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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승희 시인

부흐고비 2021. 5. 29. 06:34

신이 감춰둔 사랑 / 김승희
심장은 하루 종일 일을 한다고 한다/ 심장이 하루 뛰는 것이/ 10만 8천 6백 39번이라고 한다/ 내뿜는 피는 하루 몇천만 톤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4천 9백 6십만km인데/ 하루 혈액이 뛰는 거리가/ 2억 7천 31만 2천km라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두 번 갔다 올 거리만큼/ 당신의 혈액이 오늘 하루에 뛰고 있는 것이다/ 바로 너, 너, 너! 그대!// 그렇게 당신은 파도를 뿜는다/ 그렇게 당신은 꺼졌다 살아난다/ 그렇게 당신은 달빛 아래 둥근 꽃봉오리의 속삭임이다/ 은환(銀環)의 질주다// 그대가 하는 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이 사업은 하느님과의 동업이다/ 그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발견하겠다//

엄마의 발 / 김승희
딸아, 보아라,/ 엄마의 발은 크지,/ 대지의 입구처럼/ 지붕 아래 대들보처럼/ 엄마의 발은 크지.// 엄마의 발은 크지만/ 사랑의 노동처럼 크고 넓지만/ 딸아, 보았니,/ 엄마의 발은 안쪽으로 안쪽으로/ 근육이 밀려 꼽추의 혹처럼/ 문둥이의 콧잔등처럼/ 밉게 비틀려 뭉그러진 전족의/ 기형의 발// 신발 속에선 다섯 발가락/ 아니 열 개의 발가락들이/ 도화선처럼 불꽃을 튕기며/ 아파아파 울고/ 부엉부엉 후진국처럼 짓밟히어/ 평생을 몸살로 시름시름 앓고// 엄마의 신발 속엔/ 우주에서 길을 잃은/ 하얀 야생별들의 신비한 날개들이/ 감옥창살처럼 종신수로 갇히어/ 창백하게 메마른 쇠스랑꽃 몇 포기를/ 조화처럼/ 우두커니 걸어놓고 있으니/ 딸아, 보아라,/ 가고 싶었던 길들과/ 가보지 못했던 길들과/ 잊을 수 없는 길들이/ 오늘밤 꿈에도 분명 살아 있어/ 인두로 다리미로 오늘밤에도 정녕/ 떠도는 길들을 꿈속에서 꾹꾹 다림질해 주어야 하느니/ 네 키가 점점 커지면서/ 그림자도 점점 커지는 것처럼/ 그것은 점점 커지는 슬픔의 입구,//

배꼽을 위한 연가 / 김승희
인당수에 빠질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저는 살아서 시를 짓겠습니다// 공양미 삼백석을 구하지못하여/ 당신이 평생 어둡더라도/ 결코 인당수에는 빠지지는 않겠습니다/ 어머니,/ 저는 여기 남아 책을 보겠습니다// 나비여,/ 나비여,/ 애벌레가 나비로 날기 위하여/ 누에고치를 버리는 것이 죄입니까?/ 그대신 점차책을 사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점자 읽는 법도 가르쳐드리지요// 우리의 삶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외국어와 같다는 거 -/ 어디에도 인당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우리는 스스로 눈을 떠야 합니다//

배꼽을 위한 연가 1 / 김승희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간에, 당신의 배꼽을 보여준다면은, 나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더럽게 뒤엉긴 자그만 동그람이 굽이굽이 꼬불쳐진 그대의 서러운 배꼽도 나의 배꼽과 똑같이 부끄러운 죄와 어리석은 욕망이 고불고불 서리서리 끼어 있을 테지요, 그대여, 어둠의 태속에서 영문 모르고 튀어나와 정처없이 죄를 짓고 죽어가는 그대여, 그대여,// 우리는 배꼽 위에서 평등하다/ 그것은 생일날의 흉터,/ 고아들의 패찰,/ 인광을 칠한 백골의 주황색 입술이/ 아삭아삭 제일 먼저 뜯어먹는/ 온순한 육체의 이삭,/ 우리는 배꼽 위에서 너무나 평등하다//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간에, 당신의 배꼽을 버리지만 않았다면은, 나 그대를 열렬히 용서하겠습니다, 봄이 되어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트는 것을 바라보거나 푸드득---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습진처럼 나의 배꼽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배꼽은 과거완료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나의 삶속에 움터오르고, 어머니--- 아, 어머니--- 라고 불러보면 바닷가를 울면서 걸어가는 한 여인이 떠오릅니다, 그녀의 슬픔 그녀의 사랑 그녀의 절망을 따라 나의 배꼽은 또 하염없이 시원의 태 속으로 적셔들어가고, 어머니--- 자비와 저주의 비밀구좌이신 어머니--- 나의 어머니시여......//

죽도록 사랑해서 / 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다시 사랑이 빅뱅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제목없는 사랑 / 김승희
죽어버릴까,/ 아니면 이 불행한 삶을/ 계속해야 하나/ 해질무렵이면/ 언제나 화두처럼 떠오르는 이 질문을/ 가슴에 안고/ 아가를 업은 나는 골목을 서성인다// 이혼을 할까./ 아니면 이 우울한 결혼을 계속할 것인가./ 가령 이 질문은 언제나 그 질문과 같아서/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롯데백화점 앞 네거리 스타트라인 위에서/ 갑작 시동이 꺼져버린 중고차처럼/ 사방에서 경음기 소리가 들려오는데/ 혼자서 울고만 싶은 백치성이 있다.// 절망 때문에 결혼을 하여/ 그 절망을 두 배로 만들고/ 허무 때문에 자식을 낳아/ 그 허무를 두 배로 만들었으니/ 자꾸만 약효가 안 듣는 약을/ 자가처방하고 있는/ 너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해질무렵이면/ 약방의 진열대 뒤에 서서/ 자꾸만 이름모를 약을 조제하고 있는/ 너를/ 약효를 남 먼저 시험해 보느라고/ 두 눈을 감고 자꾸만 쓰디쓴 약을/ 삼켜보고 있는 너를// 아가를 업고/ 서성이는 골목길 안에서/ 나는 너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네가 만든 영화 속에/ 나는 몹시 아픈 환자의 역할을 맡은/ 약물시음용 배우인 것만 같다//

가까운 사람을 멀리 사랑하기 위하여 / 김승희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내가 온통 벌거숭이로 피를 칠하고 있을 때/ 난 알 것 같았어,/ 왜 별이 아름다운지를,/ 난 알아질 것 같았어,/ 만일 구름의 너울이 없다면/ 어떻게 감히 태양을/ 사랑-이라고 부르겠는가를,// 밤에 마지막 외침처럼 황량한 마음으로/ 지붕 위에 서 있으면/ 먼데 있는 사람아, 말하려므나/ 내가 평화처럼 혹은 구원처럼/ 금빛이더라고,/ 신비한 금선이 아득히 흘러/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꿈꾸게 되는지를,//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내가 울부짖는 하나의 욕설처럼 추악해질 때/ 난 알고 말았어,// 별과 神은 왜 그토록 멀리 있어야 하는지를,/ 모든 성당의 창문에는/ 왜 천연색의 색유리가 끼여 있는지를,// 오늘 내가 여기 천벌의 화형으로/ 지새우는 불이/ 어디엔가 먼 사람에겐 -/ 아마도 위안처럼 정다우리니/ 생각해 보아,/ 멀리 있어서 아름다운 별은, 하느님은-/ 우리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왜 우리에겐 그토록 간격의 탐닉이/ 필요한 것인가를//

만파식적(萬波息笛) -남편에게 / 김승희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같이,/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같이,/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간격을 지키면서/ 외롭지 않게,/ 외롭지 않으면서/ 방해받지 않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두 개의 대나무가 묶이어 있다./ 서로간의 기댐이 없기에/ 이음과 이음 사이엔/ 투명한 빈 자리가 생기지./ 그 빈 자리에서만/ 불멸의 금빛 음악이 태어난다.// 그 음악이 없다면/ 결혼이란 악천후,/ 영원한 원생동물들처럼/ 서로 돌기를 뻗쳐/ 자기의 근심으로/ 서로 목을 조르는 것//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같이/ 우리 사이엔 투명한 빈 자리가 놓이고/ 풍금의 내부처럼 그 사이로는/ 바람이 흐르고/ 별들이 나부껴,// 그대여, 저 신비로운 대나무 피리의/ 전설을 들은 적이 있는가?/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같이/ 죽순처럼 광명한 아이는 자라고/ 악보를 모르는 오선지 위로는/ 자비처럼 서러운 음악이 흘러라……//

시계풀의 편지 4 / 김승희
사랑이여.// 나는 그대의 하얀 손발에 박힌/ 못을 빼주고 싶다./ 그러나// 못박힌 사람은 못박힌 사람에게로/ 갈 수가 없다.//

제도 / 김승희
아이는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깔이 나갈까봐 두려워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길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개뭉개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한국은 노래방 / 김승희
당신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사람/ 노래방에서 당신 혼자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삼십분 넘게 앉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에게 노래를 부를 것을/ 권한다 강요한다 애소하고 명령한다// 노래방에서 당신 혼자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삼십분 넘게 앉아있어 본 적 있는가/ 당신은 남북통일에 반대하는 사람/ DMZ를 만드는 사람/ 수원지에 독극물을 붓는 사람/ 성수대교를 무너뜨리는 사람/ 백범 김구를 암살한 바로 그, 그, 그 장본인이 된다// 길은 이것뿐이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남겨두고 노래방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당신은 아웃사이더가 된다)/ 노래를 부르라고 부르라고 잡아끄는/ 친구들의 팔목을 절단해 버리고/ 친구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당신은 체제 부정자가 된다)/ (이제 당신은 비로소 노래부르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니면 노래를 권하는 친구들의 끈질긴 권유에 항복하여/ 잘 부르지 못하는 노래지만 한 곡조 마지못해/ 불러 본다/ (당신은 그 순간 자랑스런 한 패로 승격된다)// 노래방 바깥으로 홀로 나간다/ 노래방 바깥의 번쩍이는 네온 붉은 조명이/ 밤도 별빛도 다 삼켜버린 천지/ 눈물을 문지르며 그대는 깨닫는다/ 노래방은 만유에 편재하고/ 노래방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노래방 체제가 한국의 유일한 체제이며/ 그 바깥에는 다른 어떤 체제도 없다는 것을//

황혼이면 / 김승희
황혼이면/ 밥상을 부수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다던/ 한 여류작가가 생각나지,/ 언제부턴가 하루하루란 사는 것이 아니었고/ 힘껏 견뎌야만 하는 무엇이었지,// 푸른 목숨의 그리움/ 있는 대로 선혈처럼 다 배어나오는/ 저 미친 하늘/ 일그러진 얼굴을 원흉처럼 거느린 채// 치마폭일랑은 치렁치렁/ 난파의 깃발처럼 펄럭이며/ 아아, 머리칼은 욱조아 묶은 채로/ 그대로 두고 말까,/ 괴물의 마수처럼 훨훨 이글거리며/ 제 슬픔의 또아리를/ 힘껏 틀고 있으라고,// 밤은 모르는 남자로부터 매일 오는/ 연서처럼/ 상냥하고도 은밀한 것,/ 두근거리며 드럼, 드럼, 드럼,/ 위험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인가/ 행복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인가// 나는/ 더 이상 산이 안 보이는/ 그런 산 위에 서 있고 싶다.// 가라, 가서/ 루마니아 폴카를/ 피가 절이도록 루마니아 폴카를/ 추며 잊으며 돌라오지 말까,/ 음악이 공범이 될 때까지/ 춤이 정사가 될 때까지// 나는 더 이상/ 절벽이 안 보이는 그런 절벽 위에/ 춤추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오래 서 있었다,/ 춤을 추지는 않고/ 별빛이 내내 뼈에 시릴 때까지-//

빨래를 개키는 여자 / 김승희
불길한 주황빛 노을이 날개를 접고 지상에 저녁이 내린다/ 텔레비전에서는 하루치의 나쁜 뉴스가/ 뜨거운 국처럼 끓어 넘치고/ 여자의 치마 아래엔 죽은 닭들의 시체, 방사능 묻은 시멘트 폐기물, 폐타이어, 머리가 깨진 지구본이 묻혀 있다, 지구본의 금 사이로,/ 석류 즙 같은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난민들은 푸른 파도 아래 침몰한다,/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는 것은/ 열린 창문 앞에서 한 여인이 빨래를 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 똑같은 삶의 폭력과 파괴에 젖어서도/ 저녁마다 나쁜 뉴스를 보며/ 치마 아래에 돌아버린 문명의 황폐한 쓰레기를 품고/ 열린 창문 앞에서 오염을 문지르고 보푸라기나 실밥을 뜯으며/ 조용히 빨래를 개키는 한 여인이 있다/ 손이 뜨거운 다리미가 된 듯 다독이고 쓰다듬어서/ 하얀 와이셔츠나 청바지나 블라우스나 팬티나 손수건을/ 눈부시게 펴서 나란히 개키고 있는 여인의 손은/ 쓸쓸한 노동의 손이 아니라/ 창자가 끊어지는 비탄의 깊은 낙관주의// 지금 어느 해변 가에는 등대가 켜지겠지/ 열린 창문 앞에서/ 한 여인이 빨래를 개키고 있기 때문에/ 사랑은 오직 가난하고 위급한 때 오기 때문에//

두 번째 줄 / 김승희
나는 늘 두 번째 줄에 서서 살아왔다/ 누가 일부러 시켜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비켜라! 그렇게 누가 험악하게/ 소리를 쳐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너는 세상의 첫 번째 줄에 설 수 없다는 그런 명령을/ 딱히 받은 기억은 없다// 그보다도 더 나는/ 두 번째 줄이 내 자리라는 생각/ 두 번째 줄이 나에게 마땅하다는 느낌/ 너는 결코 첫 번째 줄이 아니라는 그런 의식이/ 나에게는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것에는 아픔이 없다/ 자연스러운 것에는 질문도 없다/ 자연스러운 것에는 의심도 낙심도 없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줄에 서서 염소처럼 산다// 물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허우적대며/ 물 위로 올라오려고 필사적으로 헤엄을 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물 밖으로 나와야 목숨을 건질 것이다/ 그리고 맙소사! 늘어진 해파리처럼/ 두 번째 줄은 아마 떠오르기에 너무 늦은 줄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 / 김승희
결국 모든 시의 제목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는// 이상은 그렇게 위독의 문학을 했다,/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고,/ 김유정도, 카프카도 그런 위독의 문학을 했다,/ 나도 이렇게 위독하다고,/ 폭설이 가혹해지면/ 봉쇄 수도원처럼 침묵과 폐쇄의 자리가 된다,//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극한의 맹지, 봉쇄 추위 속에 누워/ 백 년 전쯤 태어난 이상, 김유정, 윤심덕, 백석들의/ 고독과 위독을 생각하고 있는데/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수선화와 유채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샛노란 소식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수선화와 유채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는……/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수선화가 무리지어 꽃을 피워/ 싱그러운 향기를……/ 아, 제발,/ 아랑곳없이……/ 그런 말//

맨드라미의 심연 / 김승희
영화 같은데 영화는 아니었다/ 병원은 분주한데 빨간 맨드라미 꽃밭이었다// 뱅크시의 낙서 그림 같은 콘크리트 벽에 그려진/ 부러진 횡경막과 다친 심장의 빨간 피// 결코 분업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 나의 고통은 연년세세 나만의 고통인데/ 갑자기 붉은 맨드라미 꽃밭이 두 팔을 살짝 들고 나만 들리게 부르는 것 같았다/ 만세는 함께 부르는 것 같지만 실은 혼자씩 부르는 것이다// 울고 울고 울다가 스스로 끓는 물이 되어 한 톤 트럭의 달걀을 다 삶은 물불 모르는 눈물이 있었다/ 온 천지가 빨간 불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갑자기 온몸에서 불이 난 빨간 불이 되었다/ 맨드라미의 심연 같은 환희의 약용의 힘!// 사랑을 깨닫기까지 욥기 42장이 걸렸습니다//

감자꽃이 싹트는 것 / 김승희
감자를 깎으려고 지하실 푸대에서 감자를 꺼냈을 때/ 주렁주렁 딸려 나오는 무슨 주먹 같은 것/ 쭈글쭈글한 주먹마다 보라색 꽃순이 싹텄는데/ 감자에서 싹이 나서 감자꽃/ 독을 머금고 꽃이 피어난 감자는 못 먹는 감자래/ 꽃이 독을 품은 거라/ (가시가 많은 꽃이 색깔이 진하다는데)/ 어떤 마음을 먹고 주먹을 꽉 쥐고 숨었길래 독이 꽃이 되었을까?/ 내가 힘은 없지만 꼭 너를 죽여야겠다고/ 감자 속에 숨은 마음이 주먹이 되어서/ 주렁주렁 감자가 보라색 꽃순을 피웠는데/ 증오는 너무 자해적이야/ 독이 생활 속에 스며들어 감자가 보라색 꽃을 피웠다/ 꽃이 핀 감자는 못 먹는 감자/ 무수한 주먹들이 서로 목을 감고 뒤엉켰다// 생활이라는 것/ 때로 주먹을 활짝 펴서 양산처럼 빛을 받아야 하는데/ 꽉 쥔 주먹이 펴지지가 않아서/ 베란다에 앉아 가위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오리고 있다/ 때로 도심의 지붕 아래 감자 푸대를 말려야 하는 임상적 이유/ 썩은 감자들을 베란다 한곳에 몰아놓았더니/ 주먹들이 발악을 했는지 봉분만한 보랏빛 꽃밭을 이루었다/ 주먹만 한 감자에서 싹이 터서 감자꽃/ 머랄까,/ 자전을 하면서 공전도 하는 그런 삶이어야 한다고 했다//

장미와 가시 / 김승희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해바라기와 꿀벌 / 김승희
해바라기 꽃잎 속에 고개를 파묻고/ 꿀벌은 성경을 읽듯이 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집중에는 이상하게도 서러움과 성스러움이 있었다,/ 누우면 발끝이 벽에 닿는 창문 없는 쪽방에서/ 서로의 몸 밖에는 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젊은 가난/ 우주의 한 구석지에서 쟁, 쟁, 쟁, 타오르는 해바라기 몸/ 종소리마다 박히는 크고 검은 씨앗, 탐스런 꿀에 고개를 박고/ 차라리 모든 괴롬을 던져버린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미래라는 단어만한 사치도 없었을 것이다,/ 죽어도 좋아,/ 가난한 꿀벌의 등은 등 뒤에 걸린 칼날을 찰나찰나 예감하고/ 파르르 떨리기도 했을 것이다,/ 꿀에 머리를 박고 고요히 등 뒤의 칼날을 느끼며/ 꿀 송이에 빠져 있는 깊은 꿀벌의 모습이/ 아프도록 슬픈 성자의 사색 어린 모습과 어딘지 닮아 있던 것이다//

꽃이 친척이다 / 김승희
오늘/ 시계 없는 시간이 파란 하늘로 흐를 때/ 뻐꾸기시계 소리가 새 달력 위로 쏟아질 때/ 초침이 머리칼을 지나 침대 아래로 녹아 떨어질 때/ 배가 새고 있어요/ 종잡을 수 없는 부르짖음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 때/ 절벽 위에 핀 꽃들이 경련하며 쏟아질 때// 종잡을 수 없는 종다리의 노랫소리가/ 종잡을 수 없게 숲을 흔들어놓고 사라질 때/ 그 종다리 소리에 피가 뛸 때/ 갑자기 꽃이 혈연이라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도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종다리 노랫소리가/ 땅도 시내도 나무도 산도 쪽빛 바다 갈대숲도/ 다 흔들어놓을 때/ 저녁에 산 너머로 뚝뚝 떨어지는 해도// 그래, 죽음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 것인가/ 하늘도 구름도 땅도 바람도 아카시아 라일락 향기도/ 혈연보다 가까운 나의 일부/ 꽃이 친척이다, 느껴질 때/ 종잡을 수 없는 죽음은 종잡을 수 없게 가까이 와 있다//

꽃들의 제사 / 김승희
어떤 그리움이 저 달리아 같은 붉은 꽃물결을 피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혈관 속에 저 푸른 파도를 울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흰 구름을 밀고 가는가/ 어떤 그리움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저 반짝이는 햇빛을 펄떡이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끊어진 손톱과 끊어진 손톱을 이어놓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돌멩이에게 중력을 잊고 뜨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에게 17년 동안의 지하생활을 허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에게 한여름 대낮의 절명가를 허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비행운과 비행운을 맺어주나/ 지금 파란 하늘을 보는 이 심장은 뛰고 있다/ 불타는 심장은 꽃들의 제사다/ 이 심장에는 지금 유황의 온천수 같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데//

저 산을 옮겨야겠다 / 김승희
저 산을/ 옮겨야겠다/ 저 산을/ 내가 옮겨야겠다/ 오늘 저 산을/ 내가 옮겨야겠다// 먼저 산에서 ㄴ을 빼고/ ㅏㅏㅏㅏ/ 목 놓아 바깥으로/ 아를 풀어 놓으면/ 산은/ 마침내 ㅅ만 남게 된다/ 두 사람/ 비스듬 몸 맞대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ㅅ...... ㅅ......ㅅ......ㅅ....../ 저 산이 움직인다/ ㅅ...... ㅅ......ㅅ......ㅅ....../ 저 산이 걸어간다/ ㅅ...... ㅅ......ㅅ......ㅅ....../ 산을 움직이는 두 사람/ ㅅ...... ㅅ......ㅅ......ㅅ....../ 사랑하는 두 사람이다//

홀연忽然 / 김승희
홀연…… 다운 말이다/ 흘리는 말이다/ 상상력을 주는 말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말이다// 그 말에 기대어 아침을 본다/ 그 말에 기대어 기도한다/ 철로에 누워 하늘을 보는 마음/ 서로 사랑한다면 두려울 것 없으리, 그런 마음// 홀연…… 누구나 그 꿈을 갖는다/ 홀연 누구나 그 사랑을 갖는다/ 홀연 누구나 어깨를 기대고 싶은 말이다/ 누구나 알고 싶은, 그러나 알 수 없는/ 슬픈 내일 같은 말이다//

매화는 힘이 세다 / 김승희
다른 것은 몰라도/ 저 얼음덩어리 빙하의 땅 밑에는/ 곰이 겨울잠을 자고/ 죽은 유리디체를 찾아 오르페우스가 간 길이/ 구뷔구뷔 있을 것이다,/ 겨울잠을 자는 곰보다도 못한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부스럭댄다,/ 그 인간보다도 못한 것이 저승의 악사다/ 빙하를 뚫고 저승으로 길 떠난 오르페우스다/ 죽음을 우는, 죽음을 살리려는 오르페우스다/ 살리지 못하였다/ 유리디체는 이미 죽었고 다시한번 또 죽었다/ 강물이 풀리면/ 그 물 위로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수금이 둥둥 떠내려간다/ 그 혼이 피기 전에 매화가 먼저 핀다// 매화는 힘이 세다//

하나를 위하여 / 김승희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살았던 것들 중/ 그 중 아름다운 하나가,/ 슬펐던 것들 중/ 그 중 화사한 하나가,/ 괴로왔던 것들 중/ 그 중 순결한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많은 길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길을 버리고 싶고/ 더 많은 꿈을 지우고 싶고/ 다만 하나의 길과/ 다만 하나의 꿈을 통하여/ 물방울이 물이 되고/ 불꽃들이 불이 되는/ 그 하나의 비밀을 알고 싶을 뿐이다.//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그 하나에 닿기 위하여/ 나는, 하나하나, 소등 연습을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가로등이 다 꺼진 어둠 속으로/ 솜처럼 착하게 다 적셔져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타오르는/ 하나의 봉화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별 / 김승희
별/ 에서/ ㄹ 이/ 떨어져서/ 무릎 같은 ㄹ 이 떨어져서/ 땅에 내려와서/ 논에 들어가/ 벼가/ 되어서/ 벼로 패어서// 일하는 농부의 다리/ 힘들어서/ 꺾어져서/ 주저앉아서/ 겹친 다리/ 꺾인 무릎/ ㄹ 이 되어서/ 벼를 모시고 쉬는데/ 때/ 그런 때/ 벼가/ 별이 되어서//

탕 / 김승희
소방서 앞길에 떨어진/ 성냥 한 개비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조마조마함으로/ 불안의 일상병리 같은 시대만/ 쥐 죽은 듯 깊어가고 있었다// (너무나 겁을 먹었기 때문에)/ 아직도 미치지 않은 그대여,/ 미치지 않고서/ 이 미친 시대를 바라보고만 있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처형인가, 얼마나/ 조마조마한 배덕인가?// 관자놀이에 권총구멍이 나버린/ 달걀/ 그런 행복한 폭발을 해방이라고 불러선/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탕!/ 난 다만 그 팽팽한 침묵의 물이/ 찢어지는지 아닌지/ 다만, 그것을, 한번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멍 / 김승희
비닐하우스에서 생산되어 팔려온/ 시금치는/ 그렇게 푸르지가 않다,/ 무언가가 크게 잘못 되어/ 심하게 멍든 것 같은 표정을 줄 뿐이다.// 바람이 되다만 사랑이/ 희망이 되다만 낙망이/ 새벽이 되다만 절벽이/ 혁명이 되다만 울부짖음이/ 저런 정막의 멍이 된 것일까?// 푸른 멍이 자신의 상처를 이길 수/ 없을 때/ 멍은 멍에가 되어/ 한밤을 개집 속에서 울부짖어야 한다./ 멍/ 멍 · 멍/ 멍 · 멍 · 멍// 멍멍멍 울부짖는 멍을 나는 기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이 되다만 멍들이/ 새벽이 되다만 절벽들이/ 개벽이 되다만 희망들이/ 다른 언어로 꽃피어남(울기)을/ 찾을 때까지// 나는 더 멍들의 멍에를 걸머지고/ 이 토막난 변사체 같은/ 희망의 빈민굴을 좀더 사랑할/ 작정이다,/ 멍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멍들게/ 하는 것들을 좀더 질기게/ 비웃어 주어야만 하기 때문에/ 멍이 멍 · 멍을 초월하는/ 그 어떤 아름다운 반동을 낳을 때까지//

절벽의 포스트잇 / 김승희
난 정말 시간이 없어,/ 글씨 쓰는 인간/ 허공에서 강하고 급한 바람이 휙 몰아칠 때/ 외출하기 직전 옷소매에 한쪽 팔을 집어넣다가/ 포스트잇에 글씨를 쓰네/ 격한 호흡/ 작고 사소한 우리의 약속, 다급한 비상용 처방전,/ 숨찬 짝사랑의 흘려 쓴 기록// 마트 계산원 엄마가 일 나가면서/ 어린 아들에게 고등어구이 꼭 먹으라고 쓴 메모,/ 간병 일을 하는 김평순씨가 병원으로 나가면서/ 딸에게 입시 공부 잘 해라, 주말에 보자라고 쓴 글씨,/ 잠깐 나갔다 와요, 저녁 먼저 먹어요/ 반지를 빼놓고/ 애인이 애인을 만나려고 나가면서 쓴 거짓말 편지,/ 혼자 있는 게 아니야, 포스트잇을 쓸 때면/ 순간 둘이 있어,/ 잠깐 손을 맞잡은 두 개의 물방울 같은 포스트잇/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구나/ 이렇게 안부를 붙이다니!/ 거짓말이라도 반가워/ 거기에 그렇게 쓰네// 촛불이 다시 꺼지겠어요/ 촛불을 다시 켜주시겠어요?/ 라보엠의 미미가 흘려 쓴 글씨/ 이슬은 꼭 부디, 라는 말로 시작하는 일기를 쓰지/ 이 슬픈 보석을 부디 밭에 던지지 마오/ 난 정말 시간이 없어,/ 촛불이 다시 꺼지겠어요/ 거울에서 두 개의 물방울 같은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화염 같은 고통 속의 사랑이라는 격투기/ 어디선가 포스트잇을 붙이는 급한 손/ 또한 지상의 어디에선가 가을처럼 사뿐 포스트잇 떨어지는 소리// 포스트잇 한 장이 냉장고 문에서 굴러 떨어질 때/ 우리의 약속이 굴러 떨어지네/ 난 정말 시간이 없고/ 바람도 없는데 낙엽처럼 가벼이 날리네/ 쓰는 때면 늘 둘이 되는 포스트잇에/ 급하게 쓴 짝사랑의 격한 숨결/ 흘려 쓴 글씨들의 희망이 굴러 떨어지네/ 텅 빈 우주 속으로 작은 종이 한 장이 굴러 떨어지네//

젖가슴 골짜기 / 김승희
그 산에 동백사라는 절이 있더란다.// 그 절에서 수행을 하던 주지스님이 득도 직전 아름다운 여인에 홀려 벼락을 맞아 바다에 떨어졌는데, 가사옷이 날아가 가사도가, 장삼이 날아가 장산도가, 날아간 상의가 상태도, 하의가 하의도가 되었더란다. 손가락은 주지도, 발가락은 양덕도, 목탁은 불도가 되었더란다.// 네가 무슨 섬을 섬기겠느냐,/ 득도 직전까지 가보겠느냐,/ 벼락 맞아 죽을 만큼 사랑해 보겠느냐,/ 폭포와 피, 동백꽃 심장,/ 수평선과 지평선 온 가슴 낭자한 가슴 골짜기에/ 쌓여, 흘러, 점점이 찢어져/ 아, 모르겠다, 난 이제 간다,/ 젖 먹던 아이 두고 홀연 일어나/ 한반도 어느 바닷가에 젖가슴 낙조 한 이천 리 남기고/ 내 모가지는, 내 손가락은, 내 발가락은/ 이름도 없이 그냥 바다에 모두 드리고 날아가리//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근심 걱정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 김승희
하얀 문이/ 관뚜껑처럼 닫혀버린다/ 아직, 얼굴 위에서/ 미처 미소가 지워지기도 전에/ 일방적인 해고통고와도 같이/ 하얀 문이/ 관뚜껑처럼 닫혀버린다./ 아, 아, 안녕하고 말을 맺기도 전에,// 사랑하는 이여,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면/ 정녕 그럴 수는 없다,/ 우린 좀더 사랑했어야 하고/ 우린 좀더 진지한 고통을/ 나누어야 했지,/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 우린 좀더 불을 통과하는 뜨거운/ 길들을 함께/ 다녀보았어야 했다.// 언젠가 하얀 문이/ 그렇게 닫혀지고 말겠지/ 불가사의하고도 불가항력적인-하얀-/ 단절이-우리의-/ 얼굴 위에 수면 마스크처럼/ 조용히 드리워지고/ 비단 끈으로 된 하얀 망사처럼 보슬보슬한 음악이/ 엘리베이터 천정 위에서/ 세뇌라도 하듯이, 자ㄹ자ㄹ 소ㄹ소ㄹ 속삭여대겠지/ 잊어 버려, 이젠 다 끝장이 났어,/ 잊어버리라구, 낄, 낄, 낄......//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면/ 정녕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언제나 마지막 문은/ 그렇게 닫혀지고 마는 법/ 언제나 지고 있는 노름패처럼/ 열쇠도 없다,/ 열쇠도 없이/ 그렇게 승천의 문 안에 갇혀야 하는가/ 반달은 어디로 가는가,/ 별들은 왜 흐르는가//

육십이 되면 / 김승희
육십이 되면/ 나는 떠나리라/ 정든 땅 정든 집을 그대로 두고/ 장농과 식기와 냄비들을 그대로 두고/ 육십이 되면 나는/ 떠나리라/ 갠지스 강가로// 딸아, 안녕히,/ 그동안 난 너를 예배처럼 섬겼으니,/ 남편이여, 그대도 안녕,/ 그동안 그렸던 희비의 쌍곡선을/ 모두 잊어주게/ 축하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 그대의 축하를 받으며/ 난 이승의 가장 먼 뱃길에 오르리// 생명의 일을 모두 마친 사람들이/ 갠지스 강가에 누워/ 태양의 괴멸작용을 기다린다는 곳,/ 환시인 듯/ 허공 중에 만다라花가 꽃피며,/ 성스러운 재와 오줌이 혼합된/ 더러운 갠지스 물을 마시며/ 이승의 정죄와 저승의 빛을/ 구한다는/ 더러운 순결의 나라로// 해골의 분말이 물 위에 둥둥 뜨면/ 해와 달과 별이/ 그려진 거대한/ 수레바퀴가 반짝반짝 혼령을 실어나르고/ 미쳐도 오직 신령으로 미친 사람들이/ 죽음의 천궁도를 들여다보며/ 환생을 근심하는 찬란한/ 강가// 난 그 강가로 가리/ 힌두의 장법대로/ 붉은 천 하나 몸에 두르고/ 어느 날 햇빛 아래 문득 쓰러지면/ 힌두의 승려들이 나를 태워주겠지/ 저승돈 삼십 냥을 빈손에 들고/ 나는 끝으로 말하리라/ 부디 사리를 채취하지 말아주게,/ 마치 모닥불 위에 장미꽃잎을 얹은/ 것처럼/ 그리고 그 불은 아름답겠지// 해골의 분말이/ 그 강위에 뿌려지면/ 난 저승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오리,/ 한강이 되어 섬진강이 되어/ 광주 어귀의 극락강이 되어/ 어머니의 나라 딸의 나라/ 내 원죄의 나라로// 육십이 되면/ 그러나 나는 떠나리라/ 성훼와 식수가 뒤섞인/ 그 이상한 나라,/ 뼈 한 점 한 점마다/ 환각의 약초가 피어나고/ 슬픔이 완전 소독되고/ 임종의 오줌 안에서/ 뱀이 불같은 머리를 트는 그곳으로,/ 죽음마저 차마 예술이 되는/ 끝없는 끝의/ 그 먼 나라로//

새벽밥 /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구름 밥상 / 김승희
검은 리본이 둘러쳐진 영정사진 아래서/ 밥을 먹는다./ 모란꽃 같은 구름이 밥상으로 내려왔다./ 아니 모란꽃 같은 밥상이 구름 위로 올라갔다./ 이 꽃 같은 구름 밥상,/ 어이, 어언, 어이, 그런 밥상.// 검은 리본이 둘러 쳐진 영정사진 아래서/ 밥을 먹는다/ 모란꽃이 뚝뚝 지기 시작하는 밥을 먹는다./ 흘러가는 밥상,/ 언제나 모든 밥상은 흘러가는 밥상이었다./ 어이, 어언, 어이, 그런 밥상.// 어느 화창한 날/ 어느 고유한 날/ 검은 리본 둘러쳐진 영정사진이 되어/ 나도 식구들 흘러가는 밥상에 둘러앉아/ 흘러가는 밥 먹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어이, 어언, 어이 그런 날.// 피란 원래 구름으로 만들어졌고/ 정액도 원래 구름으로 만들어졌고/ 달도 원래 구름으로 만들어졌고/ 해도 원래 구름으로 만들어졌고/ 태초에 구름 밥상,/ 모란꽃 지었다 피는 그런 구름 밥상,/ 어이, 어언, 어이, 어이, 아 그런 밥상……//

남도창 / 김승희
동녘은 많지만/ 나의 태양은 다만 무등위에서 떠올라라// 나는 남도의 딸/ 문둥이처럼, 어차피,난/ 가난과 태양의 혼혈인걸// 만장 펄럭이는 꽃상여길 따라 따라/ 넋을 잃고/ 망연자실 따라가다가/ 무등에 서서/ 무등에 서서//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위에/ 요화처럼/ 이글거리며 피어나던/ 붉은 햇덩어리를 보았더니라/ 모두들 사당패가 되자 함인가/ 백팔번뇌 이땅을 용서하자 함인가// 신명지펴 신명피어/ 벌레 같은 한평생/ 가난도 아니고/ 죄도 아닌 사람들// 나는 남도의 딸/ 징채잽이처럼,어차피,난,/ 가락과 신명의 혼혈인걸// 무등의 가락으로 해가 질 때만/ 노을의 원한이 되는 것이니/ 천지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내 고향 사람들의 울음을 모아/ 지는 해/ 굽이굽이/ 서러운 목청// 돌아가 돌아가서/ 내 썩은 오장육부를 징채 삼아/ 한바탕 노을을 두들겨 보노니/ 붉은 햇덩이는 업과처럼 둥글다가/ 문득 스러지면서/ 가장 진한 남도창을/ 철천지에 뿌리더라.//

‘이미’라는 말 2 / 김승희
이미라는 말/ 하나의 세계에 고요히 문을 닫는 말/ 이미라는 말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 미래가 미래를 완료하는 말,/ 누구도 누구를 구원할 수 없는 시간의 말,/ 문상객도 없이 병풍만 쳐놓은 그런 말,/ 박제가 박제를 완료하는 말,// 이미라는 말에는/ 핏기 잃은 지상의 마지막 기도뿐/ 이미라는 말에는/ 바깥에서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는/ ‘이미’라는 미래완료의 시간과/ 지금은 단지 어두운 그 통로를 천천히 걸어가는/ 소슬한 시간//

갑자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이 들렸다 / 김승희
폭설의 밭 속에서 살고 있는 것들!/ 백설을 뻗치고 올라가는 푸른 청보리들!/ 폭설의 밭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들!/ 시퍼런 마늘과 꿈틀대는 양파들!/ 다른 색은 말고 그런 색들!/ 다른 말은 말고 그런 소리들!//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사흘이나 나흘을 살더라도 그렇게//

꿈틀거리다 / 김승희
꿈틀거리다/ 꿈이 있으면 꿈틀거린다/ 꿈틀거린다, 라는 말 안에/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이란 말이 의젓하게 먼저 와 있지 않은가// 소금 맞은 지렁이같이 꿈틀꿈틀/ 매미도 껍질을 찢고 꿈틀꿈틀 생살로 나오는데/ 어느 아픈 날 밤중에/ 가슴에서 심장이 꿈틀꿈틀할 때도,/ 괜찮아/ 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 꿈꾸는 것은 아픈 것/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틀꿈틀/ 바닥을 네 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

단무지는 단무지 사바나는 사바나 단무지는 사바나 / 김승희
친근하고 낮은 가난의 막통 속에 절여지는 단무지/ 조금씩 식초의 쓰라림 속에 진저리를 치며/ 치자 꽃물을 곱게 들여 온몸이 노란 단무지/ 단무지 위에 다른 단무지가 얹혀 있다/ 가슴이 다른 가슴에 얹혀 있는 것처럼// 단무지는 단순 무식 지랄의 줄임 말이라지/ 뼈도 녹인다는 소금 식초 속에 쓰라리게 절여진,/ 탯줄을 달고 콘크리트 바닥에 내던져져 죽은 신생아와/ 이 모든 버려진 것들의 비참을 끌어안고/ 진저리나는 소금 식초의 사바나의 침묵 속에서// 알고 보면 고요한 사바나의 침묵은 정말 더 큰 것을 품고 있다/ 큰불이 지나고 우기가 오면/ 사바나에는 탐스러운 풀이 우거지고/ 숨어 있던 사자가 순하게 풀을 뜯는 얼룩말을 덮치고/ 악어가 강을 건너는 누 떼를 공격하여 창자부터 먹는데/ 곡哭소리 하나 없는 푸른 초원/ 힘의 그늘에서 그늘의 힘으로 관통하는 고요// 조용한 것이 평화는 아니지만/ 낙심과 절망 속에 쓰리다 시리다 아프다 시디시다 짜디짜다/ 묵언으로 절여지는 단무지는 단무지/ 숨죽여 우는 것들 위에 숨죽여 다둑이는 것들/ 단무지의 연관 검색어는/ 오이 시금치 당근 김 우엉 고추장 멸치 짜장면이라지/ 무심한 멸치, 무심한 짜장면 옆에 무심한 단무지/ 죽이고 죽어도 먹고 먹혀도/ 거짓말이 없어 차라리 좋은 사바나의/ 원초 옆에 원초/ 식초 옆에 식초// 그리하여 이 망할 놈의 세상은/ 온통/ 단무지는 단무지 사바나는 사바나 단무지는 사바나//

시의 응급실에서 / 김승희
시는 응급실,시는 산소텐트,시는 시린 사과속의 빨간 피,/ 슬픔은 비료와 같아/ 시의 이곳 저곳에 뿌려둬야지,/ 시는 임산부의 날/ 언제가 해산의 날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날,/ 어둠은 빛을 알지 못하여/ 시는 시한폭탄을 타고 달린다,/ 산 위로 , 구름위로 층층 달린다,/ 그런데 산기슭, 한배미 논배미에서/ 누런 벼들이 익어가고 있다,/ 밥 한 공기만한 논,삿갓으로 덮어도 될만큼/ 작은 한 공기의 삿갓 논,/ 죽그릇,밥그릇 하나만 한 죽 배미, 밥 배미,/ 삿갓배미여,/ 무릇 죽한그릇으로 원기소성 하노니/ 가을 다랑논 한 배미의 힘으로/ 나를 살리고 너를 살려/ 다시 산 논배미에 엎드려 언어의 이삭을 줍고/ 언어의 씨앗을 심게 하나니/ 층층이 겹쳐진 황금빛 다랑 논/ 거친 땅, 별이며 구름이며 달이며 바람이며/ 당신의 시한편/ 하얀 김이 펄펄나는 밥 한공기/ 당신의 필생인 문학전집 한권//

같이 죽자는 말 / 김승희
그런 말을 해보았는가/ 같이 죽자는 말// 사랑이 없으면 못하는 말/ 사랑이 있어도 못하는 말/ 차라리, 라는 검은 말이 깊은 밤 문장의 마차를 몰고 가는 말// 어찌하다가 같이 죽자는 말/ 번개같이 예쁜, 정신이 번쩍 드는 섬광의 말/ 그럼에도 언제나 빛은 있다는/ 검은 바다를 끌고 푸른 나팔꽃을 지나가는 새벽의 말// 그런 말을 들어보았는가/ 차라리, 라는 말을 구원하는 것은/ 오히려, 라는 말이라고// 꿈과 악몽으로 이루어진 삶의 문턱에서/ 찢어진 레테강의 물결을 두 손에 뚝뚝 들고서/ 때로 침몰의 반대편으로 힘껏 가자는/ 오히려, 라는 그 기적의 말//

일회용 시대 / 김승희
사발면을 후루룩 마시고/ 일회용 종이컵을 구겨서 버리는 것처럼/ 상처가 아물면/ 일회용 반창고를 딱 떼어서 던져넣은 것처럼// 이 시대에/ 내가 누구를 버린다 해도/ 누구에게서 내가 / 버림받는다 해도// 한번 입고 태워버리는 종이옷처럼,/ 한번 사용하고 팽개쳐야 하는/ 콘돔처럼,/ 커피 자동판매기 안에서/ 눈을 감고 주루룩 쏟아져 내리는/ 희게 질린 종이컵처럼/ 껌종이처럼 설탕포장지처럼/ 그렇게/ 내가 나를 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 나도 나를 버릴 수 있을까// 어느 으슥한 호텔 욕실에서/ 잠깐 쓰고 버려지는/ 슬픈 향내의/ 일회용 종이비누처럼...//

오른편 심장 하나 주세요 / 김승희
​사랑은 머리위로 떨어지는 칼/ 손으로 잡으면 늘 다치는 것/ 사랑은 가슴 위로 떨어지는 피/ 피하려고 해도 꼭 적시는 것// 세상은 온통 배롱나무 꽃 천지/ 지금은 꽃의 피가/ 사방 공기에 다 물들었다// 앞으로 갈 길에는 주유소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 기름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다음 주유소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여기서 부터다/ 주유소가 안 나오면/ 꽃의 피로 가야지,/ 못 박힌 자리에서 쏟아지는 피,/ 오른편 심장 하나 구하려고 배롱나무 꽃그늘에//

심장딴곳증 / 김승희
인어가 물 밖으로 나와 걸어 가는 것처럼/ 우리가 땅 위를 걸어갈 때/ 물 밖으로 나와 방울방울 피를 뿌리며 걸어가는 모든 해저의 것들에 대해/ 안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기막히게 아픔 심장같은 것에 대하여/ 나는 노래하고 싶다/ 심장은 결국 하트 모양이 아니었고/ 차라리 피투성이 근육 덩어리였다/ 어딘지 정육의 냄새가 풍겼다// 터널처럼 내 육체는 그만 아픈 심장을 견디다 못해 방출하였고/ 밖으로 쫓겨난 심장은/ 이제 비밀한 단 한사람조차 숨겨 졸 수 없게 되었을 때/ 구태여 물 밖으로 나와 걸어가는 인어라든가/ 샤갈의 그림 밖으로 끌려 나와 바위에 머리를 박고/ 여지없이 중력에 추락하는 푸른 신부라든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척추를 뚫고 지나간 쇠파이프를 지닌/ 프리다 칼로의 철철 흘러 내리는 피의 성찬식이라든가/ 그런 어처구니 없이 아름다운 것들에 대하여/ 안에 있지 않고/ 바깥으로 나와/ 아무나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며 아파? 아프겠지?/ 놀림 받아 정신없이 걷는 심장의 여자라든가/ 그래도 기도하며 걷는 여자라든가/ 맨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한땀 한땀 핏방울 뜨며 걸어가는/ 으리으리한 인어공주,/ 그런 벙어리, 피의 자수가刺繡家 이야기 라든가//

물이 수증기로 바뀌는 순간 / 김승희
그 뜨거운 홀연/ 순간/ 그 미끄러운 순간/ 날씨처럼 항상 변하고 있는/ 천연,/ 어디에도 밑줄을 그을 수 없는/ 그 순간/ 아낌없는 순간/ 죽어도 좋은 순간//

솟구쳐 오르기 2 /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 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 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콩나물의 물음표 / 김승희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이 나온다//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긴 기간 동안/ 밑 빠진 어둠으로 된 집, 짚을 깐 시루 안에서/ 비를 맞으며 콩이 생각했을 어둠에 대하여/ 보자기 아래 감추어진 콩의 얼굴에 대하여/ 수분을 함유한 고온다습의 이마가 일그러지면서/ 하나의 금빛으로 터져나오는 노오란 쇠갈고리 모양의/ 콩나물 새싹,/ 그 아름다운 금빛 첫 싹이 왜 물음표를 닮았는지에 대하여/ 금빛 물음표 같은 손목들을 위로위로 향하여/ 검은 보자기 천장을 조금 들어올려보는/ 그 천지개벽//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어두운 기간 동안/ 꼭 감은 내 눈 속에 꼭 감은 네 눈 속에/ 쑥쑥 한시루의 음악의 보름달이 벅차게 빨리// 검은 보자기 아래 -- 우리는 그렇게 뜨거운 사이였다//

냄비는 둥둥 / 김승희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아르헨티나 아, 아르헨티나가 냄비 두드리던 소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여름 밤거리를 뒤흔들던 소리,/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냄비, 프라이팬, 국자, 냄비뚜껑까지/ 들고 나와 두드려대던 소리,/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내지른 비명소리/ 아르헨티나 아아/ 빚과 실업자, 극빈자, 점쟁이와 정신과의사,/ 사망자와 부상자들, 그 한숨소리/ 나도 프라이팬을 들고 뛰어가 섞인 듯/ 입을 꽉 다문 채 몇 시간씩 은행과 직업소개소 앞에 늘어선 모습들/ 이런 광경 고요함// 비 내리는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며/ 묵묵히 밥을 먹는다/ 다리 하나 부러진 개다리소반/ 아무도 그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냄비 밑바닥만 우두커니 들여다본다/ 냄비 안에 시래깃국, 푸르른 논과 논두렁들,/ 쌀이 무엇인지 아니? 신의 이빨이란다,/ 인간이 배가 고파 헤맬 때 신이 이빨을 뽑아/ 빈 논에 던져 자란 것이란다,/ 경련하는 밥상, 엄마의 말이 그 경련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조용한 밥상의 시간,/비 내리는 저녁 장마,/냄비는 둥둥//

달걀 속의 生 5 / 김승희
달걀을 보면/ 알 수 있지,/ 아, 저렇게 해방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구나.// 조그맣게 차갑게/ 두 눈을 감고/ 아, 어찌해,/ 저리도 못다한/ 벙어리사랑을.// 외치고 싶고/ 깨지고 싶어도/ 시간의 실금이 온몸에 강물처럼 퍼지기를/ 기다려. 배꼽 같은 씨눈이/ 노른자위를 먹어치워/ 흰자위를 먹어치워/ 아, 그 안에서 원무처럼 일어서는/ 열애 같은 혁명을 기다려.// 달걀을 보면/ 눈물이 어리지./ 아, 저렇게 미해방의 절벽 위에서/ 꿈꾸는 사람!//

저녁의 잔치 / 김승희
저녁, 아직 다 다리가 끊어지지 않은 시간에/ 야전병원 같은 하루가 진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다리 위에서/ 노을은 울부짖노라, 왔다 갔다 하는 하루의 상처가 말도 못하고/ 쏟아지는 양동이의 피처럼 저물어 갈 때/ 부상병의 하루를 정리하고/ 기약이 없는 병든 팽이처럼 또 일어나야겠다고// 일어날 수 있겠는가, 뼈의 유령인 팽이여,/ 다리의 모서리에 걸쳐져서,/ 정말 광장 앞에는 나동그라진 뼈의 유령들이 즐비하다/ 부상당한 팽이에게는 역사가 없다,/ 역사도 상처도 기억도 노여움도 사월 오월도 없이/ 팽이는 그저 오늘의 채찍으로 오늘 돌고 있을 뿐인데/ 그런 간신히 팽이를 김수영은 성자라고/ 바보라고, 야전병원의 하얀 거즈 같은 위로라고도/ 마지막 힘을 다하여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팽이는 돌고 있다/ 바라춤같이 속으로 울며 돌고 있다// 내일의 팽이는 어제의 팽이로 급하게 넘어갈까,/ 아니면 일어나서 한 번 더 핑그르르 돌아 볼까,/ 배 넘어가는 순간에 저 혼자 배를 탈출한 선장 같은/ 대낮에 팬티만 입은 고급 남녀들이 곳곳에서 키를 잡고/ 중대한 도장을 무섭지도 않게 찍고 있는데, 모두 돌다가 쓰러질까,/ 이냥 이대로,/ 노을이 비스듬히 걸린 붉은 다리 끝에 팽이가 돈다// 세상의 모든 팽이가 다 쓰러지고 말면/ 세금은 누가 낼까, 전선은 누가 막을까, 국가는 누가/ 지킬까, 병원은 누가 간호할까, 왜 우리는,/ (병원이 나를 간호해야지)/ (내가 병원을 간호하는) 이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아픈 팽이에게는 세상은 거대 정신병원의 격실과 다름없는,/ 뇌수를 미싱 바늘로 쪼는 석양의 낭떠러지// 사랑할 수 있는 한, 햇빛 한 줄기가 있는 한/ 저녁의 다리가 다 끊어지지 않는 한/ 영원히 자신을 고쳐 가며 일어서고 또 일어서야 할 시간에/ 아픈 팽이에겐 누더기 같은 역사도 분노도 기억도 없다/ 쓰러지고 고쳐 가고 쓰러지며 또 고쳐 가면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라는 단순을 폐기하며, 단지/ 평범한 사람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성자가 될 때까지, 피를 묻히고, 저녁노을 아래서 온몸으로 돌고 돌면서/ 못 박힌 발로 춤추며/ 속으로 울며 눈을 감고/ 일어서는 자의, 비틀거리는 자의, 취한 팽이들의 고요한 춤만/ 저녁 광장에 조명을 켠 광화문처럼 가득하다//

앵무새 기르기 / 김승희
영혼 없는 새/ 남의 말을 따라 하는 새/ 고장 난 녹음기 보다 더 나쁜 새/ 내 영혼을 들킬까봐 남의 말 뒤로 숨는 새/ 세상은 그런 새를 기르기를 원한다/ 그런 새를 만들려고 학교를 만들었고 입시를 만들었고/ 사법고시를, 언론고시를 만들었다/ 앵무새를 길러 놓으니 참 편해, 내 말을 다 해주잖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매번 그렇게……/ 참 고마워라,/ 숲에서 우는 소쩍새여, 꾀꼬리여, 부엉이여,/ 놀라워라/ 제 소리로 제 슬픔을 애통하며/ 에레미아 선지자처럼/ 천년세세/ 남의 슬픔을 관통하는 새/ 앵무새는 죽어도 못 따라 갈/ 영혼 고운/ 새//

좌파/우파/허파 / 김승희
시계 바늘은 12시부터 6시까지는 우파로 돌다가/ 6시부터 12시까지는 좌파로 돈다/ 미친 사람 빼고/ 시계가 좌파라고,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바빠도 벽에 걸린 시계 한번 보고 나서 말해라// 세수는 두 손바닥으로 우편향 한번 좌편향 한 번/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야 낯바닥을 온전히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시계바늘도 세수도 구두도 스트레칭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세상은 돌아간다/ 벌써 구두의 한쪽은 좌파이고 또 다른 쪽은 우파이다/ 그렇게 좌우는 홀로 가는 게 아니다/ 게다가 지구는 돈다// 좌와 우의 사이에는/ 청초하고도 서늘한, 다사롭고도 풍성한/ 평형수가 흐르는 정원이 있다/ 에덴의 동쪽도 에덴의 서쪽도/ 다 숨은 샘이 흐르는 인간의 땅/ 허파도 그곳에서 살아 숨 쉰다//

난설헌의 방 / 김승희
머리는 찬 서리로 시려서 대낮에도/ 송이송이 타오르는 화관을 몇 겹씩 써야” 했던 조선시대 허난설헌에 빙의되어 그 뼛속을 들여다본다. “자기를 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아서 대낮에도/ 붓 한 자루에 언덕을 넘고자” 했던 난설헌을 보고, 그 뼛속에 가득한 “땅에서 하늘까지 번개가 흐르고/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근심을 주신 하느님께 / 김승희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이토록 많은 근심을 주셔서// 하늘은 넓고 갈 길은 막막한데/ 이토록 자잘한 근심들이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아침을 시작하여/ 무엇으로 밤을 마감할 수 있을까요/ 근심이야말로 분명한 행선지/ 삶의 공허 앞에 비석처럼 세워진/ 확실하고도 고마운 하나씩의 이정표// 세상은 광막하고 시대는 혼란스러온데/ 나에겐 자잘한 근심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취직걱정 건강걱정 자식걱정에 반찬걱정/ 주택부금 상호부금 월부책값에 세금걱정/ 연탄가스 주의보와 동파된 하수구 걱정,/ 시어머님 생활비와 친정아버지의 병원비와// 이 조그만 근심들이 있어서/ 난 우주가 막막하게 텅빈 낯선 것이 아니고/ 쌀독처럼 친숙한 것이며,/ 밑도 끝도 없는 적막강산이 아니라/ 한없이 체온으로 정든/ 내 헌옷 샅은 생각이 들어요,/ 근심이야말로 정다운 여인숙/ 그것조차 없다면 삶은 정말 매달릴/ 것이 없는 백골산의 단애와 같아요// 작고 미소한 근심들이여/ 너는 위대합니다,/ 너야말로 나를 삶에 꼭 매달리게 하는/ 지푸라기며,/ 허무의 양손이 우리 상처의 아가리를 끔찍하고도 냉혹하게/ 옆으로 찢어벌려/ 그 속으로 죽음 같은 극약을 부어넣으려고 할 때/ 넌 작지만 완강한 손끝으로/ 상처의 벌어진 틈을 재빨리 오무려주는/ 전천후의 자동단추와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린 잽싸게 그 싶은 허무 속의/ 막막한 무서움을 잊어버리고/ 일심으로 근심에만 집착하면서/ 다시 살 길을 재촉합니다,/ 25시도 지난 지금/ 우리는 갈 곳도 없는데/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그토록 많은 근심을 주셔서/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을 잊어버리도록/ 더 많고 자잘한 근심들을 주소서,/ 길 없는 길을 가기 위하여/ 문 없는 문을 열기 위하여//

희망이 외롭다 1 / 김승희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은 때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하지만/ 희망의 응급처치를 싫어하는 인간도 때로 있을 수 있네,// 아마 그럴 수 있네,/ 절망이 더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 약을 구하러 멀리서 왔는데/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믿을 정도로/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인데//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

꿈과 상처 / 김승희
나대로 살고싶다/ 나대로 살고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었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은 절망이로구나//

그림 속의 물 / 김승희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사랑스런 프랑다스의 소년과 함께/ 벨지움의 들판에서 나는 藝術의 말(馬)을 타고/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손을 들어/ 내가 그린 그림의 얼굴을/ 찢고 또 찢고/ 울고 있었고.// 나는 당황한 現代의 이마를 바로잡으며/ 캔버스에/ 물빛 물감을 칠하고, 칠하고,// 나의 의학상식으로서는/ 그림은 아름답기만 하면 되었다./ 그림은 거칠어서도 안 되고/ 또 주제넘게 말을 해서도 안 되었다.// 소년은 앞머리를 날리며/ 귀엽게, 귀엽게/ 나무피리를 깎고// 나의 귀는 바람에 날리는/ 銀잎삭./ 그는 내가 그리는 그림을 쳐다보며/ 하늘의 물감이 부족하다고,/ 화폭 아래에는/ 반드시 江이 흘러야 하고/ 또 꽃을 길러야한다고 노래했다.// 그는 나를 탓하지는 않았다./ 現代의 고장 난 수신기와 목마름./ 그것이 어찌 내 罪일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내 罪라고/ 소년은 조용히/ 칸나를 내밀며 말했다.// 칸나위에 사과가 돋고/ 사과의 튼튼한 果肉이/ 웬일인지 힘없이/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나에게 강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강은 깊이 깊이 흘러가/ 떨어진 사과를 붙이고/ 싹트고/ 꽃피게 하였다./ 그리고 그림엔 노래가 돋아나고/ 울려 퍼져/ 그것은 벨지움을 넘어/ 멀리멀리 아시아로까지 가는 게 보였다./ 소년은 강을 불러/ 내 그림에 다시 들어가라고 말했다./ 화폭아래엔 강이 흐르고/ 금세 금세/ 훤한 이마의 꽃들이 웃으며 일어났다.// 피어난 몇 송이 꽃대를 꺾어/ 나는 잃어버린 내 친구에게로 간다./ 그리고 강이 되어/ 스며들어/ 친구가 그리는 그림/ 그곳을 꽃피우는 물이 되려고 한다./ 물이 되어 친구의 꽃을 꽃피우고/ 그리고 우리의 죽은 그림들을 꽃피우는/ 넓고 따스한 바다가 되려고 한다.//

유서를 쓰며 / 김승희
내 뼈에 가득찬/ 죄악을 비우기 위하여/ 나는 유서를 씁니다./ 독한 청산가리같은 잉크에/ 내 넋의 붓을 적셔/ 한자 한자 공들여 적어봅니다.// 선언합니다./ 내 몸의 모든 세포들에게/ 시시한 추억들/ 못잊을 가족들에게/ 이것저것 유품을 나누어 놓고/ 이것이 최후라고/ 단호히 선언합니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문틈을 샅샅이 레이스로 봉합니다./ 그리고 가스마개를 틀고/ 더러운 부엌바닥에/ 냉정히 드러눕습니다.// 그리고 아직 너무나 젊기에/ 더 살고 싶다는 푸르른 나의 육신에/ 못을 탕- 탕- 박고/ 망치를 허공으로 던져버립니다./ 살점이 튀고/ 아까운 피가 양수처럼 따뜻이 고입니다.// 이제야 생각납니다./ 기역- 니은- 디귿! - 하고/ 어머님께 매를 맞으면서/ 처음 글씨를 배웠던 일이/ 첫애를 낳을 때의/ 현란한 극한 사랑의 고마움이// 번개처럼 일어나/ 창문을 열어봅니다./ 달빛이 초설처럼 흘러내립니다./ 나의 해골을 집어들고/ 달빛을 한바가지 가득 떠서 마십니다./ 고해를 하고 성찬을 받은 것처럼/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것 같습니다.//

자살자의 노래 / 김승희
떠나는 건 쉬워ㅡ// 처음엔 왼발을,/ 그 다음엔/ 오른발,/ 그리고 슬쩍 몸을 날리는 거야,/ 애욕처럼 진하게/ 두 눈을 감고 ㅡ// 그런데/ 아직/ 유서를 못썼어,/ 나의 死因을 포장해 줄/ 극비의/ 설형문자를,// 그때까지는 살려고 해 ㅡ// 하하 ㅡ/ 이건 변명이/ 아니라/ 소명이라오!//

새봄의 떴다방 / 김승희
봄이 되면 어김없이/ 여기저기 천막을 치고 현수막 펄럭이는 떴다방/ 속아도 떴다방이지만/ 그 때가 좋았다고/ 떴다방처럼 봄이 다시 온다/ 못 박고 천막 치느라 먼지가 풀풀 일어난다/ 행여 무슨 이득이 있을까/ 분주한 구두들이 오락가락한다/ 속아도 떴다방 속여도 떴다방,/ 꿈결만 같은 봄인걸 뭐...../ 막걸리 자국 남은 구두, 제비처럼 날씬한 명품 구두도/ 소녀가 할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다시 소녀가 되는/ 마술의 왕래가 잦은 떴다방/ 잠시 잠깐 햇볕 한 사발, 감기약 같은 봄에 취하여/ 탄식이나 한숨도 슬몃 사리지는 날/ 먼 데서 오는 발소리 가득하고/ 접시에 웃음소리 저절로 부서지는 날/ 금세 일어섰다 금방 사라져도/ 떴다방은 정겹고/ 속아도 희망 속여도 희망/ 먼지 속에 풀풀 현수막이 흩날리고/ 꿈결처럼 사람들은 괜히 분주하고//

유령과 함께 / 김승희
어느덧 밥그릇에 붙어 있는 유령들/ 그렇게 우물 속에 숨어 사는 유령들/ 머리칼 갈피마다 비 내리는 유령들/ 삼류 극장 거울에서 노려보던 유령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도 하얀 밥그릇 속에/ 다 감겨진 코닥 필름 한 통이 들어 있었다/ 누구의 촬영이 다 끝났다는 것일까?//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간다 해도 하얀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밥그릇 속에 뒤로 다 감겨진 코닥 필름 한 통// 하얀 밥그릇 속에/ 하얀 밥그릇 속에/ 하얀 밥그릇 속에/ 엄숙한 코닥 필름 한 통이)// 질척한 폐혈관에 홍등을 켜든 유령들/ 빠진 이빨 틈에서 노려보던 유령들/ 한 벌의 검은 그림자처럼/ 늘상 발 밑으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유령들/ 흰색 브라운관에 흰색 비 내릴 때/ 소스라치듯 노려보며 달려오는 유령들/ 명멸하는 유령들 명중하는 유령들//

객석에 앉은 여자 / 김승희
그녀는 늘 어딘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난 아파./ 난 아프기 때문에/ 난 너무도 아파서//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노숙의 일가친척 / 김승희
해골의 윤곽이 그려진 초안에/ 밤이 내리면/ 꽃들도 꽃잎을 접고 노숙할 준비를 하고/ 나무들도 날개를 접고 노숙을 하고/ 새들도/ 묘지도 노숙을 하고/ 강과 하늘이 서로 거울이 되는 양/ 별들도 강물 안에 노숙을 하러 멀리서 내려온다/ 아름다운 것들은 다 노숙을 한다// 노숙을 하는 묘지의 별 위로/ 노숙을 하는 새들이 잠시 새벽을 스치고/ 이슬이 몸을 털고 일어나는 아침/ 질경이 달개비 민들레들아/ 너희들도 함께 노숙을 했구나/ 무비자 속에 비자가 있고/ 무조건 속에 조건이 있고/ 무연고 속에 연고가 있듯이/ 노숙이 노숙을 위로하는구나// 노숙의 일가친척들을 거느리고/ 오늘밤이 또 묘지 곁으로 무한 속으로 나온다//

하늘은 공평하게 / 김승희
하늘은 공평하게/ 슬리퍼를 끌고 나온 노인에게도/ 아장아장 걷다가 모래밭에 엎어지는 아가에게도/ 정장 양복을 차려입고 생명보험을 팔러 다니는 영업사원에게도/ 아기를 잃어버리고/ 젖몸살이 난 퉁퉁 불은 젖을 짜고 있는/ 탐스러운 젊은 엄마의 곡선의 유방 위에도/ 박사과정 학생의 무거운 가방 속으로도/ 노점상 아주머니의 산처럼 쌓인 과일 위에도/ 정신이 혼미한 할머니의 혈관 주사액 주머니 속으로도/ 하늘은 공평하게 하늘을 골고루 나누어주신다// 누구의 하늘인가?/ 누구의 파란 하늘인가?/ 난 하늘이 공평하게 누구에게나/ 자기자신을 나누어주시는 것이 좋다/ 하늘은 누구의 것이 아니어서 더 좋다/ 내 것이 될 수 없어서 더더욱 좋다// 시간은 떨어지는 칼과 같아서/ 나 하늘나라 갈 때도/ 저 산 위에 꼭 저대로 저 하늘 걸어놓고/ 하얀 신경의 흉터 하나도 남기지 않고, 걷어가리,/ 두고 가리,/ 놓고 가리, 저 파란 하늘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 / 김승희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당연의 세계는 왜, 거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왜 맨날, 당연히 거기에 있는 것일까./ 당연의 세계는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있어서/ 그 두터운 껍질을 벗겨보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당연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당연한 사람들이 만들었겠지,/ 당연히 그것을 만들만한 사람,/ 그것을 만들어도 당연한 사람,// 그러므로 당연의 세계는 물론 옳다,/ 당연은 언제나 물론 옳기 때문에/ 당연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려다가는/ 물론의 손에 맞고 쫓겨난다,/ 당연한 손은 보이지 않는 손이면서/ 왜 그렇게 당연한 물론의 손일까,// 당연의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는/ 물론의 세계의 말을 항상 믿을 수가 없다,/ 물론의 세계 또한/ 정녕 나를 좋아하진 않겠지// 당연의 세계는 물론의 세계를 길들이고/ 물론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길들이고 있다,/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물론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나날이 다가오는 모래의 점령군,/ 하루 종일 발이 푹푹 빠지는 당연의 세계를/ 생사불명 힘들게 걸어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그와의 싸움임을 알았다./ 물론의 모래가 콘크리트로 굳기 전에/ 당연의 감옥이 온 세상 끝까지 먹어치우기 전에/ 당연과 물론을 양손에 들고/ 아삭아삭 내가 먼저 뜯어 먹었으면.//

도미는 도마 위에서 / 김승희
도미가 도마 위에 올랐네/ 도미는 도마 위에서/ 에이, 인생, 다 그런 거지 뭐,/ 건들거리고 산 적도 있었지/ 삭발한 달이 파아랗게 내려다보고 있는 도마 위/ 도미/ 물방울이빨랫줄에조롱조롱// 도미는 도마 위에서 맵시를 꾸며보려고 하지만/ 종말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될까?/ 비늘을 벗기고 보면 다 피 배인 연분홍 살결/ 그래도/ 고종명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되느니/ 물방울이빨랫줄에조롱조롱// 도미가 도마 위에서/ 도미가 도마 위에서/ 몸서리치는 눈부신 몸부림/ 부질없는 꼬리로/ 도마를 한번 탕 치고 맥없이 떨어져/ 보랏빛 향 그윽한 산천//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 / 김승희
110층 화염의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여자는 핸드폰을 목숨처럼 껴안고/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두 신발에 오렌지색 불이 붙는 것을 느끼면서/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꼭두서니빛 불타오르는 화염으로 치마를 물들이면서/ 너를 사랑했으며 너를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엉덩이를 다 먹고/ 허리 한 복판을 너울너울 화염이 베어먹는 것을 느끼면서/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이 불타는 허리 이 불타는 등줄기 이 불타는 모가지/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누구나 자기 무덤을 만들 시간은 없지만/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여자는/ 난폭한 머리카락 난폭한 두 귀가 갈기처럼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죽지만, 죽어서는 안돼, 라는 연인의 말할 때/ 불길이 그녀의 하얀 두 손을 먹고 핸드폰을 녹일 때/ 그때/ 바로 그때까지/ 죽어선 안돼, 절대로 안돼, 라는 연인의 말이 전해진/ 두 귀짝을 소중히 움켜쥔 채/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사/ 랑/ 해/ !//


 

김승희(金勝熙) 시인, 소설가
1952년 광주 출생으로 서강대학교 영문과,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현재 서강대학교 국제인문학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이다. '불의 여인’, ‘언어의 테러리스트’, ‘초현실주의 무당’으로 불린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여,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1991년 제5회 〈소월시문학상〉, 2003년 제2회 〈고정희상〉, 2013년 제4회 질마재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태양미사》《왼손을 위한 협주곡》《미완성을 위한 연가》《달걀 속의 生》《어떻게 밖으로 나갈까》《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냄비는 둥둥》 등과 산문집으로 《고독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영혼은 외로운 소금밭》《제13의 아해도 위독하오》《벼랑의 노래》《33세의 팡세》《단 한 번의 노래 단 한 번의 사랑》《사랑이라는 이름의 수선공》《너를 만나고 싶다》《남자들은 모른다》《김승희 윤석남의 여성이야기》《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산타페로 가는 사람》《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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