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구상 시인

부흐고비 2021. 6. 1. 08:32


한가위 / 구상

어머니/ 마지막 하직할 때/ 당신의 연세보다도/ 이제 불초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더 세었답니다.// 어머니/ 신부(神父)형*이 공산당에게 납치된 뒤는/ 대녀(代女)*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棺)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어머니/ 오늘은 중추 한가위,/ 성묘를 간다고 백 만 시민이/ 서울을 비우고 떠났다는데/ 일본서 중공서 성묘단이 왔다는데/ 저는 아침에 연미사(煉彌撒)*만을 드리곤/ 이렇듯 서재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 신부(神父)형: 나의 친형 구대준(具大浚)은 가톨릭 신부였음.

* 대녀(代女): 카톨릭의 세례 때 공증인이 된 사람을 대부(代父)․대모(代母), 그 당자를 대자(代子)․대녀(代女).

* 연미사(煉彌撒): 가톨릭의 제사를 미사(彌撒)라 하고, 죽은 이를 위한 제례를 연(煉)미사라고 함.

 

가장 사나운 짐승 / 구상

내가 다섯 해나 살다가 온/ 하와이 호놀룰루 시의 동물원,/ 철책과 철망 속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짐승과 새들이/ 길러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구경거리의 마지막 코스/ “가장 사나운 짐승”이라는/ 팻말이 붙은 한 우리 속에는/ 대문짝만한 큰 거울이 놓여 있어/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찔끔 놀라게 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때마다/ 거울에다 얼굴도 마음도 비춰보면서/ 스스로가 사납고도 고약한 짐승이/ 되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꽃자리 /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임종고백 / 구상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흉물 같은 내 마음을/ 나는 마치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환자처럼/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실상 나의 知覺만으로도/ 내가 외면으로 지녀 온/ 양심, 인정, 명분, 협동이나/ 보험에나 들듯한 신앙생활도//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綺語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저런 추악망측한 나의 참 모습과/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하느님, 맙소사!//

 

임종예습(臨終豫習) / 구상

흰 홑이불에 덮여/ 앰불런스에 실려간다.// 밤하늘이 거꾸로 발밑에 드리우며/ 죽음의 아슬한 수렁을 짓는다.// 이채로 굳어 뻗어진 내 송장과/ 사그라져 앙상한 내 해골이 떠오른다.// 돌이켜보아야 착오(錯誤)투성이 한평생/ 영원한 동산에다 꽃 피울 사랑 커녕/ 땀과 눈물의 새싹도 못 지녔다.// 이제 허둥댔자 부질없는 노릇이지…// ―아버지 저의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시늉만 했지 옳게 섬기지는 못한/ 그분의 최후 말씀을 부지중(不知中) 외우면서/ 나는 모든 상념(想念)에서 벗어난다.// 또 숨이 차온다.//

 

우음(偶吟) 2장 / 구상

1/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2/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 우음(偶吟) : 우연히 읊은 시라는 뜻

 

새해 / 구상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워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워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意識은/ 理性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深呼吸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忠直과 一致하여/ 나의 줄기찬 勞動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祈禱는 나의 日課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生涯,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까마귀 / 구상

1/ 봄놀이 버스가 들떠서 달리는 고속도로(高速道路) 한복판에 까마귀 한 마리 날아와 앉아 울고 있다.//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예전에는 내가 저 산등나무 위에서 두세 번 목소리만 내어도 사람들은 걸음을 멈춰 오늘의 자기 행신(行身)을 불안해하고, 자기 삶의 모습을 살피기도 하고 죽음을 떠올려도 보고, 더러는 영원이라는 것도 생각들을 하더니//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요즘 세월은 어찌된 셈판인지 내가 이렇듯 아스팔트 한가운데까지 나와 기를 쓰고 우짖어대도 오고가는 차 하나 멎기는커녕 그저 줄달음치는 굳게 닫긴 차창(車窓) 속에서 저런 쓸모없는 날짐승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었구나 하는 눈짓들이니// 까옥 까옥 까옥 까옥// 거리에서 쫓기며 헤매는 참새떼 소리나 저희 집 새장 안의 앵무새 소리나 창경원(昌慶苑) 철망 속의 꾀꼬리 소리 같은 그 철딱서니없는 노래들만을 노래로 알고 들으며 사는 저것들이 오늘날 벌리고 있고 또 내일도 벌릴 그 세상살이라는 게 나로선 하두 맹랑해 보여서//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오산(烏山) 인터체인지 근처 고속도로(高速道路) 한복판에 까마귀 한 마리 역사(轢死)를 각오한 듯 나와 울고 앉아 있다.// 2/ 나는 비탈산, 거친 들판을 헤매면서/ 썩은 고기와 죽은 벌레로 배를 채우며/ 종신서언(終身誓言)의 고행수도(苦行修道)를 하는 새다.// 까옥 까옥 까옥 까옥// 너희는, 영혼의 갈구(渴求)와 체읍(涕泣)으로/ 영영 잠겨버린 나의 목소리가/ 불길(不吉)을 몰아온다고 오해하지 말라.// 오직 나는 영통(靈通)한 내 심안(心眼)에 비친/ 너희의 불의(不義)가 빚어내는 재앙(災殃)을/ 미리 알리고 일깨워줄 따름이다.//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오늘도 나는 북악(北岳)허리 고목(古木)나무 가지에 앉아/ 너희의 눈 뒤집힌 세상살이를 굽어보며/ 저 요르단 강변(江邊) 세례자(洗禮者) 요한의/ 그 예지(豫智)와 진노(震怒)를 빌어서 우짖노니// ―이 독사(毒蛇)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하느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자는 한 벌을 헐벗은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넉넉한 사람은 굶주린 이와 나누어 먹고/ 권세가 있는 사람은 약한 백성을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쓰지 말 것이요,/ 나라의 세금은 헐하고 공정하게 매겨야 하며/ 거둬들임에 있어도 부정(不正)이 없어야 하느니라―//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진혼곡(鎭魂曲) -4·19 마산(馬山) 희생자를 위하여 / 구상

손에 잡힐 듯한 봄 하늘에/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이듯이/ 피 묻은 사연일랑 아랑곳 말고/ 형제들 넋이여 평안히 가오.// 광풍(狂風)이 휘몰아치는 쑥대밭 위에/ 가슴마다 일렁이는 역정(逆情)의 파도/ 형제들이 틔워놓은 외가닥 길에/ 오늘도 자유(自由)의 상렬(喪列)이 꼬리를 물었오.// 형제들이 뿌리고 간 목숨의 꽃씨야/ 우리가 기어이 가꾸어 피우고야 말리니/ 운명(運命)보다도 짙은 그 바람마저 버리고/ 어서 영원한 안식(安息)의 나래를 펴오.//

 

밭 日記 / 구상

개똥이네 할아버지가 개똥밭에/ 똥을 한 삼테기 줏어다 쏟는다/ 수수전 같은 소똥 국화만두 같은 말똥/ 조개탄 같은 돼지똥 생굴 같은 닭똥/ 검정콩 토끼똥 분꽃씨 쥐똥 염소똥 당나귀똥 여우똥/ 똥이란 똥이 온 밭에 널려있다// 개똥이가 생선밸 같은 코를 훌쩍이며 쫄레쫄레 나와/ 보리밥풀이 말라붙은 잿빛 가랭이 바지를 짝 벌리고/ 진달래꽃빛 엉덩이를 훌쩍 까고선/ 끙끙 안깐힘을 쓰며 똥을 눈다// 누렁이도 쫄래쫄래 쫓아나와/ 똥누룽지와 똥부스럼딱지가 다닥다닥 붙은 밭고랑을/ 반지르한 코를 쿵쿵대고 다니면서/ 찔끔찔끔 진오줌을 싸고/ 뿌지직 뿌지직 된 똥을 갈기고선/ 이 번엔 꼬리를 치며 달려와 개똥이 엉덩짝을 핥으려 든다/ 개똥이는 똥구멍을 하늘로 치켜 올리고/ 똥통에 빠졌다나와 뻗어있는 성에 낀 막대기를 주워서/ 가랭이 밑으로 휘휘 흔들며 이개 이개 몰아 쫓는다// 그리고 늘어진 고개를 들어서 제끼곤/ 북쪽 한울타리에 아직도 걸린 푸른 스무날달을 바라보다가/ 지난해 여름 그 꿀맛 같던 개똥참외를 머리에 그리고/ 천둥배탈이 나서 벼락설사를 하던/ 그 지랄 같던 추억에 이르러서는/ 설레설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이번 참엔 한개 두개 세개 요렇게만 먹어야지 중얼대며/ 막대 쥔 손으로 왼손가락을 눌러가드니/ 야금야금 두손가락을 모조리 꼽고만다// 마주보이는 뒷산/ 가지에서 가지로 오르내리는 까치 한 마리가/ 흰 버러지 같은 똥을 삘삘 싸며/ 혼자 재밌어 캑캑거린다//

 

나 / 구상

내 안에 사지(四肢)를 버둥거리는/ 어린애들처럼/ 크고 작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뿌리/ 그보다도// 미닫이에 밤 그림자같이/ 꼬리를 휘젓는 육근(六根)이나 칠죄(七罪)의/ 심해어(深海漁)보다도// 옹기굴 속 무명(無明)을 지나/ 원죄(原罪)와 업보(業報)의 마당에/ 널려 있는 우주진(宇宙塵)보다도// 또다시 거품으로 녹아 흐르고/ 마른 풀같이 바삭거리는/ 원초(原初)와 시간의 지층을 빠져 나가서/ 사막에 치솟는 샘물과/ 빙하(氷河)의 균열(龜裂), 오오 입자(粒子)의 파열(破裂)!/ 그보다도// 광막(廣漠)한 우주 안에/ 좁쌀알보다, 작게 떠 있는/ 지구보다도// 억조광년(億兆光年)의 별빛을 넘은/ 허막(虛漠)의 바다에/ 충만해 있는 에테르보다도// 그 충만이 주는 구유(具有)보다도/ 그 반대의 허무(虛無)보다도/ 미지(未知)의 죽음보다도// 보다 더 큰/ 우주 안의 소리 없는 절규!/ 영원을 안으로 품은 방대(尨大)!// 나.//

 

혼자 논다 / 구상

이웃집 소녀가/ 아직 초등학교도 안들어 갔을 무렵/ 하루는 나를 보고/ ㅡ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 그러기에/ ㅡ 유명이 무엇인데?/ 하였더니/ ㅡ 몰라!/ 란다. 그래 나는/ ㅡ 그거 안좋은 거야!/ 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ㅡ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 하고 물었더니/ ㅡ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ㅡ 잘 했어! 고마워!/ 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 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홀로와 더불어 / 구상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시 / 구상

우리가 평소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이 아무리 말을 치장해도/ 그 말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느니// 하물며 시의 표상(表象)이 아무리 현란한들/ 그 실재(實在)가 없고서야 어찌 감동을 주랴?// 흔히 말과 생각을 다른 것으로 아나/ 실상 생각과 느낌은 말로써 하느니/ 그래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렷다.// 그리고 이웃집에 핀 장미의 아름다움도/ 누구나 그 주인보다 더 맛볼 수 있듯이/ 또한 길섶에 자란 잡초의 짓밟힘에도/ 가여워 눈물짓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시는 우주적 감각*과 그 연민(憐憫)에서/ 태어나고 빚어지고 써지는 것이니/ 시를 소유나 이해(利害)의 굴레 안에서/ 찾거나 얻거나 쓰려고 들지 말라!// 오오, 말씀의 신령함이여!//

* 하이데거의 "언어와 사고"에서의 말. 폴 발레리의 시에 대한 정의.

 

시심 / 구상

내가 달마다 이 연작에다가/ 허전스런 이야기를 고르다시피 하여/ 시라고 써내니까// 젊은 시인 하나가 하도 이상했던지/ "그러면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하나도 없겠네요"하였다.// 그렇다!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정녕, 하나도 없다.//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의/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다가 시다.// 아니, 사람 누구에게나/ 또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에는/ 진·선·미가 깃들어 있다.// 죄 많은 곳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하듯이 말이다.*/ 그것을 찾아내서/ 마치 어린애처럼/ 맞보고 누리는 것이/ 시인이다.//

* 성서의 로마서 5장 20절

 

날개 / 구상

내가 걸음마를 떼면서/ 최초에 느낀 것은/ 내 팔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이제 칠순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느끼는 것도/ 내 팔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엄마의 손길을 향하여/ 기우뚱대며 발걸음을 옮기던 때나/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에 매달려/ 어찌 어찌 살아가는 이제나// 내가 바라고 그리는 것은/ '제트'기도 아니요,/ 우주선도 아니요,// 마치 털벌레가 나비가 되듯/ 바로 내가 날개를 달고/ 온 누리의 성좌(星座)를 꽃동산 삼아/ 첫사랑 어울려 훨훨 나는/ 그 황홀이다.//

 

달밤 2경(景) / 구상

1/ 달이 으슥한 우물 안에서/ 철렁철렁 목욕을 하다/ 두레박을 타고 올라와/ 질옹배기로 흘러들어간다.// 이번엔 햇바가지에 담겨/ 새댁의 검은 머리채 위서부터/ 보얀 등허리와 볼록한 앞가슴을/ 미끄러져 내려// 빨랫돌 위에 산산히 부서진다.// 달로 씻은 육신(肉身)은 달처럼 희다….// 노란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던 고추들이/ 얼굴을 더욱 붉힌다.// 어느새 중천(中天)에 다시 올라간/ 달을 쳐다보고/ 박덩이가 쩔쩔매며/ 넝쿨 뒤로 숨는다.// 꽃밭에서 이를 바라보던 봉선화가/ 너무나 재밌어 꽃잎을 떨구며/ 눈에 이슬을 단다.// 2/ 강에 달이 둥실./ 강낭밭에 그림자가 바삭 버석./ 마당의 코스모스가 너울 너울./ 뒤란의 장독대가 빙./ 지붕 위에 박넝쿨이 살살.//

 

독락(獨樂)의 장(章) / 구상

얘들아, 내가 노니는 여기를/ 매화 옛 등걸에/ 까치집이라 하자.// 늬들은 나를 환희(幻戱)에 산다고/ 기껏 웃어주지만/ 나에게는 어느 영웅보다도/ 에누리없는 사연이 있다.// 이제 나도 세월도/ 서로 무심해지고/ 눈 아래 일렁이는 세파(世波)도/ 생사(生死)의 소음(騷音)도/ 설월(雪月) 같은 은은(殷殷) 속에/ 화해(和解)된 유정(有情)!// 얘들아!/ 박명(薄明), 저 가지에 걸치는 서광(曙光)과/ 모혼(暮昏)의 정적(靜寂)을 생식(生食)하면서/ 운명(運命)을 정서(情緖)로 응감(應感)시킨/ 내사 갖는 이 즐거움이야/ 늬들은 모르지.// 도도(陶陶)한 이 아픔을/ 늬들은 모르지.//

 

초토(焦土)의 시(詩) 1 / 구상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내려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少女)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초토(焦土)의 시(詩) 2 / 구상

제 먹탕으로 깜장칠한 문어 한 마리를 무릎에 싸안고서 어르고 있는 광경이라면 모두 웃음보를 터치리라./ 그러나 앞자리에 마주 자리잡은 나의 표정은 굳어만 갔다./ `정식아! 볶지 마아, 빠빠에게 가면 까까 많이 사 줄게'/ 이건 또 너무나도 창백한 아낙네가 정식이라고 이름붙은 검둥애에게 거의 애소에 가까운 달램이었다./ 자정도 넘은 밤차, 희미한 등불 아래 손들의 피곤한 시선은 결코 유쾌한 눈짓이 아니었고 칭얼만 대는 검둥애의 대구리와 울상이 된 그 엄마의 하이얀 이마 위 땀방울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 뒤틀어대는 흑백(黑白)의 모자상(母子像)을 보다못해 호주머니를 뒤져 전송 나왔던 친구가 취기 반으로 사주던 해태 캬라멜을 꺼내 까서 녀석에게 넌지시 권해본다./ 아니나다를까, 적중이었다. 녀석은 흑요석(黑耀石)보다도 더 짙은 눈을 껌벅이며 깜장손으로 냉큼 잡아채어 입에 넣더니 제법 의젓해지지 않는가./ 두 개, 세 개, 네 개, 이제는 아주 나의 무릎으로 슬슬 기어오르며 이것만은 차돌같이 흰 이빨을 드러내어 웃어 반기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르면 안 논다는 재주 없다. 눈물이 글썽하여 연신 미안스러워하는 아낙네에게 녀석을 아주 받아 안고 창경원에 가서 원숭이 놀리는 그 꼬락서니가 되어 캬라멜과, 애새끼와 있는 재주를 다 피워 얼러댄다./ 이러는 사이에 어처구니없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뜻하지 않은 나의 구조를 넋없이 바라보던 아낙네가 신명(身命)의 고달픔이 차고 말았던지 사르르 잠들어버리고 그렇게 날치던 애새끼 역시도 이제는 어지간히 흡족했던지 내 품에서 색색 코를 고는 것이 아닌가./ 꼼짝없이 검둥이 애비 꼴이 된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심정속에서 그 채로 눈을 감고 만다/ 나의 머리에는 이 녀석의 출생의 비밀이 되었을 지폐 몇 장이 떠오른다./ 이 검둥이의 애비가 쓰러져 숨졌을 우리의 어느 산비탈과 어쩌면 그가 살아 자랑스레 차고 갔을 훈장을 생각해본다./ 저 아낙네의 지쳐 내던져진 얼굴에서 오늘의 우리를 느낀다./ 숨결마저 고와진 이 무죄하고 어린 생명을 안고서 그와 인류의 덧없는 운명에 진저리친다./ 차는 그대로 밤을 쏜살같이 뚫어 달리고 손들은 모두 지쳐 곤드리졌는데 이제는 그만 내가 흑백(黑白)의 부자상(父子像)이 되어 이마에 땀방울을 짓는다.//

 

초토(焦土)의 시(詩) 8 -적군 묘지 앞에서 /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초토(焦土)의 시(詩) 10 / 구상

조국(祖國)아, 심청(沈淸)이마냥 불쌍하기만 한 너로구나./ 시인(詩人)이 너의 이름을 부를 양이면 목이 멘다.// 저기 모두 세기(世紀)의 백정(白丁)들,/ 도마 위에 오른 고기모양 너를 난도질하려는데/ 하늘은 왜 이다지도 무심만 하다더냐.// 조국(祖國)아, 거리엔 희망도 절망도 못하는/ 백성들이 나날이 환장해만 가고/ 너의 원수와 그 원수를 기르는 벗들은/ 너를 또다시 두 동강을 내려는데/ 너는 오직 생각하며 쓰러져가는 갈대더냐.// 원혼(寃魂)의 나라 조국(祖國)아,/ 너를 이제까지 지켜온 것은 비명(非命)뿐이었지./ 여기 또다시 너의 마지막 맥박이듯/ 어리고 헐벗은 형제들만이/ 북(北)으로 발을 구르는데/ 먼저 간 넋을 풀어줄 노래 하나 없구나.// 조국(祖國)아, 심청(沈淸)이마냥 불쌍하기만 한/ 조국(祖國)아!//

 

초토(焦土)의 시(詩) 11 /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둔덕을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스런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땅은 30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람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버린다.//

* 적군(敵軍): 북한 공산군.

 

네 마음에다 / 구상

요즘 멀쩡한 사람들 헛소리에/ 너나없이 놀아날까 두렵다.// 길은 장님에게 물어라./ 해답은 벙어리에게 들으라./ 시비는 귀머거리에게서 밝히라./ 진실은 바보에게서 구하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길은 네 마음에다 물어라./ 해답은 네 마음에서 들으라./ 시비는 네 마음에서 밝히라./ 진실은 네 마음에다 구하라.//

 

어른 세상 / 구상

네 꼬라지에 어줍잖게/ 그리 생각에 잠겨 있느냐고/ 비웃지 말라.// 내가 기가 차고 어안이벙벙해서/ 말문마저 막히는 것은// 글쎄, 저 글쎄 말이다./ 이른바 어른들이 벌리고 있는/ 이 세상살이라는 게, 그 모조리/ 거짓에 차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정의를 외치며 불의를 행하고/ 저들은 사랑을 입담으며 서로 미워하고/ 저들은 평화를 내걸고 싸우며 죽인다.// 내가 주제넘어 몹시 저어되지만/ 어느 분의 말씀을 빌려 한마디 하자면// 저들이 어린이 마음을 되찾지 않고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듯이/ 저들이 어린이 마음을 되찾지 않고선/ 이 거짓세상의 그 덫과 수렁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백련 / 구상

내 가슴 무너진 터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솟아난 백련 한 떨기// 사막인 듯 메마른 나의 마음에다/ 어쩌자고 꽃망울 맺어 놓고야// 이제 더 피울래야/ 피울 길 없는 백련 한 송이// 왼 밤 내 꼬박 새어 지켜도/ 너를 가리울 담장은 없고// 선머슴들이 너를 꺾어 간다손/ 나는 냉가슴 앓는 벙어리 될 뿐// 오가는 길손들이 너를 탐내/ 송두리째 떠간다 한 들// 막을래야 막을 길 없는/ 내 마음의 망울진 백련 한 송이// 차라리 솟지야 않았던 들/ 세상없는 꽃에도 무심한 것을// 너를 가깝게 멀리 바랠 때 마다/ 퉁퉁 부어오르는 영혼의 눈시울//

 

풀꽃과 더불어 / 구상

아파트 베란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 흰 거물 같은 꽃을 피웠다.//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그지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며/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기 그지없다.// 종종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그 풀꽃과 더불어//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이제 여기 존재한다.//

 

가을 병실(病室) / 구상

가을 하늘에/ 기러기 떼 날아간다./ 내 앓은 가슴 위에다/ 긴 그림자를 지으며/ 북으로 날아간다./ 한 마리 한 마리 꼬리를 물 듯이/ 一直線을 그으며 날아간다.//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내 가슴 空洞에 내려 앉는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마지막 한 마리는/ 내가 붙잡았다.// 팔딱/ 팔딱/ 팔딱/ 내 가슴이 뛴다.// 끼럭/ 끼럭/ 끼럭/ 내 가슴이 운다.// 끼럭/ 끼럭/ 끼럭/ 하늘이 운다.// 끼럭/ 끼럭/ 나는 놓아 보낸다.// 혼자 떨어져 날으는 뒷모습이/ 나 같다.// 가을 하늘에/ 기러기 떼 날아간다./ 나의 가슴에/ 平行線을 그으며 날아간다.//

 

오늘 / 구상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서부터 영원을 / 구상

오늘도 친구의 부음을 받았다./ 모두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차피 가는구나.// 나도 머지않지 싶다.// 그런데 죽음이 이리 불안한 것은/ 그 죽기까지의 고통이 무서워설까?/ 하다면 안락사(安樂死)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두려운 것은/ 죽은 뒤가 문제로다./ 저 세상 길흉이 문제로다.// 이렇듯 내세를 떠올리면/ 오늘의 나의 삶은/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 내세를 진정 걱정한다면/ 오늘서부터 내세를/ 아니 영원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 / 구상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도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기도 / 구상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 / 구상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오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근황(近況) / 구상

바닷가의 조개껍질처럼/ 비린내 나는 육신과는 헤어지고/ 세상 파도에서는 밀려나/ 일흔의 나이를 살고 있다.// 나를 이제껏 살아남게 한 것은/ 나의 성명(性命)의 강(强)하고 장(長)함에서가 아니라/ 그 허약(虛弱)에서다.// 모과(木瓜)나무가 모과(木瓜)나무가 된/ 까닭을 모르듯이/ 나 역시 왜 시인이 되었는지를/ 스스로도 모른다.// 한마디로 이제까지의 나의 생애는/ 천사의 날개를 달고/ 칠죄(七罪)의 연못을 휘저어 온/ 모험과 착오의 연속,/ 나의 심신(心身)의 발자취는/ 모과(木瓜) 옹두리처럼 사연투성이다.// 예서 앞길이 보이지 않기론/ 지나온 길이나 매양이지만/ 오직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끌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고요 / 구상

평일 한낮/ 명동 성당 안에는/ 고요만이 있었다.// 온 세상이/ 일체 멈춤과 같은/ 침묵과 정적속에서/ 제단 위에 드리운 성체등이/ 이 역시 고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라장(修羅場)을 방불케 하는/ 문 밖 거리의 인파와 소음은/ 마치 딴 세상 정경인 듯/ 오직 죽음과 같은 고요 속에/ 고요가 깃들어 있었다.// 그 고요 속에 나 또한/ 고요히 잠겼노라니/ 그 고요가 고요히 속삭였다.// 이제 너의 참 마음을 열어보라고!// 그러나 나는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거듭남 / 구상

저 성현들이 쳐드신 바/ 어린이 마음을/ 지각(知覺) 이전의 상태로/ 너희는 오해하지들 마라!// 그런 미숙(未熟)의 유치란/ 본능적 충동에 사로잡히거나/ 독선과 편협을 일삼게 되느니,//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린이 마음이란// 진리를 깨우침으로써/ 자기가 자신에게 이김으로써/ 이른바 '거듭남'에서 오는/ 순진이요, 단순이요,/ 소박한 것이다.//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 / 구상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그분이 홀로서 가듯 / 구상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은총에 눈을 뜨니 / 구상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노경(老境) / 구상

여기는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다.// 영원의 동산에다 꽃 피울/ 신령한 새싹을 가꾸는 새 밭이다.// 젊어서는 보다 육신을 부려왔지만/ 이제는 보다 정신의 힘을 써야 하고/ 아울러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형이상(形而上)의 것에 눈을 떠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독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히거나/ 근심과 걱정을 능사(能事)로 알지 말자.// 고독과 불안은 새로운 차원의/ 탄생을 재촉하는 은혜이어니/ 육신의 노쇠와 기력의 부족을/ 도리어 정신의 기폭제(起爆劑)로 삼아/ 삶의 진정한 쇄신에 나아가자.// 관능적(官能的) 즐거움이 줄어들수록/ 인생과 자신의 모습은 또렷해지느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욱 불태워/ 저 영원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이제 초목(草木)의 잎새나 꽃처럼/ 계절마다 피고 스러지던/ 무상(無常)한 꿈에서 깨어나// 죽음을 넘어 피안(彼岸)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白金)같이 빛나는 노년(老年)을 살자.//

 

동토(凍土) / 구상

내 가슴 동토(凍土) 위에/ 시베리아 찬바람이 살을 에인다.// 말라빠져 엉켜 뒹구는 잡초(雜草)의 밭/ 쓰레기 구덩이엔/ 입 벌린 깡통, 밑 나간 레이션 박스,/ 찢어진 성조기(星條旗), 목 떨어진 유리병,/ 또 한구석엔 총(銃) 맞은 삽살개 시체(屍體),/ 전차(戰車)의 이빨자국이 난 밭고랑엔/ 말라뻐드러진 고양이의 잔해(殘骸),// 저기 비닐 온상(溫床) 같은 천막(天幕) 앞/ 피 묻은 바짓가랑이가 걸린/ 철망(鐵網) 안을 오가며/ 양키 병정(兵丁)이 휙휙 휘파람을 불면/ 김치움 같은 땅속에서/ 노랗고 빨갛고 파란/ 원색(原色)의 스카프를 걸친 계집애들이/ 청개구리처럼 고개를 내민다.// 하늘이 갑자기/ 입에 시꺼먼 거품을 물고/ 갈가마귀떼들이 후다닥 날아/ 찌푸린 산을 넘는데// 나의 잔등의 미칠 듯한 이 개선(疥癬)―/ 나의 가슴을 치밀어 오르는 이 구토(嘔吐)―/ 어느 누구를 향한 것이냐?//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 구상

빠삐용! 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 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혀질 건가!// 빠삐용! 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이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옭혀 올 것을 겁내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 빠삐용! 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주는 복지(福地)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게 새 삶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일세.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徒刑囚)임을 나는 깨달았단 말일세.// 이 죽음의 섬을 지키는 간수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우리 큰 감방의 형편없이 위험한 건달패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소임인 2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사는 것이 딴 세상 생활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했단 말일세.// 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걸세.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領土)로 삼고 어려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變質)시킬 자유만이 있단 말일세.// 빠삐용! 그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걸세.//

* 드레퓌스의 벤취: 앙리 샤리에르의 탈옥 수기 `빠삐용'에 나오는 죽음의 섬의 벼랑에 있는 벤취로, 유태 출신 프랑스 육군 대위로 반역죄에 몰려 이 섬에 유형되었다가 12년 만에 복권된 드레퓌스의 이름을 딴 것임.

* 짱: 주인공의 탈출을 돕고도 죽음의 섬에 그대로 남는 중국계 도형수(徒刑囚)의 이름.

 

인류의 맹점에서 / 구상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그 칠흙 속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 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 난 배처럼/ 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 달까?/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내가 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들에게 새 십계명(十誡命)은 무엇일까?/ 아니, 새 것이 있을 리가 없고/ 바로 그 십계판(十誡版)을 누가 어떻게/ 던져야 하는가?// 여기에 이르면 판단 정지!/ 오직 전능과 무한량한 자비에 맡기고 빌 뿐이다//

 

출애급기(出埃及記) 별장(別章) / 구상

각설(却說), 이때에 저들도/ 황금의 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 믿음이나 진실, 사랑과 같은/ 인간살이의 막중한 필수품들은/ 낡은 지팡이나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서로 다투어 사람의 탈만 쓴/ 짐승들이 되어갔다.// 세상은 아론*의 무리들이 판을 치고/ 이에 노예근성이 꼬리를 쳤다.// 그 속에도 시나이산에서 내려올/ 모세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외롭지만 있었다.//자유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후유, 멀고 험하기도 하다.//

* 아론: 구약성서 `출애급기'에 나오는 인물로 황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데 앞장을 섬.

 

나자렛 예수 / 구상

나자렛 예수!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상놈들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치 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린 사람들에게 우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일을 하다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 이라고 ‘하느님 나라는 바로 당신들 차지’라고 엄청남 소리를 하신 당신,//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문둥이를 말짱히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도// 스스로의 말대로 온 세상의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다가 마침내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볼 꼴 없이 죽어 간 철저한 실패자,//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맺어져 나의 삶의 바탕이 되고, 길이 되고, 때로는 멀리 하고 싶고 귀찮게 여겨지고,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주고,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현세의 경륜가가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사회혁신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뒤엎고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고 고통 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다만,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 시요,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 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이고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 하였다.//

 

말씀의 실상 / 구상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 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허막(虛漠)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실상(實相)으로 깨닫습니다.// 참회로 달관한 오늘의 꽃자리!//

 

부활송 / 구상

죽어 썩은 것 같은/ 매화의 옛 등걸에/ 승리의 화관인 듯/ 꽃이 눈부시다.//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 저렇듯 죽어도 죽지 않고/ 또 다시 소생하고 변심함을 보느니/ 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한/ 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우리 삶은 허무의 수렁은 아니다.// 봄의 행진 아롱진/ 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나는 우리의 부활로써 성취될/ 그날의 우리를 그리며 황홀에 취해있다//

 

노부부 / 구상

아름다운 오해로 출발하여/ 처참한 이해에 도달했달까/ 우리는/ 자신보다도 상대방을/ 더 잘 안다/ 그리고 오히려/ 무언으로 말하고/ 말로써 침묵한다/ 서로가 살아오면서/ 야금야금 시시해지고/ 데데해져서 아주 초라해진 지금/ 두 사람은 안팎이/ 몹시 닮았다/ 오가는 정이야 그저 해묵은 된장 맛/ 하지만 이제사 우리의 만남은/ 영원에 이어졌다//

 

구상무상(具常無常) / 구상

이제 세월처럼 흘러가는/ 남의 세상 속에서/ 가쁘던 숨결은 식어가고/ 뉘우침마저 희미해가는 가슴.// 나보다도 전해진 그림자를/ 밟고 서면/ 꿈결 속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그저 심심해 서 있으면/ 해어진 호주머니 구멍으로부터/ 바람과 추억이 새어나가고/ 꽁초도 사랑도 흘러나가고/ 무엇도 무엇도 떨어져 버리면// 나를 취케 할 아편도 술도 없어/ 홀로 깨어 있노라./ 아무렇지도 않노라.//

 

시법(詩法) / 구상

사과를 그리다 보면/ 배가 되고/ 배를 그리다 보면/ 사과가 된다.// 짓궂은 생각에서/ 사과를 그리려고/ 배를 그렸더니/ 木瓜가 되었다.// 外樣도 이렇듯/ 어긋나는데/ 사과와 배의 속살이나/ 그 맛은 어림도 없다.// 그 언제나 사과가/ 사과로 그려지고/ 배가 배로 그려지고/ 그 사과와 배의 속살과 맛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을까?// 나의 눈과 손에/ 신령한 힘이 깃들고 내려서/ 實在의 안팎을 고대로 그려낼/ 그날은 언제일까?//

 

신록을 바라보며 / 구상

한 겨우 내 세상무대 뒤 땅 밑에서/ 움츠리고 살던 초목들이/ 아무런 요란도 수선도 떨지 않으며/ 저마다 새로운 봄치장을 하고서/ 화사한 햇발을 온몸에 받으며/ 서로가 영미를 발산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의 푸른 새 옷이/ 명동 양장점이나 이태원 외인상가나/ 또는 남대문시장에서/ 팔고 산 것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에게/ 봄의 새 단장을 시키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선사한/ 조화옹(造化翁)의 그 신령한 힘과 섭리에는/ 눈멀어 감사할 줄도 섬길 줄도 모르면서/ 그져 ' 저절로 ' 러고 무심히 여긴다/ 주여! 우리를 축은히 여기소서!//

 

강가에서 / 구상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처럼 띄워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때고 이뤄질 것이다// 저 망망한 바다 한 복판일는지/ 저 허허한 하늘 속일는지/ 다시 이 지구로 돌아와설는지/ 그 신령한 조화 속이사 알바 없으나/ 생명의 영원한 동산 속의/ 불변하는 한 모습이 되어// 내가 이 강에다/ 이배처럼 띄워 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때고 이루어질 것이다//

 

강 / 구상

바람도 없는 강이/ 몹시도 설렌다/ 고요한 시간에/ 마음의 밑둥부터가/ 흔들려 온다// 무상(無常)도 우리를 울리지만/ 안온(安穩)도 이렇듯 역겨운 것인가?/ 우리가 사는 게 이미 파문(波紋)이듯이/ 강은 크고 작은 물살을 짓는다//

 

강 / 구상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에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이면서/ 단일과 평등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 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 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속의 영원성을 보여준다// 강은/ 날마다 판토마임으로/ 나에게 여려 가지를 가르친다//

 

그리스도 폴의 江 1 / 구상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白楊木)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黃金)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그리스도 폴의 江 7 / 구상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는 강에/ 백금의 빛이 녹아 흐른다.// 나룻배가 소년이 탄 소를/ 싣고 온다.// 건너 모래톱에/ 말뚝만이/ 홀로 섰다.// 낚시대 끝에/ 잠자리 조은다.// 멀리 철교 위에서/ 화통차( 火筒車)가/ 목쉰 소리를 낸다.// 풀섶에 갓 오른/ 청개구리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스도 폴의 江 9 / 구상

붉은 산 굽이를 감돌아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소슬한 산정(山頂) 옹달샘 속에/ 한방울의 이슬이 지각(地殼)을 뚫은/ 그 순간을 생각는다네.// 푸른 들판을 휘돌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침내 다다른 망망대해(茫茫大海)/ 넘실 파도에 흘러들어/ 억겁(億劫)의 시간을 뒤치고 있을/ 그 모습을 생각는다네.// 내 앞을 유연히 흐느는/ 강물을 바라보며/ 증화(烝化)를 거듭한 윤회(輪回)의 강이/ 인업(因業)의 허물을 벗은 나와/ 현존(現存)으로 이곳에 다시 만날/ 그 날을 생각는다네.//

 

그리스도 폴의 江 10 / 구상

저 산골짜기 이 산골짜기에다/ 육신(肉身)의 허물을 벗어/ 흙 한줌으로 남겨놓고/ 사자(死者)들이 여기 흐른다.// 그래서 강은 뭇 인간의/ 갈원(渴願)과 오열(嗚咽)을 안으로 안고/ 흐른다.// 나도 머지않아 여기를 흘러가며/ 지금 내 옆에 앉아/ 낚시를 드리고 있는 이 막내애의/ 그 아들이나 아니면 그 손주놈의/ 무심한 눈빛과 마주치겠지?// 그리고 어느 날 이 자리에서/ 또다시 내가 찬미(讚美)만의 모습으로/ 앉아 있겠지.//

 

그리스도 폴의 江 16 / 구상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集合)이면서/ 단일(單一)과 평등(平等)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無抵抗)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 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拘束)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生成)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無常) 속의 영원을 보여준다.// 강은/ 날마다 판토마임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

 

그리스도 폴의 江 20 / 구상

오늘도 神秘(신비)의 샘인 하루를/ 구정물로 살았다.// 오물과 폐수로 찬 나의 暗渠(암거) 속에서/ 그 淸洌(창렬)한 水精(수정)들은/ 거품을 물고 죽어 갔다.// 진창 반죽이 된 시간의 무덤!/ 한 가닥 눈물만이 하수구를 빠져나와/ 이 또한 연탄빛 강에 합류한다.// 日月(일월)도 제 빛을 잃고/ 은총의 꽃을 피운 사물들도/ 이지러진 모습으로 照應(조응)한다.// 나의 現存(현존)과 그 의미가/ 저 바다에 흘러들어/ 영원한 푸름을 되찾을/ 그날은 언제일까?//

 

그리스도 폴의 江 42 / 구상

공초(空超)* 선생이 이승을 떠나실 무렵 나는 한번 선생께 ‘하느님에게 귀의’를 권해보고 싶었지만 주제넘어서 차마 입을 못 떼고 있던 중 어느 날 밤,/ “황톳빛 봇물이 터져 흐르는 개울 한복판에 알몸의 공초께서 허위적대시길래 둑에 앉았던 내가 손을 내밀자 그것을 붙잡고 간신히 헤어나셨는데 내 무릎을 베고 누우셔 숨을 헐떡이는 선생에게 내가,/ —이제 그만, 무(無)의 수렁에서 허덕이지 마시고, 유(有)에 기대보시지요./ 하였더니 선생은 눈을 흘깃 뜨시면서,/ —나는 유무(有無)의 분간부터 질색이란 말일세./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꿈으로 다시는 객쩍은 충고를 단념하고 말았는데 선생께서는 임종 직전 저 몽사(夢事)와는 맥락이 닿지 않지만 나에게 마치 감춰뒀던 비밀이나 털어놓으시듯,/ “자유가 나의 평생을 구속했었구나”라는 엄청난 말씀을 남기셨다./ 선생이 가신 지 20년, 올 여름 어느 밤 또다시,/ “저 팔당댐 상류같이 물이 철철 넘치는 강 위를 신선 모습을 하신 선생께서 마치 나자렛 예수처럼 걸어오시더니,/ —상(常)이! 유(有)는 유에서 나오고 유에서 나온 것은 불멸하느니라.”/ 라고 타이르시고는 홀연히 사라지셨다./ 치몽(稚夢)이랄까? 선몽(禪夢)이랄까? 어쨌거나 나는 꿈속에서나마 선생과의 선문답(禪問答)이 지속됨을 흐뭇해한다.//

*공초: 시인 오상순 선생 아호.

 

그리스도 폴의 江 60 / 구상

한방울의 물이 모여서/ 강이 되니/ 강은 또한 크낙한/ 한 방울의 물이다.// 그래서 한 방울의 물이 흐려지면/ 그만큼 강은 흐려지고/ 한방울의 물이 맑아지면/ 그만큼 강이 맑아진다.// 우리의 인간 세상/ 한 사람의 죄도/ 한 사람의 사랑도/ 저와 같다.//

 

무소부재(無所不在) / 구상

아지랑이 낀 연당(蓮塘)에/ 꿈나무 살포시 내려앉듯/ 그 고요로 계십니까.// 비 나리는 무주공산(無主空山)/ 어둑이 진 유수(幽邃) 속에/ 심오하게 계십니까.// 산사(山寺) 뜰 파초(芭蕉) 그늘에/ 한 포기 채송화 모양/ 애린(愛隣)스레 계십니까.// 휘영청 걸린 달 아래/ 장독대가 지은 그림자이듯/ 쓸쓸하게 계십니까.// 청산(靑山)이 연장하여/ 병풍처럼 둘렀는데/ 높이 솟은 설봉(雪峰)인 듯/ 어느 절정에 계십니까.// 일월(日月)을 조응(照應)하여/ 세월 없이 흐르는 장강(長江)이듯/ 유연(悠然)하게 계십니까.// 상강(霜降) 아침/ 나목(裸木) 가지에 펼쳐 있는/ 청렬(淸冽) 안에 계십니까.// 석양이 비낀/ 황금 들판에 넘실거리는/ 풍요 속에 계십니까.// 삼동(三冬)에 뒤져놓은/ 번열(煩熱) 식은 대지같이/ 태초의 침묵을 안고 계십니까.// 허허창창(虛虛蒼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무애(無涯)도 넘어/ 아득히 계십니까.// 칠색(七色)의 무지개 위에/ 성좌(星座)를 보석자리 삼아/ 동천(東天)의 일출(日出)마냥/ 휘황스레 계십니까.// 이화(李花), 도화(桃花) 방창(芳暢)한데/ 지저귀는 저 새들과/ 옥류(玉流)에서 노니는 고기떼들의/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계십니까.// 풀잎 뜯어 새김하며/ 먼산 한번 구름 한번 바라보는/ 산양(山羊)의 무심으로 계십니까.// 저고리 섶을 연 젖무덤에 안겨서/ 어미를 쳐다보는 아기의 눈빛 같은/ 무염(無染) 속에 계십니까.// 저 신선도(神仙圖)/ 흰 수염 드리운 그윽한 미소로/ 굽어살피고 계십니까.// 이렇듯 형상으론 섬기지 못하고/ 붓 안 닿는 여백같이/ 시공(時空)을 채워 계심이여!//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천주(天主)님!//

 

봄맞이 춤 / 구상

옛 등걸 매화가/ 흰 고깔을 쓰고/ 학(鶴)춤을 추고 있다.// 밋밋한 소나무도/ 양팔에 푸른 파라솔을 들고/ 월츠를 춘다.// 수양버들 가지는 자잔가락/ 앙상한 아카시아도/ 빈 어깨를 절쑥대고/ 대숲은 팔굽과 다리를 서로 스치며/ 스탭을 밟는다.// 길 언저리 소복한 양지마다/ 잡초 어린것들도 벌써 나와/ 하늘거리고// 땅 밑 창구멍으로 내다만 보던/ 씨랑 뿌리랑 벌레랑 개구리도/ 봄의 단장을 하느라고/ 무대(舞臺) 뒤 분장실(扮裝室) 같다.// 바람 속의 봄도/ 이제는 맨살로 살랑댄다.//

 

해빙(解氷) / 구상

흰 눈이 덮인 밭과 밭 사이/ 우리 국토(國土) 모양을 짓고/ 얼었던 강이 녹아 흐른다.// 아직도 얼음은 둘로 갈린 허리 응달에서/ 포문(砲門), 총구(銃口), 칼날처럼 줄줄이 번득이고/ 강 한복판 모래무덤들은 태극기(太極旗)를 만들기도 하고/ 제주도(濟州道)나 울릉도(鬱陵島)나 남해군도(南海群島)를 이루기도 하고/ 양측 기슭으론 진남포(鎭南浦), 신의주(新義州)/ 원산(元山), 서호진(西湖津), 청진항(淸津港)을 이루고 있다.// 남향(南向)받이엔 버드나무들이/ 은회색(銀灰色) 쥐새끼를 가지마다 붙이고/ 벌써 눈이 트고 있는데/ 건너편 북향(北向)받이 나무들은/ 표독한 가시를 돋친 채/ 아직도 물기가 감감하다.// 중천(中天)에 친 황금사(黃金絲) 그물에/ 어린 해들이 걸려 하늘거리고/ 강 속에는 수초(水草)들이 꼬리를 친다.// 며칠 전만 해도 꽝꽝 얼어붙었던/ 이 사각지대(死角地帶)!/ 지나간 우리의 미움처럼/ 이제는 우리의 사랑처럼/ 녹아 흐르고// 저기 흉물스레 놓여 있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도/ 흘러 떠가고 있다.//

 

허(虛)의 장(章) / 구상

제군(諸君)!/ 이 소식을 알자면/ 먼저, 마음을 욕망의 덮개와/ 불안의 밑이 없는 항아리로/ 비워놓게!// 그럴 양이면 아롱진 바람들과/ 고름 낀 인업(因業)들이/ 민들레 마른 꽃술인 양 스러져/ 흩어질걸세./ 애증(愛憎)의 동아줄도 풀어질걸세./ 선악의 철창도 열어질걸세./ 신화의 망루(望樓)도 무너질걸세./ 마침내 그대는 화평(和平)으로/ 해방된다는 말일세.// 제군(諸君)!/ 허(虛)란 실상 실유(實有) 그것일세./ 어둠에서 빛으로/ 불에서 물로/ 진창에서 꽃밭으로/ 식료(食料)에서 변통(便痛)으로/ 바람에서 돌 속으로/ 사람에게서 짐승에게로/ 물고기에서 땅벌레에게로/ 죄수(罪囚)의 눈빛에서 간수(看守)의 눈빛으로/ 여왕(女王)에게서 걸인(乞人)에게로/ 시(詩)에서 과학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봄 여울에 눈 녹아 흐르듯 흐르며/ 또한 동양화의 여백(餘白)같이 본래(本來) 있어/ 생사(生死)와 명멸(明滅)을 낳고/ 시간과 공간을 채워서/ 남음이 없지.// 그래서 허(虛)는 존재(存在)와 생성(生成)을/ 혼연(渾然)케 하고/ 운명과 자유를 병존(竝存)케 하며/ 모든 실존(實存)의 개가(凱歌)를 울려/ 저 허허(虛虛)한 창공(蒼空)을 스스로의 안에서/ 대응(對應)시키는 조화(造化) 속일세.// 제군(諸君)! 그러나 이 경지는/ 막다른 심연(深淵)의 축복에서/ 드맑은 정상(頂上)에 이르른/ 생(生)의 화해(和解)된 인지(認知)라는 것을/ 납득(納得)해주게.//

 

수난(受難)의 장(章) / 구상

우 몰려온다. 돌팔매가 날은다./ 머슴애들은 수수깡에 쇠똥을 꿰매 달고/ 어른들은 곡괭이를 휘저으며 마구 쫓아오는데/ 돌아서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선지피 쏟아지는 이마를 감싸쥐고서/ 어머니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이제 어디로 달려야 하는가.// 쫓기다가 쫓기다가 숨었다./ 상여집으로 숨었다./ 애비 욕, 에미 망신 고래고래 터뜨리며/ 벌떼처럼 에워싸고 빙빙 돌아가는데/ 나는 얼른 상여 뚜껑을 열어제치고/ 벌떡 드러누워 숨을 꼭 죽였다.// 피를 토한 듯 후련해지는 가슴이여/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지는 마음이여/ 사람도 도깨비도 얼씬 못하는 상여 속에서/ 나는 어느새 달디단 꿈 한 자리를 엮고 있었다.// 상여 속에 송장처럼 잠들은/ 사나이 얼굴은 십상 달같이 흴 게다./ 어쩌면 상달같이 깜찍한 여인이 별 같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상처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있을 풍경/ 나의 달가운 꿈속의 꿈이여.// 추억의 연못가엔 사랑의 연꽃도 한 송이 피었으리./ 다홍신은 벗어놓고 외로움에/ 장승처럼 못박혀 있는/ 또 나의 사랑.// 꽃수레처럼 화려한 상여를 타고/ 림보*로 향하는 길 위엔/ 곡성마저 즐겁구나/ 소복한 나의 여인아/ 사흘만 참으라.//

* 림보: 예수가 죽어서 부활하기 전 가 있었다는 선령(善靈)이 머물던 곳. 일명 고성소(古聖所).

 

화전민의 꿈 / 구상

태양의 용광로(鎔鑛爐)가 엎질러 쏟아지는/ 밀림(密林) 속에다/ 김칫돌만한 부시로/ 두꺼비손을 깨면서/ 생불을 지른다.// 충천(沖天)하는 불길!/ 삽시에 정글은 불바다다./ 로스케나 양키같이/ 하늘로 치솟은 거목(巨木)들과/ 기름가마에 절은 호인(胡人)녀석의/ 아름드리 고목(古木)들과/ 지난 세월 광기(狂氣)의 의미도 모르는 채/ 남북(南北)의 군사(軍士)가 집총(執銃)을 하듯/ 빽빽히 늘어선 잡목(雜木)들과/ 현실의 증오(憎惡)와 적개심(敵愾心)으로/ 가시 돋친 덤불과/ 역사의 악순환(惡循環)으로 엉키고 설킨/ 인업(因業)의 칡덩굴들과/ 모든 권력(權力)의 숲과/ 모든 조직(組織)의 뿌리까지/ 그저 이 세기(世紀)의 사각일대(死角一帶)가/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내며/ 포탄(砲彈)소리를 내며/ 송두리째 뒤집히며 불타오른다.// 이 무주공산(無主空山)을 지배(支配)하여/ 제 혼자만의 세상처럼 으르렁대던/ 호랑이 표범 같은 맹수(猛獸)들도/ 꽁지에 불을 달고 줄도망을 치며/ 진창 제 배만을 불리던/ 곰, 너구리, 멧돼지 족속(族屬)들은/ 참호(塹壕) 같은 불구덩이에 통째로 빠지고/ 뱀, 여우, 늑대, 살쾡이같이/ 간사한 무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해번득이면서/ 살 구멍을 찾아 요리 뛰고 저리 뛰고/ 올빼미, 박쥐 같은 날도둑들과/ 정보망(情報網)을 드린 거미들,/ 옴두꺼비, 땅두더쥐, 쥐새끼 같은/ 첩자(諜者)와 정탐(偵探)꾼들,/ 요쪽 저쪽 붙어먹던 무리들,/ 세상 제멋대로 지껄여대던/ 소음(騷音)의 새떼들 둥주리까지/ 아니, 더러는 무죄(無罪)한 청개구리마저/ 탄다./ 뻐드러진다./ 질식(窒息)의 매연(媒煙) 속을 뛰며/ 곤두박질하며 뒹군다./ 신음(呻吟)하고, 포효(咆哮)하고 비명(悲鳴)을 지른다./ 낭자(狼藉)한 피마저 타들어간다./ 지글지글 타들어간다.// 넘실거리는 불길의 파도(波濤)!/ 타오르는 불길의 산악(山嶽) 속에서/ 이 강토(疆土)와 겨레의/ 모든 주박(呪縛)이 스러지고/ 모든 속박(束縛)이 풀린다./ 오오 타라, 타오르라./ 한 달도 석 달도 타오르라./ 그리고 모든 것이 연기와 재로 사라진 뒤,/ 피비린내 나는 음산(陰散)마저 가시고 난 뒤,/ 화장장(火葬場)의 고요와 산모(産母)의 해방감(解放感) 속에서/ 출현(出現)하는 신영토(新領土)!/ 상흔(傷痕)을 아물리는 새살처럼/ 강단(强斷)된 남북(南北)을 합쳐놓은 원야(原野)!// 거기 노아와 방주(方舟)에서 갓 나온 듯한/ 사내와 계집들이/ 패랭이 고깔을 쓰고/ 징을 울리고 북을 두드리며/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며/ 나아간다./ 땅을 판다./ 밭을 일군다./ 씨를 뿌린다./ 원혼(寃魂)과 선령(善靈)들의 귀기(鬼氣)마저/ 불살라버리고 난/ 이 크낙한 새 밭에/ 세기(世紀)의 아침을 맞아/ 새로 모실 이는/ 오직 자주(自主)와 근로(勤勞)와 화락(和樂)의 삼위일체(三位一體)다.//

 

수치(羞恥) / 구상

창경원(昌慶苑)/ 철책(鐵柵)과 철망(鐵網) 속을 기웃거리며/ 부끄러움을 아는/ 동물을 찾고 있다.// 여보, 원정(園丁)!/ 행여나 원숭이의/ 그 빨간 엉덩짝에/ 무슨 조짐이라도 없소?// 혹시는 곰의 연신 핥는/ 발바닥에나/ 물개의 수염에나/ 아니면 잉꼬 암놈 부리에나/ 무슨 징후라도 없소?// 이 도성(都城) 시민에게선/ 이미 퇴화(退化)된/ 부끄러움을/ 동물원에 와서 찾고 있다.//

 

아가는 지금 / 구상

아가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다./ 무엇을 듣고 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 저 히라동굴에서 마호메트가/ 알라의 계시를 전해받듯/ 그런 현상을 보고 있다.// 저 요단강변에서 세례를 받는/ 나자렛 예수 머리 위에서 울리던/ 그런 소리를 듣고 있다.// 저 가야산 숲속 보리수 아래/ 석가모니가 정각에 든 순간의/ 그런 생각에 취해 있다.// 아니 아가는 그도 저도 아닌/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다.// 인류의 오직 하나만의 존재로서/ 자기만이 싹을 틔우고 꽃 피워야 할/ 그 누구도 보도 듣도 생각도 못한/ 그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서 빙그레 웃고 있다.//

 

에로스 소묘(素描) / 구상

1/ 농익은 수밀도(水密桃)가슴.// 꽃무덤 위에 취해 쓰러진/ 나비.// 메론 향기의 혀.// 흰 이를 드러낸 푸른 파도에/ 자맥질하는 갈매기.// 수평선의 아득한 눈 속.// 원시림 속의 옹달샘을 마시는/ 노루.// 에로스의 심연(深淵),/ 원죄(原罪)의 미(美).// 2/ 호롱 하롱 고양이의 요기(妖氣) 서린/ 얼굴.// 삼단 머리채로 휘감은/ 비너스의 목.// 명주(明紬) 젖가슴에 솔개의 발톱자국.// 모래시계의 배꼽.// 함지박 엉덩이,/ 아름드리 나무 속살 허벅지.// 랑데부 여울목/ 불지른 봄날의 잔디 두덩.// 어둠의 태백(太白) 속// 진달래산 담요벼랑 아래// 출렁이는 백포(白布)의 파도 위/ 양팔을 포승(捕繩)으로 조이는/ 나부(裸婦).// ……// 비둘기 울음.// 숨막히는 찰나(刹那), 오오 비의(秘義)!// 3/ 허공에 새긴다.// 그 얼굴/ 그 목소리/ 그 미소/ 그 허벅지// 허지만 그 정은/ 새길 수가 없다./ 마음 속에 새겨진 것은/ 형상(形象)이 안 된다.// 4/ 그 알몸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흰 수염을 쓰다듬는다.// 백금(白金)같이 바래진 정념(情念)…// 그 사랑은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제 그 시간과 공간은/ 영원에 이어졌다.//

 

여명도(黎明圖) / 구상

동이 트는 하늘에/ 까마귀 날아// 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 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 이윽고/ 북이 울자/ 원한에 이끼 낀 성문이 뻐개지고/ 구렁이 잔등같이 독이 서린 한길 위를/ 횃불을 든 시빌*이/ 깨어라!/ 외치며 백마(白馬)를 달려.// 말굽 소리/ 말굽 소리/ 창칼 부닥치어/ 살기(殺氣)를 띠고/ 백성들의 아우성/ 또한 처연(凄然)한데/ 떠오는 태양 함께/ 피 토하고/ 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고웁다.// * 카스바: 북아프리카 알제시(市)에 있는 암흑가. 프랑스 영화 `망향'의 무대가 됨.

* 시빌: 희랍어로 선지자(先知者).

 

오늘은 내 안에 / 구상

1/ 내 안의 울 속에서/ 밤낮없이 으르렁대는// 저 사나운 짐승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슨 먹이라도 보았는가?/ 오늘은 길길이 뛰고 있다.// 2/ 내 안의 바다 위를/ 정처없이 표류하는// 저 닻 없는 쪽배의/ 기항지(寄港地)는 어디일까?// 파도가 거센가보다./ 오늘은 몹시도 흔들린다.// 3/ 내 안의 허공 속을/ 끝없이 나래 펴는// 저 파랑새의 꿈은/ 언제 어디서 이뤄질까?// 불멸의 그 동산을 그려본다./ 영원이 오늘은 내 안에 있다.//

 

월남기행(越南紀行) / 구상

나는 어디서 날아온지 모르는/ 메시지 한 장을 풀려고/ 무진 애만 쓰다 돌아왔다.// 꾸몽고개 야자수 그늘에서/ 봉다워 바닷가에서/ 아니 사이공의 아오자이 낭자(娘子)와/ 마주앉아서도/ 오직 그것만을 풀려고/ 애를 태다 돌아왔다.// 아마 그것은 베트콩이 뿌린/ 전단(傳單)인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나트랑 고아원(孤兒院)서 만난/ 월남(越南)소년의 장난인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어느 특무기관(特務機關)이/ 나의 사상(思想)을 시험하기 위한/ 조작(造作)인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로마교황(敎皇)의/ 평화를 호소하는/ 포스타인지 모른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어느 용사(勇士)가/ 남겨놓고 간 유서(遺書)인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은/ 흐르는 눈물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고랑쇠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포탄(砲彈)으로 뻥 뚫린/ 구멍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사지(四肢)를 잃은/ 해골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눈감지 못한/ 원혼(寃魂)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월남(越南) 이야기인 것도 같고// 그런데 그것은/ 나 개인의 문제인 것도 같고// 그런데 그것은/ 우리 민족에 관련한 것도 같고// 아니 그것은 보다 더/ 인류와 세계에 향한/ 강렬한 암시(暗示) 같기도 하였다.//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직 느낀 것이 있다면/ 나란 인간(人間)이/ 아니 인류(人類)가/ 아직도 깜깜하다는 것뿐이다.// 나는 그 메시지를/ 풀다 풀다 못하여/ 이제 고국(故國)에 돌아와서까지/ 이렇듯 광고(廣告)한다.// 백지(白紙) 위에/ 선혈(鮮血)로 그려진/ 의문부(疑問符)/ `?'/ 그게 무엇이겠느냐?//

* 이 시는 내가 1967년 11월 월남을 시찰하고 쓴 유일(唯一)의 작품으로 자유월남 정부군에게 전세(戰勢)가 유리하고 더구나 파월국군은 승승장구하던 때였지만….

 

은행(銀杏) / 구상

나 여기 서 있노라./ 나를 바라고 틀림없이/ 거기 서 있는/ 너를 우러러/ 나 또한 여기 서 있노라.// 이제사 달가운 꿈자리커녕/ 입맞춤도 간지러움도 모르는/ 이렇듯 넉넉한 사랑의 터전 속에다/ 크낙한 순명(順命)의 뿌리를 박고서/ 나 너와 마주 서 있노라.// 일월(日月)은 우리의 연륜(年輪)을 묵혀가고/ 철따라 잎새마다 꿈을 익혔다/ 뿌리건만// 오직 너와 나와의/ 열매를 맺고서/ 종신(終身)토록 이렇게/ 마주 서 있노라.//

 

잡초송(雜草頌) / 구상

희랍신화(希臘神話)의 혀 안 돌아가는/ 남녀신(男女神)의 이름을/ 죽죽 따로 외는 이들이// 백결(百結)선생이나 수로부인(水路夫人),/ 서산대사(西山大師)나 사임당(師任堂)을 모르듯이// 클레오파트라, 로미오와 줄리에트,/ 마릴린 몬로, BB의 사랑이나/ 브로드웨이, 할리우드의 치정(痴情)엔/ 횡한 아가씨들이// 저의 집 식모살이/ 고달픈 사정도 모르듯이// 튜울립, 칸나, 글라디올러스,/ 시크라멘, 히아신스는/ 낯색을 고쳐 반기면서// 우리는 넘보아도/ 삼생(三生)에 무관(無關)한 듯/ 이름마저도 모른다.// 그 왜, 시골 그대들의 어버이들이/ 전해가지고 붙여오던/ 바우, 돌쇠, 똘만이,/ 개똥이, 쇠똥이, 억쇠,/ 칠성이, 곰, 만수,/ 이쁜이, 곱단이, 떡발이,/ 삐뚤이, 순이, 달,/ 서분이, 꽃분이,/ 이런 정답고 구수한 이름들 함께/ 우리 이름도 한번 들어보겠는가.// 민들레, 냉이, 달래, 비듬,/ 떡쑥, 토끼풀, 할미꽃,/ 범부채, 초롱꽃, 쐐기풀,/ 이런 것이야 누구나 알지만// 홀아비꽃대, 염주괴불주머니, 광대수염,/ 개부랄풀, 벼룩이자리, 개구리밥,/ 도깨비쇠고삐, 퉁퉁마디, 무아재비,/ 며느리배꼽, 개미탑, 큰달맞이꽃,/ 처녀이끼, 도둑놈갈구리, 도깨비바늘,/ 거지덩풀, 애기똥풀, 미치광이,/ 이렇듯 재미있고 천연(天然)스런/ 이름들을 들어보기나 했는가?// 땅속 줄기에다/ 홀아비 사추리의 무성한 것 같은/ 꽃수술을 달았으니/ 홀아비꽃대요,// 퉁겨운 줄기에/ 꽃주머니가 양쪽으로 달렸으니/ 염주괴불주머니요,// 홍자색(紅紫色) 입술 꽃부리로/ 아래턱이 세 갈라진 데다/ 두 장의 수염 같은 수술꽃이 달렸기에/ 광대수염이요,// 온몸에 짧은 털이 나고/ 잎은 뭉툭한 톱니를 가진데다/ 불그레한 두 장의 꽃이/ 마치 덜렁덜렁 달린 무엇 같기에/ 개불알이요,// 잎은 둥근알 꼴/ 온몸엔 가는 털이 끼어서/ 벼룩이가 붙은 꽃 같기에/ 벼룩이자리요,//겨울 연못에도/ 눈을 맞으며 떠 있기에/ 개구리밥이요,// 덩이 줄기에다/ 길이 1미터나 되는 큰 잎이/ 광택을 내고 있어 `그로테스크'하기에/ 도깨비쇠고삐요,// 바닷가에/ 큰 마디가 줄기마다 달린/ 퉁퉁마디,// 역시 바닷가에 살지만/ 굵은 무 같은데/ 거기다 수염이 달려/ 무아재비,// 고운 여인 알몸의/ 꽃 속이 피어서/ 며느리배꼽,// 이삭꽃이/ 불개미떼가 붙은 것같이/ 황갈색(黃褐色)으로 피기 때문에/ 개미탑,// 큰달맞이꽃은/ 온몸에 부드러운 융털이 있고/ 여름밤에 노랑꽃이/ 크게 피어 어울리며// 처녀이끼는/ 제주도(濟州道) 나무와 바위에/ 실꼴[絲形]로 흐느적거리고/ 잎과 홀씨주머니가 알을 품은 것 같다.// 이름마저 흉측한 도둑놈갈구리는/ 부스스한 열매가 한번 옷에 붙으면/ 떨어질 줄 모르고// 도깨비바늘도 역시/ 바늘 같은 열매가 달라붙으며// 거지덩굴은/ 더러운 손자국, 발자국처럼 지저분하고// 애기똥풀은/ 노란 진물이 나오고// 미치광이는/ 흙탕 같은 온몸에 잎과 꽃이/ 어둡고 어지럽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며느리미씨개, 참소리쟁이,/ 갓버섯, 벌레잡기, 오랑캐, 끈끈이주걱,/ 팔손이나무 등/ 우리 친구들 이름과 그들의 특징을/ 주워 섬기자면 한이 없다.// 옛부터 일러오기를/ 하늘이 녹(祿)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없는 풀을 싹트지 않는다/ 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부르짖으면서/ 길섶이나 밭두렁이나 산비탈에/ 어느 누구의 신세도 안 빌고/ 자연으로 싹터서 자연의 구실을 하다/ 자연히 스러지는 우리들의 본명(本命)!// 그대 시인(詩人)이란 것들마저/ 함부로 잡초(雜草)라 부르고/ 소외(疎外)하는가!//

 

점경(點景) / 구상

산허리 무밭가/ 춘곤(春困)에 조는 늙은 바위에/ 쉬파리 한 마리 놀고 있다.// 영(嶺)으로 오르는 산길 풀섶에/ 묵은 남비뚜껑만한 쇠똥엘/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바위의 응달진 허리에도 붙어보고/ 햇볕에 단 이마에도 앉아보고/ 움푹 파인 숫구멍에 괸/ 빗물에 촉촉히 젖어도 보고// 손발을 살살 빌어도 보고/ 눈곱 같은 찌를 깔겨도 보고/ 서캐 같은 알을 슬어도 보고// 이번엔 무우밭 한가운데 홍일점(紅一點) 끼여든/ 봄 국화 꽃술에 날아가 앉아서/ 영사막(映寫幕)에 홀린 소년처럼/ 지평선까지 평면으로 전개된/ 들과 강과 길을 내려다보는데// 세상은 일시에 모두 정지되어/ 푸른 송장이 된 것 같이/ 숨소리도 없는 이 순간,/ 기아(飢餓)와 멸시(蔑視)와 살육(殺戮)에서 해방된 순간/ 저주(詛呪)와 모반(謀反)도 없는 이 순간,// 너, 쉬파리 똥파리/ 어쩐지 이 고요가/ 서러운 공포가 되며/ 산울림하게 왕왕, 울어보누나.//

 

정(靜)과 동(動) / 구상

팔당(八堂)과 양평(楊平) 사이/ 후미진 강기슭 빈 조각뱃전에/ 한켠엔 내가 앉고/ 한켠엔 노처(老妻)가 앉아/ 바람도 없이 출렁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다.//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제 백만의 신도가 모인 여의도(汝矣島)/ 그 찬란한 가설제단에 앉으셨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몇달 전 여성잡지에서 뵈온/ 가야산(伽倻山) 바위 위에 앉으신 성철(性撤) 종정과의/ 두 모습,// 한 분은 인파(人波)의 그 환성 속에 계시고/ 한 분은 자연의 그 적막 속에 계시나/ 두 모습 그대로가 진실임을 의심할 바 없거늘/ 과연 이 대조(對照)는 무엇을 뜻함인가?// 한 분이 행하시는 인위(人爲)의 극진(極盡) 속에도/ 한 분이 행하시는 무위(無爲)의 극치(極致) 속에도/ 신비가 감돌기는 매한가지어늘/ 과연 이 부동(不同)은 무엇을 말함인가?// 저 두 분의 모습이 다 함께/ 진리의 체현(體現)임에 다를 바 없으니/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소식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정동일여(靜動一如)의 소식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저녁노을과 함께 숨을 죽이듯/ 잔잔해진 강물을 바라보며/ 노부처(老夫妻)는 하염없는 생각에 잠겨/ 일어설 줄을 모른다.//

 

조화(造化) 속에서 / 구상

울 밑 장독대를 빙 둘러/ 채송화가 피어 있다.// 희고 연연한 몸매에/ 색색의 꽃술을 달고/ 저마다 간드러진 태를 짓고/ 서로 어깨를 떠밀기도 하고/ 얼굴을 비비기도 하며 피어 있다.// 하늘엔 수박달이 높이 걸리고/ 이슬이 젖어드는 이슥한 밤인데/ 막내딸 가슴의 브로우치만큼씩한/ 죄그만 나비들이 찾아들어/ 꽃술 위를 하늘하늘 날고 있다.// 노랑,/ 빨강,/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이 꽃술에서 저 꽃술로/ 꽃가루를 옮겨 나르는 나비들!/ 이른봄부터 밤마저 새워가며/ 그 수도 없이 날던 나비떼들!// 알록달록 채송화의 꽃물을 들이기에/ 저 미물(微物)들이 여러 천년을 거듭하는/ 억만(億萬)의 역사(役事)를 하였겠구나.// 헛간 뒤 감나무의 짓무른 홍시도/ 입추(立秋) 전까지는 입이 부르트게 떫었으며/ 저 뒷동산의 밤송이도/ 가시를 곤두세워 얼씬도 못하게 하더니만/ 알을 익혀 하강(下降)의 기름칠을 하고는/ 입을 제 스스로 벌렸다.// 오오, 만물은 저마다/ 현신(現身)과 내일의 의미를 알고/ 서로가 서로를 지성(至誠)으로 도와/ 저렇듯 어울리며 사는데// 사람인 나 홀로 이 밤/ 울타리에 썩어가는 말뚝이듯/ 아무것도 모르며 섰는가?//

 

초동(初冬)의 서정(抒情) / 구상

상강(霜降)/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진/ 고목(古木) 가지에/ 서리 핀 흰 아침이 드맑게 펼쳐 있다.// 소년 적 죄그만 가슴의 그리움이던/ 교리방(敎理房) 수녀(修女)의 흰 이마가/ 아련히 떠오른다.// 청렬(淸冽)이 결코 설움은 아니련만/ 내 눈에는 찬이슬이 맺힌다.// 입동(立冬)/ 헤식어가는 햇발이/ 긴 그림자를 끌고/ 양지(陽地)를 찾는다.// 대지(大地)는 번열(煩熱)을 가시고/ 본래(本來)대로 누워 있다./ 11월의 일모(日暮)엔/ 나의 인생도 회귀(回歸)에 든다.// 초설(初雪)/ 첫눈을 맞을 양이면/ 행복한 이에겐 행복이 내려지고/ 불행한 사람에겐 시름이 안겨진다.// 보얗게 드리운 밤하늘을/ 헤치고 가노라면/ 등불의 거리는 고성소(古聖所)처럼 그윽한데// 멀리 어디선가/ 기항지(寄港地) 없는 뱃고동 같은 게/ 쉰 소리로 울려온다.//

 

초생달 꽃밭 / 구상

초생달 꽃밭에는/ 옛 얼굴들이 산다.// 봉선화 꽃술에서 내민 얼굴은/ 혼례(婚禮)를 치른 지 사흘 만에/ 북간도(北間島)로 떠나던 외사촌 누나,/ 색(色)골무타래를 쥐어주고선/ 목쉰 기적(汽笛)과 함께 떠나간 누나,/ 다홍으로 얼룩진 50년 전 그 얼굴이/ 소롯이 내다보고 있다.// 코스모스에선 교리반(敎理班) 수녀의 얼굴!/ 악네스이던가 누시아던가/ 검은 고깔에 흰 수건으로 감싼 보얀 얼굴에/ 푸른 눈을 반짝이던/ 죄그만 내 가슴의 그리움이던/ 하늘하늘 키가 큰 서양수녀(西洋修女)가/ 빙그레 내다보고 있다.// 국화(菊花)에서 내다보는/ 얼굴은 그 누구일까?/ 이북(以北), 산소(山所)도 알 길 없는/ 어머님 시신(屍身)의 얼굴 같기도 하고/ 거기 두고 온 처제(妻弟)의/ 상냥한 얼굴 같기도 하고/ 어쩌면 며느리 될 애의 얼굴 같기도 한데/ 초생달이 먹구름 뒤로 숨자/ 이제 꽃밭은 현기(眩氣) 같기도 하고/ 무서움 같기도 하여/ 으스스 한기(寒氣)가 든다.// 원, 몸살이 나려는가?//

 

추풍령(秋風嶺) / 구상

추풍령(秋風嶺)/ 산비탈에/ 이름도 모를 산꽃 한 무더기가/ 눈에 스친다.// 모시 치마 저고리 차림의/ 옆자리의 아리따운 여인이/ 정겨운 목소리로// `아이 저 꽃 좀 봐!/ 아름답기도 하여라!'// 수로부인(水路夫人)의 탄성(嘆聲)을 발한다.// 나는 흰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삼백년 전 그 노인*을/ 오늘 이 자리에다 떠올리며,// 오늘의 나를 천삼백년 전/ 동해(東海) 산기슭 그 자리에다 떠올리며/ 달리는 고속(高速)버스 속에서/ 저 혼자 섭섭해하고/ 저 혼자 히죽거린다.//

* 그 노인: 향가 `헌화가(獻花歌)'의 설화의 주인공.

 

하일서경(夏日敍景) / 구상

1 아침// 산과 마을과 들이/ 푸르른 비늘로 뒤덮여/ 눈부신데// 광목처럼 희게 깔린 농로(農路) 위에/ 도시에선 약 광고에서나 보는/ 그런 건장한 사내들이/ 벌써 새벽 논물을 대고/ 돌아온다.// 2 낮// `이쁜이'가 점심함지를/ 이고 나서면/ `삽살이'도 뒤따른다.// 사내들은 막걸리 한 사발과/ 밥 한 그릇과/ 단잠 한숨에/ 거뜬해져서 논밭에 들면/ 해오리 한 쌍이/ 끼익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난다.// 3 저녁// 저녁 어스름 속에/ 소를 몰아/ 지게 지고 돌아온다.// 굴뚝 연기와/ 사립문이 정답다.// 태고(太古)로부터/ 산과 마을과 들이/ 제자리에 있듯이// 나라의 진저리나는/ 북새통에도/ 이 원경(原景)에만은/ 안정이 있다.//

 


 

구상(具常, 1919년~ 2004년) 시인, 언론인

본명은 구상준(具常浚)이다. 1919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지만 가족과 함께 함경남도 함흥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내다 그 후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성장하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1938년 원산 덕원 성베네딕트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하고 1941년 니혼 대학교 전문부 종교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 후 원산의 작가동맹에서 펴낸 시집 《응향》에 자신의 시를 실었으나, 1946년 응향 사건이 발생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으로부터 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월남하였다. 이후 언론계에 투신하였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단에 참가 하였다. 제자들에게 올바름에 대한 올곧은 추구를 중요하게 생각한 구상 시인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언론 운동을 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지만 곧 무죄 석방되었다. 그 뒤로는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언론과 문학 활동에만 몰두하였다. 박정희가 정계입문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미국 하와이 대학교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였다. 화가 이중섭, 걸레스님 중광, 장애인 화가 김기창, 시인 고은 등 다양한 방면의 예술가와 교류하였다. 2004년 5월 11일에 지병인 폐질환과 교통사고 후유증이 악화되어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경기도 안성시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작품은 주로 가톨릭 신앙에 바탕한 것으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프랑스 문부성에서 선정한 세계 200대 시인에 들기도 하였다.

 

※ 칠곡군 구상문학관 홈페이지

 

칠곡군 대표포털

호국평화의도시 칠곡군입니다. 행정정보 및 군정소식, 각 분야별 정보를 제공합니다.

www.chilgok.go.kr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이하 시인  (0) 2021.06.03
김관식 시인  (0) 2021.06.02
홍윤숙 시인  (0) 2021.05.31
박용철 시인  (0) 2021.05.30
김승희 시인  (0) 2021.05.2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