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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용철 시인

부흐고비 2021. 5. 30. 09:38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박용철 생가(안채).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3호.

 

                  떠나가는 배 / 박용철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이도 못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화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싸늘한 이마 / 박용철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온몸은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또리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기쁨이랴// 파란 불에 몸을 사르면 싸늘한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 기리는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한 즐검이랴//

비 / 박용철
비가 조록조록 세염없이 나려와서···/ 쉬일 줄도 모르고 일도 없이 나려와서···/ 나무를 지붕을 고만히 세워놓고 축여준다···/ 올라가는 기차소리도 가즉히 들리나니···/ 비에 흠출히 젖은 기차모양은 애처롭겠지···/ 내 마음에서도 심상치 않은 놈이 흔들려 나온다···// 비가 조록조록 세염없이 흘러나려서···/ 나는 비에 흠출 젖은 닭같이 네게로 달려가련다···/ 물 건너는 한줄기 배암같이 곧장 기어가련다···/ 검고 붉은 제비는 매끄름히 날아가는 것을···/ 나의 마음은 반득이는 잎사귀보다 더 한들리어···/ 밝은 불 켜놓은 그대의 방을 무연히 싸고돈단다···// 나는 누를 향해 쓰길래 이런 하소를 하고 있단가···/ 이러한 날엔 어는 강물 큰애기 하나 빠져도 자취도 아니남을라···/ 전에나 뒤에나 빗방울이 물낱을 튀길 뿐이지···/ 누가 울어보낸 물 아니고 섧기야 무어 설으리마는···/ 저기 가는 나그네는 누구이길래 발자취에 물이 괸다니···/ 마음 있는 듯 없는 듯 공연한 비는 조록조록 한결같이 나리네···//

비나리는 날 / 박용철
세엄도 업시 왼하로 나리는 비에/ 내 맘이 고만 여위어 가나니/ 앗가운 갈매기들은 다 저저 죽엇겠다//

비에 젖은 마음 / 박용철
불도 없는 방안에 쓰러지며/ 내쉬는 한숨따라 '아 어머니!' 석기는 말/ 모진 듯 참어오는 그의 모든 설어움이/ 공교로운 고임새의 문허져 나림같이/ 이 한말을 따라 한번에 쏟아진다.//

어느 밤 / 박용철
저녁때 개구리 울더니/ 마침내 밤을 타서 비가 나리네// 여름이 와도 오히려 쓸쓸한 우리집 뜰 우에/ 소리도 그윽하게 비가 나리네// 그러나 이것은 또 어인 일가 어데선지/ 한 마리 벌레소리 이따금 들리노나// 지금은 아니 우는 개구리같이/ 내 마음 그지없이 그윽하여라 고적하여라//

           눈은 나리네 / 박용철

    이 겨울의 아침을
    눈은 나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
    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나리어
    우리 함께 빌 때러라.


고향 / 박용철
고향은 찾어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 데/ 저녁 까마귀 가을 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로 옛 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 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 하리.// 하늘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앗긴/ 옛 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바람부는 날 / 박용철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것을 여위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단 말인가.//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 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발갛게 쏠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인가.//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 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인가.//

어디로 / 박용철
내 마음은 어디로 가야 옳으리까/ 쉬임 없이 궂은 비는 내려오고/ 지나간 날 괴로움의 쓰린 기억/ 내게 어둔 구름되어 덮이는데.// 바라지 않으리라던 새론 희망/ 생각지 않으리라던 그대 생각/ 번개같이 어둠을 깨친다마는/ 그대는 닿을 길 없이 높은 데 계시오니// 아-- 내 마음은 어디로 가야 옳으리까.//

이대로 가랴마는 / 박용철
설만들 이대로 가기야 하랴마는/ 이대로 간단들 못 간다 하랴마는// 바람도 없이 고이 떨어지는 꽃잎같이/ 파란 하늘에 사라져 버리는 구름쪽같이// 조그만 피로 지금 수떠리는 피가 멈추고/ 가는 숨길이 여기서 끝맺는다면-// 아- 얇은 빛 들어오는 영창아래서/ 차마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온 가슴에 젖어나리네.//

연애 / 박용철
어젯날이 채 가지도 않아/ 또 새로운 날이 부챗살을 피는 나라 오-로-라// 언덕에는 꽃이 가득히 피고/ 새들은 수없이 가지에서 노래한다//

시집가는 시악시의 말 / 박용철
나는 이제 가네./ 눈물 한 줄도 아니 흘리고 떠나가려네.// 어머니 치마로 눈을 가리지 마셔요./ 너희들도 다 잘 있거라./ 새벽빛이 아직도 희미해서 얼굴들이 눈에 서투르오,/ 다시 한 번 눈이라도 익혀둡시다./ 공연히 수선거리지들 말아요./ 남의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줄도 모르고,// 황토 붉은 산아 푸른 잔디밭아 다 잘 있거라./ 잔 자갈 시냇물도 잘 놀고 지나거라./ --가면 아주 가나, 잔 사정 작별은 내 이리 하게!/ 봉선화야 너는 거년까지 내 손가락에 물들이었지?// 순이야, 금이야, 남이야, 빛나던 철의 동무들아,/ 이제는 동무라는 말조차 써볼 데가 없겠고나,/ 너희들 땋-늘인 머리를 어디 좀 만져보자.// 붉은 댕기 울 너머로 번득이는 자랑스러움,/ 거리낄 데 하나 업이 굴러가던 너희들 웃음,/ 이것이 어느새 남의 일같이 이야기될 줄이야!/ 손 하나 타지 않고 산골에 맑은 흰 나리 꽃송이같이,/ 매인 데 굽힐 데 없이 자라나던 큰 아기 시절을/ 내 이제 뒤으로 머리 돌려 아까워할 줄이야!// 눈물은 내서 무엇하니,/ 가고야 마는 것을! 가면 아주 가랴마는,/ 남는 너희나 그대로 있어줘다고, 내 다시 볼 때까지.// 아버지 이 길은 무슨 길이길래,/ 눈물에 싸여서라도 가고 보내는 마련이래요?/ 마른 잎은 부는 바람에 불려야만 되나요?/ 손에 닳고 눈에 익은 모든 것을 버리고/ 아득한 바다에 몸을 띄워야만 새살림 길인가요?// 갈피없는 걱정 쓸데없는 앙탈을 이냥 삼키고,/ 나는 떠나가네./ 싸늘한 두 손으로 얼굴을 싸만지며.//

희망과 절망은 / 박용철
어느 해와 달에 끄을림이뇨/ 내 가슴에 밀려드는 밀물 밀물// 둥시한 수면은 기름같이 솟아올라/ 두어마리 갈매기 어긋저 서로 날고// 돛폭은 바람가득 먹음어/ 막리길 떠날 차비한다// 그러나 이순간을 스치는 한쪽 구름/ 가슴 폭 내려앉고 깃발은 꺾어지며// 험한 바위 도로 다 제 얼굴 나타내고/ 검정 뻘은 죽엄의 손짓조차 없다/// 남은 웅덩이에 파닥거리는 고기들/ 기다림도 없이 몸을 내던진 해초들// 우연은 머리칼처럼 헝클어지도 않았거니/ 너는 무슨 낙시를 오히려 드리우노// 희망과 절망의 두 등처기 사이를/ 시게추같이 건네질하는 마음씨야// 시의 날랜 날개로도 따를 수 없는/ 걸음빠른 술레잡기야 이 어리석음이야//

절망 / 박용철

나는 이제 절망의 흙속에/ 파묻혀 엎드린 한 개의 씨/ 아! 한없는 어둠……/ 과 고요……/ 그러나 그러나/ 천 천 이 천 천 이/ 나는 고개를 든다./ 천천이 천천이/ 그러나 힘있게 우으로/ 나는 머리를 밀어 올린다……/ 나는 숨을 쉬었다. 지구를 나는 뚫었다-/ 나는 팔을 뻗힌다-/ 나는 다리를 뻗힌다-/ 아! 나는 아침해 비친 언덕 우에/ 두팔 쳐들어 왼몸 훨씬 펴고 서 있는/ 오! 서 있는 사람이로다.//

 

밤 / 박용철
마음아 너는 더 어질어지렴아/ 너는 다만 헛되이/ 아 ㅡ 진실로 헛되지 아니하냐// 남국의 어리석은 풀잎은/ 속임수 많은 겨울날 하로 빛에 고개를 들거니// 가문 하늘에 한 조각 뜬구름을 바랐고/ 팔을 벌려 불타오르는 나뭇가지같이// 오 ㅡ 밤길의 이상한 나그네야/ 산기슭 외딴집의 그물어가는 촛불로/ 네 희망조차 헛되이 날뀌려느냐 아 ㅡ// 그 현명의 노끈으로 그 희망의 목을 잘라/ 걸으라 걸으라 무거운 짐 곤한 다리로/ 걸으라 걸으라 가도 갈 길 없는 너의 길을/ 걸으라 걸으라 불 꺼진 숯을 가슴에 안아/ 새벽 돌아옴 없는 밤을 걸으라 걸으라 걸으라//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 박용철
1./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버리는/ 한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 보내고 돌아서 오는/ 나의 가슴이여./ 쓰린 듯 부인 듯 한 데 뿌리는 눈은/ 들어 안겨서/ 발 마다 미끄러지기 쉬운 걸음은/ 자취 남겨서/ 멀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 2./ 밖을 내어다보려고 무척 애쓰는/ 그대도 설으렷다./ 유리창 검은 밖에 제 얼굴만 비쳐 눈물은/ 그렁그렁하렸다./ 내 방에 들면 구석구석이 숨겨진 그 눈은/ 내게 웃으렷다./ 목소리 들리는 듯 성그리는 듯 내 살은/ 부대끼렷다./ 가는 그대, 보내는 나, 그저 아득하여라.// 3./ 얼어붙은 바다에 쇄빙선 같이 어둠을/ 헤쳐 나가는 너./ 약한 정 후리쳐 떼고 다만 밝음을/ 찾아가는 그대./ 부서진다 놀래랴, 두 줄기 궤도를/ 타고 달리는 너/ 죽음이 무서우랴, 힘있게 사는 길을/ 바로 닫는 그대./ 실어가는 너, 실려가는 그대, 그저 아득하여라.// 4./ 이제 아득한 겨울이면 멀지 못할 봄날을/ 나는 바라보자./ 봄날같이 웃으며 달려들 그의 기차를/ 나는 기다리자./ '잊는다' 말인들 어찌 차마! 이대로 웃기를/ 나는 배워보자./ 하다가는 험한 길, 헤쳐가는 그의 걸음을/ 본받아도 보자./ 마침내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라도 되어 보리라.//

너의 그림자 / 박용철
하이얀 모래/ 가이없고// 구름 위에/ 노래는 숨었다// 아지랭이같이 아른대는/ 너의 그림자// 그리움에/ 홀로 여위어 간다.//

실제(失題) / 박용철
당신은 웃으십니다/ 이제/ 살아보려 한다는 내 말을 듣고/ 방울같이/ 맑게 울리는 소리로/ 새삼스럽다/ 나의 이 큰 결심을 비웃습니다// 살아본다는 일이 없다는 말에는/ 엄청난다는 듯이 높이 웃으십니다// 삶이란 한낱 헛된 그림자라 할 때에/ 퍼지는 햇발같이 자유스러이/ 그대는 나를 비웃었습니다// (너도 이런 것을 아는 날이 올까보아/ 나는 한갓 두려워한단다)//

기원(祈願) / 박용철
우리는 구하는 것 없는 무리올시다/ 우리가 무엇을 바란다 하오리까/ 다만 한점 시원한 것을/ 우리의 가슴에 주시옵소서 가르쳐// 시끄러운 무리 속에서 멀미에 어지럽고/ 산중에 고독을 즐기기에 어질지 못합니다/ 이 두 사이 아닌 곳에/ 마음 가라앉어 살 곳을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를 용서하시옵소서/ 우리가 주책없이 웃을 때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눈물로 보아 우리의 울음을 용서하시옵소서/ 속물들을 피하여 흙창 속으로 들어갈 때에/ 우리의 손을 이끌어 주시옵고/ 세상을 건지려는 이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시옵고/ 다만 새로운 공기로 우리를 길러주시옵소서/ 우리가 취하고 멀미하고 어지러워 비척거릴 때/ 무엇보다 우리를 사람 훈기에서 구하시옵소서/ 벗어진 산같이 거리낄 데 없이 밋밋한 우리의 하루를 이로 살리시옵고/ 우리의 손이 할 바를 모를 때에 우리의 손을 놀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당나귀같이 말을 듣지 아니할 때에/ 우리 우에 멍에를 얹지 마시옵소서// 가진 것이 없는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마음을 마저 빼앗으시고/ 장승같이 아침을 기다리게 하시옵소서//

나는 그를 불사르노라 / 박용철
나는 그만 그이를 불사르노라./ 나의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그이를./ 한 줌 재나 남을가! 불에 사뤄 올리노라.// 검고 사나운 땅이 그에게 알맞지 않아/ 하얀 연기를 다만 멀리 높이 사뤄 올리려// 하늘조차 파랗지 못하고 희부옇게 흐리여,/ 검고 붉은 누른 골짜기 주름에/ 한줄기 생기있는 시냇물도 흐르지 않고,/ 벌거벗은 가지에 숨어 있던 바람만이/ 가만 오르는 흰 연기를 가만 있지 못하게 나부껴 주느니./ 삼천 광년(三千光年)보다 더 머언 곳으로 그를 잃어버리고/ 연금학자(鍊金學者)도 아닌 나는 잿속에서 무슨 금을 찾을거냐?// 중한 보배 구슬을 손수 산산 깨트리는/ 세상없는 귀한 향을 진흙에 파묻어버리는 심사는./ 쓰나쓴 쓸개를 씹는 대로 삼켜가며/ 험상한 바위에 몸을 퍼더버리고 앉어 있노니.//

너의 그림자 / 박용철
하이얀 모래/ 가이없고// 적은 구름 우에/ 노래는 숨었다// 아지랑이같이 아른대는/ 너의 그림자// 그리움에/ 홀로 여위어간다//

조각달 / 박용철
해가 이제 그의 권세를 마구 펴서 중천에 자랑스러운 자리를 잡고 있는 때에 서쪽 하늘에 새파란 조각달이 걸려 있다.// 이는 눈에 띄지도 않는 가엾은 존재다. 몰락의 때를 놓치고 그의 생명을 넘겨 살 것의 하나이다. 여기서 젊었을 때 고운 이의 늙어 꼬부라진 양을 연상하고 있다. 호화로운 한창 때의 꿈을 머리 한구석에 남겨 두고 아편에 시든 몸을 남의 집 문간에 의지한 모양이 생각된다. 여기는 주인이 맛있게 먹는 음식을 뜰방 위에서 침을 삼키며 쳐다보는 개의 눈치의 비열함이 있다.// 다른 이에게로 건너간 여인을 잊지 못하고 그의 남은 자비의 키스를 바라며 떨어지지 않는 사내의 더러움이 있다.// 가엾음은 경멸에 이르고 경멸은 미움에까지 다다른다.// 겨우내 가지에 붙어오던 잎사귀가 봄철에 새삼스레 누려지는 것 같다.//

한 조각 하날 / 박용철
무심한 눈을 들창으로 치어들다/ 한 조각 푸른 하늘이 눈에 뜨이여// 이 얼마 하늘을 잊고 살던 일이 생각되여/ 잊어버렸든 귀한 것을 새로 찾은 듯싶어라.// 네 벽 좁은 방안에 있는 마음이 뛰어/ 눈에 거칠 것 없는 들녘 언덕 위에// 둥그런 하늘을 온통 차일삼고/ 바위나 어루만지며 서 있는 듯 기뻐라.//

만폭동(萬瀑洞) / 박용철
백만 소리 속에/ 너는 또 그 속 고요를 지켜.// 털끝만한 움직임/ 웃어보임 없으나// 영원한 멜로디로/ 너는 흔들리우고// 그윽한 웃음/ 네 모습에서 풍기어난다.// 걸친 거 없이/ 천연스러운 너.// 빛깔도/ 너를 가리지 않아// 안에서 스사로 트이고/ 시울다아 아니 넘는다.// 형상(形象)을 짓지 않는다/ 너는 통이 정신(精神).// 너는 부드럽고/ 너는 자랑 없다.//

부엉이 운다 / 박용철
1// 부엉이 운다/ 부엉이 운다/ 밤은 깊으고 바람은 불고 구름 덮힌데/ 부엉이 운다/ 문은 엿같이 몸이 엉기는 어둠 가운데/ 부엉이 운다/ 어둠 가운데 외딴집 하나/ 불은 희미히 창을 비쵠다/ 부엉이 운다 불이 깜박인다/ 부엉이 운다 불이 까물친다// 2// 부엉이 운다/ 부엉이 운다/ 이슬에 젖어 측은한 풀잎 쓰러져 눕고/ 부엉이 운다/ 검은 땅에서 모를 그림자 뽑아 오르고/ 부엉이 운다/ 무덤가에서 헤매는 늑대/ 꼬리 늘이고 고개 숙이고/ 부엉이 운다 불이 깜박인다/ 부엉이 운다 불이 까물친다// 3// 부엉이 운다/ 오―무엇을 부르는 울음/ 네―무엇을 불러내느냐/ 부엉이 운다/ 부엉이 운다/ 모든 이야기 가운데 사는/ 머리푼 귀신 피묻힌 귀신/ 부엉이 운다/ 부엉이 운다/ 구름 밑에서 땅 우에까지/ 키를 뻗지른 귀신상 같이/ 휘―휙 불어 지나는 바람/ 부엉이 운다 불이 깜박인다/ 부엉이 운다 불이 까물친다/ 오―불은 아조 사라져버리다/ 부엉이 운다/ 부엉이 운다/ ……//


 

박용철[朴龍喆, 1904.6.21~1938.5.12] 시인
1904년 전라남도 광산(光山) 출생. 호는 용아(龍兒).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도일,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거쳐서 도쿄 외국어학교 독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하여 연희전문에 입학, 수개월 후에 자퇴하고 문학에 전념. 1930년에 김영랑(金永郞)과 함께 《시문학(詩文學)》을 창간, 이 잡지 1호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떠나가는 배」,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 《시문학》에 이어 《문예월간(文藝月刊)》 《문학》 등을 계속해서 발간하고 시와 함께 많은 번역시, 그리고 인형의 집」을 비롯하여「빈의 비극」, 「베니스의 상인」 등의 희곡을 번역. 1931년 이후로는 비평가로서도 크게 활약하여 「효과주의 비평논강(效果主義批評論綱) 」, 「조선문학의 과소평가」, 「시적 변용(詩的變容)에 대하여」 등을 발표, 계급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시에 배격하여 임화(林和)와 논전을 벌임. 사후 1년 만에 《박용철 전집》(전2권)이 간행되었으며, 2001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이 수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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