한 한떨기 金蓮花에 환히 비추일 듯 마음이 부시었다.// 참한 床一나찬 童貞 女僧이 정성껏 보아온 까만 술상이다. 고사리 나물 호박전, 오이 김치, 두부지짐……./ 가지가지 빛나는 하얀 접시들이여, 나는 혼자서 술잔을 기울였다. 山포도 물든 볼그레한 맑은 술을 혼자서 기울였다.// 술기운 함께/ 먼 하늘가로 돌아오는 흰 구름에,/ 뜰 안에 타는 빨간 金蓮花에,/ 童貞 女僧의 알뜰한 情에,/ 있는 듯 없는 듯 가느란 시름에,/ 나는 혼자/ 취해 가고 있었다. 취해 가고 있었다.//
고사(古寺) / 김달진
밤이 깊어가서/ 비는 언제 멎어지었다./ 꽃 향기 나직히/ 새어들고 있었다.// 모기장 밖으로/ 잣나무 숲 끝으로/ 달이 나와 있었다./ 구름이 떠 있었다.// 풍경 소리에 꿈이 놀란 듯/ 작약꽃 두어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의희한 탑 그늘에/ 천 년 세월이 흘러가고, 흘러오고....// 아, 모든 것/ 속절없었다./ 멀리 어디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삶 / 김달진
등뒤에 무한한 어둠의 시간/ 눈앞에 무한한 어둠의 시간/ 그 중간의 한 토막,/ 이것이 나의 삶이다./ 불을 붙이자/ 무한한 어둠 속에/ 나의 삶으로 빛을 밝히자.//
체념 / 김달진
봄 안개 자욱히 내린/ 밤 거리 가등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마음을 앓는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몰려가고 오는 사람 구름처럼 흐르고/ 청춘도 노래도 바람처럼 흐르고// 오로지 먼 하늘가로 귀 기울이는 응시/ 혼자 정렬의 등불을 달굴 뿐// 내 너 그림자 앞에 서노니 먼 사람아/ 우리는 진정 비수에 사는 운명/ 다채로운 행복을 삼가오.// 견디기보다 큰 괴롬이면/ 멀리 깊은 산 구름 속에 들어가// 몰래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주워/ 싸늘한 입술을 맞추어 보자.//
사행소곡 회한집 –망미인해천일방, 동파 / 김달진
어디고 반드시 계오시라 믿었기에/ 어렴풋 꿈속에 그리던 모습,/ 어둔 방 촛불인 듯 내 앞에 앉으신 양/ 아, 이제 뵈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네.// 푸른 나뭇잎 나뭇잎 사이로/ 말간 가을 하늘 우러러보면/ 어디서 오는 가느란 바람이기에/ 꽃잎처럼 흔들리는 임의 그 모습// 아, 내 마음 어떻게 두어야 하리까?/ 너무나 작고 더러운 존재오라./ 영혼의 속속들이 눈부시는 빛 앞에/ 화살 맞은 비둘긴 양 날개만 파득일 뿐// 사람이 되고 안 되고사/ 오로지 임에게 매이었고,/ 마주앉아 말 주고받는 인연/ 오백생 깊음이 느껴 자랑스럽네.// 들 밖 어둔 길을 밤 늦어 돌아오면/ 허렁허렁 술기운 반은 취하고,/ 먼 남쪽 하늘가 흐르는 별빛 아래/ 산 넘어, 물 건너 몇백 리인고?// 가다가 문득 문득/ 가슴 하나 얼컥 안기는 그리움,/ 해바라기 숨길처럼 확확 달아/ 가을 석양 들길에 먼 이 선다.// 애닯고 애닯은 이 사모를/ 혼자 고이 지닌 채 이 생을 마치오리까?/ 임아, 진정 아닌 척 그대로 가야 하리까?/ 살아 한 번 그 가슴에 하소할 길이 없이// 창밖에 궂은 밤비 소리 들으면/ 풀숲에 숨어 있는 한 마리 벌레가 되어/ 울지도 못하는 외로운 가슴,/ 홈초롬 이슬발에 얼어 세우랴.// 어렴풋 잠결에 꾀꼬리 소리/ 놀란 듯 허겁지겁 창을 여나니,/ 꿈에 뵈던 임의 소식 아니언만/ 알뜰히 살뜰히 아쉬움이라.// 동무와 떠들다 문득 입다물고,/ 잔 들어 흥겨웁다 문득 먼 이 앉아봄은// 어디서 오는 뚜렷한 모습이기/ 눈썹 끝에 아롱아롱 한숨발에 어리는고?// 그대를 바라볼 제면 내 가슴 문득 트이는 바다라/ 그대 한 마리 흰 갈매기 되어 자무락질하나니,/ 그대 날아난 뒤 내 가슴 문득 거칠은 벌판/ 한종일 낙엽을 부는 바람만 울어울어// 오랜 도시의 빛나는 전설처럼/ 오랜 도시의 빛나는 전설처럼,/ 내 마음의 황혼에 피어난 꽃 한 송이/ 가만한 향훈에 젖어드는 설움이라.// 너는 한 송이 백합, 아담히 피어/ 들며 나며 바라보는 내 마음에 무심히 피어/ 등 뒤 유리창에 저녁볕 고이 타는데/ 어느 하늘 꿈속에서 이 밤을 세우려노?// 가도가도 어둔 밤 찬하늘 아래/ 오직 하나 등불, 너 생각 의지하여/ 두 손길 호호 불며 이 길을 가오리다./ 이 길을 가오리다, 언제까지 가오리까?// 아무리 애닯게 불러봐도/ 들어줄 이 없는 설운 노래는,/ 밤 늦어 돌아오는 눈바람에/ 혼자 가슴에 삼켜 고이는 눈물.// 오직 까만 까만 밤빛/ 까만 밤빛 속에 오직 하나 빛나는 얼굴,/ 하룻밤이라니 열두 시간인가?/ 만 겁에도 깊은 그리운 설움.// 이 세상 모든 그리움 다 모아,/ 이 세상 모든 슬픔 다 모아,/ 이 세상 모든 행복, 아름다움 다 모아,/ 그대 무슨 인연 내 앞에 나타났던고?// 오직 하나 내 기쁨 그대 하나뿐,/ 깊은 바다 속에 빛나는 진주처럼/ 어둔 밤 발끝마다 반짝이는 모습,/ 오직 하나 내 기쁨 그대 하나뿐.// 머리 숙인 그대 모습 탐탐이 바래다가/ 깊은 한숨발에 눈을 돌리면/ 창밖에 나직한 한 겨울 하늘/ 아, 우리는 얼음장 밑에 사는 두 마리 물고기.// 신비한 못에 잠긴 별인 듯 빛나는 눈동자,/ 높은 갈망에 가늘이 떠는 앵두 입술,/ 담쑥 안으면 향기론 키쓰,/ '영원히 담긴 리나'의 황홀이여.// 나 혼자 어디로 가는 이 밤길인가?/ 살뜰한 그대를 떠나가야 하는 이 길인가?/ 이제 바로 그대 함께 거닐던 길을/ 가끔 멈춰서서 둘러보아야 깊은 어둠뿐.// 별처럼 영롱한 가슴속 그리움/ 한 겹 수줍음에 떨고 있었기,/ 달 없는 밤 오리 들길을/ 끝내 한마디 말없이 걸어온 두 마음.// 기다리다 못 만나고 돌아오는 길/ 일부러 둘러 돌아온 외로운 길,/ 그의 지붕은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조각 초생 달빛이 서려 있었다.// 불꽃 같은 애정의 눈동자 앞에/ 내 혼이 오로지 행복에 탈 때,/ 나는 그대로 자취 없이 사라지고 싶어/ 구름처럼 안개처럼 사라지고 싶어// 혼자서 걸어오는 길이오라./ 이라도 흰 눈송이 폭폭 내리고/ 유난히 푸근한 첫봄 밤이 아까워/ 가끔 서보는 들길은 일찍 함께 거닐던 길.// 영겁에서 영겁으로 흐르는 사랑의 속삭임,/ 영겁에서 영겁으로 흐르는 사랑의 입맞춤,/ 맑은 밤하늘 수많은 성좌를 바라보면/ 그대와 나는 동해 바닷가 두 개 모래알인가?// 이리도 갑자기 풀린 다수한 봄날은/ 어딘가 그대 얼굴 보일 듯하여,/ 시름없이 거리거리를 헤매보는 한나절/ 어딘가 그대 얼굴 보일 듯하여.// 그대 아무래도 건널 수 없는 은하 저편이라면/ 내 차라리 하나 싸늘한 운석 되어,/ 영원한 망각으로 어느 깊은 숲속에 떨어지고 싶어라./ 끝내 바라만 보는 은하 이편의 괴롬이라면// 이리도 다는 그리운 숨길 누르고 눌러두어/ 언제고 이 가슴 탁 터지는 그날이 오면/ 빨간 심장 화살처럼 어디로 날아가련고?/ 임의 가슴은 이미 겨누어 가리킨 과녁이오라.// 아, 얼마나 달고 향기로운 봄볕이뇨?/ 하늘은 하나 커다란 꽃일산이라./ 향아 너 달려오라, 달려오라,/ 우리 이 꽃일산 아래 나란히 서보자.// 아무도 바라보는 이 없는/ 먼 사막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피지도 못한 우리 사랑의 꽃봉오리는/ 어느 영겁의 어둠 속에 반짝일런가?// 나시고 자라신 곳 어디메쯤이온고?/ 어둠 속에 빛나는 등불들도 다정하여/ 오똑오똑 걸음마 아가야, 색동저고리야, 피어나는 함박꽃아,/ 아, 먼 남쪽 하늘에 하나 별이여, 안타까움이여./ (밤 역을 지나며)//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바람 마시며,/ 알뜰한 사모 속에 산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니 느긋하며 든든하온가마는/ 눈뜨니 한 겹 현실, 천만 리 머오이다.// 임은 떠나시고 나는 임을 보내나니,/ 떠나는 마당 고별의 미소는 얼마나 슬프기에/ 그대, 뱃전에 서 있는 그대는/ 끝내 하얀 마스크를 벗을 줄 모르느뇨?// 고동 울어 임은 떠나가노니,/ 흔드는 손길 눈 끝에 멀어가고/ 모르는 척 산모롱을 돌아나가는 배/ 하얀 갈매기만 날아라, 날아라.// 뜰 위에 삽살이 졸음에 겹고,/ 흰 나비 한 마리 지붕을 넘고,/ 어인 모습 수심처럼 가슴에 떠올라,/ 앵두꽃 은은한 그늘에 낮이 몹시 기옵니다.// 파란 보리밭 위로 바람이 지나가면/ 아름아름 떠오르는 모습,/ 매화꽃 향기로운 황혼의 길거리에/ 추억처럼 흘러가는 고운 그림자.// 고요한 사원의 깊은 밤을/ 혼자 일어 뜰 앞에 나서나니,/ 어스름 조각달 기울어가는데/ 임이여, 이 침정이 못내 향기롭습니다.// 푸른 그늘 숲길을 혼자 돌아들면/ 두세 마리 청개구리 애끊는 소리에/ 하얀 클로버 꽃밭을 밟고 서나니,/ 머리 위에 내려깔리는 아연빛 하늘.// 짧은 밤 고달픈 잠이 모른 듯 깨어/ 창에 든 새벽달빛 어렴풋 바라보고,/ 멀리 뻐꾸기 소리 꿈속인 양 듣다가/ 다시 모른 듯 잠이 들었다.// 오직 하나 알뜰한 상이 있어/ 가슴속 깊이 보배로이 지녔기에,/ 여섯 문 꼭꼭 닫고 녹장 내리고/ 오로지 태우는 그리움의 촛불 하나.// 게으른 흠대 물소리에 흰 날은 길어/ 한나절 송홧가루 뜰에 날리고,/ 먼 산 그늘에 뻐꾸기 우는 날을/ 늙은 승은 창 앞에서 졸고 있었다.// 저녁볕 아래 타는 열무우 꽃밭길을/ 혼자 게으른 발길 돌아나오면,/ 멀리 기어내리는 산그늘 속에/ 아른아른 어리는 애틋한 그리움.// 이렇게 몸이 찌붓거리는 날을/ 멀리 앞바다에 비 묻어들고,/ 보리누름 추위가 못내 슬퍼져/ 아, 나는 한 이틀 앓고 싶어라.// 하늘에 저러이 빛나는 별,/ 옥수수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혼자 깊은 여름밤을 마루에 앉았나니/ 이제 막 두 번째 감 떨어지는 소리 났다.// 아무리 부딪쳐보아도/ 움찍 않는 싸늘한 바위의 마음이기/ 부서져버리는 산산이 하얗게 사라져버리는/ 저 물결이 되고 싶어라, 저 물결이// 멀리 하늘 끝 외로운 섬가로/ 흐르는 구름이 근심스러워,/ 바닷가 산기슭 돌아오는 황혼이여./ 구슬픈 해숙 소리에 등을 밀리며.// 보던 책 덮고 나직히 창을 나와/ 긴 여름날을 사랑하고 앉았으면,/ 나무 잎새 잎새 눈부시듯 빛나고/ 먼 하늘 끝으로 흰구름 돌아간다.// 한밤내 창밖에 궂은 빗소리/ 깊은 시름 한숨발에 살찌는 꿈길이여./ 핼쑥히 차거운 반딧불인 양/ 가슴속에 피어나는 애틋한 불빛.// 가벼운 구름 그림자 산허리에 조을고/ 뒤뜰에 은실을 뽑는 매미 소리./ 어딘가 숨어 흐르는 바람길 있어/ 가슴에 속삭이는 듯 귀기울여 보나니.// 먼 하늘 끝으로 하늘 끝으로/ 한 가닥 사무치는 애틋한 길이 있어,/ 구름이면 구름을 따라, 바람이면 바람을 따라, 향시/ 눈앞에./ 어인 그림자 아슬아슬 돌아오나니.// 푸른 달빛 고요히 조는 빈뜰 안에/ 이슬인 양 영롱히 깔리는 뭇벌레 소리/ 가슴속에 얼컥 안기는 가을 생각/ 부질없는 세상일에 사랑만이 참되느뇨?// 얄푸른 안개 가벼이 서린 꿈길 위에/ 아침 햇살 고이 퍼지는 가난한 선창가,/ 사공은 아직 보이지 않고,/ 까마귀 두 마리 빈 배 안에서 무언가 쪼고 있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그리웁고/ 비 내리면 빗소리에 우니나니,/ 창창한 세월 굽이굽이 물결 위에/ 아으, 어이료만이요 억만 시름!// 어둠이 깃드는 텅 빈 교무실에/ 내 어이 홀로 화로 앞에 앉았느뇨?/ 식어가는 숯불 다독다독거리며/ 뒷산에서 내리는 송뢰를 듣고 있다.// 봄인 양 따뜻한 늦가을 한나절을/ 햇볕 하도 탐스러워 마루 끝에 나앉으면/ 어디서 정구공 소리 한결 한가함이여,/ 담머리에 활짝 핀 코스모스에 바람이 잔다.// 보일 듯 잡힐 듯 허득거리며/ 골목길 돌아돌아 따라온 그림자,/ 어느 모를 어둠 속에 사라져버렸거니,/ 내 이 찬 거리에 엉거주춤 섰을밖에//
김달진(1907~1989) 시인, 승려, 한학자, 교육자
1907년 경상남도 창원 출생. 호는 월하(月下). 1929년『文藝公論』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순수문학을 심화시켜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한 서정주·김동리·오장환·김광균 등과 더불어 동인지『詩苑』『詩人部落』『竹筍』동인으로 활약했다. 그는 한때 승려였으며, 교사와 한학자 그리고 시인으로 일생을 살았다. 평생을 세간에서 멀리 떨어져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절대적인 세계의 동경과 세속적인 명리를 거부한 그는 직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봄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일상 속에서 무한한 존재의 즐거움으로 현실을 초극하고자 했다. 1960년대 이후 동국대학교 역경위원으로 불경 국역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1983년에는 '불교정신문화원'에 의해 한국고승석덕으로 추대되었다. 시집으로 《청시(靑枾)》 《올빼미의 노래》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 《김달진 시 전집》과 《산거일기》(산문전집)와 《손오병서》,《장자》,《고문진보》,《한산 시》,《법구경》등의 훌륭한 번역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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