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봄비 / 김어수
꽃잎 지는 뜨락 연두빛 하늘이 흐르다/ 세월처럼 도는 선율 한결 저녁은 고요로워/ 그 누구 치맛자락이 스칠 것만 같은 밤// 저기 아스름이 방울지는 여운마다/ 뽀얗게 먼 화폭이 메아리쳐 피는 창가/ 불현듯 뛰쳐나가서 함뿍 젖고 싶은 마음// 놀처럼 번지는 마음 그 계절이 하 그리워/ 벅찬 숨결마다 닮아가는 체념인가/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걷고 싶은 마음//
영산影山 / 김어수
가을산 단풍길에/ 돌을 밟고 걷다보니// 옥처럼 맑은 물이/ 굽이치며 꺾이는데// 다리 밑 긴 그림자가/ 나를 따라 흐르네.// 저 만큼 흰 구름이/ 일렁이는 잿마루에// 펄럭이는 소맷자락/ 냇물에 비치는데// 먼 허공 바라고 서서/ 갈 길 잊은 나절인가.// 다락에 올라 앉아/ 내가 나를 찾다보니// 어느덧 석양볕이/ 뜨락에 가로 눕고// 푸른 뫼 물에 떨어져/ 구름 속에 비치다.//
옛 고향 / 김어수
내 자라던 옛 고향을/ 오늘 다시 찾아드니// 살던 오막사리/ 그도 마자 헐어졌고// 어머니 물 깃던 샘도/ 묻혀지고 없구려// 아버지 이 돌에서/ 밥때마다 불렀는데// 가신지 그 동안에/ 四十년이 되단말가.// 업드려 흐느끼는 이 자식/ 나도 털이 희였소.// 봄이면 山藥캐고/ 가을이면 버섯 줍고// 석양에 거적 깔고/ 통감 사략 읽던 곳이// 어데가 어데 쯤인지/ 솔만 우묵하구려// 지팡이 던지고서/ 잔디 밭에 앉았으니// 어느덧 눈물 흘려/ 옷깃이 적셔지고// 낯설은 젊은 사람들/ 힐끗 힐끗 보는걸.// 고의 벗고 같이 놀던/ 그때의 어린 동무// 모두 白首 老人되어/ 서로 봐도 모르다가// 성명을 통하고 나서야/ 겨우 손을 잡다니.// 내 심은 버드나무/ 아름넘는 古木인데// 뒷산 진달래는/ 오늘도 붉어지고// 시냇물은 흐르는 속에/ 어머니 얼굴 보이다.//
정靜 / 김어수
책장 덮어 두고 찻잔 밀쳐놓고/ 선뜻 뜰에 나려 먼 구름을 바라다가/ 흐르는 낙엽 하나에 내가 나를 또 찾소// 노래를 잊자 해도 젖어드는 냇물 소리/ 외로워 거닐어도 산이 앞에 서는 것을/ 탱자 알 손에 굴리며 번히 보는 저 하늘// 심지 돋우면서 벽과 마주 앉았으니/ 하얀 대화들이 밤이 가도 끝이 없고/ 해말간 허공 밖으로 트여지는 한줌 빛.//
정情 2 / 김어수
못 이즐 그 하늘이 청자보다 푸르러도/ 수묵 색 짙은 노을 바라다 지친 넋이/ 현絃 끊인 가락 가락에 묻어 피는 창 기슭// 수양을 닮은 맘이 구름 가에 일렁일 때/ 옹달샘 그늘 따라 먼 그날에 얽힌 정이/ 치솟는 세월 밖에서 안개처럼 번진다.// 고요도 저물다가 재를 넘는 그림자 인가/ 잡힐 듯 그 노래가 마디마디 스미는 밤/ 차라리 저 별 아래서 꿈을 핥고 지샐 가.//
창窓 / 김어수
투명한 입깁이 새어/ 영원으로 굳은 얼굴// 노상 멀어진 그림자/ 하얀 물결이 일고// 어느새 일렁이는 새벽에/ 새 하늘이 흐르다// 빨갛게 정(精)은 익어/ 안개에 묻어 날아// 수집은 가슴마다/ 점점이 한(恨) 새기고// 녹 묻은 낡은 년륜(年輪)이/ 매듭으로 숨 쉬다.// 부서진 허공이/ 조각조각 쏟아질 때// 후미진 그 길목을/ 맴도는 가는 노래// 침묵이 젖은 등성이/ 노오란 놀이 퍼지다.//
낙상(落想) / 김어수
피에 젖은 영토(領土)/ 저려오는 적막(寂寞) 앞에// 정(情) 묻은 가락가락/ 달을스처 흘러가고// 연륜(年輪)도 서름을 못 참아/ 또 황혼을 즈레 밝고// 하마 그 화폭(畵幅)이/ 후미진 그늘인데// 못다 한 한(恨)은 익어/ 산비에 묻어 날고// 저만큼 연두 빛 노을이/ 안개마냥 피는 언덕// 무늬진 염원(念願)이사/ 몸부림을 치다가도// 찢어진 깃발아래/ 일렁이는 그림자를// 그래도 새하얀 숨결/ 강물처럼 부풀다.//
낙서 / 김어수
찢어진 그 세월이/ 안개처럼 피는 저녁// 한결 아쉬움이/ 여백(餘白)에 얼룩지고// 다 낡은 조각 종이에/ 그이 이름 써보다// 말이나 할 것처럼/ 산은 앞에 다가서고// 5월 긴 나절에/ 번져드는 메아리를// 공연히 턱 괴고 않아/ 그저 기는 내 마음// 그립고 하 허전해/ 내 그림자 꼬집다가// 불현듯 잔디밭에/ 먼 구름을 흘겨보고// 쓰면서 나도 모르는/ 그 글자를 또 쓰오.//
통도사 / 김어수
舞楓橋 냇물 따라 十里 산길 들어가니/ 慈藏스님 지었다는 신라 도량 펴지는데/ 부처님 頂骨사리를 모신 佛寶寺刹 통도사를// 영취산 기슭 아래 毒龍이 살던 못을/ 스님의 법력으로 여기에다 절을 짓고/ 이 나라 억천만년에 바른 법을 펴시다// 寶塔 맑은 뜰에 戒壇을 차려 놓고/ 衆生을 제도코저 法音이 퍼질 적에/ 極樂庵 늙은 스님은 서쪽 하늘 가리킨다.//
백두산 / 김어수
낭림산맥 뻗은 자리 무산 고을 펼첬는데/ 9천척 백두산은 하늘을 받혔구나/ 천지의 웅장한 모습 그저 숙연 하나이다// 천리 천평 박달나무 단군님이 하강 하고/ 이나라 처음열어 백성에게 이를 적에/ 인간을 홍익 하란 말 억만년에 빛나다// 북으로 만주 벌판 남으로 삼천리를/ 앞록 두만 두 강물이 여기에서 갈라지고/ 관모봉 주춤주춤 흘러 금수강산 이루다.//
압록강 / 김어수
이 강을 사이두고 두나라가 갈렸는데/ 험한산 굽이돌아 팔백리가 멀었구나/ 그날의 뗏목 노래가 들릴듯한 이저녁// 유난히 푸르다고 압록이다 이름하고/ 연개소문 임경업이 북벌하러 넘던 물결/ 진남포 서쪽바다로 흐른 것이 몇만년가// 오랑캐들 떼를 지어 어름위를 밟고 올 때/ 양만춘 큰 화살이 적장의 눈을 뚫고/ 이국토 천년 사직을 바로 세운 이 강인가//
금강산 / 김어수
단발령 넘어서니 장안사가 바로 뵌다/ 과가연 표훈사는 어느골에 묻혔는고/ 조물주 정교한 솜씨 다시한번 느끼다// 산과 구름 같이 히니 산과 구름 알 수 없고/ 만 이천봉 굽이굽이 바위마다 물형인데/ 비로봉 높은 꼭대기 안개 훨훨 날으다// 벼랑에 붉은솔이 바람에 흔들리고/ 만폭동 물구슬에 단풍이 비치는데/ 보덕굴 외나무다리 허공위에 뜬듯하다//
한산도 / 김어수
남쪽바다 끝머리에 늙은 솔 흰학이/ 푸른물 구비밖에 우뚝 높은 제승당을/ 왜적을 몰살한 거기가 바로 저기 저섬인데// 충절용맹 다 갖추신 이장군이/ 이 민족을 구하려고 거북선 만들어서/ 널따란 이 바다 지키며 추한 적을 무찌르다// 바다보다 장한뜻을 하늘에 빌것가/ 등구신 그 인격을 땅에다 겨눌것가/ 사당문 조용히 열고 향사르고 있답니다//
김어수(1909∼1985) 시인, 승려, 교육자.
어수(魚水)는 법명이고 본명은 소석(素石)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 1807~1863)과 더불어 영월이 낳은 시인이다. 범어사에서 출가해 수행자로 25년을 살았고, 중·고교 교사와 교장을 역임했으며,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로서 말년을 회향했다. 1932년 조선일보에 시조 ‘조시(弔詩)’를 발표해 등단한 그는 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시, 시조, 수필을 발표하였다. 시조집《회귀선의 꽃구름》,《햇살 쏟아지는 뜨락》, 수필집《달안개 피는 언덕길》, 불교경전 번역서로는《안락국 태자경》,《법구경》등이 있다.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