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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관식 시인

부흐고비 2021. 6. 2. 08:17

호피(虎皮) 위에서 / 김관식
해 진 뒤, 몸 둘 데 있음을 신에게 감사한다!/ 나 또한 나의 집을 사랑하노니/ 자조근로사업장에서 들여온 밀가루 죽(粥)이나마 연명을 하고/ 호랑이표 시멘트 크라프트 종이로 바른 방바닥이라/ 자연 호피를 깔고/ 기호지세(騎虎之勢)로 오연(傲然)히 앉아/ 한미합동! 우정과 신뢰의 악수표 밀가루 포대로 호청을 한 이불일망정/ 행(行). 주(住). 좌(坐). 와(臥)가 이에서 더 편함이 없으니/ 왕(王). 후(候). 장(將). 상(相)이 부럽지 않고/ 백악관 청와대 주어도 싫다/ G.N.P가 어떻고,/ 그런 신화 같은 얘기는 당분간 나에겐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병상록(病床錄) / 김관식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간(肝), 심(心), 비(脾), 폐(肺), 신(腎) ...../ 오장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憂患)에서 살고 안락(安樂)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나의 임종은 / 김관식
남향 미닫이, 재양한 마루 끝에/ 귀여운 젖먹이 무릎에 안고 앉아 조용히 엄마의 얼굴처럼 화색이/ 되는 자애로운 하늘 아래 하찮은 미물들과 푸나무 떨기조차 은총에 젖어 축복을/ 받는// 오늘은 춘분! 낮과 밤이 같은 날./ 나의 임종은 자정에 오라!/ 가장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듯/ 너를 위해 즐겨 마중하고 있으마/ 비인 방에 호올로 누워 천고의 비밀을 그윽히 맛보노니...// 가여운 아내 아들딸들아./ 아이예, 불쌍한 울음일랑 들레지 말라./ 그동안 신세끼친 여숙을 떠나/ 미원한 본택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벌판에 내던지면 소리개와 사갈의 밥이 될 게고 땅에 묻으면/ 아미와 구더기의 즐거운 향연.// (발가숭이로 왔으니 발가숭이로!)/ 불타여. 피 빨아먹고 산 공변된 공변된 업이요 보가 아니오니까. 백운대 위에 세워 풍장을 해도숱연키야 하겠다만 모초롬만에 연인들을 데리고 하이킹 코오스를 밟아 나온 알피니스트 제위께서 뜻하지 않이 당하는 일에 질겁들을 하실 테니... 어차피 활활 타는 불가마에 넣어 다비하는 게 또한 해롭지 않을라.// 저녁밥상을 물리고 난 여름밤/ 멸구 깔따귀를 앞세우고 날아와/ 스스로 불에 들어/ 오뇌의 나래 파닥거려 시루는 불나비처럼, 깃은 찟기고 죽지만 남아/ 형해뿐의 육신이지만 달라는 이 있거든 서슴없이 인도하라.// 그리고 또, 낙엽이 구으는 가을 황혼에 빗물에 홈이 파진 외딴 산골길./ 민첩한 다래미 손에서도 어느새 빠져나와/ 가랑잎 사이 구르는 상수리 열매처럼/ 사고의 허을 벗어 던져버리고 모든 것 거기 두고 나 여기 간다./ 잘 있어! 서러워 말아다오.// 한잠 자고 난/ 겨울 아침에/ 예고도 없이 별안간 조촐디 조촐한 흰 옷 입고/ 즐거운 눈발인 양 표표히 내 이승에 다시 날아올는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 가을에 / 김관식
창 밖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가을이던가./ 녹차(鹿車)에 가구를 싣고/ 랑잎 솔솔 내리는/ 이끼 낀 숲길/ 영각소릴 쩔렁쩔렁 울리며/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도 없네./ 반겨 맞아 줄 고향도 집도.// 순채나물/ 노어회(鱸漁膾)/ 강동(江東)으로 갈거나/ 구양수(歐陽修)/ 글을 읽는/ 이 가을 밤에.//

 

연(蓮) / 김관식
수천만 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그날 하루가 다하기 전에/ 한 뼘 가웃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지막 타는 안스러이 부셔지는 저녁 햇살을…/ 얇은 나래야 바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지러이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곤두서서/ 어젯밤 자고 온 풀시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갓난애기의 손가락보담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잡아 가로 세로 자질하며/ 가물가물 높이 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못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 오르는 어리디어린 아그배 나무같이/ 물 오른 아희들이 웃도리를 벗고 서서/ 물 가운데 어떤 놈은 물 속의 하늘만을 들여다보고/ 제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내린 내 마음 한구석/ 그 어느 그늘진 개흙밭에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연(蓮)꽃이 그 큰 봉우리를 열었다.//

 

홍련(紅蓮)이에게 / 김관식
옛날이다./ 나는 낚싯대를 던져두고/ 과히 좁지 않은 우리집 연못 방축가를 거닐었다./ 비단개구리 잡는 애송이 녀석들이 몇 놈 보일 뿐./ 부평초(浮萍草)는 한쪽에 밀린 그대로./ 비취(翡翠)새 날고,// 마름잎 흐느끼는 여름 초저녁/ 서늘한 바람에선 풋내가 난다./ 하늘나라의 선녀(僊女)들이 우의(羽衣)를 펼쳐든 채/ 가지런히 내려와 목욕하는 듯./ 천개(天蓋)와 같이 육중한,/ 물방울이 수은(水銀)처럼 구을르는 연잎 위에/ 촉대(燭臺)인 양 빼어난 대공마다/ 초파일 연등(燃燈)처럼 만타(萬朶)한 홍련(紅蓮)!// 덤덤히 섰던 나는 별안간 허물어지는/ 쓰러질 뻔한 찰나(刹那) 이상한 소릴 분명히 들었었다./ 장화(薔花)를 따라간 홍련(紅蓮)이 운다./ 무슨 신(神)들린 자(者)와 같이 핼쓱한 얼굴로/ 그 서러운 정령(精靈)은 누구에게 무엇을/ 하소거리듯 하솟거리듯 우는 것이아닌가./ 그날밤 꿈에 나는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허씨(許氏)의 죄(罪)를 다스리지 안해도 좋았을 것을……// 아무래도 절실(切實)한 원한(怨恨)은 필경/ 잎새도 다 떨구어 악마디게 자라서/ 등치만 남은 한 그루 늙은 괴목(槐木)나무가/ 혼자 오묘(奧妙)한 소리를 갊아 바람이 입맞출 때/ 목을 놓아 울듯이 이름지을 수 없는 그림자로 되살아/ 항용 나직히 초월계(超越界)에 숨어서/ 뜻있는 이의 마음과 맞부딪쳐/ 언제든지 이렇게 울릴 줄은 몰랐다.//

 

정(情)·단장(斷章) / 김관식
사랑은 겹겹/ 안으로 붉게 타는 연(蓮)꽃 봉오리// 가고 없어도/ 정(情)은 장강(長江) 물…/ 연(蓮)뿌리 끊쳐도/ 실로 이어지듯이/ 심줄만치나 끈질긴 괴로움.// 누가 어디서/ 날카론 지혜(智慧)의 칼날을 세워/ 두 눈 꽉 감고/ 뚝 끊어버리랴/ 정(情)의 실마리…//

 

다시 광야(曠野)에 / 김관식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어놓고/ 당신의 그림자가 어리울 때까지를/ 가슴 조여 안타까웁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그러면 저의 옆에 가까이 와 주십시오./ 만일이라도…… 만일이라도……/ 이승 저승 어리중간 아니면/ 어데든지 당신이 계시지 않을 양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몸뚱어리는/ 암소 황소 쟁기결이 날카론 보습으로/ 갈아헤친 논이랑의 흙덩어리와 같습니다.// 따순 봄날 재양한 햇살 아래/ 눈 비비며 싹터 오는 갈대순같이/ 그렇게 소생하는 힘을 주시옵소서.//

 

장자(莊子)와 나비 / 김관식
내 마음의 공허한 벌판을/ 네가 측량하여 표(標)ㅅ말을 세워/ 빨간 기(旗)를 꽂고/ 자국마다 오뇌(懊惱)의 씨앗을 심고/ 그리고 돌아간 뒤// 노루 발목을 구워서 문질러도/ 낫지 않는 슬픈 생채기!/ 앓은 짐승처럼 벙어리 되어/ 담즙(膽汁)보다 쓴 잔(盞)을 소리 없이 마시노니// 새여./ 새벽 묏부리에 쇠잔(衰殘)한 달빛이 찰 때/ 각혈(咯血)하다 쓰러져 돌아누운 새여./ 간밤 비바람에 생으로 떨려/ 점점이 어룽진 피의 낙하(落下)// 蔣生曉夢迷蝴蝶 (장생효몽미호접)/ 望帝春心託杜鵑 (망제춘심탁두견)// 정수머리에 살며시 나와/ 불을 켜 들고/ 가리마 사이 푸른 오솔길을 밟아/ 조용히 나들이 간 영혼(靈魂)을 불러// 나도 언제는 한번/ 나비가 되어 보나 하고/ 훨훨 날아보는/ 봄밤의 꿈.//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 김관식
오늘은 나도 고기잡이라,/ 그물을 말어 사렴 사렴 걷어 담고 닻 감아 돛 일우어/ 물이랑에 남실거리는 아지랭이 봄날을…// 푸른 이끼의 시내 언덕 위에는 복사꽃이/ 노을같이 피어 있길래 어지러이 떨어져 궁구르는 꽃이팔./ 머나 먼 어데론지 저어서 가고.// 빛나는 바위굴로 기어들어가면은 깊은 골목에 개짖는 소리.// 저녁 연기 피어 오르는 저기 저 수풀 아래/ 그윽히 가라앉은 항아리 속 같은 곳에/ 그림처럼 펼쳐진 아주 옛스러운 마을이었다./ 해는 늦게 떴다 일찌감치 떨어지고/ 하늘만 동그랗게 빤히 내다보이는.// 아들놈에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과/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 그리고/ 염생이 뜯기기를 가르칠 일이요 어린 손주놈들은/ 시냇가에 나가 오리새끼들이나 데리고 놀게 하면 그만인 것이다.// 뽕나무 밭이 있어, 아내의 누에치기엔 걱정이 없고/ 제사(祭祀)날이 돌아오면 며느리 손으로 지어/ 곱게 발다듬이질한 명주 두루마기에/ 눈부신 동정을 달아 새로 갈아 입을란다.// 인동(忍冬) 넌출에 피는 꽃은 금은화(金銀花)./ 차를 대려 마시며 옛글을 보다 고개를 들어/ 구름 밖에 머언 생각을 달리기도 하다가/ 무심코 수그리며 도처사(陶處士)를 생각는다.// 나뭇군이 줏어 온 유자(柚子) 속에서/ 상산사호(商山四皓)가 바둑을 두더라는/ 귤중선인(橘中仙人)이야 못 만난다 하더래도/ 솔가루 긁어모아 가리나무 몇 짐이면/ 훈군한 구들목에 겨울을 난다.// 약초(藥草)밭 풀을 매다 쉬일 참에는/ 흰돌을 등에 지고 엇비슷이 기대어/ 서너잔(盞) 유하주(流霞酒)에 느긋이 취(醉)하여서/ 환히 핀 꽃그늘에 눈 잠깐 조으는 사이/ 꿈결을 스쳐 흐르는 산(山)나비 한 쌍.//

 

거산호(居山好) 1 / 김관식
山에 가 살래./ 팔밭을 일궈 곡식도 심구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山에 가 살래.//

 

거산호(居山好) 2 / 김관식
오늘, 북창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태고로부터 푸르러 온 산이 아니냐.// 고요하고 너그러워 수(壽)하는 데다가/ 보옥(寶玉)을 갖고도 자랑 않는 겸허한 산.// 마음이 본시 산을 사랑해/ 평생 산을 보고 산을 배우네.// 그 품 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리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라히 뻗쳐 있어 다리 놓는 산.//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 미역취 한 이파리 상긋한 산 내음새/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꿈 같은 산 정기(精氣)를 그리며 산다.//

 

가난 예찬(禮讚) / 김관식
귀를 씻고 세상 일 듣지 말거나/ 피에 젖은 아우성/ 고달픈 삶에, 가쁜 호흡을 지키기 위해/ 사나이는 모름지기 곡괭일 들고/ 여자여. 너는……// 세리(稅吏)도 배고파 오지 않는 곳./ 낫거미 집을 짓는 바람벽에는/ 썩은 새끼에 시래기 두어 타래……// 가난 가난 가난 아니면/ 고생 고생 고생이렸다./ (시름없이 튕겨 보는 가야금 줄에 청승맞게 울면서 흐느끼는 가락은)// 단정학(丹頂鶴)은 야위어 천년을 산다./ 성인(聖人)에의 지름길은 과욕의 길./ 밭고랑에서 제 땀방울을 거둬들이는/ 부지런한 지나(支那)의 꾸리[苦力]와 같이/ 기나긴 세월을 두루미 목에 감고 견디어 보자.// 가만히 내 화상(畵像)을 들여다본 즉/ 이렇게, 언구렁창에 내던져 괜찮은 건가./ <눈으로 눈이 들어가니>/ <눈물입니까.> <눈물입니까.>/ 요지경 같은 세상을 떠나// 오늘도 나는, 누더기 한 벌에 바릿대 하나./ 눈포래 윙윙 기승부리고/ 사람 자국이 놓인 일 없이/ 흰곰의 떼 아프게 소리쳐 우는, 저/ 천산(天山) 북로(北路)를 넘어가노나// 무(無)에 대(對)하여 / 김관식
없었다가는 생겼으니까 없어지는 게 고향이로다./ 온 곳이 어데인지를 모르는 거와 마찬가지로/ 가는 곳이 어데인지도 나는 모른다.// 우리들은 사실상 어머니 배안에서 탯줄을 떨어뜨려/ 태어나기 십삭전 이미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지만// 동해바다에 먼동이 틀 때 짚신에 감발하고/ 길옷차림을 마을 골목을 뚫고 나와/ 안개 낀 나루터의 선술집 같은 데서 건너갈 배가/ 어서 대어 오기만 조용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뿐.// 그리하여 마지막 거기까지는/ 아니 갈래야 갈 수도 없는/ 가고 싶어도 그 밖에는 한발자치도 내디디지 못하는/ 그 어떠한 천길 벼랑끝 낭어덕진 곳으로/ 아무래도 기어이 이르고야 말 것이다.// 거기엔 바로 죽음으로 통하는/ 무거운 돌문이 열리어 있고/ 있었다가는 없어지는 게 모든 이치의 근원이니라.//

 

옹손지(饔飡志) / 김관식
해 뜨면/ 굴 속에서/ 기어나와/ 노닐고,// 매양 나물죽 한 보시기/ 싸래기밥 두어 술/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다.// 남루(襤樓)를 벗어/ 바위에 빨아 널고/ 발까벗은 채 쪼그리고 앉아서/ 등솔기에 햇살을 쪼이다.// 해지면/ 굴 안으로/ 기어들어/ 쉬나니.//

 

屋漏(옥루)의 書(서) / 김관식
조그만 암캐/ 마아리가 있었다/ 土窟(토굴) 속에는.// 天頂(천정)에서 떨어지는 푸른 빗방울// 宮(궁). ....../ 商(상). ....../ 角(각). ....../ 徵(치). ....../ 羽(우). ......// 五音(오음)이 和諧(화해)하는 소리/ 끼니가 없어도 호올로 晏如(안여)함은/ 褐色皮膚(갈색피부)에 주름살이 새겨진/ 印度(인도)의 숲속 마하트마 깐디가/ 圓卓會議(원탁회의)에 羊(양)을 몰고 나가듯/ 젖만을 먹고 살기 때문이오.// 벼슬아치가/ 수레를 머무르고 찾아온다 할지라도/ 두 다리 쭈욱 뻗고 마루에 걸터앉아/ 괼타리를 까 배꼽을 내놓은 채/ 이를 잡으며 말할 것이다.//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자하문(紫霞門) 밖 / 김관식
나는 아직도 청정이 어우러진 수풀이나 바라보며 병을 다스리고/ 살 수 밖엔 없다. 혼란한 꾀꼴새의 매끄러운 울음 끝에 구슬 목청을/ 메아리가 도로 받아 얼른 또 넘겨 빽빽한 가지 틈을 요리조리 휘돌아/ 을러 흐르듯 살아가면서 앞길은 열리기로 마련이다.// 사람이 사는 길은 물이 흘러가는 길./ 山마을 어느 집 물항아리에 나는 물이 되어 고여 있다가 바람에 출렁거려/ 한 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처럼 여기에 흘러왔을 따름인 것이다.// 여름 햇살이 어름처럼 여물어 쏟아지는 과일밭,/ 새카맣게 그을은 구리쇠빛 팔다리로 땀을 적시고 일을 하다가 가을철로// 접어들면 몸뚱아리에 살오른 실과들의 내음새를 풍기며/ 한 번 쯤 흐물어지게 익을 수는 없는가.// 해질 무렵 석양 하는 언저리/ 수심가같이 서러운 노을이 떨어지고 밤그늘이 덮이면/ 예저기 하나둘 씩 초록별이 솟아나/ 새초롬한 눈초리로 은근히 속샐기며 어리석음을 흔들어 일깨워준다./ 수줍은 달빛일래 조촐하게 물들어 영롱히 자라나는 한 그루 향나무의/ 슬기로움을 그 곁에 깃들여서 배우는 것은 여간 크낙한 기쁨이 아니라서/ 스스로의 목숨을 곱게 불살라 밝음을 얘기하는 난낱 촛불이 열두 폭 병풍 두른/ 조강한 신혼 초야 화촉동방에 시집온 큰애기를 조용히 맞이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며 구름 속에 파묻혀 기러기 한백년을 이냥 살으리로다.//

 

석상(石像)의 노래 / 김관식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하여/ 벙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계곡(溪谷)에서 / 김관식
물이 흐른다.// 늙으신 어머니가 가늘은 눈웃음을 머금으실 때,/ 입가장자리, 눈썹기슭에 조용히 말렸다가/ 살며시 풀어지는 해설피듯 막막하고/ 그리고 잔조로운 사랑스런 주름살./ 아니면 흰나비 한 마리 가을 하늘에 가벼이 나래 저어/ 날아가는 자리마다 보일락말락/ 아슴푸레히 일어나는 자잘한 무늬를 지어가면서.// 아니 이것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다.// 나는 한나절 초록바탕의 언덕 위에 앉아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어린 누이들이 뒷골방에 숨어서/ 눈물 씻고 나직히 흐느껴 우는 소리.// 봉우리에서, 또는 골짜기에서/ 사뭇 여기까지 굴러내려온 조약돌 조약돌 조약돌이 만일,/ 그 숱한 혼령들의 조각이라면/ 서어러운 햇살 아래 빛나는 이마빡을 가지런히 드러내고/ 지나간 옛날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물이 흐른다./ 흐르는 물을 따라 나도 흘러가며는 죽은이들이/ 서로 도란거리며 의초로웁게 모여서 사는/ 바다와 같은 마을이야 없는가.//

 

고매(古梅) / 김관식
납향(臘享)도 지낸,/ 눈빛 새하얀 섣달 단대목./ 한겹 장지 밖 울부짖는 저 바람 속/ 사나운 눈보라 성가시게 보채쌓고./ 아내도 없이 홀아빗내 풍기는 비인 내 토실(土室)./ 아랫목 한귀퉁이 분(盆)에 섰는 너에게/ 정성스레 핫옷을 내어 입히다./ 천정에 쥐란 놈이 엿볼 겨를에―./ 악마딘 덩그렇게 가는 가지에 흰나비 몇 마리/ 건성드뭇 붙어 앉은 얼마 안되는 화판(花瓣)이라 할지라도/ 알만 모를만 가만히 새어나오는 말할 수 없는 느긋한 향기(香氣)./ 희한한 일은 희한한 일이다./ 하물며 이 세한(歲寒)에……/ 다로(茶爐)에 김이 서리고 항아릿 술이 괴어 오르는 밤./ '달 밝고 서리 친 밤에 울고 가는 저 기럭아/ 소상동정(潚湘洞庭) 어데 두고……'/ 무릎 장단에 한배도 치렁치렁 사설(辭說) 한 가락 서럽게 뽑아,/ 오호! 가장 순수한 정신(精神)이여. 정신(精神)이여./ 너의 곁에서 널 본받아/ 가난한 내 영혼(靈魂)은/ 고요한 하늘나라 저승 끝까지.//

 

귀로(歸路) / 김관식
길을 가다가 서서 문득 의구(疑懼)의 부로가 되어/ 전율(戰慄)하는 것은 나의 육신(肉身)을 포박(捕縛)한/ 질곡(桎梏)임을 깨달은 연고(緣故)로./ 작약(雀躍)하는 생명(生命)을 유인(誘引)하여/ 결국은 사망(死亡)의 고확함정에 몰아넣는 길!//

 

녹야원(鹿野苑)에서 / 김관식
여기 가야(伽倻)의 조그만 마을/ 보리수(菩提樹) 그늘……/ 신비(神秘)하여라./ 오른편 옆구리로 해산(解産)을 한 채/ 마야부인(摩耶夫人)은/ 피로(疲勞)한 안색(顔色)으로 앉아 계시고./ 뻗혀 오르는 오릇한 원광(圓光) 안에/ 귀가 크신 부처님 탄생(誕生)하시다./ 고운 얼굴은 해바라기꽃일레라.// 지혜(智慧)로운 눈동자를 살며시 굴려/ 미소(微笑)하는 입설에서 차례로 한오리씩/ 올과 날이 풀려나와 눈부신 햇살처럼 빛나는/ 존재(存在)로서의 당신의 언어(言語)./ 여러 가슴의 여러 심장(心臟)에 화살처럼 박혀져/ 진한 장미(薔薇)의 붉은 피가 흐르고./ 그것은 이루 형용(形容)할 수 없이/ 무량(無量)한 법열(法悅)이었다.// 바르나시성(城)가까운 교외(郊外)./ 수풀이 즐비하게 성제자(聖弟子)를 모아놓고/ 그는 비로소 무거운 입을 열었다./ 비구(比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들을 낳아 기르는 어미와 같이,/ 자비(慈悲)로워라. 보살(菩薩)의 마음./ 그로 하여금 항상(恒常)/ 이러한 상태(狀態) 속에 잠기어 안으로 눈을 뜨고,/ 육신(肉身)의 캄캄한 내부(內部)를 들여다보아/ 여울져 밀물치는 사사로운 욕정(欲情)을 말끔히 씻어 가시게 하라.// 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켜/ 하늘 아래 호올로 높다 하신 사월 초파일/ 종이 초롱에 불을 켜달고 경(磬)쇠소리도 하마 잠들어/ 만뢰가 구적(俱寂)한테 화엄(華嚴)의 세계(世界)에/ 들어간 나는 두 손을 모아 옛날을 생각는다.//

 

동양(東洋)의 산맥(山脈) / 김관식
아침 햇살이 퍼져 흐르는 창(窓)살 사이로/ 수저어 불그스름한 햇무리 황홀(恍惚)히 얼비치어/ 상서(祥瑞)로운 구름 안개를 정수리에/ 휘감아 무릅쓰고 서 있는 청산(靑山)을 우러러보며/ 실상 사람이란 정수리에/ 하잘것없는 미물(微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관악산(冠岳山)이여./ 아리 아리 닿을 길 없는 하늘이언만/ 그래도 끝내 저바리지 않고/ 참으로 한결같이 마음속 깊이 염원(念願)하여/ 눈물겨운 보람으로 이루어진 이 지극히도 순수한 입상(立象)에서/ 별안간 나무(南無) 대자(大慈) 대비(大悲)/ 성(聖) 관세음(觀世音) 보살(菩薩). ……/ 그리하여 필경 내가 배태(胚胎)하기 그 이전/ 원시(原始)의 자태(姿態)로 돌아가는 날/ 한줌 티끌로 까만 허공에 스러지든지 한줌 흙으로/ 너의 품안에 가 안기기도 즐거웁거니.// 젖가슴 풀어헤친/ 북받쳐 터질 듯이 새까맣게 살쪄서/ 머루처럼 여물은 꼭지를 달고/ 젖가슴 풀어헤친 서른 대여섯 살쯤의/ 커다란 항아리모냥 투박하고 건장한 시아낙네.// 은밀히 피어 오르는 고운 입김이기에 해도/ 인제는 저만치 바알갛게 솟아/ 온누리에는 흐터져 내리느니/ 혼란한 혼란한 빛뿐이로다.//

 

무검(撫劍)의 서(書) / 김관식
시방은/ 공원(公園)의 벤취 위에/ 팔 베고 돌아 누워/ 명상(瞑想)에 취할 때,// 나무여,/ 바람에 흐느끼는 발가벗은 나무여./ 그래도 너는,/ 한 해에 한 번씩은 제 마음을 가늠하여/ 자아(自我)의 혁명(革命)을 개운히 치르고,/ 무거운 침묵(沈默) 속에 안으로 눈을 돌려/ 또 하나의 연륜(年輪)을 굳혀 가건만……// 원(願)하여 이룬 바 없이/ 불혹(不惑)의 나이에 도리어 의혹(疑惑)만 짙어/ 칼자루 어루만지며 휘파람 불어/ 세상 일 길이 탄식하노니/ 강(江)물은 흘러도/ 구르지 않는 바위가 되어, 바위가 되어/ 부동심(不動心)의 자세(姿勢)를 배워 줄란다.// 비인 포키트에 손을 찌르고/ 스치는 시장기를 하품으로 달래며/ 어둠살 짙은/ 육조(六曹)앞 너른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이런 것을 생각해 본다.// 정부(政府)는 배요,/ 인민은 바다, 바다는 뱃길이사 열어 주지만,/ 어쩌다 포효(咆哮)하여,/ 산악(山嶽)이 찢어지는 천지개벽의 그전날 같이/ 물너울이 또로 공중에 치뻗히는 날에는/ 까짓거 사정없이 때려 부신다!// 일껏, 호텔의 옥상(屋上)에 서서/ 휘저은 골프 크럽, 저 멀리 손짓하여/ 아방궁(阿房宮)에 도둑의 떼 불러들이고/ 누구의 피로,/ 헛되이 만리성(萬里城)을 쌓으려는가.// 생강을 씹지 않곤/ 잠 못 이루던 공자(孔子)의 괴로운 밤을/ 아하, 어떻게 새워야 하나./ 소크라테스보단도 육신(肉身)은 야웨ㅆ는데,/ 독배(毒盃)도 내 차지는 없단 말이냐!/ 두룩저어지종(種) 누룩돼지야/ 오래 오래 꿀, 꿀, 꿀 잠 잘 자거라.// 높새가 불고 청노새 울어/ 지평선(地平線) 너머 누른 해는 빠지고/ 쇠붙이 소리 서그럭거리는 고량(高梁),/ 수수밭에 서리 찬 달빛. ……/ 기러기떼 우지짖으며 지나가는 그림자도/ 그리 반갑던 나의 형제(兄弟)의 즐거운 안항(雁行)의 밤은/ 어린 시절(時節)의 아름다운 동화(童話) 속에나 묻어 버리고// 눈이여. 어서 내리고 지고,/ 내리고 지고, 눈이여. 우리/ 눈 속에 묻혀 눈을 씹어 눈물을 먹고/ 삼동(三冬)을 하얗게 얼어서 살자.// 사계절(四季節) / 김관식
“사랑은 죽엄보다 강(强)하다./ 내가 원(願)하기 전(前)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 ―/ 『아가서(雅歌書)』// 강물을 따라서/ 세월은 가고/ 구슬이 울리는/ 다리 아래의,// 영산홍(映山紅)도 봄바람에 벙그러진다.// 살구꽃처럼/ 슬프고 슬픈/ 이별이기에// 병든 가슴을, 새새끼마냥/ 자지러지게 떨리는 심장(心臟)에/ 고목동굴(枯木洞窟)을 쪼아리는 쪼아리는/ 딱따구리 한 마릴 가져다 준 채/ 인사도 없이 떠나간 나그네처럼/ 봄은 그렇게 수월히 가버리고// 어느 사인지/ 녹색(綠色)의 여름/ 비도 그쳤고// 머언/ 가벼운/ 은은한/ 우레(雨雷)/ 구름에서는/ 송이(松茸)버섯의 냄새가 난다.// 처처한 방초(芳草)/ 미인(美人)의 혼령(魂靈)/ 황혼(黃昏)을 향한 언덕 위에 머무른/ 왕소군(王昭君)의 무덤에도 한(恨)많은 풀빛이 짙었을랏다.// 어질고 젊은 산(山)의 아침저녁을/ 맑은 새벽의 쇠북 소리를/ 새떼 우짖고 어지러이 깃들이는 해 저물음을/ 흰옷 입은 청상(靑孀)의 매서운 눈매,/ 수풀 끝에 기어올라 싸늘한 빛을 뿜는 초승달 밤을// 가랑잎 지는 소리 소나기 하는/ 원숭이 우는 벌판의 황무(荒蕪)와 같은/ 늙은 홰나무에 늦가을 어스름의 하늬바람이/ 머리칼 풀어헤쳐 더펄거리며 목을 매달아/ 어설픈 목청으로 몸서리나는 아우성을 칠 때에// 은하(銀河)에 칼을 씻어 허리춤에 차고서/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으리으리한 열두다락 다섯성(城)/ 아스라이 드높은 하얀 돌층계를 밟아 오르면/ 나의 선녀(仙女)는 여기 와서 사는가./ 밤새도록 밀어(密語)를 소곤거리다 어느 난간에 기대어 서서/ 계수(桂樹)나무 한 가지를 후리쳐 베었더니/ 천지(天地)에 그득히 들뜨는 향기(香氣).// 그리고 겨울……// 사랑하는 사람아. 무엇인가 뼛골에/ 먹먹히 뜨거웁게 사무쳐오는 것이 있지 않더냐./ 세상은 왼통 깊숙한 잠에 멍청히도 취했는데/ 나는 혼자서 정말로 미쳤어라.// 까풀어진 눈사부랭이 슴슴히 맺혀오는 눈물에 어려/ 싸락눈 포실포실 지평선(地平線)에 적시어/ 목마르게 막막한 들길을 걸어서 희미(稀微)로이 흔들려/ 어데로 사라져간 늬 그림자 하나를/ 언제까지나 놓치지 않고 지켜볼 뿐이다.// 기러기 가고/ 제비는 오고// 자산홍(紫山紅)도 봄바람에 사그라진다.// 구슬이 울리는/ 다리 아래의/ 강물을 따라서/ 세월은 가고.//

 

삭풍(朔風)에 기대어 말이 울면 / 김관식
하늘로 피어 오르다 절반쯤 가서 대공이/ 꺾여져버린 한 떨기의 옥부용(玉芙蓉)./ 묏부리로 말하면 바람에 갈고 닦아/ 그처럼 쌓아올린 정신(精神)의 높이./ 천야만야한 벼랑 끝 낭떠러지 아슬한 데서/ 은하수(銀河水) 기울어지듯 까만 허공에/ 바야흐로 내려질리는 한 줄기 폭포(瀑布)./ 성품(性稟)이야 원체가 착한 게지만/ 언제는 이같이 무놀이해 포효(咆哮)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현애(懸崖)에는 목수국(木水菊)이 지천으로 피어서/ 향내 자욱히 서글거리는 시푸런 운애(雲靄)./ 바람 되어 비인 골을 흔드는 옆에 하루에 천리(千里) 달리는 시내./ 이 근처(近處)에는 나무하는 더꺼머리/ 옛적 효자(孝子)의 아버지를 위하여 사철 술이 괴는/ 샘이라도 정녕 있을 법하야 낙엽(落葉)을 사뤄/ 대려 온 차[茶]를 마시는 인 응당 오래 살 게다.// 외나무다리 건너 서광(瑞光)이 비치는 굴(窟)로 들어서/ 두귀 모아 솔곳이 기울여 봐도 매양 들리는 건/ 물소리에 이울어져 이따금 놀래 나는 새울음 뿐일레라.// 옥야(沃野)가 열려, 가는 길초마다 밋밋이 패어/ 해묵은 여나무의 수풀 사이에 먹음직스레 흐무러져/ 익은바 여기열음이 억시게도 열렸데.// 늙은 솔 아래 파리한 노인(老人) 한 분./ 파초(芭蕉)를 심어놓고 빗소리를 기다리다가 잠들었나베./ 삼(蔘)딸기를 물고 선 사스미를 타시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가로이 졸더라./ 그의 살림이란 다래끼에 캐담은 약(藥)뿌리 몇 개.// 저어리로 뵈이는 건 칠리탄(七里灘)일까./ 여뀌풀 우거진 훤칠한 갈대 물갓 허연 개여울./ 나루에 사람 없이 배만 혼자서 스스로히 비꼈는데/ 마름에 뜬 발꿈치는 나도 또한 갈매기.// 잠자코 품안에 도(道)를 안고 현기(玄機)를 보아가며/ 그때를 기둘르다 서리묻은 샛파람 삭풍(朔風)에 기대어/ 말이 울면 허리춤에 서슬 푸른/ 청평검(淸萍劍)을 빼어들고 일어서보자.//

 

산중재상(山中宰相) / 김관식
산중(山中)에 무엇이 있다더뇨./ 영(嶺) 위엔 흰구름이 피고 지지 않습니까./ 다만 혼자서 즐길 수야 있지만/ 가져다 임에게 바칠 수야 있나요……// 산중재상(山中宰相)은/ 그림자가 산(山)에서 떠난 적 없어/ 성시(城市)의 티끌을 발에 묻히지 않는다./ 삼층루(三層樓) 위에 몸을 기대어/ 늙은 소나무에 풍악(風樂)을 잡히면/ 사죽(絲竹)이 아니래도 유량한 학려!// ― 이 그림을 보라. 그럼 알 것이다.// 굴레 벗은 소는/ 물가에 한가(閑暇)로이 풀을 뜯으나/ 금롱(金籠)으로 머리를 호사(豪奢)한 소는/ 채찍을 잡고 막대로 몬다.// 햇빛을 좀 비켜 서 다오!/ 제왕(帝王)의 배 위에 두 다리 들어얹고 낮잠이나 잘까.// 산중제상(山中帝相)은/ 임종(臨終)할 때도 그린 듯한 눈썹에 또렷한 눈매/ 운신(運身)이 자유(自由)로와/ 잠자듯 꿈꾸듯 고운 안색(顔色) 그대로,/ 향(香) 내음새 날을 두고 피어나리라.//

 

승가사(僧伽寺)에서 / 김관식
여기 외로운 혼령들끼리 수부룩이 모여 살게 하기 위하여/ 누가 세운 절집 뒤안길에 한숭어리의 풀꽃을 둘러싸고/ 어우러져 날으는 오빠시떼들 머리를 부딪치며/ 달라붙는 모양을 이윽히 살피다가 발길을 옮긴다.// 바윗돌을 다루는 솜씨로 말미암아 조금만 건드리면/ 그대로 앵돌아질 찬란한 웃음 지그시 눌러담아/ 구김살 하나 없이 저렇게 너그러워/ 관옥 같은 얼굴이 달덩이처럼/ 선연히 솟아올랐다고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꽃판에 앉으신 석가여래 부처님 무릎 위에 안기어 잠들었으면/ 도도록한 가슴에 주르륵 젖이 솟아 입으로 흐르려니/ 배고픈 줄 모르고 한시름을 잊을래.// 쏠쳐내리는 벼랑의 물을 정수리로 받아 인 채 적시고 서 있으면/ 흥건히 피가 돌아 무어래도 넉넉히 이루어질 것이요./ 입때 가난한 살결에서도 햇살에 빛나는 감잎같이/ 동백기름 칠칠한 윤이 우러나리라./ 하늘은 제 몰골을 도로 찾았거니와/ 자욱한 소나기 비 몰려 들어오는 듯,/ 풀벌레 소리 우거진 수풀 속에/ 싸리나무 순애기도 자랄 만큼 자랐다.// 청산 만리에 저물음이 끼이면/ 머언 들녘 끝 언저리에서,/ 알연히 서물거려 기어오는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고개 돌려 보아야 어느 겨를에 나를 에워산 것은 가을이로다.//

 

신라(新羅) 소묘(素描) / 김관식
꽃으로 치면,/ 아주 활짝 핀 석류(石榴)꽃과 같은 꽃.// 우리나라에도 해와 같이/ 황홀(恍惚)히 광명(光明)하던 시절(時節)이 있었다면/ 그것은 신라(新羅).// 아하 빛이여 눈이 시리다./ 눈이 멀을까 눈을 뜨지 못하겄네.// 봄이 와 밭고랑에 파란 옥(玉)비녀 꼭지처럼/ 봉긋한 옹곳싹이 뽀조록이 돋으면,/ 무너진 돌덤부럭 금이 간 틈서리에 잠깨어/ 흙을 털고 부스스 일어나는 놈이 있고녀.// 내가 꿈에 본/ 한마리의 땅벌레.//

 

양생수(養生修) / 김관식
아희야. 봄비가 오거들랑 그 어데 이웃에라도 가서/ 등(藤)나무 묘종(苗種)이나 한 포기 얻어다가 사립 앞에 심어라.// 그리고 또 늬 친구(親舊)들이 더러 찾아 오거든/ 뜰안에 돋아나는 슬기로운 풀잎들이/ 하나도 다치잖게 멀찌감치 물러나 행길에서 놀아라.// 앞으로 여기 와서 여치와 베짱이가 맑고 가는 목청으로/ 은실을 뽑아 가을 비 멎은 뒤의 시냇물같이/ 사느라운 노랫가락 나직히 읊으리니.// 화초(花草)밭에는 은가지의 꽃송이가/ 빛나는 눈웃음을 그윽히 머금고 서로 잘 어울리어/ 아름다운 얘기를 향기로서 주고받아/ 한껏 즐거운 삶을 누리는 모양새를 똑똑히 좀 익혀 보아 두어라.// 우리들은 모름지기 천생(天生) 여질(麗質)의 착한 성품(性稟)을/ 무양(無恙)하게 자라도록 김매고 고수런해 가꾸어 보자.// 철따라 채마(菜麻)에선 아욱이나 명아주의 푸새가 나고/ 산(山)에는 삽주싹과 수리치도 있길래 풀뿌리를 캐먹고/ 연명(延命)을 하더라도 금심수장(錦心繡腸)을 지녀야 하느니라.//

 

양생명(養生銘) / 김관식
하늘 우러러 눈물겹고나 간신히 끊이잖고/ 겨우 이어나가는 아주 가냘핀 호흡(呼吸)이기에.// 맨드라미의 꽃송아리라든지 닭벼슬마냥/ 오불구불 고부라져 아스라히 떨리는 묏부리들이/ 거세인 바람결에 몹시도 흔들리는 물이랑이/ 이랑 이랑 높았다간 낮았다 물너울을 일으키듯/ 네굽 놓아 내닫는 말의 힘을 빌어 가지고/ 연하여 줄기차게 내려오다가 무엇에 자지러지게 놀래인 때/ 비스듬 별안간 발을 멈춘 채 올연(兀然)히 오뚝 솟아/ 가닥가닥 흐트러져 갈피 많은 옷자락을 주체하지 못하여/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포개여 간(肝)처녑처럼/ 첩첩이 에워싸인 허구 많은 산(山)과 산(山)과 산(山).// 그 너머로 기웃이 넘어다보는 새로이 돋아나는/ 송아지 뿔따구니의 아양찬 귀염성이 다분히 있는 아니면 죽순(竹筍)./ 아니면 선인장(仙人掌)의 봉오리가 한 자웅(雌雄).// 힘들여 잡아당긴 활시위처럼 구부러져/ 휘어든 으늑한 골아실에 외 엮고 진흙 발라 초당(草堂)을 두어/ 낮에는 들에 나가 콩도 심고 팥도 가꿔 역사를 하고/ 비내리는 날일랑 집안에 들어앉아 청올치 노를 비벼/ 반가운 손이 오면 내어다 깔 돗자리를 매거나/ 명절(名節)날 어린 것들 호사로이 신겨줄 꽃메투리를 삼는 것이다.// 때로는 구럭에다 온갖 산나물과 약(藥)뿌리를 캐어오고/ 밤이면 새발심지 피마자(皮麻子)기름등잔 또는/ 광솔불 아래 옛글을 본다./ 언제고 보배로운 거문고와 술항아리./ 그리고 숲사이엔 여남은 통의 꿀벌을 치고.// 마을 아낙네들 도리도리 모여 앉아 길쌈하는 뜨락에/ 퇴깽이새끼 도야지새끼들도 나와 돌아다닌다.// 시골 살림살이도 맛들이기 나름이지./ 나는 나의 가난한 식솔(食率)들을 거느리고/ 아하 이런 은벽(隱僻)한 산골짝에 없는 듯이 파묻혀/ 조용히 살더라도 연연히 걸어오는 신록(新綠)과 같이/ 타고난 목숨을 티없이 조촐히 기른다는 그것은./ 얼마나 스럽고 즐겁고 또 빛나는 이야기가 될 것인가.//

 

융동(隆冬)의 서(書) / 김관식
창(窓) 밖에 눈, 눈, 눈이 눈이 내린다./ 제가끔,/ 서럽고 즐거운 몸짓으로 종 종 종/ 육체(肉體)의 가늘한 종(鐘)을 울리며―// 유리(琉璃) 쪽으로 바깥을 내다보면/ 마른 나무의 위태로운 곳에서 어데서 날아와/ 우수(憂愁)에 잠긴 묏새 한 마리./ 고독(孤獨)한 날개를 저어 다리 오그리고 정물(靜物)인 양/ 앉은 너머로 문수(文殊) 보현(普賢)의 봉우리들은/ 발꿈치서 무릎까지 묻혀버리다./ 自纛 든 덴 왕겨불에 모개를 구워 먹으면 좋다고./ 겨울의 하룻날을 자리에 누워 미열(微熱)을 앓는/ 머리맡엔 아내가,/ 다소곳이 고개 숙여 속눈썹을 깜빡이며 왜포수건을 개키고/ 다섯살 난 큰놈은 천연(天然)스레 꿇어앉아 이마를 짚다./ 혈연(血緣)이기에 녹아흐르는 따스한 체온(體溫)./ 아하, 이리도 선(善)한 사람의 성품(性稟)은/ 원시(原始)로 이어받은 처음이요 나중인 소중한 유산(遺産)!/ 내 비로소 인류애정(人類愛情)의 훈훈함을 느끼다./ 인연(因緣)의 가지 끝에 열린 하나의 과일./ 아들아./ 이 얼마 안되는 몸뚱어리의 골육(骨肉)에/ 거미줄같이 엉기인 가느다란 핏줄을 흔들라치면/ 머언 조상(祖上)님네 주름마다 자애(慈愛)로운/ 온화(溫和)한 얼굴들이 정다운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눈은 내리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에도 눈은 내리는데……/ 차고 슬픈 것이 가슴에 와서 닿는데/ 창자 속으로 젖어 내리는데 ……// 머언 훗날 애비도 가고 에미도 가고/이렇게 창(窓) 밖에 눈, 눈, 눈이 설치는 날이 오거든/ 인연(因緣)의 가지 끝에 열린 하나의 과일./ 아들아./ 너는 그때 거기서 슬퍼하라.//

 

의고풍(擬古風) / 김관식
녹슬은 사당(祠堂)이다. 사개 물러나 뒤틀어지고/ 창살 부러진 홍문(紅門) 안뜰에 소경들은 모여서/ 단청(丹靑) 구경하는 잔치를 열어.……/ 암키와 수키와 이끼 낀 기왓골엔/ 삵아지 새끼 치는 잡(雜)풀만이 우거져 을씨년스런.// 이태백(李太白)이 망명(亡命)할 달도 없는 밤./ 허물어진 봉분(封墳)은 여우할미 집일다./ 꼬랑지 아홉 돋힌 구미호(九尾狐)년 나와서/ 해골(骸骨)박 박박 긁어 머리에 쓰고 재주 한번 넘으면/ 금시 미인(美人)으로 둔갑(遁甲)도 하고/ 기울어진 망주석(望柱石) 금이 간 상석(床石)/ 귀떨어진 동자석(童子石)은 돌아앉아 웃더라./ 향로(香爐) 향합(香盒)에 오줌똥을 깔기고 선산구목(先山丘木)도/ 제기(祭器)접시도 모조리 팔아먹은 망나니새끼.// 밤나무를 깎아서 신주(神主)라 하여/ 낡은 곰팡난 위패(位牌) 앞에서 사람들은/ 무작정 가로 세로 늘어서 읍(揖)들을 하고,/ 절을 올리고 술잔(盞)을 들어 음복(飮福)도 하고……/ 가짜 적손(嫡孫)들을 물리친 다음 서얼(庶孼)이라/ 누명쓴 우리들끼리 층(層)이 진 제절 아래 풍석(風席)을 피고/ 지방(紙榜)을 불사르어 소지라도 올리고/ 합문(闔門)을 하고 사신(辭神)을 하자.//

 

임원생활지(林園生活志) / 김관식
집안이 간구하면/ 어진 안해를 생각하게 된다더라 어진 안해를.// 무너진 성(城) 너머로 아침 햇살이/ 필락말락 동천홍(東天紅)의 한때를// 나의 게으름을 이름 모를 산새들이/ 깨워 줄 무렵, 런닝사쓰 바람으로/ 조로에 물을 담뿍 퍼 들고/ 상치 쑥갓 아욱 들과/ 갈증(渴症)이 있을 듯한 나의 정원수목(庭園樹木)들에게/ 나는 친절(親切)한 급수부(給水夫)가 된다.// 안해여, 나의 안해와, 나와 같이/ 가난한 모든 시인(詩人)의 안해들이여/ 남의 집 텔레비 안테나 키가/ 높고 큰 것을/ 너의 지아비에게 뇌까리지 말라./ 나는 이런 때 오릉중자(於陵仲子)의/ 어진 안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재상(宰相)이 되면/ 화려한 집에서 고량진미(珍味)를 먹게 된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베를 짜면 영감이 신 삼고,/ 하루에 세 때 끼니를 잇는데// 집이 좋았자 한 몸뚱이를/ 용납할 뿐/ 맛이 있었자 배를 채울 뿐.//

 

창세기초(創世記艸) / 김관식
하늘이 열리고 땅이 있고/ 빛이 있으라 한대 빛이 있었다./ 그리하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것은 첫쨋날./ 그 뒤로부터 하루…이틀…사흘…나흘…닷새…엿새……/ 모든 것은 다아 이루어졌다./ 그 이튿날 이레째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포근히 쉬었다.// 쫓겨난 사람들을 비웃어 주는/ 동산에는 온갖 꽃이 가득하게 피었고/ 새들은 즐거이 구름 끝을 날은다./ 때는 이미 늦었다./ 허나 지금은 또 다른 한 그루의 나무 열매까지도/ 따먹지 못한 것을 뉘우칠 따름인 것이다.// 인제는 바람소리로밖에 귓바퀴를 돌아서 젖어 들어와서는/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울리는/ 지극히 위엄스런 여호아의 목소리.// 당신이 처음 흙으로 빚어/ 숨결을 불어넣어 살아나게 하시던/ 꼬옥 그와 같은 모양으로 돌아가게 하시라.// 배암이여. 다시는 질투하지 말아다오./ 나를 질투하지 말아다오. 그리고/ 나의 여편네를 질투하지 말아다오.// 목줄기 안으로 안으로 한사코 감기기만 하여서/ 드디어는 실마리처럼 풀어버릴 수도 없이/ 뼛골 안에 잦아져 녹아 흐르는 설움을 지니고// 두더쥐처럼/ 두더쥐처럼 흙이나 파먹고/ 흙이나 파먹고 살다 가련다.//

 

풍요조(諷謠調) / 김관식
바위야 바위야 눌러라./ 황소 같은 바위야/ 천근(千斤) 같은 무게로/ 네가 아무리 눌러도/ 죽순(竹筍)은 뾰죽뾰죽/ 자꾸만 자꾸만 솟더라.//

 

폐가(廢家)에 부쳐 / 김관식
길을 가다 보니/ 외딴 집 한 채가 비어 있었다./ 무슨 이 집의 연척(緣戚)이라도 되는 양/ 앞뒤를 한 바퀴 휘둘러보다./ 구렁난 지붕에는/ 풀 버섯이 같이 자라고/ 썩은새 추녀 끝엔 박쥐도 와서 달릴 듯하다./ 먼지 낀 툇마루엔 진흙 자국만 인(印) 찍혔는데/ 떨어진 문(門)짝 찢어진 벽지(壁紙) 틈에서/ 퀴퀴한 냄새가 훅 끼치고/ 물이끼 퍼런 바가지 샘에/ 무당(巫堂)개구리 몇 놈이 얼른 숨는다.// 이걸 가지곤/ 마른 강변(江邊)에 덴소 냅뛰듯/ 암만 바시대도/ 필경 먹고 살 도리가 없어/ 별똥지기 천수답(天水畓)과 골아실 텃논이며/ 논배미 밭다랑이 다 버려둔 채/ 지게품을 팔고/ 막벌이를 하더라도 도회지(都會地)라야 한다고…/ 오쟁이 톡톡 털어 이른 아침을 지었을 게고/ 게다가 차(車) 안에서 먹을 보리개떡도 쪘을 테지만/ 한번 떠난 뒤 소식(消息)이 없고// 장독대 옆에/ 씨 떨어져 자라난 맨드라미 봉숭아꽃도 피었네./ 돌각담 한모퉁이 대추나무에/ 참새 한 마리 포르르 날아들어/ 심심파적(破寂)으로 주인(主人)의/ 후일담(後日譚)을 말해 주는 양/ 저 혼자 재재거리다 말고 간다./ 찌는 말복(末伏)철 저녁 샛때/ 귀창 터지거라/ 쓰르라미만 쓰라리게 울고 있더라.//

 

효자전(孝子傳) / 김관식
Ⅰ. 석종(石鐘)// 신라(新羅)적 모량리(牟梁里)의 손순(孫順)이는 효자(孝子)다./ 운조(運鳥)라는 홀에밀// 내외(內外)가 힘을 다해 받들어 모시다가/ 쑥국새 우는/ 그러니까 이른 봄/ 은혜로운 바람 속에 다복솔빛 푸르른/ 햇빛 밝은 날 열한 점(點)쯤 쳤을까.// 향불에 혼(魂)을 사뤄/ 노고지리 우짖는 보리밭 새로/ 아슬한 회상(回想)처럼/ 서울로 가는 길이 뵈이고/ 가난이 허물이라 괭이를 메고/ 산(山)으로 가는 애비 무거운 걸음걸이/ 등에 업힌 어린 건 나비같이 잠들어/ 치마폭 펼쳐든 채 옷고름 입에 물고/ 연신 눈물을 씻어내리며 뒤따르는 에미는/ 설움을 깨물어도 울음이 흘러// 입때,/ 무심(無心)한 줄로만 알았던 하늘로도/ 청댓잎같이 맑은 마음씨 앞에서야 차마 그대로는 볼 수 없든지/ 마침내 녹슬은 석종(石鐘)이라도 한 개/ 마련해 두지 않고서는 못 배겼단 말인가./ 높이 달아놓고 당목을 잡아다려 깨어져라 후리칠 때/ 임금에게야 들리거나 말거나 오히려 쌀 몇 섬은 아랑곳없이/ 신령(神靈)의 흐느낌처럼 삼십삼천(三十三天)을 흔들어 일깨우라/ 석종(石鐘)아 석종(石鐘),/ 드을에 차고 고을에 둥긋이 넘치는 음향(音響)…// 멀리서 손짓하여,/ 고향이 부르는 소리 꿈에서 깨어난 듯,/ 아스라히 귓갓으로 들려오거든 자다가 일어서라도/돌아오라 효자(孝子)에 해바라기 핀 마을/ 장항아리 옆에서 모싯바구리 같은 머리를 이고/ 파파한 네 홀에미 기다림에 행여나 조바심칠라./ 운조(運鳥)라는 홀에밀/ 신라(新羅)적 모량리(牟梁里)의 손순(孫順)이는 효자(孝子)다.//

Ⅱ. 쌍리작출도(雙鯉躍出圖) // 효도롭어라./ 왕상(王祥)의 마음/ 어메 여의고 의붓에미 시새워/ 애비한테도 사랑을 잃어// 맨날 외양간에 쇠똥만 쓸게 해도/ 어버이 병(病)이어든 밤도아 새워/ 입맛을 잃고 허리띠도 안 풀며/ 약(藥)을 대리어 맛본 뒤에야…// 언젠가는 그 에미가 동지(冬至)섣달에/ 물고기와 참새구이가 먹고 싶었다./ 중의를 걷고 강(江) 속에 뛰어들 제// 얼음이 빠개지며 두 마리의 이어(鯉魚)가/ 참새 한 떼가 집으로 날아들고.// 또,/ 붉은 뻐찌가 열매 맺어 익을 때/ 지키라니까/ 비바람 칠 때마닥/ 나무를 안고 목을 놓아 울었다.//


김관식(金冠植)의 입관(入棺) / 천상병(千祥炳) 시인
심통(心痛)한 바람과 구름이었을 게다. 네 길잡이는./ 고단한 이 땅에 슬슬 와서는/ 한다는 일이/ 가슴에서는 숱한 구슬./ 입에서는 독한 먼지./ 터지게 토(吐)해 놓고,/ 오늘은 별일 없다는 듯이/ 싸구려 관(棺) 속에/ 삼베옷 걸치고/ 또 슬슬 들어간다./ 우리가 두려웠던 것은,/ 네 구슬이 아니라,/ 독한 먼지였다./ 좌충우돌의 미학은/ 너로 말미암아 비롯하고,/ 드디어 끝난다./ 구슬도 먼지도 못되는/ 점잖은 친구들아,/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되려 기뻐해다오./ 김관식(金冠植)의 가을바람 이는 이 입관(入棺)을.//


 

김관식(金冠植, 1934년~1970년) 시인, 번역문학가
1934년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 소룡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추수(秋水), 만오(晩悟), 우현(又玄), 현현자(玄玄子)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며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53년 육당 최남선에게서 동양학을 공부했다. 고, 1954년 서울상고 교사를 하면서 학생들과 맞담배질도 거침없이 하고 학교 앞 깡패들과 대판 싸움질도 서슴없었다.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연〉(蓮), 〈계곡에서〉, 〈자하문 밖〉을 내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당시 당대의 시인 미당 서정주와 동서(서정주 시인:방옥숙 여사, 김관식 시인:방옥례 여사와 결혼)가 된 뒤 20년 연상인 서정주 시인과 말을 트고 지냈으며, 문단의 20년 선배인 문학평론가 조연현 선생을 '자네!'라고 불렀으며, 불과 25살에 세계일보(오늘날 세계와는 관련없음) 논설위원(우리나라 최연소 논설위원 기록)을 역임하고, 서울 종로에서 장면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겨뤄, 유세장을 통쾌한 웃음바다로 만들었으며, 명함에 단 일곱 글자 [대한민국 김관식]을 써 가지고 다녔으며, 지금의 평창동 산속에 살면서 세계를 주유천하하듯 살다가 술이 주요 원인이 되어 건강 악화로 1970년 8월 30일 향년 서른일곱에 별세한 것을 꼽는다. 시인이 살아서는 단 한 권의 개인 시집 《낙화집》(락화집 1952)이 있으며, 공저인 《해 너머가기 전의 기도》(1955), 《김관식시선》(1957)이 있다. 그리고, 1976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김관식 시전집인 《다시 광야에》가 나왔다. 《다시 광야에》를 보면, 그의 시전집이 무색하게 164쪽에 85편의 시가 있다. 생애 85편의 시는 참으로 적은 수이다. 그보다 10년을 더 못살다 간 27살 요절한 시인 이상이 100여 편이 넘는 시를 남긴 것을 보면, 김관식 시인은 대단한 과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김관식 시인이 한국 문학사에서 호방한 자유주의자의 세계를 거칠 것 없이 표현하여, 감성적 세계로 오롱이조롱이한 시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전 보문산 사정 공원에 詩 〈다시 광야에〉가 새겨진 시비와 모교인 강경상고 내에 〈이 가을에〉를 적은 시비가 서 있다.

 

‘홍은동의 전설’ 김관식

시인 김관식(왼쪽), 최남선과 함께. 같은 홍은동 산동네에 살면서 김광주를 ‘쓰레기 작가’라는 표현으로 모멸했던 김관식은 김광주보다 3년여 앞선 1970년 8월 30일 타계했다. 그의 나이 고작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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